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의 그림책 - 오늘의 눈으로 읽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김홍도 그림법’을 몰라도 즐겁다
 [책읽기 삶읽기 31] 최석조, 《단원의 그림책》


 제주섬 아래쪽에 조그마한 섬 마라도가 있습니다. 이 마라도로 찾아와 사진을 찍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마라도를 사진감으로 삼아 내놓는 사진책이 더러 나오기도 하는데, 돋보인다 하는 사진책으로는 배병우 님이 담은 《마라도》(안그라픽스,1985)하고 김영갑 님이 담은 《마라도》(눈빛,1995)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담은 《마라도》는 사뭇 달라, 어느 한 가지만 본 사람이라면 마라도라는 섬을 어느 한 가지 빛깔로 한결 짙게 바라보거나 생각할 만합니다. 두 사람은 사뭇 다른 ‘사진 기법’으로 사진을 찍었다 할 만한데, 곰곰이 헤아린다면 ‘사뭇 다른 사진 기법’이라기보다는 ‘사뭇 다른 삶’으로 마라도하고 만나거나 사귀면서 마라도에서 지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이 사진은 이러한 기법으로 이러한 느낌이 우러나도록 찍었다느니, 저 사진은 저러한 솜씨로 저러한 느낌이 드러나도록 담았느니 하는 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사진 기법’을 쓸 수 없습니다. 유행이나 사진 흐름에 따라 어느 기법이 더 사랑받기도 하지만, 유행으로 퍼지거나 사진 흐름으로 자리잡는 까닭이란, 이러한 기법이 더 쓸 만하거나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행으로 퍼지든 사진 기법으로 자리잡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제법 있기 마련이에요.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내 삶에 걸맞게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테니까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찍을 사진이 아니요,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려 그릴 그림이 아닙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흐뭇할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기법이든 수법이든 하나도 소담스럽지 않습니다. 소담스레 바라보거나 보배로이 여길 대목은 내가 즐거이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을 즐겼느냐입니다.


.. 김홍도가 〈무동〉의 저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은, 결국 ‘설움의 공유’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 음악 향유자의 대부분은 신분이 높았을 터였다. 듣는 쪽에 맞추어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천한 광대들이 갓 쓰고 도포 입은 건 자기들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  (30쪽)


 여느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갖가지 기법과 수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실기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보다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이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조차 시험문제 틀에서 맴돕니다.

 학교에서 시나 다른 문학을 배울 때에 은유법이니 활유법이니 비유법이니 하는 기법과 수법 이야기만 골이 아프도록 배웠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 글을 쓴 사람 마음과 삶과 느낌이 어떠했구나 하고 느끼도록 배우지 못했습니다. 글을 즐기는 매무새란 한 번도 배울 수 없었고, 배우도록 이끌어 준 분 또한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글 즐기기’나 ‘그림 즐기기’나 ‘사진 즐기기’는 따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어느 스승이라 해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노래 즐기기’라든지 ‘춤 즐기기’라든지 ‘영화 즐기기’라든지 매한가지입니다.

 영화평론 하는 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운다고 내가 즐거이 볼 영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림을 풀이해서 알리는 큐레이터 같은 이들이 입에 침이 닳도록 첫손꼽는다 해서 내가 눈을 빛내며 우러를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가슴에 사무치도록 스며드는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볼 뿐입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차분히 스며들다가는 용솟음치는 사진과 글을 마주할 뿐입니다.

 대형사진기나 중형사진기나 파노라마사진기를 썼다 해서 더 돋보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슬라이드필름이나 흑백필름을 썼대서 더 눈여겨볼 사진이 되지 않아요. 천만 원짜리 사진기로 담은 작품이 더 빼어날는지요. 만 원짜리 1회용 사진기로 담은 사진은 작품이란 소리를 붙일 수조차 없을는지요.

 값싼 붓으로 그리면 못난 그림이 되나요. 비싼 붓과 종이를 쓰면 잘난 그림이 되나요. 스승이 이름난 분이면 이름난 그림쟁이로 되나요. 스승 없이 혼자 그림을 배워 나갔으면 어설픈 그림쟁이가 되려나요.


.. 모든 작품에서 숭늉처럼 구수한 여유가 끓는다 ..  (135쪽)


 최석조 님이 쓴 《단원의 그림책》을 읽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일군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를 곰곰이 풀이하여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그림 풀이책(해설서)’은 어렵거나 딱딱한 말투에다가 갖은 외국말을 섞어 그들먹거렸다면, 《단원의 그림책》은 오늘날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살가우면서 홀가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림을 굳이 어려운 말로 딱딱하게 읽을 까닭이 없으며, 그림이란 누구나 제 눈썰미와 깜냥껏 마음 가득히 즐기면 좋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무슨무슨 기법이나 수법을 썼다는 대목을 훤히 꿰뚠다 해서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렸거나 즐겼다 할 수 없습니다. 선운사 지붕이나 대문이 어떠한 모습 어떠한 값어치 어떠한 시대유물임을 안다 해서 선운사 마실을 한결 즐거이 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 골목길 ‘정취’가 ‘몇 십년대 풍물’이라 읊으며 사진을 찍어야 골목마실이 한껏 빛난다 할 수 없습니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소나무 넋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떠들어야 소나무가 아름답다 여길 수 있지 않습니다.

 살아온 목숨을 꾸밈없이 껴안을 줄 아는 내 고운 목숨이면 넉넉합니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벗이며 이웃이라 느낄 줄 아는 따순 가슴이면 넉넉합니다.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숨결로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애틋하게 어우러지는 삶임을 깨닫는 너른 품이면 넉넉합니다.


.. ‘먹는’ 그림에서 아이들은 꼭 엄마 옆에 붙어 있다 ..  (162쪽)


 단원 김홍도 님 그림이든 혜원 신윤복 님 그림이든, 또 박수근 님이나 이중섭 님 그림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당신들 그림이 어느 시대 어느 기법으로 빚은 작품이라는 풀이말은 덧없습니다. 당신들 그림이란 당신들 어떠한 삶이 소롯이 묻어난 이야기임을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당신들 그림에 당신들 삶을 어떻게 담아 우리들이 오늘날 어떠한 넋과 얼로 껴안으면서 흐뭇한가 하고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단원의 그림책》도 ‘김홍도 님 삶’보다는 ‘김홍도 님이 선보인 그림 기법’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춥니다. ‘김홍도 님 그림 기법’ 이야기를 여느 사람들 말씨로 재미나게 풀어내는 일도 좋다 할 수 있으나, 이렇게 풀어낸다 하더라도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투로 풀어낸 ‘그림 풀이책’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읽고 나누어야지, 손재주를 기리거나 우러를 수 없어요. 자동차를 몰더라도 자동차를 모는 사람 매무새를 읽어야지, 자동차 기종이 무어요 ‘모퉁이 돌기(코너링)’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느냐를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지난날 ‘어떤 붓으로 그림을 그렸느냐’라든지 ‘어느 종이에 그림을 그렸느냐’를 샅샅히 살피거나 훑는다고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림을 그린 사람 삶과 그림에 그려진 사람 삶을 살가이 껴안으면서, 내가 꾸리는 삶을 톺아보고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가 복닥이는 삶을 그러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4.1.11.불.ㅎㄲㅅㄱ)


― 단원의 그림책 (최석조 글,아트북스 펴냄,2008.5.13./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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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3. 

집 물이 얼어 웃집까지 가서 빨래하고 물을 길어오는 아빠한테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는 아이. 아빠는 아이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려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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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11 23:13   좋아요 0 | URL
ㅎㅎ 따님이 정말 귀여워 보이네요.근데 사시는 곳은 도회지보다 더 추운가요? 아이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나오는것을 보니 그런것 같아서요.

파란놀 2011-01-12 06:34   좋아요 0 | URL
산골이니 조금 더 춥기도 하지만, 이불 뒤집어쓰고 놀기를 좋아한답니다~
 


 냇물과 글쓰기


 공장 종이기저귀가 아이한테 얼마나 나쁜 줄을 알기 때문에, 공장에서 만드는 종이기저귀를 아이한테 대지 못합니다. 공장 가루젖이 아이한테 얼마나 모진 줄을 아는 까닭에, 공장에서 만드는 가루젖을 아이한테 먹이지 못합니다. 공장에서는 더 많은 물건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하는데,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섣불리 쓰기 어렵습니다. 사람들 눈길을 더 사로잡으려 하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더 큰 힘과 더 많은 돈을 바라는 줄 번히 안다면, 이러한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낮오줌은 가리지만 아직 밤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한테는 기저귀를 대야 합니다. 밤오줌을 걱정하며 천기저귀를 댑니다. 아이한테 천기저귀를 대는 아빠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아이가 오줌을 누어 칭얼거린다든지, 아이가 오줌을 누어 기저귀가 젖은 줄을 모르며 곯아떨어졌다든지,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까 틈틈이 잠에서 깨야 합니다. 아이가 밤새 용하게 오줌을 안 누었더라도 문득문득 눈을 떠서 아이 천기저귀를 만져 봅니다.

 종이기저귀는 아이 몸에 나쁩니다. 종이기저귀는 우리 삶터에도 나쁩니다. 종이기저귀를 만들고, 종이기저귀를 가게에 들이려고 짐차에 실어 나르며, 종이기저귀를 판다며 가게에서 불을 밝히는데다가, 종이기저귀를 쓴 사람들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놓고, 종이기저귀 담긴 쓰레기뭉치를 쓰레기터에 갖다 버려 파묻거나 태울 때, 우리 터전은 더없이 더러워집니다.

 사람들이 종이기저귀를 더 쓸수록 냇물은 냇물다움을 잃습니다. 사람들이 종이기저귀를 손사래치거나 종이기저귀가 사라지도록 애쓸 때에 비로소 냇물 빛깔은 조금이나마 살아납니다. 천기저귀 하나 쓴다 해서 냇물이 흐르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천기저귀 하나를 쓰는 매무새를 기를 때부터 바야흐로 냇물이 흐르도록 하는 삶결을 찾거나 느낍니다. (4344.1.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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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문화와 사진예술
 ― 좋은 삶에서 길어올리는 사진꽃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예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든 빨리빨리 해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학교를 나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어를 솜씨있게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결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제 목숨을 보배롭게 여기면서 즐거이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서 저마다 사랑하는 마을에서 저마다 사랑하는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일굴 수 있으면 좋습니다. 누구나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삶자락을 누리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 나라에는 사진문화가 없습니다. 사진문화란 사진만 헤아리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만 헤아리더라도 이 나라에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더욱이 문화라 할 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삶이 있기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삶이 있을 때에 문화가 비로소 태어납니다.

 전통문화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꾸린 삶입니다. 김치이든 된장이든 시래기이든 콩국수이든, 잘나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잘난 재주나 대단한 재주로 자랑하던 모습이 아닙니다. 밥이건 집이건 옷이건 노래이건 춤이건, 하늘에서 똑 떨어지거나, 사람들 살림살이나 마을에서 동떨어진 채 퍼지는 문화나 예술이란 없습니다. 그저 여느 삶이고 그예 수수한 사람이 어디에서나 나눈 전통문화입니다.

 짚신, 소쿠리, 삽짝, 온돌, 이엉, 질그릇, 멧돌이란 전통문화이면서 생활문화라고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름이란 부질없이 ‘삶’ 한 가지입니다. 삶이었고 삶이며 삶으로 이어가기에 ‘전통’입니다. 따로 ‘전통’이라는 앞머리를 붙일 까닭이 없이 삶이요, 삶이기에 학자들은 전통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예술이라든지 이름을 거듭 붙입니다. 도자기를 굽든 그림을 그리든 장구를 치든 굿을 하든 무어를 하든 인간문화재나 예술이나 문화이기 앞서 노상 삶입니다. 언제나 삶인 가운데 더욱 알뜰히 즐긴 이야기입니다.

 사진문화가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녹아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예술이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꽃피운다는 소리입니다.

 나랑 너랑 우리,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수수한 터전에서 조촐하게 어우러지면서 즐기는 삶인 사진일 때에 사진문화이면서 사진예술입니다. 이른바 ‘순수문화’나 ‘순수예술’이란 없습니다. ‘순수삶’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식사’란 없습니다. ‘순수육아’라든지 ‘순수살림’이라든지 ‘순수직장인’ 또한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기계와 같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도 되는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이 꾸리는 삶이 아닙니다.

 집 바깥에서 돈만 벌어들이면 되는 아버지 노릇이나 어머니 구실이 아닙니다. 집 안쪽에서 식구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도란도란 생각과 꿈을 나누어야 비로소 어버이 노릇이요 딸아들 구실입니다. 밥하는 사람 따로 밥먹는 사람 따로일 때에는 집살림이 엉터리입니다. 함께 밥을 차리고 함께 밥상을 치우며 함께 마루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한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돌보는 아이입니다. 한 집안 식구가 모두 사랑하며 보살필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은 부속품이나 톱니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은 늘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어느 한 가지 일만 해도 된다거나, 회사에서 무슨 한 자리만 지키면 된달지라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말을 하고 귀로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마음결을 고이 건사하는 살아숨쉬는 목숨인 사람입니다. 누군가한테 아버지나 어머니요, 누군가한테 딸이나 아들인 고운 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곱거나 착하거나 참다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쁜 한 사람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명함으로 다루어집니다. 경제개발을 이루어야 하는 톱니바퀴로 여겨집니다. 사람이 부속품처럼 나뒹구는 이 나라에서는 사진이란 어쩔 수 없이 부속품 구실을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다울 때에는 사진이란 한결같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돈벌 생각만 하거나 돈벌 일만 하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듯, 사진문화만 생각하거나 사진예술만 살필 때에는 문화도 예술도 못 될 뿐더러 사진부터 되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만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진문화가 되지 못하고, 사진읽기(비평)만 한대서 사진이야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집살림 꾸리는 돈은 돈대로 벌면서 집식구랑 살가이 어울리는 가운데 내 삶 그대로 사진을 하면 됩니다. 먹고살기 팍팍해서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는 젖혀 놓은 채 돈벌이만 한다면, ‘사진을 찍어서 돈벌이를 한다’고는 하더라도 ‘돈벌이를 할 뿐’이지 ‘사진을 찍는다’고 말할 수 없어요. 오늘날 신문·잡지사 사진기자가 수두룩하게 많기는 많으나, 돈벌이를 하는 사진기자만 있지 사진을 하는 사진기자는 몹시 드뭅니다. 스튜디오이든 사진관을 차린 이들 또한 돈벌이로 사진기를 매만지지, 삶을 헤아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내 아이를 사랑하며 즐거이 돌보는 가운데 담는 사진 한 장이랑, 사진관에 찾아가서 예쁘장한 옷을 입히고 예쁘장하게 웃으라 하면서 찍는 사진 한 장이랑, 서로 견줄 수 없습니다. 서로 견줄 만한 값이 아닙니다. 무언가 뜻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을 앞에 세워 놓고 사진기를 드는 사진 한 장이랑, 스스로 알차거나 다부지거나 씩씩하거나 즐거이 삶을 일구는 사람을 살가이 사귀면서 스스럼없이 사진기를 쥐는 사진 한 장이랑,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둘은 나란히 놓을 높낮이가 안 됩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살피려 한다면, ‘좋은 사진문화’나 ‘아리따운 사진예술’이 꽃피우는 나라나 겨레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기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마을)에서 어떠한 보금자리를 일구며 삶을 즐기는가에 따라, 사진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됩니다. 좋은 삶에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진’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좋은 문화’나 ‘좋은 예술’만 덩그러니 태어나거나 샘솟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틀만 좋을 수 없습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해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좋음이란 다 다름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꽃을 피워 다 다른 열매를 맺고 다 다른 맛을 즐길 때에 좋음입니다. 호박꽃은 호박을 맺고 오이꽃은 오이를 맺으며 수세미꽃은 수세미를 맺습니다. 호박은 호박이어서 좋고 오이는 오이여서 좋으며 수세미는 수세미여서 좋습니다.

 잘 찍는 사진 한 장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며 가르치거나 배울 학사과정이나 강의란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즐거우면서 좋은 사진을 당신 삶으로, 내 삶으로, 우리 삶으로 받아안으며 펼칩니다.

 잘 찍어 선보이는 사진이 없듯,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아이랑 짝꿍을 굳이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제 아이는 제 아이답게 찍으면 되고, 제 짝꿍은 제 짝꿍대로 찍으면 됩니다.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아이를 바라보며 제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제가 일구는 살림살이대로 제 짝꿍을 마주하며 제 짝꿍 한삶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내 됨됨이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지고, 달라지는 내 삶에 따라 사진 또한 달라집니다. 내가 먼저 고운 됨됨이가 되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해야, 눈물을 흘릴 만큼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착한 마음가짐으로 아리땁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즐겨야, 웃음꽃 흐드러질 만큼 기쁜 사진을 얻습니다.

 사진을 하는 내가 아니라, 참답고 착하며 곱게 살아가는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맞아들일 노릇입니다. 사진문화를 말하는 내가 아니요, 사진문화를 북돋우는 내가 아니라,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따숩게 껴안을 줄 아는 예쁜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곰삭일 노릇입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고 옆지기를 사랑하며 멧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시골 도서관을 꾸리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하는 사진이라면 제 삶에 따라 하는 사진입니다. 제가 좋아하거나 바라보는 사진이라면 제 삶자리에서 바라보며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이나 ‘나한테 돈 10억이 들어온다면’처럼 덧없는 꿈을 꿀 일이란 없습니다. 나로서는 ‘딸아이 아빠로서’ 오늘 하루를 생각하고, ‘집살림 일구는 남편으로서’ 오늘 하루를 헤아리며,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되뇝니다. ‘작가’라든지 ‘비평가’로 살필 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서 돌아보고, 사랑스러운 한 사람으로서 되돌아보며,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서 뒤돌아보는 삶인 가운데 사진입니다.

 이 나라에 내 삶을 내 삶대로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거나 조금 더 자리를 잡거나 조금 더 신나게 사진잔치를 마련하거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아주 보드랍고 따사로이 사진문화가 꽃을 피고 사진예술이 무럭무럭 봄바람 꽃내음을 실어나릅니다. (4344.1.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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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사랑하는 아이


 글을 쓰는 아빠 곁에는 글을 쓰는 아이가 있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 하는 아빠 곁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셈틀을 켜 놓은 책상맡에서 자판을 또각거리는 아빠 곁에는 나란히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또각거리고파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얌전히 앉아 밥을 먹는 아빠 곁에는 얌전히 앉아 밥을 먹으려는 아이가 있을까요. 글쎄, 아이는 밥 먹을 때만큼은 참으로 말을 안 듣지만, 배고픈 때에 맞추어 알맞게 밥을 해서 차려 놓으면, 배가 찰 때까지 얌전히 잘 받아 먹어 줍니다.

 사진을 찍는 아빠 곁에는 함께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픈 아이가 있습니다. 골목을 거니는 아빠 곁에는 함께 손잡고 골목마실을 하고픈 아이가 있어요.

 아이는 아빠 곁에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는 손재주나 말재주나 몸재주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로지 삶을 배웁니다. 제 아빠가 미운 삶을 일군다면 미운 삶을 배우고야 맙니다. 제 아빠가 고운 말을 사랑한다면 고운 말을 알알이 받아들입니다. 제 아빠가 착한 나날을 보낸다면 아이 또한 시나브로 착한 나날을 보낼 테지요.

 그러나 아이 곁에는 아빠만 있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는 엄마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이웃이랑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만 놀지 않습니다. 더 눈길을 끌거나 더 눈길을 사로잡는 데로 쏠리거나 휘둘리거나 휩쓸립니다. 우리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안 보지만, 어느 집에 가거나 어느 밥집에 들어가거나 텔레비전 없는 데가 없습니다. 아이는 텔레비전 켜진 데에서 발길을 떼지 못할 뿐더러,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아빠가 열 번을 부르건 백 번을 부르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은 좋은 넋으로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넋으로 일구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알쏭달쏭합니다. 좋은 넋으로 좋은 살림을 일구지 않을 때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지만, 좋은 넋이란 또 무엇이고 좋은 살림이란 또 무엇이며 좋은 책이란 참말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방방 뛰며 눈을 못 떼는 아이 곁에 선 아빠는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텔레비전 없는 우리 멧골집으로 돌아가기 앞서까지는 어찌하는 수 없습니다. 서울에 볼일을 보러 와서 전철을 타고 움직일 때에도 가야 하는 데까지 그예 가야지, 사이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밀고 밟으며 치는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아이 또한 시달려야 합니다. 매캐한 바람을 아이도 마셔야 합니다. 복닥거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아이도 들어야 합니다.

 서울이라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울이든 대전이든 제주이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은 늘 있어요.

 그러나 이대로 좋으려나요. 이대로 이 나라 이 터전 이 나날이 괜찮으려나요. 서울 홍제동에 자리한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한국인의 정서》(우석,1981)라는 묵은 책 하나를 이천 원쯤 주고 장만했습니다. 글을 쓴 하종갑 님은 경남일보라는 지역신문 기자입니다.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가 낸 책이었을 때에도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이 잊히거나 묻히거나 안 읽혔을까 궁금하지만,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는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을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쓸 수조차 없으리라 봅니다. 아니, 이런 책이 나왔어도 읽어서 기쁘게 삭이며 즐거이 느낌글 하나 기사로 쓰지 못했겠지요.

 우리 아이가 글을 사랑하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 주면 좋겠습니다. 아빠부터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우리 아이가 착한 마음씨를 보듬는 아이로 예쁘게 크면 고맙겠습니다. 아빠부터 착한 마음씨를 아끼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아빠는 손에 물이 마를 겨를 없이 신나게 빨래를 합니다. (4344.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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