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가락을 따라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이내 스스로 책을 읽는다. 

엄마랑 아빠랑 옆에서 함께 안 놀아 주고 

책만 읽으니 

아이도 이냥저냥 엉기고 어리광을 부리다가 

스스로 놀다가 책을 펼친다.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놀아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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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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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작품은 아름다운 삶으로
 [책읽기 삶읽기 4]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만화책 《유리가면》을 1권부터 44권까지 며칠 만에 읽어내다. 미우치 스즈에 님은 1976년부터 2009년까지 서른네 해에 걸쳐 그렸는데 나는 고작 며칠 만에 이 만화 한 질을 ‘아직 연재가 끝나지 않았’다지만 훌쩍 읽어치우고 만다. 1/3쯤 읽을 무렵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제아무리 어느 한 작품을 깊이 새기며 사랑할 수 있다지만 ‘책을 쓰는 사람’ 마음이나 삶이 될 수 없다고.

 만화책 《유리가면》에서 ‘꼬마’ 마야를 가르치며 ‘어른’ 마야가 되도록 이끄는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홍천녀〉라는 작품을 할 때에 스승인 츠기카게 치구사가 선보이는 〈홍천녀〉가 아닌 어린 마야가 어른 마야가 되며 선보이는 새로운 〈홍천녀〉가 되도록 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만화책 《유리가면》을 읽는 사람 또한 ‘미우치 스즈에’ 마음이 아닌 ‘읽는이 아무개’ 마음으로 읽을밖에 없겠지. 아니, 읽으면서 ‘미우치 스즈에’ 마음으로 읽되 ‘읽는이 아무개’ 삶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지. 또는 ‘미우치 스즈에’라면 이 만화를 어떻게 그리며 어떻게 읽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한몸 한마음이 되어 읽는 가운데, 이 책을 덮은 뒤에는 ‘무대에서 내려와서(책을 덮고)’ 내 삶을 내 나름대로 내 두 다리와 두 손으로 씩씩하게 일굴 때 아름답다는 셈이 될 테지.

 만화책 《유리가면》을 들여다보면 온누리에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숱한 연극 이야기가 나온다.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니 세계 명작이라 일컫는 온갖 작품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명작을 하나하나 들추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책 《유리가면》은 오늘날에 이르러 또다른 명작 자리에 들어선다. 이제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을 놓고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작품처럼 명작이 아니라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서른네 해에 걸쳐 스스로 ‘명작을 낳은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 《유리가면》 연재를 마무리짓든 연재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든, 뒷날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만화책 하나를 연극 대본으로 새롭게 고쳐쓰며 또다른 무대를 선보일 수 있겠지. 그런데 이냥저냥 《유리가면》을 무대에 올린다면(만화영화로든 영화로든 연속극으로든 연극으로든 노래로든 춤으로든), 이렇게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명작이 되지 못한다. 아마 수많은 ‘이냥저냥 작품’이나 ‘고만고만 작품’이 쏟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이 문득 깨우쳐 ‘마냥 따라하는 무대’가 아닌 ‘내 깜냥껏 내 삶을 바친 온 사랑 깃든 새 무대’를 마련하리라 본다. 그때에는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 하나는 다른 한 사람이 새로운 명작을 내놓는 데에 밑거름이 되는 셈이요, 이렇게 《유리가면》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명작이 하나 태어난다면, 더 먼 뒷날에는 새로운 명작 하나를 밑거름 삼아 새삼스럽게 다른 명작 하나 다시금 태어날 수 있겠지.

 《유리가면》 애장판으로 13권째를 보면 333쪽에서 마야가 “에? 왠지 나무가 따뜻하다. 나무에게도 체온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맞춤법 틀린 데뿐 아니라 번역이 얄궂다고 느낀 데가 무척 많았다. 이 대목에서는 “에?”가 아닌 “어?”로 적어야 올바르다. 마야는 ‘문득 놀라’서 한 마디를 절로 뱉어내니까 “에?”가 아닌 “어?”가 맞다. 아무튼,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1권부터 44권까지 언제나 다른 모습 다른 느낌 다른 말마디로 들려준다.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낀 당신 삶을 보여주고,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끼며 품은 궁금함과 놀라움과 기쁨을 슬며시 밝힌다. 그러니까 〈홍천녀〉라는 연극 하나를 놓고 이리도 길며 ‘하나도 안 길다’고 느낄 만큼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힘이 있지 않느냐 싶다. 이름도 돈도 무엇도 버리며 넋으로 사랑할 짝꿍이란, 남녀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애틋함일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한테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과 씨앗과 푸성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도 매한가지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와 푸름이라고 다를 수 없다. 저잣거리 장사꾼이라든지 운전기사라든지 정치꾼이라든지 기자라든지 다를 까닭이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밝히며 일구는 고운 나날을 맞이해야 한다. 돈바라기 삶이 아닌 사랑바라기 삶이어야 한다. 이름바라기 일거리 아닌 꿈바라기 일거리여야 한다. 내 밥그릇을 채우거나 내 몸값을 높이는 일터를 찾아 대학 졸업장을 챙길 슬픈 우리 삶은 내버리거나 놓아 주고, 내 마음그릇을 갈고닦으며 내 믿음을 북돋우는 일자리를 깨달아 노상 웃고 울며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보여주는 만화인 《유리가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만화책 《유리가면》만 아름다울까. 그린이 미우치 스즈에 님 삶은 안 아름다울까. 아름다운 삶이 아닌 만화쟁이임에도 만화책 《유리가면》 하나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작품과 삶은 다른가. 작품과 사람은 동떨어져 있을까. 작품을 내놓는 사람과 작품을 받아들일 사람은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 아직 애장판으로는 나오지 않고 얇은 낱권으로만 나온 43권(2009년 8월) 137쪽을 보면 ‘어른이 되어 가는’ 마야가 밥 한 그릇을 받아먹으며 〈홍천녀〉에 나오는 아코야 삶이 되어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읊고는 마치 부처님과 같은 매무새로 거듭나는 대목이 나온다. 어린 마야는 연극을 하며 ‘무대에서는 딴 사람 새로운 삶’이 된다는 대목만 어렴풋이 알아차리는데, 차츰차츰 연극 무대 연기란 한낱 연기로 끝나지 않고 어린 마야 삶을 어른 마야 삶으로 이끌어 가는 고마운 벗이요 스승임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마야라는 아가씨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천재라기보다 맑고 밝은 넋이요 곱고 착한 넋이다. 맑고 밝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재주를 받을 수 있다. 곱고 착하기 때문에 하늘이 ‘누구한테나 물려준 선물’을 즐거이 나눌 수 있다.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자꾸자꾸 “네 안에 있는 홍천녀를 찾으라”고 외친다. “네 안에 있는 홍천녀”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내 삶을 나 스스로 보며 즐기라는 소리이다. 내 삶은 내가 즐길 뿐 누가 즐겨 줄 수 없다. 내가 읽는 책 하나는 나 스스로 내 마음그릇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뛰어난 사람으로 살지 못하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뛰어난지 깨달을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손잡지 않으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우리 나라에 세계 명작 번역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와 있으나 정작 나라안에 ‘세계 명작은 둘째치고 국내 명작’이라도 될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운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세계화 시대에 세계 시민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국내 명작이나 세계 명작이 ‘한글 문학이나 문화나 예술’로 못 나오지는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고 착하며 참된 삶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한국땅 한글 명작이 나올 수 없다. 몇몇 이름난 글쟁이들을 두고 ‘이제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이 나올 만하지 않느냐?’ 하고 떠들지만, 내가 보기로는 이 나라에서 이름난 글쟁이들은 그저 ‘이름난’ 글쟁이일 뿐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못할 뿐더러 하나도 ‘어른답’지 않다고 느낀다. 이래서야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은커녕 국내 명작이 될 수조차 없다. 백 해 이백 해뿐 아니라 즈믄 해를 살아내며 빛날 작품이 명작이다. 오늘 2010년 한국에서 3010년 뒷날에까지 즐거이 읽거나 읽힐 작품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앞으로 즈믄 해 뒤에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기쁘며 반갑게 맞아들여 읽을 작품으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는가. 줄거리만 재미나면 그만인가. 제법 사랑받으며 100만 권이나 1000만 권이 팔리면 되겠는가. 작품으로도 아름답고 작품을 담은 ‘말과 글’로도 아름다우며 작품을 빚은 한 사람 삶으로도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명작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유리가면》 애장판 7권 328쪽을 보면 마야가 고등학교를 마치며 졸업장과 사진첩을 ‘보라빛 장미를 베푸는 분’한테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 나오는 말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 애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으로서는 만화쟁이 당신한테 소담스러운 삶을 이 작품 하나에 쏟아부었다. 아니, 쏟아부었다기보다 스스로 만화가 되어 송두리째 내보였다. 이 피와 땀을 읽을 수 있다면 만화책 《유리가면》은 그냥 허울좋이 붙이는 명작이 아닌, 내 삶과 네 삶 모두 아름다이 바라보며 어우러질 길을 붙안는 사랑임을 알 수 있겠지.

 나보다 먼저 《유리가면》을 다 읽은 집식구한테 “《유리가면》을 읽은 사람 가운데 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를 제대로 읽는 사람은 아주 드물 수밖에 없을 듯해요.” 하고 말했다.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 삶터인데 뭐. 대학교 졸업장을 고이 가슴에 안을 줄 모르는 한국 터전인데 뭐. (4343.9.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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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37 : 좋은 책을 읽기

 좋은 책 한 가지를 놓고 열 가지 다른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좋은 책 한 가지를 읽은 느낌을 백 가지 다른 글빛을 살리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좋은 책 한 가지를 장만하여 받아들이기까지 어떤 마음이었는가를 즈믄 가지 꿈으로 삼아 고이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책 한 가지가 참으로 좋은 줄 알자면, 나 스스로 내 삶이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내 삶이 좋은 삶이려면 나부터 내가 참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자면 내 말과 넋이 좋은 말과 좋은 넋이어야 합니다.

 좋은 말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넋이란 어떠할까요. 아마 즈믄 가지 좋은 말이 있을 테고, 즈믄 가지 좋은 넋이 있을 테지요. 서로 똑같은 좋은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언제나 늘 다르게 좋은 말이 있다고 느낍니다. 즈믄 사람한테는 즈믄 가지로 다른 좋은 말이며 좋은 넋이요 좋은 삶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는 대학교가 137군데라나 더 되나 덜 되나 한답니다. 우리 둘레 대학교 백 몇 십 군데를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 다른 아름다운 배움터라기보다 성적표 점수에 따라 줄세우기를 하는 배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이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 다른 아름다움을 찾으며 누리고 나누려는 배움터로는 뿌리내리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말 좋은 넋 좋은 삶 좋은 사람인 가운데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사랑을 나눕니다. 좋은 짝꿍을 만나 좋은 사랑을 하고 싶으면 차근차근 내 삶과 넋과 말을 좋은 쪽으로 꾸려야 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 좋은 짝꿍만을 바랄 수 없습니다.

 나날이 좋은 날씨가 아닌 궂은 날씨인 까닭은 자연이 미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미쳤기 때문에 좋은 날씨가 아닌 궂은 날씨가 찾아듭니다. 다문 한 사람만 좋아서는 날씨가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좋은 사람으로 좋은 삶을 일굴 때라야 비로소 좋은 날씨입니다.

 만화책 《유리가면》은 1976년에 1권이 나왔고 2010년 8월에 일본에서 45권이 나옵니다. 2010년 9월까지 45권 한글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곧 한글판이 나오겠지요. 서른네 해 동안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한테는 애를 태우는 작품이라 할 테지만, 이 사랑스럽도록 좋은 만화를 그저 애를 태우며 볼 수는 없습니다. 그냥저냥 귓결로 들은 얘기로 읽는다든지 시간죽이기를 하며 읽는다든지 한다면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에 서린 멋이나 맛을 내 멋이나 맛으로 삭일 수 없어요. 섣불리 집어들 《유리가면》이어서는 안 됩니다. 둘레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든다 하여도 나 스스로 내 삶이 좋은 길을 접어들며 좋은 꿈을 찾아나서는 매무새가 되기 앞서까지는 함부로 장만하지 말아야 할 《유리가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하여도 나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데, 무슨 좋은 열매를 받아먹으며 좋은 손길을 좋은 이웃을 느끼어 뻗을 수 있을는지요. ‘명작’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은 아주 많은 사람이 본 작품이 아니랍니다. (4343.9.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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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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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기를
 [책읽기 삶읽기 3] 이란주, 《아빠, 제발 잡히지 마》(삶이보이는창,2009)



 지난 2009년 5월 8일에 장만해서 이해 5월 21일에 다 읽은 《아빠, 제발 잡히지 마》인데, 한 해가 지나고 넉 달이 지나도록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가를 갈무리하지 못한다. 글쓴이 이란주 님 첫 책 《말해요 찬드라》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몇 해 앞서 《말해요 찬드라》 느낌글을 쓸 때에도 책을 다 읽고 곧바로 쓰지는 못했다. 한 번 쓴 느낌글을 나중에 크게 고쳐서 다시 썼다. 이 책을 놓고 나 스스로 삭이며 되뇔 대목이 많아 아직 느낌글 하나로 실타래를 풀기 어려울 수 있다. 아무래도 이주노동자 삶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내 삶이기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에 깃든 이야기를 섣불리 풀어내지 못한달 수 있다.

 “인천 부천 사는 사람들은 늘 낡은 전철에, 늘 많은 사람에 시달려야 하니 도대체 무슨 죈지 모르겠다(183쪽).”는 대목에 밑줄을 긋고 한참 싱긋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푸념을 하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생각 밖에 꽤 드물다. 인천이나 부천에 제 삶터가 있어도 이렇게 못 쓸 뿐더러, 서울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도무지 모르는 이야기이다. 서울이나 부산에 제 삶터가 있는 사람은 이런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그래도 부천은 인천보다 훨씬 낫다. 부천은 인천보다 서울이 가까울 뿐더러 인천처럼 어마어마하게 크고 많은 공장들로 산업단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천은 제국주의 일본이 이 나라를 다스릴 때부터 일본땅하고 경성에 물건을 올려바치는 공장터였다. 서울로 잇는 철길과 찻길을 가장 먼저 뚫은 데가 바로 인천인 까닭을 깊이 살피는 사람이란 아주 드물다. 강원도 산골짜기 군대에서 썩어 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알 텐데, 양구 산골짜기에서 휴가를 나오며 받는 ‘휴가비(그래 봤자 집으로 가는 데에 드는 버스삯일 뿐이지만)’는 인천보다 부천을 더 높게 쳐 주었다. 부천은 서울보다 가깝고 인천이 서울보다 먼 데에도 인천은 휴가급지가 서울과 같이 3급이었고 부천은 2급이었다.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는 1급지였다. 1급지이면 휴가비가 3만 얼마였고 2급지이면 2만 얼마, 3급지이면 1만 얼마였다. 인천으로 가자면 서울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전철로 갈아탄 다음 들어가야 하니까 부천보다 멀면 멀지 가까울 수 없다. 이를 놓고 따지니까 윗사람(소대장하고 중대장하고 행정보급관)이란 이들이 하는 말, “인천은 직할시이고 부천은 경기도잖아?”

 “중동이니 상동이니 하는, 같은 부천에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는 흔하디흔한 것이 공원이요 분수다. 그러나 중동과 상동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낡은 동네 도당동에는 쉼터 한 자락 없이 빽빽하여 도무지 숨 돌릴 자리가 없다(108쪽).”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몇 사람 꼽을 수 있을까. 모두들 경부운하나 4대강에 푹 빠져 있는 터에, 내 살림터나 내 고향동네에 깃든 말썽거리와 고름을 들여다보며 땀흘리는 글쟁이(또는 활동가)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울에서 큼지막하게 촛불집회를 한다고 외치며 서울로 모이기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서울에서 꼭 큼지막하게 뭔가를 해야 하는가. 서울에서 뭔가를 큼지막하게 할 터이니 다들 모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서울로 오는 데에 드는 찻삯은 누가 댈까. 더구나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때에 걸어서 오겠는가. 하나같이 버스나 기차나 자가용을 탄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또 국가보안법이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이밖에 숱한 골칫거리이든, 이런저런 아픔과 생채기를 풀자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4대강 사업을 막자는 뜻은 무엇일까.

 지난 2009년 5월 21일에 《아빠, 제발 잡히지 마》를 다 읽으며 책에 몇 가지 이야기를 끄적였다. 먼저 책 속종이에는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온몸 부대끼며 오래도록 껴안고 땀으로 쓴 책은 다르다. 땀없는 사람을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있겠나. 낮거나 얕은 그릇이라면, 그러려니 하거나 해야지.’ 하고 끄적였다. 책 안쪽에는 5월 13일에 끄적인 이야기가 하나 보인다. ‘땅에 뿌리박은 사람, 땅을 보살피는 사람, 땀흘려 일하는 사람, 사랑으로 손잡는 사람, 믿고 어깨동무하는 사람, 모두모두 한국땅에서는 바보.’

 이란주 님이 할 일은 무척 많고 몹시 바쁜 줄 안다. 이런 가운데 바지런히 글을 써서 이주노동자 삶을 두루 알리거나 나눈다. 가만히 보면 나도 내 삶이 참 빠듯하고 바쁘다. 아이 하나랑 아픈 살붙이 하나랑 복닥이며 보내는 삶이란 얼마나 빠듯하고 바쁜지. 마감에 쫓겨 얼른 보내 주어야 하는 글이 아니라면, 이제는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쓸 겨를을 내지 못한다(제대로 말하자면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책을 읽을 틈조차 낼 수 없다). 집식구 모두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부시시 일어나 신나게 한꺼번에 몰아서 쓸 뿐이다(제대로 말하자면 밤에는 건넌방에서 불을 켜며 책을 읽기도 어렵다). 여느 때에는 ‘잘 하지 못하며 잘 다스리지도 못하는’ 집안일을 붙잡느라 코가 빠진다. 아이 하나일 때에 이런데 아이가 둘이 되면 어떻게 바뀔까. 형과 나를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아이 셋이나 너덧이나 대여섯이나 ……를 키웠거나 키우는 수많은 어머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어디 먼 나라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내 삶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이주노동자로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 삶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려는 이 땅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삶과 내 어머니 삶과 내 어버이 삶과 내 이웃 삶을 곰곰이 돌아볼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지 못하니, 따로 배우지 않아도 좋은 우리 삶인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집에서 이르는 대로 받아들이며, 딱히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삶인가.

 얼마 앞서 장정일 님 독서일기 한 권이 새로 나왔다. 1994년부터 장정일 님 독서일기가 띄엄띄엄 나오지 않았느냐 싶은데, 이란주 님이 쓰는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 또한 띄엄띄엄일지라도 더 자주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란다면 해마다 한 권씩 이주노동자 삶 이야기책이 우리 누리에 나온다면 기쁘겠다. 2003년에는 찬드라한테 말하라 했고 2009년에는 어린 친구 샤프라를 만났으니, 2010년에는 또다른 누군가와 사귄 삶을 풀어낼 수 있으면 반갑겠다. (4343.9.24.쇠.ㅎㄲㅅㄱ)


― 아빠, 제발 잡히지 마 (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2009.5.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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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 2


 몸이 고단해 드러누워 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앉아 다소곳하게 읽도록 이끌 수 있을 때에 좋은 책. (4343.9.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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