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꽃 책읽기

 


  이오덕 님이 쓰신 시요 1960년대에 내놓은 시집이기도 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나는 이오덕 님 남은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여러 해 하기도 했지만, 탱자나무로 이룬 울타리를 막상 제대로 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내 어버이들 시골집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지 모르나, 내 어린 날 이런 울타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막상 《탱자나무 울타리》를 읽으면서도, 또 지난날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면서도 탱자나무도 탱자나무 울타리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인천에서 살며 골목마실을 하던 때, 주안2동 골목집 한 곳에서 탱자나무를 한 그루 보았다. 소담스레 열매가 달렸을 때에 비로소 알아보았다. 그러고는 고흥에 보금자리 마련하며 살아가는 동안 제대로 탱자나무를 보고 탱자꽃을 본다. 면내에 있는 중학교를 지나 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탱자나무 가지들이 얼키고 설킨 작은 울타리 비슷한 녀석이 있는데, 누군가 탱자나무 가지 사이에 빈 깡통을 여럿 찔러 넣었다.


  단단하고 굵직해 보이는 탱자나무 가시는 촘촘하다. 나뭇가지 사이에 박힌 빈 깡통을 빼낼 길이 없어 보인다. 팔을 뻗어 꺼내자면 팔뚝이 가시에 죽죽 긁혀 찢어지겠다 싶도록 아주 촘촘하다.


  4월 한복판 봄날, 탱자나무에 핀 하얗게 눈부신 꽃송이를 본다. 탱자나무를 가시와 열매로만 알다가, 이제 꽃으로 새삼스레 안다. 탱자꽃을 처음 보며 으아리꽃하고 살짝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으아리꽃을 먼저 보았으니 탱자꽃이 으아리꽃하고 살짝 닮았다고 생각할 뿐, 거꾸로 탱자꽃을 어릴 적부터 익히 보다가 어느 날 멧골짝에서 으아리꽃을 보았다면 으아리꽃이 탱자꽃을 살짝 닮았네 하고 생각할 테지.


  한참 탱자꽃을 바라보며 헤아린다. 모과꽃은 참 작으면서도 커다란 열매를 맺는다면, 탱자꽃은 알맞춤하다 싶은 크기에 알맞춤하다 싶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면, 귤꽃이나 유자꽃은 얼마쯤 되는 크기일까. 가만히 보니, 감꽃도 꽤 작은데 감알은 그리 작지 않다. 능금꽃이나 배꽃도 퍽 작지만 능금알이나 배알은 퍽 크다 할 만하다. 복숭아꽃도 제법 크다 싶은 열매를 맺는다.


  더 곱씹는다. 나뭇가지에 달리는 열매를 모두 따고 보면 몹시 묵직하다. 나뭇가지 하나 무게는 얼마 안 되는데, 가냘프다 싶은 나뭇가지에 묵직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곤 한다. 더 돌이키면, 모질게 비바람이 불어도 웬만한 나무는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이들 나무가 없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 없는 사람살이를 생각할 수 있을까. 책을 빚는 종이는 탱자나무로 만들지 않는다지만, 탱자나무 없이 사람살이를 꿈꿀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탱자나무를 잊거나 모르더라도, 탱자나무는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지구별을 지키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장미꽃 팬지꽃 국화꽃 튤립꽃에 넋이 나가더라도, 탱자꽃은 언제나 고요히 제 흙땅에 뿌리내리며 지구별을 돌보지 않았을까. (4345.4.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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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174
박기성 지음, 심병우 사진 / 대원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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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90] 심병우·박기성, 《울릉도》(대원사,1995)

 


  우리 집 둘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기를 날마다 빌면서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가 아버지 자전거수레에 탈 수 있으면 언제라도 네 식구 즐겁게 자전거마실을 다닐 수 있으리라고. 이제 둘째는 첫째와 함께 자전거수레에 앉습니다. 처음에는 퍽 못마땅해 했지만, 요사이는 자전거수레에 앉히면 몹시 좋아합니다. 꼭 첫째 때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첫째는 자전거수레에 처음 타던 날 대단히 무서워 했어요. 그러더니 이내 더 태워 달라 보챘고, 이제는 자전거수레에 타고 함께 마실 다니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옆지기 자전거 뒷바퀴에 자꾸 실바람이 생겨 튜브를 통째로 갈아야겠다고 느낍니다. 마침 따사로운 봄날씨인데 뒷바퀴 때문에 네 식구 나란히 자전거마실 다니기를 못합니다. 읍내에 나가 자전거집에 튜브를 알아보지만 시골 읍내에는 마땅한 튜브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로 했으면, 이런저런 물건을 스스로 손질하거나 짓거나 다듬을 수 있도록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다시금 깨닫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나날을 문득 떠올립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를 벗어나 여러 날 자전거마실을 해야 할 때에는 자전거 손질하는 연장을 한 꾸러미 챙깁니다. 언제 어디에서 못을 밟아 바퀴나 튜브가 찢어질는지 몰라요. 언제 어디에서 브레이크슈가 다 닳거나 망가질는지 모르며, 체인이 끊어지거나, 건전지가 다 닳거나,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갑작스레 비를 만날 수 있고, 돌을 밟고 넘어져 뒹굴 수 있어요. 시골 두메나 멧길에서 자전거집을 들를 수 없을 뿐더러, 찬찬히 갖춘 연장을 만나기 어려운 줄 미리 헤아립니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태껏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제대로 살피거나 돌아볼 노릇입니다. 찬찬히 살피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찬히 아끼고 가만히 사랑합니다. 나는 내 가장 가까운 곳 사람들, 곧 살붙이부터 살피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내 옆지기와 아이들부터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네 식구 살아가는 우리 시골마을을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머나먼 좋은 나라나 멀디먼 예쁜 나라를 바라기 앞서, 네 식구 오래오래 살아가고 싶어 뿌리내리는 시골마을 둘레를 즐겁게 나들이할 노릇이에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늘 내 삶터부터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릴 때에 가장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사람한테는 서울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인천사람한테는 인천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고흥사람한테는 고흥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서울사람한테 제주섬이 가장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제주섬이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서울사람이라면, 서울을 떠나 제주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울릉섬을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부산사람이라면, 부산을 떠나 울릉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터전에서 삶자리를 꾸려야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느낄 만한 나날을 누리거든요.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지 못하는 곳에서는 스스로 썩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망가뜨리거나 덧없이 보냅니다. 돈을 벌든, 사랑짝을 찾든, 학교를 다니든,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곧,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어떠한 일이든 돈을 많이 벌 만한 곳으로 가면 됩니다. 마음이 느긋하면서 기쁜 채 돈을 벌고 싶으면 돈크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좋은 일터를 찾으면 됩니다. 얼굴 예쁜 색시를 만나고 싶으면 사람들을 얼굴로만 따지면 됩니다. 마음 착한 동무를 사귀고 싶으면 사람들을 마음씨로 어깨동무하면 돼요.


  가장 바라는 꿈대로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립니다. 가장 아끼는 모습대로 가장 빛나는 사진을 빚습니다.


  심병우 님 사진과 박기성 님 글이 어우러진 《울릉도》(대원사,199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발을 묶는 바다는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살진 오징어와 명태, 방어가 무궁무진하고 기른 것 아닌 천연 미역과 돌김은 인건비가 안 빠져 못 딴다(13쪽).”고 하는데, 두 분은 울릉섬을 몇 차례쯤 마실해 보았을까요. 울릉섬 마실을 하는 몇 차례에 걸쳐 며칠쯤 묵어 보았을까요. 얼마나 울릉섬에서 살고 나서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이러한 책에 사진을 담을 수 있을까요.

 


  고작 열흘이나 기껏 두어 달쯤 살아내고서 어느 한 마을을 들려주거나 보여준다 하는 사진책이나 이야기책을 낸다면, 이런 책은 빈 껍데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흘이나 두어 달을 살아낸 사랑을 속속들이 일구어 아름다이 엮을 줄 안다면, 이런 책은 넉넉하고 따스한 알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딱 한 번 스치듯 지나가며 담은 사진으로도 ‘사진여행’을 풀어놓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태어나서 자라거나 여러 해 살더라도 ‘사진여행’뿐 아니라 ‘사진삶’조차 풀어놓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 마음 때문입니다.


  《울릉도》를 읽습니다. “신천지인 까닭에 유물·유적이 거의 없지만 볼거리는 많다. 역사가 보잘것없는 미국사람들이 1872년에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랑거리로 삼았듯, (울릉도는) 곳곳에 천연기념물 지역을 두었다(19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것(울릉 9경)을 모두 보려면 아무래도 섬을 한 바퀴는 돌아야 한다. 배나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그리고 성인봉을 오르고 나리분지에도 가 봐야 한다(24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쟁이 심병우 님이나 글쟁이 박기성 님은 울릉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손님입니다. 그렇다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손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땀방울을 영글어 《울릉도》를 내놓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랑이 아리땁게 모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을 찍을 테고, 누군가는 더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글로 옮길 테지요. 그런데,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이나 더 놀랍다 싶은 글이 꼭 있어야 되지는 않아요. 스스로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돼요. 스스로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넉넉해요.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덧붙여, 내 사랑스러운 꿈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여쁩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이야기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리땁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미국땅을 자동차를 몰아 두루 돌며 담은 《미국사람들》이라는 사진책은, ‘자동차를 몰아 넓고 큰 미국땅을 두루 도는’ 느낌을 담습니다. 더 돋보이거나 더 멋스러운 모습이나 느낌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넓고 큰 미국땅 온갖 모습과 느낌’을 담습니다. 사진책 《울릉도》는 자동차나 버스나 헬리콥터나 배에 기대지 않고 두 다리로 즐기거나 누린 울릉섬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거룩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눈길로 담습니다. 세계사진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해서 더 돋보일 까닭이 없고, 한국사진역사에조차 이름을 못 올린다 해서 덜 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울릉도》에 실린 “천부에서 한 시간 반쯤 걸려 올라선 고개는 세상 모를 딴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방이 험상궂은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거짓말처럼 설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여남은 채의 집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85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추운 겨울날 한 시간 반쯤 눈밭을 헤치며 멧자락을 누빈 이야기입니다. 삶을 담고 사랑을 들려주고 꿈을 보여줍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낄 사진을 빚습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 울릉도 (심병우 사진,박기성 글,대원사 펴냄,1995.9.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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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 글쓰기 (익명 글쓰기)

 


  국어사전에서 ‘익명(匿名)’이라는 낱말을 찾아본다. “이름을 숨김”을 뜻한다 한다. 문득 생각한다. 한자말로 ‘익명’이라 적는 일이 나쁘다 느끼지 않으나, 새로운 한국말로 ‘이름숨김’이나 ‘숨긴이름’처럼 빚을 수 있으리라고. 또는 ‘이름감춤’이나 ‘감춘이름’처럼 새 낱말 빚을 수 있겠지.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예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글’이라 하는 좋은 그릇이 있다 하더라도 이 그릇에 담을 어여쁜 낱말을 빚지 못한다. 한글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낱말이란 으레 한자말이거나 영어가 되기 일쑤이다. 요사이는 아예 한자로 적거나 알파벳으로 적을 뿐 아니라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까지 적기도 한다.


  쉽게 헤아려 보고 싶다. ‘익명’이라 하는 한 번 감춘 낱말이 아닌, 말뜻 그대로 생각을 나타내는 ‘이름을 숨긴’이나 ‘이름을 감춘’이라는 쉽고 또렷한 한국말로 곰곰이 헤아려 보고 싶다.


  사람들은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춘 채 글을 쓰기도 한다. 지난날에는 문학을 하는 이들이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었다.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보이려 하는 뜻이 있었을는지 모르나,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면, 글쓴이가 ‘몇 살이요, 남자냐 여자냐, 학교는 어디를 얼마나 다녔나, 어느 마을에 사는가, 한국사람인가 외국사람인가, 재일조선인인가 연길사람인가, 어린이인가 푸름이인가, 밥벌이로 삼는 일거리는 무엇인가’ 같은 모든 그림자가 사라진다. 문학을 읽을 사람은 이 모든 껍데기나 허울을 생각하지 않고 글만 읽는다. 곧, 문학을 문학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며 문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는 이름을 숨기며 인터넷에 글을 쓸 때에 남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들볶는다. 모진 말이나 거친 말을 일삼기도 한다.


  왜 남을 해코지해야 하나. 왜 모진 말을 일삼아야 하나.


  이름을 숨긴 채 글을 써도 된다. 이름을 밝히며 글을 써도 된다. 어떻게 하든 내 글이다. 이름을 숨겨서 다른 사람이 ‘누가 썼는가’ 알아보지 못한대서 내 글 아닌 다른 사람 글이 될까. 내 글 아닌 다른 사람 글처럼 보일까.


  어느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이름을 숨겨도 누구나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소리란, 모든 마음을 활짝 열고 즐겁게 생각을 나누자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익명’이라는 그늘에 스스로 갇히면서 슬프며 억지스러운 논리라는 틀에 사로잡히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을 숨기며 글을 쓸 적에는 사람들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 뒷모습이 드러난다. 이뿐 아니다. 뭇사람 앞에서 제 이름을 숨긴 채 뭇칼질 같은 글을 함부로 쓰는 일이란, 누군가를 비아냥거리거나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름 숨긴 채 글을 쓰는 나’를 비아냥거리거나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일이 된다.


  예부터 ‘때린 사람은 잠 못 이룬다’고 했다. 왜냐하면, 때린 사람은 ‘때린 느낌’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때린 느낌이 때린 사람한테서 지워질 수 없다. 이름을 숨긴 채 뭇칼질 하듯 글을 쓰면, 이 글은 ‘이름 숨긴 채 글을 쓰는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지워지지 않는다. 곧, 이름을 숨기든 이름을 드러내든, 나 스스로 쓰는 모든 글은 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면서 ‘내 생각’과 ‘내 삶’이 된다.


  입에 발린 고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이는 참말 ‘입에 발린 고운 듯 보이는 삶’에서 허덕인다. 속알맹이까지 알차도록 어여삐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이는 참말 ‘속알맹이까지 알차도록 어여삐 삶’을 일군다. 막말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막삶을 보내고 만다. 거친 말이란 거친 삶이다.


  사랑을 꽃피우는 삶을 바란다면, 내 이름을 숨기거나 드러내거나 내 사랑을 흐드러지게 꽃피우도록 글을 쓸 노릇이다. 이 땅에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가 자리잡기를 바란다면, 나부터 스스로 언제나 평화로운 넋과 평등한 꿈과 자유로운 사랑과 민주다운 얼을 빛내는 글을 쓸 일이다.


  평화롭지 않은 말이라면 평화롭지 않은 넋이며 평화롭지 못한 삶이다. 자유롭지 못한 글이라면 자유롭지 않은 마음이며 자유롭지 못한 삶이다.


  이름을 숨기며 쓰는 글은 ‘딴 사람이 안 본다’고 여기며 용두질을 하는 모습과 같다. 딴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풀숲이나 길바닥에 쓰레기가 떨어졌으면 아무렇지 않게 주워 치우거나 쓰레기통으로 옮길 노릇이다. 누가 ‘당신은 참 착한 일을 했소’ 하는 말을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말고, 나 스스로 마땅히 할 몫을 하면 된다. 스스로 착하게 살고 스스로 참답게 생각하며 스스로 아름답게 꿈꾸면 된다.


  이름은 한낱 허울이기만 하지 않다. 이름은 사람 몸뚱이처럼 대수롭다. 다만, 이름과 몸뚱이가 아무리 대수롭다 하더라도 알맹이와 마음에 앞설 수 없다. 이름으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알맹이로 누리는 삶이요, 겉치레로 꾸미는 삶이 아니라 온마음 기쁘게 누리는 삶일 테니까.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숨긴들, 누구보다 나 스스로 내 글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글을 안다. 나는 내 글을 알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짓을 고스란히 바라본다. 내가 내 짓이 미운 줄 느끼며 바라본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깎아내리는 꼴이다. 한자말로 일컫자면, ‘자위’란 ‘자해’일 뿐이다. ‘자위’하듯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를 ‘자해’하는 글이 될 뿐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며 글을 쓰면, 언제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삶이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며 글을 쓰면, 이름을 숨기건 밝히건 늘 내 마음 따사롭게 돌보며 어여삐 빛난다고 느낀다. (4345.4.25.물.ㅎㄲㅅㄱ)

 

 

***

 

알라딘서재 논쟁에서 더없이 부질없구나 싶은 '익명 글'로 스스로 갉아먹으려는 분이 곧잘 보여, 이 같은 글을 한 자락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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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71 : 정밀(靜密)

 


조릿대 숲을 지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햇빛 미끄러지는 그 두꺼운 청록 이파리 아래는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 만큼 정밀(靜密)하다
《박기성·심병우-울릉도》(대원사,1995) 56쪽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의 터널(tunnel)을 통과(通過)하는데”는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이를 지나가는데”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잇길을 지나가는데”로 다듬습니다. “청록(靑綠) 이파리”는 “푸른 이파리”나 “싯푸른 이파리”나 “짙푸른 이파리”로 손보고,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은 “없는 시마음이 일어날”이나 “없는 마음이 일어나 시를 쓸”이나 “절로 우러나 시를 쓸”로 손볼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한자말 ‘정밀(靜密)’은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여 빈틈이 없고 자세함”을 뜻한다 합니다. 국어사전 뜻풀이가 흐리멍덩해 다시 ‘정교(精巧)’를 찾으니 “솜씨나 기술 따위가 정밀하고 교묘하다”를 뜻한다 하고, ‘치밀(緻密)’을 찾으니 “(1) 자세하고 꼼꼼하다 (2) 아주 곱고 촘촘하다”를 뜻한다 합니다. ‘정밀’을 풀이하며 ‘정교’라 말하고, ‘정교’를 풀이하며 ‘정밀’이라 말합니다. 이래서야 낱말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치밀’에 이르니 ‘꼼꼼함-촘촘함’이라 일컫습니다. 곧, ‘정밀-정교’는 나란히 ‘빈틈없음’을 가리키는 셈이요, ‘치밀’은 ‘꼼꼼함-촘촘함’을 나타내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거나 써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뜻과 말쓰임을 옳게 살피자면, ‘정밀-정교-치밀’은 그닥 쓸 만하지 않으며, 이 세 가지 한자말은 ‘빈틈없다-꼼꼼하다-촘촘하다’를 밀어내며 쓰인다 하겠습니다.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 만큼 정밀(靜密)하다
→ 없는 시마음이 일어날 만큼 놀랍게 빽빽하다
→ 없는 마음이 일어나 시를 쓸 만큼 매우 촘촘하다
→ 절로 우러나 시를 쓸 만큼 대단하다
 …

 

  깊은 숲으로 들어가니 짙푸르거나 싯푸른 잎사귀가 흐드러지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 합니다. 참 대단한 숲이니 ‘대단하다’ 말할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참 놀라운 숲이니 ‘놀랍다’ 말할 수 있습니다. 푸른 잎사귀가 우거진 모습일 테니 ‘정밀하다’가 아닌 ‘우거지다’ 같은 낱말이 어울립니다. “나무가 빽빽하다”라든지 “푸른 빛(잎사귀)으로 촘촘하다”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서 헤아리기도 하지만, 한자말 ‘정밀’을 넣는대서 얼마나 빈틈이 없도록 잎이 들어찼는지 밝힐 만하지 않습니다.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밝힌대서 얼마나 촘촘하거나 빽빽한가를 나타낼 만하지 않아요.


  꾸밈없이 글을 쓰면 됩니다. 수수하게 느낌을 적바림하면 넉넉합니다. 내 느낌을 나 스스로 가장 알맞거나 가장 사랑스럽다 여길 만한 쉽고 또렷한 낱말로 즐거이 풀어낼 때에 더없이 싱그럽게 빛납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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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릿대 숲을 지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잇길을 지나가는데, 햇빛 미끄러지는 그 두꺼운 짙푸른 이파리 아래는 시가 절로 우러날 만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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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한사람님의 "...알라딘 서재에서 논쟁의 진짜 이유..."

익명으로도 말해도 된다고 하는 이야기란, 모든 마음을 활짝 열고 즐겁게 생각을 나누자는 소리예요. 익명이라는 그늘에 스스로 갇히면서 슬프며 억지스러운 논리라는 틀에 사로잡히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참모습(진면목)'을 본다기보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감추던 '뒷모습'을 볼 테지요. 그만큼, 사람들 앞에서는 겉치레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아무 의견'이라는 핑계를 내걸며 자위행위와 똑같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댓글을 붙이는구나 싶군요.

 

..

 

[붙임말]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일은 재미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이름을 숨긴 채 글을 써 보았자, 하늘은 다 알고, 땅 또한 다 알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누군가한테는 이름이 보여지지 않는다지만, 마음을 열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슬픈 삶인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가. 껍데기 아닌가. 껍데기도 사람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껍데기에 얽매여 알맹이인 삶을 내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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