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 평가’에 나 혼자 괜히 골을 부리며

 


 지난 2005년부터 내 마음에 오래도록 감도는 시집이 있다. 2005년에 이 시집 느낌글을 하나 쓰기는 했으나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이 느낌글을 썩 제대로 썼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2012년 설을 맞이해 음성까지만 다녀왔다. 음성을 거쳐 일산까지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고흥을 떠나는 새벽까지 옆지기 몸이 어떠한가를 살피느라 음성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막상 미리 끊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못 간다 하더라도 표는 미리 끊어야 하지 않았으랴 싶다. 왜냐하면, ‘간다 10% 못 간다 90%’인 채 광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표 하나는 끊었으니까.

 

 살림돈 후덜거리기에 음성에 간다 하면 음성에서 서울로 갈 기차표 끊을 돈을 걱정할 만하지만, 그래 봤자 10만 원 안팎일 텐데, 정 못 간다면 집에서 취소하면 되니까 그리 근심할 일이 아니었구나 싶은데, 늘 이렇게 때가 지나고서야 뒤늦게 땅을 친다. 아마, 표를 미리 끊었다면 우리 네 식구 음성을 거쳐 일산 옆지기 어버이까지 뵙고 돌아왔겠지.

 

 후줄근하고 초라한 살림집이라 하더라도 어여쁘며 좋은 보금자리이다. 못난 어버이는 없다. 나와 옆지기한테 우리 어버이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듯,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가 못난 어버이가 아니다. 서로 꾸밈없이 어여쁜 사람들이다. 조그맣고 조그마한 이 시골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다리 뻗고 즐거이 주무시고 돌아가셔요, 하고 인사할 만하다. 한 지붕에 한 이불 덮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지, 꼭 호텔 방 같은 데에서 묵어야 보람이거나 즐거움이 아니다.

 

 아주 찌뿌둥한 몸으로 새벽에 일어난다. 오래도록 마음에 담은 시집 하나를 헤아리다가, 이 시집에 하나 달린 ‘서평’을 읽다가, 이 시를 내놓은 분 삶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괜히 골이 난다. 어느 분이 별 다섯 만점에 별 둘을 붙이면서 ‘노동시’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는다고 적은 짧은 ‘서평’을 읽다가, 울컥 하고 무언가 치민다. 노동시란 뭐지? 사랑시란 뭐지? 문학이란 뭐지? 시란 뭐지? 글이란 뭐지?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시를 읽으며 생각한다. 이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읽으라고 시를 쓰는 도시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시골마을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예쁘게 나누려고 시를 쓰는 문학쟁이란 없다. 아무도 없다. 연필 쥐기보다 호미 쥐기를 좋아한 박경리 님이라지만, 막상 박경리 님이 쓴 시조차 시골자락 흙을 밟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읽도록 쓴 시이지는 않다.

 

 노동시라면 누가 읽으라는 시일까. 노동자라는 사람이 읽으라는 시인가. 그러면, 노동자라는 사람은 어떤 시를 읽고 어떤 ‘노동자 삶’을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즐기다가는, ‘노동자 삶을 꾸리며 낳은 아이들’한테 이 ‘노동자 일과 삶’을 물려줄 만할까.

 

 새벽바람에 찌뿌둥한 바람으로 골을 부리며 글을 쓴다. 글을 다 쓰니 기운이 폭 빠진다. 울컥 하고 치미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일은 매우 부질없다. 그런데, 찌뿌둥할 뿐 아니라 눈이 절로 감기는 마당에 울컥 하고 치밀다 보니, 없는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책상맡에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책상맡에 걸상을 놓고 앉아 글을 쓸 수 있는데, 옆지기하고 한살림 꾸리던 때부터는 낮은 책상 앞에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글을 쓴다. 일부러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는데, 무릎이 시릴 때까지만 책상맡에서 무릎 꿇고 글을 쓰니 나한테 아주 좋구나 싶다.

 

 내가 즐겨읽던 시집 하나를 누군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손길로 쓰다듬은 글을 붙여 주었다면, 나는 어떤 넋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때에도 이 시집에 느낌글 하나 쓸 만했을까. 다른 이가 고운 사랑으로 느낌글 하나 썼다면, 나는 애써 내 사랑을 담는 느낌글을 쓰려 했을까.

 

 나는 새해 설날부터 아이한테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마음이나 다짐과 달리 잔소리를 하고야 만다. 잔소리를 하고 난 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또 속을 긁는다. 이 바보스러운 아버지는 얼마나 바보스러운 티를 풀풀 내며 철부지로 살아야 하느냐고 스스로 속을 긁는다. 나는 좀 사랑어린 손길로 우리 집식구를 보듬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자꾸자꾸 이렇게 뉘우치기만 하지 말고, 사랑어린 삶을 누려야 하지 않나.

 

 슬프구나 싶은 서평 때문에 괜히 골을 냈다. 괜히 골을 내면서, 나는, 나부터, 나야말로 골을 부리지 않는 삶을 일구며, 사랑을 돌보는 삶을 누리자고 또 다짐한다.

 

 누군가 나한테 거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달갑잖은 거울은 그야말로 달갑잖다. 아름다운 거울이 좋다. 눈물 흘리는 거울이 좋고, 웃음꽃 흐드러진 거울이 좋다. 새벽에 코피 쏟은 아이 곁으로 돌아가서 더 드러누워야겠다. 아이 손을 살며시 잡고 아이 이불을 여미고 아이 머리칼을 쓸어야겠다. (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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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지에 핀 꽃 삶의 시선 14
조혜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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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이 시를 써야 아름답다
― 조혜영, 《검지에 핀 꽃》

 


 - 책이름 : 검지에 핀 꽃
 - 글쓴이 : 조혜영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5.1.5)
 - 책값 : 5000원

 


 문학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이름난 이가 새롭게 펴낸 글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쓴 글에 힘이 빠지거나 맥알이가 없거나 풋풋함과 튼튼함이 사라지면, 이러한 글은 읽거나 읊을 맛이 사라져요. 글재주는 남고 울림은 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 노동과 시를 바라보는 눈에도 /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게야 /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줄곧 / 시를 써온 한 시인에게 / 유명한 평론가에 교수는 / 일하면서 시 쓰기는 /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며 / 시 쓰는 일과 노동자의 삶은 /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고 감탄 연발이다 ..  (편견-노동시)


 나는 이름값으로 쓰는 시를 읽지 못합니다. 나는 손재주로 쓴 시를 읽지 못합니다. 나는 목소리로 외치는 시를 읽지 못합니다. 나는 이름표나 딱지를 붙인 시를 읽지 못합니다. 나는 돈을 버는 시를 읽지 못합니다.

 

 어쩌면 나는 시를 읽는 생각이 좀 한쪽으로 치우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으며 내 생각이 어느 한골로 치우쳤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나는 내 삶으로 시를 읽을 뿐이니까요. 나는 내가 일구는 삶에 비추어 누군가 쓴 시를 읽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치우친 생각(편견)이 있다고 합니다. 이주노동자나 장애인이나 여성이나 학력 낮은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을 치우친 눈길로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곰곰이 따지면, 하나하나 돌아보면, 이러한 눈길이나 이러한 생각은 딱히 치우쳤다고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바라보는 눈길일 뿐이거든요.

 

 성차별을 하는 사람은 입으로만 성차별을 하지 않아요. 삶으로 성차별을 합니다. 이주노동자를 깔보는 사람은 입으로만 이주노동자를 깔보지 않아요. 이녁 삶으로 이주노동자를 깔봐요. 장애인 권리나 여성 권리를 생각하거나 아끼거나 돌보는 사람은 목소리로만 아끼거나 돌보지 않아요. 삶으로 예쁘게 얼싸안거나 어깨동무하면서 아끼거나 돌봐요.

 

 다시금 곰곰이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문학을 옳게 못 바라보지 않나요. 사람들은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잊거나 잃지 않나요.

 

 문학은 글 잘 쓰는 사람이 써야 하지 않아요. 시나 소설은 글쓸 겨를이 많은 사람이 써야 하지 않아요. 전문가라든지, 대학교수라든지, 평론가라든지, 글재주꾼이 써야 하는 문학이 아니에요. 일하는 사람이 일하는 삶을 담는 글이면 돼요. 살림하는 아줌마가 살림하는 나날을 글로 펼치면 돼요. 흙을 만지는 일꾼은 시골자락 흙삶을 글로 보여주면 돼요. 기름밥 먹는 일꾼은 기름밥 먹는 나날을 고스란히 글로 꽃피우면 돼요.


.. 요즘 세상에 / 결핵이 무슨 병이냐고 / 보건소에 가 약이나 갖다 먹으라는데 / 나는 그 결핵에 걸렸습니다 ..  (흔적)


 말하듯이, 살아가듯이, 일하듯이 쓰는 시입니다. 구김살이 있을 까닭도 없지만 꾸미거나 감추거나 보탤 까닭이 없이 쓰는 시입니다.

 

 신경림 시인은 1970년대에 첫 시집을 내놓을 때에 “못난 놈은 못난 놈끼리 논다” 하고 노래했던가요? 그래, 못난 놈은 못난 놈대로 못난 동무하고 놀면 돼요. 가난한 놈은 가난한 놈대로 가난한 동무하고 놀면 돼요. 사랑을 찾는 이는 사랑을 찾는 이대로 사랑을 찾는 동무랑 놀면 돼요. 아름다운 나날 꿈꾸는 이는 아름다운 나날 꿈꾸는 이대로 아름다운 나날 꿈꾸는 동무랑 놀면 돼요.

 

 착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착하게 살아가고픈 이와 동무를 삼으며 어울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하며 살고픈 이를 벗으로 여겨 예쁘게 어울리고 싶습니다.

 

 좋은 꿈으로 좋은 삶 일구고 싶어요. 좋은 꿈으로 좋은 삶 일구는 시를 읽고 싶어요. 좋은 꿈으로 좋은 삶 일구는 시를 읽으며 내 보금자리를 고이 보듬고 싶어요.


.. 공공기관에 와서 공공근로를 하면 / 공공연하게 비웃음 받을 수 있지 // 할머니는 너무 늙었어 / 노인네들은 집에 가서 애나 보지 / 젊은애가 아직 워드도 할 줄 모르고 / 재주가 없으면 이쁘기나 할 것이지 / 차 심부름이나 시켜야지 뭐 // 공공근로 주제에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네 / 사내자식이 대학까지 나와 가지고 / 에-라이 돈이 아깝다 / 공무원 월급 깎더니 / 필요도 없는 공공근로 보내서 골칫거리야 / 뭐 시켜먹을 일이 있어야지 ..  (공공근로 1)


 경상도 안동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권정생 님은 으레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공책에 적으면, 그게 바로 시인데, 어머니들이 그걸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이 얘기를 권정생 할아버지를 뵐 적마다 들었고,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글에서 곧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권정생 할아버지를 곁에서 모셨거나 가까이 섬겼다고 하는 분들 가운데 당신 아이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적바림하면서 시꽃을 피운다든지, 당신 어머니나 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찬찬히 적바림하면서 시열매를 맺는 모습을 아직 못 봅니다.

 

 아, 그러고 보면, 참말 그러고 보면, 나한테는 내 아이가 있지만, 나는 내 어머니한테는 아이예요. 나는 내 어머니 앞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이야기가 곧장 시꽃이 되는 셈이에요. 내가 내 어머니하고 주고받는 말마디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싯말이에요. 내가 내 아버지하고 나누는 말마디는 고스란히 말꽃이요 말열매요 시꽃이며 시열매예요.

 

 그러니까, 공공근로 일자리 하나 얻어 공공기관에 드나들면서 그곳 공무원들이 뇌까리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받아적을 때에도, 이러한 말마디는 고스란히 시가 돼요. 삶이 말이고, 말이 삶이에요. 삶이 시요, 시가 삶이에요.


..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 그들의 자질구레한 업무를 하나 둘 / 공공근로에게 공공근로로 시킨다 / 커피 타기, 해묵은 서류정리, 지하실 쓰레기 분리 / 국장님 담배심부름이 시간을 채워간다 //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 공공근로가 없으면 / 하루 종일 허둥대고 몸도 따라 바쁘고 / 공공근로를 기다리며 손부터 마비되어 간다 / 공공근로를 파견하지 않을 때는 정부를 탓하고 /무능한 정부 탓하며 시간을 보낸다 ..  (공공근로 3)


 이 땅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를 써야 맞아요. 이 땅 모든 일꾼들, 이를테면 흙일꾼과 기름밥 일꾼을 비롯한 모든 일꾼들은 글을 써야 옳아요. 내가 일하면서 보고 듣고 겪고 부대낀 이야기를 꾸밈없이 쓰면 돼요. ‘시적 자아’라든지 ‘모티브’라든지 ‘시적 구성’이라든지 ‘언어기교’ 따위는 몰라도 돼요. 아니, 이런 겉치레를 끼워붙이면 시하고 동떨어져요. 이런 자질구레한 껍데기를 들씌우면 글이 되지 않아요.

 

 부풀리는 글은 부풀린 풍선이지, 시라 할 수 없어요. 감추는 글은 감춘 고쟁이가 되지, 글이라 할 수 없어요.

 

 시금털털하면 시금털털한 맛이 나는 시예요. 수수하면 수수한 멋이 나는 시예요. 투박하면 투박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시예요. 맛깔스러우면 맛깔스러운 이야기 살가운 시예요.

 

 따분한 삶을 그리는 따분한 시가 있겠지요. 오순도순 웃음꽃 피는 삶을 그리는 시가 있을 테지요. 아프거나 슬픈 삶을 그리는 시가 있어요. 즐겁거나 가슴 벅차는 삶을 그리는 시가 있어요.

 

 애써 머리로 지어야 시가 되지 않아요. 억지로 글을 짜맞추어야 시가 되지 않아요.

 

 운율을 살펴야 시가 되지 않아요. 연과 줄을 나누어야 시가 되지 않아요.

 

 글자를 알맞게 줄여야 시가 되나요. 길이가 짧아야 시가 되나요.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 시를 쓸 수 있나요. 누군가한테서 문학수업을 받거나 문학강의를 들어야 시를 쓸 만한가요.

 

 내 삶이 있을 때에 시를 써요. 내 삶을 누리면서 시를 써요. 내 삶을 사랑하면서 시를 써요. 내 삶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날을 하루하루 곱새기면서 시를 써요.

 

 내 삶을 돌아보고 내 마음과 생각을 찬찬히 되짚으면서 시를 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길과 꿈과 일을 돌아보면서 시를 씁니다. 내 사랑을 다스리고 내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 한때 노동운동을 하다가 / 한때 학생운동의 기수이다가 / 한때 혁명전선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다가 // 지금 어디서 다 무얼 할까 // 누구는 정계에 진출해 꿈을 펼치고 / 누구는 지자체에 출마해 시의원 되고 / 누구는 벤처하고 누구는 판사 되고 / 하다못해 대학시간강사나 고액과외 선생이라도 하는데 / 누구는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되어 / 젊은날 청춘시절 무용담 섞어 큰소리라도 쳐보는데 // 너는 뭐냐! ..  (포물선-병렬이 3)


 조혜영 님 시집 《검지에 핀 꽃》(삶이보이는창,2005)을 읽습니다. 검지에 꽃이 피었다는 시를 읽습니다.

 

 명월리 응기, 갑작스레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둘레에 있는 수많은 이웃, 회사일과 집회로 고단한 남편 들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쓴 시를 읽습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나대로 살아갑니다. 다들 무언가를 생각하고 어떤 삶을 꾸립니다.

 

 “당신이 왜 총을 맞고 포탄에 쫓겨 / 산천을 떠돌아야 했는지도 모른 채 / 평생을 혼자 짊어지고 온 / 분단의 그 고통 잊고 / 오래오래 사셔야 할 텐데(어떤 명예회복)” 하는 노래에는 조혜영 님 어떤 삶 한 자락 담았겠지요. “병원 문 앞에 도착하면 / 나도 모르게 부산을 떤다 / 어제처럼 대답 없는 엄마가 / 아기천사처럼 누워 있다 / 노동을 잃은 살결이 너무 뽀얗다(증후군)” 하는 노래에는 조혜영 님 또다른 어떤 삶 두 자락 담았겠지요.

 

 조혜영 님을 낳아 기른 어버이는 어떠한 나날 어떠한 삶을 누렸을까요.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는 어떠한 꿈 어떠한 사랑을 빛냈을까요.

 

 쓸쓸히 떠나는 어버이인가요. 고단히 살아온 어버이인가요. 조혜영 님 어버이는 나한테 어떤 이웃일까요. 내 어버이는 조혜영 님한테 어떤 이웃일까요.


.. 아직도 밤새워 회의하는 조직이 있어? / 문학회가 글은 뒷전이고 / 매일 회의다 사업이다 매달리니 발전이 없지 / 어디 그래 가지고 문단에서 알아 주기나 한대? / 그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자 문학을? / 얼마 전 한 선배가 술김에 한 말이 / 불현듯 떠올랐지만 / 찬바람에 오줌 털 듯 진저리치며 / 다시 집으로 간다 ..  (단잠)


 발전이 없으면 어떻고, 시대에 뒤떨어졌으면 어떱니까. 누가 알아주지 못하면 어떻고 밤새워 모임을 하면 어때요. 글 하나 제대로 써내지 못하면 어떻고, 책 하나 번듯하게 못 내면 어떻겠습니까.

 

 서로 부대끼며 착하게 살아왔어요. 서로 복닥이며 예쁘게 살아가겠지요.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이냥저냥 부대끼며 착하게 살아가면 되는걸요.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땀흘려 일하면 넉넉한걸요. 없는 틈을 쪼개든, 있는 겨를을 나누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잘난 손놀림으로 글을 빛내든, 어수룩한 손재주로 글을 매만지든,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저 내 삶과 내 넋과 내 꿈을 시라는 글줄에 실을 수 있으면 즐거워요.

 

 사람들 앞에 널리 내보이려고 시를 써도 돼요. 혼자 용두질하듯 혼자 읽고 혼자 웃거나 울어도 돼요. 답답하니까 갑갑하니까 슬프니까 괴로우니까, 이 가슴을 뻥 뚫고 싶어 시를 써요. 즐겁거나 기쁘거나 보람차기에 이 모든 이야기를 널리 나누고 싶어 시를 써요.

 

 할 말이 많아, 온갖 말을 시로 써요. 못할 말이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털어놓듯 시를 써요. 옆지기한테 이야기하듯 시를 써요. 거울을 보며 나랑 이야기하듯 시를 써요.

 

 이렇게 쓴 시는 어디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중·고등학교 권장도서 목록’이나 ‘대학생 교양도서 목록’에 끼지는 못하겠지요. 이름난 평론가들 글도마에 오르지 못하겠지요. 이름난 문학잡지 서평에서 다루지도 않겠지요. 중앙일간지라는 ‘서울’신문이라든지, 서울하고 멀찍하게 떨어진 시골신문이라든지, 책소개 한 줄로라도 이야기되지 못하겠지요.

 

 시집 《검지에 핀 꽃》을 조용히 읽고 조용히 덮습니다. 나는 얄팍한 사랑시를 그리 안 좋아하기에 《검지에 핀 꽃》을 조용히 읽습니다. 나는 귀청 따가온 노동시를 그닥 안 좋아하기에 《검지에 핀 꽃》을 조용히 읽습니다. 나는 돈내음 그윽한 베스트셀러 시집을 썩 안 좋아하기에 《검지에 핀 꽃》을 조용히 읽습니다. 나는 평론가들 추천이나 비평에 따라 시집을 읽지 않으니 《검지에 핀 꽃》을 조용히 읽습니다.

 

 마음을 담고 삶을 노래하며 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수수하고 투박한 시가 좋습니다. 꾸밈과 거짓과 부풀림과 치우침하고는 처음부터 사귀지 않는 정갈한 시가 사랑받을 수 있는 날을 빌면서 조그마이 옹크린 시를 좋아합니다.

 

 푸근하게 감도는 따스함 어우러진 시집 한 권 읽으면 마음이 넉넉합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지 모르나, 푸근하게 감도는 따스함이 어우러지는 싯말 사이사이, ‘문학다이 꾸미는 말’이 보여 아쉽습니다. 아마, 아직 어쩔 수 없겠지요. 시를 읽는다는 사람들이나 시를 말한다는 사람들은 이런 ‘문학처럼 보이려고 꾸미는 말’을 좋아하거나 반길 테니까요. 온누리가 온통 ‘뭣처럼 보이려고 꾸미는 판’인데, 이러한 말마디 한두 대목 시집 한켠에 슬쩍 스밀 수 있을 테니까요.

 

 아이들이 읊는 말은 아이들 스스로 아이들 삶을 얼마나 꾸밀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삶을 스스로 꾸미면서 말을 지을까 궁금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읊는 말은 꾸미는 말인지, 꾸밈없이 터져나오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이웃 아이들이 외는 말은 꾸미는 말인지, 꾸밈없이 샘솟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텔레비전 때문에 물든 말인가요. 그러면, 어른들 말은,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은, 어디에서 어떻게 물든 말이 될까요. 어렵거나 딱딱한 어른들 말은 어디에서 어쩌다가 그 모양으로 물든 말이 되나요. 책을 읽어서? 무슨 학습을 하느라? 무슨무슨 집회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내 삶을 사랑하는 결대로 말하면 좋겠어요. 내 삶을 사랑하고 싶은 몸짓대로 말하면 기쁘겠어요. 내 삶을 사랑하는 살붙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말하면 예쁘리라 믿어요. 내 삶을 사랑하는 내 손길이 내 이웃이랑 동무 삶을 나란히 사랑하는 손길로 이어지며 아리따이 말하면 더없이 즐거우리라 믿어요.

 

 일하는 사람이 시를 쓰면 어여뻐요. 일하는 사람이 흙일을 하든 기름밥 일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스스로 사랑하는 일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만한 일을 웃음꽃이랑 눈물꽃 함께 나누면서 시를 쓰면 어여뻐요.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일이면서, 내가 내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을 만한 일을 환하게 누리면서 시를 쓰면 어여뻐요.

 

 대통령이 대통령이라는 일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하다면,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쓰는 시는 어여뻐요. 공장 일꾼이 공장 일거리를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하다면,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쓰는 시는 어여뻐요.

 

 함께하는 삶이고, 함께하는 사랑이에요. 함께 쓰는 시이면서, 함께 읽는 시예요. (4338.3.14.달./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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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 빨래

 


 고흥에서 음성으로 가던 날 새벽, 둘째 똥기저귀랑 오줌기저귀를 신나게 빨래한다. 시외버스로 돌고 도는 멀디먼 길에 오줌이랑 똥에 젖은 기저귀를 그냥 들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흥에서 광주로 가는 시외버스에는 우리 네 식구만 탄다. 옆 빈자리에까지 옷걸이에 꿴 젖은 기저귀를 넌다. 광주에서 청주로 가는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꽉 차고 유리창에 김이 잔뜩 끼기에 빨래를 널지 못한다. 청주에서 음성으로 가는 버스는 옷걸이를 걸 만한 자리가 없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니 빨래를 못 넌다.

 

 이틀을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묵고 나서 고흥집으로 돌아온다. 고단한 몸을 누이기 바쁜 나머지, 둘째가 내놓은 똥기저귀랑 기저귀싸개 석 장만 빨래하고 나머지 빨래는 이듬날로 미룬다. 새벽에 둘째 칭얼거리는 소리에 깬다. 오줌기저귀 갈고 첫째 아이 코와 손을 씻긴다. 첫째 아이도 얼마 뒤 쉬를 눈다. 셈틀 앞에 앉아 조용히 지난 며칠을 돌아본다. 사흘 동안 찍은 사진을 가만히 살핀다. 아하, 이런, 고흥으로 오기 앞서 음성에서 빨래하고 말리지 못한 기저귀를 봉지에 담은 채 밤새 안 꺼냈잖아. 부랴부랴 젖은 기저귀를 꺼낸다. 덜 마른 기저귀 다섯 장을 옷걸이에 꿰어 넌다. 히유, 한숨을 돌린다.

 

 첫째를 데리고 마실을 다니던 때, 먼길 마실을 하며 빨기만 하고 말리지 못한 옷가지를 봉지에 담은 채 며칠 깜빡 잊기 일쑤였다. 며칠이 지나 고단한 몸을 겨우 추스르면서 짐을 끌를 때, 여러 날 봉지에 처박은 빨래를 알아챈다. 이즈음 되면 젖은 기저귀 빨래는 그만 곰팡이꽃으로 얼룩지기 마련. 젖은 빨래는 가방에 넣으면 안 된다. 잘 알아볼 자리에 봉지 구멍을 열어서 두어야 한다. 제발 바보짓 하지 말자. (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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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 쓰는 시

 


 꿈을 꾼다. 꿈에서 온갖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내 머리속으로 품는 생각들일까, 이 이야기들은 내가 바라는 생각들일까, 이 이야기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생각들일까. 꿈속을 누비는데, 꿈에서 내가 시를 쓴다. 아홉 줄인가 열 줄인가, 꿈속을 누비는 내가 시를 찬찬히 읊는데, 이 시 꽤 좋다. 음, 그런데 꿈을 누비면서 시를 쓰지 않니.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이제 눈을 뜨고 일어나 빈책에 이 시를 옮겨적을까. 그러나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등허리가 뻑적지근하다고 느껴, 이 뻑적지근한 등허리를 곧게 펴고 싶기에, 애써 일어나지 않는다. 문득, 이렇게 꿈에서 쓰는 시를 아침에 일어날 때에는 다 잊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침에 이 시를 다 잊어도 나쁘지 않다고, 내 꿈속에서 쓰는 시는 아침이 되어 가뭇없이 사라질는지 모르나, 내 마음속에는 깊이 남아 언제까지나 나하고 함께하리라 느낀다. 내 좋은 삶이 내 좋은 꿈으로 태어나고, 내 좋은 꿈은 내 좋은 삶으로 이어지리라. 나는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 좋은 생각으로 씨앗을 심고, 나는 꿈에서 깨어 새 하루를 맞이할 때에는 차근차근 뿌리내리고 잎을 틔우며 줄기를 올릴 좋은 생각나무를 기쁘게 돌보면 된다. 아이들이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일찌감치 잠에서 깬다. 아침부터 온 집안이 부산하고 시끌벅적하다. (4345.1.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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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을 수 있나

 


 설날을 맞이해 길을 나선다. 버스표를 모두 미리 끊을 수는 없고, 광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 하나만 미리 끊을 수 있다. 고흥에서 광주 가는 버스하고 청주에서 무극 가는 버스는 표를 끊을 수 없다. 두 버스는 자리번호가 따로 없다.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길이 아닌, 시골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그러나, 길을 나서기 앞서 여러 날에 걸쳐, 갈 수 있나, 못 가나, 하고 자꾸자꾸 망설였다. 아이들 몸이 힘들 일이 뻔하며, 옆지기도 몸에 그닥 좋지 않았기 때문. 토요일 새벽 여섯 시에 옆지기가 비로소 “가자!” 하고 말해서 바지런히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내 짐가방에 책을 두 권 챙겼다. 이 책을 한 번이라도 꺼내어 펼칠 수 있나 없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책 두 권 챙겼다. 고흥에서 광주로 가는 두 시간 이십 분 버스길에서는 아이들 달래고 무릎에 누여 재우느라 바쁘다. 광주에 내려 오십 분쯤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 오줌 누이고 무언가 먹이고 달래느라 금세 지나간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는 길, 버스에 오른 지 이십 분쯤 될 무렵 첫째 아이가 우웩 하고 게운다. 세 차례 차근차근 잇달아 게우는 아이를 달래고 토닥이며 수건으로 받아 치우고 닦으며 옷 벗기고 내 무릎에 누인다. 배를 살살 쓰다듬고, 팔 다리 가슴 배 등 목 어깨 골고루 주무른다.

 

 골이 띵하다. 광주부터 청주 가는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리나. 두 시간 가까이 달리면서 쉴 낌새가 없다. 후유, 힘들구나, 생각하면서 맥주깡통을 딴다. 맥주 한 모금 홀짝 마시면서, 내 무릎에서 자는 아이를 바라보고, 옆지기 무릎에서 자는 아이를 바라본다. 세 식구는 고단하게 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멀뚱멀뚱 뻑적지근한 팔다리와 등허리로 버틴다. 시외버스가 흔들흔들 한 시간 이십 분쯤 달릴 무렵 맥주깡통을 따면서 책 한 권 꺼낸다. 어지러운 머리로 어질어질 책을 읽는다. 한 쪽이나마 펼치겠느냐 싶더니 이럭저럭 마흔 쪽쯤 읽는다. 그러나, 마흔 쪽으로 끝. 더는 넘기지 못한다.

 

 책을 덮는다. 나도 눈을 감아 본다. 신탄진에서 십오 분을 쉰단다. 한숨을 돌린다. 아이를 안고 내린다. 찬바람을 쐰다. 아이 쉬를 누인다. 아이를 안고 실비 흩날리는 바깥에서 아이를 달랜다. 아이가 핑 도는 머리에서 조금씩 맑은 머리로 돌아가는 듯하다.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버스로 들어간다. 버스는 한 시간을 더 달려 청주에 닿는다. 청주에 닿아 비를 맞으며 고속버스역에서 시외버스역으로 길을 건넌다. 표를 끊는다. 아이가 자꾸 노래부르는 얼음과자 하나를 사서 들린다. 버스에 오른다. 그리 먼길이 아니었을 텐데, 구불구불 진천과 맹동과 꽃동네 둘레를 돌고 돌아 무극에 닿는다. 속이 메스껍고 그야말로 어지럽다. 더구나, 지치는 몸으로 지친 아이를 안고 내리다가, 아이가 목에 걸다가 아이가 어느 결에 목에서 풀어 자리에 내려놓은 아이 사진기를 내가 못 챙기고 내렸다.

 

 무극에서 택시를 잡는다. 택시를 타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 준다. 바리바리 들고 안고 찾아온 짐을 내려놓는다. 아이들 옷을 벗기고 빨래할 옷가지를 씻는방에 풀어놓는다. 아아, 왔구나. 닿았구나. 생각보다 삼십 분이 더 걸려, 꼭 일곱 시간 걸려 왔구나. 고흥에서 서울까지는 다섯 시간쯤인데, 고흥에서 음성까지 일곱 시간 길이라니.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는 아이들 지켜보고 빨래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책을 들출 겨를이 조금도 없다. 깊은 저녁 잠자리에 들며 겨우 넉 쪽쯤 펼치고 불을 끈다. (4345.1.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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