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삶을 사랑하는 하루



  배가 한 척 가라앉았습니다. 배에는 오백 사람 가까이 탔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삼백이 넘었다고 해요. 배는 처음부터 와장창 무너지듯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아이와 어른 모두 걱정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배가 한참 기울고 나서야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바닷속에 잠긴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뒤집힌 배에 갇힌 채 바닷속에 잠겨야 한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배가 기우뚱하며 말썽이 생겼을 때에 왜 사람들을 재빨리 바깥으로 내보내어 살리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비가 내립니다. 사월에 내리는 비는 촉촉하며 포근합니다. 삼월에 꽃이 피었다가 진 매화나무에는 매화알이 푸르게 굵습니다. 매화나무에 이어 모과나무에 꽃이 피고, 모과나무에 이어 느티나무에 꽃이 핍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나 벚나무를 잔뜩 심어 봄꽃잔치를 하니, 벚꽃이 지면 마치 꽃이 다 진 줄 여기곤 하는데, 탱자나무는 요즈음이 한창 꽃철입니다. 탱자꽃이 질 무렵에는 찔레꽃이 피고, 찔레꽃이 질 무렵에는 밤꽃이 피어요. 사이사이 오리나무에 꽃이 피고 등나무에 꽃이 핍니다. 치자나무에 꽃이 피며 감나무에 꽃이 피어요. 겨울을 난 동백나무와 닥나무와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면,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꽃철입니다.


  마쓰나리 마리코 님이 그리고 고향옥 님이 옮긴 그림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청어람미디어,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기쁜 일이 있을 적에 조용히 숲에 가서 벚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고 합니다. 기쁜 마음을 담아 나무를 심고 기쁜 웃음으로 나무를 보듬으면서 기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쓰다듬으며 나무에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6쪽)” 하는 모습처럼, 늘 나무한테 말을 걸면서 하루하루 가꾸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가이 말을 걸 때에 나무가 더 푸르게 자랍니다. 우리가 웃음 어린 손길로 쓰다듬을 때에 나무가 더 굵게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가 곁에서 노래하며 즐겁게 뛰놀고 일할 때에 나무가 잎을 찰랑이면서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꽃도 이와 같아요. 따사롭게 웃으며 바라보면 꽃은 더욱 곱습니다. 풀도 이와 같아요. 따스하게 웃으며 톡톡 끊으면 더욱 맛있습니다. 사람한테도 이와 같을 테지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 적에 싫을 수 있을까요?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할 적에 거북할 수 있을까요? 깔깔 웃으며 이야기꽃 피울 적에 못마땅할 수 있을까요?


  꼭 사월 오일에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우리 모두 언제나 나무를 심어요. 기쁜 일이 있으면 씨앗을 얻어 들과 숲에 뿌려요. 늦봄에 모내기를 하면서 하하호호 웃어요. 도시에 살더라도 시골로 봄일을 거들려고 찾아가요.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나와 살림을 꾸린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마다 싱그러운 바람과 햇볕을 누리면서 함께 일하러 마실을 가요.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섭니다. 빗방울이 또르르 구르는 풀잎을 바라봅니다. 빗방울을 머금는 꽃송이를 톡 건드립니다. 이 비가 그치고 둠벙이 늘거나 논마다 물이 고이면 개구리가 즐겁게 알을 낳겠지요. 개구리알은 곧 올챙이로 깨어나고, 올챙이는 씩씩하게 자라 개구리로 태어나겠지요. 새로 깨어난 개구리는 여름에 흐드러진 노래잔치 베풀겠지요.


  열여덟 살이 되어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물여덟이나 서른여덟 살에 비로소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흔여덟이나 쉰여덟 살에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을 가로지르면 무척 시원합니다. 자동차로 들길을 달려도 즐거울 테지만, 자전거로 숲길을 달리거나 두 다리로 마을길을 걸어도 즐겁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새로운 삶을 느끼고 싶어 먼 뱃길을 달립니다. 과자 한 점을 사먹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면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동무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험공부에서 며칠 홀가분하고, 어버이 품을 떠나 동무들끼리 지내면서 삶과 사랑과 살림에 새롭게 눈뜹니다. 삶을 사랑하는 하루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하루입니다. 삶을 가꾸는 하루입니다.


  그림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나이들어 몸져눕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하고 숲마실을 가고 싶으나, 할아버지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는 홀로 숲으로 가면서 생각합니다. “벚꽃 산의 벚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할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많은 벚꽃, 벚꽃, 벚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22쪽).”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아이 손을 잡고 숲을 돌아봅니다. 멋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잔치를 바라보며 빙긋 웃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이제부터 참말 아이는 할아버지하고 숲으로 올 수 없습니다. 혼자 숲으로 와야 하고, 혼자 나무한테 말을 걸어야 합니다. 혼자 풀놀이를 해야 하며, 혼자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아이는 한 살 두 살 먹으며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마음이 맞는 짝꿍을 만나 살림을 꾸립니다. 어른 두 사람은 사랑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가 자라 다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새롭게 짝꿍을 만나 살림을 꾸릴 테고, 곧 아이를 사랑으로 낳겠지요.


  할아버지는 이녁 할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아 숲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가꾸어 이녁 아이한테 다시 곱게 사랑을 물려줍니다. 숲은 수많은 아이와 할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아 오래오래 푸르게 빛납니다. 수많은 아이와 할아버지는 숲에서 푸른 바람을 즐겁게 받아마시면서 한결같이 아름다운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가 그친 땅에서 봄풀이 새롭게 돋습니다. 유채꽃이 노랗게 한들거리는 둘레에 모시풀이 올라오고 쑥줄기가 활짝 벌어집니다. 차가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은 몹시 춥습니다. 차가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어버이도 매우 춥습니다.


  삶이 흘러 새로운 삶이 찾아옵니다. 사랑이 흘러 새로운 사랑이 피어납니다. 이야기가 흘러 새로운 이야기가 자랍니다. 시든 풀잎으로 누렇던 겨울들이 새로 돋은 풀잎으로 새빛이 됩니다. 풀씨는 긴긴 겨울을 견디어 봄에 하나둘 깨어나며 흙을 어루만집니다. 아픈 이들 눈가를 쓰다듬는 풀싹이고, 슬픈 이들 손을 꼬옥 붙잡는 풀꽃입니다. 마당 한쪽에서 자라는 흰민들레 꽃송이에 입을 맞추며 비손합니다. 4347.4.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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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처음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한 척 가라앉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날는지 지켜볼 일인데, 맨 처음 배에서 빠져나와 살아난 사람은 선장이고, 맨 처음 주검으로 나온 사람은 안내원이라고 한다. 맨 처음 배에서 빠져나와 살아난 사람은 다른 이들이 배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나도 돕지 않았고, 맨 처음 주검으로 나온 사람은 끝까지 다른 이들을 돕느라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맨 처음 빠져나와 살아난 사람은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을 못한다. 맨 처음 주검으로 나타난 사람은 얼굴 사진이 훤히 퍼지면서 ‘똑같이’ 아무 말을 못한다.


  두 사람 모두 ‘1등’이다. ‘1등 만능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두 사람은 저마다 다른 ‘1등’을 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나라에서 어떤 사람으로 자라야 아름다울까. 우리 어른들은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하고 꿈을 키울 때에 사랑스러울까.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릴 적에 곁님이나 나는 늘 ‘아이들 밥그릇’을 먼저 채워서 밥상에 올린다. 우리 어머니나 장모님도 언제나 아이들 밥을 먼저 퍼서 밥상에 올린다. 왜 그럴까? 왜 아이들 밥그릇을 어른들 밥그릇보다 먼저 퍼서 밥상에 올릴까?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이다. 사랑을 주면서 즐거운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처음에 받고 마지막에 받을 한 가지는 사랑이다. 어른들이 처음에 주고 마지막에 줄 한 가지는 사랑이다. 아픈 마음과 다친 마음에 따사로운 사랑이 깃들 수 있기를 빈다. 4347.4.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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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바느질 - 36.5℃ 손바느질 소품 37
송민혜 지음 / 겨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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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옷장에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떠 주신 스웨터가 아직까지 걸려 있어요.-머리말쪽

제 쓰임이 있는 소품들이라면 아이가 늘 곁에 두고 쓰면서 엄마 사랑을 담뿍 받을 수 있어요.-12쪽

느리게
한 땀 두 땀

빛깔 고르고
바늘땀 더하는 재미

손꽃 핀다.-17쪽

청 자투리를 밑으로 덧대고 위쪽으로는 해진 올을 그대로 살려 수를 놓았더니 꽃 한 송이 곱게 피었답니다.-31쪽

아이는 자르고 엄마는 바느질, 사이좋게 뚝딱.
안 입는 옷과 자투리 천으로 만든 장식줄.-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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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느질은 언제나 손바느질이었다. 글은 언제나 손글이었다. 빨래도 언제나 손빨래였다. 삶과 사랑과 꿈은 언제나 사람들 스스로 손으로 일구었다. 손질을 하고 손길을 보내며 손빛을 밝혔다. 집짓기와 밥짓기와 옷짓기를 스스로 놓거나 잃거나 잊으면서 손이 제구실을 잃는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언제나 우리 손으로 빚지만, 이제 손이 아닌 기계를 빌어 모든 것이 태어난다. 마음이 있으면 손이 아닌 발로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사랑을 담은 마음이라면 손이 아닌 기계를 쓰더라도 아름답다. 《처음 손바느질》은 바느질 가운데에서도 ‘손바느질’을 노래한다. 바느질노래라고 할까. 시집살이 아닌 ‘시집노래’이듯, 살림살이를 ‘살림노래’로 가꾸면, 이런 예쁜 책이 태어날 테고, 예쁜 책을 읽는 사람들 가슴에는 예쁜 씨앗이 자랄 테지. 4347.4.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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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바느질- 36.5℃ 손바느질 소품 37
송민혜 지음 / 겨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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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75) 존재 175 : 존재하지도 않는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최승자-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1984) 88쪽 〈시인〉


 존재하지도 않는

→ 있지도 않는

→ 드러나지도 않는

→ 나타나지도 않는

→ 보이지도 않는

→ 없는

 …



  말을 빚는 시인입니다. 말을 가꾸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한 마디 두 마디 알뜰살뜰 보듬어 말빛을 밝힙니다. 시인이 쓴 ‘존재’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있다’와 ‘드러나다’와 ‘나타나다’와 ‘보이다’를 모두 나타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말 ‘있다’를 쓰더라도 다른 느낌을 아울러 담아요. ‘보이다’를 쓰거나 ‘드러나다’를 쓸 때에도 다른 느낌을 함께 담습니다.


  한자말 ‘존재’를 써야만 깊거나 너르지 않아요. 시인 스스로 ‘있다’라는 낱말을 깊거나 너르게 다룰 수 있습니다. ‘보이다’나 ‘나타나다’라는 낱말을 새롭게 가다듬어 한결 환하게 선보일 수 있어요. 4347.4.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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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뼈를 /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실(實)은’은 “실제로는, 사실대로 말하자면”을 뜻합니다. ‘실제(實際)로’는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를 뜻하고, ‘현실적(現實的)’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는”을 뜻하며,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합니다. 이래저래 살피면 모두 돌림풀이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실은’을 ‘곧’이나 ‘그러니까’나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따지면’이나 ‘정작’이나 ‘참으로는’이나 ‘참말로는’이나 ‘이 땅에는’ 같은 말마디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뼈를”은 ‘-의’를 손질해서 “시간이라는 뼈를”이나 “시간에 있는 뼈를”로 손볼 만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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