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K’와 ‘스낵바’
[말사랑·글꽃·삶빛 29] 푸름이 앞에서 어떤 말을 쓰는가

 


  종이를 사러 문방구에 찾아간 어느 날 ‘miilk’라는 이름이 큼직하게 적힌 꾸러미를 보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들여다보니, ‘우유’를 가리키는 ‘milk’를 바탕으로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느낌을 알리고 싶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왜 ‘우유 닮은 빛깔’을 ‘우유빛(우윳빛)’처럼 안 적고 ‘miilk’라 적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여러 고등학교 푸름이가 모여 ‘우리 말글 이야기마당’을 여는 자리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푸름이들한테 한국말은 무엇이고 한국말을 쓰는 삶이란 무엇이요 한국말을 생각하는 길이란 어떠한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이야기마당 꾀한 분이 다들 배가 출출하지 않겠느냐면서 빵과 우유를 마련했다고, 이야기터 한켠에 놓았으니 모둠마다 두 사람씩 나와서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푸름이들한테 말씀하는 그분은 ‘한쪽’에 놓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양 사이드’에 놓았다고 말씀합니다.


  이날 자리가 여느 이야기마당이 아닌 우리 말글 이야기마당이지만, 그분은 늘 쓰던 말투 그대로 말씀한 셈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슬프지만, 어느 모로 보면 투박한 모습이에요. 아무것 아니라 할 만한 말마디인데,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말매무새를 어떻게 추스르고 말투를 어떻게 가다듬어야 아름다운가를 거의 못 느끼거나 생각을 안 하는구나 싶어요.


  종이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왜 ‘miilk’ 같은 이름을 내세워야 했을까요. ‘세계화’ 때문에? 이제 영어는 바깥말 아닌 한국말하고 나란히 쓸 만한 말이기에? 영어를 널리 쓰고,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물건이름이나 회사이름을 붙여야 ‘세계화’가 될까요? 어떻게 해야 ‘세계화’이고,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이란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며 뜻있게 갈고닦는다 할 만할까요?


  우유는 ‘牛乳’ 소리값을 한글로 적은 낱말입니다. ‘牛乳’란 곧 ‘소젖’입니다. ‘소젖’이라 말하면 남우세스럽거나 어딘가 알맞지 않다 여기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어머니가 아기한테 먹이는 젖은 ‘어머니젖(엄마젖)’입니다. ‘모유(母乳)’가 아니에요. 양이 제 새끼한테 먹이는 젖은 ‘양젖’입니다. 염소가 제 새끼한테 먹이는 젖은 ‘염소젖’이에요. 목숨을 살리는 젖이요, 목숨을 밝히는 젖입니다. 이와 같은 낱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알맞고 바르며 씩씩하게 쓰지 않는다면, 한국말은 어디에 서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안 쓰고 바깥말만 아끼거나 즐겨쓴다면, 한국말은 어떤 모습과 빛깔이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경기도 파주에서 푸름이들을 만난 이듬날, 기차를 타고 고흥 시골집으로 돌아갑니다. 기차 때를 맞추느라 ‘KTX’를 탑니다. ‘한국고속철도’를 일컫는 이름을 ‘ㅎㄱㅊ’이든 ‘한고철’이든 알맞게 간추려 이름을 붙이지 않고 알파벳으로 이름을 붙였다 해서, 맨 처음에는 이 이름을 놓고 여러 곳에서 나무랐어요. 그러나, 한 해 두 해 열 해 남짓 흐르며 모두들 이 알파벳 이름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요. 이제 아무도 ‘KTX’를 나무라지 않아요. 빨리 달리는 기차라 하면, 빛처럼 빠르다고 빗대어 ‘빛누리’라든지 ‘빛나래’처럼 이름을 붙일 만했으나, 이처럼 생각을 빛낸 어른은 찾아볼 수 없어요. 아무튼, ‘고속철도’ 아닌 ‘KTX’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안내방송을 하는 분이 ‘스낵 바’를 말씀합니다. 스낵 바에서 도시락이나 과자나 마실거리를 장만해서 자시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사전에서 ‘snack’을 찾아보면 “간단한 식사”라고 풀이합니다. ‘bar’를 찾아보면 “술집, 바, 술집 카운터, 전문점”라고 풀이합니다. 영어 ‘bar’를 “바”라고 풀이하는 모습은 너무 엉뚱한데, 가만히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 영어 전문가 참모습이 이쯤이라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어쨌든, 고속철도 안내방송에서 흐르는 ‘스낵 바’란 “간단한 식사를 즐기는 전문점”이란 소리가 됩니다. 말풀이를 살핀다면 잘못 쓰거나 틀리게 쓰는 이름이라고는 할 만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어딘가 어설프구나 싶어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듯해요. 이것저것 골고루 파는 “자그마한 가게”일 텐데, 굳이 영어로 ‘스낵 바’처럼 이름을 붙여야 했을까 싶어요. 말뜻과 쓰임새 그대로 ‘작은가게(작은 가게)’라 이름을 붙이면 돼요. 또는 ‘쉼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고속도로 사이사이 있는 ‘쉼터’는 먹고 마시며 쉬는 곳이요, 고속철도에 있는 가게 또한 ‘쉼터’ 구실을 해요. 동네 자그마한 가게를 일컫는 ‘나들가게’라는 이름을 새로 빚었듯, 고속철도에서도 ‘나들가게’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을 기울일 때에 말이 꽃피우고, 스스로 마음을 쓸 때에 말이 싱그럽게 빛나요.


  사람들이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다고 느껴요. 스스로 영어로 겉멋을 부리거나 겉치레를 하려 애쓴다면, 이렇게 겉멋과 겉치레로 흐를 노릇이라고 느껴요. 스스로 꾸밈없거나 수수하거나 곱게 살아가고 싶으면, 꾸밈없는 말과 수수한 말과 고운 말로 스스로를 보살필 노릇이라고 느껴요.


  푸름이 앞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는가를 오늘날 어른 스스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어린이 앞에서 어떤 어버이나 어른으로 살아가는지를 오늘날 여느 어버이와 여느 어른 스스로 헤아리면 좋겠어요. 푸름이와 어린이가 이 나라 새빛이요 앞날이라는 말만 읊지 말고, 푸름이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 모두 새롭게 거듭나며 환하게 빛날 앞날이 되도록 사랑과 꿈을 나눌 수 있기를 빌어요. (4345.9.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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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이야기

 


  마실길 나오며 시집 세 권째 읽는데, 퍽 따분해서 책읽기를 멈춘다. 시를 입으로 쓰거나 머리로 쓰면 ‘문학’은 될 수 있고 ‘책’으로 태어나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는 못 되며 ‘삶’으로 스며들지는 못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참말 스스로 시가 좋고 사랑이 기쁘며 삶이 아름답다고 여길까. 시를 읽는 사람은 더없이 시가 예쁘며 이야기가 반갑고 삶이 빛난다고 여길까. 삶을 사랑하면서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4345.9.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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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과 집을 읽는다

 


  기차는 차츰 서울과 가까워진다. 고흥에서 멀어질수록 둘레에서 들과 메가 줄어든다. 벌교를 지나고 순천을 거치니 살림집 바글거린다. 구례 곡성 남원 지나니 너른 들판과 높은 메에 어우러지는 숲도 차츰 줄어든다. 전주 익산 대전을 지나며 높다란 아파트가 춤을 춘다. 수십 미터 될 듯한 다리를 놓는 고속도로가 밭과 메를 가로지르고, 송전탑이 마을을 건너뛴다. 서울 언저리에는 나무 한 그루 뿌리내릴 틈이 거의 없다. 비싼 땅에 풀이 돋거나 나무가 자라게 하지 않는구나. 땅금이 비싸니까 찻길도 시원하게 나지 않고, 아이들 뛰놀 빈터나 흙땅은 아예 없으며, 사람들 살림집조차 다닥다닥 높디높게 빽빽 바글바글 갇힌다. 서울 언저리 작은 삭월세방조차 보증금 빼면 시골서 집과 땅을 살 만하지만, 사람들은 서울 언저리 도시에서 악착같이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 낑기거나 밀치거나 밟으면서 살아간다. 무엇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삶일까. 무엇을 아끼며 좋아하는 나날일까. 들이 없고 숲이 사라지는 곳에서 사람들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들을 누리지 못하고 숲을 생각하지 못하는 데에서 사람들 보금자리는 얼마나 빛날까. 사람들 누구나 가슴속에 환한 빛줄기 있는데, 사람들 스스로 이녁 가슴 환한 빛줄기를 바스라뜨리는구나 싶다. 까만 자동차와 잿빛 건물이 지나치게 많아, 사람들은 시나브로 삶을 잊고 돈한테 매달린다. 책이 있어도 책이 책다운 꿈을 펼치지 못한다. (4345.9.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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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온 들판 시원하게 적시는 밤비
두 달만에 만난다.

 

낮비이든 밤비이든
빗줄기 들으면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마를 생각을 않는다.

 

그러나,
시원스레 내리는 비는
도랑을 가득 채우고
못과 논을 가득 채우며
가문 날씨에 목이 타던
풀과 꽃과 나무한테
좋은 동무가 된다.

 

시원스레 내리는 밤비
소리 들으며
아이들 옷가지 빨래를
만지작거리다가
대청마루에 선 채
오래도록
빗소리 듣는다.

 


4345.7.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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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수레

 


첫째 아이가 세 살이던
2010년 가을부터
우리 아이들을
자전거에 붙인 수레에 태워
읍이나 면을 마실합니다.

 

첫째 아이는 이태 동안
혼자 자전거수레를 차지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
돌을 맞이할 무렵
비로소 두 아이가 함께 탑니다.

 

아이들은 자전거수레에 타고
읍이나 면에 갈 적에
신나게 춤추며 노래하느라
수레가 덜컹덜컹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아이들은 하나씩 고개 까딱까딱
앞뒤로 옆으로 흔들다가
그만 꼬꾸라지듯 잠듭니다.

 

둘째가 첫째한테 머리를 기대고
첫째가 둘째한테 머리를 기대어
둘은 나란히 새근새근
꿈나라로 예쁘장하게
날갯짓하며 찾아갑니다.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 무렵
자전거 발판을 살몃살몃 밟으며
수레가 덜 흔들리도록 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더 힘을 주어 꾹꾹 밟습니다.

 

첫째 아이 일곱 살이 되어도
둘째 아이 다섯 살이 되어도
첫째 아이 열 살이 되어도
둘째 아이 일곱 살이 되어도
다 같이 자전거수레 타겠지요.

 


4345.7.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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