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3


 아이 엄마가 긴 걸상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책을 손에 쥔 채로 잠들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일을 쉬거나 숨을 돌리며 책을 돌리려 할 때마다 아이랑 놀거나 아이한테 밥을 해 주거나 파리를 잡거나 빨래를 하거나 하면서 책을 손에 쥐려다가 놓습니다. 밤새 이불에 네 차례 오줌을 눈 아이는 아침부터 “바지 젖었네.” 하는 말로 깨어납니다. 아이한테 너 이렇게 자꾸 오줌 안 가리려 하고 그냥 싸 버리면 다시 기저귀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울 듯 말 듯한 얼굴이다가 창가에 개미들이 바글거리는 모습을 보며 “개미 있다.” 하는 말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합니다. 아빠가 잠자리 나무판을 걷어 말리려 하니 옆으로 떨어져 있다가, 바지 하나 들고 와서 아빠한테 입혀 달라고 흔듭니다. 이제 아이 먹일 밥을 하고 이불을 빨고 아이 씻기고 빨래를 하며 하루를 열어야겠습니다. (4343.7.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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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번역가들
쓰지 유미 지음, 송태욱 엮음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35 ― 잇는 삶, 잇는 사람, 잇는 손
 : 쓰지 유미, 《번역과 번역가들》



- 책이름 : 번역과 번역가들
- 글쓴이ㆍ엮은이 : 쓰지 유미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열린책들 (2005.5.10.)
- 책값 : 12000원



 (1) 말을 다루는 책


 온누리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말을 다루지 않는 책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림만 있다거나 사진만 있는 책이라 한다면 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라면 이 숱한 글로 차곡차곡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창작도 말이고 번역도 말입니다. 창작도 문학이고 번역도 문학입니다. 창작도 삶이며 번역도 삶입니다. 어느 자리에 서거나 어느 쪽에 있든,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어디에 있거나 어디로 가거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 그대로 말을 합니다.

 문학이 문학답자면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워야 하며, 문학하는 삶다움을 건사할 때에 비로소 문학하는 말이 문학하는 말다웁습니다.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웁지 못하다면 문학하는 말이란 문학하는 말다울 수 없습니다. 이는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과학에서든 사회에서든 교육에서든 종교에서든 매한가지입니다. 내 두 다리를 어디에 세우고, 내 가슴을 어디에 놓으며, 내 눈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옳게 갈 수 있는 한편, 그릇되이 갈 수 있는 삶길입니다.

 글이란 억지로 지을 수 없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어 쓸 수 있을 뿐입니다. 글짓기는 창작이 아니지만 문학 또한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기만 해서는 문학이 되지 않고 창작 또한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짓기’ 아닌 ‘쓰기’를 하는 밑바탕이 서야 하고, 이러한 밑바탕을 튼튼히 건사하면서 ‘아름다운 내 삶’을 일구는 손길과 땀방울을 알알이 서려 놓아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태어나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붙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를 다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이며 다 다른 아름다운 삶을 일굴 때에 저마다 따사롭게 빛나고 너그러이 자랍니다. 이때에, 키가 백오십 센티미터이든 백오십일 센티미터이든 백육십 센티미터이든 백팔십 센티미터이든 이백 센티미터이든 다 다르게 아름다운 몸뚱이입니다. 흔히 말하는 예쁜 얼굴이든 미운 얼굴이든 저마다 다르게 고우며 맑은 모습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좋고 저 사람은 저렇게 좋기 마련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삶이기에 반갑고 흐뭇하며 살가웁지,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으며 똑같은 말을 하는데다가 똑같은 삶을 꾸리면 하나도 반갑지 않고 조금도 흐뭇하지 않으며 터럭만큼조차 살가웁지 않습니다.

 아주 똑같은 넓이만큼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주 똑같은 낱알을 빻고 까부르고 일고 씻고 안쳐 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밥그릇에 밥알을 똑같이 담아 똑같은 숟가락질로 퍼서 먹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고 다 다른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며 같을 수 없는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같을 수 없는 말이요, 같을 수 없는 삶인데 같을 수 없는 글입니다.

 오늘날은 제도권 교육이 태어난 까닭에 보육원이나 어린이집부터 모든 목숨들을 똑같이 길들이며 가르치려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넋에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말을 하도록 짜맞춥니다.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분은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머리로 태어나지만 어버이와 교사가 똑똑한 아이를 망가뜨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내 아이를 이웃 아이랑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일거리를 찾아 똑같은 돈벌이를 하는 사람으로 키우려 하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교사는 교사대로 제도권 학교에서 똑같은 교과서 지식을 똑같은 부피만큼 집어넣어 좀더 시험을 잘 치르는 훈련병으로 내몰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우리 누리를 돌아보면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책이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쏟아지는 책 ‘권수와 가짓수’는 많으나, ‘서로 다르다’고 느낄 만한 대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서로 사뭇 다른 삶을 일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다른 일거리를 찾으며 서로 다른 사랑과 꿈을 노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똑같은 틀에 똑같은 넋에 똑같은 지식에 똑같은 가방끈에 똑같은 눈썰미에 똑같은 글매무새에 갇혀 있습니다. 홀가분한 몸뚱이가 아니요, 가벼운 마음이 아니며, 가붓한 손길이 아닙니다. 얽매인 몸뚱이요, 무거운 마음이며, 짐을 잔뜩 짊어진 손길입니다.

 다시금,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모든 책이 다루는 말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모든 책에 차곡차곡 실린 글월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꾸리는 삶결이 고스란히 담긴 발자취이거나 열매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나날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걷는 길이 다른 삶은 몹시 드뭅니다. 때때로 제도권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더라도 제도권 울타리 안쪽에서 이리 가고 저리 옮기고 하는 모양새만 살짝 벌어지기만 합니다. 스스로 ‘내 삶 만들기’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내 길 걷기’로 뻗어나지 않습니다. 남 눈길을 살피고 남 눈치를 보며 남 삶을 기웃거립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으며 나를 가장 빛낼 고운 삶무늬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싱그러우며 나를 가장 알뜰히 여밀 참된 삶자락을 부둥켜안지 못합니다. 이러는 동안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과 나누는 흐름이 무언긴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한글일 테지만 속보기로는 우리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일본 말투이니 번역 말투이니 하는 말썽거리뿐 아닙니다. 우리 말투이냐 아니냐에 앞서 ‘내 삶을 담은 나다운 내 말투’이냐 아니냐부터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날 농사꾼들한테서는 그 집 밥을 보고 푸성귀를 보며 장맛을 보면서 ‘아무개네 밥이구나’라든지 ‘아무개가 키운 푸성귀구나’라든지 ‘아무개가 담은 장이구나’라 말하며 다 다르게 느꼈습니다. 똑같은 밥맛 나물맛 장맛이란 없습니다. 집집마다 다 다른 밥맛이요 나물맛이며 장맛입니다.

 오늘날 농사꾼들한테서는 집집마다 다른 밥맛과 나물맛과 장맛을 느끼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비료와 농약을 쓰는데 무슨 다른 쌀이요 나물이요 열매요 장이 되겠습니까. 씨제이에서 만든 콩나물과 풀무원에서 만든 콩나물과 청정원에서 만든 콩나물이 어떻게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들은 공장에서 찍어내거나 뽑아낸 먹을거리에 길들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혀와 맛과 삶과 넋 모두를 스스로 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삶은 다 똑같은 제도권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며 오로지 돈만 벌고 겉치레 학벌에 매여 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 시멘트 아파트와 자가용을 꼭 붙잡고 있으니, 으레 똑같은 책을 써내고 다 같이 똑같은 책을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이름으로 찾아서 읽습니다.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살아가고야 맙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얼굴과 몸매와 머리가 되려고 악을 쓰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내 멋이 있어야 하는데, 더 예쁘장하다는 아무개를 닮은 머리카락 모양으로 가꾸고, 더 곱다는 아무개가 입은 옷을 사서 입으며, 더 멋지다는 아무개가 타는 자동차를 장만하여 몹니다. 내 쓸모에 따라 내 삶결을 살피며 내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으면 글쓰기를 익히면 되지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들어간다거나 글쓰기 강좌를 들을 까닭이 없어요.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고 싶으면 사진찍기를 하면 되지 대학교 사진학과를 들어간다거나 사진찍기 강의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줄 헤아리지 못하며, 내 삶에 따라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마음을 아끼는 흐름을 잡아채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이 땅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말을 다루는 책’들은 하나같이 닮은 꼴입니다. 하나같이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에다가 한국말답지 않은 매무새와 얼거리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틀과 말법와 말투에 앞서 저마다 오롯이 아름다운 삶결을 알뜰살뜰 실어낸 아리따운 책으로 우뚝 서지 못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야 틀릴 수 있고, 잘못된 낱말이나 말투야 아직 잘 모르니까 어수룩하게 쓸 수 있어요. 그러나, 겉모양이 아닌 속알맹이는 야무져야 합니다. 겉모양은 좀 투박하거나 못생기더라도 속알맹이는 튼튼하고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참되고 착하며 곱게 속을 차려야 합니다. 맑고 밝으며 튼튼하게 속을 일구어야 합니다. 책 하나가 책다웁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줄거리가 알차면서 즐거웁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2) 《번역과 번역가들》 제대로 읽기


 쓰지 유미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엮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프랑스 둘레에서 번역일을 하는 사람들이 번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하고,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을 들려줍니다.

 ‘번역을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깊이 알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하며, ‘번역을 잘 해내려면 내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산문으로 옮긴 시는 진작에 시가 아니지만 산문조차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 찾아갔을 때 이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느끼려 하는가’처럼 새로운 작품을 처음 만나며 내 동무들한테 알려주고픈 마음으로 번역을 하고, ‘밥을 먹듯이 사랑을 하듯이 마실을 하듯이’ 번역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따질 수 있는 우리 넋이라면, 창작이든 번역이든 똑같이 문화이고 예술이며 삶입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만 책을 읽었다면 오늘날에는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지식하고 권력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사람들 또한 책을 읽습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았고,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사이에서만 책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누기도 하지만, 이런 데하고 동떨어지거나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또한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눕니다. 둘이 섞여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지난날 사람들한테는, 아니 지난날 한국땅에서는 창작이나 번역은 문화나 예술이 되기 어려웠고 삶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는 드문드문 문화나 예술이 되는 책이 나오며, 삶이 되는 책 또한 더러더러 마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면 지식이나 권력하고는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되고 삶으로 거듭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 한다면 지식이나 권력을 굳이 가까이 사귈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진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려는 매무새이기 때문입니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번역을 한다고 했는데, 창작하는 사람들 또한 누구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창작을 합니다. 창작하는 사람이든 번역하는 사람이든 당신들이 다루는 이야기감 하나를 대단히 다부지게 붙잡으며 파헤칩니다. 따숩고 너른 마음결로 보듬으면서 다룹니다. 자전거 이야기 하나를 쓴다고 할 때에, 자전거를 글쓴이 삶으로 녹여내지 않는다면 자전거 이야기를 쓸 수 없습니다. 자전거를 다루는 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이도 그렇습니다. 아무렇게나 그림 하나 그려 넣고 ‘돈만 벌 생각’이라면 겉보기로는 예쁘장하거나 멋스러워 보이도록 그릴 테지요. 그렇지만 그린이 삶으로 자전거를 녹여냈다면 그리 예쁘장하거나 멋스럽지 않다지만 참 자전거다운 자전거를 그릴 뿐 아니라, 두고두고 들여다보며 질리거나 따분하지 않는 자전거를 수수하고 조촐하게 그려냅니다. 이는 번역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라, 번역하는 사람 스스로 자전거를 아끼고 사랑하며 내 몸뚱이로 녹여낼 때에라야 비로소 자전거 이야기를 알뜰살뜰 옮겨 냅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엮은 일본사람 쓰지 유미 님은 이 책 하나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하고 ‘번역은 어떻게 하는가’에다가 ‘번역은 어떤 일인가’와 ‘번역하는 뜻은 어디에 있나’를 차근차근 풀어내도록 숱한 사람들한테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르게 끌어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을 다룬 책이 몇 가지 나오기는 했는데, 《번역과 번역가들》처럼 알뜰하고 살가우며 훌륭하게 엮지는 못했습니다. 쓰지 유미 님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에서 ‘번역은 삶입니다’ 하는 목소리를 다 다른 번역쟁이들한테서 다 다른 목소리와 넋으로 풀어내도록 이끌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나온 번역 다룬 책들은 이 대목을 건드리지조차 못하거든요.

 살아가는 내 결에 따라 창작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자리에 따라 번역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터전에 따라 읽기를 합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창작과 번역이 달라질 뿐 아니라, 나 스스로 골라서 읽는 책이 달라집니다. 내 삶이 어떻게 흐르는가에 따라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알아챌 수 있는 한편,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닫거나 도리질을 할 수 있어요. 내 삶을 보듬는 모양새에 따라 어깨동무와 손잡기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어루만지는 매무새에 따라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느냐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엉뚱하게 말하느냐가 갈립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글과 글쟁이들”이라든지 “사진과 사진쟁이들”이라든지 “기사와 기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번역을 다루는 줄거리를 이루고 있으나, 속내를 찬찬히 굽어살피면 ‘번역 = 삶’이라는 물줄기를 잘 붙잡고 있기에, ‘번역’ 하나를 발판 삼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슬기로운 길을 스스로 찾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즐겁고 산뜻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참말, 글은 쓰기 나름이고, 번역을 하기 나름이며, 책은 읽기 나름입니다. 삶은 일구기 나름입니다.
 



 (3) 좀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다면


 무척 좋은 이야기를 다룬 책 《번역과 번역가들》이라고 느끼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옮긴 분이 썩 좋은 말투로 옮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번역을 다루는 책인데, 아름다운 우리 말로 옮길 수는 없었을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말밭으로 옮겨 내기란 너무 힘들기만 한가 싶어 아쉽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듯, ‘한 해에 천 쪽이나 옮겨야 먹고살 수 있다면 제대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분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번역글을 좀더 알뜰살뜰 돌보거나 추스르거나 가다듬기 어렵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 책 하나를 여러 해를 두고 느긋이 옮기면서 차근차근 가다듬을 수 있었다면, 다른 수많은 세계명작 못지않게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이 명작다운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3.7.26.달.ㅎㄲㅅㄱ)


[17, 20, 26, 101쪽] 내가 번역을 하는 것은 우선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 번역이라는 시련을 빠져나갈 때는 번역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때는 정말로 이해했는지 어떤지가 가려진다 … 번역이란 원문 속에 간직된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차원이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번역문에 옮겨 놓을 수 있을 때, 번역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내 생각에 번역한다는 것은, 일본의 독자가 일본어로 읽었을 때 그 작품이 주는 느낌에 가까운 것을 프랑스어 독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작품을 재구축하는 일이다 … 훌륭하게 쓰인 작품일수록 번역은 쉽다.

[20, 27, 38, 84, 102, 157쪽] 기원전 3세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쓰인 것 등은 지금의 중국어에서 보면 외국어 같은 것이다 … 일본어의 구어는 쉬워, 아이라면 자신의 생활환경에서 나오는 말을 쉽게 익힌다. 그러므로 구어 차원에서 보면 이중 언어 사용자는 얼마든지 있다 …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어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 하나하나의 작품은 고유한 목소리나 에너지, 숨결이나 리듬으로 독자적인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작품은 그대로 남지만 번역은 변한다 … 번역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은 모어로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이 서툴면 원문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가 없다.

[31, 35, 51, 109쪽] 번역에는 양쪽 언어에 대한 확실한 지식, 특히 번역문의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교양을 빼놓을 수 없다 … 번역에는 문학이나 언어의 역사에 대한 아주 깊이 있는 지식과 함께 그 작가에 대해 깊숙이 파고든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 왜 번역하는가 하면 아마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제도의 명칭 같은 일본사 용어를 앞에 두었을 때, 만일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지 않고 일본어 그대로 썼다면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정말로 잘 생각했는지 어떤지, 아마 나 자신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일본의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은, 물론 일본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77, 83, 123쪽] 번역할 작품을 차분히 읽어 친숙해지고 거기에서 일종의 일관성을 찾아내면 ‘자연스러운’ 번역문이라는 환상에 빠질 위험은 적어진다. 주문을 받아 번역하는 경우에 자주 있는 일인데, 번역할 페이지만 읽으면 함정에 빠져 의미라든가 중요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감수성 같은 것만을 번역하기 십상이다 … 번역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출판사 측에 의해 생긴다. 잘 팔리기 위해서는 이른바 독자의 문학적 기호에 맞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출판사는 번역 원고에 손을 대 아주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번역 냄새를 지우기 위해 다시 쓰는 경우도 있다 … 네덜란드의 네덜란드어는 영어의 영향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그에 비해 벨기에의 네덜란드어는 과거의 것을 훨씬 잘 보존하고 있어, 19세기 말이나 중세에서 유래하는 표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모르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벨기에 사람이 적어진다는 것은 네덜란드어의 풍부함이 상실되어 버리는 일이다.

[91, 101, 122쪽] 번역의 재미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다른 문화와 접하는 것 같은 일이다. 문화 탐색이라는 것은 정말 지평선을 넓혀 준다. 끝이 없는 일이다 … 문제는 훌륭한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번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쪽 언어를 깊이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쓰는 것도 알아야 한다. 쓰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번역문의 표현력을 길어 낼 원천이 없다 … 단어의 의미라면 사전에 쓰여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각각의 저작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어조와 리듬, 물론 거기에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114, 130, 198쪽] 에로와 범죄를 다룬 것은 새롭고 잘 팔리기 때문에 많은 출판사들이 그런 책을 출판하여 이익을 올리고 있다. 번역한 것도 잘 팔리는 것은 속악하고 장정의 예술성도 형편없는 책이다 … 나에게 중요한 것은 책이 번역되어 독자의 손에 건네지는 일이다 … 1년에 1천 페이지나 되는 번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면 질 높은 번역을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128, 155쪽] 번역하는 데는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번역하는 언어의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될수록 오랫동안. 그것은 이미 언어학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들과 섞여 버스나 전철을 타고, 그 나라 여자 또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 하나의 언어란 그러한 것 전부를 말한다. 번역하려는 문화, 문명, 생활은 그러한 것 전체이다. 그것은 음식이고 여행이며 연애이다 … 어떤 언어로 쓰인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재창조하는 일이다.

[175쪽] 번역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 번역을 읽은 사람들은 잘못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톨스토이나 체호프를 대작가로 인정했다.

[204, 206쪽] 나의 번역학교가 성공한 것은 그것이 대학의 틀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 번역은 예술과 같다. 출판 번역만으로 생활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피아노 연주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이라면 가능해도 피아노 연주로 먹고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 때로 학생들은 훌륭한 번역어를 찾아낸다. 나보다 훨씬 좋은 경우도 있다. 멍청하게 있을 수는 없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자칫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번역에 쉽게 만족해 버리기 십상이다.

[235쪽] 최근 교양 있는 사람이나 문화ㆍ사회ㆍ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를 산다. 문학적 에세이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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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하기


 하루 두 끼니만 먹는 살림이지만, 두 끼니 밥을 하려면 이만저만 품이 들지 않습니다. 저녁나절 두 끼니째 먹은 다음에 설거지를 하고 치운 뒤에는 이튿날 먹을 쌀을 씻어서 불려 놓아야 합니다. 옆지기하고 둘이서 아이를 보며 저녁때가 되면 지쳐 나가떨어질 만큼 되는데, 고단한 몸에 무거운 다리로 부엌에 가서 쌀과 콩을 꺼내어 씻고 불리자면 얼마나 눈꺼풀이 감기는지. 그렇지만 막상 쌀을 씻고 불린 다음 잠자리에 들면 걱정이 사그라듭니다. 몸이 너무 고단하여 도무지 못 일어나겠다고 생각한다든지 그만 깜빡 잊고 곯아떨어질 만큼 힘들다든지 하면,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글쓰기를 하기 앞서 바지런히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밥 한 그릇 먹는 일만 해도 참 이렇구나 싶으나, 아이가 날마다 새로 어지르는 방도 쓸고 닦아야지요, 아직 오줌가리기를 못하니 젖은 옷은 빨고 젖은 바닥은 닦아 말리고 젖은 이불 또한 몇 차례 말리다가는 다시 이불 빨래를 해야지요, 또 자전거를 타고 읍내나 면내에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다녀와야지요, 아이를 씻기고 아이랑 놀고 아이랑 마실을 다니고 해야지요, 이러면서 우리 식구 밥벌이가 될 글과 사진을 만져야지요, 잡지 부쳐 달라는 사람 있으면 책을 싸서 부쳐야지요 …….

 꼭 열 해쯤 앞서인가, 어느 시골마을에 일손 거들러 찾아갔을 적에 끼니마다 쌀을 빻아서 까부르며 밥을 지어 먹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몸이 깨닫는데, 밥을 해 먹자면, 먼저 벼를 절구에 넣어 절구질을 해서 빻아야 합니다. 또, 벼를 얻자면 한 해 농사를 지어 거두어야 합니다. 낫으로 벼를 베어야 하고, 벤 벼는 털어서 알곡을 갈무리해야 합니다. 처음 모를 심어 놓으면 피사리 몇 번 하고 더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논일이라지만, 모심기를 할 때까지, 또 모심기를 하는 동안, 또 모판을 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하는지요. 게다가 이렇게 논일을 하는 사이에도 밥을 먹어야 하니, 날마다 쉴새없이 벼를 찧고 돌과 부스러기를 훑고 쌀을 씻어서 불린 다음 냄비에 넣고 안쳐야지요. 더욱이 밥만 먹을 수 있는가요. 반찬도 먹으려면 반찬으로 삼을 먹을거리도 손수 마련하든 돈을 치르고 사오든 해야 합니다. 또한, 이 반찬감을 아예 통째로 사오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나하나 지지고 볶고 무치고 해서 마련해야 합니다.

 아이돌보기 하나로도 하루해가 꼴딱꼴딱하지만, 집 치우기로도 하루가 꼴딱꼴딱하고, 밥하기 하나로도 하루해가 빠듯합니다. 집살림하는 분들, 그러니까 살림꾼들한테는 책읽기란 그야말로 꿈꾸기 어려운 일이 되는데, 책읽기뿐 아니라 사진찍기이든 그림그리기이든 더없이 바라기 어려운 일이곤 합니다. 글 좀 쓰고 싶다는 사람, 사진 좀 찍고 싶다는 사람, 만화나 그림 좀 그리고 싶다는 사람, 노래나 춤 좀 하고 싶다는 사람, 교사가 되고 싶다는 사람, 정치 좀 하고 싶다는 사람, …… 다들, 무엇보다도 애 낳고 애 키우고 밥하고 빨래하고 쓸고닦고 농사짓고 하는 일부터 치르거나 겪거나 몸소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농사짓기까지는 몹시 힘들다 한다면, 적어도 밥 빨래 청소 애보기 네 가지만이라도 스스로 할 줄 알아야지 싶어요. 그만 이 네 가지조차 못하겠다면, 어여쁜 짝꿍하고 사랑놀이할 생각일랑 아예 말아야지 싶어요. (4343.7.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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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7-25 15:45   좋아요 0 | URL
여성학과 이재경 교수님이 늘상 하던 말씀과 비슷하네요. 밥 빨래 청소를 제 손으로 할 줄 모르면서 여성학을 운운하지 말라고요. ^^

파란놀 2010-07-26 04:50   좋아요 0 | URL
남자한테나 여자한테나 마찬가지랍니다~
 


 벼락과 글쓰기


 금요일 낮,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고, 아차 하는 사이에 공유기는 뻥 하고 터지며 모뎀과 랜카드응 맛이 갔다. 시골에서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라면 인터넷줄이며 전화줄이며 전깃줄이며 모두 뽑아 놓고 있어야 하는데, 비바람이 곧 잦아들겠지 하고 잘못 생각했다.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에 여러 차례 겪었으면서 또 이렇게 한 방 얻어맞았다.

 이틀 동안 글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겨우 인터넷을 고쳐 놓았어도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셈틀을 아예 꺼 놓는다. 저절로 글쓰기는 더 멀어진다. 그러나, 애 아빠가 글쓰기하고 조금 멀어지는 만큼 아이 얼굴을 좀더 들여다본다. 글쓰기를 덜 하는 만큼 집일을 조금 더 하고, 글쓰기를 생각하지 않는 만큼 텃밭에서 자라는 풀포기를 좀더 뽑는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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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초등학교 아이들 그림 338점 지음, 이오덕 엮음 / 보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어설프고 잘못된 편집 때문에 안타까이 절판된 책을 기리며 별을 다섯을 붙이지 못하고  

고작 셋밖에 못 붙인다.) 

 


 어린이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그림책이 좋다 81] 이오덕,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책이름 :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그림 : 이오덕 선생님한테서 배운 시골 아이들
- 엮은이 : 이오덕
- 펴낸곳 : 보리 (2008.8.25.)
- 책값 : 5만 원 (판 끊어짐)



 (1)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읽으며


 아이슬랜드에서 나고 자란 비요크 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고운 삶을 보여주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세 식구가 함께 앉아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보았고, 아이는 엄마 곁에서 이 영화를 잘 지켜보곤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싶은 한편, 아이 엄마가 집에서 이 영화를 되풀이해서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때에 군데군데 보기도 했구나 싶습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 때문에 당신이나 당신 아이나 눈이 몹시 나쁜 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입니다. 영화에 붙은 이름 그대로, 셀마(비요크)는 차츰 눈이 나빠지며 어둠에 갇히고 맙니다. 또한, 셀마가 꾸리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여 주지 못하는 안쓰러운 이웃 때문에 셀마는 어둠 쪽으로 자꾸 밀려나다가는 그예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맙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집 동무는 가녀린 셀마를 깊이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며 슬픈 넋입니다. 모두가 돈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나, 돈에 앞서 참다운 사랑과 믿음을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셀마는 둘레에서 바라보기에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며 애틋합니다. 그러나 셀마는 당신 스스로를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애틋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셀마한테는 셀마한테 닥친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조차 달콤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눈병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뮤지컬을 즐길 수조차 없으나, 셀마는 어둠이 더 깊디깊이 닥칠수록 더 불타는 마음이 되어 스스로 숱한 뮤지컬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꿈에서 만들 뿐이지만요. 눈이 좀 밝다 싶은 때에는 한결 밝은 뮤지컬을 만들지만, 눈이 자꾸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에도 무척 신나는 뮤지컬을 만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만드는 뮤지컬은 당신 꿈속에만 가두지 않고 사람들 모두한테 보여줍니다. 이태껏 셀마 스스로 만든 뮤지컬은 셀마 혼자만 즐겼다면, 마지막 뮤지컬은 이 뮤지컬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을 사람한테는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하고, 이 뮤지컬을 보고도 어벙벙해 하는 사람한테는 가슴이 하나도 벅차오르지 않는, 사랑하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이 없는 가슴이라면 그예 메마른 채로 있고 마는 뮤지컬을 선보입니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이자 문화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거나 받아들이며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임을 모르는 가운데 누구나 이 문화이자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딱히 뮤지컬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든지, 그저 뮤지컬이라서 한결 아름답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뮤지컬은 뮤지컬일 뿐입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보는 동안, 이 영화를 찍은 분이나 셀마라는 삶을 보여주는 분이나 더없이 눈이 맑고 밝다고 느꼈습니다. 빛그림 이야기에 담는 틀부터 몹시 부드러우며 따사롭습니다.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과 뭇목숨한테 둘러싸여 고운 삶 하나를 꾸리고 있음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둠 속의 댄서”로 옮겨 적었으나, “어둠을 춤추는 사람”이라거나 “어둠을 노래하는 춤꾼”이라거나 “어둠과 벗삼는 춤꾼”이라거나, 제 나름대로 다시 읽으면서 영화를 헤아려 봅니다. 셀마라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 그대로 당신 꿈속에서 뮤지컬을 만들거든요. 웃고 싶을 때에는 웃고, 울고 싶을 때에는 울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워하고, 기쁠 때에는 기뻐하며 뮤지컬을 만듭니다. 목매달려 더는 노래를 할 수 없을 무렵 셀마가 펼친 노래는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기뻐하면서 해맑게 부른 노래였습니다. 셀마와 살가이 지내던 동무는 셀마가 ‘사형장 이슬’로 사라지지 않는 일이 당신 아이한테 ‘엄마로 살아가는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셀마는 ‘내 아이한테 눈을 주는’ 일이야말로 당신 스스로 당신 아이한테 ‘엄마가 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셀마처럼 내 아이 땀따귀를 갈기며 왜 학교에 안 가고 못된 녀석들하고 어울리느냐고 다그치는 어머니가 되면서, 내 목숨을 바쳐 내 아이한테 눈을 주고, 내 목숨이 사그라지는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내 아이가 비로소 새 삶을 얻었음을 느낀 다음에는 더없이 느긋하며 즐거울 수 있는 삶길이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뮤지컬을 즐기면 됩니다.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즐기면 됩니다. 책을 즐기고 싶다면 책을 즐기고,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고 싶다면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며, 사진을 즐기고 싶을 때에는 사진을 즐기면 됩니다.

 문학과 영화로 함께 나온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과 고차매 남매는 시골마을에서 둘 나름대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에 따라 바라보는 그림이 아닌, 두 사람 눈썰미에 따라 서로서로 그림을 좋아하며 즐겼습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 나오는 셀마는 무척 외로웠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은 가운데 당신 둘레 사람들을 동무나 이웃으로 여기면서 당신 일과 삶과 춤노래를 꾸밈없이 즐겼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아직 우리 누리에서는 어린이 그림을 제대로 읽거나 깨닫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없이 모자라거나 드문데, 바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을 담은 그림책’에 실린 그림을 그렸던 1960∼70년대 산골마을 어린이들하고 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쳤던 이오덕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하건 그림 재주와 이론이 어떠하건, 당신들은 당신들 배움터인 산골마을 작은 학교에서 당신들 나름대로 아름다우며 신나고 멋진 그림누리를 즐겼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은 이론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 이오덕 선생님은 이론으로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교사는 종이 하나와 크레파스 하나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종이를 펼치고 크레파스를 쥔 손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짜내려고 하는 몸뚱이나 넋이 아닙니다. 산골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고스란히 담을 뿐입니다. 아니, 고스란히 삶을 담는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고스란히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 그렸다고 해야 옳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로 꾸리는 삶이 좋든 싫든 궂든 재미있든,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로‘도’ 저희 삶을 나누었습니다.

 자랑이 아닌 이야기입니다. 뽐냄이 아닌 말걸기입니다. 효행일기나 반공일기 따위는 조금도 아니지만, 생활일기 또한 아닙니다. 셀마가 꿈속에서 웃음지으며 춤노래를 즐기다가는, 꿈 밖으로 나와서 바야흐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듯, 아이들은 노상 꿈 바깥자리에서 까만 얼굴 까만 손 까만 몸뚱이인 산골아이로 지내는 저희 하루하루를 홀가분하면서 스스럼없이 종이 한 장에 크레파스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2) 아이들 그림을 함께 즐겨야 할 텐데


 지난 2008년 8월에 나왔던 어린이 그림책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무척 슬프게도 진작에 판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들여다보면, 이오덕 선생님 아드님인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더는 책을 내지 마십시오’ 하고 잘라 말하면서 스스로 판을 끊은 까닭을 알 만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그림을 읽을 때에는 아이들 눈높이뿐 아니라 아이들 삶결 그대로 바라보며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 멋대로 그림을 요모조모 자른다든지(트리밍), 어느 한 군데만 오려낸다든지 하면서 엉뚱한 겉멋 부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그림 한 장을 그리며 구석구석 빈틈없이 크레파스를 다 발라 놓는 흐름을 우리 어른들은 잘 읽어야 합니다. 배경이 군더더기라고 잘못 읽는다든지, 끝자리가 좀 구지레 보인다고 하면서 가운데 쪽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며 긴네모 그림을 바른네모 그림으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 눈결과 삶이 되어 어린이 그림을 볼 노릇입니다. 처음부터 ‘오로지 어른 눈썰미로 좀더 예쁘장한 책을 만들겠다’는 섣부른 생각이 되면 안 될 노릇입니다.


.. 그림은 이렇게 그려라, 저런 색을 칠해라 하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다만 남의 그림을 흉내내지 않도록 할 것이고, 종이·연필·붓·물간……과 같은 용구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가려서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는 태도는 천천히, 온 정신을 기울여서 그리도록 하고, 자기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해야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면서 즐길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은 모두 어렸을 때 비참한 흉내내기 그림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그리도록 했을 때에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저희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글짓기 아닌 글쓰기로 아이들마다 제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널리 쓰고 있는 낱말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었습니다. 글이란 억지로 만드는 ‘글짓기’가 아닌, 꾸밈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 그대로 즐기는 일이기에 ‘글쓰기’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느끼며 쓰셨습니다. 글이란 글쓰기라면, 그림이란 바로 ‘그림그리기’이겠지요. 사진이란 ‘사진찍기’이며, 춤이란 ‘춤추기’이고, 노래란 ‘노래부르기’입니다. 일이란 ‘일하기’이며, 놀이란 ‘놀이하기’입니다.

 이런 모든 우리 삶은 그예 삶입니다. 뒤에 ‘-교육’이라든지 ‘-강좌’라든지 ‘-학습’이라든지 ‘-체험’이라든지 ‘-학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무엇이든 붙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둘레를 보면 이런 안쓰러운 이름들이 더없이 많습니다. 놀이마저 놀이교육 놀이강좌 놀이학습 놀이체험 놀이학원 …… 아주 많습니다. 영어는 어떻지요? 영어는 아예 영어마을 잉글리쉬존 따위마저 판을 칩니다. 영어를 즐기려면 마음껏 즐기도록 해야 하는데,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고 맙니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학문 또한 즐기는 삶이어야 할 뿐인데, 이 나라 이 땅 이곳 학교에서는 늘 ‘교육’이라는 이름이 달라붙습니다. 모두 제도권이 되고야 맙니다.

 이리하여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책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 한 차례조차 나오지 못한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누리를 펼쳐 보이면서 나눌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망가뜨렸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그림을 즐긴 나날이 소록소록 배어든 알뜰한 그림책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출판사 일꾼들이 아이들 그림을 잘못 매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 〈로빙화〉에 나오는 ‘그림을 이론으로만 아는 교사’들이 ‘사물을 똑같이 베껴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듯, 아이들 그림을 아이들 그림 그대로 읽고 즐기며 받아들이지 못한 편집자들이 여기 자르고 저기 자르면서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니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기에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어도 언제 생채기를 입혔는지 모를 뿐 아니라 무엇이 생채기가 되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소 귀나 다리가 잘리도록’ 소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통으로 소 몸뚱이를 그림에 다 그려 넣습니다. 그림 한 장에 소만 우격다짐으로 꽉 들어차게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 깜냥껏 넉넉한 품을 남기고 소를 채워 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보리밟기를 하는 모습을 위 아래 옆이 빡빡하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그리고 넓은 보리밭이 잘 드러나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해가 잘리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에 나오는 해가 잘 나와서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게끔 그립니다.

 아이들은 보리베기를 할 때에 보리 알곡이 잘리게 그리지 않습니다. 보리 알곡을 줄기와 잎사귀와 알곡 모두 잘 나오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에 다리를 자른다든지 머리를 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통으로 잘 나오도록 알뜰살뜰 그립니다.

 아이들은 집을 그리며 집 어느 한쪽을 자르지 않습니다. 집을 통째로 다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모두모두 자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통으로 내보이면서 이 통 그림 하나에 아이들 넋과 삶과 꿈과 손길이 어떻게 묻어 있는가를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편집하는 멋’에 따라, 어느 대목은 자르고 어느 자리는 붙일 수 있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편집하는 멋이란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하는 멋이란 멋을 부릴 자리에 부려야지 섣불리 아무 데나 부릴 수 없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책이라면 이러한 책에 걸맞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산골마을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며 그린 그림이라 할 때에는 바로 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편집하는 멋을 살릴 노릇입니다. 이와 동떨어진 데에서 어설피 멋을 부릴 노릇이 아닙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빌어 말씀드린다면, 셀마는 당신 아들한테 새 눈을 선물해 주려고 체코에서 미국까지 건너와서 공장 일꾼이 되어 돈을 벌지, 당신 아들한테 자전거‘나’ 사 주려고 미국가지 건너오지 않았습니다. 셀마 또한 아이 어머니로서 얼마나 자전거‘를’ 사 주고 싶었을까요. 그렇지만 셀마는 자전거 ‘따위’는 아이한테 사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따위’는 나중에 아이가 새 눈을 얻은 다음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살 수 있으니까요. 자전거는 언제라도 돈을 다시 벌어 사면 되지만, 하루하루 나빠지는 눈을 고치려면 셀마 스스로도 눈이 더 나빠지기 앞서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빨리 ‘아이 눈을 고칠 수술을 할 돈’을 버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아이 또한 셀마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눈이 몹시 나빠지고 있으니,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라든지 아이한테 새 옷을 사 입힌다든지 아이한테 더 맛난 밥을 해 준다든지에 돈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이런 데에는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135쪽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김경수’라는 아이가 그림 한쪽에 적은 이름 석 자마저 ‘책을 편집하는 분들께서’ 싹둑 잘라 놓았습니다. 이런 책 편집을 이 아이가 들여다본다면 이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통으로 내보이지 않고 어느 곳은 잘라서 없애 버리고 말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글 한 꼭지를 썼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싹둑싹둑 자르면 어찌 되지요?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내가 담은 모습을 동강동강 자르면 어찌 되나요?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건전하지 않다’며 몇 분치를 마구마구 자르면 어떡합니까? 노래 하나를 지었는데 ‘노랫말을 바꾸라’느니 무어니 하며 몇 초를 요리조리 자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손가락 몇 가락을 잘라도 괜찮을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머리통 반쪽이 잘려도 살아숨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염통을 조금 잘라도 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발톱 몇 군데쯤 없어도 잘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331쪽부터 335쪽까지 실린 그림 일곱 점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얼굴 그림’입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 그림들에 ‘아버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림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요, 아이들이 무엇을 그림으로 담았는가를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더구나,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그림 원본을 보내 줄 때에 이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쪽지에 적어 붙여서 보냈는데 이런 편집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 아이들의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그대로 그리게 해도 괜찮은가요? 언제나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데 어떻게 지도하면 될까요?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곱고 착하며 참되게 일구어야 합니다. 다른 이 생각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다른 이 생각이 내 생각으로 녹아들도록 잘 새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떠한 좋은 생각이든 좋은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내 생각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요, 이리하여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터전에 걸맞게 내 땀을 흘리며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가 아이 하나를 낳아서 키운다고 할 때에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아동발달 전문가’한테서 말씀을 하나하나 듣고서 키우겠습니까. ‘보육지침서’에 따라 키우겠습니까. 어린이집과 보육원과 학교에만 맡기며 키우겠습니까.

 우리가 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읽겠습니까. 전문가 비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신문잡지 서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출판사 보도자료대로만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아이들 그림은 아이들 삶결을 살피고 삶무늬를 들여다보며 삶자락을 껴안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를 톺아보고, 아이들이 저희 삶을 얼마나 아이들 스스로 즐겁도록 일구는 가운데 이어가고 있는가를 헤아리며, 아이들이 어떤 눈빛이고 말빛이고 얼빛인가를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만 쓴다고 해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그린다고 해서 그림그리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가이 찍는다고 사진찍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느낌대로 부른다고 해서 노래부르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춘다고 해서 춤추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삶으로 이룹니다. 두렵고 걱정스러우며 따스하며 넉넉하다가는 차갑고 슬픈 삶으로 이룹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웃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울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로빙화〉에서 고아명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책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린 그림과 울면서 그린 그림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엮은 분들은 아이들 웃음과 울음을 느끼기 앞서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는 대목에만 지나치게 매여 있고 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 한다면,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20년대 아이들 또한 즐거우며 기쁘며 보람차게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면서 알뜰살뜰 오순도순 알콩달콩 누릴 수 있는 고운 그림나라 넋을 스며 놓은 책으로 엮어야 했겠지요.

 유물로 만드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놀라운 어르신 한 사람이 이룩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그림인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 누구나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부둥켜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릴 수 있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좋은 그림을 읽고 즐기며 좋아할 수 있으려면,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좋은 아이들 좋은 그림을 읽기 앞서 좋은 일놀이를 즐기는 좋은 어른으로서 좋은 나라를 가꾸고 있는 좋은 삶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저희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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