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8. 한글날이 공휴일이 된 뜻
― 껍데기인 ‘글’과 알맹이인 ‘말’

 


  2013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됩니다. 달력을 보면 한글날 빛깔이 빨갛게 물듭니다. 공휴일이 되니 사람들이 한글날을 새롭게 다시 기리려나 궁금한데, 사람들이 기릴 만한 날이라 한다면 공휴일이건 국경일이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기리리라 느껴요.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은 중앙정부에서 공휴일이나 휴일이나 국경일로 삼지 않아도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입니다.


  한글날은 한글을 기리는 날입니다. 한겨레가 쓰는 ‘말’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한글이라는 글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임금님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한글단체에서는 한글날에 세종큰임금 동상 앞으로 가서 꽃을 바칩니다.


  한글날이나 꽃바치기가 뜻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무언가 엉뚱한 데로 잔치와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한글이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담는 그릇이 한글입니다. 우리한테 글이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기리려는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처음 만든 때부터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 언저리를 지나도록, 이 나라 지식인과 권력자와 공무원은 한글을 업신여겼어요. 모두들 중국글을 빌어 글을 썼지, 한국글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한국글 아닌 중국글 빌어서 글을 쓰니, 저절로 중국말이 스며듭니다. 중국글로 담는 이야기는 중국말로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한자말이 중국글 빌어쓴 버릇 때문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요즈음에는 영어를 마구 쓰는 일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한국말을 한국글로 안 담고 영어를 한국글로 담으려 하니 나무라거나 꾸짖습니다. 그러면, 한국말 아닌 중국말을 한국글에 담는 일 또한 나무라거나 꾸짖어야 올바릅니다. 더 나아가, 한국글이 한국글답도록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살찌우면서 아낄 때에 아름답지요.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가리키는 나무가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백일홍’이라고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배롱나무’라 하거나 ‘간지럼나무’라 합니다. 꽃은 따로 ‘배롱꽃’이라 합니다. 글로 놓고 보자면 ‘목백일홍’이나 ‘백일홍’도 한글이에요. 그러나 ‘백일홍’처럼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 않아요. 한국말은 ‘배롱꽃’이고 ‘배롱나무’이며 ‘간지럼나무’입니다.


  ‘목’이라 적어도 한글이지만, 한국말이 아닙니다. ‘나무’라 적고 말할 때에 올바른 한글이면서 아름다운 한국말입니다. ‘대지’라 적으면 한글은 되어도 한국말은 못 되어요. ‘땅’이라 적고 말할 때에 한국말다운 한국말입니다.


  말은 ‘말’이라고 가리켜야 올바른 한국글이면서 한국말입니다. ‘언어’처럼 적으면 껍데기와 무늬는 한글이라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한국글이고 엉뚱한 중국말이 됩니다.


  박남일 님이 쓴 글로 빚은 그림책 《뜨고 지고》(길벗어린이,2008) 52쪽을 보면,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물결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메밀꽃이 일고.” 같은 글월이 나옵니다. 물결과 너울과 메밀꽃을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무척 자주 오래 놀았어요. 어릴 적에 ‘메밀꽃’이라는 낱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피는 메밀꽃 아닌 바다에 일어나난 메밀꽃을 보고 들었어요. 바다와 얽힌 낱말을 살핀다면, ‘물결’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입니다. ‘파도’는 껍데기만 한글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바닷가’와 ‘모래밭’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이에요. ‘해변’과 ‘해안’과 ‘해수욕장’과 ‘모래사장’은 한국말도 아니고 한국글도 아닙니다.


  다시 공휴일이 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이라는 글자에만 눈길을 둘 수 없습니다.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는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을 한국사람 넋과 삶을 사랑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알파벳을 빌어서 쓰더라도 겨레말과 나라말 아름답고 튼튼히 지키는 저 아시아 나라와 중남미 나라를 보셔요. 베트남 겨레가 쓰는 베트남말은 베트남말입니다. 브라질과 칠레와 쿠바가 부르는 노래는 브라질 겨레 노래요 칠레 겨레 노래이며 쿠바 겨레 노래예요. 이들은 글이 없고 나라를 빼앗기며 모진 식민지살이를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말까지 에스파냐말이나 포르투갈말을 써야 하지만, 이러한 글과 말로도 이녁 겨레와 나라 넋·얼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겉보기로만 한글인 글이 아닌, 알맹이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옳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낱말만 예쁘장한 토박이말이 아니라, 낱말과 낱말을 엮는 글월(문장)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가 어지럽게 섞인 글을 쓴다면, 이러한 글은 ‘겉보기 한글’이지만 ‘속보기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 한글날을 기리는 데에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다운 알맹이가 될 한국말을 살찌우고 북돋우면서 사랑하고 즐기는 길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한글로 ‘오마이뉴스·프레시안’이나 ‘네이버·다음’처럼 적으면 겉보기로는 한글이지만, 속알맹이로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이들 이름은 모두 ‘ohmynews·pressian’에다가 ‘naver·daum’이라는 외국말이에요. 무늬만 한글로 적어서 보여준대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올곧게 추슬러서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글날을 기리는 참뜻이 됩니다. 생각을 하고, 생각을 키우며, 생각을 넓힐 때에 비로소 한글날을 한글날답게 아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종큰임금이 한글(훈민정음)을 빚어서 퍼뜨린 일은 틀림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세종큰임금이 왜 한글을 빚어서 퍼뜨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바로, 이 나라 시골마다 흙을 만지며 일구던 수수하고 투박한 여느 사람들이 여느 시골살이를 지키고 가꾸고 살찌우면서 시골말을 아름답게 돌보았기에, 한글(훈민정음)을 빚을 수 있었고, 이 한글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토박이말이란 바로 시골말입니다. 토박이말은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고 숲을 가꾸며 들을 노래하던 삶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도시문명사회가 된 모습에서 한겨레 토박이말을 아무리 되찾거나 되살리려고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못 쓰거나 잘 몰라요. 도시에서는 흙을 안 만지고 숲과 들을 아끼거나 보살피지 못하니까요. 앞으로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도시 한복판에도 숲을 마련해서, 도시사람 스스로 밭과 숲을 노래하며 햇볕과 바람과 비와 눈과 꽃과 풀과 나무와 흙을 사랑할 수 있다면, 시나브로 한글과 한국말 모두 넉넉하고 푸르게 되살아나리라 생각합니다. 4대강사업과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국가보안법과 막개발과 핵발전소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입시지옥과 재테크와 자동차와 고속도로와 경제성장율에 목을 매다는 나라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숨조차 쉬지 못합니다.


  삶길을 열어야 말길이 열립니다. 말길을 열어야 마음길과 생각길을 엽니다. 2013년 한글날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는 겉치레와 무늬와 껍데기에서만 그치는 ‘한글날 잔치’가 아닌, 속살과 알맹이와 참모습을 가꾸며 살찌우는 ‘한국말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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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또 쓰는 글

 


  들풀을 먹을 적에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고 한다. 먹을 수 있는 풀이라면 달고, 먹을 수 없는 풀이라면 쓰다. 버섯은 빛깔과 냄새로 살피기도 하지만, 풀은 입에 넣고 혀로 맛을 느끼면서 씹어서 조금 먹어야 먹을 만한지 안 먹을 만한지 알 수 있다. 웬만큼 쓰더라도 다른 보드라운 풀을 섞어서 먹으면 외려 몸에 더 좋기도 하다.


  책을 읽을 적에 풀먹기를 늘 떠올린다. 나한테 달다고 해서 아무 책이나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나한테 쓰다고 해서 아무 책이나 모두 손사래칠 수 없다. 책은 그저 책으로 읽는다. 생각해 보면, 풀도 그저 풀로 먹을 뿐, 쓰다고 덜 먹거나 달다고 더 먹지는 않는다. 먹을 만한 풀을 찾아서 먹고, 먹지 않을 만한 풀은 안 먹을 뿐이다. 읽을 만한 책을 찾아서 읽고, 읽지 않을 만한 책은 안 읽을 뿐이다.


  글을 쓸 적에 써야 하는 글을 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쓴다. 나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다. 내가 살찌우고픈 사랑을 글로 담고, 내가 북돋우고픈 꿈을 글로 엮는다. 써야 하는 글이 아닌데 써야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쓰고 싶지 않은데 쓰는 글이라면 얼마나 골이 아플까. 나 스스로 즐거우며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루를 빛내고 싶듯이, 글로 엮는 이야기 또한 내가 되읽거나 남이 읽거나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마음이라면, 즐겁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리라. 글을 쓰는 넋이라면 아름답게 꿈꾸고 싶은 넋이리라. 글을 쓰는 얼이라면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하고픈 얼이리라.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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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어귀

 


나무그늘에서 들일 쉬며
샛밥 먹고
낮잠 한숨 달게 자고는
들바람 한 자락 마신다.

 

햇볕은 뜨끈뜨끈 나락을 익힌다.
콩 수수 서숙도 익고
들콩도 산딸도 감알도 익는다.

 

비가 오며 나무가 젖는다.
빗물은 나뭇잎을 통통 튀기면서
논으로 밭으로 떨어진다.

 

햇볕과 빗물 먹는 나락을 쓰다듬는다.
바람과 구름 마시는 나무를 어루만진다.

 

구월부터 천천히 알록달록한 풀숲은
시월에 이르러 온통 울긋불긋 너울댄다.
시월바람 깨고소하게 분다.

 


4346.10.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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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 책읽기

 


  노랑나비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노랑나비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막상 노랑나비 사진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이제 드디어 찍는다. 하양나비도 노랑나비도 참 바지런히 날갯짓을 하며 다닌다. 다른 나비는 꽃송이에 살그마니 내려앉아 차분히 꿀이나 꽃가루 빨아먹는데, 왜 노랑나비는 이다지도 날갯짓만 많이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랑나비와 하양나비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무섭다고 여겨 퍽 멀리 떨어진 데에서도 알아차리고는 내빼려고 날갯짓을 할 테지. 사람들은 노랑나비와 하양나비가 애벌레일 적에 푸성귀 잎사귀를 짓궂게 갉아먹는다고 몹시 싫어하잖은가. 이 기운을 나비가 된 뒤에도 몸으로 느껴 사람 앞에서 사진 찍히기를 꺼리는 셈 아닌가 하고 느낀다.


  노랑나비한테 말을 건다. 얘야, 우리 집 풀밭은 너희가 홀가분하게 자라는 터전이잖아. 우리 집 풀밭에서 어느 풀이든 너희 마음껏 갉아먹으며 애벌레로 자랐잖니. 우리 집 풀밭에서 흐드러지는 온갖 들꽃에 너희가 사뿐사뿐 내려앉아 꿀이랑 꽃가루 배불리 먹을 수 있잖니. 그래도 사진으로 찍히기 싫니?


  그래, 너희가 바라지 않는다면 찍히지 않아도 돼. 나는 너희들을 날마다 마주하고 언제나 지켜보니까. 내 눈과 마음에 너희 모습을 담을 수 있으면 넉넉하단다. 가을철에도 따스하고 아늑한 시골마을 실컷 누리렴.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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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찌의 육아일기 -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로 사는 즐거움
이창식 지음 / 터치아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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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41

 


육아관찰 푸념일기
― 하찌의 육아일기
 이창식 글
 터치아트 펴냄, 2013.5.20. 13000원

 


  이레 즈음 목과 코가 몹시 아팠습니다. 콧물이 멈추지 않고,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그렇지만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과 마실을 다닙니다. 밤에 아이들 자리에 눕혀 자장노래 부르려 하는데, 코와 목이 아프면서 콧물이 안 그치고 또 코로 숨을 쉬기 어렵다 보니, 겨우 몸을 추슬러 노래 한 가락 부른 뒤 밖으로 나와 코를 풀고 목을 추스르고는, 다시 들어와서 노래 한 가락 부른 뒤 밖으로 나와 코를 풀고 목을 추스릅니다.


  아이들은 이런 아버지 몸을 느낄까요. 느낄 테지요. 큰아이가 갓난쟁이였을 적에 아버지처럼 코로 제대로 숨을 못 쉬어서 날이면 날마다 코로 소금물 넣으며 뚫어 주었어요. 이제 큰아이는 아버지처럼 코로 숨을 못 쉬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마에 땀방울 송알송알 맺히도록 뛰노니, 아이들은 코도 목도 몸도 천천히 튼튼해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저녁에 코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던 며칠 앞서, 깊은 밤에 마당으로 나와 별바라기를 하며 코를 풀다가 별똥을 보았어요. 이듬날 밤에도 또 코가 막혀 괴롭게 재채기를 하다가 별똥을 보았어요. 별똥이 사라지기 앞서 마음속으로 꿈을 하나 빌라 했지만, 그럴 겨를은 없어, 별꼬리 가늘게 사라지는 모습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부디 이 코로 맑은 숨 걱정없이 쉬면서 아이들과 즐겁게 노래부를 수 있는 삶 찾게 해 주소서, 하고 생각합니다. 밤하늘 그득 채운 별을 바라보면서 기지개를 켜고, 너희 아버지 새로 기운을 차려 밥도 한결 맛나게 차리고, 노래도 더 신나게 부르마 하고 다짐합니다.


  엊저녁 드디어 코가 조금 뚫립니다. 코가 뚫리니 코로 숨을 쉴 수 있고,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목떨림 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보드랍고 차분하게 부르는 아버지 노래를 듣는 두 아이는 한두 가락 같이 따라 부르는가 싶더니 이내 곯아떨어집니다. 이불깃 여미고 토닥토닥하면서 노래를 몇 가락 더 부르고는 나도 눈을 감습니다.


[2012.1.25.] 딸아이의 출산휴가 1년이 마침내 끝났다. 덕분에 요즘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천사를 영접하게 되었다.
[2012.3.5.] 재영이가 밥을 삼키지 않고 입에 물고만 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일요일을 엄마 아빠랑 함께 지내고 오더니 나쁜 버릇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고 아내는 걱정했다.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면 생기는 버릇이란다.
[2012.3.10.] 운동화가 낡아 예쁜 걸로 한 켤레 사고 싶다며 백화점에 갔던 아내가 자기 운동화는 안 사고 외손자 운동화와 원숭이 인형만 달랑 사들고 돌아와서는 자기 물건 산 것보다 더 즐거워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들풀 뜯어 날푸성귀로 먹기 즐기면, 아이들도 날푸성귀를 즐깁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함께 풀을 뜯습니다. 어버이가 밭에서 돌을 고르고 일구어 씨앗을 심어 돌보면, 아이들도 밭둑에 나란히 쪼그려앉아서 돌을 고르다가는 씨앗도 심고 풀도 뜯습니다. 어버이가 자전거를 타며 흥얼흥얼 콧노래 부르면, 아이들도 자전거를 얼른 타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저희끼리 놀 적에도 콧노래 흥얼흥얼 즐겁습니다.


  크레파스를 사고 크레용을 사며 색연필을 삽니다. 종이를 넉넉히 장만합니다. 따로 아이들을 불러서 그림을 함께 그리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스스로 그림을 즐깁니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어떤 꿈이나 사랑을 이야기 한 타래로 엮어 갈무리하고 싶을 적에 스스럼없이 크레파스나 크레용이나 색연필을 꺼내고 종이를 펼칩니다.


  이렇게 어버이 스스로 그림그리기를 즐기면,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어버이 곁에 엎드립니다. “나도, 나도, 나도 그림 그릴래!” 하면서 함께 그림을 그립니다. 이윽고 어버이가 마음속 이야기를 그림으로 다 그립니다. 작은아이는 아직 많이 어려 다른 놀이로 갈아타지만, 큰아이는 어느새 그림놀이에 푹 빠집니다.


  아이들이 못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이들은 ‘일’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몸을 써서 움직이는 모든 삶을 반깁니다. 아이들은 ‘심부름’이라고도 여기지 않습니다. 몸이 쑥쑥 자라니 즐겁고, 팔과 다리에 힘이 차츰 붙으니 신납니다.


  우리 어른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도 처음부터 익숙하게 해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 쉰이나 예순이나 일흔부터 새롭게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처음에만 낯설 뿐, 이내 익숙하게 해요. 나이 예순이나 일흔부터 자전거를 타더라도, 차츰 새 힘살이 붙어요. 나이 일흔이나 여든부터 책을 읽더라도 차츰 머리에 새 빛이 감돕니다.


  아이만 배우지 않아요. 어른도 배웁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는 동안’ 배워요.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과 숨결(짐승과 푸나무와 벌레들도 함께)은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고,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죽으려 하는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2012.3.22.] 돌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재영이가 이 노래를 알아듣거나 따라 부를 수는 없지만, 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고마운 일인가.
[2012.3.24.] 오늘 아침도 녀석과의 실랑이로 신경이 바짝 곤두선 아내가 나한테 화풀이하듯 나물들을 몇 가지 무쳐 놓았으니 밥은 알아서 좀 먹으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울화통을 터트리며 밥상을 번쩍 들어 마당으로 내던져버렸을 텐데, 요즘은 던질 밥상도 없고 마당도 없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외손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너무 심한데다 지금 내 처지가 4순위라는 것.
[2012.4.11.] 지금까지 여당이 해온 짓거리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고 여당 후보자로 나온 인물은 더욱 혐오스럽지만 눈물을 삼키고 새누리당과 그 후보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여당보다는 야당들이 하는 짓거리가 더 마음에 안 들고 더 혐오스럽기 때문이었다.


  번역 일을 하는 이창식 님이 이녁 딸아이가 시집가서 낳은 아이를 옆지기(외할머니)와 함께 돌보는 이야기를 갈무리한 《하찌의 육아일기》(터치아트,2013)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창식 님은 ‘육아일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늦깎이에 어린 아이하고 삶을 함께 보내니, 이 이야기를 일기로 남기면서 어느새 ‘육아일기’가 되었지 싶습니다.


  그런데, 《하찌의 육아일기》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하찌) 이창식 님이 외손자를 돌보거나 보살피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종이기저귀 갈아 주고 밑을 씻기는 일, 플라스틱 자동차에 태워 몇 바퀴 돌리다가 자장노래 불러 주는 일, 가끔 놀이터로 데려가 한 시간 즈음 지켜보는 일, 이 세 가지를 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외손자하고 놀이터도 자주 다니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이창식 님은 아이(외손자)한테 밥을 먹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밥을 차릴 줄 모릅니다. 아마 설거지도 못 할 테지요. 설거지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글로 안 썼으니, 설거지를 모른다고 해야 옳다고 느껴요. 《하찌의 육아일기》를 보면, ‘마누라 밥상 차리는 꼴이 못마땅해서 밥상을 뒤엎고 싶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적습니다. 아마 이녁이 젊을 적에는 참말 밥상을 뒤엎으며 거친 말을 내뱉았으리라 봅니다. 나이가 들어 이렇게 못 할 뿐이라는 푸념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2012.5.8.] 아내가 나더러 요리 학원엘 다니란다. 자기는 외손자 녀석 먹거리 장만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진이 빠져 남편 먹을 것까지 챙겨 줄 여력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자기가 날 먹여 살렸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요리를 배워 자기를 좀 먹여 살려 주면 얼마나 고마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 말은 되는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해 보니 좀 한심했다.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와서 드시라고 해도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면 사양하고 안 갈 판인데,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요리 학원을 다니라고? 차라리 사먹고 말자고 했더니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쩜 그렇게도 없느냐고 타박했다. 기가 찼다.
[2012.5.10.] 젓가락으로 인절미를 떼어내어 콩고물에 찍어 입안에 넣자 목구멍이 갑자기 콱 막히며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만년에 이런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져 식탁을 확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2012.5.26.] 저녁에 딸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모처럼 쉬는 날에 혼자서 재영이를 돌보며 집안 청소와 소소한 일들을 하느라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집사람이 듣고 있다가 “네 새끼 내가 키워 주고, 김치랑 반찬이랑 국이랑 다 제공하고, 재영이 먹을 것까지 다 챙겨 주는데도 힘들다고 푸념하냐?”며 타박했다.


  《하찌의 육아일기》는 참말 ‘할아버지 육아일기’가 맞을까요? 육아일기 아닌 ‘육아관찰일기’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한 걸음 나아가, 육아관찰일기조차 아닌 ‘육아관찰 푸념일기’라고 해야 꼭 들어맞지 않을까요?


  이 책 《하찌의 육아일기》는 할아버지 이창식 님이 이녁 모습과 생각을 거의 안 숨기고 잘 드러냅니다. 이 대목은 훌륭합니다. 밥상을 뒤엎고 싶다는 생각, 또 마누라한테 큰소리를 내며 부부싸움을 한 모습, 예순 넘어서 요리학원 다니라는 말에 성을 벌컥 낸 모습, 이런 이야기와 저런 모습을 감추지 않았기에, 오늘날 남자 지식인과 남자 어른(할아버지) 생각과 삶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창식 님은 왜 ‘여자가 차려 주는 밥’만 먹으려 할까요. 여자(할머니)가 이녁보다 먼저 숨을 거두거나 그만 허리가 다쳐 일어서지 못할 적에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요. 집안에 있는 여자가 몸이 아프거나 다쳐서 꼼짝을 못하면 집안에 있는 여자를 내팽개칠 생각일까요. 스스로 밥도 못 하고 죽도 못 끓인다면, 스스로 살림을 돌보지 않고 여자한테만 도맡긴다면, 이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까요.


  가만히 보면, 이창식 님 딸아이는 이런 ‘아버지 모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이창식 님 사위도 이와 같은 ‘아버지 모습’으로 아이를 마주할는지 모릅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일요일을 엄마 아빠랑 함께 지내고 오더니 나쁜 버릇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고 아내는 걱정했다(3월 5일 일기)” 같은 말을 읽으며 헤아립니다. 외손자는 정작 어머니 아버지 사랑을 받는다기보다 외롭게 크는구나 싶기까지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을 제대로 못 받으니,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와서 자꾸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지요. 제대로 사랑을 받고 싶어 외손자가 자꾸 앙탈을 부리고 밥을 뱉고 법석을 떨지요.


  다 까닭이 있어요. 아이는 이렇게 드러낼밖에 없어요. 두 돌도 안 된 갓난쟁이와 같은 아기가 어떻게 제 마음을 밝히겠어요. 어른과 같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이 어린 아기가 어떻게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제 마음을 보여주겠어요. 도리질을 치고 울고 밥 안 먹고 심통을 부리는 모습으로 말을 합니다. 아이들 말은 ‘어른처럼 입으로 읊는 말’이 아닌 ‘몸으로 하는 말’이고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라면, 아이 눈높이에 맞출 뿐 아니라 아이 마음결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 말을 아이 눈높이로 알아채고, 아이 마음을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느껴야 합니다.


[2012.12.26.] 무언가 표현은 하고 싶은데 말이 되지 않으니까 외계인 언어를 마구 지껄여대는데, 거의 소움 수준이다. 오늘도 하도 잘난 척 때때거리기에 내가 “오냐 그래, 니 똥 굵다!” 해 버렸더니, 녀석이 그 다음부터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굴따! 굴따! 굴따!” 하며 깔깔거렸다. 듣고 있던 아내가 이제 말 배우기 시작하는 외손자한테 잘 가르친다 하며, “재영아, 하찌랑 같이 놀지 마.”라고 말했다. 녀석이 ‘굵다’는 말의 뜻을 벌써 알아차렸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명색 문학을 한다는 외할아버지가 외손자한테 그런 식의 언어 교육을 한다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야말로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가 아닌가.


  아이가 하는 말은 ‘외계인 말’이 아닙니다. 아이 마음을 드러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할아버지가 ‘소음’으로 여긴다면, 아이는 너무 가엾습니다. 아이 마음에 할아버지는 무엇을 그려 넣는가요. 아이 마음에 할아버지뿐 아니라, 이창식 님 사위와 딸아이는 날마다 무엇을 그려 넣는가요.


  이창식 님 사위와 딸아이가 ‘휴가를 즐기려’고 아이를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극장에 영화 보러 가려’고 아이를 외할머니한테 맡기며, ‘휴일에 집에서 느긋하게 쉬겠다’며 아이를 외할머니한테 맡기는 이야기가 《하찌의 육아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창식 님 사위와 딸아이한테 몹시 궁금합니다. 두 분은 아이를 왜 낳았을까요? 두 분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려는 마음이 있기에 아이를 낳았는가요? 아이한테 모든 것을 바치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어느 만큼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아이와 함께 웃고 떠들며 즐기는 아름다운 삶을 어느 만큼 헤아리는지 궁금해요.


  할아버지 이창식 님은 《하찌의 육아일기》 첫머리에 “딸아이의 출산휴가 1년이 마침내 끝났다. 덕분에 요즘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천사를 영접하게 되었다(1월 25일 일기)” 하고 적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녁 외손자를 ‘천사’가 아닌 ‘(할머니) 남편 사랑을 빼앗는 적’으로 여길 뿐 아니라 ‘떼쟁이’와 ‘괘씸이’로 삼다가는, 마지막에 이르러 ‘외계인’으로 바라봅니다.


  이창식 님한테 한 가지 바라고 싶습니다. 이녁 외손자와 함께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알프스 멧자락에서 혼자 살아가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갑작스레 외손자를 떠맡아야 했을 때에 어떻게 스스로 삶을 바꾸었는지를 만화영화로, 또 원작소설로 읽어내시기를 바랍니다.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와 살림하기와 아이돌보기는 ‘여자(어머니·며느리·할머니)’가 도맡아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밥과 빨래와 청소와 살림과 아이는 모두 ‘삶’입니다. 이녁 딸아이도 사위도 스스로 즐겁게 맡아서 함께 할 때에 아름답게 빛나는 삶입니다. 진수성찬 받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진수성찬을 차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외손자한테서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참으로 외손자한테 따스하며 너른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할아버지 이창식 님이 옆지기한테서 고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먼저 이창식 님 스스로 이녁 옆지기를 곱게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밥상을 뒤엎는 짓은 자랑이 아닙니다. 밥상을 뒤엎는 짓이란 바보도 안 하는 짓입니다. 외손자 앞에서 밥상을 엎어 보셔요. 얼마나 재미난 일이 벌어질까요. 외손자 앞에서 할머니를 마구 꾸짖거나 거친 말을 뱉어 보셔요. 얼마나 재미난 일이 생길까요. 쓸쓸합니다.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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