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에


 글을 쓸 때에 나는 꼭 한 가지를 생각한다. 이 글을 쓴 나부터 내 글을 읽고 활짝 웃거나 꺼이꺼이 울 만하지 않다면 굳이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때로는 빙그레 웃을 글을 쓰고, 어느 날에는 조용히 눈물지을 글을 쓸 테지. 그러니까, 나부터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이 되어 내 글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느껴야 비로소 글다운 글이라는 이야기이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마음쓸 까닭이 없다. 내가 알아줄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어야 한다. 내가 알아주는 아름다운 글일 때에는 나는 웃음어린 목소리나 눈물젖은 목소리로 내 삶을 내가 왜 글로 담아내어 읽히려 하는지를 들려줄 수 있다. (4343.3.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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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소년한길 유년동화 6
도이 카야 글 그림, 김정화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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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그림책에는 참사랑을 담습니다
 [그림책이 좋다 76] 도이 카야,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책이름 :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글ㆍ그림 : 도이 카야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소년한길 (2002.6.10.)
- 책값 : 6500원



 (1)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


 온누리에 나오는 모든 책이 모두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만든 책이 있다고 느끼고, 나날이 돈을 바라보는 책이 차츰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돈바라기 책이라 하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다만 책다운 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엠에스지를 넣었느냐 안 넣었느냐를 놓고 아웅다웅이지만, 이에 앞서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얼마나 먹고 자란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깃들었느냐를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사다 먹는 밥거리 가운데 밥거리다운 밥거리란 없다고 할 만하다는 흐름하고 맞닿습니다.

 아주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가 있습니다. 며칠 앞서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를 얻어타고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생태와 진보를 바라는 분들 자그마한 모임자리에서 우리 옆지기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해서 찾아갔다가 전철이 끊길 무렵이 된 탓에, 인천(부개동)에서 자동차를 몰고 온 분이 우리 식구를 집 언저리까지 자동차로 태워 주었습니다.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찻길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사람들한테 찡기고 낑기며 힘들기는 하여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데,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워 어지러웠습니다. 아이는 집에 닿고 보니 차에서 똥을 싸서 기저귀를 적셨고, 옆지기는 이튿날까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지냈습니다. 저라고 몸이 나을 구석이 없으나, 집살림을 하느니 바깥일을 하느니 하면서 아픈 몸을 겨우 붙들어 세웠습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마다 고맙다는 마음이지만, 고마운 한편 제발 10분 넘게 달리지 않는 얻어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 몸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치고 자동차를 타며 멀미를 하거나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어지러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고, 이제는 고속버스를 타지만 한 번 타고 나면 며칠 몸앓이를 할 뿐더러, 택시이든 고급자가용이든 작은자가용이든 자동차라는 탈거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꽤 많은 짐을 한꺼번에 멀리까지 제법 빨리 옮겨 주는 자동차라 하지만, 제 몸과 삶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제 몸에 잘 안 맞기 때문에 되도록 바깥에서는 밥을 사먹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몸에 거의 안 맞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어타기조차 싫고 자가용을 장만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빨래기계를 쓰면 손일을 덜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넉넉히 낸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손빨래를 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손빨래를 하는 동안 옷을 한결 아끼면서 나중에 ‘빨래기계가 낡아서 버려야 할 때에 쓰레기를 만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빨래기계를 쓰면 전기와 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데요. 전기를 아예 안 쓰고 물은 훨씬 적게 쓰면서 우리 식구 옷가지를 좀더 사랑하고 아끼는 손빨래는 제가 두 눈을 감고 죽는 날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삶이 고스란히 제 책읽기로 이어집니다. 손을 쓰고 몸을 놀리며 땅하고 가까이 맞닿고픈 삶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눈길로 옮아갑니다. 몸이 제아무리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넋이 스민 책이 좋습니다. 산골마을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얼이 깃든 책이 좋았고, 골목동네 자그마한 가난뱅이 집에 살면서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다가 꽃과 나무와 풀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키우면서 옆지기나 저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보육원에든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붙어 지내야 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내고 아이를 또래 동무하고 억지로 사귀도록 내몰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탓도 있다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안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키우기란 얼마나 즐겁고 신나고 아름답고 멋진데요. 다만, 참말 힘들고 고되고 괴롭고 벅찹니다. 즐거우면서 힘들고, 신나면서 고되며, 아름다우며 괴롭고, 멋지며 벅찹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옆지기는 퍽 자주 “아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따로 말로 나타낼 줄을 모르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아빠가 좋아한다는 책이라 하지만, 정작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 아이 바로 너를 돌보면 다 알 수 있는 지식과 생각이 담긴 책이니, 굳이 이런저런 책을 읽기보다 바로 너하고 어울리면 아빠가 몸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고 곰삭일 수 있음’을 배우곤 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팔이 빠지거나 허리가 쑤시는 가운데, 날마다 치워도 끝이 없을 뿐더러 나날이 아이 옷가지 빨래가 넘쳐나는 이 모든 고단함이 곧바로 아이키우기에서 얻는 보람이 됩니다.

 예전에 혼자 살 때에도 아이들 그림책을 참으로 신나게 사들이며 혼자서 즐겁게 보았고, 오늘날 세 식구 살아가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지없이 반가이 장만하며 세 식구 나란히 봅니다. 지난날에 아이들 그림책을 신나게 사들이던 때에는 아이들 그림책이란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보고 어른들이 ‘꼭’ 함께 보면서 ‘아이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할 책이라고 느꼈고, 오늘날 세 식구 복닥이며 아이들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책과 아이가 쳐다보지 않는 책이 갈리는구나. 왜 갈릴까?’ 하고 돌아보면서, 아이가 콧방귀조차 잘 안 뀌는 책에는 아이가 이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차츰차츰 깨닫습니다. 그림만 이쁘장하다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이 엉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림 하나하나에 너른 사랑이 담겼을 때에는 아이는 어김없이 알아챕니다. 그림이 알록달록하더라도 아이가 달가이 받아들이지만 않으며, 그림이 수수하다 할지라도 그림마다 깊은 마음이 스몄을 때에는 아이는 아주 좋아하고 자주 펼쳐 봅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중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림책을 끄집어 내서 아빠나 엄마 앞에 집어던졌고, 조금 더 큰 뒤에는 아빠나 엄마 무릎에 그림책을 들고 털썩 주저앉아 얼른 펼쳐 달라고 옹알거리고, 이제는 혼자 책을 펼쳐서 한참 들여다보곤 하며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되풀이 넘기곤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아이한테 참으로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동안 제가 장만한 그림책들은 거의 다 우리 아이 또한 퍽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다른 아이를 바라볼 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길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몸소 아이를 낳아 길렀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루 내내 벌써 스무 달째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아니, 스무 달째 아이와 하루 내내 붙어 지냈다기보다 스무 달째 아이하고 얽힌 모든 일을 엄마랑 아빠랑 모두 손으로 보듬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마음으로 사귀어 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린이책을 어린이만 보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엄마 아빠 된 사람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날 이원수 님과 이오덕 님부터 줄곧 외친 까닭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이란 책 하나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좋은 다리이거든요. 아름다운 고리이거든요. 멋진 놀잇감이거든요. 훌륭한 배움터이거든요. 넉넉한 보금자리이거든요. 재미난 이야기보따리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손길이거든요.

 어른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책을 돈바라기 눈길과 몸짓으로 만드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에는 몹시 싫습니다. 몹시 딱합니다. 몹시 슬픕니다. 어린이책이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빚을 책이고, 어린이책부터 사랑으로 빚는 매무새를 갈고닦아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크면서 어른이 되어 어른책을 빚을 때에도 돈바라기 어른책이 아닌 사랑바라기 어른책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림과 뜻만 좋은 어린이책을 넘어


 그림책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는 어린 오누이가 목도리를 놓고 다툼질을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오누이한테 뜨개 목도리를 선물해 준 할머니가 슬기로운 생각을 짜내어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묶어 준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그림결에 따라 재미나고 살가운 이야기를 펼치는 좋은 어린이책입니다. 노란빛 목도리는 노란빛대로 어여쁘고 빨간빛 목도리는 빨간빛대로 어여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코앞에 마주하는 좀더 나아 보이는 빛깔에 끌리면서 시샘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샘을 다스리며 한결 사랑스러운 길로 나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차근차근 풀어 보입니다.


.. 치프와 초코는 강아지 오누이입니다. 오늘 할머니께서 선물을 보내 주셨어요. 오빠 치프에게는 노란 목도리를, 여동생 초코에게는 빨간 목도리를 보내셨습니다. 치프는 노란 목도리를 보고 좋아하며 말했어요. “이 목도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말이 색깔이야. 치프는 목도리를 목에 둘렀습니다. 초코는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가 더 멋져 보였어요. “나도 달걀말이 색깔 목도리가 좋아. 바꿔 줘, 바꿔 줘.” 엄마가 말했어요. “어머, 초코의 목도리는 빨갛고 귀여운 딸기 색인걸.” ..  (2∼4쪽)


 그림책이 되든 어린이책이 되든 어른문학책이 되든 마찬가지인데, 기나긴 말을 줄줄줄 늘어뜨리면서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을 들 수 없습니다. 짤막한 한두 줄로 느낌과 생각과 삶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에서도 할머니가 뜨개 목도리를 선물한 이야기를 짤막히 보여주고, 동생이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를 더 좋아하지만, 엄마가 잘 달래 주는 모습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첫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한테나 엄마한테나(또 이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아빠한테나) 큰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누이한테 선물한 목도리는 할머니가 한 땀 두 땀 애써 뜨개질을 해서 일군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몇 푼으로 치른 목도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넋으로 애틋하게 뜬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해요. 엄마도 아이도 “할머니 고맙습니다.”라든지 “우와, 이 목도리를 손으로 떴다구요?”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목에서 이런 대목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두 오누이가 노란빛과 빨간빛을 보고 다툼질을 하겠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시샘하며 다툼질을 하더라도 ‘할머니 사랑 손길’을 돌아보는 매무새를 한 줄쯤 살며시 밝힐 수 있었다면, 이 그림책은 더없이 따스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초코는 다시 노란색 목도리가 갖고 싶어졌어요. “바꿔 줘, 바꿔 줘.” “싫어. 나도 노란색이 좋단 말이야.” 초코가 울기 시작했어요. 치프는 하는 수 없이 목도리를 바꿔 주었어요.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  (10∼11쪽)


 아이들은 둘이 저마다 받은 목도리에 얼마나 깊고 짙고 너른 사랑이 담겼는지를 먼저 찬찬히 살피면서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에, 할머니 댁으로 찾아가면서도 끝없이 다툼질을 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또는 더 좋은 물건을 오빠한테 주거나 동생한테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오누이가 아니라,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겠어!’ 하는 마음만 부글거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라지만, 왜 오누이이든 형제이든 자매이든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우리 어른이 잘못 가르친 탓인가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들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은 것’을 스스럼없이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없는 탓인가요.


.. 할머니네 집이 바로 눈앞이에요. 꽃밭에는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예뻤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밭을 보니 치프는 걱정스러웠어요 ..  (16∼17쪽)


 오누이는 할머니 댁에 와서도 “할머니, 선물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누이가 좋아한다는 땅콩빵을 먹으면서도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기에 바쁩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도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 보기 바빴을 뿐이듯, 밥상머리에서도 “할머니도 와서 함께 먹어요!”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두 오누이 목도리 실을 끌러 새로 뜰 때까지도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저희끼리만 놀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와 흐름과 끝맺음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철없는 오누이들 다툼질을 할머니가 잘 마무리지어서 다시금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다고 ‘가르침’을 베푸는 얼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누이부터 오누이를 기르는 아빠엄마 모두 옳게 살아간다고 하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사랑이나 믿음이나 나눔이란 귀퉁이 한 자락에도 깃들어 있지 않아요.

 내 밥그릇에만 눈길이 머뭅니다. 내 손아귀에만 눈썰미를 둡니다. 내 몸치레에만 눈높이를 맞춥니다. 슬픈 우리 삶이 어여쁜 그림책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 치프와 초코는 할머니가 만든 땅콩 빵을 아주 좋아해요. 목도리 일은 까맣게 잊고 산처럼 쌓인 땅콩 빵을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아까 둘이 왜 울었는지 듣고는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할머니는 둘의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  (20∼21쪽)


 문학책에서야 어찌어찌 다루어도 된다고 하지만, 뜨개질을 아무리 잘하는 분이라 하여도 목도리 둘을 후딱 뜰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찌 되었든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땅콩빵을 먹는 짧은 동안에 할머니가 목도리 둘을 ‘짠!’ 하고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노랑과 빨강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목도리를 새로 받아들고는 기뻐합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목도리요, 그냥 후딱 뜰 수 있는 목도리인 듯 여깁니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그림결이며 오누이가 이래저래 시샘하고 다툼질을 하다가도 잘 끝난다는 줄거리라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림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두 오누이를 불러 “얘들아, 이 목도리란 말이지, 할머니가 너희 오누이를 사랑하면서 한 땀 한 땀 떴단다. 노란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뜻과 사랑을 담고, 빨간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넋과 믿음을 담았지.” 하면서 노란 목도리는 얼마나 노랗게 아름답고 빨간 목도리는 얼마나 빨갛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나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너희한테 노란 목도리와 빨간 목도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도 안 하고 주어서 다투었구나. 할머니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구나.” 하면서 할머니가 참다운 슬기를 뽐내는 얼거리로 뻗어나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만큼으로 마무리짓는 그림책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만큼으로 이루어 낸 그림책이어도 반갑습니다. 이만큼이나마 했어도 고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이만큼이나 돌아보거나 살필 겨를이 없이, 몹시 바빠맞도록 돈벌이에 매여 있는 탓입니다.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는 할머니를 기쁘게 맞이할 딸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쉬운 우리 삶에 걸맞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그림책이라 할 터이나, 아쉬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예쁘고 곱고 재미나고 뜻있기까지 한 그림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겠다고 봅니다.

 이 그림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며 더 너른 따스함을 꽃피울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감을 더 좋은 그림틀에 실어내면서 더 따사롭고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를 껴안고 어루만지는 훌륭한 그림책을 새삼 기다리고 손꼽아 봅니다. (4343.3.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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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문화유산 해설사 따라 사찰 여행
박상용 지음, 호연 그림 / 낮은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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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한테는 좋은 그림책이 함께 있어야
 [그림책이 좋다 75] 박상용(글)+호연(그림),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책이름 :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글 : 박상용
- 그림 : 호연
- 펴낸곳 : 낮은산 (2010.1.15.)
- 책값 : 11000원


 (1) 그림책을 보는 눈


 아이를 낳아 기르기 앞서부터 그림책을 즐겼습니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한 까닭도 있으나, 이에 앞서 1999년 봄날 《우리 순이 어디 가니》라는 그림책을 만난 뒤로 그림책에 빠져들었습니다.

 1998년 12월을 끝으로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휴학계를 냈고(자퇴서를 내면 융자 받아 내던 학비를 한 달 안에 한꺼번에 갚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휴학계를 냈습니다), 오로지 신문배달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새벽에 일 마치고 그날 돌린 신문과 다른 지국에서 얻은 10대 일간지를 하나하나 넘기다가 ‘세밀화 그림책 봄 이야기’가 나왔다는 자그마한 기사를 보고는 ‘어, 이런 그림책도 있었나? 그림책이란 이런 책이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날 아침에 대학교 앞 구내서점이 문을 열자마자 신문배달 짐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서 책방 누나한테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주문했습니다. 이무렵 신문배달 한 달 일삯으로 32만 원을 받고 있던 터라(220부를 돌린 일삯), 그림책 한 권 값 7500원이란 퍽 만만하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다달이 10만 원을 적금으로 부었고 나머지 22만 원으로 먹고 입고 책 사 읽고 소식지 만드는 돈을 대고 있었거든요.

 이틀 뒤 주문한 책이 책방에 왔고, 책방으로 찾아가 7500원 온돈을 치르고 장만하여 신문사지국으로 돌아와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넘깁니다. 홀로 있는 지국에서 조용히 책장을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기는 동안 볼을 타고 눈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그림책이란 이렇구나,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보이는 까닭이 이렇구나,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함께 즐기는 책이구나.’

 그림책을 두 번째 넘긴 다음 덮습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봅니다. 어린 날, 집에서 그림책을 본 일이 있었나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였으나 집에서 마땅히 그림책을 본 일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1982∼1987년에 국민학교를 다닌 저로서는 괜찮은 그림책이 얼마 없던 때이니까요. 우리 형이든 저이든, 또 동네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다른 동무들이든 살가운 그림책 하나 보면서 큰 동무는 없습니다. 꽤나 잘사는 아이들이었다면 동화책쯤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괜찮은 그림책까지 아니더라도 ‘그림책 꼴을 갖춘 책’이란 만나기 참 어려웠습니다.


.. 문화재란 옛사람들이 살아온 자취입니다. 옛사람들이 의식주에 사용했던 것들은 모두 문화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쓰던 도구 또한 오늘까지 전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갖고 만들었던 불상이나 석탑은 잘 닳지 않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잘 남겨져 문화재가 된 것입니다 ..  (17쪽)


 1999년 봄부터는 책방마실을 할 때에 그림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해 여름에 신문배달 일을 접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어린이책 출판사에 들어가 받은 일삯은 62만 원. 신문딸배 적과 견주면 두 곱이 되는 일삯. 얼른 적금 하나를 더 들어 25만 원을 붓는 통장을 하나 마련하면서도 ‘돈이 남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출판사 일꾼 얼굴을 하나둘 익히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만든 좋은 그림책을 하나둘 선물로 받고, 제 깜냥껏 눈결을 다스리면서 헌책방에서 ‘판 끊어진 예전 어린이책과 그림책’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무렵, 1982년에 ‘백제’라는 출판사에서 ‘현대세계걸작동화’라는 이름을 붙여 스물여섯 권짜리 ‘그림책 전집’을 내놓았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 일꾼들은 이 그림책을 모르고 있었으나, 헌책방에는 버젓이 이 그림책이 있었거든요. ‘백제’라는 출판사가 ‘돈 까밀로와 빼뽀네’ 책으로 큰돈을 번 다음 내놓은 ‘현대세계걸작동화’였는데, 백제 출판사는 갑작스레 번 큰돈으로 영어교재를 만든다고 하다가 폭삭 무너졌습니다. 이러면서 이 그림책은 통째로 ‘문선사’로 옮겨 1984년부터 1980년대 끝무렵까지 다시 펴냅니다.

 헌책방에서 ‘현대세계걸작동화’ 스물여섯 권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짝을 맞추면서(아직 두 권을 못 찾았습니다) 속이 떨떠름합니다. 왜냐하면 이 멋지고 훌륭한 그림책들을 우리 아버지께서는 1980년대에 당신 아이 둘이 국민학생이었을 때에 한 번도 장만해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이 그림책을 당신이 맡은 국민학교 아이들한테는 장만해서 읽혔는지 모를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훌륭한 교사로 지내셨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스물여섯 권 모두는 어렵다 하여도 다문 한 권이라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봅니다. 《까마귀 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책은 이때에 《까마귀 도령》이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 그림책 《로타와 자전거》는 이때에 처음으로 옮겨진 뒤 아직 다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절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일주문을 들어설 때부터는 깨끗하고 고귀한 곳에 간다는 생각을 갖고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좋겠습니다 … 단청은 무척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파랑ㆍ하양ㆍ빨강ㆍ검정ㆍ노랑 이렇게 다섯 가지 색깔인 ‘오방색’을 기본으로, 이 색들을 섞었을 때 나오는 몇 가지 중간색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오방색은 동서남북 가운데의 다섯 방향과 나무ㆍ쇠ㆍ불ㆍ물ㆍ흙 다섯 원소를 뜻합니다. 이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좋은 기운을 뿜어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  (28, 100쪽)


 제가 어린 날 즐겁게 본 그림책이 하나도 없었나 하고 다시금 머리를 쥐어짜내면 꼭 한 가지 떠오르기는 합니다. 우리 형이 중학교에 들어선 다음 아버지가 사 주어 다달이 숙제를 해내도록 했던 학습지 별책부록으로 나왔던 《아모스와 보리스》 하나가 있습니다. 학습지에 딸린 해적판 《아모스와 보리스》는 1994년에 《생쥐와 고래》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온 ‘윌리엄 스타이그’ 그림책이었습니다. 비록 해적판이기는 하지만, 얄팍하고 번역 어설픈 학습지 별책부록 《아모스와 보리스》를 천 번 가까이 되읽곤 했습니다. 1999년 가을, 《생쥐와 고래》라는 그림책을 책방 책꽂이에서 만나면서 얼마나 반갑고 서럽고 기쁘고 아팠는지.

 저와 나이가 같은 대학교 적 동무는 국민학교 3학년 때에 《몽실 언니》를 읽었다고 했습니다. 권정생 님 《몽실 언니》는 1984년에 나왔고 이때가 우리한테 국민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몽실 언니》를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 집에서 밍기적거리다가 헌책방 나들이를 하던 1998년 1월에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열네 해나 지난 끝에 만난 셈이고,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서야 읽었습니다. 이때에도 이 놀랍고 아름다운 책을 왜 나는 국민학생 때에 읽지 못했나 되새기면서 가슴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와 되새기면, 어린 날 여러모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만나지 못했기에 오늘에 와서 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뒤늦게 알아채어 읽고 삭이고 즐길 수 있다고 할 테지만, 또한 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우리 아이한테는 제때에 제대로 읽힐 수 있게끔 하고자 힘쓰지만, 제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허전함이란 지우기 어렵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린 날 제 삶이란 워낙 개구져서 날이면 날마다 동무들하고 밖에서 뒹굴며 뛰놀았으니 책을 쥐어 주었다 하여도 안 읽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슴을 적시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눌려 밖에서 뒹굴며 뛰놀 생각을 잊고 집안에 틀어박혔을는지 모릅니다. 집안에 틀어박힌 채 책을 파고들었다면 좋은 책으로 마음밭이 한결 넉넉했을 터이나, 그만큼 바깥에서 동무들하고 골목놀이를 하며 부대끼지 않았을 테니 ‘뛰놀던 어린 나날’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어린 나날에 좋은 어린이책을 만나야 하고 좋은 그림책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어김없이 어린 나날부터 살가운 그림책을 마주해야 하며 살가운 어린이책으로 어린이 마음에 착하고 곱고 맑고 튼튼하고 씩씩한 넋이 자라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만 키울 수 없는 어린이 마음입니다. 흙밭에서 뛰고 땀내 나도록 달리며 때로는 무릎이 까지고 팔뚝이 벗겨지고 얼굴이 새까매지도록 부대끼며 마음과 몸이 나란히 쑥쑥 자라야 할 어린이 삶입니다.


.. 지방 권력자들의 사상적인 협력자가 된 육두품 세력은 절을 지어 머물며 공부를 계속했는데, 터를 정할 때 ‘풍수’를 적용해 명당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산속의 좋은 자리에 절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종교적인 기능뿐 아니라 관광 명승지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30∼32쪽)


 1999년부터 2010년 봄까지 이천 권 남짓 그림책을 장만하여 늘 다시 꺼내어 펼치고 읽고 삭이면서 곰곰이 헤아립니다. 저한테 아름다운 그림책이란 제 마음을 아름다이 살찌우는 그림책입니다. 하루하루 알차게 꾸리고픈 제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책이 저한테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여야 재미있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별나라를 가고 달나라를 가며 해나라를 넘나들어야 신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걸레질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심부름을 하며 밥상을 차리고 쓰레기를 치우고 하는 갖가지 살림을 익히는 삶자락이 고이 담길 수 있으면서, 한 사람이 고운 목숨을 사랑스레 일구면서 내 몸과 마음을 오롯이 아낄 수 있도록 어깨동무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밑틀을 따스한 눈높이로 넉넉하게 품어 안을 수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나와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모두 빛나는 넋을 가슴에 담고 있음을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지식이란 부질없습니다. 삶이어야 아름답습니다. 정보란 덧없습니다. 땀방울이어야 알찹니다.

 삶이란 집살림일 수 있고 마을살림일 수 있으며 나라살림일 수 있습니다. 자연살림이나 겨레살림일 수 있겠지요. 학교살림이나 들살림이나 갯살림이나 멧살림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살림도 되고, 아파트살림도 될 테지요.

 땀방울이란 놀며 흘리는 땀방울일 수 있고 일하며 흘리는 땀방울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닫는 땀방울이 아닌 서로 나란히 나아가는 땀방울이어야 합니다. 신나게 놀고 기운차게 일하는 땀방울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아름다운 그림책 하나라 할 때에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즐겁게 쥐어들고 펼치며 가슴에 새길 수 있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사랑할 수 없다 한다면 아름다운 그림책이 아닙니다.


 (2) 절에 담긴 마음과 그림에 담는 뜻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그림책을 봅니다.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를 ‘그림책 갈래’에 넣을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분이 있을 텐데, 절 문화를 사진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사진으로만 이루어진 이 같은 짜임새 책일 때에도 ‘그림책 갈래’에 들 수 있습니다. 만화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도 ‘그림책 갈래’에 녹아들 수 있어요.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그림책은 이 땅에서 오래디오랜 나날을 여느 사람을 비롯하여 권력자까지 골고루 마음자리에 스며들어 왔던 ‘불교 문화’가 ‘절집’에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면서 이어왔는가를 부드러운 말씨로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만화쟁이 호연 님이 산뜻하고 정갈한 그림을 사이사이 넣어 ‘절집 문화’를 한결 포근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끕니다.


.. 그런데 불상이 생기고부터는 탑을 바라보면서 불러일으켜지는 신앙심보다는 위대한 이의 외형을 그대로 본따 만든 불상을 보면서 신앙심을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절의 중심이 점점 더 불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세워졌을 때, 고려가 멸망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불교의 폐단이 심했던 점이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불교가 귀족화되면서 일반 사람들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불교 행사만 성대하게 하고, 절에 많은 땅을 주어 일반 농민은 땅고 가지지 못하고 고통을 당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66, 84쪽)


 저는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를 장만하면서 이 책에 담긴 줄거리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절집 얼거리를 이 책을 읽으면서 좀더 꼼꼼하고 찬찬히 알아챈 다음 절집 나들이를 한다면 한결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보람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절집 얼거리를 하나도 모르는 채 절집 나들이를 한다면 내 가슴에 올망졸망 스며들 이야기가 얼마 없을 수 있어요. 아직 절집 삶과 문화를 모를 아이들한테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는 더없이 도움이 되고 길잡이가 되리라 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한테도 좋은 길잡이가 될 테지요.

 저로서는 이 그림책에 그림을 넣은 호연 님 그림이 좋아서 장만했습니다.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 그림을 넣은 호연 님은 《도자기》(애니북스2008)라는 대단한 작품을 내놓았던 분이고, 요즈음은 당신 누리사랑방(blog.naver.com/sakumkun)에 “사금일기”를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겪고 보고 느끼는 이야기를 서너 칸(거의 세 칸짜리로) 그림이야기로 선보이고 있어요. 호연 님이 당신 누리사랑방에 “사금일기”를 올릴 때마다 챙겨 보던 어느 날 당신 그림을 넣은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책 소식이 떴기에 기꺼이 이 그림책을 장만했고, 이 그림책에 담긴 줄거리 또한 참 쉽고 부드러이 잘 풀어냈다고 느끼는 한편, 이와 같은 줄거리를 이만큼 제대로 삭이고 헤아리면서 그림으로 풀어낸 사람이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될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 좋아합니다.

 ‘문화유산 해설사 따라 사찰 여행’이라는 이름을 함께 붙여 펴낸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 이어, 우리 나라에 뿌리내린 역사 깊은 예배당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낮은산 출판사에서 앞으로 새롭게 펴낼 수 있을지 궁금한데, 서양 종교라고 하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불교 또한 나라밖에서 들어와 사람들한테 뿌리내린 믿음이었던 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한테 뿌리내리는 서양 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 삶과 문화 이야기를 다루는 살갑고 포근한 그림책을 함께 선보일 수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은 것은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있었던 삼국 시대입니다 ..  (13쪽)


 그런데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서는 한 가지 대목에서 아쉽습니다. 첫머리와 몇 군데에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있었던 삼국 시대”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왜 ‘가야’를 빠뜨렸을까요? 익히 입에 굳은 대로 읊고 만 탓일까요? 학교 역사에서 ‘가야’를 모두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왜 가야 이야기는 빼고 ‘삼국 시대’라고 해 버리고 말까요? 우리 옛 역사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까지 ‘네 나라 시대’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는지요.

 그렇지만 이 그림책 하나만 탓할 수 없습니다. ‘삼국 시대’라는 말은 이 그림책에서만 쓰지 않습니다. 우리 교과서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교과서와 맞물려 우리 생각과 지식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안타깝게도 북녘 또한 ‘세나라시기’라고 말합니다. 북녘 또한 가야 역사를 빠뜨린 채 ‘세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여태까지는 ‘삼국사기’이니 ‘삼국유사’이니 하는 이름에 얽매이며 ‘삼국’이나 ‘세 나라’라는 엉뚱한 이름을 썼다 하여도, 이제부터는 ‘사국’이나 ‘네 나라’라는 이름을 알맞고 올바르게 찾아서 우리 삶과 발자국과 터전을 다룰 수 있는 눈높이로 거듭날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좋은 그림책에 깃든 자잘한 티끌을 걷어내어 그지없이 알차고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애틋하게 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3.3.26.쇠.ㅎㄲㅅㄱ)
  

















(네이버에서 '사금일기'를 넣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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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2014-06-30 13:31   좋아요 0 | URL
<로타와 자전거>는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논장출판사) 제목으로 이번에 출간되었습니다. 소식 전해드려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느낌이 있는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을 꿈꾸겠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9] 박경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세상으로 나와서 스무 달째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이제 밤에 두 번이나 세 번, 때로는 한 번만 칭얼거립니다. 깊은 밤에 두세 번씩 깨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기란 만만하지 않은 노릇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에서 조용히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한창 갓난아기일 때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기저귀갈이를 해야 했고 백일 때까지는 한 시간이 아닌 삼십 분마다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무렵은 잠을 잔다기보다 졸면서 아기를 본다고 해야 맞았고, 밤 사이에 똥기저귀 빨래를 여러 차례 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스스로 잘 걷고 달리기까지 하는 만큼, 이제는 아이를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골목을 휘저을 때에는 어김없이 아이를 안아야 하고, 고단해 하거나 힘들어 하면 그때그때 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걷는다 하더라도 아이 몸으로는 한 시간 넘게 걷기란 몹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집에서는 쉬잖고 뛰논달지라도 밖에서는 삼십 분을 거닐어도 몹시 힘든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바깥바람을 쏘이며 아이를 걸릴 때면, 아이가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동네 모습이 아이 눈에 어떻게 비칠까 퍽 걱정스럽습니다. 어른 눈으로 보자면 고즈넉한 골목동네랄 수 있으나, 조금만 걸어나가면 곧장 시내이고 유흥거리가 나옵니다. 몇 분 걷지 않아도 자동차 우글거리는 큰길이 나오고, 큰길에는 시끄러운 노래 흘러나오고 번쩍이는 불빛 가득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여느 도시이든 시골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익히 보고 길들고 젖어드는 삶자락이란 온통 소비주의 물질문명입니다.


.. 그럼, 곰은 무엇을 먹고 살까? 그 옛날 곰은 육식동물이었다. 그러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잡식으로 바뀌었고, 초식으로 변해 가는 단계라고 알려져 있다. 봄에는 부드러운 나뭇잎과 꽃, 나물류를 맛있게 먹는다. 열매가 맺는 여름에는 덜 익은 열매를 먹는데, 달콤한 산딸기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 벚나무 열매, 머루, 다래처럼 사람들이 먹는 모든 열매를 좋아한다 … 이 땅에 산양이 산다는 것은 천연기념물 한 종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땅의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  (16, 43쪽)


 그제 아침 민방위훈련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민방위훈련 통지서는 참 질기게 온다고 느끼면서,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런 훈련을 시키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를 한동안 곱씹습니다. 누가 무엇을 지키라는 민방위요, 우리가 지킬 만한 아름답거나 빛나는 터전이란 어디일까요. 고향이요 삶터임을 떠나, 내가 깃든 이 도시가, 많은 사람들 복닥이는 이 도시가, 얼마나 지킬 만한 값이 있거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기 어려운 이 도시가, 사람 아닌 뭇목숨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이 터전이,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개성과 다양성을 건사할 수 없는 이 자리가, 어느 만큼 지킬 값이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낮 목에 사진기를 걸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눈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빗길이었는데 삼십 분쯤 걷다 보니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한동안은 싸락눈이더니 이내 굵은 눈송이로 바뀌었고, 얼음눈이 우산에 철벅철벅 들러붙어 무겁습니다. 눈과 바람과 얼음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얼어붙습니다. 눈으로 덮이는 동네를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으며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곱고 맑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에 내린 눈은 그때그때 걷어내거나 치우며, 시골에 내린 눈이 아니고는 햇볕에 녹거나 마르기란 어렵습니다. 아주 잠깐 하얗게 덮어 줄 뿐이요, 요사이는 눈이 내리는 동안에도 쌓이지 않도록 바지런히 쓸고 치웁니다.


..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제안한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인이었다. 1933년 일본인 다무라(田村剛)는 금강산을 답사한 뒤 국립공원 지정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 사람들은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까지 하이힐을 신고 간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는 실제로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이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산이 낮고 완만해서가 아니다. 향적봉은 1614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지만, 곤돌라를 타고 단숨에 봉우리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29, 210쪽)


 국립공원 나들이를 생각하는 이들한테 좋은 길잡이가 될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을 읽는 새벽나절, 시계는 세 시 삼 분을 가리키는데, 우리 윗집에 사는 분이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 무겁게 내며 계단을 딛고 올라갑니다. 윗집 이웃은 무슨 일로 이 깊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갈까요. 택시를 몰기 때문에 이제야 일이 끝나서? 그러고 보면, 퍽 자주 이 깊은 새벽에 발걸음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는 아이가 새벽나절 발걸음 소리에 놀라 깨곤 해서 퍽 애를 먹었습니다. 기찻길 옆 골목집에 살 때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울리는 기차소리에도 깨지 않더니.

 “여행이 더 즐거우려면 여행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하다(80쪽)”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힘주어 말하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쓰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국립공원 둘레 마을’ 사람들 목소리를 빌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 누구나 쓰레기를 손쉽게 만들어 냅니다. 아니, 우리 나라 얼거리는 쓰레기를 끝없이 새로 만들도록 짜여 있습니다. 도시 삶터란 새 물건을 만들어 사고팔면서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도록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알뜰히 건사하거나 돌보면서 우리 터전을 맑고 곱게 지키도록 하는 틀로 맞추어 놓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다시쓰기나 되살려쓰기 얼거리를 이루어 놓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을 찾아가든 여느 관광지를 찾아가든, 우리는 우리 삶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찾아가서 지냅니다. 우리 삶자리에서 우리 동네를 맑고 곱게 건사하는 매무새를 지키고 있다면, 어느 곳에 간들 그곳 삶자리를 다치게 하거나 흐트려 놓거나 헤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자리부터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얼개여야 비로소 관광지에서도 관광지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살피고 껴안는 삶얼개를 이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에서든 《희망을 여행하라》라는 책에서든 《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에서든,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타령을 제아무리 줄줄줄 늘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낌새가 없습니다. 나아질 구석이 없습니다.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진보 지식인마저 1회용품을 버젓이 쓰고 있거든요.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보수 우익 인사조차 헌 물건 고쳐쓰기와 재활용품 살리기와 생협 매장 다니기와 텃밭농사 같은 일을 안 하고 있거든요.


.. 여행지에서 여행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역 경제를 살릴 반가운 손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쓰레기만 남기고 지역문화를 훼손하는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산에 올라 보면 유독 정상에만 사람들이 북적댄다. 근처에 있는 너른 공간과 시원한 숲그늘을 마다 하고, 굳이 햇볕이 내리쬐고 강한 바람이 부는 정상에만 몰려 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산봉우리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한 채 바위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서만 오르는 바람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흙이 쓸려내린 것이다. 그리고 정상을 밟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정상 표지석을 끌어안고 기념촬영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  (45, 177쪽)


 말이 좋아 ‘여행’이요 ‘탐방’이요 ‘트레킹’입니다. 예부터 써 온 우리 말로 하자면 ‘나들이’이거나 ‘마실’입니다. 나들이나 마실이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찾아가는 일”입니다. 국립공원이든 관광지이든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려도 되는’ 곳이 아니라, ‘내 이웃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든 뭐를 하든 순례를 하든 트레킹을 하든 ‘누군가 살아가는 마을’을 찾아가서 돌아보고 즐기고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에 사람들이 있든 들짐승이나 멧짐승이 있든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과 다름없이 곱고 어여쁘고 알뜰한 마을이나 보금자리나 삶자리’를 찾아가서 마주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를 추스르듯 우리가 찾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와 모양새를 번듯하고 야무지고 싱그럽고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내 보금자리 동네에서 내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느낄 노릇이요, 내가 찾아가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에서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 국립공원은 우리 나라 생태계에서 가장 보전가치가 있는 곳이자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할 만큼 소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다 ..  (7쪽)


 그 숲에 가는 우리들은 이 숲 또는 이 도시 또는 이 아파트 또는 이 골목동네에서 아름다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섬에 찾아가는 우리들은 이 동네 또는 이 빌라 또는 이 도심지에서 살가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를 사랑하듯 내 아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요, 내 어버이를 아끼듯 내 이웃을 아끼는 한 사람이며, 내 동무를 살피듯 낯선 손님을 살피는 한 사람입니다.

 국립공원이란 나라에서 좀더 마음을 써서 건사하는 자연 터전이라 하는데, 국립공원만 건사해서 되는 나라살림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에 좀더 마음을 써야 한달 뿐이요, 우리 터전 어느 곳이든 마음을 샅샅이 쏟아야 합니다. 국립공원만 깨끗이 지켜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 할지라도 맛보고 껴안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생각하고 느끼는 삶’이어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여행’이 되자면, 맨 먼저 ‘천천히 기다리는 삶’을 내 삶으로 곰삭여 놓아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새로운 국립공원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한편, 국립공원 아닌 곳은 손쉽게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국립공원마저도 차근차근 잡아먹으며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4343.3.23.불.ㅎㄲㅅㄱ)


 ┌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양철북 펴냄,2010)
 ├ 글ㆍ사진 : 박경화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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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1
제러미 시프먼 지음, 임선근 옮김 / 포노(PHONO)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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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노래이나, 아름다운 삶은 아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8] 제러미 시프먼,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



 제가 1980년대에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는 다달이 한 번쯤 학교에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사내아이라 해서 실과 수업을 빠진다든지 덜 해도 되는 법이란 없었습니다. 사내아이이든 계집아이이든 똑같이 실과 수업을 하면서 밥하기와 찌개 끓이기와 바느질하기와 톱질하기 들을 배웠고, 이처럼 배우는 살림일을 몸소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쯤 밥하기를 하니까, 이날은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도 됩니다. 따로 학교에서 밥하기를 배우지 않더라도 또래 동무들은 거의 모두 집에서 ‘혼자 밥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계집아이이든 사내아이이든 2∼3학년쯤이면 쌀을 일고 물을 맞추어 솥밥이나 냄비밥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웬만큼 집살림을 거드는 아이들은 김치찌개이든 된장찌개이든 제법 끓일 줄 알았습니다. 밥물을 맞출 줄 모른다든지 조리를 쓸 줄 모른다든지 밥불을 놓을 줄 모른다든지 하는 동무는 핀잔을 듣거나 나무람을 듣기 마련이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집살림이 넉넉한 동무는 거의 없었습니다. 동무들은 하나같이 고만고만하게 가난한 집살림이었고, 가난한 집살림에서 동무네 어버이들은 하나같이 바깥일을 하느라 바쁘고 고된 만큼 동무들은 집에서 집안일을 많이 거들어야 했습니다. 여자라서 일찌감치 집안일을 배워 거든다거나 남자라서 집안일을 안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 모차르트에게 스승이라고는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이들을 학교 문전에도 데려가지 않고, 또래와의 우정을 거의 박탈한 채로 키웠다 … 모차르트는 세상을 뜰 때까지 버드, 프레스코발디, 몬테베르디 같은 이름들을 전혀 몰랐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믿기 어렵지만 그가 바흐나 헨텔의 작품들을 발견한 것도 최전성기를 누리던 1780년대의 일이다 … 마지막 교향곡 세 곡은 놀랍게도 고작 6주 사이에, 그것도 경제적인 궁핍이 극에 달했을 때에 작곡되었다. 모차르트가 그 작품들이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들이 될 것을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그때 겨우 32살이었고, 그 뒤로 세 해를 더 살았다 ..  (29, 37, 130쪽)


 입시지옥에 매인 중학교 1학년부터는 텔레비전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텔레비전하고 가까이 붙어 지낸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보던 텔레비전 영화 가운데 무술 영화를 떠올리면 예전 무술 영화에서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은 으레 ‘스승이 사는 집으로 찾아가서 여러 해 동안 밥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같은 집안일을 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제자 되는 사람은 여러 해 동안 ‘무술은 하나도 안 가르쳐 주고 집안일만 시키며 부려먹는다’며 골을 부립니다. 스승은 빙그레 웃으면서 ‘넌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집안일을 더 시키’는데, 제자 된 사람은 ‘무술을 하는 솜씨’를 아직 몸에 익히지 않았으나 ‘무술을 할 때에 함께 해야 하는 몸 만들기’는 어느새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재주꾼이 되기’ 앞서 ‘옹글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몸 만들기’를 ‘집안일하기’로 시켜 주고 있던 셈이었습니다.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집안일을 하는 사람치고 뚱뚱하거나 군살 많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몸이 나빠서 붓는다든지 아이를 낳고 몸풀이를 제대로 못해서 뼈가 어긋나며 퉁퉁 부은 아줌마들이 있습니다만, 집안일을 하노라면 그야말로 온몸에서 군살이 붙을 겨를이 없습니다. 내 옷가지만이 아닌 집식구 옷가지를 모조리 손빨래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몸소 한 달쯤 집식구 옷가지를 손빨래를 해 보셔요. 헬스클럽 몇 달 다닐 때보다 한결 억센 팔뚝이 되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불을 빨고 바느질을 해 보셔요. 팔굽혀펴기나 턱걸이를 할 때 못지 않게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도록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아기를 업고 저잣거리 마실을 하여 먹을거리를 장만한 다음 밥하기를 하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를 해 보셔요. 다리통과 등허리가 얼마나 야물딱지게 단단해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오늘날은 집살림을 덜어 준다는 갖가지 기계가 잘 나와 있습니다. 빨래나 청소나 설거지나 밥하기에서 우리 손이 덜 가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손을 덜 써도 되며, 택배라고 하는 제도는 굳이 마실을 나가서 낑낑거리며 들고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냉장고라고 하는 녀석은 먹을거리가 썩지 않도록 건사해 주는 곳간 노릇을 합니다. 여러 날 먹을거리를 한 번에 장만해 놓아도 됩니다.


.. 그는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어떤 불안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는 연주든 작곡이든 뭔가 이루어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주입시켜 놓았음이 분명하다 … 이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아무리 음악의 천재로 살아왔다지만 그는 또래 아이들처럼 자신의 두 날개를 활짝 펴야 할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 많은 신동들이 그러하듯이 모차르트도 어린 시절을 거의 도둑맞고 살았던 것이다 … 1777년에 21살이 된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자신이 작곡한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위대하고 독창적인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  (56, 79쪽)


 우리 삶자락에서 우리 손길을 타는 자리가 많이 줄었습니다. 아니,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우리 손길을 타는 자리란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 눈길을 받고 우리 손길을 타며 우리 마음길이 녹아들 만한 자리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손과 손이 만나는 자리는 잊혀지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 자리는 밀려나며, 마음과 마음이 어울리는 자리는 스러집니다. 사람이 깃들 자리란 얼마 없습니다. 사람이 머물 자리란 몇 군데 없습니다. 사람이 쉴 자리란 자꾸자꾸 밀려납니다. 사람이 부리는 기계이지만 사람이 부리는 기계한테 사람이 쫓겨납니다. 서로서로 살을 부비며 아끼고 사랑하며 돕던 삶결을 어린 날부터 곱게 받아들이면서 맑고 싱그러운 한 사람으로 오롯이 서는 일이란 드뭅니다. 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믿으며 따숩게 얼크러지는 삶자락을 젊은 날에도 고이 이어가면서 튼튼하고 넉넉한 한 사람으로 당차게 서는 일이란 좀처럼 없습니다. 나란히 손을 맞잡으면서 씩씩하고 슬기롭게 빛나는 삶무늬를 늙은 날에도 어여삐 뿌리내리면서 아름답고 멋스러운 한 사람으로 우뚝 서는 일이란 꿈 같은 노릇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맑은 어린이로 살아가며 풋풋한 젊은이로 꿈을 키우고 슬기로운 늙은이로 삶을 마무리하는 삶고리를 알뜰살뜰 꾸릴 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 모차르트는 어떤 면에서는 과장을 극도로 혐오했다. 더 나아가, 극도로 단순하고 명징한 모차르트 피아노 음악의 짜임새는 연주자에게 숨을 구석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 모차르트는 헨델 이래로 후원자라는 족쇄 대신에 자유를 선택한 첫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함께 해방시켜 그들이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든 첫 작곡가로 불려 마땅하다 … 모차르트는 협주곡을 변모시켰다 … 무엇보다도 그는 정복자도 정복당한 자도 없는 유토피아적인 세계, ‘평등 공화국’을 구현해 냈다 … 이후 몇 해에 걸쳐 모차르트가 내놓은 걸작은, 그 수만으로도 경이롭다. 게다가 가르치고 연주하는 의무적 일과, 남편 노릇과 아버지 노릇, 활발한 사교 생활이 기본이고, 작곡은 가욋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작업량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다가 17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의 음악은 그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크게 성격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연주 난이도가 갈수록 높아져서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사기를 꺾었다. 음악의 성격은 음울하고 강력해졌으며 화성적으로는 새로운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 그들(청중)은 슬픔을 맛보려고 콘서트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  (91, 134, 140∼141, 170쪽)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고작 서른다섯 해를 살다가 떠난 모차르트라는 사람이 남긴 노래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짚어 보는 이야기책입니다. ‘노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주 어린 나이에 가락을 쓰고 악기를 타던 모차르트가 어떠한 사람과 부대끼며 어떠한 삶을 꾸렸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모차르트 삶을 옆지기한테 들려줍니다. 옆지기는 지아비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더니, 모차르트한테 피아노 치기가 재미있었을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모차르트는 노래를 짓고 악기를 타는 데에만 너무 바쁘고 매여서 정작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수 없고 할 줄 모르며 할 겨를이 없지 않느냐고 이야기합니다.

 모차르트는 고급스러운 옷을 사들여 입고, 집안을 온통 고급 물건으로 꾸미는 데에 빠져 있었다는데(이 때문에 죽은 뒤에도 빚이 무척 많이 남았답니다), 정작 스스로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지어 입을 줄을 모릅니다. 알아보지 않아도 뻔할 터인데, 모차르트는 손수 밥을 해서 먹은 적이 없겠지요. 언제나 ‘돈을 주고 일을 부리는’ 일꾼들이 밥을 차려 주고 치워 주고 했겠지요. 노래를 지어 돈을 벌고, 이 돈으로 삶을 꾸리던 천재요 신동인 모차르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숱한 운동선수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운동경기 한 가지를 기계처럼 더 꼼꼼하고 뛰어나게 해내는 데에만 눈길을 맞추기 때문에 운동선수한테는 ‘내 삶’이란 없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운동경기 솜씨를 갈고닦는 데에 바쳐야 합니다. 하루라도 운동을 빠지거나 거르면 ‘다른 선수한테 뒤처지기’ 때문에, 운동경기 아닌 일은 생각하지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아마 연예인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예쁘장하고 멋스레 보일는지 모르는데, 예쁘장함이란 무엇이고 멋스러움이란 무엇일까요. ‘화면발이 좋으’면 예쁘장한 삶일까요. 연속극이나 영화에 ‘뭔가 있어 보이도록’ 나오면 멋스러운 삶일는지요.

 어쩌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서는 공부는 잘하여 시험성적은 좋습니다. 그런데 시험성적 잘 나오는 일이 참말 ‘공부 잘하는’ 일이 될까요? 공부란 시험성적 잘 나오도록 하는 일일까요?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점수는 잘 받을 줄 알지만, 걸레 빨기 하나 못하고 걸레질 하나 할 줄 모른다면, 이 아이한테는 무슨 삶이 있다고 할까요.

 커다랗고 까만 자가용을 굴리는 삶이 아름답거나 훌륭한 삶일까 궁금합니다. 커다랗고 비싸며 서울 강아랫마을에 있는 아파트에서 꾸리는 삶이 좋거나 신나는 삶일까 궁금합니다. ㅅㄱㅇ이라는 대학교 졸업장을 따거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대학교에서 받은 학위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삶이 거룩하거나 알찬 삶일까 궁금합니다.


.. “제가 이제까지 아버지께 눈곱만큼의 애정도 보여준 일이 없었으니 이제야말로 애정을 보여줄 순간이라고 주장하시다니, 어처구니없군요. 이게 진짜 아버지 본모습입니까? 제가 아버지를 위해서 제 쾌락을 희생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구요? 제가 여기에서 어떤 쾌락을 누린다는 말씀이세요? 진정 제가 쾌락과 재미에 빠져 흥청망청 지낸다고 믿으시나요? … 제가 뭣 때문에? 돈 때문에요? 저는 부자 아내도 결코 원하지 않고요. (아무튼 베버 씨 가정은 결코 부자도 아닙니다) 설령 결혼을 통해 한 재산을 챙길 수 있다 해도 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제 마음은 다른 문제로 꽉 차 있으니까요. 하느님이 제게 재능을 주셨는데 마누라에 매여 이 황금과 같은 세월을 게으르게 낭비하라고요? 저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한 참이라고요! ..  (149∼150쪽)


 모차르트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차르트한테는 뜻이 맞는 동무가 없었다고 합니다. 꼭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뜻맞는 또래 동무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차르트한테는 ‘천재’요 ‘신동’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준 대단한 솜씨를 부려 노래를 짓는 데에만 온삶을 바치도록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모로 보았을 때 모차르트라고 하는 분은 서른다섯 짧은 해에 걸쳐 어마어마한 노래를 무척 많이 지었습니다. 서른다섯 해로 삶을 마감했으나 코흘리개일 때부터 노래를 지었으니 얼추 서른 해를 ‘노래꾼 삶’으로 보낸 셈입니다.

 역사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워 할 수 있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만, 모차르트가 코흘리개일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쓰고 하지 않으면서 좋은 동무를 사귀고 좋은 자연을 숨쉬면서 살아갔으면 나중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코흘리개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서른 해 ‘노래꾼 삶’으로 보낸 모차르트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좋은 동무들과 아름다운 너른 자연에서 마음껏 뛰놀고 부대끼고 어울리다가, ‘서른 살부터 예순 살까지’ 서른 해를 노래꾼 삶으로 보냈다면 어떤 노래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하늘이 모차르트한테 내려준 선물이란 ‘노래짓기’ 하나뿐이었을까요. 모차르트한테 뜻있고 좋은 일거리와 놀잇감이란 오로지 ‘노래짓기’ 하나만이었을까요. 아름다운 노래를 아름다운 삶을 꾸리면서 아름다운 넋으로 일굴 수 있었다면, 모차르트 서른 해 노래꾼 삶이란 어떤 모양새로 뿌리내렸을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천재성이 담긴 노래와 아름다움이 깃든 노래는 우리 삶을 어떻게 보듬거나 어루만져 줄는지를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우리 아이한테 무슨무슨 천재성이 엿보인다 할지라도 우리 아이한테는 스스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살림 꾸리는 매무새를 익히도록 해 주고 싶습니다. 조금 더 힘을 쏟을 수 있다면 스스로 먹을 밥은 스스로 농사지어 먹는 삶을 다문 며칠이라도 함께 꾸리고 싶습니다. (4343.3.21.해.ㅎㄲㅅㄱ)


 ┌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포토넷 펴냄,2010)
 ├ 글 : 제러미 시프먼
 ├ 옮긴이 : 임선근
 └ 책값 : 2만 원 (노래 시디 두 장 함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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