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과 반동
이갑철 사진, 강운구.김용택 글 / 포토넷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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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7] 이갑철, 《충돌과 반동》



- 책이름 : 충돌과 반동
- 사진 : 이갑철
- 펴낸곳 : 포토넷 (2010.4.1.)
- 책값 : 7만 원



 (1) ‘대가’와 ‘엉터리’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 사진밭에서 ‘대가(大家)’라는 이름이 붙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라밖에서 그리 알아주지 않으나, 나라안에서는 서로서로 추켜세우거나 부추기면서 ‘대가’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꼭 나라밖에서 알아주어야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나라안에서 몇몇이 알아준다 하여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입니다.

 크게 뜻을 이루었다는 분들이란 어떤 분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오랜 나날에 걸쳐 작품 하나 빚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작품 하나 빚기까지 오랜 나날을 보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다른 어느 문화밭이나 예술밭보다 사진밭에서 ‘대가’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팔리고 나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대가라는 이름이 붙거나 이 이름을 붙이는 분들 사진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분들 사진책이 덜 팔린다고 이분들이 대가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많이 팔리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대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무렵부터 사진을 꾸준히 찍고 사진책을 차근차근 즐기는 오늘날까지 “대가 = 엉터리”이고 “엉터리 = 대가”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대가라고 일컫거나 둘레에서 대가라고 일컫는 이름에 흐뭇해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사래치지 않는다면 그예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엉터리라 하든 스스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든 엉터리 소리를 흔히 듣거나 자주 듣거나 으레 듣는다면 이이야말로 대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작품 하나로 그치는 대가란 없습니다. 작품 하나로 마무른 대가라 한다면 새로운 작품 하나로 나아갈 노릇이요, 지난날 당신이 이룬 대가다운 작품은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작품 하나를 일군 대가라 한다면 하루하루 새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당신이 지난날 이룬 대가다운 작품을 깎고 보태고 다듬고 손질하면서 마지막 숨결을 잇는 그때까지 땀흘리기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자말로는 ‘대가’라지만, 우리 말로는 ‘큰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하든 글쓰기를 하든 그림그리기를 하든, 우리가 굳이 큰그릇만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그릇이면 어떠하고 작은그릇조차 못 되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은 그릇이 되고자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끼는 만큼, 내가 알아 가는 만큼, 내가 고개숙이는 만큼, 내가 부대끼는 만큼, 내가 껴안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내가 깨닫는 만큼, 내가 믿고 보듬는 만큼 일을 하고 놀이를 한다고 봅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딸아이 하나를 옆지기와 낳아 함께 복닥이고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아빠나 엄마보다 크고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이란 처음부터 큰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작은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인데, 아마 작은그릇이 되라고 작품을 빚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다들 당신들 삶을 고루 담아내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열매 하나를 생각하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억지로 짜맞추거나 끼워맞추거나 들어맞추도록 하려는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당신들 삶을 찬찬히 실어내며 따사로운 보람 하나를 헤아리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크고 높게 내세우거나 내놓으려고 하는 작품으로만 헤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대가’라는 옷에 휘감긴 채 ‘작품’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사진이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즐기며 함께하는 사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복닥이는 삶이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쉰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얽매일 사슬이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앞으로 백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악다구니를 쓰듯 붙잡으려는 힘-돈-이름이란 가없이 덧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사진으로 일거리를 찾고 이름값을 높이며 돈벌이를 하는 한편 큰배움터나 문화마당 같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분들 누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곱씹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왜 하고, 사진을 왜 찍고, 사진을 왜 가르치며, 사진을 왜 보여주고, 사진을 왜 돈 받고 파는지를 찬찬히 되새기면 반갑겠습니다. 사진을 책 하나로 엮는 까닭을 생각하고, 당신이 찍어서 엮은 사진책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까닭을 생각하면 기쁘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는데, 마땅히 글은 글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괜히 멋부리듯 읊지 말고, 그저 그대로 온몸과 온마음 고스란히 내맡겨 스스로 사진삶을 일구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도록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삶이 그대로 글이고 그림이듯,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뿐 아니라 사진쟁이 또한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자꾸자꾸 대가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당신 삶을 풀어 놓지 못한다면, 어설픈 이름 하나 얻을는지 몰라도 이러한 이름이 사진일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이름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권력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돈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이니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은 아직 엉터리’라고 여기며 늘 새롭게 거듭나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니까요.
 











 (2) 다시 나온 사진책 《충돌과 반동》


 2002년에 처음 나왔던 사진책 《충돌과 반동》이 새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예전 판은 보지 못했는데, 새옷을 입고 나온 책은 예전 판에 실린 사진하고 똑같다고 합니다. 예전 책에는 육명심 님 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 글을 덜고 강운구 님 글을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쟁이 이갑철 님으로서는 2002년이나 2010년이나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내놓은 셈입니다(2009년에 《RED》라는 작품을 내놓으셨데 ‘충돌과 반동’이라는 사진감으로는 여덟 해 동안 다른 발돋움이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충돌이 있고 반동이 있대서 책이름이 《충돌과 반동》이요, 이갑철 님이 일구어 온 사진밭은 다름아닌 충돌과 반동이라는 낱말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flict’와 ‘reaction’으로 적는데, 우리 말로는 ‘부딪힘’과 ‘거스름’ 또는 ‘부대낌’과 ‘튕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부딪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거스르거나 튕깁니다. 부대끼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밀어내거나 등을 돌립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이라 할지라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충돌과 반동이란 그치지 않는 흐름이요, 만남과 헤어짐이며, 잠과 깸입니다. 해와 함께 달이 있듯,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밥하고 똥은 다르지 않으며,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고운 목숨입니다.

 이갑철 님이 2002년에 보여주었던 《충돌과 반동》은 여덟 해가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고작 여덟 해로서는 달라지지 않는 탓입니다. 아니, 앞으로 열여덟 해나 여든 해가 흐르더라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는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여든 해조차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더 움켜쥐려고 할 뿐, 더 나누거나 더 베풀거나 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바빠지는 삶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슷비슷합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흐름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어떠할 때에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길이 어디로 이어질 때에 우리 스스로 신나고 맑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우리 스스로 반갑고 넉넉한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한국땅입니다. 같은 잘못이 이어지고 같은 슬픔이 잇달으며 같은 생채기가 자꾸 파이는 한국땅입니다. 이름과 때와 곳이 다를 뿐, 지난날과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이란 거의 한결같습니다.

 이러한 한국땅에서 《충돌과 반동》에 깃든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제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갑철 님으로서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일구어 새로 나오는 책에 보탤 까닭이 없습니다. 《충돌과 반동》은 2002년에든 2010년에든 2022년에든 2102년에든 똑같은 사진책이 되고, 똑같은 느낌이 되며, 똑같은 삶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나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나 어떠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스스로 ‘달라질 삶’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는 사람 또한 ‘달라질 삶’을 붙잡지 않습니다.

 좋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이어가는 삶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넉넉하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내놓는 사진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이 삶터는 새로운 흐름이란 없고 달라질 삶이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에는 한껏 넓고 깊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이 스며들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이런 틈바구니가 가부장제도이든 남녀 신분과 계급이든 마을과 고을이든 보수와 진보이든 시골과 도시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일까요. 이어온 대로 좋다면 무엇이 예부터 이어온 줄기일까요.

 2010년에 새옷을 입고 거듭 태어난 《충돌과 반동》이란 미식가한테 맛난 밥이 되듯 소장가치가 있어 집안에 모셔 둘 만한 사진책인지, 또는 2002년에는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한 깊은 얘기가 있어 2010년이 된 오늘날부터는 새롭게 받아들일 얘기를 건네려고 내놓은 사진책인지, 또는 사진쟁이 이갑철 님을 대가로 섬기고자 마련한 사진책인지, 또는 웅숭깊은 사진말이 없는 한국땅 사진밭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자 선보이는 사진책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에 담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는 고맙고 드물며 반가울 사진말로 다가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으로 담는 젊은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젊은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이루었다는 사진쟁이들한테 이 사진책 하나가 얼마나 말걸기로 파고들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열 만한 마음밭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걱정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는 어슬렁거리며 작은 방의 프린트들을 뜯어보며 고생많았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트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두운 상황에서 뭔가를 본 순간에 쏠려고,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심도를 깊게 하면서도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필름의 감도를 두 배나 네 배로 올려서 찍는다”고 이갑철은 나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다. 그래도 이갑철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과 초점이 나간 흐릿함에 귀신들이 깃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철 사진의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자동 카메라를 잘못 쓴 것 같은 엇나간 초점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윌리엄 클라인의 경우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다가 점차 귀신 잡는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기법은 머리의 얄미운 계산이 아니라 뛰는 가슴의 어쩔 수 없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130쪽/강운구 풀이말)


 2002년에 첫선을 보인 사진책 《충돌과 반동》에는 199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이갑철 님 눈길로 담겨 있습니다. 이갑철 님은 이갑철 님 눈썰미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았기에 《충돌과 반동》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데, 이갑철 님한테 당신한테만 남다른 눈길이 있기 앞서, 먼저 이갑철 님한테 보여지며 마주한 사람들이 오랜 나날을 당신들 터전에서 고이 살아내 왔기 때문에 이갑철 님 남다른 눈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 숱한 사진쟁이들이 흔히 놓치는 대목이란 바로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자락이 거쳐 온 발자국 하나하나입니다. 옛날 사람이란 없고 오늘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옛날 모습이란 따로 없고 오늘날 모습 또한 따로 없습니다. 옛날 결하고 오늘날 결은 있으나, 이 또한 사람들이 서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이루어 내는 삶을 돌아본다면 언제 적 모습이니 어쩌니 하는 갈래 나눔이란 덧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농사짓고, 낫질하는 사람은 똑같이 낫질하고, 절집 다니는 사람은 그예 절집을 다니고, 성모상에 절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성모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기나길며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사진쟁이 남다른 눈으로 잘라내거나 옮겨내거나 이어받아 한 가지 모습으로 선보이는 손짓입니다.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사람들 삶입니다. 섣불리 따지거나 잴 수 없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모습으로 찍혔다 한들 사람들 삶입니다. 조금 어둡게 찍히든 더욱 밝게 찍히든 사람들 삶입니다. 사람들 삶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느껴야 할 사진찍기이고, 사람들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맺고 사귀고 다가서며 스며들며 어우러지는가를 느껴야 할 사진읽기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어떤 필름을 쓰든, 어떤 디지털 장비를 쓰든, 어느 사진감을 붙잡든,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걷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눈길보다 바라보는 눈길에 서린 삶을 느낄 노릇입니다. 사진에 담길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만큼 내 사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자연 터전이나 물건들이 바로 나와 내 사진기를 어떻게 느끼며 마주하고 있느냐를 나란히 곰삭일 노릇입니다.

 그나저나, 2010년판 《충돌과 반동》은 곱게 여민 옷자락에 정갈하고 말끔하여 멋스럽지만, 책값 7만 원이란 지나치게 짐스럽습니다. 책꽂이에 박아 놓을 사진책이 아니라 한다면 좀더 단출하고 자그마한 그릇으로 여미어 한결 수수하며 너른 이야기자리가 되도록 매만질 때에 바야흐로 푸진 사진결이 빛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7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7만 원으로 이 사진책을 두어 권 장만할 수 있도록 여밀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4343.5.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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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 - 이언진 시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2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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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으로 번역한 시는 시가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4] 박희병 번역, 《이언진 시집 : 골목길 나의 집》



 18세기 천재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언진이라는 분 시를 우리 말로 옮긴 책이 나와 있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읽었습니다. 더없이 뜻깊은 책이요 그지없이 알찬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번역이라고 해야 할는지 뭐라고 해야 할는지 어지러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영 찜찜합니다. 도무지 이언진이라는 분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거실》이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박희병 님은 ‘호동()’이란 ‘골목길’과 같고, 이 골목길에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비천(卑賤)’이란 “지위가 낮고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나 이제나 잘나고 이름있고 돈있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법이란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예술쟁이가 골목동네로 나들이를 와서 얼핏설핏 담 너머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골목길’이라는 글월이 영 못마땅합니다. 아니, 가없이 슬픕니다. 골목길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러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애써 높이지 않고, 스스로를 괜히 낮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농사꾼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서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못 벌고 더 큰 이름을 못 누리며 더 센 힘을 뽐내지 못할 뿐, 골목길 사람은 여느 자리 사람이든 궁궐 안쪽 사람이든 다 매한가지로 애틋하고 알뜰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호동거실》을 우리 말로 옮겼다고 하는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은 골목동네 사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매무새가 엿보이지 않아 슬프고 씁쓸합니다.


.. ‘골목길’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사는 공간을 표상한다. 골목길의 집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시인의 집은 바로 이 골목길 속에 있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 《호동거실》에는 백화(중국의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  (6, 188쪽)


 더욱이, 이 책 《골목길 나의 집》은 번역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책을 읽은 저로서는 도무지 번역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6언시(글자수를 여섯으로 맞추어 넉 줄로 쓴 시)’를 옮긴 번역책 《골목길 나의 집》인데,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견주어 자유롭게 말하고 입말(그래 봤자 중국 한문입니다)을 살려서 쓰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골목길 나의 집》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에 옮겨진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에핌 에트킨드라는 분이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109쪽)”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언진 님 시를 우리 말로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은 틀림없이 뜻이 있고 아름다운 문학입니다. 그러나 번역이라 할 수 없는 번역을 선보이는 한편, 18세기 이언진 님이 살아가던 골목동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높’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눈썰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말로 옮길 때에 ‘6언시’처럼 여섯 글자로 맞추거나 어슷비슷한 짧은 글월로 맞추기란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 문학’이라는 꼴은 갖추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모두 170 꼭지 시를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에서 열세 꼭지를 가려내어, 저 또한 어설프고 어줍잖습니다만, 이언진 님이 골목동네에서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지내던 느낌을 헤아리면서 골목사람들 말투로 다시금 옮겨 봅니다. 책에는 우리 말로 옮긴 산문 밑에 이언진 님이 한문으로 적은 싯말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기에 저 같은 쥐대기도 어설프나마 번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문 원문까지 옮겨 적기란 너무 버겁고 부질없다고 느껴, 박희병 님 번역에 제 번역을 붙이기만 합니다. 박희병 님 번역은 넉 줄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두 줄로 붙입니다. 왜냐하면 이언진 님 6언시는 넉 줄이 아닌 두 줄로 나누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문학을 옮겨서 나누려 한다면 시 문학 짜임새와 얼거리와 글맛과 글흐름을 모두 살피어 오늘날 우리 말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4343.5.10.달.ㅎㄲㅅㄱ)
 





(1)
새벽종 울리자, 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
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 만인의 마음 나는 앉아서 안다.
(새벽종 울리자 / 골목사람 바쁘다 /
 밥 빌고 벼슬 얻으려는 / 이 마음 난 앉아서 안다)


(5)
치가(治家)하려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애 기를 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야지.
‘빈이락(貧而樂)’ 이 세 글자 비결을 알면 얼굴에 근심이 깃들 리 있나.
(살림 하며 눈귀 멀고 / 아이 보며 기저귀 간다 /
 가난이 즐거우면 / 얼굴에 근심 없지)


(9)
집 나가 노닐면 고생 또 고생 집에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
몸이 늙거나 약해지지 않고 식솔이 기한(飢寒)에 떨지도 않지.
(집 나가면 괴롭고 / 집에서는 즐겁다 /
 늙어도 튼튼하고 / 굶거나 추운 식구 없다)


(15)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는 건 범 안고 자고 뱀 품고 달리듯 위태하기 때문.
용퇴하면 화(禍) 적고 복 많을 텐데 뭣 땜에 사주 보고 점을 치는지.
(나라님 부름 싫다 / 범 안은 독뱀 방석 /
 물러서니 걱정 없다 / 내 팔자 그예 좋다)


(19)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골목 사람 거룩하다 / 가난하고 배고파도 /
 착하고 고운 마음 / 맹자님도 말했다)


(28)
아이 우는 소리 천뢰(天뢰)와 같아 피리와 거문고 소리보다 훨씬 낫지.
처마의 한적한 물소리 참 좋으니 똑, 똑, 똑 베개맡에서 듣고 있노라.
(아이 울음 하늘 소리 / 뭇 악기보다 좋다 /
 처맛물 조용한 소리 / 누워서 듣는 똑똑똑)


(43)
인정세태는 천만(千萬) 가지고 바다 속엔 온갖 고기가 있지.
선생의 마음은 터럭처럼 세밀해 저자사람 얼굴의 마마 자국까지 알지.
(사람 마음 갖가지 / 바다엔 숱한 고기 /
 내 마음 촘촘한 터럭 / 장사꾼 낯 다 알지)


(58)
저잣거리의 구운 떡 어린애는 그 값을 아네.
좋은 물건이면 그뿐 난 진짜 가짜 따위 가리지 않아.
(저잣거리 구운 떡 / 아이는 아는 제값 /
 좋으니 두루 좋아 / 참거짓 떠나 좋지)


(78)
밥은 하루 지나면 쉬었는가 싶고 옷은 해 지나면 낡았는가 싶지.
문장가의 난숙한 문투 한당(漢唐) 이래 어찌 안 썩을 리 있나?
(밥은 하루면 쉬고 / 옷은 한 해면 낡고 /
 어리숙한 글쟁이 / 예부터 썩을밖에)


(81)
가난한 집 식탁 썰렁하여서 반찬이란 꼴랑 된장뿐이네.
오늘 아침은 처자가 호강하누나 / 제사 지낸 서쪽 이웃 쇠고기 보내 줘.
(가난해 밥상 썰렁 / 된장 하나만 겨우 /
 오늘 아침 뜻밖에 / 젯상 고기 들어와)


(91)
진짜 보타산과 진짜 관음이 10보 옆에 있다 해도 나는 안 갈래.
내 엄마가 곧 부처 엄마니 / 집에 있으면서 엄마를 잘 공양할래.
(보살 관음 살아서 / 내 곁에 있다 해도 /
 울 엄마가 참 부처 / 울 집에서 섬기리)


(105)
손가락끝, 붓끝, 종이 사이에 하나의 부처 분명 생겨나지만
손가락끝 보고 붓끝 보고 종이를 봐도 부처는 없네.
(손붓이 빚은 부처 / 환히 그려진 모습 /
 손붓 종이 어디도 / 참 부처는 없는데)


(132)
천하엔 본래 일이 없는데 유식한 이가 만들어 내지.
책을 태워 버린 건 정말 큰 안목 그 죄도 으뜸이요, 그 공도 으뜸.
(처음부터 없던 일 / 글쟁이가 지어내 /
 책 불사름 훌륭해 / 엉터리요 멋진 일)



 ┌ 《골목길 나의 집》(돌베개,2009)
 ├ 글 : 이언진
 ├ 옮긴이 : 박희병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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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2 :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셔요? 



 저는 모르는 책이 참 많고, 못 읽은 책이 참 많으며, 못 읽을 책 또한 참 많습니다. 아직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님 책은 한 가지조차 읽지 않았거나 읽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거나 그리 안 좋아하거나 이분 책을 읽은 분 가운데 다른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골고루 샅샅이 읽은 분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책을 읽으면 다른 한 가지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 하여도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할지라도 골라서 읽을 뿐, 모두 읽을 수 없으며 모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저 나름대로 살아가듯, 우리들은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을 뿐입니다.

 잘난 책읽기이든 못난 책읽기이든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결에 따라 살아가며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마주하는 가운데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대로 내 몸과 마음을 가꿉니다. 내가 고른 책이 훌륭한 책이든 어설픈 책이든 우리로서는 좋은 알맹이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고른 책이 빼어난 책이든 멋진 책이든 우리로서는 나쁜 버릇에 물들 수 있습니다.

 어제 동네 헌책방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백암,1993)가 보이기에 집어들어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소설은 어떠한지 잘 모르나 수필은 참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충 같다(87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번역은 꽤 엉망이라고 느끼면서도 이 글월에 담긴 글쓴이 마음은 기쁘게 헤아렸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생각이자 삶은 “어떻게 쓰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얼추 같다”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내 삶부터 올바르고 아름답게 잘 꾸려야 한다는 소리랍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내 삶부터 좋은 삶이 되도록 잘 추스려야 한다는 소리이고요.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일 테지요? 그지없이 옳은 말씀일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마땅하고 옳은 글월을 마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옳게 새기지 못합니다. 그냥 책 한 귀퉁이에 실린 글줄로 읽고 잊습니다. 고운 삶이란 하루키 님 책에만 있지 않고 우리 둘레에 두루두루 있는데. 맑은 삶이란 하루키 님 소설에만 있지 않고 우리 터전에 구석구석 있는데. 참된 삶이란 하루키 님 수필에만 있지 않고 우리 이웃이나 살붙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어떤가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다룬 이야기나 바라본 사람들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꿈꾸며 가꾸는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문학을 읽는 내 삶과 내 몸뚱이와 내 손길과 내 삶터를 좋아하시나요?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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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골목길과 배다리를 팔아먹는 거짓말쟁이들


 인천 토박이 가운데 스스로 인천 토박이임을 내세우며 인천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천 토박이는 으레 더없이 조용하기 마련이다. 인천 토박이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일컫는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인천에서 일감을 찾아 인천땅 다른 토박이하고 어깨동무하며 지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인천사람이다. 이들이 모두 인천 토박이이지 않다. 그러나 인천에 살면서도 인천사람 아닌 서울사람이 있고 경기사람이 있으며 부천사람이 있다.

 누가 더 옳다는 소리가 아니다. 누가 더 아름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마다 제가 선 자리에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되는 가운데 아름다이 살아가면 된다.

 다만,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 이름값하고 돈과 지위와 일거리와 홍보 따위에 휘두르려고 인천과 배다리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인천 토박이만 인천을 말하란 법이란 없다. 아주 마땅한 소리이다. 그러나 인천을 말하고 싶으면 인천을 말해야지, 왜 인천을 팔아먹고 있을까? 배다리를 말하고 싶으면 배다리를 말해야지, 왜 배다리를 비틀면서 팔아먹는가?

 인천이란 인천 토박이와 인천에 깃든 사람들 삶터이다. 배다리란 인천땅에서 낮은 자리 여느 사람들이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오순도순 북적이던 골목동네요, 한국전쟁 무렵부터 헌책방거리로 자리잡은 곳이다. 인천을 인천 아닌 엉뚱한 곳인 양 떠드는 이들은 정치꾼만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을 내세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배다리를 배다리 아닌 얄딱구리한 곳으로 덮어씌우며 팔아치는 이들은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만이 아니다. 문화이니 예술이니 들먹이는 이들과 모임도 매한가지이다.

 제발 입 좀 다물면 좋겠다. 제발 다른 데에서 돈벌이를 하면 좋겠다. 인천은 인천 그대로 놓아 주고, 배다리는 배다리 그대로 살려 주면 좋겠다. 좋은 노래와 춤사위가 있으면서 책을 즐길 수도 있다만, 조용한 가운데 차분한 마음결이 되지 않고서는 책을 삭일 수 없다. 인천이 왜 인천이고, 배다리가 왜 배다리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인천이고, 어디에서 인천이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배다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며, 배다리가 왜 배다리이고,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얻었는지를 길디긴 흐름과 기나긴 삶자락과 여느 사람들 눈물 콧물 웃음 땀방울로 돌아보는 사람들 가슴에 쓰라린 생채기를 남기는 모든 지식인들은 당신들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부질없는 꿈일는지 모르나 하도 답답하고 갑갑해서 한 마디 적는다. (2010.5.8.흙.ㅎㄲㅅㄱ) 

 

.. 


인천에서 '배다리'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모든 지식인을 두고 쓴 글이다만, 이들 배다리를 내세우는 지식인들과 문화인과 예술인과 운동가들은 이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느낀다. 그러나 배다리 주민으로서 더는 참고 지켜볼 수 없기에 글조각이나마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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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면을 먹을 때 모두가 친구 12
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빨래할 때에 이웃집도 빨래를 한다
 [그림책이 좋다 79] 하세가와 요시후미,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책이름 :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글ㆍ그림 : 하세가와 요시후미
- 옮긴이 : 장지현
- 펴낸곳 : 고래이야기 (2009.3.20.)
- 책값 : 9800원



 (1) 내가 손빨래를 할 때


 어제 하루 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낮잠 한 번 없이 신나게 놀며 아빠를 힘들게 하던 아이는 밤 한 시 무렵 깨어났습니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혼자 신나게 놀다가 사탕 하나 집어물고 스르르 잠든 때가 저녁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러니 배가 고파서 깼겠지요.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잠들었으면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쯤 일어났을 테지만, 배고프다고 밤 한 시부터 한 시간 반 남짓 칭얼칭얼거립니다. 밤나절에는 먹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달래고 어르고 안고 업고 하지만 도무지 잠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밥을 조금 먹여야겠구나 싶습니다. 밤에 일어나 밥을 차려 놓습니다. 그렇지만 밥상을 차려 놓으니 잘 먹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네 시 가까이까지 아빠와 엄마 모두 힘들게 한 끝에 잠들고, 다시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스스로 말은 잘 안 하려 하지만 말귀는 모두 알아듣는 아이한테 하소연하듯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제발 조금 더 자고 일어나 주라, 응? 힘들어 못살겠구나.”

 이런 말을 한다고 아이가 다시 잠드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누리에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오늘까지 그야말로 잠 없고 기운 넘치게 놀아대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틀림없이 낮잠은 거뜬히 건너뛰고 저녁나절까지 낑낑 칭얼칭얼 하다가 까무룩 하고 잠이 들겠지요. 보나 마나 오늘도 밥은 잘 안 먹으려고 하겠지만 제발 밤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밥을 조금이나마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이가 깨어 있는데 아빠는 드러누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저 때문에 아빠와 엄마가 잠을 설칠 뿐 아니라 졸음이 가득한 줄을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십 분 또는 이십 분쯤 엎드린 채 끙끙거리다가는 일어납니다. 더 누워 있다가 아이가 이부자리나 방바닥이나 책상맡에 오줌이라도 누면 큰일이니까요.

 게슴츠레 일어나서 씻는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낮 한 시부에 도서관 책손을 맞이해야 하기에 머리를 감고 씻고 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지난밤 아이가 오줌을 눈 기저귀와 옷가지에다가 새로 잔뜩 쌓인 옆지기 옷가지를 씻는방 바닥에 펼쳐 놓고 머리를 감습니다.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부터 빱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작은 대야에 비빔질 마친 빨래를 하나씩 넣고는 다섯 벌로 나뉘어 차근차근 헹굼질을 합니다. 다섯 벌로 나눈 빨래이니 첫 벌로 헹군 빨래를 두 벌로 빤 빨래를 헹구고, 이렇게 다섯 가지 빨래를 착착 헹굽니다. 마지막 헹군 구정물로는 씻는방 바닥과 벽에 부어 물때를 벗깁니다. “아이구 허리야, 날마다 해도 해도 빨래는 날마다 잔뜩 쌓이는구나.” 하는 노래를 하며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물놀이를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이가 양말을 챙겨 신은 채 씻는방에 들어왔기에, “벼리야, 양말 젖는다. 방으로 들어가.” 하는 말을 세 차례 해서 내보냅니다. 맨발로 들어왔으면 가만히 지켜봤을 테고, 맨발로 있던 아이를 아빠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면 아이는 살그머니 저 두 손을 헹굼물에 담그며 놀았을 테며, 이러는 가운데 아이는 옷이 젖었을 테고, 아이가 옷이 젖으면 ‘이 녀석, 또 옷을 버리네.’ 하고 한숨을 쉬며 아이 씻을 물을 따로 받아 아이를 씻기면서 빨래를 했겠지요. 어차피 거의 날마다 아이를 씻기지만 오늘 아침은 몹시 힘들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빕니다. ‘아이야, 오늘은 저녁에 씻자, 응? 오늘 아침은 너무 힘들다.’

 비비고 헹구고 털며 빨래를 하는 내내 허리를 톡톡 두들깁니다. 오늘 아침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빨래로 여는데, 오늘날 여느 한국땅 살림집처럼 빨래기계를 키우고 있다면 이런 고단함이란 없을는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집일이 부쩍 늘어 빨래를 다 마치고 널면서 어제 해 놓은 빨래가 다 말랐어도 곧바로 개지 못합니다. 자리에 드러누워 허리를 편 다음 개든지 한숨 크게 돌리고 나서 저녁에 개든지 이틀치를 쌓아 놓고 개든지 합니다.

 헌 빨래기계를 거저로 준다는 사람이 있고, 이제는 빨래기계 한 대쯤이야 돈으로 얼마 치지 않아 집안에 들이기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빨래기계를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냉장고며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빨래기계가 들어오는 일이란 하나도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고맙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기계한테 맡기기 싫고, 괜히 빨래기계 냉장고 텔레비전을 키우며 애먼 전기를 더 쓰고 싶지 않아요. 글을 쓰는 셈틀하고 손전화에 밥 먹이는 데하고 밤에 등불 켤 때를 빼고는 전기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우리가 오늘날처럼 전기를 많이 쓰던 날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거든요. 지난날 여느 살림집은 어디나 전기를 얼마 안 쓰거나 없이 살았으며 등불 하나 켜면서 조마조마해 했습니다. 여느 살림집에는 셈틀이란 없던 우리들이요, 빨래기계를 집집마다 들인 지 수십 해가 된 우리 나라가 아닐 뿐더러, 냉장고가 여느 살림집에 들어온 햇수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집이나 손으로 일을 하고 손으로 부대끼며 손으로 얼싸안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기계를 쓴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하면서 내 살림살이를 남한테 맡기지 않은 우리들 발자취입니다. 아이를 키우든 아이를 가르치든 먹을거리를 마련하든 누구나 제 손으로 꾸리던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손빨래를 하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 이웃집 가운데 어느 집도 빨래기계 안 쓰는 집은 없을 테지만, 이 아침나절에 어느 이웃집이나 빨래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빨래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한테 밥을 먹일 테고, 새벽바람으로 일 나가는 집식구가 있으면 새벽밥을 지어서 먹을 터이며, 집식구 모두 아침부터 바깥일을 나가야 한다면 지난밤에 아침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으리라고.

 이리하여 아침 예닐곱 시부터 낮 열두 시 무렵까지는 골목동네마다 빨래를 하는 때입니다. 이무렵에 집일을 모두 마치고 골목마실을 나서면 동네마다 막 마친 빨래를 햇볕 잘 드는 자리에 널어 놓으려고 부산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열두 시를 넘은 때에 골목마실을 하면 새로 빨래를 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햇볕과 바람으로 거의 다 마른 빨래가 팔랑팔랑 나부끼는 모습을 찾아봅니다. 때로는 바람에 날린 빨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때에는 슬며시 빨래를 집어들고 탁탁 흙먼지를 털어 빨래줄이나 빨래대에 곱게 얹습니다. 빈 빨래집게가 있으면 집어 놓습니다. 빨래집게로 안 집어서 빨래가 날리는데,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빨래집게가 어엿하게 있는데 깜빡 잊는다든지 집에서 전화가 울리면 그냥 널어 놓고 들어간 채 잊곤 하거든요.

 어제 낮에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있는 책쉼터 〈낮잠〉이라는 곳에서 만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제 골목 사진을 보고 사진을 이렇게 잘 찍으려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제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은 아니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다만 날마다 여러 시간을 여러 해 돌아다니면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뿐이랍니다.”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눈썰미에 따라 좋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굳이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어요. 애써 작품이 되기를 꿈꾸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노상 신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인데, 우리들은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를 하루하루 잃고 있다고 느낍니다. 손빨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손걸레질을 즐기는 매무새를 나날이 잃고 있구나 싶습니다. 두 다리로 마실하는 재미를 잃고,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키우는 보람을 잊구나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어른인 나부터 신나게 돌아보고 우리 딸아들한테 알뜰살뜰 보여주며 함께 나눌 책 하나 우리 눈길로 살피어 장만한 다음 같이 읽기란 어려운 노릇이겠지요.


 (2)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 담은 삶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를 넘깁니다. 책이름 그대로 일본땅 여느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어린이가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부터 이야기를 엽니다. ‘뭐야, 라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라면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 라면이 맛나다든지 뭐 그런 그림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모두)은 라면을 좋아하고 즐겨먹고 있어 이런 그림책마저 그리는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쳐 끝까지 보지 않고서야 무슨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겉그림이나 첫그림만 보고 섣불리 짚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 단추를 누른다.



 그림책 첫머리는 라면 먹는 아이 모습이 나옵니다. 라면 먹는 아이는 일본땅에서는 ‘아주 잘사는 집’도 아니고 ‘아주 못사는 집’도 아닙니다. 그저 수수한 살림집 여느 아이입니다. 아이 곁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심심한 듯 하품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집이 퍽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이 이웃집 옆에 사는 아이는 뒷간에서 비데 단추를 누릅니다. 오늘날 웬만한 살림집이란 모조리 아파트이거나 빌라입니다. 빌라는 차츰 줄며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잘사는 아파트이건 조금 못사는 아파트이건 시설이나 집 얼거리는 ‘현대화’나 ‘최신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비데 단추쯤이야 아무것 아닐 테지요.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는 일본땅에서 문화와 물질을 듬뿍 누리는 아이들을 하나둘 보여줍니다. 말끔한 야구옷을 차려입고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를 보여주고, 바이올린을 개인 선생한테서 배우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부엌에서 손수 밥하기를 하며 노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이 달라집니다. 이제 ‘아이들 이웃집’이 ‘아이들 이웃나라’로 옮깁니다. 먼저, 일본하고 맞붙은 이웃나라인 한국으로 와서 한국땅 ‘자전거 타는 어린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한국땅에서 이웃이라 할 나라인 아시아로 접어들어, 아시아에서 ‘아기 보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처음에 라면 먹는 어린이라든지 비데 단추 누르는 어린이라든지 값나가는 바이올린을 여러 대 벽에 걸어 놓고 이쁘장하게 배우는 어린이라든지 나올 때에는 그예 흔하디흔한 싸구려 그림책이 아닌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기(어린 동생)를 보는 어린이를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아하, 이렇게 차근차근 내 눈길을 우리 옆으로 옆으로 돌리면서 우리 이웃과 동무와 둘레 삶자락을 느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설피 가르침을 베풀려는 그림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주 부드럽고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내 삶터와 이웃 삶터를 골고루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가슴이 시린 대목을 톡톡 건드립니다. 소를 부리며 농사일을 하는 어린이를 보여주고, 엄마 아빠 몫을 떠안아 길에서 장사를 하며 살림을 꾸리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모두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다음 어린이까지 싸움터에서 누군가 쏜 총에 맞아 길바닥에 널브러진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소를 몰 때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판다.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가 빵을 팔 때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싸움은 누가 일으켰을까요. 어린이들끼리 싸움이 붙었을까요. 어린이들은 까닭 모르며 집을 잃고 어버이를 잃으며 목숨마저 잃어야 하는가요. 무슨 잇속을 챙기려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무기를 끝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만들고 있나요. 평화를 지키려는 무기인가요, 싸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남보다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하는 무기인가요. 나라를 지킨다는 이름을 앞세우는 어른들인데, 정작 제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 목숨은 아주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무기를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 죽이고 죽는 어른들은 이웃집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싸움터로 끌려나가야 하거나 스스로 싸움터로 뛰쳐나간 어른들 또한 당신 둘레 동무와 아이들을 살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총을 든 어른들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사람이지 누군가를 살리려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적군을 죽이는 총이요 우리를 지키는 총이라지만, 우리한테 적군일 맞은편도 우리하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들만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가 아닙니다. 적군인 나라도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입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인 우리들 서로서로가 총을 맞대며 우락부락 다툴 까닭이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더 있는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힘겨운 이웃나라한테 보태 주며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한테 모자란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넉넉한 이웃나라한테서 얻으며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억지로 힘을 써서 빼앗아야 할 까닭이 없고,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어거지로 옆사람을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며 나 홀로 1등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1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2등이 될 까닭 또한 없으며 3등과 4등 또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등수나 숫자나 돈셈이 아닌, 사랑과 웃음과 눈물과 즐거움과 보람과 땀방울로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괴롭힘과 죽임과 빼앗음입니다. 갖추어야 할 매무새는 착함과 올바름과 넉넉함과 따뜻함과 너그러움과 참됨입니다. 갖추지 않아야 할 매무새는 시샘과 따돌림과 미움과 못됨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거짓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바람이 불었다” 한 마디를 넣은 그림을 여러 쪽 잇달아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라면을 먹던 어린이는 이웃집 동무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바람을 느꼈을 수 있고, 그냥 라면만 배불리 먹고 빈 그릇은 개수대에 던져 놓고 설거지는 엄마한테 떠넘긴 채 야구방망이와 장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 다른 동무들하고 신나게 공놀이를 즐겼을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고, 라면을 먹었으니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은 든든한 몸으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한편, 라면을 먹으면서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놀 때에 일하는 동무가 있고, 내가 잠잘 때에 싸우는 어버이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동무가 있으며,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와 학원을 오갈 때에 썰렁한 집에서 라이타로 불장난을 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옆에 있다고 모두 동무가 아니며,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한다고 동무 아닌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동무들과 이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우리 둘레 사람이나 삶터를 하나도 모르거나 아예 등돌린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라면을 먹을 때에 바람이 붑니다. 아이 옷가지를 손빨래하고 있을 때에 이웃집에서도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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