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 이야기 1 - 세 어머니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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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4 ― 한 해를 통틀며 가슴으로 껴안는 책
 : 시모무라 고진, 《지로 이야기 1》



- 책이름 : 지로 이야기 1
- 글 : 시모무라 고진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09.4.24.)
- 책값 : 14000원



 (1) 올 한 해 나한테 가장 돋보이는


 한 해에 책을 한 권만 읽은 분들한테 ‘올 한 해 당신한테 가장 돋보이는 책’을 꼽으라고 여쭙기는 머쓱합니다. 그러나, 한 권을 읽든 열 권을 읽든 백 권을 읽든, 그 책 가운데 하나라도 마음을 움직였다면 우리한테는 아름답고 반갑고 훌륭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저한테는 어떤 책들이 지난 2000년부터 가슴을 파고들었는가를 곱씹어 봅니다. 지난 2008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 씀,달팽이 펴냄), 《니사》(마저리 쇼스탁 씀,삼인 펴냄),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폴 콜먼 씀,그물코 펴냄), 《도자기》(호연 그림,애니북스 펴냄), 《페르세폴리스 2》(마르잔 사트라피 그림,새만화책 펴냄),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씀,양철북 펴냄), 《음주가무연구소》(니노미야 토모코 그림,애니북스 펴냄) 들을 꼽습니다.

 지난 2007년에 나온 책 가운데 한 가지 책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 씀,달팽이 펴냄)와 《이 여자, 이숙의》(이숙의 씀,삼인 펴냄)를 꼽습니다(한 권이 아니고 두 권이군요). 2007년에 나온 그 어떠한 책도 이 두 권보다 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지 못했습니다. 2006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모이치 구미코 씀,한림출판사 펴냄)과 《낫짱이 간다》(김송이 씀,보리 펴냄)를 꼽습니다. 2005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씀,양철북 펴냄)와 사진책 《섬》(전민조 사진,눈빛 펴냄)을 꼽는데, 이와 함께 만화책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씀,야간비행 펴냄)가 참 좋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책에서는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 로이 씀,녹색평론사 펴냄)를 오래도록 곱씹었습니다. 2003년에 나온 책에서는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와 그림책 《꼬마 인형》(가브리엘 벵상 그림,열린책들 펴냄)이 한 해 내내 가슴을 채웠고, 2002년에 나온 책에서는 사진책 《역전 풍경》(김기찬 사진,눈빛 펴냄)과 환경문학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 씀,그물코 펴냄)을 손꼽습니다. 2001년에 나온 책을 돌아볼 때에는 1999년부터 나와서 모두 23권으로 마무리가 된 만화책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준코 카루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열 권과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열세 권이 아름다웠다고 느끼는데, 2001년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1권이 막 나오면서 자전거 사랑과 자전거 삶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들한테 보여주던 해입니다. 2000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야누스 코르착 씀,내일을여는책 펴냄)과 환경문학 《블루백》(팀 윈튼 씀,눌와 펴냄)만한 책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올 2009년을 놓고 돌아볼 때에는 《우애의 경제학》(가가와 도요히코 씀,그물코 펴냄)이나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숲속여우비 펴냄)나 《흐느끼는 낙타》(싼마오 씀,막내집게 펴냄)나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필립 퍼키스 말,안목 펴냄)가 돋보인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가운데 《아돌프에게 고한다 1∼5》(데즈카 오사무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리틀 포레스트 2》(이가라시 다이스케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현미선생의 도시락 1》(오사무 우오토 그림,대원씨아이 펴냄)가 퍽 좋았습니다. 《민들레솜털》(오자와 마리 그림,북박스 펴냄)이 올해에 3권과 4권이 번역되어야 했을 텐데 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가만히 보면,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13권까지만 번역이 되고 14권부터는 나오지 못합니다.

 2009년에 제 마음속에 파고든 좋은 책을 더 든다면, 여기에 《지로 이야기》 1ㆍ2ㆍ3권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빈센트 반 고흐 글,아트북스 펴냄)를 들고 있는데, 누군가 이 가운데 한 권을 다시 추린다면 어느 책이냐고 여쭐 때에는 《지로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628쪽(1권) + 564쪽(2권) + 372쪽(3권)으로 이루어진 긴 소설인 《지로 이야기》는 자그마치 1564쪽이나 되는 두툼한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이 책은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바람에 이만한 부피로 끝났지, 글쓴이가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면 훨씬 길었겠지요.

 무척 긴 이야기라 할 만하지만, 저는 아기 기저귀를 빨고 어르고 달래면서 《지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기를 겨우 잠재운 깊은 밤에 조용히 일어나서 읽고, 새벽나절 빨래를 하고 나서 읽으며, 아기 죽을 끓이는 부엌에서 읽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하고, 전철간에서도 이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밖에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글,달팽이 펴냄)와 《희망을 여행하라》(이혜영과 임영신 글,소나무 펴냄)와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글,양철북 펴냄)을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바지런히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느꼈습니다. 제 손이 짧고 머리가 짧으며 생각이 짧은 탓에 더 많은 좋은 책을 더 널리 제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습니다. 읽거나 훑거나 살핀 책은 천 권이 넘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다문 한 권이라도 금세 떠올릴 수 있는 책이 있던 해라고 생각하니, 2009년 한 해 책읽기 또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지난 열 해를 거슬러 보면서 기쁩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읽은 책들을 앞으로 우리 딸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 식구한테 돈은 없으나 좋은 마음밥이 있는 셈이니 괜찮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돈벌이가 시원치 못하나 마음나눔은 흐뭇하게 한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고 책만 들여놓고 있는 이 터전을 언제까지나 고이 이어가고 싶습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하느라 말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을 늘리지 못했는데, 새해에는 옆지기와 아이한테 좀더 말을 걸고 좀더 깊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작은 조각틈을 내어 책 하나하나 알뜰살뜰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2) 《지로 이야기》라는 푸름이문학


 2009년 봄에 모두 세 권으로 옮겨 나온 《지로 이야기》는 일본에서는 1부부터 5부까지 따로따로 나온 판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다섯 권으로 나온 책이요,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 권으로 나온 셈입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몸이 아파 자리에 드러누운 탓에 뒷이야기를 꾸준히 이어쓰지 못했으며, 모두 7부로 마무리를 짓고자 했던 《지로 이야기》는 그만 5부를 끝으로 더는 쓰지 못했습니다. 5부를 마치고 나서 글쓴이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선뜻 이 책을 집어들기 어렵다 말할 수 있지만, 《지로 이야기》는 1부부터 5부까지 모두 ‘독립되어’ 있습니다. 세 권짜리로 나온 우리 나라 판 또한 1권과 2권과 3권이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지로’라고 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조금씩 철이 들고 세상을 읽는 눈썰미를 키우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모습이 권마다 달리 펼쳐집니다. 1권만 읽든 3권만 읽든,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과 얼’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1부와 2부를 하나로 묶은 《지로 이야기 1》인데,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1942년 5월 5일, 2부를 마무리짓고 낱권책으로 펴내면서, “첫 권에서 나는 운명의 아들인 지로의 성장을 그리면서 주로 ‘교육과 모성애’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주제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의 생활 대부분은 오히려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같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다뤄졌다. 그러나 제 2부에서 지로는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지로는 여전히 모성애를 갈망하는 운명의 자식으로서 세상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문제의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지로 자신이다. ‘자기 개척자로서의 소년 지로’,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인 셈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이 글은 번역책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에만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 1》에서는 ‘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어머니 마음이란 무엇인가’와 ‘나를 낳아 키운 어머니와 둘레 사람과 터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을 푸름이한테는 ‘우리 엄마 아빠란 분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끼는가?’ 하는 궁금함과 ‘나는 내 어버이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꾸려야 하는가?’ 하는 걱정을 돌아보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을 어버이한테는 ‘나는 얼마나 어버이다운 매무새로 우리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는가?’ 하는 돌아봄과 ‘나는 내 아이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자라서 아이를 낳기까지 나를 돌보고 키운 내 어버이를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하는 되새김으로 지나온 발걸음을 생각하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 갈래로 나눈다면 ‘푸름이 문학(청소년 문학)’이 될 《지로 이야기》인데, 갈래는 문학이지만 속에 담은 이야기와 줄거리와 넋은 문학이 아닌 삶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살아낸 이야기요, 지은 이야기가 아닌 살아갈 이야기입니다.

 그저 재미 삼아 뒤적거리는 읽을거리가 아니며, 한낱 시간 죽이기로 훑을 읽을거리가 아닙니다. 성장소설이라든지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책입니다. 따로 추천도서나 권장도서로 묶을 만한 책 또한 아닙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자네는 그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같은 꾸지람까지 들으며 이 책을 써냈는데, ‘내 삶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일 때에 쥐어들 《지로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내 삶이 아이 앞에서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되새기고자 할 때에 읽을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 가슴에 따순 사랑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에, 내 가슴에 깃든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 이웃과 동무를 따사롭게 껴안고 싶을 때에 읽는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가 걷는 이 한길이 얼마나 나와 내 식구와 이웃을 옳게 북돋우며 곱고 맑은 빛을 비추는가를 살피고 싶을 때에, 내가 걷는 이 한길이 내 밥그릇만 챙기려는 노릇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을 때에 펼칠 《지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길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한테 마음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생각동무, 슬기동무, 넋동무, 삶동무로 곁에 놓을 책이라 하겠어요.

 “너희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대로 앙갚음하겠다는 거냐.”

 시모무라 고진 님은 당신 삶을 비춘 좋은 사람으로 세 사람을 꼽고, 이 가운데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첫손이라고 꼽습니다. 젊은 날,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학교식당에서 ‘혼자 밥을 왕창 먹어 다른 사람이 굶게 되었을 때에, 혼자 밥을 왕창 먹은 동무를 골탕 먹이겠다고 하는 동무들 앞에서 읊은 한 마디’가 시모무라 고진 님한테 오래도록 남았다는데, 앙갚음이란 사람이 걸을 길이 아니겠지요. 사람이 걸을 길이란 앙갚음도 아니지만 미움도 아닐 테며, 내 밥그릇을 홀로 단단히 움켜쥐는 일도 아니리라 봅니다. 사람이 걸을 길이란 내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거나 훌훌 놓는 일이며, 콩 한 알을 두 쪽 세 쪽으로 나누는 일입니다. 돈이 넘쳐나게 있어야 이웃나눔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는 빈털털이라고 이웃나눔을 할 수 없겠습니까. 내 몸이 튼튼하다고 이웃사랑을 널리 펼치겠습니까. 내 몸이 여리고 아프다고 이웃사랑을 하나도 못 펼치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여 내가 똑똑하고 슬기로와서 내 이웃한테 기쁨과 보람을 두루 나누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거나 몇 권 안 된다고 내가 어리석고 철딱서니없어서 내 이웃한테 아무런 기쁨과 보람을 골고루 나누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문학은 이 문학을 일구는 사람 넋이요 얼이며 삶입니다. 늦깎이에 소설을 쓴다고 못난쟁이일 수 없으며 이들을 못난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슬픈 못난쟁이입니다. 시를 쓰든 수필을 쓰든 소설을 쓰든 한동아리입니다. 글을 쓰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연기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한 흐름입니다. 문학을 하건 예술을 하건 농사를 짓건 노동을 하건 한 갈래 길입니다. 대통령이건 기자이건 운동선수이건 고기잡이이건 교수이건 애 엄마이건 한 삶입니다. 높고 낮음이 아닌 곱고 미움으로 들여다볼 삶매무새입니다. 있고 없음이 아닌 맑고 더러움으로 살펴볼 삶자락입니다. 곱고 맑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안 난 애 엄마이건 애 아빠이건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밉고 더럽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크게 난 대통령이나 운동선수이건 하잘것없을 뿐 아니라 부질없는 사람입니다.

 우리한테는 사람다운 사람인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내 이웃 앞에서 사람다운 사람인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이웃을 찾을 노릇이고,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사람으로 늘 새로워지도록 삶을 추슬러야 합니다. 《지로 이야기》는 내가 더욱 나다우면서 사람된 길을 잘 갈무리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손을 내미는 반갑고 살가운 이슬떨이가 되어 줍니다.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내 삶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나 스스로 놓지 말라고 다독이고 말을 걸며 웃음지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고맙고 믿음직한 스승이 되어 줍니다.


 (3) 한 줄 두 줄 곱씹어 되읽기


 628쪽에 이르는 《지로 이야기 1》를 여러 번 곱씹어 되읽습니다. 밑줄을 긋고 찬찬히 거듭 읽은 이야기를 다시금 하나하나 옮겨 적어 봅니다. 눈으로 읽을 때하고 소리내어 읽을 때하고 다르며, 밑줄을 그으며 읽을 때하고 손으로 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자로 옮겨 적을 때하고 다릅니다. 읽으며 가슴에 무언가 울린 책이라 한다면, 이렇게 타자나 손글씨로 옮겨 적습니다. (4342.12.31.나무.ㅎㄲㅅㄱ)


[13, 49쪽] 하지만 좋은 시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지로가 행복하게 산 것만은 아니었다 … 다다미방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데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오타미(지로 엄마)였다. “너, 정말 …….” 오타미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 뒤 지로는 밥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타미가 늘어놓는 끝없는 설교를 또 들어야만 했다. “여긴 네가 태어난 집이란 말이다.” 오타미는 지로가 어제 밤새도록 들었던 내용과 똑같은 설교를 했다. “우린 비록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어엿한 무사 가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이 말도 어제 귀가 따갑게 들었다. 지로는 도대체 무사 집안이 어떻다고 오타미가 입만 열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63쪽] “끈적끈적한 이 녀석 몸이 갑자기 내 몸에 닿아서 깜짝 놀랐어.” 슌스케(지로 아빠)는 지로가 기댔던 자기 옆구리를 부채 끝으로 훑어내렸다. 지로는 이상하게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로는 누워서 지그시 아빠를 쳐다보았다. 오타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에요.” “뭐가?” “세상에 자기 자식보고 더럽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그러면서도 아버지로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것과 이것은 다르잖아? 바보 같은 소리하네.” “아빠들은 그게 문제예요. 자기 혼자 아이를 귀여워하는 척하다가도 금방 아이한테 상처를 입힌다니까.” “그런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 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억지 이론만 늘어놓고 있는 거 아녜요?”

[108, 120쪽] 새해가 밝았다. 사랑받는 자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에게도 시간만은 공평하게 찾아왔다 … 친구들 사이에서 지로는 나무를 가장 잘 타는 아이로 이름났다. 돌팔매질도 잘했고, 수영도 물고기처럼 빨랐다. 잠자리 잡는 것과 붕어 낚시, 미꾸라지 낚시도 따라올 아이가 없었다. 동네에서는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만 빼고 언제나 맨발로 돌아다녔다. 지로는 학교에 다니면서 문명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야생의 자연인이 되는 것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118∼119쪽] “하나만 물어 보지. 지로가 자네 아들이 (이빨로) 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어떻게 되다니요? 뭐가요?” “지로 말일세. 지로가 오늘 기타로를 물지 않았다면 지로는 일 년 내내 기타로에게 시달릴 거야. 한번 생각해 보게. 무릎을 물리는 것과 어린 시절의 비겁한 추억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이 더 큰 상처라고 생각하나? 자네도 두목 소리를 듣고 있는 사나이인데 내가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른다고는 못할 걸세.” … “매실장아찌만 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 어느 부모가 참을 수 있겠나. 나도 지로가 개처럼 사람을 물어뜯었다는 얘기를 듣고 잘못 가르친 것 같아 부끄러웠네.” 슌스케는 또 개라고 표현했다. 지로는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한 번 훑었다. “사실은 나도 기타로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자네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어. 그리고 치료비도 물어 줄 작정이었다네. 그런데 자네 태도가 틀렸어. 우리 집사람한테 돈을 안 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것도 좋아.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치지. 화가 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돈을 준 것을 기타로가 알아보게. 또 지로가 그 얘길 들어 보게.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여보게 쇼하치. 자네나 나나 자식들만큼은 돈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는 떳떳한 사람으로 키우세.”

[130쪽] ‘앞으로 엄마나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무조건 무시할 거야. 형에게 덤비는 게 나쁘다면서 슌조가 나한테 덤빌 땐 왜 야단치지 않지? 동생에게 져주는 게 형이라면서 교이치가 나를 때리는 것은 왜 말리지 않지? 엄마랑 할머니는 틀렸어. 엄마랑 할머니는 내가 맞는 것을 봐야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엄마나 할머니가 같이 기뻐해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고.’

[149, 157쪽] 그 뒤 지로의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물론 지로가 십자가를 짊어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로는 아직도 슌조를 사랑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슌조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이 연민은 지금까지 적대적이었던 슌조를 자기보다 한 단계 낮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지로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 그러나 단 한 가지, 차별만큼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차별을 받으면 받을수록 겉으로는 냉정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는 엄청난 분노가 회오리치게 된다.

[203쪽] “지로, 부탁이야.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되는 거야. 알았지?” 하루코의 뺨이 지로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지로는 따스한 기운에 휩싸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눈물이 방울방울 무릎 위에 떨어졌다. “오하마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228, 233쪽] 외할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너희 집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될지 모른단다.” 외할아버지의 말은 지로의 가슴을 쿡 찔렀다. 움직이지 않는 별과 타닥거리는 짚신 소리가 자신의 처지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로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란 마음이 가장 중요하단다. 마음만 올바르면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단다.” … 외할아버지는 마을 앞에 다다르자 다시 말을 꺼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네 아빠처럼 누구라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다. 아빠가 오늘 집안에 보관해 두었던 귀한 물건들을 내다판 것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느라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너도 아빠처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니? 네 마음속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다음에 커서도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314∼315쪽]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게 불편하시면 진작부터 병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은 하시지 말았어야죠.” 마사키 외할머니가 일부러 빈정거려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혼다 할머니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할머니는 서둘러 마사키 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싸늘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 “그래도 지로만은 언제나 엄마 곁에 있어 주는구나.” 대여섯 살 때부터 보아 온 엄마의 얼굴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로는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엄마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의 두 눈은 오하마나 하루코, 마사키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연못에 잠긴 달빛처럼 조용히 지로를 보고 있었다.

[322쪽] “지로 많이 컸지요?” “예,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내가 이 아이하고 유모한테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지요. 나도 다 알아요.” “에그, 무슨 그런 말씀을 …….” “어렸을 땐 그저 귀여워해 주면 되는데 …….” 오하마는 오타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오타미의 심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이제야 겨우 알았어요. 헤어질 때가 돼서야 알았으니 …….” “작은 마님, 무슨 말씀을 …….” “죽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다만 지로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요. 이대로 죽으면 지로에게 …….” “그만 하시래도요!” “날마다 지로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에구머니나 …….” 지로도 이때쯤에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407, 421쪽] “지로는 아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행복하겠구나.” ‘행복’이라는 낱말이 지로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로는 늘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고, 둘레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여기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하루 무사히 버틴다는 심정으로 순탄하지 않은 환경을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날들이 모두 그랬다. 지로는 곤다와라 선생님이 말하는 지로는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 “나만 귀여워해 주고 넌 귀여워해 주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할머니가 너한테 하는 걸 보면 더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지로는 교이치(지로 형)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교이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지로는 교이치가 자신을 동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공평한 것이 형제 간의 우애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바람직한 일인지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이 찾아헤매는 정의와 배부른 사람이 말하는 정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의 괴리는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보지 않는 한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556쪽] 지로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크게 실망한 사람들은 그런 친구들보다 선생님들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 가운데 곤다와라 선생님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은 소학교 선생님들보다 자기 과목에 대한 전문 지식이 좀더 많을 뿐, 인간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래전에 배운 지식을 오늘날까지 교실에서 쥐어짜 내야 하는 선생님들이 안쓰러울 때도 많았다. 더구나 점수와 처벌로 학생들을 위협하는 것이 교사의 권위라고 착각하는 선생님들을 볼 때면, 안쓰러움을 넘어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였다. 학교에 볼모로 붙잡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루한 표정을 하고 복도를 서성이는 인간들, 지로는 그것이 중학교 선생님들이라고 생각했다.

[606쪽]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규정한다고 믿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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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글을 올려주시네요.
된장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바람드리의 라무 높새바람 22
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2] 류은, 《바람드리의 라무》



 우리 나라만큼 말과 탈이 많은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다고 느끼는 하루하루입니다. 나라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수십 수백 조를 벌어들인다는 큰 회사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여느 어른들이나 한결같이 ‘세계 시대’와 ‘지구 시대’와 ‘우주 시대’를 들먹이지만, 2010년을 코앞에 둔 오늘까지도 이 나라 어른들은 아직도 ‘중고등학생 머리길이와 치마길이’에 목매달고 있거든요.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아이들 머리길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겠습니까. 지구 어디에서 아이들 치마길이나 옷매무새를 놓고 시끌벅적 말이 많겠습니까. 아이들한테 술담배를 하지 말라지만 어른들은 술담배를 즐깁니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사랑놀이를 하다가 아기를 배는 일이 나쁘다고 하면서, 어른들은 으레 바람을 피우고 두다리나 세다리를 걸치는 한편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바로 청소년이 아닌 어른입니다. 우리가 일컫는 청소년범죄란 하나같이 어른범죄를 시늉하는 꼴인데, 어른범죄 푼수와 견주면 얼마 안 됩니다. 어른 스스로 푸름이 앞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니, 푸름이가 보고 배우는 모습이란 범죄요 성폭력이요 욕지꺼리요 돈과 이름값과 주먹힘에 목매다는 꼴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공자님 말씀을 읊든 하느님 말씀을 읊든, 말로 읊는 매무새가 아닌 몸가짐으로 바르게 서며 살림을 꾸리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옛말에 맹자 엄마가 집을 세 번 옮긴다고 했는데, 맹자 엄마가 집을 옮겨다닌 까닭은 ‘아이들이 엉터리’라서 아니라, 마을 터전을 이루는 ‘어른들이 엉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이 어떻고 어디는 또 어떠하고 같은 이야기는 한결같이 어른들이 빚어냅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고스란히 아이들한테 옮아갑니다. 우리 삶터는 어른들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고, 맑은 물과 깨끗한 바람이 사라진 우리 터전 또한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릴 적에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어떠했다고 추억어린 이야기를 들추지만, 우리 아이들한테도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실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추억만 떠듭니다. 아이들한테 자연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우리 자연을 깨끗하고 싱그럽게 가다듬는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더 큰 자가용을 뽑고, 가까운 길도 자가용을 끌며, 갖가지 전기제품과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 누립니다.


.. “…… 놓아 줄까요?” “허허허! 네가 잡았으니 결정도 네 몫이지.” 카알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야. 먼저 토끼는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라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  (18쪽)


 어린이문학이나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이나, 모두 어른이 빚어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노래나 청소년노래나 어른노래나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가 보는 영화나 연극이나 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에 나와 어른들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춤노래가 귀엽거나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데, 아이들이 어른들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는 ‘말잘못 하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어렵거나 딱딱한 말을 써서도 안 됨’을 살갗으로 느끼며 다소곳하게 제 몸가짐을 갈무리하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코앞에 있어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는 어른이 많고, 아이들이 눈앞에 안 보이면 아주 망나니처럼 막 나가는 어른이 많습니다.

 옳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어른도 꽤 있습니다. 그렇지만, 옳고 바르게 삶을 꾸리고 생각을 가누며 말글을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을 하는 어른들은 삶과 넋과 말이 어떠합니까?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른이나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일하는 어른은 어떠하지요? 인터넷에서 ‘어린이 청와대 누리집’은 쉽고 바르고 알맞게 말글을 가다듬으려 한다면, ‘어른이 보는 청와대 누리집’은 어떠합니까? 아이들 앞에서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이 있겠습니까?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을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들 밥상에 얄딱구리하거나 화학약품으로 찌든 찬거리를 올릴 수 있습니까? ‘어른은 먹어도 돼’ 하는 마음을 ‘아이들도 한두 번 먹을 때에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지는 않습니까?

 말만 예쁘장하다든지, 이야기만 놀랍다든지, 짜임새는 판타지로 꾸민다든지, 줄거리는 웃음이나 눈물이 묻어나는 재미난 글감이라든지 한다고 해서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가르침이 있느냐 없느냐로 어린이문학을 가르지 못합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우리 어른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삶입니다. 우리 어른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가 하는 꿈입니다. 우리 어른이 잘 살건 잘못 살건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뉘우치거나 되씹는 가운데, 우리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빛줄기입니다.


.. 유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진 (괴물) 로스를 막다가 돌아가셨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로스를 조종한 검은 복면이 다시 온다고 했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  (145쪽)


 밤새 밀린 일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마무리를 지을 무렵 아기가 깨어납니다. 아기는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하는 아빠 곁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다닙니다. 말이 늦은 아기는 아빠 곁에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아빠는 빨래를 할 때에 아기보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다그칩니다. 겨울철이라 빨래하는 씻는방이 춥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춥건 말건 곁에서 빨래하기를 지켜보며 물놀이를 하고파 하는데 못내 서운해 합니다. 아빠 눈에 걱정스러운 모습이 아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빨래를 마칠 무렵 아기는 잠이 듭니다. 새벽 여섯 시부터 깨어 있던 아기이니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잠들 만합니다. 또한, 우리 아기는 낮잠을 살짝 자거나 안 자고 넘긴 다음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엄마 아빠하고 놀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아기하고 어울리고 있다 하여도 날마다 지칠밖에 없습니다. 귀엽고 예쁜 아기이지만, 늘 곁에서 돌보고 보듬어야 하니 고단할밖에 없습니다.

 옆지기는 때때로 말합니다. 아기가 이 나이에는 우리 곁에서 잠깐도 안 떨어지려고 하지만, 기껏 열 살까지 이런 삶이 이어가겠느냐고. 어른들이 아기는 열 살까지만 효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아기(아이)가 효도한다는 일이란, 엄마 아빠 곁에서 안 떨어지면서 지낸다는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잠든 아기와 옆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빠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바깥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낮과 저녁은 엄마 혼자 아기와 씨름을 하며 듬뿍듬뿍 ‘효도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 앞서 읽어낸 어린이문학 《바람드리의 라무》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바람드리에 사는 라무라고 하는 아이는 둘레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둘레 어른들한테서 좋은 모습도 보고 얄궂은 모습도 보면서 컸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며 좋은 뜻을 품다가는, 얄궂은 모습을 보며 저 스스로도 얄궂은 쪽으로 기울듯 말듯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어른들 곁에서 지내며 라무 스스로 착하고 아름다운 목숨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도 하지만, 못나고 뒤틀린 어른들 곁에서 시달리고 들볶이면서 자칫 마음이 다치거나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라무 앞에 좋은 동무가 나타나 주었습니다. 또래동무로 좋은 동무이든, 나이가 많은 어른동무로서 길동무이든.


.. 수야는 하르진에게 밥이 든 큰 그릇을 건네고 하르진의 손을 잡았다. 수야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이렇게 손이 따뜻한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  (213쪽)


 좋은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가리킬까 헤아려 봅니다. 널리 사랑받는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두고 이야기할까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어른이 아이한테 혼자 읽으라고 건넬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고, 어른이 아이한테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즐겁게 읽어 줄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지요.

 그러나, 읽는 재미나 즐거움에 앞서, 작품에 깃든 어른들 삶자락이 아름다워야 좋은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읽히는 기쁨과 보람에 앞서, 작품에 서린 어린들 넋과 얼이 싱그럽고 맑고 착해야 비로소 훌륭한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예부터 이원수 어린이문학이나 임길택 어린이문학이나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높이 여긴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린이문학 평론을 알뜰히 여기며 고맙게 돌아보는 까닭 또한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창작하거나 비평을 하는 어른은, 말재주와 논리와 줄거리에 앞서 말과 넋과 삶이 살갑고 튼튼하며 고운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바람드리의 라무》를 써낸 분께서는 이 대목을 조금 더 깊이 살피고 널리 감싸안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12.29.불.ㅎㄲㅅㄱ)


 ┌ 《바람드리의 라무》(바람의아이들,2009)
 ├ 글쓴이 : 류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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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의 땅 - The Unrooted - 1991-2005, 성남훈 사진집
성남훈 지음 / 눈빛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9] 성남훈, 《유민의 땅》



- 책이름 : The unrooted 1991-2005, 유민의 땅
- 사진 : 성남훈
- 펴낸곳 : 눈빛 (2005.12.29.)
- 책값 : 5만 원



 (1)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2005년 12월에 1쇄를 찍은 사진책 《유민의 땅》은 2007년 11월에 2쇄를 찍습니다. 나라안 사진책이 2쇄를 찍는 일이 드문데, 《유민의 땅》은 고작 이태 만에 2쇄를 찍었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추켜세울 뿐 아니라, 이름이 제법 높은 분 사진책임을 헤아린다면, 흔한 말로 ‘필터 하나 값’밖에 안 되는 5만 원짜리 사진책 《유민의 땅》이 2쇄밖에 못 찍은 일은 슬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만한 필터는 5만 원뿐 아니라 7만 원도 하고 10만 원이 넘기도 합니다. 필터 아닌 다른 부속이나 장식품은 훨씬 비싸곤 합니다. 저로서는 사진기하고 필름 두 가지만 사지 다른 어떠한 부속이나 장식을 더 사지 않으니 잘 모릅니다만, 곁따르는 물건이 제법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살핀다면, 사진책이 참 안 팔리는 모습이 슬픕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장비를 사고파는 누리집하고 가게만 있지, 사진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책방이 없는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진책이라 한다면 ㄱ문고나 ㅇ문고 같은 책꽂이뿐 아니라 웬만큼 큰 사진관 한켠에 책시렁을 마련해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을 보아야 사진 찍는 눈썰미’를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만, 사진 한 장으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사진 한 장으로 우리 마음을 따뜻히 감싸안을 수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사진을 더 즐겁고 알차게 가꿀 수 있거든요.


.. 앞으로 5년 정도 저널리즘에 천착하고자 한다면 분명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집 《유민의 땅》이 출간되는 시기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5년 간 단 한 순간도 인간과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최소한 5년 간 분명한 사진의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 《유민의 땅》은 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90쪽)


 택시 탈 일이 거의 없는 제 삶인데, 어찌하다 보니 서울에서 인천으로 몇 번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만 돌아다니면 지하철이 늦게까지 있으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일찍 끊깁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달리니 4만 1천 원 안팎이 나옵니다. 택시삯을 치르며 ‘이 돈이면 책이 몇 권인가?’ 하고 되뇌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데,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유민의 땅》 같은 사진책을 한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헌책방마실을 하며 ‘世界の文化史蹟’ 가운데 하나로 나온 《マヤの神殿》(講談社,1968) 하나를 장만했습니다. 1968년에 나온 책값으로 2500엔인데, 헌책방에서는 고작 1만 5천 원에 팔았습니다. 자그마치 마흔 해가 묵은 사진책입니다만 인쇄 품질이나 사진결이나 얼마나 대단한지, 1만 5천 원이든 2500엔이든(예전 값이지만) 더없이 값싼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진책이 헌책방에 자주 들어오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장만해 놓고 있는데, 택시삯 4만 원이면 몇 푼 얹으면 이만한 놀라운 사진책을 세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서울 혜화동에는 〈이음책방〉이라고 하는 인문예술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가면 ‘PHAIDON’에서 펴낸 손바닥 사진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습니다. 자그마한 판으로 퍽 값싸게 묶은 이 사진책들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달린 택시삯으로 네 권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꽤 괜찮은 필터 하나 사는 데에 들이는 값이면 좋은 사진책 하나를 살 수 있기도 하지만, 필터를 사지 말자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요사이는 필름값이 무척 올라서, 제가 쓰는 필름(일포트 델타 프로페셔날 400)은 한 통에 7500원씩 합니다. 제가 쓰는 필름으로 치자면, 이 필름 여섯 통 값이면 《유민의 땅》 한 권이 나옵니다. 필름 여섯 통을 덜 사면 좋은 사진책 한 권을 마련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한 해가 끝나는 요즈음 크고작은 갖가지 술자리가 많다는데, 웬만한 술자리 한 번 치르며 나가는 돈은 몇 만 원씩 됩니다. 예부터 익히 떠도는 말인데, 술자리 한 번 줄이는 값이면 《유민의 땅》에다가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한 권을 더 장만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이래저래 나가는 돈을 줄여서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이래저래 나가는 대로 돈을 쓰면서도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려고 용쓰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그 어느 데에도 돈을 안 쓰면서 사진책만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사진책은 꿈같은 소리로 여기며 눈을 감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집하고 가까운 도서관에 사진책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면서 도서관마실을 하며 사진책을 읽는 일이 좋을까요.


.. 다른 사람들도 제 사진에 ‘변화’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앵글의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요즘 제 사진에 대한 문제점과 그 원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가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작업 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저도 제가 가는 길과 제가 얻으려 하는 사진에 대해서 많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좀더 저널리즘 쪽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  (290쪽)


 보름쯤 앞서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눈빛,2007)을 장만했습니다. 2007년에 2만 원 값으로 나온 책인데 2009년 눈높이로 돌아보자니 책값 2만 원은 퍽 싸다고 느꼈습니다. 2005년에 나온 전민조 님 사진책 《섬》(눈빛,2005)은 책값이 1만 5천 원입니다. 2005년에 이 사진책을 살 때에도 그리 비싸다고는 느끼지 않았으나 이무렵 1만 5천 원에 나온 사진책이 요즈음에는 3만 원을 달고 있습니다. 더욱이 《섬》은 156쪽인데 《낙동강》은 110쪽입니다.

 사진책을 ‘어떠한 사진이 어떻게 담겨 내 마음을 건드리느냐’가 아닌 돈값과 쪽수와 크기로만 따지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사진책도 똑같은 책인 만큼 이런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사진책 값이 퍽 비싸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 사진책들이 참으로 비싼지, 비싸다면 얼마나 비싼지를 곰곰이 따져 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책은 한 번 슥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닙니다. 내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한다는 사진책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100번은 다시 넘기는 책입니다. 참 좋았던 사진책이라면 1000번을 되읽습니다.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책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종이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추다가는 나중에 ‘깨끗하게 간수할 판’으로 하나 더 사 놓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섬》 사진책이 두 권 있습니다. 전몽각 님이 담은 《윤미네 집》도 두 권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포토넷’ 출판사에서 새로 찍는 《윤미네 집》까지 주문해 놓았습니다. 이들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주머니가 한꺼번에 아주 얇아진다고 느끼지만, 주머니가 얇아져 살림돈이 바닥나 버리더라도 제 가슴에는 뭉클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가득 넘치기 때문에 기꺼이 거듭거듭 장만해서 새로 보고 새삼 보며 새록새록 되새기며 봅니다.


 (2) 성남훈 님이 사진으로 담은 삶


 2005년에 《유민의 땅》을 내놓은 성남훈 님은 1993년에 《꿈꾸는 들녘》을 내놓았고, 1996년에 《소록도》를 내놓았으며, 2000년에 이상엽 님과 함께 《No War No Cry》를 내놓은 다음,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을 내놓습니다. 2005년에 내놓은 《유민의 땅》은 그동안 일군 사진 열매를 한 자리에 그러모은 작품이라 할 수 있어, 예전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많이 다시 실었습니다. 다만, 《유민의 땅》에 실린 ‘달동네 아이들’ 모습은 따로 묶어 놓은 작품들이 아닌데, 성남훈 님이 당신 나름대로 바라본 낮은자리 달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앞으로도 좀더 꾸준히 담아서 한 자리에 그러모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요즈음에는 ‘연화지정’이라는 사진감을 잡아서 동티베트땅에서 불교를 배우는 비구니를 사진으로 담고 있습니다.


.. 파리로 곧장 가지 못하고, 파리 근교의 지방도시에서 어학원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특히 이국적인 풍경을 접하면서 순수풍경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루빨리 파리로 들어가 사진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더군요. 점점 마음에서 패션 사진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파리로 가서는 브레송, 드와노의 사진 같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도회지풍의 전형적인 프랑스 사진이 마음에 자리잡았습니다 ..  (287쪽)


 사진책 《꿈꾸는 들녘》부터 《유민의 땅》까지 두루 살피면, 《소록도》 한 권과 《유민의 땅》에 실린 이 땅에서 떠돌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삶 몇 칸을 빼놓고, 성남훈 님은 늘 나라밖 떠돌이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추고 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나라안 떠돌이보다 나라밖 떠돌이가 더 많습니다. 세계가 한울타리라고 하는 물결에서 나라안팎을 굳이 따지는 일은 덧없습니다. 성남훈 님은 나라밖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아내지만, 이들 떠돌이 발자취는 ‘우리 나라하고는 아무 끈이 안 닿는’ 사람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 삶이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와 다를 바 없었고,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가 이렇게 살아가게 된 까닭에는 우리 나라 흐름도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 못나거나 게으르거나 잘못했기에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겠습니까. 이리 휩쓸리고 저리 쫓겨나는 까닭이 당신들 스스로 애쓰지 않은 탓이겠습니까. 프랑스 파리 변두리 루마니아 난민은 어쩌다가 제 고향마을이 아닌 파리 변두리에서 목숨줄을 잇고 있습니까. 아프가니스탄과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은 왜 제 집자리를 잃거나 빼앗기며 서로 총을 들고 싸워야 하겠습니까. 이들이 손에 쥔 무기는 누가 만들었고, 이들이 조용하게 살던 터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고, 아프가니스탄에 또다시 군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엇을 노리고 나라밖으로 군대를 보내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나라가 나라밖에 군대를 보내는 일에 얼마나 눈을 두거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 나라 안에는 수없이 많은 전투경찰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무기를 갖추어 든 채 한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전투경찰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남녘과 북녘은 수십만 군인을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다툼질을 하도록 부추기는데, 남북녘 젊은이들은 왜 낯모르고 이름모르는 한겨레한테 총부리를 겨누면서 서로를 윽박질러야 하겠습니까.


.. 제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나 깊은 성찰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사진가의 사진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 사진가가 암병동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도 연극이나 영화처럼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  (288쪽)


 성남훈 님 《유민의 땅》은 제 삶터를 잃거나 앗긴 사람들이 어느 땅에 어떻게 서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꾸밈없이 보여주지는 않고 ‘꾸며진’ 대로 보여줍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억지스레 꾸미는 삶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내쫓거나 들볶으면서 이들한테 ‘꾸며진’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 땅을 잃거나 앗겨야 하는 사람들이 낯설고 물선 땅에서 무엇을 꿈으로 삼으며 목숨줄을 이어야 하는가를 갈피 잡기 어려운 삶을 성남훈 님 눈길이 넌지시 곁눈질을 하면서 담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떠돌이가 아닌 ‘떠돌이를 찾아다니는 성남훈’ 님입니다. 그래서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입니다. 그러나, 곁눈이라고 하여 어설피 스쳐 지나가는 눈길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로 바라보는 눈길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일 수 없는 성남훈 님 눈길입니다.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으로 떠돌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왜 이들은 떠돌이가 되어 제 터전이 아닌 자리에서 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제 삶터가 아닌 데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을 깨닫습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한테 눈물도 많으나 웃음도 많고, 고단함과 아픔도 많으나 즐거움과 사랑스러움도 깊음을 배웁니다.

 사진기를 들고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사진기 앞에 서며 찍히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어느 쪽이 더 즐거운 삶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고단한 삶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둘 모두 아름다운 삶이고, 두 쪽 모두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틀에 넣는다면 성남훈 님 사진은 틀림없이 다큐사진이라 일컬을 수 있을 텐데, 다큐사진에 이르는 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다루었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살펴보았거나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제프 쿠델카나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다큐사진작가라고 하는데, 이들 또한 다큐사진을 한다고 일컬을 수 있으나, 이들 사진은 다큐사진이라는 틀에 굳이 집어넣어야 할 까닭이 없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진은 그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맡은 몫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기 좋게 다큐사진이니 상업사진이니 패션사진이니 보도사진이니 예술사진이니 가르지만, 어느 갈래 어떤 사진이라 하더라도 우리 삶을 내 눈길과 눈높이에 따라서 얼마나 살뜰히 담아서 보여주느냐로 이야기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내가 생각하는 사진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흐름이어야 하고,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 앞서 내가 함께 살아가는 님들과 나란히 서 있는 넋이어야 하며, 사진을 종이에 옮길 때에는 누구보다도 내 가슴을 철렁 울리는 발자국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우연히 파리 근교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보게 되었고, 집시 사진을 찍게 되었죠. 그러면서 주제뿐만 아니라 그런 사진들이 나의 정서와도 일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사회의 주류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작업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생각을 키우기는 했어도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집시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프랑스 안에서의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정도였습니다 ..  (288쪽)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오늘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우리 둘레에서 누가 떠돌이가 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읽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이 모습으로 내몬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당신 삶은 어떠한 빛깔과 모습으로 일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사진학과 교수님이 된 성남훈 님은 당신이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사진을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궁금하고,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당신 제자한테 ‘사진하는 마음’을 어떤 눈썰미로 들려주는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열일곱 해를 이어온 사진 한길을 앞으로도 꿋꿋하게 걸어가시겠지요. 이 사진 한길에서 좀더 많이 흔들리고 더욱 크게 소용돌이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성남훈’이니, 성남훈 사진을 힘차고 다부지게 이어나가면 좋겠습니다. 다큐사진이든 그냥 ‘사진’이든 어떤 사진감을 잡느냐보다도 사진으로 무엇을 하느냐를 더 속깊이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하는 맛과 멋을 차분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내가 일구고 있는 삶 그대로입니다. (4342.12.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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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개념어 사전
어니스트 칼렌바흐 지음, 노태복 옮김, 박병상 감수 / 에코리브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으로 곱고 맑게 살아가는 길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8] 어니스트 칼렌바크, 《생태학 개념어 사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해야 하던 일을 그친 지 스무 날이 넘었습니다. 스무 날이 넘는 동안 새 살림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싶었으나, 그동안 몸이 더 나빠진 옆지기를 돌보고 아이를 함께 보살피느라 어디로도 다니지 못한 채 거의 집에서만 붙어 지냈습니다. 이러느라 서울마실은 한 주에 한 번 살짝 할 뿐이었는데, 모처럼(?)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안 타다가 지옥철을 다시 한 번 타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날은 겨울이라 사람들 옷은 두툼해지니 자리에 앉아도 훨씬 비좁을 뿐더러, 다리를 벌리거나 신문을 쫙 펼치는 남자들 매무새가 짜증스럽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찡기며 책장을 펼칠 때에도 밀치고 밟는 몸가짐은 매한가지라서 고단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을 돌보고 쉬는(?) 동안에는 이맛살을 찌푸릴 일이 드물었는데, 고작 하루 지옥철을 다시 타면서 자꾸자꾸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책읽기로 마음닦기를 하기보다 한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비비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느낍니다. 이 지옥철에서는 나 홀로 고달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 지옥철에서는 나 혼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타고내릴 때에 새치기를 하거나 불쑥 끼어들며 밀쳐대는 숱한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이 지옥철을 타는 사람들은 으레 ‘고단하다고는 안 느끼지’ 모른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당신들 삶으로 여기면서 ‘혼자 빨리빨리’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남이야 어찌 되든 제 몸만 느긋하면 괜찮은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겠다고.


..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옳고 적합하며 아름답고 만족스러운가에 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삼는다 … 집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휴가 기간에 당신이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법이다 … 장거리 여행은 당신의 ‘생태적 발자취’를 크게 남긴다. 음식 공급 체계를 비롯한 여러 사안과 마찬가지로, 관광에도 ‘지역으로 돌아가기’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주요 책무는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 자동차가 차지하던 땅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더욱 푸르게 만들 수 있다 … 보존 운동이 우리 자연 유산이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교육ㆍ정치ㆍ법률적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도로 포장과 오염과 벌목이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주요한 동물 종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을 보존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  (17, 39, 58, 90쪽)


 ‘일상(日常)’이라는 한자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자말을 쓸 일이 없으나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바로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서울 둘레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 또한 ‘일상’이로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일상’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늘 같은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글피가 같으며, 글피와 모레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이 같으며, 오늘날과 앞날이 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삶이 아이 삶하고 같고, 이 아이 삶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낳아 기를 아이 삶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삶이란, 경쟁과 학벌과 이름과 돈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여행이라는 똑같은 틀거리에 맞춘 한결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지 않으면서 아이한테도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면서 아이한테도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도록 내몹니다.

 제아무리 헌법에 ‘인권과 기본권과 시민권’이 적혀 있다고 하여도 이 나라 푸름이한테는 어떠한 인권도 기본권도 시민권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짧게 맞추어야 하고, 치마길이와 치마통을, 옷차림과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지식을, 그 어느 한 가지 자유와 민주와 창조와 평등에 걸맞게 가다듬을 수 없습니다. 교육감이 무슨무슨 틀거리를 새로 짜야 하는 ‘청소년 머리길이’가 아닙니다. 법에 따라 어찌어찌 적어 놓어야 할 ‘체벌 규칙과 높낮이’가 아닙니다. 헌법에 따라 마땅히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아껴 주는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시민권이어야 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 자동차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한 운전자로만 만들 뿐 관심을 가져야 할 시민으로 대하지 않게 한다 …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은 상당 부분, 생명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양식 물고기나 유전자 조작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음식을 생산하려면 인공적인 먹이와 화학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  (30, 57, 112, 143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낳아 키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다운 권리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깨끗한 터전에서 오순도순 어울리며 즐겁게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제 은행계좌 숫자가 높아지고 제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며 제 자가용 크기가 커지기만을 꿈꿉니다. 내 은행계좌에 높아지는 숫자를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한테 기꺼이 베푸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구세군 냄비에 넣는 돈을 떠나, 소리와 소문이 없이 늘 기꺼이 나누며 삶을 꾸리는 어른은 얼마나 있는가요?

 지옥철을 타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까닭은 오늘 하루 몸이 몹시 고달파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옥철이 되도록 서로서로 깎아내리는 이 터전을 비롯하여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내 밥그릇만 단단하게 붙잡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초를 안 기다리고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는 새치기를 안 할까요? 밀고 밟으며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며 골목을 달릴 때에 마구마구 빵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내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 데에나 침을 뱉는 일은, 옳지 않은 법이 자꾸 생겨나도 나 몰라라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한 번 쓰고 나서 쓰레기로 버리는 물건을 끝없이 쓰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거나 보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참다운 진보라면 마땅히 이 땅 터전을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곱게 지키는 일에 온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참된 보수라면 누구나 이 나라 삶터를 알차고 슬기롭고 맑고 어여쁘게 가꾸는 일에 온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 이 나라에서 진보요 하고 외는 사람과 보수요 하고 나서는 사람치고 ‘참 자연사랑’으로 삶자락을 추스르는 분은 몇이나 됩니까.


.. 미국에서 처음에 야생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대부분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산업 시설이나 교외 주택단지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버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계속 돌고 돈다. 우리가 환경이며 환경이 우리인 셈이다 ..  (150, 210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앎’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마르크스를 알든 공병호를 읽든, 대학 졸업장이 있든 대학원 학위가 있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밑슬기’를 먼저 닦아 놓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내 집이 어떻게 마련되었으며, 내 밥이 어떻게 밥상에 놓이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머리통에 지식을 가득 채운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며, 지식인이라는 이름은 가방끈으로 붙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몹시 슬픕니다.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어 더없이 슬픕니다. 이 책은 ‘생태환경 갈래를 모르는 새내기’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는 책인데, 생태환경 갈래 이야기를 이 나라 웬만한 지식인들은 한줌 지식으로조차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읽어 머리속에 넣어 놓을 지식을 담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구나 마땅히 시나브로 깨우치면서 몸뚱이로 익히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소비 자본주의가 부흥하는 내내 서구인들은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종교와 문화는 부차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 성숙한 도시일수록 유지 보수에 쓰는 에너지가 더 많으며, 도시 자체의 성장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 우리 인간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땅을 점령해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어지럽힌다 ..  (18, 56, 113쪽)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길잡이책입니다. 아니 ‘길잡이책을 알아보는 길에 한 번 들추어 보는 읽을거리’입니다. 이 땅과 사람과 목숨붙이 이음고리를 헤아리는 길잡이책이라 한다면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이나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나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이나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이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나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이나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이나 《너를 부른다》(이원수)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책을 먼저 차근차근 곱새겨 읽고 내 온몸으로 바르고 곱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낸 다음에 비로소 집어들면서 ‘이론을 갈무리해’ 보도록 거드는 《생태학 개념어 사전》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른 삶을 꾸리고 있을 때에 앞으로 더욱 즐겁고 힘차게 이 길을 씩씩하고 튼튼히 걸어가도록 돕는 길잡이책입니다. 길잡이책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맨 처음 읽는 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쥐어들며 읽는 책은 ‘배움책’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배움책으로 삼는다면 생태와 환경을 놓고 ‘지식 쌓기’는 할 수 있으나, ‘삶 다스리기’는 할 수 없습니다. 생태와 환경 이야기란 지식을 쌓으려고 알아보는 갈래가 아닌 만큼, 지식을 쌓으려는 배움책으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만나려 한다면, 차라리 이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합니다.


.. 우선순위의 방향을 경제에서 생태로 전환해야 한다 … 땅 일부를 야생 지역으로 남겨 두면,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언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190, 206쪽)


 그런데,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책이라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번역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며, 우리 말법과 말투에 알맞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쉽고 바르게’라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 삶터에 발맞추는 말과 글이 못 되었으며, 우리 겨레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돌아보도록 돕는 말과 글이 아니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 하나만 번역이 아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책들은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지 않고 쏟아집니다. 외국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모르나 우리 말은 너무도 형편없이 못하는 분들이 번역일을 하고 있느라, ‘참 좋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참 좋은 모양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책에 담긴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을 살리는 좋은 말로 풀어내기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힘든 노릇일까요. 좋은 책을 좋은 말로 엮어내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어깨동무하기란 우리 터전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일까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우리네 지식인들이 우리 땅과 삶과 사람과 목숨에 걸맞는 ‘생태환경 이야기책’을 즐겁고 알차게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4342.12.24.나무.ㅎㄲㅅㄱ)


 ┌ 《생태학 개념어 사전》(에코리브르,2009)
 ├ 글 : 어니스트 칼렌바크 / 옮긴이 : 노태복
 └ 책값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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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번역이 너무 형편없어서 별 하나를 깎고 싶지만, 책이 좋기에 별 다섯을 그대로 살려 놓는다. 번역하는 분들은 제발 우리 말 좀 배우고 나서 일을 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그리고 2쇄부터는 오탈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내가 출판사에 알려준 오탈자는 마흔 곳쯤 되는데, 한 번 알려주고 나서 예순 군데를 더 찾았다. 히유... 띄어쓰기 문제가 아닌 '오탈자' 문제이다... 그리고 고흐가 살던 곳은 '네덜란드'인데, 화가 이름이나 지역 이름을 '네덜란드 말대로 읽기'가 아닌 '영어대로 읽기'로 적어 놓은 대목이 많아서, 책을 읽으며 몹시 언짢았다. 네덜란드사람이 한국사람 이름을 일본 말투대로 엉뚱하게 읽어서 적어 놓으면 기분이 좋을까?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 문화와 우리 나라 문화 또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하지 않다면, 제발 번역가라는 이름은 달고 다니지 말아라...)  

(글 사이사이 곁들인 그림은, 출판사 '아트북스'에서 보내 주었기에 붙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이 책을 엮어낸 출판사 분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긴다. 앞으로도 꾸준하게 힘내어 주시면 좋겠다...)


 이 책 하나 130 ― 문화를 먼 나라에서 찾을 까닭이란 없다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책이름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글ㆍ그림 : 빈센트 반 고흐
- 옮긴이 : 박홍규
- 펴낸곳 : 아트북스 (2009.5.14.)
- 책값 : 26000원



 (1) 내가 꾸리는 삶은 고스란히 예술


 제 삶은 남들이 보면 부지런히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하루하루입니다. 혼자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하루가 온통 골목마실이나 자전거마실을 거쳐 헌책방이나 동네새책방에 드나든 다음 집으로 돌아와 글쓰기로 채워졌습니다. 옆지기와 살아가면서 자전거마실과 책방마실은 많이 줄었고, 아기를 낳은 뒤로는 자전거마실과 책방마실은 웬만하면 엄두를 못 내지만, 한 주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책방마실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책을 꼭 읽어야 하거나 새로운 책을 꼭 사야 하지는 않으나, 저 스스로 우물에 빠진 생각밭이 되고 싶지 않은 한편, 아직 새로 배울 이야기가 많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마련해 둔 책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도 되고, 이제까지 읽은 훌륭한 책을 거듭 되뇌어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훌륭한 책을 바탕으로 새롭게 일군 ‘내 손길을 기다릴 또다른 훌륭한 책’이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고 느끼기에 책방마실을 꾸준히 이으려고 합니다. 아픈 옆지기와 함께 살며 아기를 함께 키우자면 바깥마실이 힘들어 집에서 인터넷을 또닥거리며 책을 장만할 수 있지만, 책은 제 발품을 팔아 찾아다닌 책방에서 제 손품을 팔아 살피면서 장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장만한 책은 너무 무겁거나 다른 짐이 많지 않다면 한겨울에도 땀 뻘뻘 흘리며 제 큼지막한 가방에 가득 채우고 끈으로 꽁꽁 묶어서 낑낑대며 집으로 나르고 싶습니다. 손발을 쓰지 않으며 책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2009년 12월 오늘 이 자리에서 돌아보면 지난 1992년 8월부터 열여덟 해에 걸쳐 날마다 3킬로그램 남짓에 이르는 책을 장만해 왔습니다. 충북 충주에서 살며 자전거마실로 서울을 오가며 책을 사던 2006년 한 해에는 봄부터 겨울까지 자전거수레와 가방과 자전거 짐받이에 70∼80킬로그램에 이르는 책을 나누어 싣고 한 주에 한 번씩 오갔습니다. 지난 2008년과 올해에는 책을 좀 적게 샀는데, 2006년까지 책을 장만해 온 흐름을 줄잡으면 날마다 10킬로그램이 됩니다. 요새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데, 아무래도 열여섯 해 동안 몸을 지나치게 많이 부린 탓이 아닌가 싶고, 요 이태에는 책방마실을 자주 못 다닌다고 하여도 집일을 많이 맡으면서 스스로 힘겨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손발톱을 깎아 남들 눈에 안 뜨이게 되었지만, 올 2009년 첫머리부터 제 손톱은 한쪽이 갈려 있었습니다. 곯아떨어진 어느 날 겨우 잠에서 깨어 일어났지만 잠자리에 누운 채 문득 손을 들어서 들여다보다가 손톱 끝이 갈려서 없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왜 이렇게 갈린 줄 몰랐습니다. 며칠 앞서 드디어 ‘손톱이 갈린 까닭’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아기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에 들이는 품이 퍽 많아, 쉼없이 비빔질을 해대느라 손톱 끝이 한쪽으로 갈려 없어진 셈이더군요. 날마다 기저귀를 서른 장씩 빨 때에는 이러하지 않았고, 저와 옆지기 옷을 빨며 살 때에도 이러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아기가 젖을 차츰 적게 먹고 밥갈이와 오줌가리기를 하려는 요즈음 이렇게 손톱이 갈립니다. 





 언제인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으나, 1980년대 가운데무렵쯤, 아버지 어머니 형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열세 평 오층짜리 아파트에 살던 때에 빨래기계를 처음 들여오던 날이 생각납니다. 네 식구 옷과 이불까지 모두 손빨래를 하던 어머니한테는 빨래기계가 그야말로 ‘손품 더는 혁명’과 같지 않았으랴 싶은데, 이무렵 빨래기계 값은 요즈음 빨래기계 값하고 거의 맞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어쩌다가 빨래기계 장만할 생각을 다 하셨는지 궁금하지만, 빨래기계를 쓰며 어머니 손이며 손톱이며 조금은 수월해지셨겠지요. 그러나 빨래기계를 쓴다고 집일은 줄지 않습니다. 집일을 나누어 맡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큰일입니다. 형과 저는 어릴 적부터 으레 어머니를 거들며 집일을 함께했고, 양말과 신발은 마땅히 스스로 빨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말에는 걸레를 빨아 방바닥 훔치는 일을 도왔고요.

 빨래기계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빨래를 개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하는 집일을 물끄러미 살펴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집일은 언제나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빨래와 청소가 마무리되면 아침 낮 저녁 세 끼니 밥을 마련하는 데에 바쁘고, 끼니를 마련하자면 날마다 저잣거리 마실을 다녀야 했고, 찬거리 손질이며 쌀을 일고 씻고 안치고 하는 일에다가 상차림이며 나중에 설거지와 갈무리까지 ……, 입으로 읊으면 짧지만 몸으로 움직이면 겨울날에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고단하고 바쁜 하루하루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니며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 가운데 떠오르는 대목이 거의 없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운 지식조각 가운데 생각나는 대목 또한 몇 가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곁에서 늘 바라본 어머니 집일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아주 많은 모습이 떠오르고 생각납니다. 아니, 떠오른다기보다 늘 떠올리며 삽니다. 생각난다기보다 노상 생각하며 삽니다. 오늘 하루 내 집일을 맡아 하면서 어린 날 어머니는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돌아봅니다. 내 국민학생 때 어머니는 바로 오늘 제 나이쯤 되었을 텐데, 그무렵 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본 어머니 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제 손은 얼추 비슷합니다. 어린 날 제 손은 말랑말랑하고 뽀얀 모습이었지만 어머니 손은 누리끼리하며 굳은살이 마디마디 박혀 있는데다가 손톱도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머니 지난날 손 모양을 제가 물려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제 저녁 혼자서 제 손톱 모양을 사진으로 한 장 남기면서, 우리 아이가 앞으로 서른세 해를 더 살아낸 다음 스스로 제 손을 들여다볼 날이 있다면 제 아버지(나 어머니) 손을 담은 사진을 돌아보면서, 제 어버이와 제 어버이를 낳고 기른 어버이와 그 어버이를 낳고 기른 어버이를 가만히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그 어느 책에도 이 같은 이야기는 다루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굳이 어떠한 책에서 이 같은 이야기를 다루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느끼고 읽고 삭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교육이나 정치나 경제가 꽃피운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깨닫고 내 이웃 삶을 톺아볼 줄 알 때에 바야흐로 내가 걷는 한길이 얼마나 고맙고 싱그럽고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까지는 제 사진감 가운데 하나인 ‘헌책방’ 한 가지 사진을 날마다 열 장쯤 찍으면서 살아왔다면, 올해에는 제 사진감 가운데 하나인 ‘골목길’ 한 가지 사진을 날마다 60장쯤 찍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진들 가운데 추리고 추려 보니 얼추 3650장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 스스로 제 마음에 아주 들어서 덜고 빼고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제 삶터 골목동네 사진을 날마다 열 장쯤 찍었다고 하겠습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텐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십이월 막바지에 이르며 곰곰이 되돌아봅니다. 그만큼 집식구와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집식구와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좀더 걸음을 잘 걷고 조금 더 자란다면 몸 아픈 옆지기는 집에서 쉬더라도 둘이 골목마실을 할 수 있을 테고, 몸이 조금 괜찮은 날에는 셋이 골목마실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이 고향동네 삶터가 오로지 아파트만 때려짓는 재개발을 멈추지 않아 어쩌는 수 없이 우리 식구 조그마한 보금자리마저 밀려나야 한다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게 함께 골목마실을 할 만큼 큰 다음이라 하여도 서로 웃으며 조용조용 골목마실을 즐길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즐거운 마실은 꿈으로만 그치지 않을까 근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꿈으로 그친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이 또한 제가 걸어갈 길이라고 느낍니다. 가난이, 더 밑으로 내려가는 가난이, 날마다 오늘 끼니를 어떻게 이을까 걱정하는 가난이 저한테 주어진 길이라 한다면, 찍고픈 사진과 쓰고픈 글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우리 삶터 흐름 또한 저한테 주어진 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달게 받아들이되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꾸밈없이 삭여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어떤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킬 수 없다고 느끼는데, 이를테면 헌책방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묶는다든지, 골목동네 삶자락을 글과 사진으로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은 조금도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요사이 문화예술밭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아카이브’ 또한 아닙니다(저로서는 ‘아카이브’가 도무지 무엇인지 아직도 알 노릇이 없습니다만). 저는 그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헌책방을 좋아해서 즐겨 찾아다니며 듣고 보고 느끼고 담았습니다. 골목길 또한 있는 그대로 이곳에서 살아가니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몸뚱이와 눈썰미로 사진을 찍고 글을 썼습니다. 잘나지 않은 주제이나 못나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저 있는 깜냥 그대로입니다. 저보다 가난한 골목이웃이 있으나 이들이 저보다 못살거나 꾀죄죄하거나 불쌍하거나 안쓰럽지 않습니다. 저보다 가멸찬 골목이웃이 있지만 이들보다 제가 못살거나 꾀죄죄하거나 불쌍하거나 안쓰럽지 않습니다. 모두 제 깜냥대로 제 삶길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삶길대로 골목길을 두 다리와 자전거로 돌아다니면서 이 길을 걸었던 지난 1975∼1995년 자취를 오늘과 맞대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것이라 더 좋을 수 없고 새것이라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옛것은 옛것대로 좋고 새것은 새것대로 좋습니다. 옛삶은 옛삶대로 모셔야 하고 새삶은 새삶대로 아껴야 합니다. 옛길은 옛길대로 고즈넉하고 새길은 새길대로 싱그럽습니다. 다 다른 마디와 고비와 대목이 깃든 길과 삶과 사람과 넋입니다. 다 달리 곱고 즐겁고 애틋한 길이요 삶이요 사람이요 넋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사진기 하나 들고 동네마실을 하는 동안 따로 ‘취재’를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헌책방마실을 거의 날마다 하고 살던 때에도 따로 ‘취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날에는(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헌책방에서 ‘살았’습니다. 헌책방에서 살아온 그대로 헌책방을 사진과 글로 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골목길에서 ‘살고’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살고 있는 그대로 골목길을 사진과 글로 담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교육 따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문화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교육이든 있다면 바로 ‘삶’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삶으로 받아들여 내가 맡은 아이들을 내 식구요 동무요 이웃으로 여기며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에서는 어떠한 이론이 없어도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내 삶으로 껴안으며 시이든 산문이든 희곡이든 수필이든 적바림할 때에는 마땅히 문학이 이루어집니다. 글이 대수입니까? 그림이 대수입니까? 사진이 대수입니까? 춤이 대수입니까? 노래가 대수입니까? 몸짓이 대수입니까? 대수란 바로 삶입니다.

 삶을 알면 사람을 압니다. 사람을 알면 넋을 압니다. 넋을 알면 길을 알고, 길을 아니 이제 시나브로 말을 알 수 있어, 저절로 말이 샘솟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를 하고 예술을 하고 문학을 하고 학문을 한다는 숱한 사람들은 저절로 말이 샘솟도록 ‘제 길을 살아내지’ 않고 있습니다. 억지로 말을 뽑아냅니다. 우물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다가 관정기를 쑥 집어넣고 물을 억지로 빼냅니다. 관정기로 땅을 팔 돈을 어버이한테서 얻든 스스로 일해서 벌든 하고 나서는 억지로 물자리를 알아보고 끊임없이 빼냅니다. 스스로 물길을 트지 않으며, 제절로(저절로) 꾸준히 물이 샘솟을 때까지 스스로를 갈고닦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책만 판다고 학문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학교를 오래 다닌다고 학문이 이룩되겠습니까. 훌륭한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학문이 빛을 보겠습니까. 아닙니다. 학문 또한 삶이기 때문에, 제 삶을 제 발로 디뎌야 합니다. 먼저 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거나 즐기는 세계명작이란 다름아닌 ‘글쓴이 삶이 무르익어 열매로 터져나올 그때까지 조용히 힘을 쏟은 끝에 이루어진 빛’입니다. 억지로 우물파기를 해서 이룬 전기불이 아닙니다.

 나라안에 이름 높은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그림쟁이가 억지로 우물파기를 했을까요. 나라안에 이름 거룩한 김유정이나 이원수나 최명희나 박경리가 어거지로 우물파기를 했는지요. 우물파기로는 ‘우물 파는 데에 들인 돈’만큼 다시 본전치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본전치기가 삶이 되나요?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듯이 대학교 졸업장에 얽매이고 큰회사 높은 연봉에 얽매이는 매무새가 삶이라 할 수 있나요? 큰 차와 넓은 아파트가 삶일 수 있습니까? 영어 일찍 배우도록 하려고 나라밖으로 보내거나 영어마을을 돈으로 때려짓는 일이 삶이 됩니까?

 틀림없이 이 나라에는 영어 ‘천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는 ‘아름답고 해맑게 영어로 제 넋과 꿈을 빛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책방마다 ‘글쓰기 다루는 책’이 넘칩니다. 요즈음 글쓰는 사람 아주 많습니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많이 팔리고 읽히는’ 글ㆍ그림ㆍ사진ㆍ노래ㆍ춤ㆍ몸짓을 넘어, ‘우리 문화와 예술을 빛낸다고 할 만한’ 글ㆍ그림ㆍ사진ㆍ노래ㆍ춤ㆍ몸짓은 얼마나 될는지요?

 아무개 님 책이 수십만 권 팔린다고 하여 아무개 님 책이 우리 삶을 빛내는 문화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개 님 사진이 수천만 원에 팔린다고 해서 아무개 님 사진이 우리 삶을 비추는 예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요.

 내 주제를 알고 내 길을 다스리며 내 삶을 사랑하는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어머니는 나한테 당신 삶을 그 어떤 말로도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일러 주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내 어머니가 보낸 풋풋하고 싱그러운 스물∼서른 나이에 두 손이 누리끼리해지고 손톱 끝이 갈린 해쓱한 얼굴인 채, 제 서른 줄 나이를 보내는 오늘 하루가 고맙고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한 시간을 주물러도 풀리지 않는 어머니 어깨와 다리와 팔다리 뭉친 힘살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몸소 겪고 있는 제 나이값이 반갑고 흐뭇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제 삶결을 그저 그대로 글로 옮기고 사진으로 싣고 책으로 묶습니다. 저로서는 달리 재주가 없기도 하며, 달리 재주가 없어 기쁘기도 하고, 달리 재주가 없는 까닭에 ‘다큐’나 ‘리얼리즘’하고는 처음부터 끈이 맞닿지 않았습니다. ‘문화’니 ‘예술’이니 ‘문학’이니 하는 얼굴하고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예 저한테 주어진 결대로 살아내는 하루하루요, 이 하루하루가 글과 사진이라는 모습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2) 당신이 꾸리는 삶 또한 고스란히 예술


 799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백 군데 남짓 되는 ‘오탈자’를 보고는 끔찍하다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펴낸 곳에서 낸 다른 책을 떠올리면서, 엮음보다는 옮김에서 저으기 아쉬울밖에 없었다고 느낍니다. 아무래도 반 고흐(네덜란드말로 하자면 ‘환 호흐’)라고 하는 사람이 동생과 둘레 사람들하고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묶어내자면, 더없이 만만하지 않은 부피에 눌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나타날밖에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아쉬움이 눈에 자주 뜨여도 책을 읽으며 그리 거리끼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한길을 가는 것이야(111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나는 조용히 한길을 걸어가야 할 뿐이야”로 새깁니다. “사람들은 보는 방식이나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하듯이 책읽는 방법도 배울 필요가 있어(115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나 세상을 사는 길을 배워야 하듯이, 책읽기도 배워야 해”로 받아들입니다.

 제 도서관 한켠에 얌전하게 꽂아 두고 있던 조그마한 책 《고호의 편지》(정음사)를 끄집어 냅니다. 1974년에 벌써 우리 말로 옮겨져 있던 이 책은 이때 뒤로 한 번 더 옮겨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노릇이나 여러 차례 더 옮겨졌는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1974년에 나온 작은 책 하나로도 넉넉했기에, 굳이 다른 새 옮김판을 찾거나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는 그림쟁이 고흐 님이 쓴 편지글을 꽤 많이 실어 놓았습니다. 아쉽게도 모든 편지글을 담은 책으로 여미지 못했으나, 이만큼이라도 만날 수 있는 일은 그지없는 기쁨입니다. 책마을 일꾼이 책과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베풀어 준 좋은 선물입니다.

 책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라고 붙였습니다만, 그림쟁이 고흐 님이 쓴 편지한테는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꾸밈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편지글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는데, 고흐 님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지 않았거든요. 고흐 님 당신이 그릴 수 있는 ‘꾸밈없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바랐습니다.

 우리 나라는 일본 다음으로 ‘반 고흐 그림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로 손꼽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에서 제대로 엮었다 할 만한 ‘고흐 읽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흐 님이 편지글에 손수 쓰기도 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읽는 동안 어렵잖이 깨달을 수도 있는데, ‘감상에 지나치게 젖거나 사상에 지나치게 기울며’ 잘못 읽고 읊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이 그림(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거야. 나는 그런 그림이라고 확신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이는 농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가장 맞는 것을 찾으면 돼. 나로서는 농민을 조합한 그대로 그리는 쪽이, 그들에게 상투적인 감미로움을 갖게 하는 것보다 길게 보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믿어(334쪽).” 같은 말마디처럼 고흐 님 그림에 담긴 넋을 찬찬히 읽으며 이렇게 읽은 이야기를 내 삶으로 담아내고자 애쓰는 분들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그림에 담긴 좋은 넋을 내 삶으로 담는 분’들은 이름과 소리소문이 하나도 없이 조용히 당신 길을 꿋꿋하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겠지요.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되쓰거나 책으로 낼 일은 아니라 하겠지요.

 그림쟁이 고흐 님은 남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당신한테 주어진 길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면서 당신 깜냥과 주제에 걸맞게 삭여내면서 스스로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그림을 남기거나 대단한 편지를 남긴 고흐 님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답고 좋은 삶을(반가운 쪽으로든 얄궂은 쪽으로든) 꾸린 하루하루이고, 이 하루하루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살아낸 발자취이기에 고흐 님이 오늘날 널리 사랑받거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당신 그림과 편지는 더없이 아름다울밖에 없습니다.

 전시장에 걸리는 그림이어야 아름답거나 훌륭한 작품이겠습니까. 집에서 손수 그려 집 벽에 걸어 놓거나 그저 스케치북에만 모셔 두는 그림이라 하여 떨어지거나 모자란 그림이겠습니까.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고 알뜰살뜰 꾸리고 있다면 누구한테나 당신 삶은 고스란히 문화이고 예술이며 문학입니다. 미국을 다녀왔다고 문화가 되지 않고, 유럽마실을 해 보았다고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키나 마리를 읽었다고 문학이 될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에 담긴 고흐 님 편지글은 우리한테 깃들어 있으나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하여 우리 스스로 일으켜세우지 못하는 숱한 문화와 예술과 문학 실마리를 우리 스스로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애타는 목소리와 애끓는 이야기가 가득가득합니다. 다만, 이 같은 애탐과 애끓음이란 느끼려는 가슴일 때에 비로소 느낍니다. 느끼려는 가슴이 아니라면 그저 ‘아, 나도 고흐쯤은 읽었다구!’로 그쳐 버립니다.
 





 (3) 되읽고 곱읽는 글월


 지난 유월부터 처음 읽어 두 달에 걸쳐 조금씩 곱씹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덮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오래도록 곰곰이 되돌아보았습니다. 느낌글이야 얼마든지 짤막하거나 단출하게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 마음으로는 이 같은 편지글을 짤막하거나 단출하게 섣불리 적바림하기 싫었고, 제가 좋아하는 대로 곁에 놓고 찬찬히 되씹고 싶었습니다.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며 새로 삭이고 거듭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 몇 가지를 간추려서 옮겨적어 봅니다. (4342.12.22.불.ㅎㄲㅅㄱ)


[56∼57, 82, 114, 115, 145∼147, 203, 236쪽]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도록 하렴. 그것이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연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단다 … 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처럼 펜도 종이를 따라야 하는 거야 … (예술은) 사람들이 옳게 이해하고, 사물을 왜곡하지 않는 경우에 한정되고, 그 사람의 인격의 참모습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어 … 사람들은 굴뚝 위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오는 것을 볼 뿐, 그대로 지나쳐 … 예술가는 언제나 처음에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게 마련이지. 그러나 자연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런 저항에 기가 꺾이기는커녕, 자극으로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자연과 성실한 예술가는 하나가 되는 거야 … 모든 주의를 그 나무에 집중하여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노력한다면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저절로 만들어진단다 … 만일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고 그냥 그대로 계속한다면 현상에 머물거나 답보하면서 후퇴하겠지 … 생명이 있는 존재를 소묘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정말 어렵지만 멋진 일이지 …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은 화가들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야.

[58, 64, 80, 95 177, 236쪽]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 사람들이 멋지고 소박한 눈을 가졌다면, 그 눈 속에 수많은 대들보가 없다면 말이야 … 삶에서 우리의 몫이 신의 나라 속의 가난한 자, 즉 신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인지 물어 보자 … 아우야, 낙담과 병과 분쟁을 만날 때마다, 이러한 시간을 우리에게 내린 신에게 감사하도록 하자. 그리고 온화한 마음을 잃지 말도록 하자 …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살기 때문이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마케도니아 사람 같은 인간, 괴로운 생활을 보내는 노동자에게 힘을 주고 위로하며 계몽할 수 있는 주님이기 때문이라고 … 성직자들이 말하는 신은 나에게 완전히 죽었어 …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 그리고 끝없는 관찰을 요구하는구나. 끈질기다라는 말은 무엇보다 쉼 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해. 





[100, 126∼127, 211, 246, 412쪽] 갱부들과 사귀려면 그들의 심정을 알고, 그 기분을 나누어야 해. 다라서 교만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는 금물이야 … 광부나 방직공은 아직도 다른 노동자나 직공들과는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고,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단다. 언젠가 이들의 모습을 그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 점점 이 가난하고 슬픈 노동자들, 소위 최하층 인간들, 가장 경멸받는 사람들, 보통사람들이 전혀 근거 없이 마치 범죄자나 악당처럼 생각하는, 그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감동적인 무엇, 비통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어 … 신 앞에서 정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해. 옳은 일을 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는 거야 … 나는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저질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 … 그러나 옛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새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104, 137, 203, 235, 325, 413쪽] 나는 대학에서 죽을 각오로 공부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수명을 다하고 죽는 편이 좋아. 가끔 독일인 계절노동자에게 배우는 것이 그리스어 수업보다 더 도움이 돼 … 나는 반드시 땅을 파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경작하는 남녀를 쉬지 않고 그려야 해 … 이제 나는 화상이나 화가들을 쫓아다니지 않기로 했어. 그들이 누구라도 말이야. 내가 쫓아다녀야 할 사람은 모델뿐이야. 모델 없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래 …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야 …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스러운 사람, 불쾌한 사람일 거야 … 그래, 좋아,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언젠가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괴팍한 사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의 가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겠어. 그것이 내 야망이야. 그것은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하고, 열정이 아니라 평온한 느낌에 근거하는 거야 …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막신을 신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말, 즉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에서 농민이 만족하는 정도에 자신도 만족한다는 점이야. 밀레는 그것을 실천했고, 사실 그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이는 이스라엘스나 모베처럼 꽤나 사치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주지 않은 길을, 밀레가 인간으로서 화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해 … 네가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랐어. 아니야, 사랑하는 어린 누이야, 차라리 춤을 배우고, 공무원이든 장교든 간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렴. 요컨대,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더 많은 바보짓을 하렴. 공부란 사람을 둔하게 만드는 것 외에 어떤 목적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 





[110, 178, 195, 261, 324, 410쪽] 너도 잘 알 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 나도 그걸 알고 있고, 내 꼴이 충격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러나 생각해 봐. 그것은 내가 외모를 꾸미는 일에 환멸을 느낄 뿐더러 그런 데 쓸 돈이나 재산이 없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것은 자신의 공부에 깊이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해 …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은 정말 경이로운 거야 … 내가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씀드렸다고 해서, 심지어 이성을 잃고 신랄하게 말씀드렸다고 해서 내가 아버지를 적으로 본 것은 아니야. 단지 아버지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뿐이지 … 작은 바다 스케치에는 황금색의 부드러운 효과가 있고, 숲 스케치는 더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야. 인생에는 두 가지 모두 있다는 게 기뻐 … 나는 밀레가 “나는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가 그 자신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 …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에게도 싹을 틔우는 힘이 있어. 따라서 자연스러운 생활이란 싹을 틔우는 거야. 곡식의 싹을 틔우는 힘이란, 우리에게는 바로 사랑에 해당하지.

[113, 155, 169, 175∼176, 280, 493쪽]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기란 정말 어려워. 지금 내가 직장을 잃고, 몇 년 동안 직장 없이 살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자신들과 생각이 같은 자들에게만 일자리를 나눠 주는 신사들과 생각이 달라서야 …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 너나 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냥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전부가 아니겠니? 그러니 실의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불과 빛을 끄지 말고 머리를 맑게 유지하도록 하자 … 당신도 언젠가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어. 그럴까, 교수도 사랑에 빠질까? 성직자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까? …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새벽녘에도 곁에 친구가 있음을 발견하면, 세상살이가 더 즐겁지 않겠니? 그것은 성직자들이 사랑하는 교훈적인 일기나 교회의 흰 벽보다도 훨씬 즐거운 것이야 … 구빈원 노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들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비록 이스라엘스가 그들을 완벽하게 그렸지만,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는 것이 놀라워. 여기 헤이그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세계가 존재하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야 … 어떤 사람은 색채의 뛰어난 관현악법을 알고 있으나, 사상이 결여되어 있네.

[266∼267, 311, 353, 388쪽] 실패를 거듭한다고 해도, 가끔은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해 … 중요한 것은 행동이지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점이야. 나는 원칙이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인정될 수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 원칙만 나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칙으로부터도 얻을 게 전혀 없지만, 네가 말한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마음을 다잡고 사려 깊게 산다면,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 위대한 일은 우연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야 … 나는 우리가 자연 자체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또 자연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틀리에 작업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네 … 나는 “밭갈이하는 농부에게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 농부는 진짜 농부여야 하고, 밭 가는 사람은 밭을 갈아야 그 그림은 진정으로 현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이야 … 그 누구보다 평온했던 코로는 봄을 깊게 느꼈고, 평생을 노동자처럼 간소한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타인의 불행에 언제나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297, 333∼335쪽] 사람은 왜 평범하게 되는가? 그건 세상이 시키는 대로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순응하고 타협할 뿐, 결코 세상에 반대하지 않고 그 의견에 얌전히 따르기 때문이야 … 나는 램프의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의 감자를 먹는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어. 따라서 그 그림은 손 노동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양식을 정직하게 얻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나는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들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어. 따라서 나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도 모른 채 감탄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아 … 언젠가는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거야. 나는 그런 그림이라고 확신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이는 농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가장 맞는 것을 찾으면 돼. 나로서는 농민을 조합한 그대로 그리는 쪽이, 그들에게 상투적인 감미로움을 갖게 하는 것보다 길게 보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믿어 … 만일 그 소녀가 귀부인의 옷을 입는다면 본래 개성은 사라져 버릴 거야. 농민은 일요일, 신사용 코트를 입고 교회에 갈 때보다 무명옷을 입고 들판에 있을 때가 더 멋지거든. 마찬가지로, 나는 농민화를 상투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 … 농민화에 향수 냄새가 나서는 안 돼 … “웬 쓰레기 같은 그림야!”라는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지만, 그것은 각오해야 한다. 나 자신도 그렇듯이. 그래도 우리는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해 … 농민을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들 자신과 같이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려야 해.

[326, 339, 345∼346, 348쪽] 밀레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쓰는 이유는, 도시 화가들이 그린 농민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역시 파리 근교의 농민을 생각나게 할 뿐이라고 네가 지난번 편지에서 썼기 때문이야. 나도 같은 인상을 받았어. 이는 그 화가들이 인간적으로 농민생활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밀레는 또 말했지. 예술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 아무리 견고한 기초를 다진 신앙이나 종교도 결국은 썩어 버리고 말지만, 농민들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똑같이 이어진다는 거야 … “천사를 그린다니! 흥, 누가 도대체 천사를 보았지?”라는 쿠르베의 말에 남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계속 말하고 싶어. “〈하렘의 재판〉이라니! 흥, 도대체 누가 하렘의 재판을 보았지?”라고 … 그 모든 역사화들이, 보지도 못한 것을 계속 높이거나 넓혀 온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무엇을 위해 그런 그림을 그렸는가? 그것들은 대개 몇 해가 지나면 진부하고 재미도 없으며 더욱더 따분한 것이 되어 버릴 텐데 말이야.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그림을 잘도 그렸으니,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하겠지 … 나는 그 모든 이국적인 그림이 아틀리에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 밖으로 나가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모든 일이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어 …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농가에 살면서 농민처럼 들판에 나가야 한다는 거야. 여름에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 겨울에는 눈과 서리를 참아 가며, 실내가 아닌 툭 트인 야외로 나가, 잠시 산책하는 게 아니라 하루 진종일 농민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야. 





[371, 492, 520, 535∼536쪽] 현실의 삶 자체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지. 나는 길거리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귀부인보다 하녀가 흥미롭고 더욱 아름다워. 그런 평범한 남녀 속에서 기력과 활력을 발견한단다. 만일 그들을 그 특유의 성격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확고한 붓놀림과 간단한 기술로 그려야 해 … 정확한 소묘, 정확한 색채를 추구하는 건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색이나 무엇으로 정착시키려고 해도,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사진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야 … 수확을 그리는 동안, 내 일은 수확하는 농부들보다 더욱 힘들었어 … 이곳에 온 어느 날, 어떤 화가가 이렇게 말하더군. “이런 걸 그리기는 너무 지리할걸.”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네. 이 풍경이 너무나 훌륭했기에 그 바보 녀석을 야단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지.

[414∼415, 571, 608, 662, 773쪽] 책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하렴. 그림을 그리렴. 생명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생한 인간이어야 해 … 가능한 많이 즐기고, 가능한 한 재미를 느끼렴 …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그것은 독창성을 고갈시킬 뿐이야 … 파리에는 나막신 그림이 전혀 없어 유감이야 … 파리에서 나는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밖에 배우지 못했어 … 마치 자신이 꽃인 듯이 자연 속에 사는 그런 일본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아닐까? 더욱더 즐거워지고, 더 행복해지며, 인습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나 노동과는 반대로,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일본 미술을 연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 모든 게 인상주의인 인상주의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 돼. 결국 다른 무엇인가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돼. 확실히 색채는 인상주의를 통해 진보했어. 비록 길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이미 그들 이상의 경지에 이르렀어. 그리고 거의 색채를 갖지 않은 밀레는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지! … 나는 조카녀석을 자주 생각한단다. 모든 신경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아이를 키우는 쪽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지만, 발길을 돌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바라기에는 지금 너무 늙어 버렸다고 느끼고 있어. 





[504, 663, 707쪽] 도대체 언제쯤 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 그 그림을? … 화가는 자신이 본 대로 그리면 위대한 인간으로 남아 …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는 것은 좋은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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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2-2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 글은 언제 읽어도 좋은데 의외로 알라딘에선 오시는 분이 드므신것 같아요.참고로 전 프리첼 시절부터 된장님 글을 많이 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