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 - 터키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의 서울 산책
아리프 아쉬츠 지음 / 이마고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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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살며 사진찍기는 온통 물음표
 [찾아 읽는 사진책 99]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의 장미도둑》(이마고,2009)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빚은 사진책 《이스탄불의 장미도둑》(이마고,2009)을 아주 금세 재미나게 읽습니다. 처음에는 사진만 죽 살피고, 다음으로 글을 찬찬히 읽습니다. 글을 읽으며 ‘사진만 먼저 읽던 느낌’을 떠올립니다.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아니, 터키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한국이라는 나라를 꾸밈없이 바라본다 할 때에 어떤 빛깔로 드러날까요.


  “여자들 옷의 화려한 문양과 색깔이 두드러져 보였다. 햇빛이 강하지도,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여자들은 옷만큼이나 화려한 양산을 쓰고 다녔다. 서울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청자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 건설현장을 둘러싸는 그물, 골프연습장, 간판, 표지판, 가로수, 길거리 노점상의 천막 등 청자빛이나 그와 비슷한 초록색이 녹음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색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7쪽).” 하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그림자빛으로 사진을 찍던 아리프 아쉬츠 님은 한국에 닿아 서울을 돌아보면서 무지개빛으로도 사진을 찍자고 생각합니다. 당신 눈길을 사로잡는 눈부신 무지개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합니다.

 

 


  나는 사진을 두 갈래로 찍습니다. 필름으로만 사진을 찍던 예전이든, 필름과 디지털로 사진을 찍는 요즈음이든, 무지개빛으로 찍는 사진기 한 대랑 그림자빛으로 찍는 사진기 한 대를 따로 챙깁니다. 똑같은 사람을 바라보건, 똑같은 집이나 들이나 마을을 바라보건, 무지개빛으로 느끼는 아름다움과 그림자빛으로 누리는 아름다움은 사뭇 다르다 느껴요. 어느 한 가지로만 바라본다면 내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겠다고 느껴요.


  “한국은 한눈을 팔기에는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돌아가는 나라였다(31쪽).” 하고 말하는 대목을 되뇝니다. 참 그렇습니다.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하기도 하지만,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뒤에서 밀어댑니다. 사진도 빨리 찍어야 하고, 사진책도 빨리 만들어야 하며, 사진비평도 빨리 쏟아내야 합니다. 무엇이든 먼저, 빨리, 크게 하지 않고서야 한국에서 빛을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1등만 바라보는데, 이 1등이란 한 번 1등을 해서는 안 되고 ‘죽는 날까지 내처 1등’을 지키도록 빨리 달리고 죽어라 달려야 해요.


  그러고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국사진’이라 일컬을 만한 아름다운 사진이 아직 없다고 할 만하구나 싶어요. 스스로 살아가는 꿈과 사랑을 돌보지 않는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찍기는 할 테지만, 정작 ‘한국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지구별 사진밭’에 즐거이 내놓아 나눌 ‘아름다운 사진’ 하나 누리기 힘들지 않겠느냐 싶어요.

 

 


  “아줌마들의 옷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패턴을 자랑했다. 피카소나 마티스도 그와 같은 패턴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공원이나 지하철 등에서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보고 다니는 일은 포비즘 전시회보다도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39쪽).” 하는 대목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참말 재미있구나 싶은 모습이겠지요. 참말 재미있구나 싶은 모습을 한국사람 스스로 만들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참말 못 느낀다 하겠지요.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어 나라밖에 알린다 할 때에 어떤 사람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담아서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진으로 담아 이웃나라에 알린다 할 때에 어느 도시나 시골을 언제 어떻게 담아서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몇 개월을 살다 보니 반은 한국인이 됐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통일에 대한 친구들의 회의적인 시선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56쪽).” 하는 대목을 곱씹고, “젊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MP3를 귀에 꽂고 다녔다. 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75쪽).” 하는 대목을 되새깁니다. 한국사람이 보여준다 할 만한 ‘한겨레 넋’이란 무엇일까요. 남녘과 북녘을 아우를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남북녘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모든 한겨레를 어우를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지구별 숱한 나라에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온 한겨레를 그러모을 만한 넋이란 무엇일까요.


  사진과 글을 한참 읽다가 살며시 책을 덮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터키사람 하나 한국에서 꽤 오래 지내며 한국땅 가운데 서울에서 보고 듣고 겪고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누린 삶을 적바림합니다. 한국사람 하나 터키로 나들이를 가서 여러 달 살아내며 글과 사진을 적바림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다시 책장을 넘깁니다. “이스탄불의 소리는 어떤가? 아침 5시, 침실 바로 곁 창가에서 아카시아 나무에 앉은 나이팅게일 한 쌍이 나를 깨운다. 봄여름에는 제비가 재빨리 날며 소리를 낸다(134쪽).”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들새 노랫소리로 아침을 연다고 합니다. 한국 서울에서는 어떤 소리로 아침을 여는가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제비들 춤사위와 노랫소리를 누릴 수 있는데, 한국 서울에서는 어떤 사위와 소리를 누리는가요.


  스스로 누리는 대로 스스로 글로 담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대로 스스로 사진으로 빚습니다.


  “‘왜 그렇게 정확하게 바꿔야만 할까?’ 나는 물었다. ‘렘브란트나 베르베르가 이 집을 화폭에 담았을지도 모르니까.’ 역사에 대한 존경심은 네덜란드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으로 네덜란드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보여줄까? 박물관의 그림으로? 아니면 현실로(143쪽)?” 하는 대목을 오래도록 헤아립니다.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만난 네덜란드 벗은 네덜란드 시골자락에 17세기 모습 고스란히 깃든 집이 많다고 말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퍽 예전부터 옛집을 허물거나 부수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언제나 살아숨쉬는 역사이자 문화이니까요. 역사는 박물관이 아닌 마을에 있으니까요. 문화는 교과서나 도서관이 아닌 ‘여느 사람 여느 살림집’에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한국 문화’를 사진으로 담는 이들은 여느 사람 살림집 모습을 사진으로 옳게 담아내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내 집’부터 사진으로 담아 내 집이 곧 한국사회요 한국문화이며 한국예술이라고 즐거이 나누지 못합니다.


  “인사동 위쪽으로 북촌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골목은 잘 단장이 되어 있었지만 아줌마도 개도 시끌벅적한 어린아이들도 없었다. 오래된 집들 같았지만 사실은 옛 스타일로 새로 지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집들을 보며 밀랍인형을 떠올렸다. 진짜랑 똑같지만 생명력은 없는 … 소나무와 산을 이토록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이 진정 산을 허물고 인공적인 물길을 만든단 말인가? 한국사람들이 진정 눈과 코에 성형수술을 해대는 사람들처럼 자연 전체에 메스를 대고 싶어한단 말인가? 도시의 기억상실증으로도 모자라서 자연의 기억상실증을 만들고자 한단 말인가? 네덜란드만큼이나 부유한 한국사람들에게 역사는 네덜란드사람들보다 덜 중요하단 말인가(144∼145쪽)?” 하는 대목을 밑줄 그으며 읽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습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멧줄기를 타려고 멀리 자동차를 타고 나갑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좋은 자연 구경’을 하려고 자가용을 타든 기차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멀리멀리 나다닙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곳에 좋은 자연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내 보금자리를 좋은 자연이 싱그러운 데에 마련하지 않습니다.

 

 


  나도 마을도 숲도 한몸입니다. 내가 사랑스러울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정갈할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정갈합니다. 내가 어여쁠 때에 나도 마을도 숲도 어여뻐요. 곧, 내가 사랑스레 살아가며 내 사진을 나 스스로 사랑스레 일굽니다. 내가 빛나는 눈길일 때에 내 사진은 늘 빛나는 이야기잔치입니다.


  봄날 찔레꽃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내 눈과 머리와 마음과 몸이 온통 찔레꽃이 됩니다. 나는 내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찔레꽃 ‘지식이나 정보’를 아로새기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찔레꽃과 한덩어리가 되어 즐거운 꿈과 사랑을 찬찬히 적바림합니다. 봄날 들딸기를 사진으로 옮기면서 내 입과 귀와 가슴과 꿈이 온통 들딸기가 됩니다. 나는 내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들딸기 ‘지식이나 정보’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들딸기와 하나가 되어 해맑은 웃음과 눈물을 천천히 빚습니다.


  “정치가들은 왜 여전히 탐욕으로 불타 있는 것일까 … 몇 개월 간의 서울 체류 기간 동안 나는 외국인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서울에는 관광객이 드물다. 왜 한국에 와야 할까? 김치를 먹고 아파트를 구경하기 위해서(147쪽)?” 하는 대목을 읽다가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곳곳을 누비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구나 싶어요. 한국땅 어디를 가도 온통 아파트투성이잖아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아파트 구경할 일이 없으니, 애써 한국땅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아요.

 


  서울에서 대구나 대전이나 광주에 간들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을 볼 만할까요. 부산에서 인천이나 수원이나 일산에 간들 무엇이 다른가요. 무엇을 볼 만한가요.


  “한국의 십자가들은 달랐다. 그 십자가들은 큰 건물의 꼭대기를 장식하지 않았다. 대신 깔끔하지 않고 지저분한, 그리고 값싸고 허름한 건물 지붕 위에 있었다(168쪽).”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너털웃음이 납니다. 아주 마땅하지만, 믿음은 예배당 십자가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예배당 십자가에도 있고 내 가슴에도 있겠지요. 하느님은 예배당 뾰족탑에 찔려 피를 흘리기도 할 테고, 내 부질없는 헛생각에 엉덩이 걷어차이며 아파하기도 할 터입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이 한국에서 살며 사진을 찍는 나날은 온통 물음표입니다. 그예 물음표투성이 사진을 찍습니다.


  “터키 남부에도 소나무가 많아 어딜 가도 송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소나무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 수백만 불이 넘는 건물들의 외관이 떨어진 솔잎으로 구겨지지 않도록 청소부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 서울에서는 소나무 외에도 단풍나무, 아카시아, 감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잎들도 냄새를 풍길 시간이 없다. 서울시는 도시 미관을 정리하는 데 열심이다(176쪽).” 하는 대목을 읽으며 이 나라 서울이 그지없이 슬프지만, 정작 서울사람 스스로 슬퍼할 일이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소나무는 있으나 솔내음을 못 맡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울까 잘 모르겠습니다. 감나무가 있어도 감내음을 못 나누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얼마나 기쁠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리프 아쉬츠 님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릅니다. “닫혀 있는 한국의 집에서 살았던 몇 개월 동안 내게는 폐쇄공포증의 징후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184쪽).” 하는 느낌말처럼, 한국땅 여느 살림집은 울타리가 매우 높습니다. 창문은 참으로 작습니다. 대문은 꽁꽁 잠깁니다. 햇볕이 잘 드는 집이 적습니다. 햇볕이 잘 들 만한 높은 아파트라 하더라도 앞뒤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섭니다. 높은 아파트에서도 높은 아파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다세대주택에서는 이웃 다세대주택 벽돌담이나 시멘트담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사람이라고 잘 느끼며 한국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진으로 담을 만큼 재미나거나 놀랍거나 멋스럽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 자꾸자꾸 나라밖 마실을 다니며 이웃 가난한 나라나 이웃 가멸찬 나라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어떤 사진을 할 만할까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할 때에도 터키사람 아리프 아쉬츠 님처럼 온통 물음표투성이가 될까요. 느낌표투성이가 될 사진을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일굴 수 있을까요. 말줄임표나 마침표가 될 만한 한국사진을, 따옴표나 묶음표가 될 만한 한국사진을, 누군가 곱게 즐길까 모르겠습니다. (4345.5.26.흙.ㅎㄲㅅㄱ)

 


― 이스탄불의 장미도둑 (아리프 아쉬츠 글·사진,이혜승 옮김,이마고 펴냄,2009.3.16./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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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반 소년들 양철북 청소년문학 15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양철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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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잎과 환한 꽃 누리는 아이들
 [푸른책과 함께 살기 94] 우오즈미 나오코,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

 


- 책이름 : 원예반 소년들
- 글 : 우오즈미 나오코
- 옮긴이 : 오근영
- 펴낸곳 : 양철북 (2012.3.26.)
- 책값 : 9000원

 


  이웃 할머니가 마늘밭 가장자리에서 풀을 뽑습니다. 일손을 거들까 하지만 당신이 혼자 하시겠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지심매기’만 살짝 거듭니다. 할머니가 지심을 맬 때에 ‘부추’가 보이기에 “‘정구지’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쭈려다가, 전라남도에서는 달리 가리킬까 싶어 “‘여기’는 어떡할까요?“ 하고 여쭙니다. “응, 그건 놔 둬. ‘솔’이야 솔. 오늘 ‘아’들이 오는데 가져갈랑가 모르겠네.” 하고 말씀합니다.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들딸기를 땁니다. 아이가 집에서 어머니하고 함께 먹으라고 아이 두 손에 가득 담길 만큼 땁니다. 마을 어귀 마늘밭에서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창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자전거를 멈춥니다. 아이한테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도 조금 나누어 주렴 하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네가 이걸 나한테 주냐. ‘똘’이네, 똘. 아, 똘 참 맛나다.” 하고 말씀합니다.


.. 문득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전차를 타고 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자전거로 가면 두 시간은 걸리겠지만 따듯한 햇살이 등을 떠밀었다 … 흙을 정리할 때 옆을 지나가다가 “뭐 하는 거야?” 하며 아는 척을 했던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오와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화단 하나로 입구 느낌이 훨씬 좋아졌는데도 몰라보는 건가. 삭막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 삭막한 녀석들 중 하나였으니까 ..  (5, 91쪽)


  지난주에 둘째 아이 돌떡을 이웃집 모두 돌며 돌리다가, 돌울타리 타고 곱게 자라는 ‘마삭줄’꽃을 잔뜩 보았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쪽으로 마삭줄 울타리를 만들기까지 합니다.


  식구들 다 함께 마삭줄꽃을 바라볼 때에는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물어 물어 알아차립니다. 꽃이름은 모르지만 참 어여쁘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 바람개비처럼 생긴 하얀 꽃은 무어라 할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이러다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데, 꽃이든 풀이든 나무이든 꽃 모양만 놓고 무슨무슨 꽃이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마삭줄’이라는 이름을 가르치면서, ‘흰바람개비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나한테도 아이한테도, 마삭줄꽃은 그예 하얗게 생긴 작은 바람개비와 닮은 꽃이에요.


.. 옆에 있는 화분을 보니 잎 모양으로 봐서는 같은 종류인 것 같은데 줄기가 쓰러지고 잎은 시들어 축 늘어져 있다. 꼿꼿한 풀은 내가 앉은 바로 옆에 있는 화분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여기만 비가 온 걸까. 그때, 문득 어제 종이컵에 남은 물을 끼얹고 갔던 일이 떠올랐다 … ‘생각해 보면 풀이 축 늘어져 있다가 싱싱하게 살아나는 모습이,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온 지 열흘 만에 본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거든.’ … 시미즈라는 머리 긴 아이가 말했다. “흙과 씨름하는 걸 보면서 참 멋지다는 말도 했어.” ..  (17, 27, 124쪽)


  네 식구 밭둑이나 논둑을 다니다가 ‘들딸’을 따서 먹다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멧자락이나 멧등성이 아닌 들판에서 따서 먹기에 ‘들딸’이라고 여기지만, 먼먼 옛날에는 논둑이나 밭둑이 논둑이나 밭둑 아닌 멧자락이었을 수 있습니다. 멧등성이부터 천천히 퍼져 밭둑까지 ‘딸’이 자란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딸, 또는 ‘똘’은 ‘들딸(들똘)’이 아니라 ‘멧딸(멧똘)’이라 해야 바른 이름일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으레 ‘멧딸’만 말하지 ‘들딸’은 말하지 않습니다. 멧딸 가운데에는 ‘나무딸’이 있습니다. 딸도 숱한 갈래여서, 모든 딸을 멧딸이나 들딸이나 나무딸이라고만 가리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 지난해 봄 충청북도 음성 멧자락에서 먹던 멧딸이랑 올해 봄 전라남도 고흥 시골자락에서 먹는 들딸이랑 꽃도 열매가 제법 달라요. 꽃빛도 꽃크기도 다릅니다. 꽃잎도 풀잎도 다릅니다. 이처럼 다른 딸을 그냥 멧딸이라느니 들딸이라고만 해도 될까 궁금합니다. 딱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그마한 빨간 열매를 톡 따서 입에 넣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기운을 헤아립니다. 딸은 내 몸속에서 새로운 기운이 되어 내 숨결을 새삼스레 북돋운다고 생각합니다. 딸이 내가 되고, 내가 딸이 됩니다. 딸 목숨은 내 목숨이고, 내 목숨은 곧 딸 목숨입니다.


.. 먼저 오와다가 가져온 스토크 봉투를 열어 보니 아주 작은 씨앗이 나왔다. 씨앗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모래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갖고 온 페튜니아 봉투를 열어 보고는 더욱 놀랐다. 이건 모래도 아니다. 거의 가루에 가깝다 … “여기 있는 식물의 이름이 뭔지, 어떤 방식으로 키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꽃으로 가득한 화원으로 만들고 싶다면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 “BB, 너희 집 꽃가게 하는 거 맞지?” 오와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제 원예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입니다.” 쇼지는 정색을 하고 대답하고 나서 오와다를 보았다. “오와다 군은 읽지 않은 겁니까?” ..  (30∼31, 50∼51쪽)


  이제 우리 시골마을이든 면소재지 언저리이든 온통 찔레나무 하얀 꽃잎 잔치입니다. 아이들과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거닐며 마실을 하든, 자전거를 몰며 천천히 돌아보는 마실을 하든, 어디에서나 하얀 꽃잔치입니다.


  때때로 찔레꽃 하얀 송이 따서 입에 넣으며 잘근잘근 씹습니다. 돌을 갓 지난 아이 입에도 찔레꽃잎 밀어넣습니다. 아이들 모두 입을 낼름 벌립니다. 우리 집 처마에 깃든 제비들이 깐 새끼와 같습니다. 입 참 잘 벌립니다.


  찔레꽃잎을 톡 따서 한 닢씩 넣을 때에 살펴보니, 꽃잎 모양새는 이른바 ‘하트’입니다. 찔레꽃잎은 나무에 달린 모습도 예쁘고 한 닢 똑 딸 때에도 예쁩니다. 한 닢에서도 냄새 그윽하고, 무리진 꽃잎에서도 냄새 고즈넉합니다. 찔레꽃 한창인 곁을 지나가면 온몸에 찔레내음이 감돕니다. 찔레내음이 내 내음이 되고, 내 내음은 찔레내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야흐로 여름이 코앞인 느즈막한 끝봄자락, 조용조용 찔레잔치를 누립니다.


.. “아니, 오와다 군은 아니지만 그런 불량한 차림새는 다른 학생들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버젓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더러 상자를 쓰고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해서 고등학교에 들어왔습니다.” … “이름이랑 얼굴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고요! 이런 기분을 오와다 군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놀리는 녀석이 없잖아!” ..  (71, 115쪽)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빚은 푸른문학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참 재미없겠다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꼭 도시라서 재미없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 온통 ‘더 잘난 학교’에 ‘더 높은 시험성적’ 거두는 데에만 온마음 기울이도록 하는 제도권교육일 때에는, 학교 다니는 재미나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동무를 밟고 올라서는 일이란 무슨 재미일까요. 동무랑 점수겨루기를 하는 일이란 무슨 기쁨일까요. 더 높은 학교, 또는 더 잘난 대학교에 붙는 일이란 무슨 보람일까요. 모두 똑같은 옷차림에 머리모양에 생각에 가방에 …… 틀에 맞추는 일이란 무슨 즐거움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볼까요.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이 많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는 무엇을 바라보나요.


  아이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어른으로 자라야 아름다울까요. 어른들은 무슨 삶을 누리는 푸른 나날을 거쳤을까요.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왜 삶을 누리며 사랑을 꽃피우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언제 사람다운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목숨이요, 사람은 어떤 무늬이며, 사람은 어떤 넋인가 생각합니다.


.. 아는 꽃 이름이 늘자 집 근처나 학교를 오가는 길에 갑자기 꽃이 많아졌다. 물론 눈에 띄니까 그런 느낌이 나는 것일 뿐이지, 전부터 늘 있던 꽃이다 … “좋아, 자연을 보러 가자. 누가 뭐래도 우리는 원예반이잖아.” … 초록색이라고 다 같은 초록색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초록색이 산속에 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숲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  (92, 103, 109쪽)


  아이들이 누구보다 스스로 아끼면서 하루하루 좋아할 수 있으면 참 예쁘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언제나 스스로 보살피고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무척 아름다우리라 봅니다. 착한 아이들이 예쁜 아이들입니다. 참다운 아이들이 아름다운 아이들입니다.


  착한 아이들로 살아가며 착한 어른이 됩니다. 참다운 아이들 삶을 빛내며 참다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할 때에 갑자기 거듭나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나이에 들어서며 하루아침에 맑은 빛을 뽐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일 적부터 차근차근 사랑을 누리고 빛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자라나는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온갖 사랑을 맞아들이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씩씩하게 큽니다.


  나는 도시가 나쁘다고 따로 생각하지 않으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높다란 건물과 새까만 찻길과 끝없는 자동차와 형광등 켠 건물과 메마른 옷차림만 늘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너무 슬프며 어두운 넋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이 푸른 나무 푸른 잎과 마알가니 빛나는 환한 꽃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다운 사랑을 빛낼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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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님의 "▶◀ 댓글창을 열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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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광고와 트래픽 발생'을 해 주면서
알라딘 기업에 간접광고와 회사이익창출을 해 주어요.

 

어떠한 포털사이트도 개개인한테 공짜로 자리를 주지 않아요.
모두 간접광고와 여러모로 포털 회사 이익에 이바지를 해요.

 

'알라딘 뉴스레터'는
제가 보기로는 '2중으로 알라딘 이익'을 '대가를 안 치르고'
쓰는 셈이 아닌가 싶어요.

 

'뉴스레터'는 영어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틀림없이 '사외보' 성격이거든요.
뉴스레터는 사외보와 마찬가지이고,
여기에 알라딘 광고 구실까지 한다면,
이러한 인터넷'매체'를 발행해서 회원한테 보낸다면,
이에 걸맞게 '저작권 사용료'를 물어야 해요.


(왜냐하면, 뉴스레터는 '책 파는 도움 구실'을 하니,
 이렇게 뉴스레터를 발행하면서 이에 걸맞게
 뉴스레터 저작권자 사용료를 안 주는 일은
 참말 앞뒤 안 맞는 엉뚱한 노릇입니다)

 

다만, 한국은 아직 저작권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으니
너무 엉터리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아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어느 책에 실린 글월 한 줄을 읽'어도
이렇게 읽은 저작권료를 치르도록 법으로 규정합니다.
예전에는 라디오 방송에서 책 구절을 '저작권료' 안 치르고 읽었지만,
이제는, 어느 책에서 인용해서 읽더라도
반드시 저작권료를 치러야 하고,
저작권료를 안 치르고 방송에서 책 본문을 한 줄이라도 읽거나,
또 사진을 쓴다면,
이를 법으로 제소하면 모두 범법이 되거든요.

 

..

 

그런데, 저는 이런 댓글을,
우리가 '알라딘 회사한테서 돈을 받아내자'는 뜻으로 쓰지 않았어요.

 

알라딘 회사가 사고파는 주된 물품이 '책'인 만큼,
책을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책을 좋아하는 알라딘 이용자인 우리들이
더 즐겁고 더 오붓하게
알라딘 서재마을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슬기롭게 잘 연다면 참말 좋겠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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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맛

 


  나는 꼭 두 가지 딸기맛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어린 어느 날, 시골 외가집에서 밭딸기를 밭에서 바로 따서 먹던 맛입니다. 다음 하나는 그 뒤 어느 퍽 어린 날인데, 시골 밭둑인지 멧등성이인지 들딸기나 멧딸기를 따서 먹던 맛입니다.


  처음으로 밭딸기를 먹고 나서, 가게에서 사다 먹는 딸기는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알뜰히 거둔 유기농 딸기라 하더라도, 비닐을 안 친 밭자락에 심어 거둔 밭딸기 맛보다 짙거나 달거나 바알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다음으로 들딸기나 멧딸기 맛을 보고는 밭딸기조차 견줄 수 없이 오래도록 입안과 온몸을 감도는 달달하며 짙고 바알가면서 푸른 맛이 남습니다. 고픈 배를 채우거나 가벼운 입을 달싹이는 맛이 아닌, 목숨을 받아들여 내 목숨 곱게 건사한다는 삶을 느꼈어요.


  하루가 흐르고 한 해가 흐릅니다. 어린 나날 외가집에서 먹은 맨땅 밭딸기 맛은 두 번 다시 찾아보지 못합니다. 들딸기와 멧딸기는 시골로 나들이를 갈 적 곧잘 찾아봅니다. 이제 두 아이와 함께 시골자락 들판과 멧등성이 마실을 하면서 새봄 첫 들딸기와 멧딸기 맛을 봅니다. 다섯 살 아이는 스스로 딸기 알맹이를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잘 익었는가 덜 익었는가’를 깨닫습니다. 잘 익은 딸기는 손으로 살며시 잡기만 해도 톡 하고 떨어집니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건드려도 툭 하고 떨어져요.


  딸기를 쥔 손에는 딸기내음이 뱁니다. 딸기를 먹는 입에는 딸기내음이 감돕니다. 딸기를 먹은 몸에는 딸기내음이 어우러집니다.


  쌀을 밥으로 짓든 날로 씹어서 먹든, 쌀을 먹는 사람 몸에는 쌀내음이 뱁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몸에는 술내음이 뱁니다. 보리를 먹는 사람은 보리내음이 뱁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담배내음이 뱁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플라스틱과 기름 냄새가 뱁니다. 흙에서 일하는 사람은 흙내음이 뱁니다. 회사이든 공공기관이든 시멘트 건물에서 일하고 시멘트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시멘트내음이 뱁니다. 세겹살 즐겨먹으면 세겹살 냄새가 밸 테고, 갑오징어를 먹으면 갑오징어 내음이 배겠지요. 돈을 신나게 버는 사람한테는 돈내음이 가득합니다. 사랑을 나누며 꽃피우려는 사람한테는 사랑내음이 물씬 납니다.


  이웃집 할머니가 제비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늘밭에서 마늘을 하나하나 캡니다. 아이들은 낮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다가 온 집안과 마당을 넘나들며 개구지게 놉니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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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만들다

 


  첫째 아이가 한 살부터 다섯 살까지 살아낸 하루를 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 어버이도 내 어린 날 돌아보기가 어렵지 않을까 헤아려 본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고, 나날이 씩씩하게 큰다. 날마다 팔힘과 다리힘이 새롭게 붙고, 나날이 새로운 말과 새로운 몸짓으로 살아낸다.


  둘째 아이 걷기를 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첫째 아이는 혼자 멀찍이 앞서 달린다. 저 멀리, 저저 멀리, 혼자 씩씩하게 달린다. 이렇게 멀리 달렸다가 돌아온다. 돌아왔다가 다시 달린다. 쉬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그림이 된다. 스스로 사랑이 된다. 스스로 꿈이 된다. 스스로 이야기가 된다.


  그림은 루브르박물관에만 있지 않다. 사랑은 연속극에만 있지 않다. 꿈은 소설책에만 있지 않다. 이야기는 대학교 교수님 교재에만 있지 않다.


  씩씩한 두 다리가 그림이 된다. 씩씩한 두 팔로 그림을 그린다. 마알간 손길과 해말간 눈빛으로 그림을 만든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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