그림자 보관함 시인동네 시인선 14
이은림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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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4



시를 쓰고 싶어서

― 그림자 보관함

 이은림 글

 시인동네 펴냄, 2014.7.6.



  바람이 보고 싶어서 바람을 봅니다. 드센 바람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찾아왔기에, 마당에 서서 바람을 봅니다. 한참 바람을 보다가 아이들을 부릅니다. 얘들아, 우리 바람을 함께 보자.


  바람이 드세니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릅니다. 드센 바람을 따라 구름은 흩날리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합니다. 낮게 흐르는 구름과 높게 머무는 구름이 갈립니다. 얼마나 많은 구름이 태평양을 지나 한국으로 찾아왔을까 하고 바라봅니다.


  아이들과 마당에서 구름을 보다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마을 고샅길에 서서 하늘을 봅니다.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천등산 줄기를 빼고는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름도 바람도 하늘도 한결 잘 볼 수 있습니다.



.. 유모차를 밀면서 우아하게 산책은 시작됩니다 / 공원묘지 옆은 미술관 공원묘지 뒤는 아파트 /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지요 ..  (오후 세 시)



  마을 고샅길에 나온 아이들은 구름을 보다가 저희끼리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립니다. 아이들은 달리기 놀이를 합니다. 그래, 너희는 그렇게 놀아라. 나는 구름을 볼 테니.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나는 어릴 적에 구름바라기를 무척 자주 꽤 오래 했습니다. 한두 시간은 가볍게 구름바라기를 했습니다. 서너 시간쯤 구름바라기를 하다가 그만 하루가 꼴깍 지나가기도 했어요.


  참말 구름을 바라볼 적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바람 따라 흐르던 구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이 구름과 저 구름이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구름은 흐르는 동안 모양이 달라지고, 빛깔이 바뀝니다. 홀가분한 빛이 흐르고, 포근한 숨결이 감돕니다.



.. 상자 속에 갇힌 소리들이 음악이 되는 동안 / 누구는 또, 엄마가 되었고 / 누구는 건기의 나라에서 엽서를 보내온다 / 구름이 제멋대로 옮겨 다니며 / 뱉어내는 빗방울을 받아먹고 / 아이들은 시끌벅적 잘도 자란다 ..  (오르골 상자)



  높은 건물은 그늘을 만듭니다. 높은 건물이 만드는 그늘에 서도 시원합니다. 그런데, 높은 건물이 그늘을 만들면 풀도 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흐르는 구름도 그림자를 만듭니다. 구름이 만드는 그늘에 서면 무척 시원합니다. 그리고, 구름이 만드는 그늘은 풀과 나무를 쉬게 하고, 때때로 비를 뿌리면서 싱그러운 밥을 베풉니다.


  전기로 켜는 등불도 제법 밝아 저녁과 밤에도 환하게 지낼 수 있지만, 풀과 나무를 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거든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풀과 나무는 시들시들합니다.


  해는 아침에 떠서 낮을 거쳐 저녁에는 집니다. 해는 아침과 낮에는 밝으나 저녁과 밤에는 사라지니,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하지만, 우리가 알맞게 움직이고 알맞게 쉬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해는 지구별 모든 목숨을 살찌웁니다. 햇볕을 먹으며 풀과 나무가 푸르고, 햇볕을 쬐며 사람들은 새 기운을 얻으며, 햇볕을 받으며 흙과 물이 싱그럽습니다.



.. 오늘, 기분을 물었나요? 오우, 지금 난 아주 파랗거든요. 아침부터 계속 파란 상태죠. 그게 어떤 건지 설명까지 해야 하나요? 말 그대로 파랑이에요. 짐작해 보세요. 파랑이 뭔지. 그따위 질문이나 하는 당신은 내가 보기에 지독히도 빨갛군요. 며칠 동안이나 빨개지고 있었는지 당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라니, 참 ..  (오늘 나는 아주 파랗죠)



  나는 골짝물을 마시고 냇물을 마십니다. 골짝물이 반갑고 냇물이 기뻐서 골짝물이랑 냇물을 마십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지난날에는 수돗물을 마셔야 했지만, 식구들이 함께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에는 늘 골짝물이랑 냇물을 마십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골짝물이나 냇물을 마셨어요. 예전에는 이 나라 어느 곳이나 시골이었어요. 오늘날에는 몇몇 마을에서만 골짝물이나 냇물을 마십니다. 게다가 이제는 시골 깊은 곳까지 수도관 놓는 공사를 합니다. 몇몇 마을에서마저 골짝물이나 냇물을 언제까지 마실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람이 깨끗하지 못하고 흙이 싱그럽지 못한 곳에서는 골짝물이나 냇물을 못 마십니다. 자동차가 넘치고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가득한 곳에서는 골짝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온갖 건물과 아파트와 공장이 넘실대는 데에서는 골짝물이나 냇물에서 물고기조차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진 사람인데, 우리 몸은 뼈와 살갗과 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먹는 밥대로 뼈와 살갗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마시는 물대로 내 몸을 채웁니다. 그러니, 밥과 물을 싱그러우면서 맑고 즐겁게 받아들일 때에 몸이 튼튼합니다. 언제나 맑은 바람을 마셔야 맑은 마음이 되고, 늘 싱그러운 물을 마셔야 싱그러운 몸이 되어요.



.. 이 거리가 꽤 마음에 든다. 뒤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 아기가 되어가는 속도는 유쾌하고도 엉뚱하다 ..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은림 님이 빚은 시집 《그림자 보관함》(문학의전당,2014)을 읽습니다. 어떤 상자이기에 그림자를 건사할 수 있을까요. 이은림 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림자를 건사할 상자를 마련하면서 살아갈까요. 그림자를 건사하는 상자에는 어떤 그림자가 깃들었을까요. 이은림 님이 상자에 건사하는 그림자는 어떤 빛이 드리우는 이야기일까요.



.. 거꾸로 묶인 돼지를 싣고 오토바이가 지나갑니다 / 붉은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사원에서 종일 결혼사진을 찍고요 /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던 코끼리들은 서서히 돌이 되어갑니다 / 망고 주스가 되기 위해 망고들은 허둥지둥 익어가고 // 눈을 감거나, 뜨거나 / 모든 곳이 캄보디아입니다 ..  (캄보디아, 캄보디아)



  시를 읽습니다. 시를 읽고 싶어서 시를 읽습니다. 시를 씁니다.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씁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아이를 낳습니다. 밥을 짓습니다. 밥을 지어 나도 먹고 아이도 먹으려고 밥을 짓습니다.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고 싶어서 사랑을 합니다. 마음 가득 즐거운 빛이 흐르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합니다. 온몸 가득 따사로운 빛이 감돌면서 활짝 웃고 싶어서 사랑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고 싶은 대로 삽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살고 싶지 않은 대로 사는 사람은 없어요. 쳇바퀴를 도는 일을 한다면, 스스로 쳇바퀴를 돌고 싶기에 쳇바퀴를 돕니다. 쳇바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스스로 안 빠져나왔기에 쳇바퀴를 돕니다. 남한테 얽매이거나 고단한 수렁에 잠겼다면, 스스로 남한테 얽매이고 싶거나 스스로 고단한 수렁에 잠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건사해 주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 스스로 나를 건사합니다. 밥은 내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습니다. 내가 스스로 먹은 밥은 내가 스스로 몸속에서 삭힙니다. 스스로 밥을 먹어야 스스로 몸을 움직여요. 남이 먹어 줄 수 없는 밥이요, 남이 움직여 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도 내 꿈도 내 사랑도 언제나 나 스스로 빚어서 펼칩니다.



.. 잔뜩 부푼 눈구름 아래 조심조심 지나가는 시간들. 생각하면 나도 한 덩이 구름이네요. 예정된 시간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가는 구름 말예요 ..  (구름은 부푼다)



  사람들이 자가용을 몹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합니다. 정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고속도로를 자꾸자꾸 놓습니다. 땅덩이가 참으로 작다는 한국인데, 찻길은 엄청나게 넓고 많습니다. 한국에 있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지 않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숲을 가꾸어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을 생각을 안 합니다. 다른 나라 숲을 무너뜨려서 종이를 얻는 한국 사회입니다. 이웃나라 시골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를 값싸게 사들여서 먹는 한국 사회입니다. 이웃나라 땅속이나 바닷속에서 뽑아낸 석유를 값싸게 사들여서 자동차를 굴리거나 기름을 때는 한국 사회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을 낳아서 어떻게 살고 싶을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하루 빨리 대학생이 되고 도시에서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기를 바라는가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바라는가요. 아이들에 앞서, 어른인 우리들은, 스스로 어떤 꿈과 사랑을 꽃으로 피어나도록 할 마음일까요.



.. 몇 년째 그대로 스물다섯 살인 / 너를 내려다보며 / 모르는 척 / 그저 아닌 척 / 후박나무보다 더 높은 데 사는 / 기분이나 설명해줘야지 ..  (후박나무는 키가 크다)



  《그림자 보관함》을 선보인 이은림 님은 스스로 시를 쓰고 싶기에 시를 씁니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를 쓰고 싶으니 시를 쓸 뿐이고, 스스로 삶을 가꾸는 시를 쓰기 때문에, 이 시가 모여 시집 하나로 태어나고, 이 시집은 보드라운 노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싶기 때문에 보냅니다. 아이들한테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텔레비전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보여줍니다.


  아이들과 집에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함께 열어젖히는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어버이인 이녁 마음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이들과 숲마실을 다니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며 방긋방긋 웃고 노래하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푸른 넋과 맑은 꿈을 물려주고 싶은 뜻이 있는 한편, 어버이인 이녁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가고 싶은 대로 갑니다. 시를 쓰고 싶으면 시를 쓰면 됩니다. 삶을 노래하고 싶으면 삶을 노래하면 됩니다. 바보스러운 정치꾼을 몰아내고 싶으면 바보스러운 정치꾼을 몰아내면 됩니다. 살림을 알차게 다스리고 싶으면 살림을 알차게 다스리면 됩니다. 언제나 상냥하면서 착한 말을 나누고 싶으면 스스로 언제나 상냥하면서 착한 넋이 되면 됩니다.


  바람이 휘 불어 우리 집으로 스며듭니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이마를 간질입니다. 아이들 사이에 눕는 내 몸을 조물조물 주물러 줍니다. 나는 바람을 맞이하고 싶어서 기쁘게 바람을 맞이합니다. 마당에 선 우람한 후박나무도 이 바람을 씩씩하게 맞으면서 한여름을 함께 누립니다. 4347.8.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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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집 56. 마음을 틔우는 빛깔 2014.8.1.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도 아이들은 구슬땀을 흘리면서 달린다. 바람이 불며 하늘을 구름이 온통 덮어도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면서 달린다. 아이들 살갗을 햇볕이 까무잡잡하게 태운들, 아이들 살갗에 흐르던 땀을 바람이 식힌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달릴 수 있으면 된다. 길이 열리면 된다. 하늘이 열리면 된다. 마음이 열리면 된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너른 가슴이 되어 하하하 웃고 노래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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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85. 하늘 보며 달리자 (2014.8.1.)



  바람이 드세게 분다. 구름이 엄청나게 흐른다. 때때로 하늘이 열린다. 구름이 짙게 덮을 적에는 하늘빛을 못 보지만, 드센 바람이 구름을 휙 날려 보내면 파랗게 눈부신 빛깔을 올려다볼 수 있다. 시골순이와 시골순이는 구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을 맞으며 달린다. 바람은 볏포기를 눕힌다. 바람은 아이들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시원하면서 싱그러운 한여름이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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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고단한 하루



  곁님이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지 보름이 되었다. 보름 동안 나는 아이들과 어떻게 지냈을까? 즐겁게 오순도순 놀았을까? 놀기도 했지만, 곁님이 없는 동안 집안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이제껏 늘어놓은 책들을 치우려고 무던히 용을 썼는데, 이럭저럭 치우기는 했지만 아직 꽤 남기도 했고, 힘이 많이 빠졌다. 오늘은 하도 몸이 힘들다고 느껴, 영화를 하나 틀고는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한 시간 즈음 쉬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고단함은 안 풀린다. 왜 안 풀릴까. 나 스스로 고단함을 불러들였을까.

  몸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아차 아이들부터 씻기자고 마음을 바꾼다. 작은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다. 큰아이를 씻기며 옷을 갈아입힌다. 두 아이가 벗은 옷을 빨고 내 몸을 씻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이제 빗줄기가 듣는다. 마당에 놓은 평상은 가림천으로 덮었다. 슬슬 저녁밥을 차려야지 싶다. 그러고 보니, 어제와 오늘 ‘며느리밑씻개’ 풀줄기를 사진으로 찍으려고 했다가 깜빡 잊었다. 늘 보는 풀이니 다음에 언제이든 찍겠지 하고 생각한 지 벌써 몇 달째인가. 참말, 아주 흔한 풀일수록 외려 더 사진으로 못 찍는구나 싶다.

  우리 집에서 돋는 며느리밑씻개 풀에 꽃이 피기 앞서 얼른 사진을 찍자. 그러고 나서, 머잖아 꽃이 피면 또 꽃 사진을 찍어야지. 기운을 내자. 기지개를 켜자. 가슴에 파란 거미줄 그림을 그리자. 4347.8.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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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 하나뿐인 내 친구
헬게 토르분 글, 마리 칸스타 욘센 그림, 손화수 옮김 / 어린이작가정신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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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14



내 이름을 불러 주셔요

― 비발디

 헬게 토르분 

 마리 칸스타 욘센 그림

 손화수 옮김

 어린이작가정신 펴냄, 2014.6.12.



  바람이 붑니다. 아침부터 내내 바람이 붑니다. 날씨 소식을 들으니 태풍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아주 대단합니다. 짙은 구름 두꺼운 구름 옅은 구름 하얀 구름 잿빛 구름 온갖 구름이 아주 빠르게 흐릅니다. 이 가운데 비를 머금은 구름도 있을까요? 아마 있을는지 모르지요.


  나는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두 팔을 뻗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올해에는 비가 자주 내렸으니 오늘하고 이튿날까지 비를 뿌리지는 않으면 좋겠어, 하고. 하늘에 대고 말합니다. 비가 알맞게 들과 숲을 적시면서 풀과 나무가 푸르면서 싱그럽기를 바란다, 하고.


  구름은 내 말을 들었을까요. 하늘과 바람은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휙 하고 바람 한 줄기가 내 몸을 감돌다가 지나갑니다. 다시 휙 하고 바람 두 줄기가 내 발을 휘감으면서 지나갑니다.



.. 타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작은 고양이를 침대로 안아 올렸어요. 사실 고양이는 침대 위로 데리고 올라가지 않기로 약속했었지요. 하지만 타이라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어요. 타이라는 그저 행복했어요. 작은 고양이의 자박자박하는 발소리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보들보들하고 귀엽고 장난기 가득한 고양이. 폭신한 이불 위에 얌전히 누워 있는 작은 고양이 ..  (5쪽)





  아침에 밥상을 차리려고 마당에서 풀을 뜯으며 풀한테 얘기합니다. 오늘도 우리한테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렴, 너희가 머금은 햇볕과 빗물과 흙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렴, 새로 돋은 잎사귀를 톡톡 뜯을 테니 또 새로운 잎사귀를 곱게 내놓아 주렴, 하고.


  풀은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풀은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어느 만큼 알아들을까요. 풀은 내가 가만히 말을 걸 적에 어떤 마음이 될까요. 웃자란 풀을 낫으로 베거나 손으로 뽑을 적에 “미안해, 너희가 여기까지 나니까 베어야 하거든. 얘들아, 우리가 지나갈 길은 마련해 주어야지.” 하고 말합니다. 늘 보던 풀이었으나 엊그제까지 이름을 모르는 채 가끔 뜯어먹던 풀한테 한 마디 건넵니다. “며느리밑씻개야, 너는 언제부터 이 이름을 누구한테서 얻었니. 누군가는 너한테 이런 이름을 붙였겠지만, 다른 시골에서 다른 누군가는 다른 이름을 붙였겠지? 보기 드문 세모난 잎사귀에 보기 드문 마알간 꽃이 피는 너이니, 틀림없이 너를 두고 다른 이름을 붙인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해.”


  풀이름은 표준말 한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풀뿐 아니라 나무도, 물고기도, 벌레도, 바람도, 흙도, 꽃도, 한 가지 표준 이름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 가지 표준 이름만 알려집니다. 오늘날에는 한 가지 표준 이름으로만 말하고, 한 가지 표준 이름으로만 학문을 하며, 한 가지 표준 이름으로만 풀과 물고기와 벌레와 바람과 흙과 꽃 들을 바라보아요.



.. 타이라는 여기저기 귀 기울여 보아썽요. ‘잔디들은 아기 고양이를 뭐라고 부를까?’ 타이라는 정원 잔디밭에 누워 고양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까치밥나무들은 아기 고양이를 어떻게 부를까?’ 까치밥나무 열매 사이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도 했어요. ‘박새들이 고양이를 부를 때는 어떤 이름을 쓸까?’ 타이라는 자두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박새들을 올려다보기도 했지요 ..  (15쪽)





  우리 집 둘레에 마음껏 자라는 풀을 바라보면서 가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이 아이들(풀)한테 붙이는 이름이 한 가지여도 될까 하고요. 예부터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풀이름을 다르게 붙였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똑같은 풀을 놓고도 다른 이름으로 가리켰습니다. 전라도에서도 화순과 고창이 쓰는 이름이 달랐고, 곡성과 구례가 쓰는 이름이 달랐어요. 읍과 면에서 쓰는 이름이 다르고, 마을과 마을에서 쓰는 이름이 달랐지요.


  그래서, 예부터 마을말·고을말·고장말, 이렇게 말이 다릅니다. 우리는 크게 뭉뚱그려 ‘한국말’을 쓰지만, 마을에서도 ‘집말’조차 달라요.


  내가 풀이 되어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사람) 나(풀)를 바라보면서 어떤 이름으로 가리키려고 할 때에 어떤 느낌이 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참말 사람들은 제멋대로 부르는구나’ 하고 느낄 테지요. 참말 사람들은 ‘내(풀) 밑넋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부르는구나’ 하고 느끼리라 생각해요.



.. 타이라와 할머니. 둘은 발을 옮겼어요.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 이른 가을빛 속으로. “알고 보니 나는 나무와 친척이더구나.” 할머니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어요 ..  (42쪽)




  헬게 토르분 님이 글을 쓰고, 마리 칸스타 욘센 님이 그림을 그린 《비발디》(어린이작가정신,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도톰한 그림책이라고 해야 할는지, 이쁘장한 동화책이라고 해야 할는지, 이쪽에도 저쪽에도 넣기에 어중간하구나 싶은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그림책이면 어떻고 동화책이면 어떨까요. 어느 갈래에 넣든, 내 마음을 아름답게 건드릴 수 있으면 아름다운 책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스레 다가올 수 있으면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이야기를 읽는 책입니다. 삶을 읽는 책입니다. 넋을 읽는 책입니다. 글감이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림결이 어떠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줄거리가 어떠하든, 또 글쓴이나 그린이가 누구이건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른문학이나 인문책이라서 놀라울 책이 아닙니다. 어린이책이라 해서 가볍게 다룰 만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이야기책 《비발디》에 나오는 고양이와 아이와 어른은 저마다 어떤 빛일까요. 이 책에 나오는 아픈 아이와 바보스러운 학교 동무들은 저마다 어떤 숨결일까요. 아이 하나를 따돌리는 학교 동무들은 저마다 집에서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어느 아이 하나를 참으로 얄궂게 따돌릴 뿐 아니라 괴롭힙니다. 저희는 집에서 즐거우면서 애틋하게 사랑받으면서, 막상 이웃이나 동무를 사랑하거나 보살피려 하지 못합니다.



.. “모두 꼭 학교에 가야만 하나요?” 페트라는 햇살이 따사로운 쪽마루에서 부모님과 함께 주스를 마셨어요. “그럼, 학교에 가는 건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란다. 그건 너도 잘 알잖니.” 아버지가 말했어요. “갑자기 그건 왜 묻니? 학교 가기 싫은 거야? 책 읽는 게 다시 어려워졌니?” “아니에요.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  (74쪽)




  바람은 ‘바람’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까 궁금합니다. 해는 ‘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까 궁금합니다. 비와 구름과 흙과 풀은 ‘비’와 ‘구름’과 ‘흙’과 ‘풀’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사람’인데, 사람인 우리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름을 불러 봅니다. 어느덧 짙은 구름은 비를 들이붓습니다. 거세게 바람이 몰아치면서,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나무가 흔들립니다. 후박나무는 후박잎과 함께 흔들립니다. 드센 비바람에 흔들리는 후박나무 곁에 서서 후박나무 줄기를 가만히 손에 대어 보면, 바람 따라 나무가 얼마나 크게 휘청거리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풀만 바람 따라 눕고 선다’고 말하지만, 나무도 바람 따라 눕고 섭니다. 나무 곁에 서고, 나뭇줄기를 만지며, 나무가 바람 따라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비발디》에 나오는 아이는 외로우면서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나오는 아이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아이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요. 이 아이하고 동무가 되고 싶은 ‘페트라’라고 하는 아이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페트라라는 아이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다녀야 하나요? 왜 아이들은 학교를 꼭 다녀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보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야 할 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의무교육을 받거나 졸업장을 따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어버이와 이웃과 동무한테서 따순 사랑을 받으면서 즐겁게 웃고 노래할 아름다운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부릅니다. 고운 이름을 부릅니다. 저마다 가슴에 아로새긴 착하고 참다우며 멋스러운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며 서로 동무가 됩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다 함께 이웃이 됩니다. 4347.8.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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