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덮고 자는 인형

 


  큰아이가 혼자 인형하고 놀면서 인형을 책꽂이에 기대어 재운다. 인형 하나는 바닥에 눕히고는 카드로 이불을 삼아 덮어서 재운다. 자장자장 노래를 부르고, 토닥토닥 가슴을 도닥여 준다. 예쁘게 노는 아이는 스스로 예쁜 넋을 불러들인다. 예쁘게 노래하는 아이는 스스로 예쁜 얼굴이 되고 예쁜 목소리가 된다. 남들이 예쁘다 얘기해 주어 예뻐지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예쁘고 싶기에 예쁘게 살아가며 예쁜이로 빛난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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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차린 맛난 밥

 


  나는 내가 차린 밥이 참 맛납니다. 내가 차린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참 맛있네.’ 하고 말할 때면 어쩐지 사랑이 새롭게 샘솟아 다음에 밥을 차리면서 한결 맛나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내 밥을 스스로 차려 먹은 지 이제 열여덟 해쯤 됩니다. 1995년에 제금을 난 뒤로, 밥이랑 옷은 언제나 스스로 건사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밥을 차리며 ‘밥을 맛나게 해야지’ 하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저 ‘밥을 하자’고만 생각합니다. 내가 할 줄 아는 밥을 하고,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한테서 듣거나 배운 대로 조금씩 새롭게 밥을 해 보면서, 차츰차츰 밥맛이 돌게 살아왔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나는 1995년부터 내 옷가지를 스스로 빨면서 살았습니다. 2012년 봄에 처음으로 빨래기계를 들여서 가끔 기계빨래를 하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쯤 기계빨래를 할 뿐, 으레 손빨래를 합니다. 빨래를 하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빨래를 널면서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빨래를 걷고 개면서 또 한 번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내 빨래이지만, 내가 한 빨래는 참 깨끗하고 보송보송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옆지기와 아이들도 느낄까요. 느끼겠지요. 어쩌면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는걸요. 내 모든 사랑과 꿈과 믿음과 생각을 쏟아서 밥 한 그릇 차리고, 빨래 한 가지 하는걸요.


  때로는 밥상에 찬거리가 얼마 없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국과 밥과 나물 한두 가지만 있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세 시간 즈음 품을 들여 여러 반찬을 올리기도 합니다.


  나는 늘 끼니마다 모든 밥과 국과 반찬을 새로 합니다. 묵은 밥이나 국이나 반찬은 거의 안 씁니다. 끼니에 먹을 만큼 밥과 국과 반찬을 해요. 요사이에는 아침에 한 밥을 저녁에 먹고 끝내기도 하지만, 으레 새 끼니 새 밥, 새 끼니 새 국, 새 끼니 새 반찬,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그때 손품을 들이는 밥이 참말 맛있거든요. 내가 먹어 보기에 이러하니까, 나랑 같이 밥을 먹는 사람도 이 느낌을 함께 받아들이기를 바라요.


  빨래를 하루에 서너 차례 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인데, 참말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이다 보니, 빨래를 하면서 마음씻기를 이루어요. 괴롭거나 힘들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빨래를 하며 사르르 사라져요. 밥을 할 적에도 그렇고요.


  아마 사라진다기보다 잊힌다고 해야 맞을 텐데, 사라지든 잊히든, 빨래하기와 밥하기는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또, 아이들하고 함께 놀거나 마실을 다니거나 잠을 재울 적에도 더없이 기쁘고 아름다운 숨결이 나한테 스며든다고 느껴요.


  나는 내가 차린 맛난 밥을 먹습니다. 나는 남이 차린 밥도 맛나게 먹습니다. 밥집에서 사먹는 바깥밥은 조미료 냄새에 수도물 냄새에 온갖 ‘이야 이렇게 나쁜 걸 잔뜩 집어넣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지만, 숟가락을 든 뒤로는 상긋방긋 웃으면서 먹어요. 내 숨결을 살리는 고마운 밥이거든요. 조미료 듬뿍 들어가든 말든 내 숨결이 되어요. 소시지이든 세겹살이든 내 몸이 되고 피가 되며 살이 되어요. 그래서, 이런 걸 먹든 저런 걸 먹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똥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 옷을 빨든, 바닷가에서 놀며 온통 모래투성이 된 옷을 빨든, 나는 노상 기쁘게 옷을 빨래합니다. 옳거니,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야 하는구나, 저런,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도 때와 얼룩이 안 지네, 하고 깨닫습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던 손길을 떠올리고,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사랑하던 눈길을 헤아립니다. 나는 나와 내 아이와 옆지기를 어떻게 사랑하며 하루를 빛낼까요. 밥을 먹습니다. 빨래를 합니다. 비질을 합니다. 하루가 어여쁩니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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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군가한테 '사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적어도, 몸소 찾아가서 꾸벅 절을 하고 술 한잔을 사든 과자 한 봉지나 과일 한 그릇을 주든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과'를 한다면서 '자기 일기장'에만 슬쩍 적바림'하면, 이것을 사과라도 여겨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올바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길을 찾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참을성을 길러 보아야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이제 마태우스 님 서재에는 마실 갈 일이 없으리라 느껴, 이렇게 내 알라딘서재 자리에 마태우스 님한테 띄우는 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립니다.

 

..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지 마셔요

 


  모든 궁금함은 궁금하다고 여긴 사람 스스로 풉니다.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한테 다른 사람이 궁금함을 풀어 주지 못합니다. 절집에서는 으레 ‘선문답’을 한다고 하는데, 선문답을 내주는 스승도 선문답을 받는 배움꾼도 스스로 궁금함을 풀지, 누구한테 무얼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누가 알려주어서 안다고 하면, ‘참앎’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입니다. 누가 깨우쳐서 깨닫는다고 하면, 이때에도 ‘슬기’가 아닌 ‘지식이나 정보’일 뿐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쌓으면 쌓을수록 쌓일 뿐, 삶을 일으켜세우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참앎이나 슬기일 때에 비로소, 이 참앎과 슬기를 바탕으로 스스로 삶을 일으켜세우는 길을 느끼거나 삶을 북돋우는 손길을 찾습니다.


  책을 읽는대서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길은 책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거든요. 내 마음속에 있는 길을 느끼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책을 읽으면 안 돼요.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무엇이 샘솟는가를 살펴야 하고, 책을 읽고 난 뒤에 스스로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꿈과 사랑을 다스려야 해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앉은뱅이가 됩니다. 앉은뱅이로 살아가면서도 만 리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어요. 그러나,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며 앉은뱅이가 되는 사람은 만 리 밖이 아니라, 방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조차 몰라요. 방 바깥 부엌에서 누가 어떻게 밥을 차리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고 청소는 어떻게 하는지, 아이는 누가 어떻게 돌보는지를 하나도 몰라요. 날씨도 모를 뿐더러, 날씨에 따라 피고 지고 맺고 트는 잎사귀 또한 모르지요.


  오늘날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혀서 지식과 정보만 받아먹도록 이끌’고 말아요. 교사이든 교수이든 아이들 스스로 삶을 찾고 꿈을 키우도록 이끌지 않아요. 너무 마땅한 노릇이라 할 텐데, 교사와 교수 스스로 당신 삶을 안 찾고 당신 꿈을 안 키우니까, 학교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읽고 싶은 책은 스스로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읽으라 한대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고 책시렁을 살펴야 합니다. 책은 손수 책장을 넘겨야 읽습니다. 책장에 찍힌 글은 스스로 읽어야 하고, 줄거리를 넘어 알맹이를 새겨야 하며, 알맹이마다 서린 넋을 아로새겨야 합니다. 넋을 아로새긴 뒤에는 스스로 삶을 짚으면서 하루하루 빛내는 길을 손수 찾고 가꾸어야겠지요.


  사랑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구 한 사람을 ‘홀리’거나 ‘꼬드기’는 길을 알려줄 수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랑은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이것이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어떠한 일을 놓고도, 이것이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이를테면, 드레퓌스 사건 참거짓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주지 못해요. 스스로 책과 자료와 이야기를 살피고 읽고 새기고 견주면서 참거짓을 깨달아야 해요. 소설쟁이 공지영 씨가 《의자놀이》라는 책을 쓰면서 어떤 거짓말을 했고 쌍용 노동자와 이웃들한테 어떤 짓을 했는가 하는 대목 또한, 이 대목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 찾고 느끼고 알고 깨달아야 할 몫이지, 누가 누구한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알려줄 수 없어요. 알려준다 한들 ‘받아먹을 귀와 입과 손’이 없는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느끼는 사람은 한 줄을 읽으면서도 느껴요. 아는 사람은 낯빛을 보고도 알아요. 내 아이가 아플 적에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척 알 뿐 아니라, 멀리 떨어져 지내도 느낌으로 ‘어 우리 아이 아픈가 보네’ 하고 깨달아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 내 아이한테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기 때문이에요.


  지식 하나를 얻으려 할 적에도 이와 같아야 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아야 지식 하나 제대로 건사해요. 호미 쥐는 법을 익히려면 책이나 동영상이 아닌 몸소 호미를 쥐어 보면 알지만, 몸소 호미를 쥐어도 호미질이 서툰 사람이 많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안 쏟거든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삽질도 낫질도 도끼질도 익숙하게 해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지 않으니까, 하늘을 보면서도 날씨를 못 읽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지구별 어디에서라도 ‘쓰는 말이 달라’ 이야기를 못 나눌 일이란 없어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으로 이야기를 나누니까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바보가 되고 말아요. 바보가 되어도 교수 노릇을 하고 교사 노릇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보가 되어 살아가면 무슨 즐거움과 어떤 재미가 있을까요. 내 삶을 못 읽으니 이웃 삶을 못 읽잖아요. 내 삶을 못 깨달으니 동무 삶을 깨우치지 못하잖아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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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11-12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좀처럼 이런 일에 나서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된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 것 같지만,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신 것은 좀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본인이 본인의 직업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는 것은 다를 것 같아요.

파란놀 2012-11-12 10:27   좋아요 0 | URL
hnine님, '알 것 같지만'이란 무엇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주셔요. 참말 '안다'와 '알 듯하다'와 '알 수 있을 듯하다'는 모두 달라요.

hnine님이 이 글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아신다'면, 제가 이러한 글을 쓰면서 나누고 싶은 '뜻과 생각과 사랑과 꿈과 마음'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 '직업'이 무엇인가요? 저는 그분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릅니다. 그분 직업이 교사나 교수인가요? 제가 쓰는 글을 그동안 죽 보셨으면, 제가 글을 쓰면서 '지식인-교사-교수' 이런저런 사람들을 빗대는 이야기를 흔히 쓰는 줄 '아시'겠지요. 누가 무슨 직업이건 무슨 대수이겠어요. 직업이 농사꾼이면 어떻고 작가이면 어떠하며 주부이면 어떠하겠어요.

살아가는 '본질'이 무엇이고, 살아가며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스스로 하루를 빚을 수 있고,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남을 다치게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생채기를 입히고 입을 뿐이에요.
 

 

 누나가 보던 책을 슬쩍

 


  누나가 보던 책을 슬쩍 보는 동생. 누나는 이것을 하다가 어느새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다가도 새삼스레 그것을 한다. 이동안 동생은 누나가 하던 이것을 따라서 하고, 누나가 이어서 하던 저것을 좇아서 한다. 누나는 돌고 돌아 다시 이것이나 저것으로 돌아와서 노는데, 그동안 동생이 이것이나 저것을 붙잡고 놀면 “내가 놀던 거야.” 하면서 가로채려 한다.


  벼리야, 보라는 누나를 좋아해서 누나가 놀던 것을 저도 한번 놀아 보고 싶단다. 벼리는 이것도 놀 수 있고 저것도 놀 수 있잖아. 이 책도 읽을 수 있고 저 책도 읽을 수 있지. 보라가 이 책을 보고 싶다 하면 이 책을 주고, 저 책을 보고 싶다 하면 저 책을 주렴. 다 주면 돼. 그리고 벼리가 보고픈 책이 있으면 보드라운 목소리로 보라한테 달라고 해 봐. 그러면 보라도 너한테 모두 다 줄 테니까.


  예쁜 손으로 예쁘게 책을 읽자. 예쁜 마음으로 예쁜 하루를 빛내자. 예쁜 꿈으로 서로 예쁘게 사랑을 꽃피우자. 네 동생 보라는 누나 벼리가 노는 모습을 책으로 삼으며 하루를 빛내고 싶어 한단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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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은 괜찮아요 창비시선 287
차창룡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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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

 


- 책이름 : 고시원은 괜찮아요
- 글 : 차창룡
- 펴낸곳 : 창비 (2008.4.21.)
- 책값 : 6000원

 


  시골에서는 깊은 밤에 마당으로 나오기만 해도 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해가 진 이른저녁에 별빛이 하나둘 돋고,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짙어집니다. 시골 고샅을 밝히는 등불이 없는 들판이나 멧자락으로 들어서면 별무리가 한껏 빛납니다. 마당에서도 미리내를 볼 수 있지만, 들판에서 보는 미리내는 더 또렷해요.


  시골에서는 아침마다 환하게 트는 동을 바라보며 고운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도시에서도 아침마다 동트는 하늘 바라볼 수 있다지만, 으레 이 건물에 막히고 저 아파트에 가려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는 지하철이 많이 뚫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일터로 가더라도 햇볕 한 줌 못 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터가 아예 땅밑이기도 하고, 높고 큰 건물 안쪽에 깃드느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햇살 한 조각 못 먹는 사람마저 있어요.


  사람은 햇볕을 못 먹어도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땅밑 깊은 감옥에 갇혀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쉰 해를 살아남을 수 있어요. 바람을 마실 수 있고 물을 먹을 수 있으면 어떻든 목숨을 이을 수 있어요.


  그런데 퍽 궁금해요. 목숨을 잇는대서 사람이라 할 만할까요. 목숨만 이으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 토방 대신 마당을 방으로 사용하면, 밤마다 하늘이 더욱 가까이 내려온다. 은하수의 강물이 몸속으로 들어와 뱃속에서 꾸르륵거리고, 별빛은 살갗에 박혀 소름으로 돋는다 ..  (마당방)


  참으로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낄 때에 살아가는 하루라고 느껴요. 참으로 삶을 누릴 때에 삶을 누리는구나 싶어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에서는 삶도 꿈도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톱니바퀴 하나가 되어 늘 똑같이 움직이는 삶이라면 사랑도 믿음도 못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오늘날 중·고등학교 아이들 입에서 아주 거칠고 막되먹은 말씨가 툭툭 튀어나옵니다. 고작 열서넛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아이들 입에서 어쩜 이렇게 슬프고 딱한 말씨가 튀어나올까요.


  곰곰이 살피면, 이제 서너 살이라 할 만한 아이들이 자동차 이름을 줄줄 욉니다. 텔레비전 우스갯소리를 따라서 하고, 온갖 대중노래 춤사위를 흉내냅니다. 어떤 아이는 너덧 살에 영어로 노래를 부릅니다.


  아하, 그렇지요.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그대로 아이들이 받아먹어요. 어른들이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그대로 아이들이 말해요.


  어른들을 보셔요. 거친 말을 얼마나 흔히 하나요. ㅆㅅㄲ라든지 ㄱㅅㄲ라든지, 또는 ㅆㅎ이라든지 ㅆㅂ이라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아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 않으면서 말해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말해요. 거친 말을 일삼는 사람은 ‘듣는 이’ 아닌 ‘말하는 이’ 스스로를 깎아내려요. 막된 말을 뱉는 사람은 ‘듣는 쪽’ 아닌 ‘말하는 쪽’ 스스로를 갉아먹어요.


  아이들은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갉아먹는 줄 모르면서 거친 말을 일삼아요.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벌써 어른인 척해요. 몸뚱이는 크지만 마음그릇은 아주 좁다란 채, 주먹질을 하고 욕질을 하며 발길질을 하고 말아요. 커다란 몸뚱이처럼 마음그릇을 키울 줄 모를 뿐 아니라, 아이들 둘레 어른들치고 ‘큰 어른 몸뚱이에 걸맞는 큰 마음그릇으로 사랑을 나누는’ 분이 몹시 적구나 싶어요.


..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  (고시원에서)


  차창룡 님이 쓴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2008)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차창룡 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내놓았을까요. 이 시집은 시인 차창룡 님 스스로 이녁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글줄이 될까요.


  차창룡 님이 써서 내놓는 싯말 하나는, 잡지에 실리거나 책에 실리는 글이 아닙니다. 차창룡 님이 써서 내놓는 싯말은 바로 ‘차창룡 님 삶을 스스로 노래하고 누리는 말’입니다. 남들 들으라고 쓰는 시란 없어요. 스스로 되읽으면서 삶을 되새기는 시일 뿐이에요.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밝히는 싯말이고 시노래예요.


  어느 잡지나 기관지나 신문에서 시 한 줄 써 달라고 얘기했기에 써서 보내는 시란 없어요. 누군가 나한테 시를 써 달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없으면 한 줄이든 두 줄이든 못 써요.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누가 써 달라 하지 않아도 백 줄이나 천 줄이나 기쁘게 써요.


..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 하느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뵙기 위한 것일 뿐 // 고층아파트도 있는데 왜? ..  (내가 옥탑방을 선택한 이유)


  차창룡 님이 옥탑방도 아파트도 도시도 서울도 아닌 데에서 살아가면 어떤 시를 썼을까 헤아려 봅니다. 스스로 고시원에서 살아가려 하니까 《고시원은 괜찮아요》 같은 시를 쓸 테지요. 스스로 절집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절집은 괜찮아요” 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새로운 노랫가락을 빚겠지요. 숲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숲은 괜찮아요” 하는 이름과 함께 숲내음 숲바람 숲짐승 이야기가 얼크러진 새삼스러운 노랫자락을 펼칠 테고요.


  삶터가 삶을 빚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려 하는 마음이 삶터를 부릅니다. 스스로 어떤 사랑을 바라는가에 따라 보금자리를 꾸밉니다. 스스로 어떤 꿈을 이루려는가에 따라 마을을 돌봅니다. 스스로 어떤 믿음을 펼치는가에 따라 나라를 세워요.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군대를 끔찍하게 미워했어요. 아니, 미워했다기보다 ‘지구별에 없어야 할 첫째 것으로 군대를 꼽았’어요. 좋고 싫고 아끼고 미워하고가 아니라, 군대란 지구별을 무너뜨리려고 어떤 검은 우두머리가 만들어 사람들을 바보처럼 꼬드기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자,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편지를 쓰며 어떤 글로 이웃들과 사귀었을까요. 그리고, 시인 차창룡 님은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를 내놓으며 이녁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거나 북돋았을까요.


.. 지하철은 참 신기하다. / 상계동에서 상도동까지, 지도로 보면 아득한데, 노원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면, 지하를 헤매고 헤매어 건대입구역에서 지상으로 나와 잠시 한숨 돌리고, 다시 지하로 잠입, 나는 어느덧 상도동에 서 있다. 이처럼 신기한 두더지작전을 맨 처음 시도한 사람은 상상력이 참 풍부한 사람이다. 어떻게 우리이 발밑에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  (지하철은 참 신기하다)


  시란, 삶입니다. 시쓰기란, 삶쓰기입니다. 시읽기란, 삶읽기입니다. 글도 삶이요, 글쓰기도 삶쓰기입니다. 사진찍기란 삶찍기요, 사진읽기 또한 삶읽기입니다. 그림그리기일 때에도 삶그리기입니다. 그림보기 또한 삶보기예요. 노래부르기란 삶부르기입니다. 노래듣기란 삶듣기예요.


  모두 삶입니다. 삶 아닌 것 하나 없습니다. 스스로 바라는 꿈이 시와 글과 사진과 그림과 노래에 실립니다. 스스로 되려는 몸짓이 시와 글과 사진과 그림과 노래에 어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에 따라 ‘내가 쓰는 시’가 달라져요. 어떻게 살고 싶나에 따라 ‘내가 읽는 시’가 달라져요.


  할 말을 쓰는 시입니다만, 할 말이란 살아가고픈 모습입니다. 살아가고픈 모습을 말로 빚으면서 시가 태어납니다.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이 시 한 줄로 드러나고,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 시 두 줄로 나타나며, 내가 살아가는 오늘 모습이 곧바로 시로 그려져요.


  꿈을 쓰면서 시예요. 사랑을 쓰면서 시예요. 삶을 쓰면서 시가 될 테지요. 꿈이 있는 사람은 글로도 시를 쓰고 마음으로도 시를 써요. 사랑이 있는 사람은 글 아닌 노래로도 시를 써요. 삶이 있는 사람은 굳이 글을 안 쓰더라도 눈빛 하나로 아리땁게 무지개빛 시를 쓰고 미리내빛 시를 써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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