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색시
박현정 글.그림 / 초방책방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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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살이, 살림살이, 흙살이, 사랑살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8] 박현정, 《새색시》(초방책방,2004)

 


 옛날 옛적 할머니들 가운데 꽃치마 두르고 꽃가마 타며 시집을 가던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옛날 옛적 할머니들 가운데 꽃치마 한 벌 없이 시집을 가서 애면글면 작은 풀집에서 아이들 낳아 건사하며 살림을 일구던 분들이 퍽 많습니다.

 

 꽃치마 두르고 꽃가마를 타면 기쁠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지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내로 태어났으나 가시내 삶을 몰라서 참말 모를 만한지, 아니면 이제는 멀디먼 옛이야기가 되었으니 모를 만한지, 시집장가라 하는 삶을 모르니까 그예 모를 만한지 알쏭달쏭합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옷을 차려입고 예식장에 서는 일이란 얼마나 흐뭇하거나 보람찰까 잘 모르겠습니다. 혼례상을 차리고 혼례잔치 벌이는 일이란 얼마나 기쁘거나 어여쁠까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 나라에서는 가시내들이 시집을 간다며 꽃치마 두르고 꽃가마를 탄다 하면, 꽃가마에 실려 하루나 이틀 구비구비 멧길과 들길과 물길을 지나 새터로 가는 동안만 꽃다이 모셔질 뿐, 꽃가마에서 내려 꽃치마를 벗으면, 그야말로 ‘세 해 장님 세 해 귀머거리 세 해 벙어리’가 되어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어릴 적에 이 얘기들, 그러니까 꽃치마랑 시집살이 얘기를 나란히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어요. 끔찍하며 고된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면 꽃치마 꽃가마는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고. 게다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 또한 꽃치마 두르고 꽃가마를 타셨을 텐데, 왜 이렇게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되물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아픔과 눈물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웃음과 보람을 새로 빚어 새로 일구어 새로 사랑해야 아름다운 나날 아닐까요.

 

 무척 어린 나날, 시집장가 이야기를 듣거나 그림을 보거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을 볼 때면 늘 혼자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집장가 삶이라면 나는 장가갈 마음이 없다’고.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시집장가 이야기는 하나같이 조선 때부터 내려온 모습인데, 조선에 앞서 고려 때에는 어떠했고 고구려와 백제와 가야 때에는 어떠했으며 옛조선 때와 발해 때에는 어떠했는지 들려주는 사람은 왜 없을까’ 하고 궁금했어요.

 

 나로서는 조선 때부터 이어오는 혼례잔치나 혼례옷이나 혼례 예절이나 격식이나 문화 모두 못마땅했어요. 고려 때에도 시집살이가 있었나 궁금하고, 백제나 가야이던 때 시골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림살이를 돌보았는지 궁금했어요. 집일은 여자한테만 고되게 시켰는지, 아버지 어머니 나란히 집일을 건사하면서 삶을 일구었는지 궁금했어요. 남녀 따로 없고 시집살이라는 말이나 굴레가 몽땅 없었을 어느 옛날이라 할 때에는 어떠한 혼례마당이었을까 몹시 궁금했어요.

 

 옆지기를 만나 사랑을 지어 아이들 낳으며 함께 살아가면 누구나 느낄 뿐 아니라 똑똑히 헤아릴 수 있어요. 집안에서 아이들하고 뒹굴고 집밖에서 아이들하고 뛰놀 적에는 꽃치마이든 꽃바지이든 부질없을 뿐더러 쓸모없어요. 아이들한테 예쁜 옷을 입힐 수 있을 테지만, 옷이란 겉보기로만 예뻐서는 그야말로 부질없고 쓸모없어요. 살결이 쓸리지 않으며 바람 잘 들고 땀 잘 식으며 홀가분한 옷이어야 좋아요. 흙에서 뒹굴기 좋고, 빨래해서 말리기 좋으며, 가벼운 옷이 좋아요. 흙에서 얻어 흙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옷이 좋아요. 어머니 입던 옷을 딸아이한테 물려주고, 아버지 입던 옷을 아들아이한테 물려줄 때에 좋은 옷이라고 느껴요. 어머니 하는 일을 딸이건 아들이건 아이들이 물려받고, 아버지 하는 일을 아들딸 가리지 않고 늘 함께할 수 있을 때에 아름답다고 느껴요.

 

 박현경 님 그림책 《새색시》(초방책방,2004)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책장을 하나하나 찬찬히 넘기면서, 이 그림책을 아이하고 함께 읽기에는 퍽 아쉽다고 느낍니다. 아니, 아이한테 ‘사물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거나 보여줄’ 때에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물 모습도 통으로 느끼도록 할 수는 없기에 썩 좋지 않아요. 무엇보다 새색시 아름다움을 옷가지로만 바라보고 싶지 않아요. 얼굴이 고울 때에 고운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고울 때에 고운 사람이라고들 하면서, 막상 혼례옷이든 꽃치마이든, 다들 왜 껍데기만 바라보거나 헤아리는지 모르겠어요. 새색시 모습이나 삶을 꽃치마랑 꽃가마를 들며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색시 모습이나 삶이라 한다면, 더 깊고 더 넓으며 더 환한 이야기와 삶과 꿈과 사랑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솜을 두어 한땀한땀 곱게 누빈 무명버선”이라면서 버선 모습만 달랑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버선 한 벌 바느질하자면 얼마나 긴 품과 나날과 땀을 들여야 하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싶어요. 버선 한 벌 바느질하기 앞서 실과 바늘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고, 하루 가운데 언제쯤 버선 한 벌 바느질할 겨를을 마련해서 어떠한 몸가짐과 웃음으로 옷을 짓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고운 빛깔 고이 물들이는 실은 어디에서 얼마만큼 품을 들여 얻을까요. 실을 잣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이 가고 얼마나 깊은 품이 들까요. 하나하나 살피자면, 무명버선 한 벌 짓는 이야기로도 두툼한 그림책 여러 권 나올 법해요. 버선 한 켤레이든 치마 한 벌이든, 옷가지 하나 마련하기까지 사랑과 땀과 꿈과 이야기가 아주 그윽하며 어여삐 얼크러져요.

 

 그림책은 《새색시》예요. 그림책 이름은 “새색시”이지 “새색시 꽃치마”나 “새색히 혼례옷”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림책 《새색시》는 오로지 “새색시 꽃치마”랑 “새색시 혼례옷” 테두리에서 머물고 말아요. 더구나, 다 지은 옷가지를 그림으로 가볍게 하나 보여주고 그쳐요.

 

 새색시 혼례옷이란, 마냥 예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될까요. 그림책 《새색시》에 나오는 옷가지는 어떤 새색시가 입던 옷이었을까요.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며 풀집에서 살아가는 여느 새색시도 이러한 옷을 입었을까요.

 

 그림책 《새색시》가 엉성하거나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참 곱게 엮고 참 예쁘게 그린 이야기꾸러미라고 느껴요. 다만, 우리 옛 문화나 삶을 비추어 오늘 우리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그림책은 언제나 이 틀에 고이거나 갇히거나 머물기만 하니 안타깝습니다.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면 고된 시집살이가 기다리는데? 남자는 집일을 아예 안 하고 여자만 죽어라 집일을 하는 굴레를 뒤집어씌우는데? 이 눈부신 혼례옷은 어느 신분 어느 계급이 입을 수 있는 옷이지? 조선 때 아닌 고려 때나 가야 때나 발해 때에는 시집장가를 어떻게 들었지?

 

 생각하고 싶어요. 살아가고 싶어요. 사랑하고 싶어요.

 

 내 옆지기하고 곱게 생각하고, 우리 아이들하고 즐거이 살아가며, 서로서로 해맑게 사랑하고 싶어요.

 

 흔히들 한겨레 아름다움으로 “빈자리 남기는 아름다움(하얗게 비우는 아름다움)”, 일본사람 입을 빌자면 “餘白の美”를 들곤 해요. 아마, 빈자리 남기는 아름다움도 한겨레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겠지요. 그림책 《새색시》는 혼례옷 모습을 찬찬히 한 가지씩 정갈히 보여주면서 그림책 넓은 자리를 하얗게 비우는 “餘白の美”를 보여준다 할 만하겠지요.

 

 그림책 덮으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우리 겨레 아이들이 수많은 무지개빛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흰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조선 때 앞서 살아가던 한겨레는 딱히 흰옷만 입지 않았다고 했어요. 더구나 흰옷 입던 한겨레라 하더라도 누런 흙땅에서 푸른 푸성귀와 곡식을 돌보고 온갖 빛깔 꽃과 열매 흐드러지는 멧등성이를 타면서 나무를 하고 나물을 뜯었어요. 하얀 천으로 짓는 옷이라지만, 누런 흙물이 드는 옷을 입고, 누런 흙물이 손발에 깊이 스며들며, 환한 햇살 머금으며 흙빛 살갗이 되던 한겨레였다고 느껴요.

 

 흙을 밟고 흙을 먹으며 흙으로 집지어 살았어요. 나는 한겨레 빛깔은 짙누른 흙빛이 아닌가 하고 느껴요. 포근하고 따사로우며 촉촉한 흙기운이 한겨레를 먹여살였으리라 느껴요. 누런 흙과 누런 짚과 누런 살결로 누런 쌀알(현미) 먹으며 누런 똥 누고 누런 거름 삭여 누런 사랑 나누던 나날이었구나 싶어요.

 

 오늘 하루도 좋은 햇살 아리땁게 온누리를 비추며 새날이 밝습니다. 멧새도 들짐승도 흙을 밟고 흙에서 먹이를 찾으며 흙에 보금자리 마련하며 사람들과 나란히 새날을 맞이합니다. (4345.1.25.물.ㅎㄲㅅㄱ)


― 새색시 (박현정 글·그림,초방책방 펴냄,2004.4.2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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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그만둔 아이 이야기가 하나 또 나왔다. 곰곰이 돌아보면, 내가 쓴 내 책 <책 홀림길에서>도 대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마땅하지만, 몇 해 앞서 김예슬 님 책이든 이분 장혜영 님 책이든 나로서는 그닥 재미나다 싶은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우리라 느낀다. 살아가는 뜻이란,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지만, 스스로 어떤 굴레에 갇히면 어디에서도 삶뜻을 찾을 수 없기 마련이다. 미리읽기로 몇 꼭지 살폈을 때에는, 그리 가슴이 촉촉히 울릴 만한 이야기를 찾아보지 못하겠다. 스물 몇 해를 살며, 장혜영 님 스스로 가슴 촉촉히 적시도록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이 굴레를 넘어설 수 없을까. 오래도록 학교 울타리에 갇혔기 때문에 상상과 창조와 사랑과 믿음과 꿈을 홀가분하게 꽃피우지 못했다고만 말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부디, 이제부터 차근차근 홀가분해질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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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별 선언문'을 남기고 대학을 떠난 장혜영의 못다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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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책읽기로 그치지 않고, 삶을 바꾸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자가용을, 석유를, 대학교를, 도시를, 회사원이라는 일자리를, 하나하나 버리거나 내려놓으면서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저 책만 읽고 그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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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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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도 먹을거리도 책도 꿈도 서울로 보내는

 


 사람이 새끼를 낳으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시골마을에서 자라는 아이들 스스로 시골마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시골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시골마을에서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못한다. 시골마을 아이들은 초등학교까지만 시골에서 다니고, 중학교부터는 이웃한 큰도시로 가기 일쑤이다. 곧, 전남 고흥 시골마을 아이들 가운데 적잖은 아이들은 이웃한 큰도시 순천으로 가고, 광주로 가며, 때로는 경기도 수원이나 아예 서울로 간다. 어느 시골집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일찌감치 서울로 간다. 전남 고흥에는 대학교가 없으니 어차피 가르친다면 더 일찍 더 빨리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가도록 내몰아야 좋다고 여긴다.

 

 시골마을 사람들 거의 모두 이렇게 사람 새끼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하니, 우리 네 식구 시골마을로 깊디깊이 보금자리를 찾아 삶터를 옮긴 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알쏭달쏭하다고 여길밖에 없으리라 느낀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아이들이 시골마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칠 때에 나중에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더’라고 한결 일을 잘 하고, 생각이나 말이 또릿또릿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시골마을에는 일거리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말은 조금도 옳지 않다. 시골마을에서는 꿈을 키울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 말 또한 하나도 맞지 않다. 시골마을에 일거리가 없을 수 없다. 시골마을 일거리 때문에 시골마을뿐 아니라 크고작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밥을 먹는다. 시골마을 일거리 때문에 사람들이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집을 짓는다. 시골마을 일거리가 아니라면 사람들 모두 굶어죽거나 헐벗거나 추위에 떨어야 한다. 시골마을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꿈을 꾸고 사랑을 나누며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

 

 시골마을은 돈벌 구멍이 없다고 말해야 조금 맞을 동 틀릴 동 하다. 그러나, 돈벌 구멍이라고 해 봐야, 크고작은 도시는 공무원 일거리라든지 회사원 일거리가 있다뿐, 사람들 스스로 어버이한테서 받은 고운 목숨을 어여삐 북돋우는 착한 일거리가 참말 있다고 할 만한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패션디자이너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여행가이드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물리학자나 화학자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대학교수나 스튜디어스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버스기사나 기술자나 정비사나 연구원이나 공장 임노동자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의사나 검사나 판사나 약사나 간호사나 변호사나 법무사나 회계사가 좋은 일거리일까, 좋은 꿈일까.

 

 시골마을 어르신들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우면서 좋고 어여쁜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좀처럼 못 느끼는구나 싶다. 시골마을 어르신들 스스로 흙을 만지고 흙을 밟으며 흙을 먹고 마시는 일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보람찬가를 제대로 못 느끼는 나머지, 자꾸자꾸 흙에 비료를 치고 풀약을 뿌리며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깔며 기계를 부리는구나 싶다.

 

 밤하늘 별과 미리내를 밀어내고 전깃불을 밝혀야 문명이나 문화나 발전이나 개발이나 진보가 될까. 낮하늘 구름과 무지개를 몰아내고 자가용을 싱싱 달려야 문명이나 문화나 발전이나 개발이나 진보가 되나. 양복을 차려입고 구두를 또각이며 가죽가방을 한손에 들어야 문명이나 문화나 발전이나 개발이나 진보가 되는가.

 

 사람도 먹을거리도 책도 꿈도 서울로 보내는 마당에, 우리 네 식구는 인천을 떠나 충청북도 멧골자락으로 들어갔다. 멧골자락에서 한 해를 지낸 뒤 큰도시 서울이랑 한참 더 멀어지는 전라남도 시골마을로 들어왔다. 시골마을로 들어온 뒤 어린 두 아이 건사하랴 집일 하랴 여러모로 눈코 뜰 사이 없는 나날이다 보니, 나 또한 좀처럼 흙 밟으며 아이들이랑 못 놀고 만다. 이런 나날이라면, 시골로 온 보람이 무엇 있으랴 싶지만, 보금자리를 찬찬히 손질하고 가다듬느라 몇 달은 이럭저럭 견디자고 생각해 본다. 차근차근 우리 네 식구 일머리와 살림살이를 추스르며 시골마을 흙바람 흙내음 고이 누리자고 생각한다. 아침에 신나게 빨래를 마치고 이모저모 토닥거리고 나서는, 뒤꼍 땅뙈기를 돌보고 흙길 밟는 마실을 즐기자고 생각한다. 풀을 밟고 풀을 뜯고 풀을 먹고 하늘과 구름과 멧등성이와 바다를 바라보고 큰숨 들이마시자고 생각한다.

 

 삶이란 무엇이고, 꿈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란 무엇일까. 일이란, 돈이란, 사람이란, 삶터란, 집이란, 옷이란, 밥이란, 이야기란 무엇일까.

 

 나는 어린 나날부터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낸다.’ 하고 읊는 말마디가 참 못마땅했다. 사람을 왜 서울로 보내야 하나.

 

 하루하루 자라면서 바라보면, 이 나라에서는 사람만 서울로 보내지 않는다고 느꼈다. 사람을 비롯해 좋다 하는 먹을거리이든, 샘물이든, 종이이든, 물고기이든, 나물이든, 모조리 서울로 보낸다고 느꼈다. 온통 서울로 쏠린다. 무엇이든 서울로 빨려든다. 그러고는, 서울에서는 이 모두를 아무렇게나 휘저어 쓰레기를 만들고는 이 쓰레기를 시골로 ‘내려보낸’다. 서울은 시골에서 받아들인 온갖 열매 알맹이만 살짝 빨아먹고는 찌꺼기를 된통 시골로 ‘내다 버린’다.

 

 나는 어린 나날부터 ‘사람을 서울로 보내면 쓰레기만 만드는 바보를 만든다’고 느꼈다. 나부터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던 지난날, 서울에서 살아가던 나는 쓰레기를 만들어 버리는 바보로 지냈다고 깨닫는다.

 

 사람은 나면 시골로 보내야 할 뿐 아니라, 사람을 낳은 어버이가 저희 새끼하고 오붓하게 시골에서 보금자리를 틀어야 아름답고 즐거우며 착한 나날을 누릴 수 있다고 느낀다. 아이들은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는다. 어른들 또한 즐겁게 살아야 한다. 아이들만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아. 어른들 또한 착하게 살아야지. 아이들만 곱게 살아야 하나. 어른들 또한 곱게 살아야지.

 

 좋은 넋, 좋은 꿈, 좋은 말을 아리따이 어우르는 좋은 삶을 누릴 좋은 사람으로 지내며 좋은 사랑을 빛내야 바야흐로 좋은 글이 태어나고 좋은 그림이 태어나며 좋은 사진·좋은 노래·좋은 춤·좋은 문학이 태어나겠지. (4345.1.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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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1-26 10:37   좋아요 0 | URL
일본의 경우 지역학교를 나오서 지역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는데 우린 너무 경제 활동이 서울로만 집중된것이 큰 문제지요ㅜ.ㅜ

파란놀 2012-01-26 10:59   좋아요 0 | URL
우리는 공무원도 지역 공무원이 안 돼요.

다들 고향하고 먼 데에서 자취하거나 하숙하면서 공무원이 되고... 참 얄딱구리합니다..
 


 나 혼자 투덜대는 책읽기

 


 시골마을 조그마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이 내놓은 교사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적잖은 이들이 손꼽아 추켜세우는 책인데, 막상 이 교사일기를 읽는 나는 이 책을 조금도 추켜세울 수 없겠다고 느낀다. 말과 삶과 글과 넋이 너무 어지러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글로는 훌륭하며 꾸밈없으며 아름다이 보이려는 티가 나지만, 정작 이 글에서 드러나기로도 아이들한테 억지스레 가르침을 집어넣는 모습이 보일 뿐 아니라, 스스로 뉘우친다고 밝히지만 아이들한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이 너무 자주 나타난다. 차라리, ‘때렸다’ 하고 끝맺으면 한결 나을 텐데, ‘때리고 나서 미안하다고 느낀다’고까지 덧말을 붙인다. 이렇게 하자면 아예 글을 안 써야 맞지 않을까. 이렇게 쓰는 글을 왜 보여주어야 할까.

 

 왜 사랑을 자꾸 만들려고 하는지 슬프다. 만들려고 한대서 만들 수 있는 사랑은 아닐 텐데. 스스로 사랑스레 살아가면 시나브로 사랑을 곱게 지을 수 있을 텐데.

 

 흙을 사랑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하듯, 내 삶을 사랑하면서 아이들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삶을 짓는다. 농사는 곡식 만들기가 아니듯, 교육은 아이들 지식 만들기가 아니다.

 

 짝을 짓는다고 하지, 짝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짝짓기란 참 거룩하고 예쁘게 지은 좋은 말이다. 짝을 짓는다, 짝을 맺는다, 짝을 이룬다, 이 한겨레 말마디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으로 사랑을 빛내야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짝을 짓고, 사랑을 짓는다.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다. 가장 아름다운 나날은 짓는 삶이다. 짓는 꿈이요 짓는 말이며 짓는 이야기가 된다.

 

 사랑짓기, 배움짓기, 꿈짓기, 밥짓기, 이야기짓기가 된다. 일짓기, 흙짓기, 책짓기, 글짓기가 된다. 사람들이 스스로 옳게 짓지 못하고 제도권과 학벌과 권력과 이름값과 돈값이라는 가시울타리에 자꾸자꾸 걸거치니까, ‘글짓기’ 아닌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예부터 이오덕 님이 말했는데, 글짓기가 나쁜 일이 아니라 ‘제도권 독후감 만들기 숙제’가 나쁘다. 제도권학교에서 한 일은 ‘글짓기’가 아니라 ‘글만들기’였다.

 

 모든 ‘만들기’는 꾸미는 일이 되고 만다고 느낀다. 만드는 일이 마냥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사랑을 담으며 짓는 일이 아니라, 억지로 모양만 만들거나 시늉으로 만들거나 흉내내듯 만드니까 슬프며 못마땅하고 밉다.

 

 시골마을 조그마한 학교에서 일하는 어른으로서 아이들하고 무슨 사랑짓기 삶짓기 배움짓기 일짓기 꿈짓기를 하는가 돌아보고 싶어 교사일기를 책으로 읽는데, 정작 사랑짓기이든 삶짓기이든 배움짓기이든 일짓기이든 꿈짓기이든, 이러한 이야기를 찾아 읽기 어렵다. 그렇다고 교사일기 쓴 분이 착하지 않다거나 참답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삶이고, 더 아끼지 못하는 삶이며, 더 좋아하지 못하는 삶이로구나 싶다.

 

 교사는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내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올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곧, 교사는 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는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는 어른들과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야흐로, 교사는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일기란, ‘보는’ 이야기가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꿈짓기요 사랑짓기요 배움짓기가 되어야 아름답다고 느낀다. 교사일기를 애써 만들지 않으면 좋겠다. 교사일기를 기쁘게 쓰고 예쁘게 지으며 사랑스레 빚으면 고맙겠다. 나는 아무래도 나 혼자 투덜대며 마지막 쪽까지 골을 부리는 책읽기를 할 듯하다. (4345.1.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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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1-24 19:44   좋아요 0 | URL
이분, 나름대로 시도 쓰시고 글도 재미있게 많이 쓰시는 분인데, 이 책은 영 아니었나보네요. 더 호기심이 생깁니다. 어떤 글을 쓰셨길래 하고요 ^^

파란놀 2012-01-24 21:39   좋아요 0 | URL
영 아닌 책이 아니라,
교사로 아이들과 살아가는 나날 가운데
'공부'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 아닌데,
자꾸 아이들하고 '무슨 공부를 하느냐' 하는 데에 얽매이면서
자유롭고 사랑스러우며 즐거운 나날을 누리는 길하고
어긋나는 모습이 자주 보여요.

'좋은 공부'를 하려는 뜻은 나쁘지 않지만,
좋든 안 좋든
공부를 꼭 해야 한다는 틀에 빠지고 만다고 하겠어요.

곧, 아이들 스스로 상상과 창조를 빚고 빛내는 길을
가기보다는
아이들한테 '좋은 길'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몸짓을
교사 스스로 얽매이면서
한결 아름다우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겠지요.

그래도, 책 평점은 100점 만점에 84점을 줄 만하다고 느껴요.

기억의집 2012-01-24 21:47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일까 궁금한데요.

저 또한 굳은 철학이라도 해도 아이를 때리는(체벌)만은 반대해요. 교사가 아무리 체벌이 아이를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말입니다. 체벌 받은 아이의 상처는 평생 가는 것이니깐요. 저는 아직도 30년도 넘은, 초등2학년 담임한테 맞은 따귀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체벌은 자신의 감정을 폭력으로 드러내는, 감정적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교사는 사랑을 만든다는 구실로 자신의 손찌검을 정당화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파란놀 2012-01-24 22:16   좋아요 0 | URL
책에서는
스스로 체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지만
스스로 자제심을 누르지 못하고 체벌을 하면서
자꾸자꾸 뉘우치는 일이 되풀이돼요.

저는 이러한 슬픈 되풀이가
체벌로만 이루어진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다른 데에서도 교사일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안타깝거나 아쉬운 대목이 엿보이지 않겠느냐 싶어요.

아이들이 반기지 않는 급식을
굳이 해 보려고 밀어붙이려 하던 일도 안타깝고,
"이럴 때 말 한번 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말 꺼낸 나도 체면이 서고(98쪽)." 같은 대목이라든지 "공부 시간에 왜 이런 문제도 모르냐고 나는 딱딱한 얼굴로 사랑없이 말했고 아이는 한숨을 쉬었다(84쪽)." 같은 대목은, 솔직한 고백이라기보다, 너무 안타깝고 슬픈 모습이구나 싶어요.

이러한 대목을 스스럼없이 밝히니 좋다고도 할 테지만,
이러한 대목마저 밝힐 뿐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스스로 밝히거나 찾거나 보여주지 못해요.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안타까운 나머지
이렇게 투덜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