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8) 발상

 

자신들과 아기를 위해서 평화롭고 정상적인 출산을 원하는 부부라면 마치 공장의 조립 라인과도 같은 데서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메리 몽간/정환욱,심정섭 옮김-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샨티,2012) 60쪽

 

  “자신(自身)들과 아기를 위(爲)해서”는 “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나 “엄마 아빠와 아기를 헤아려서”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평화(平和)롭고 정상적(正常的)인 출산(出産)을 원(願)하는 부부(夫婦)라면”은 “근심없이 옳게 아기를 낳고 싶은 부부라면”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으로 손볼 수 있고, “공장의 조립(組立) 라인(line)과도 같은 데서”는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로 손볼 수 있어요. “않을 것이다”는 “않는다”로 손질합니다.


  보기글을 잘 살피면 앞쪽에서는 ‘출산’이라 적고, 뒤쪽에서는 ‘아기를 낳겠다’라 적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출산’은 알맞지 않은 낱말이라 ‘해산(解産)’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한겨레는 예부터 아이낳기를 한자말로 가리킬 때에 ‘해산’이라 했지, ‘출산’이라 하지 않았어요. 참말 언제부터 ‘출산’이라는 한자말이 들어와서 오늘날처럼 널리 퍼졌을까요. 그나저나, ‘출산’이든 ‘해산’이든 이런 한자말이나 저런 한자말 사이에서 헤매기보다는 쉽고 알맞게 ‘아이낳기’나 ‘아기낳기’처럼 쓸 때에 한결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기를 낳으니 말 그대로 ‘아기낳기’예요.


  ‘발상(發想)’이라는 한자말은 “어떤 생각을 해냄”을 뜻한다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든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든지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처럼 쓴다고 해요. 이 한자말 또한 쓸 만하니까 쓴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뜻을 찬찬히 살피면 “생각을 해냄”입니다. 곧 ‘생각하기’를 한자말로 옮기면 ‘발상’이 되는 셈입니다.

 

 아기를 낳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아기를 낳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

 

  생각을 바꾸면 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상의 전환”이 아닌 “생각 바꾸기”나 “생각 돌리기”나 “생각 고치기”나 “생각 거듭나기”가 됩니다. 생각을 새롭게 북돋우면 새로운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이나 “흐름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새날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거꾸로 가는 생각”이나 “엉뚱한 생각”이나 “엉터리 같은 생각”이 됩니다. 오래되었다고 낡지 않습니다. 새로 나왔어도 낡을 수 있고, 오래되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케케묵은 발상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아닌 “그런 케케묵은 생각은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 “그런 케케묵은 생각주머니는 이제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돼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동무랑 사랑스레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빛내며 말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며 말을 가꿉니다. 생각을 빛내기에 삶을 빛냅니다. 생각을 가꾸기에 삶을 가꾸어요.


  저마다 슬기롭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살아가며 슬기롭게 사랑합니다. 누구나 참다이 생각하고 참다이 살아가며 참다이 사랑합니다. 생각이 삶이 되고, 삶이 말이 됩니다. 말은 삶으로 다시 이어지고, 삶은 다시 생각으로 이어져요. 내 말 한 마디에 사랑을 싣기에 내 삶 한 자락 사랑으로 꽃을 피웁니다. 내 글 한 줄에 꿈을 싣기에 내 삶 한 가락 사랑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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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와 아기를 생각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아기를 낳고픈 두 사람이라면, 마치 공장처럼 끼워맞추듯 하는 데서 아기를 낳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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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삶, 책삶

 


  스스로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움직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나쁘거나 덜 좋지 않습니다. 내 모습이 어떠한가를 꾸밈없이 들여다보고 느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날 일입니다. 한결 아름답게 누릴 삶을 가꿀 때에 가장 좋습니다.


  나는 내 말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내 말을 찬찬히 일굽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럼없이 돌아보면서 내 삶을 하나하나 추스릅니다. 아름답게 나눌 말을 생각하고, 아름답게 누릴 삶을 생각합니다. 아름다이 걸어갈 길에 동무가 될 책 하나를 곁에 둡니다. 내 좋은 책은 내 좋은 동무입니다. 내 좋은 동무는 내 좋은 사랑입니다.


  스스로 살아온 대로 책을 살피거나 장만하거나 읽습니다. 스스로 살아온 결하고 어긋나는 책은 알아채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고 싶다면 새롭게 바라보면서 새롭게 알아봅니다. 스스로 새로 태어나는 삶을 꿈꾼다면 새로운 책길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닌 가슴으로 읽는 책입니다. 머리로 꾸리는 삶이 아니라 가슴으로 꾸리는 삶입니다. 눈물도 웃음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터뜨립니다. 기쁨도 슬픔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맞아들입니다. 삶이 말이요 삶이 책입니다. 말이 삶이요 책이 삶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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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숲’
[말사랑·글꽃·삶빛 24] 마음을 빛내는 말

 


  언제부터인가 ‘자연보호(自然保護)’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자연을 돌보자, 자연을 지키자, 자연을 아끼자, 자연을 사랑하자, 이런 여러 가지로 쓰면 한결 좋았을 테지만, ‘자연보호’ 네 글자로 곳곳에 푯말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된 네 글자 말마디를 쓰는 버릇은 퍽 옛날부터 ‘고사성어’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스스럼없이 ‘자연보호’를 외쳤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자연(自然)’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 합니다. 그러나, 이 한자말 ‘자연’을 한국사람이 언제부터 썼는지 아리송합니다. 조선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고려나 백제나 신라나 고구려나 가야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예전 지식인이 한자로 삶과 생각을 나타내던 때에는 어떠한 한자말로 ‘자연이 가리키는 무엇’을 나타냈을까요.


  옛시조나 옛소설에는 ‘강산(江山)’이라는 한자말을 으레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과 산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조선이나 고려 적 사람들이 ‘강산’이라는 한자말을 쓸 적에는 “자연의 경치”만 가리키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자연의 경치”라기보다 “자연”을 가리켰겠지요.


  예전 지식인이 아닌 조선 무렵 흙일꾼이나 고려 무렵 흙일꾼, 또 고구려 무렵 흙일꾼이라든지 가야 무렵 흙일꾼, 여기에 옛조선 무렵 흙일꾼은 ‘자연’이든 ‘강산’이든 어떠한 낱말로 가리켰을까요. 옛사람이 바라보던 ‘자연’이나 ‘강산’이란 무엇이었을까요.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던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우리 둘레 터전을 가리켰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처음으로 생겨 사람들 삶터를 하나하나 일컬을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오늘날 자연이나 강산이라는 낱말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내 몸뚱이가 아닌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나 오천 해 앞서 살던 내 넋으로 생각합니다. 오만 해나 십만 해 앞서 살던 내 얼로 헤아립니다.


  그래, 그무렵에는 내 삶터이고 내 둘레 터전이고 온통 ‘숲’이었구나 하고 떠오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로 ‘숲’은 ‘수풀’을 줄인 낱말이요,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것”을 뜻한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란 나무만 있는 곳이 아니에요. 풀이 함께 있습니다. 벌레가 함께 있습니다. 새가 함께 있고, 온갖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있는 데에는 돌도 있고, 냇물이 흐릅니다. 돌과 바위와 모래와 흙이 얼크러져 골짜기를 이룹니다. 멧자락을 이루고 멧골이 이루어집니다. 먼먼 옛날, 한자도 한글도 없던 옛날, 스스로 사랑을 빛내어 삶을 일구던 사람들은 ‘숲’에서 살았어요. 숲이 곧 지구요, 숲이 곧 온누리요, 숲이 곧 우주였어요.

  그렇다면 바다는? 하늘은? 바람은? 해는?


  과학자가 밝히기도 하지만, 바다는 바다 홀로 있지 않습니다. 뭍보다 너른 바다입니다만, 바다는 숲이 있어 바다 구실을 합니다. 숲에서 모래와 흙과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가 싱그럽게 숨쉽니다. 낱낱이 따로 떼내어 가리키자면 ‘나무’이고 ‘돌’이고 ‘메’이고 ‘냇물’이고 ‘바다’라 할 테지만, 가만히 헤아리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숲’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는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숲이 있기에 사람 누구나 숨을 쉽니다.


  이 숲을 감싸는 하늘이 있고, 이 숲을 간질이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숲을 살찌우는 해가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해를 찬찬히 헤아리고 보면, ‘숲’이라는 낱말로 가리킬 테두리가 참 작구나 여길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낱말이라고 해서 더 넓게 가리키지는 못해요. ‘자연’이라는 낱말로 ‘하늘’이나 ‘바람’이나 ‘해’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달이나 우주를 ‘자연’이라는 낱말로 담을 수 없어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은 “사람 힘이 닿지 않고 이루어진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작 ‘자연’이라는 낱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테두리에서 가리킵니다. 곧, ‘숲’이에요.


  이렇게 살피고 나서 새삼스레 ‘자연보호’라는 외침말을 들여다봅니다.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외친 ‘자연보호’는 ‘숲을 지키자’였습니다. 숲을 살리고 숲을 가꾸며 숲을 돌보자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 스스로 ‘숲사랑’을 외친 셈입니다.


  한자가 한국땅에 깃들어 ‘글 권력’을 이루던 때에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도 태어납니다. 이러한 권력 언저리에서 가지를 치는 ‘자연보호’ 같은 낱말입니다. 글로도 정치로도 돈으로도 학문으로도 권력을 이루지 않으며 살아가는 여느 마을 여느 살림꾼 눈높이에서 다시금 짚어 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는 데에서는 ‘사랑’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합니다. 삶이란 서로 사랑하며 빛납니다. 이리하여,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사내는 가시내를 사랑하고 가시내는 사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하고 풀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샘솟는 말마디 ‘숲사랑’입니다. 스스로 거듭나는 말마디 ‘숲사랑’이에요.


  나무는 사람이 심는대서 널리 퍼지거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씨앗을 맺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잎을 틔웁니다. 나무는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나무는 사람 힘이 닿지 않아도 천천히 우거지며 숲을 이룹니다. 사람은 나무가 이룬 숲에 예쁘게 깃들며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사랑입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스스럼없이 빛나는 삶입니다. 홀가분하게 피어나는 사랑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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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 부리는 책, 주제넘게 읽는 책

 


  나는 언제부터인가 어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내가 말하거나 글쓰며 담는 낱말을 몽땅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는 버릇이 들었습니다. 어느 낱말은 천 번이나 이천 번, 때로는 오천 번 넘게 찾아보곤 합니다. 숱하게 찾아보아도 다시금 국어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낱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욕심(欲心)’이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척 보아도 한자말이겠거니 싶은데, 국어사전 말풀이에는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 나옵니다. 옳거니, 한국말로 다시 적바림하자면, 한자말 ‘욕심’이란 “주제넘은 마음”입니다.


  한자말을 안 써야 한다거나 꼭 써야 한다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쓸 만한 말만 씁니다. 한자말 가운데 내가 쓸 만하다 싶으면 쓰는 낱말이 있고, 겨레말이든 토박이말이든, 아무튼 한국말 가운데 내가 쓸 만하다 싶으면 쓰는 낱말이 있어요.


  사람들이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니 깨닫지 못하는데,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자말은 그저 한자말입니다. 영어는 그저 영어이듯, 한자말은 한자말이에요. 영어 가운데 한국말로 받아들인 낱말이 몇 있대서 영어를 한국사람이 널리 쓸 말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한자말 가운데 한국말로 받아들여 쓰는 낱말이 꽤 많대서 한자말이 한국사람이 두루 쓸 말이라 여길 수 없어요.


  어찌 되든, 나는 ‘욕심’이라는 낱말을 안 쓰며 살아갑니다. 굳이 이 한자말을 쓸 까닭이 없기도 하지만, 이런 낱말을 쓰면 내 마음이나 넋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나 넋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낱말을 골라서 씁니다. 곧, 나로서는 ‘주제넘다’가 내 마음입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장만하거나 읽을 때에 ‘주제넘게 책을 장만하’거나 ‘주제넘게 책을 읽’는 일이 있을까?


  주제넘은 책읽기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주제넘은 일이나 주제넘은 삶이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은 으레 ‘욕심을 부렸다’ 하고 말하곤 하는데, 참말 사람들 스스로 ‘주제넘은’ 짓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누군가 ‘이런 책도 만들고 저런 책도 펴내고 싶었어요’ 하고 말한다면, 이 같은 책마을 일꾼은 ‘주제넘은’ 바보짓이 아닌, 스스로 하고픈 일을 하려는 마음, 곧 ‘꿈’을 꾸면서 ‘꿈을 이루려고 애쓴 땀방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른바 주제넘은 짓이라 한다면, 돈만 더 많이 벌어들일 생각으로 ‘어느 이름난 외국 작가 책을 선인세 십 억이나 십 몇 억을 주고 사들이는’ 짓쯤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려는 책마을 일꾼한테도 ‘꿈’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비록, 이녁 꿈이란 ‘돈을 더 벌기’라 하더라도, 돈을 버는 일도 꿈이라 할 만해요. 이러한 꿈을 좋게 바라보느냐 얄궂게 바라보느냐 안쓰러이 바라보느냐 기쁘게 바라보느냐 하는 대목이 다를 뿐이에요.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장만하는 일이나 읽는 일이나 주제넘은 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이웃이나 동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내 좋은 책마을 벗님들이 주제넘게 책을 만들거나 펴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꿈을 꾸면서 예쁘게 삶을 일굴 테지요. (4345.8.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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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진 2012.8
사진 편집부 엮음 / 월간사진출판사(월간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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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잡지 《월간 사진》 창간 46돌
 [책읽기 삶읽기 113] 《월간 사진》 535호(2012.8.)

 


  사진잡지 《월간 사진》 창간 46돌을 기리는 535호가 나왔습니다. 돌잔치야 해마다 돌아오니 딱히 남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온통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이 땅에서 종이책으로 나오는 사진잡지가 씩씩하게 한 살을 더 먹은 대목이 반갑고 어여쁩니다.


  사진잡지 《월간 사진》은 다달이 사진을 이야기합니다. 다달이 사진을 이야기하는 만큼, 아무래도 다달이 새로 마련된 사진잔치 소식을 많이 다룹니다. 달마다 새롭게 눈여겨볼 사진쟁이 삶과 발자취 이야기도 곱게 다룹니다. 잡지 끝에는 2012년 8월에 찾아갈 만한 사진잔치 소식을 그림 한 장으로 담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만 사진잔치 소식은 거의 서울 한 군데에 몰립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서울에 이것도 저것도 다 있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면 부산 소식이나 인천 소식을 곁들일 수 있겠지요. 조금 더 마음을 쓰면 대전이나 광주 소식을 얹을 수 있겠지요. 다른 지자체에서 꾀하는 사진잔치 이야기도 담을 만합니다. 다만 작은 마을 작은 사람 작은 이야기까지 손을 뻗지는 못해요. 사진잡지뿐 아니라 시사잡지도 이런 틀에서는 서로 매한가지예요. 일간신문이든 주간잡지이든 이런 테두리로 보면 서로 엇비슷해요.


.. 나의 사진 여정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진을 통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향한 굽이치는 길을 천천히 따라가며, 제 자신의 창조적인 과정을 믿는 느린 깨달음이라 생각합니다 ..  (레베카/79쪽)

 

 

 


  사진잡지 《월간 사진》을 펼칩니다. 여러 사진밭에서 저마다 다른 눈길로 예쁘게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습니다. 여러 사진밭 여러 갈래를 골고루 보여주니 반갑습니다. 나라밖 사진쟁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요즈음 눈길을 끄는 사진쟁이 이야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씩씩하게 다큐사진 한길 걷는 사진쟁이 이야기도 들여다봅니다. 새로 나오는 사진기 소식도 살펴봅니다. 사진기 만드는 회사는 해마다 새로운 사진기를 예쁘장하게 빚어서 내놓습니다. 참말 무척 많은 사람들이 새 사진기를 장만하면서 새 사진을 찍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새 사진기가 나올 까닭이 없을 테고, 사진잡지가 꾸준히 이어질 까닭이 없을 테지요.


.. 나한테 사진이란 ‘삶·사랑·사람’인 셈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예쁘게 돌아보는 길잡이가 되는 사진입니다. 내가 꿈꾸는 사랑을 착하게 되짚는 사진입니다. 내가 누리고픈 이야기를 즐겁게 함께 일구고픈 동무(사람)를 사귀는 사진입니다 ..  (최종규/97쪽)


  사진잡지를 엮는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무엇일까요. 작품사진이나 예술사진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무엇일까요. 책쟁이도 사진쟁이도 아니라 하면서 사진기를 장만해서 사진을 즐기는 여느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무엇일까요. 어린이한테, 푸름이한테, 어른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너무 마땅할 텐데, 시골 읍내나 면내에서 어깨에 사진기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을 못 봅니다. 시골 들판이나 멧골에서 사진기를 목에 걸고 일하는 사람을 못 봅니다.


  도시에서는 어깨나 목에 사진기를 건 사람을 으레 만납니다. 가방이나 주머니에 사진기를 챙기는 사람을 쉽게 만납니다.


  사진은 어디에서 찍나요. 사진은 무엇을 담나요. 사진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 사진과 아트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포토그래퍼에서 아티스트라고 바꾸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 우리 사진의 펀드멘탈(기초)이나 주제가 너무 약하다. 너무 국제화만 좇아가는 건 패배의식 때문이라고 본다 … 아마추어 안에서도 이론적 피라미드가 있어, 이것을 계속 올려줘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해 사진계는 무관심한 듯하다. 평론이란 행위는 결국 사진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전공자만의 놀음이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진동선/198쪽)

 

 


  삶이 예술인 사람이라면 사진도 예술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삶이 사랑인 사람이라면 사진도 사랑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 손에 연필이 있으면, 내 삶이 사랑일 때에 내 글 또한 사랑이 되겠지요. 내 손에 기타가 있으면, 내 삶이 예술일 때에 내 노래 또한 예술이 될 테지요.


  새벽 일찍 일어나 누런쌀을 씻어 불립니다. 오늘 하루 국거리와 반찬은 어떻게 할까 생각합니다. 빗방울 흩뿌리지 않으면 아이들과 천천히 멧길을 타고 오르는 일도 즐겁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기 앞서 내 눈이 그윽하게 바라보며 마음으로 담습니다. 마음으로 담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잡지 《월간 사진》은 사진을 얼마나 예쁘게 어루만지며 보여줄 만한 잡지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앞으로 마흔일곱 돌, 마흔여덟 돌, 마흔아홉 돌, 쉰 돌을 맞이할 때에는 어떠한 삶과 사랑을 어떠한 사진으로 그러모아 나눌 수 있을까요. (4345.8.11.흙.ㅎㄲㅅㄱ)

 


― 월간 사진 535호 (2012.8./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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