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섯 손

 


 옆지기가 피아노를 친다. 첫째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서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친다. 내가 둘째를 안고 데려가서 너도 쳐 보렴 하고 피아노 앞에 대니 둘째도 제 작은 손을 놀려 피아노 건반을 똥똥 친다. 이윽고 옆지기가 둘째를 받아 앞에 앉혀 함께 피아노 건반을 친다. 이제 세 사람 여섯 손이 피아노를 친다. 두 사람이 피아노 한 대를 함께 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세 사람이 함께 친다. 아버지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 사람이 피아노를 치면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으니까. (4345.1.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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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 - 3~8세, 개정판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2
주디스 커 글.그림, 최정선 옮김 / 보림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못생긴 고양이는 못생겨서 예쁘구나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2] 주디스 커,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보림,2000)

 


 주디스 커 님 그림책을 세 권째 읽습니다.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보림,2000)를 읽는 동안 줄거리와 얼거리 모두 《친구 거위 찰리》(문학사상사,2003)하고 닮았다고 깨닫습니다.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는 1970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이라 하고, 《친구 거위 찰리》는 2001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이라 합니다. 서른한 해를 지나는 사이, 주인공이 고양이에서 거위로 바뀌었을 뿐, 이야기는 서로 엇비슷합니다. 다만, 그림결로 보았을 때 고양이 모그 이야기는 퍽 투박하면서 수수하고, 거위 찰리 이야기는 퍽 정갈하면서 가지런합니다.

 

 두 가지 그림책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림책 그리기를 서른한 해 넘게 이으면서 엇비슷하다 싶은 작품이 두엇 또는 여럿 나올 만합니다(주디스 커Judith Kerr 님은 서른한 해가 아니라 훨씬 오래 그림을 그렸어요. 1923년에 태어나 여든아홉 살이니까요.).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엇비슷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주인공만 달리 하면서 한결같다 싶은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어요. 꼭 이야기 틀거리가 다르거나 새롭게 짜야 하지는 않거든요.


.. 한쪽 발을 닦다가 잠깐 딴생각을 하잖아요. 그럼 모그는 다른 쪽 발을 닦는 걸 깜빡 잊어버려요. 한번은요, 고양이는 날지 못한다는 걸 잊어버린 적도 있어요 ..  (6쪽)


 두 가지 그림책을 나란히 놓고 살필 때에 한 가지 재미난 대목이 있습니다. 다른 집은 어떠한가 모르겠으나, 우리 집에서는 올해로 다섯 살로 넘어선 첫째 아이가 《친구 거위 찰리》는 그닥 재미나게 들여다보지 않아요. 한 번 넘기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아요.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는 수없이 넘기고는 또 보고 다시 들여다봐요.

 

 주디스 커 님이 그림책을 그린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1970년하고 견주어 2001년이 한결 발돋움하면서 새로 거듭난다 할 만하지만, 우리 집 아이는 옛 그림책에 더 눈길이 가는구나 싶어요.

 

 어쩌면, 거위보다 고양이를 둘레에서 쉬 마주하니까 한결 낯익은 고양이 그림책이 재미날는지 모릅니다. 네 식구랑 고양이가 부대끼는 모그 이야기가 거위 찰리 이야기보다 더 살가운지 모릅니다.

 

 두 그림책을 함께 살핀 어버이 눈길을 생각합니다. 나는 두 그림책 가운데 거위 찰리 이야기는 좀 처진다고 느낍니다. 엇비슷한 줄거리나 얼거리이기 때문에 처진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림결은 한결 정갈하고 가지런하지만, 그림책으로 아이들과 나누려는 사랑내음과 사랑빛깔은 1970년 작품 고양이 모그 이야기가 퍽 따사로우면서 포근해요. 군더더기 많고 꽤 어설프다 싶은 그림결인 1970년 작품 고양이 모그인데, 투박하며 수수한 그림결이 오히려 이 이야기에 걸맞구나 싶어요.

 

 주디스 커 님 다른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서도 ‘그리 대단하지 못한 이야기’를 놓고 참 예쁘며 사랑스레 그림결을 풀어냅니다. 그러니까, 아주 돋보이는 그림감을 다룬대서 더 돋보이는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더 남다르다 싶은 그림감이라든지, 우리 삶터 아프거나 힘들거나 고단한 이야기를 다루어야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다루는 마음결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보듬는 손길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품에 안는 사랑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결국 모그는 부엌창 문턱에 올라앉아서 야옹야옹 울어요. 누가 집안에 들여보내 줄 때까지요. 나중에 보면 모그가 어디 앉아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아버지) 토마스 씨는 늘 속상했어요 ..  (10∼11쪽)


 그러고 보면, 고양이 모그는 ‘깜박깜박 잘 잊는’다고 해요. 어찌 보면 좀 바보스럽다 할 만하고, 어찌 보면 꽤 어리석거나 굼뜨거나 몸 어딘가 아픈 고양이라 할 만해요. 흔한 말로, 다부지거나 씩씩하거나 튼튼하거나 예쁘장하거나 멋스러운 고양이하고는 동떨어져요. 고양이는 풀숲을 거닐면서 꽃잎 하나 밟지 않는다고 하고, 발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지만,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에 나오는 고양이 모그는 영 딴판이에요. 엉터리 고양이라 할 만하고, 어설픈 고양이라 할 만하며, 그야말로 뚱딴지 같은 고양이라 할 만해요. 모그한테 밥을 주는 네 식구는 끝끝내 ‘너한테 참말 질렸어. 이 성가신 고양이야!’ 하고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아요.


.. 모그는 아주 졸렸어요. 모그는 따뜻하고 폭신폭신한 곳을 찾아서 잠을 잤지요. 모그는 아주 흐뭇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 모그한테 날개가 생긴 거예요 ..  (20쪽)


 사람 말을 하지 않고 고양이 말을 하는 모그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말든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으로는 느낍니다.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며 어떻게 마주하거나 어떤 몸짓을 보여주는가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사무치게 느낍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저지르니까 넌 참 바보야 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틀린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바보스러운 짓을 저질러 넌 참 바보야 하고 말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밥을 안 주거나 깔보거나 등돌리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호박씨를 깐다면 너무 슬퍼요.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하면 참 아파요.

 

 힘이 여린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가 있으면 마땅히 도와요. 힘이 여린 아이한테 무거운 짐을 들라 할 수 없어요. 한 살 두 살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대서 꾸짖을 수 없어요. 물잔이나 밥그릇이나 접시를 깨뜨린대서 나무랄 수 없어요. 고양이 모그가 엄마 모자를 찌그러뜨렸대서, 잠자는 누나 등허리에 올라타서 숨막히게 눌렀대서, 아버지 어머니가 아끼는 꽃밭을 망가뜨렸대서, 고양이 모그를 성가시게 여기거나 따돌릴 수 없어요. 더 사랑할 길을 생각하고, 깊이 사랑할 길을 헤아리며, 따스히 사랑할 길을 찾아야 즐거운 삶이에요.


.. 모그는 방을 빠져나와서 집안을 가로질러서 고양이 문으로 나갔어요. 모그는 아주 슬펐지요. 마당은 어두컴컴했어요. 집안도 어두컴컴했고요. 모그는 어두컴컴한 데 앉아서 어두컴컴한 생각만 했어요. 모그는 생각했지. “아무도 나를 안 좋아해. 모두 다 쿨쿨 잠만 자. 나를 집안에 들여보내 줄 사람도 없어. 게다가 저녁밥도 안 주었어.” ..  (32쪽)


 아버지가 잘못한 일이 있어 아이한테 잘못했어, 미안해, 하고 말하면,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웃습니다. 아버지 또한 아이가 잘못한 일을 바라보며 괜찮아, 괜찮은걸, 하고 말하면, 아이는 싱긋 웃으면서 멋쩍은 몸가짐을 훌훌 털겠지요.

 

 서로서로 더 어루만지면서 얼싸안는 사랑을 헤아리면 좋겠어요. 따사로이 품에 안고 따뜻하게 손길 쓰다듬는 사랑을 나누면 좋겠어요.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이고 넉넉하게 활짝 웃는 삶을 다 함께 누리면 좋겠어요.

 

 무슨 대단한 일을 이루어야 손뼉을 치면서 추켜세우지는 말아요. 하잘것없거나 보잘것없거나 하찮다 싶은 일을 하더라도 빙그레 웃으면서 살가이 손을 잡아요.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무등을 태우며 올려세우지는 말아요. 아무것 하는 일이 없더라도 저마다 얼마나 곱고 좋은 목숨이자 꿈인가를 살피며 예쁘게 두 손 맞잡아요. (4345.1.10.불.ㅎㄲㅅㄱ)


―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 (주디스 커 글·그림,최정선 옮김,보림 펴냄,20003.1.5./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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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1-10 19:23   좋아요 0 | URL
아 미안해, 아 괜찮아 라고 말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걸까요.
가족이란게 그러면서 함께하는건데 말이죠. 요즘, 제 일 때문이 아니라
다른 분들 일 때문에 슬퍼져요... ^^

된장님 댁에서 힘 얻어가구요.

파란놀 2012-01-11 06:01   좋아요 0 | URL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고맙게 받아들여 누리시리라 믿어요~
 

 


 민주주의자 김근태 삶

 


 네 식구 함께 읍내마실을 한다. 신호리 동백마을 앞을 두 시간에 한 차례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잡아탄다. 어른 두 사람 버스삯 3000원을 낸다. 마지막 역인 읍내 버스역에 닿아 내린다. 읍내 하나로마트로 걸어가다가 길가 한쪽에 붙은 걸개천을 바라본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을 추모합니다.”

 이 길을 걸어서 오갈 고흥읍 사람은 몇쯤 될까. 사람들 많이 걸어다니는 읍내 한복판 아닌, 읍내 변두리라 할 만한 자리에 붙은 걸개천을 얼마나 많은 군민이 들여다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처럼 누군가 이 걸개천을 올려다볼 테지. 오래오래 나부낄 걸개천을 가만히 바라보겠지.

 

 흔하게 붙는 걸개천이라 여기며 지나칠 만하지만, “김근태를 기립니다”가 아니라 “김근태 삶을 기립니다”라 적은 글월이기에 사진기를 들어 한 장 담는다. 내가 내 어버이를 기린다 할 때에는 내 어버이한테서 보일 어떤 모습을 기릴까. 내 어버이 목숨을 기리는가, 내 어버이 몸뚱이를 기리는가, 내 어버이가 남긴 돈이나 빚을 기리는가, 내 어버이가 남긴 집을 기리는가, 내 어버이가 일군 삶을 기리는가, 내 어버이가 빚은 말을 기리는가, 내 어버이가 나눈 사랑을 기리는가.

 

 나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누리고 싶다. 나는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 삶 모두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맞이하고 싶다. 민주 운동을 하던 김근태라는 사람이 아닌, 민주 운동을 삶으로 풀어내던 김근태라는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내 일과 내 살붙이와 내 글과 내 책살림, 여기에 앞으로 일구려 하는 집숲을 내 삶으로 녹여내어 사랑하고 싶다. (4345.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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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1-10 19:25   좋아요 0 | URL
마지막 글월, 너무 마음에 와닿아요.

제 삶으로 풀어내려는거, 제 삶에 녹여내려는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된장님, 저는 된장님의 삶에 대한 고집을 존경합니다.

파란놀 2012-01-11 16:59   좋아요 0 | URL
삶으로 녹이면
어떠한 일이든
아름다이 빛나리라 믿어요~
 


 따사로운 겨울햇살 글쓰기

 


 겨울이라 해서 차가운 햇살이 아니에요. 봄에도 겨울에도 한결같이 따사로이 비추는 햇살이에요. 내 글에 앞서 내 삶부터 겨울날 따순 햇살 같은 꿈길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 누리고 싶어요. 겨울햇살 따사로이 내리쬐며 마당가 후박나무 빨래줄에서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 보송보송 말라요. 집식구들 겨울날 두툼한 이불도 곁에서 햇볕을 듬뿍 머금어요. 마당에서 마음껏 달리기하는 첫째 아이한테도 겨울햇살 넉넉히 드리워요. 봄햇살도 좋고 여름햇살도 좋으며 가을햇살도 좋아요. 겨울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면서 고맙고 기뻐요. 겨울에 햇살이 없다면 얼마나 차갑고 쓸쓸할까요. 겨울에 햇살이 드리우지 않으면 얼마나 슬프며 어두울까요. 겨울에 햇살을 비추지 않으면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며 갑갑할까요. 봄을 여는 햇살 같은 글도 좋아요. 여름을 빛내는 햇살 같은 글도 좋아요. 가을을 나누는 햇살 같은 글도 좋아요.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난 십이월에 부는 차디찬 바람을 포근하게 달래는 햇살 같은 글이 무척 좋아요. 겨울아이인 나는 겨울날 하얀 들판을 따숩게 맑은 손길로 보듬는 햇살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4345.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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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린이들 - 이기웅 사진집
이기웅 / 열화당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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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이와 이웃 아이 바라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40] 이기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

 


 지난 2001년 1월 1일 첫선을 보인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을 2001년에 들여다볼 때를 곰곰이 떠올리면서 2012년 올해에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내 모습을 비추어 이 사진책을 다시 펼칩니다. 우리 시골마을 사진책도서관 책꽂이에서 이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 나는 이 책을 아직 혼인하지 않고 나한테 아이가 없을 때에 처음 만났지.’ 하고 되새깁니다. 예전 내 삶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의 어린이들》이랑 오늘 내 삶으로 헤아릴 《세상의 어린이들》은 얼마나 같거나 얼마나 다를까.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나날을 헤아리거나 겪지 못하던 때에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하고, 아이들과 스물네 시간 함께 살아가며 늘 들여다보고 노상 치닥거리하는 나날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은 참 다르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오늘 두 아이랑 복닥인다 하더라도 ‘아이가 없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는 사람’하고 견주어 어린이 사진을 더 잘 읽는다거나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더 잘 찍을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사랑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사진·글·그림·이야기 모두 달라지니까요.

 

 열한 해 앞서 읽은 책을 열한 해 만에 다시 손에 쥔다면, 똑같은 느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열한 해 동안 똑같은 느낌이 고스란히 이어질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읽든 그림을 읽든 시를 읽든 만화를 읽든, 열한 해라는 나날에 걸쳐 새롭게 일군 내 땀방울과 꾸덕살 이야기를 발판으로 더 깊게 읽거나 한결 넓게 읽을 수 있어요.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일군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을 새삼스레 다시 만지작거리며 홀로 생각합니다. ‘열한 해 앞서 이 사진책을 장만했으니 이렇게 오랜 나날에 걸쳐 책과 사진을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구나. 그저 책방에 선 채로 읽었다면, 아니면 도서관에 이 책을 넣어 달라 말하며 빌려서 읽었다면, 누군가 장만해서 이녁 집 책꽂이에 꽂은 책을 빌려서 읽었다면, 아마 그 한 번 읽은 느낌으로만 이 책을 헤아리지 않겠니. 애써 장만해서 오래도록 건사하는 책 하나가 내 집에 있으면,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곱씹고 되씹으면서 내 넋과 사랑과 꿈과 빛을 한결 따사로이 북돋울 수 있어.’ 사진책 하나 장만하는 일은 기쁨으로 그치지 않아요. 내 눈길을 날마다 새롭게 일구도록 도와요. 언제나 곁에 있는 책을 틈틈이 들추면서 열 번 백 번 천 번 되읽으며 새롭게 생각하거나 돌아보는 빛씨앗을 베풀어요.

 

 이기웅 님은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 끝자락에, “새천년의 첫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십이월 어느 날, 강운구 형의 지프를 타고 몇 날 동안의 새벽녘에, 햇볕 찬란한 한낮에, 그리고 저녁 어스름에 바흐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이 나라 남도의 들과 마을들을 달려 지나고 있었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나는, 우리 국토는 이렇듯 참담하게 망가져 가고 있으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처럼 일그러져 가고 있는가를 화내고 있었다. 나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로공사로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있는 산천들, 무책임한 건축공사로 속속 들어서고 있는 변태적인 인공구조물들, 치졸의 극에 달한 글자꼴의 간판과 디자인(423쪽).”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아, 그래요. 2001년만 하더라도 한국땅 남녘자락이 얼마나 망가지던지요. 2012년이라면 훨씬 더 망가졌겠지요. 앞으로 더 망가질 테며, 2022년쯤 되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다 싶은 시골마을이 깡그리 무너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기웅 님은 “무자비한 도로공사”를 “지프를 타고 달리며” 느낍니다. 두 다리로 남녘자락을 천천히 거닐며 느끼지는 않아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들은 이 고흥자락이 참 어여쁘며 좋습니다. 고속도로 없지, 기차길 안 들어오지,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지,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재벌회사도 따로 없지, 고흥군에는 대학교 없지, 커다란 회사도 없지, 공장도 보이지 않지, 골프장 없지, 군수가 앞장서서 친환경농업을 하겠다고 외치지 ……. 고흥에서 다른 마을로 마실을 가자면 퍽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이 외통수요 멀디멀리 돌아야 하는 만큼, 고흥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도 외통수이며 멀디멀리 돌아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멀고 돌아야 하는 길이 즐겁습니다. 지난해 가을녘,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을 거쳐 남원 지나 전주로 가는데, 시외버스 일꾼이 부러 고속도로나 고속국도 아닌 시골국도를 달리더군요. 이 때문에 시외버스는 다른 때보다 좀 더디 달릴밖에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달려서 참 좋았어요. 오가는 자가용 아주 드문 시골국도는 우람하게 자란 나무숲 사이로 달리는 길이면서, 가을자락 깊이 물든 남녘땅 어여쁜 빛깔을 듬뿍 베풀었어요. 시외버스로 세 시간을 달리면서 모처럼 차멀미를 안 할 수 있었어요.

 

 고흥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옮기려고 혼자서, 때로는 아이랑 둘이서, 때로는 네 식구 다 함께 찾아와서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며 움직이기도 했지만, 두 다리로 여러 시간 걸어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천천히 걸어 돌아다니면서 ‘고흥이라는 데로 들어올 바깥 자동차’가 몹시 드물 뿐더러, 마을사람 스스로 자동차 타고 움직일 일도 많지 않다고 느꼈어요. 읍내조차 그닥 어수선하지 않아요. 참 조용해요. 그렇다고 개발 손길이 아예 없지 않으나, 개발을 한대서 돈을 뽑아낼 무언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차분하면서 예뻐요.

 

 구례라든지 곡성이라든지 함양이라든지 양양이라든지 아마 다들 비슷하리라 느껴요.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든 한갓져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하고 가깝지 않다면 호젓하면서 예뻐요. 자동차 아닌 자전거로 움직이면, 시골버스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거닐면, 이 예쁜 온누리를 온통 내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해요.

 

 어쩌면,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새천년 첫 자락에 지프 아닌 두 다리로 천천히 남녘자락 시골길을 거닐어 보셨으면 또다른 이야기와 사랑과 느낌을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그러나, 이기웅 님은 지프를 타고 움직이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지프를 타고 움직이며 더 깊으며 그윽한 멋을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기웅 님은 “이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은 차라리 들꽃이었다. 내 카메라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꽃송이를 향해 달려간다. 무념무상으로(423쪽).” 하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막개발과 막삽날을 당신 스스로 느끼지 않았으면 온누리 아이들 들꽃송이 웃음빛을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 했을 수 있어요. 이러한 생각을 했어도 아주 느즈막하게 했을 수 있고, 굳이 사진책을 내놓자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느껴요. 이기웅 님이 천천히 두 다리로 거닐면서 남녘자락 시골마을 사람들 삶을 받아들였으면, 이러한 결대로 또다른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사진으로 담는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고.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온 지 열한 해가 되었어요. 이제 두 번째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라밖에서 만날 아이들도 예쁘고, 나라안에서 만날 아이들 또한 예뻐요. 멀리 있는 이름 모르는 아이들도 예쁠 테지만, 우리 집 내 아이들도 예쁘고 이웃집 아이들도 예뻐요.

 

 애써 비행기 타고 러시아나 인도로 나들이 가지 않더라도 한국땅 곳곳에서 눈빛 맑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먼저 나부터, 곧 우리 어른들부터 눈빛 맑은 어른으로 살아가면 눈빛 맑은 아이들을 느끼면서 서로 신나게 놀고 예쁘게 어우러질 수 있어요. 이렇게 서로 곱디곱게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가끔 한두 장 사진을 찍으면, 흐드러지는 춤꽃 노래꽃 이야기꽃 사진들이 피어나리라 믿어요.

 

 좋다고 느끼는 사진은 좋다고 여길 내 삶을 즐거이 일굴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찍더라도 태어나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은 아름답다고 여길 내 삶을 아름다이 지을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담더라도 태어나요.

 

 내 아이를 바라보며 온누리 아이들을 읽을 수 있어요. 온누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아이를 느낄 수 있어요. 내 아이들을 찍어도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은 내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4345.1.9.달.ㅎㄲㅅㄱ)


― 세상의 어린이들 (이기웅 사진,열화당 펴냄,2001.1.1./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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