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 한자말 172 : 상불원천上不怨天 하불우인下不尤人


군자君者는 상불원천上不怨天이요 하불우인下不尤人이라,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했거늘
《이현주-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 14쪽

 

 

  한자말 ‘원망(怨望)’은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을 뜻합니다. 곧, 한국말로 하자면 “원망하지 않고”는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고”나 “미워하지 않고”인 셈이에요. 어떤 분들은 한자말 ‘원망’과 한국말 ‘미움’이 뜻이나 느낌이 다르다 이야기하지만, 두 낱말은 서로 다르지 않아요. 뜻이 같고 쓰임이 같아요. “원망의 눈초리”란 “미워하는 눈초리”요, “원망에 찬 얼굴”이란 “미움 가득한 얼굴”이며, “원망을 사다”는 “미움을 사다”예요.


  보기글에 나오는 ‘군자君子’는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어진이’로 옮길 만해요. ‘어진’ 사람이 모두 점잖거나 덕이나 학식이 높다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을 텐데, 한국말 ‘어진이’ 뜻을 붙이면서, 어진 사람 또는 점잖고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면 돼요. 한국말 쓰임새와 너비를 한국사람 스스로 넓힐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상불원천上不怨天이요 하불우인下不尤人이라 (x)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o)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보기글을 쓴 분은 먼저 중국글을 씁니다. 중국글을 쓰되, 중국글 앞에 한글로 소리값을 붙입니다. 이를테면, “생큐 베리 머치thank you very much”처럼 글을 쓴 셈이에요.


  누군가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참 고맙습니다”라 말하지 않고 “생큐 베리 머치thank you very much”처럼 쓸 때에는 무엇이 더 좋거나 낫거나 빛날까요. “생큐 베리 머치”라고 한글로 적는다 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지는 않아요. 이 영어가 흔한 영어라 중학생뿐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데어 워즈 시그니피컨트 리지스턴스 투 더 아이디어 오브 컬러 포토그래피there was significant resistance to the idea of color photography”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면 얼마나 잘 알아들을 만할까요. 아니,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국말로 말하지 않고 영어로 말하면서 소리값으로 한글을 덧다는 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글쓰기가 될까요.


  곧, 보기글을 쓴 분은 ‘중국글을 쓰면서 한글 소리값을 덧다는 일’을 할 노릇이 아닙니다. ‘중국글을 한국글로 알맞게 옮겨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애쓸 노릇이에요. “상불원천이요 하불우인이라”처럼 적어도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요. “上不怨天 下不尤人”처럼 적어도 뜻을 헤아리기 어렵겠지요. 굳이 이런 중국글을 쓰지 말고 “위로 하늘을 미워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라고만 적으면 돼요. 생각을 나누는 길을 슬기롭게 찾기를 빌어요. (4345.9.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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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이는 위로 하늘을 못마땅히 여기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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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생일 - 치히로 아트북 5, 0세부터 100세까지 함께 읽는 그림책
이와사키 치히로 글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흰눈 기다리는 어린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4] 이와사키 치히로, 《눈 오는 날의 생일》(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3)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그대로 있던 퍽 어릴 적,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참 좋아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은 ‘대설’이란 절기로, 한 해 스물네 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입니다. 옛날 옛적 사람들은 한겨레 글 아닌 중국사람 글로 적었으니까 ‘大雪’이라는 한자를 빌어 적었을 텐데, 한국말로 쉽게 고치면 ‘큰눈’이에요. ‘큰눈’에 태어났다니 얼마나 사랑받은 삶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다만, 나 태어난 날에 눈이 소담스레 내린 일은 아주 드물어요.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기 때문일 수 있는데, 도시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성탄절에 눈을 바랐다면, 나는 내가 태어난 날에 눈을 바랐어요. 그래야 비로소 내 생일답다고 여겼달까요.


  눈이 없는 나 태어난 날 으레 생각합니다. ‘쳇, 눈도 없으면서 큰눈 절기란 다 뭐람.’ 그러나, 스물네 절기란 도시사람을 헤아리는 때가 아니에요. 스물네 절기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을 헤아리는 때예요. 동지도 하지도, 경칩도 우수도, 모두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 삶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더 생각하면, 설날이나 한가위도 도시사람이 쇠라는 때는 아니에요.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흙과 마주하며 누리는 때예요.


.. 하룻밤만 더 자면 내 생일. 엄마 내가 태어난 날 눈이 왔다는 게 정말이야? 난 이제부터 다섯 살 촛불 다섯 개 한 번 만에 끌 테야 ..  (2쪽)


  개구리가 운다는 절기가 찾아오면 ‘어디에서 개구리가 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내가 살아가는 도시 어디에서 개구리가 깨어날는지, 아니 개구리가 겨울잠을 잘 만한 데가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흙땅을 파헤치거나 까뒤집어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바꾸는 마당에, 도시에서 개구리가 깃들 만한 데가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적에도, 달력에서 절기 이름을 보면, 오늘은 어떤 날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그러나, 집에서든 동네에서든 또 학교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절기를 따지거나 살피는 어른이나 동무는 없습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절기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살아가요. 날씨를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흔히 절기를 말하지만, 말만 할 뿐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곰곰이 살피면, 겨울잠 잘 흙땅도 사라졌지만, 풀숲도 못물도 사라졌어요. 논도 밭도 없는 도시이니, 개구리뿐 아니라 풀벌레도 살아갈 터가 없어요. 사람 말고는 다른 이웃 짐승이나 동무 벌레가 없어요. 사람 스스로 이웃을 없애고 동무를 버려요. 이와 같은 흐름에서는 절기라든지 날씨라든지 굳이 따지지 않아요. 사람들은 ‘매출’을 따져요.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따져요.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돈벌이’가 어느 만큼인가를 헤아릴 뿐인 도시예요. 삶이 어떠하고 사람이 어떠하며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대목은 헤아리지 않는 도시예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면서도 늘 이 대목이 꺼림칙합니다. 국민학교에서 월말고사를 치르고, 중·고등학교에서 중간고사·기말고사를 치를 적에 늘 절기를 떠올립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을 살피며, 해를 생각합니다. 집에서 학교로 오는 길에 본 나무들은 어떻게 밥을 얻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까 따집니다.


  시험을 치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젖으니, 아마 다른 동무보다 시험점수는 덜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생각에 젖을밖에 없습니다. 바깥바람을 생각하고 싶어요. 내 살결은 바깥바람이 조금씩 달라지는 줄 느끼거든요. 햇살을 떠올리고 싶어요. 내 살결은 햇살이 조금씩 바뀌는 흐름을 느끼거든요.


.. 안녕, 여기 선물 편지도 들어 있어 ..  (6쪽)

 

 


  가을을 맞이한 시골마을 햇살이 다릅니다. 여름하고 사뭇 다릅니다. 곰곰이 더 따지면 이른여름과 한여름과 늦여름에도 햇살은 저마다 달랐어요. 찬찬히 더 헤아리면 늦여름에도 첫째 주와 둘째 주와 셋째 주와 넷째 주 햇살이 서로서로 달랐어요. 첫째 주에도 첫째 날·둘재 날·셋째 날…… 햇살은 언제나 달랐어요.


  어느 사람한테든 같은 날이란 없어요. 어느 날 문득 ‘참 그렇네.’ 하고 깨닫고서는 학교에서 시험을 치른다며 점수를 따지는 일이 얼마나 안 대수로운가를 느낍니다. 교사들은 시험문제를 머리 낑낑대며 만듭니다. 교사들이 만든 시험문제를 우리들이 풉니다. 교사들은 우리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시험문제를 치러 얻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여느 때에는 ‘출석부 번호’로 우리를 바라보지만, 시험만 치르면 이내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시험점수가 높을 때에는 ‘높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시험점수가 낮을 때에는 ‘낮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는 어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몰라요. 교사라는 자리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른 눈썰미로 사랑하며 다 다른 꿈이 자라도록 다 다른 사랑을 따사롭게 나누는’ 자리답게 좋은 구실을 하지 못하거든요. 초·중·고등학교 모두 입시시험하고 얽힌 이야기만 나눠요. 한국말(국어)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든, 셈(수학)을 따지는 자리에서든, 삶(역사)을 돌아보는 자리에서든, 이웃나라(영어나 제2외국어)를 헤아리는 자리에서든, 착한 꿈(도덕)을 살피는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는 그저 ‘시험에 나오는가 아닌가’와 ‘시험에 나왔을 때에 점수를 딸 만한가 아닌가’라는 쳇바퀴에서 맴돕니다.


.. 별님 별님 엄마한테는 내일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정말은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내일 생일날에 새하얀 눈을 꼬옥 내려주세요 내가 태어난 날처럼요 ..  (21쪽)


  글을 쓰는 까닭이라면 내 삶을 사랑하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무한테 글월을 띄우는 까닭이라면 내 삶을 아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겨울날 큰눈 절기를 좋아하던 까닭이라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온마음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 눈과 함께 지구별 목숨으로 태어나 풀과 꽃과 나무를 누리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랑 하루하루 예쁘게 살림을 빚는다는 이야기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 눈 오는 생일 아침, 빨간 모자랑 빨간 장갑을 엄마한테서 받았지요 ..  (24쪽)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책 《눈 오는 날의 생일》(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3)을 읽습니다. 다섯 살을 꽉 채운 아이는 싱그럽게 웃으며 놉니다. 동무 생일에 놀러가고, 내 생일에 동무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만, 넋을 놓다가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가만가만 보면 아이들이니 흔히 저지를 만한 잘못이에요. 아이들로서는 잘못인 줄 모르는 채 잘못을 저질러요. 그냥 살아가는 나날이에요. 그저 마음껏 뛰고 걷고 날고 달리고 구르면서 씩씩하게 자라요.


  언제나 좋은 마음이 되어 이마에 땀을 송송 맺습니다. 늘 밝은 넋이 되어 등판에 땀이 줄줄 흐릅니다. 아이들은 뜀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달리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구르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배가 한참 고플 때까지 놉니다.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기운껏 놀아요. 힘껏 살아요. 흰눈 기다리는 어린이는 하얀 마음입니다. 맑은 빗물 기다리는 어린이는 맑은 마음입니다. 고운 햇살 기다리는 어린이는 고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른도 언제나 어린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산들바람이 불며 가을날 풀벌레 노랫소리를 이곳저곳 곱다시 실어 나릅니다. 너른 들판을 따라, 시원스런 냇물을 따라, 푸른 멧자락 숲을 따라, 가을노래는 이 땅 곳곳으로 천천히 울려퍼집니다. (4345.9.11.불.ㅎㄲㅅㄱ)

 


― 눈 오는 날의 생일 (이와사키 치히로 글·그림,임은정 옮김,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2003.12.1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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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풀빛,1984)을 다시 읽는다. 이 알쏭달쏭한 시집을 단숨에 다시 읽는다. 나는 《노동의 새벽》이라는 묵은 시집을 헌책방에서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곤 한다. 오윤 님 판화가 ‘질 다른 종이’로 붙을 뿐더러, 책날개에 찍히는 ‘풀빛 판화시선’ 알림글이 다르고, 책을 찍은 종이가 달라 두께가 달라지는데에도 웬만한 책은 모두 ‘초판’이기 일쑤이다. 《노동의 새벽》 2쇄나 3쇄나 중쇄를 만나기란 아주 힘들기에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의 새벽》을 어떻게 알았을까. 글쎄. 1991년에 《머리띠를 묶으며》(미래사)라는 시집이 나온 적 있다. 이무렵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인천 중구 인현동에 있는 〈대한서림〉에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을 보면서 한 권씩 사서 읽곤 했는데, 100인선집이라 하고서는 101번과 102번이 있었고, 102번으로 박노해 님 시집이 있어 퍽 재미있다고 여겼다. 백 사람을 골랐다면서 백둘째 사람이 있으니 아리송했지만, 어쨌든 나는 102번째 《머리띠를 묶으며》를 맨 처음으로 장만했고,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이 시집을 다 읽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곧잘 ‘소지품 검사’를 했기에, 이 시집을 가방에 챙겨 학교에 간 날은 몹시 조마조마했다. 가방에 챙겨 학교에 갔어도 교실에서는 섣불리 꺼내어 읽지 못했다. 학교로 가는 길, 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때에 비로소 책을 꺼내어 읽었다. 고등학생 때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겨를’조차 아깝다 여겨 책을 읽으며 살았다. 이때 이 시집을 몇 차례쯤 읽었을까. 스무 차례? 쉰 차례? 백 차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헌책방을 다닌다.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나 고등학교 3학년 봄 무렵에 《노동의 새벽》을 헌책방에서 만났지 싶다. “머리띠를 묶으며”라는 책이름만으로도 학교에 책을 들고 가기 두렵다고 여겼기에, “노동의 새벽” 같은 책이름으로는 자칫 소지품검사에 걸리면 크게 말썽이 생겨 학교에서 쫓겨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이 시집은 집에서도 꽁꽁 숨기며 읽었다. 다른 책 뒤에 몰래 숨겼다.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장만하던 날 가슴이 얼마나 벌렁벌렁 뛰었는지 모른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며 “학생, 가방 좀 봅시다.” 하고는 나를 붙잡을는지 모를 노릇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이 시집을 읽는데, 책등이 안 보이게 하며 읽으려고 몹시 애를 썼다.


  이제 2012년. 헌책방 어느 곳을 가더라도 《노동의 새벽》은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즈음 이 시집을 애써 들추거나 살펴서 읽으려고 하는 손길은 거의 없지 싶다. 알쏭달쏭한 간기(판권)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노동의 새벽》은 헌책방에서 ‘고서’ 대접조차 못 받는다. 헌책방에 많이 들어오더라도 사는 손길이 드물다며 애물단지라 일컫기까지 한다.


  큰 문방구를 찾아가야 하기에 고흥 읍내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간다. 큰 문방구를 들른 다음 순천 저전동 헌책방 〈형설서점〉에 들른다. 두 가지 판본 《노동의 새벽》이 보인다. 판본은 두 가지인데 간기는 ‘찍은 날’이 같다. 나는 소장품으로 살 마음이 아니라 읽을 책으로 살 마음이기에 조금 더 깨끗한 책으로 고른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거리낌없이 시집을 펼친다.


  문득 생각한다. 고흥에서 자라다가 학교는 중학교도 미처 끝마치지 못한 채 열다섯 나이로 서울 어느 공장에 공돌이로 떠나야 하던 넋이 있는데, 이 넋이 빚은 빛글 한 자락이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간다. 순천을 떠난 시외버스는 벌교를 지나고 동강과 남양을 지나 과역에 선다. 과역을 다시 떠나 점암을 스치며 고흥읍에 닿는다. 나는 고흥읍에서 택시를 불러 포두를 지나고 도화로 들어선다. 내 사랑스러운 살붙이들이 기다리는 동백마을로 돌아온다.


  집에서 아이들은 늦게까지 잠들려 하지 않는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두 아이가 하나씩 곯아떨어진다. 너희들은 참말 대단하구나. 아니, 너희들은 참말 놀려고 이 땅에 태어났구나. 아니, 너희들은 이 좋은 어린 날 끝없이 놀고 뛰고 달리고 날아야 비로소 가장 빛나는 목숨이로구나.


  고등학생 때 박노해 님 시를 읽으며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나는 이 나이에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 시집을 손에 쥐었다는 까닭 하나로 학교에서 쫓겨날까 벌벌 떠는데, 그러면서 마음 한켠으로는 학교에서 쫓겨나 이 숨막히는 제도권 울타리에서 홀가분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학교 교칙으로는 ‘불온도서’로 손꼽히는 박노해 시집을 일부러 가방에 자주 챙겨서 갖고 다니며 읽는데, 이런 내 나이에 공장에서 공돌이로 일하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내가 열일곱 나이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아닌 공돌이 ‘3년차’라 한다면 어떤 나날을 살아갈 수 있을까, 더없이 궁금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면서, 신문사지국 한쪽에 드러누워 《노동의 새벽》을 숱하게 다시 읽는다. 바야흐로 나도 신문배달 ‘일꾼(노동자)’ 마음으로 시를 마주한다. 신문배달을 하는 마음을 시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하고 헤아려 본다. 이러던 1998년, 무기징역수로 감옥에서 옴쭉달싹 못하던 박노해 님이 풀려난다. 이른바 ‘사상전향서’를 쓰고 감옥에서 풀려났으니 변절을 했다느니 몹쓸 사람이 되었다느니 하는 손가락질이 곳곳에서 솟구쳤다. 학생운동을 하는 동무나 후배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소리를 곁에서 듣는다. 나는 내 동무와 후배한테 시집을 한 권씩 사서 선물해 주었다. 대학교 둘레 헌책방 책시렁에 아무렇게나 꽂힌 채 찾아 주는 손길 없던 《노동의 새벽》을 삭삭 훑듯 모조리 사들여 선물한다. “얘들아, 우리 이 시집을 읽어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응?”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머리띠를 묶으며》나 《노동의 새벽》을 나한테서 빌려 읽으려 하던 동무는 딱 하나 있었다. 다른 동무들은 ‘무서워’ 하며 아예 못 본 척하거나 고개를 홱 돌리곤 했다. 대학교에서는 학생운동을 하건 문학을 하건 뭐를 하건 시집을 읽으려는 벗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나를 잘 따르던 후배 몇은 내가 내미는 시집을 받아들고는 머리를 낑낑거리기는 하되, 이 시들이 무얼 말하는지를 하나도 못 느끼겠다고 했다. 삶이 달라 시를 못 읽을까. 생각이 없어 시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박노해’ 이름을 넣어 살핀다. “《머리띠를 묶으며》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사회 제도와 이념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투쟁적이고 선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수필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에는 생명과 포용과 화해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성과 정치성을 겸비한 대표적 노동자 시인으로 일컬어져 왔으나,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 그의 세계관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같은 대목을 읽는다. 그런데, 인터넷 백과사전을 엮은 이는 박노해 님 시를 읽기는 읽었을까. 시집 《노동의 새벽》이나 《머리띠를 묶으며》가 ‘선동’하는 시이거나 ‘저항’하는 시이거나 ‘투쟁’하는 시일까.


  곰곰이 돌이키니, 내 둘레에서 오직 한 사람만 박노해 님 시집을 읽고는 ‘사랑’을 노래한다고 말했다. 그래, 맞아, 박노해 님 시는 ‘사랑’을 말해. 투쟁도 혁명도 파업도 분노도 저항도 아니야. 사랑이야.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하는 노래는, 그래 노래는, 그예 사랑이야. “네가 손꼽아 기다리며 동그라미 쳐논 / 빨간 휴일날 아빠는 특근을 간다.” 하는 노래는, 온통 사랑이야.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 헛되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하는 노래는, 그야말로 사랑이야.


  삶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했기에 시를 쓸 수 있겠지. 감옥에서 풀려난 뒤 오래도록 입을 꾹 닫고 슬프게 살다가, 레바논도 아체도 이라크도 찾아다니면서 눈물바람이 되었기에 비로소 다시 시를 쓸 기운을 찾았겠지. 일하는 사람들한테 새벽은 쓰린 찬소주와 같이 고달프지만, 사랑을 생각하며 다시금 기운을 내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새 햇살이야. (4345.9.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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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호종이문에 붙이는 사진

 


  창호종이로 바르는 나무문살문에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숭숭 뻥뻥 뚫는다. 종이를 모두 벗겨 새로 발라야 하는데, 이 시골집으로 들어온 지 한 해가 되도록 좀처럼 새로 바르지 못하고 그냥 둔다. 다시 가을이 찾아들어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데 이대로 둘 수 없는 노릇이라, 집 곳곳에 많이 있는 아이들 사진을 붙이기로 한다. 그래, 이 사진을 상자에 넣고 간수하기보다는 이렇게 문에 붙이고 언제나 들여다볼 때에 더 좋겠지. 바람도 막고 보기에도 좋으며 언제나 너희들 예쁜 모습을 되새기도록 이끌겠지. 그나저나 사진은 떼지 않기를 빈다. 빈자리에 그림을 그리더라도 사진은 건드리지 말아 다오. (4345.9.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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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9-11 02:39   좋아요 0 | URL
오~ 구멍 숭숭 뚫린 문종이에 아이들 사진 붙이는 거 좋은 생각인데요.^^

파란놀 2012-09-11 19:13   좋아요 0 | URL
음... 그저 '땜질'이라고 할까요 ^^;;;;;;;;;
 
닐스의 신기한 여행 1 - 클래식 라이브러리 1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배인섭 옮김 / 오즈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꿈을 꾸기에 꿈을 이루는 삶
 [어린이책 읽는 삶 24] 셀마 라게를뢰프, 《닐스의 신기한 여행 (1)》(오즈북스,2006)

 


- 책이름 : 닐스의 신기한 여행 1
- 글 : 셀마 라게를뢰프
- 옮긴이 : 배인섭
- 펴낸곳 : 오즈북스 (2006.10.30.)
- 책값 : 9000원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꾸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꿈을 꾸는 그 자리에서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꿈을 이루기까지 퍽 오랜 나날을 들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이루지만, 꿈을 안 꾸는 사람은 꿈을 안 이룹니다.


  꿈을 꿀 때에는 가장 맑으며 가장 빛나는 넋이어야 합니다. 가장 환한 사랑으로 살아가며 가장 너른 믿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면서 믿고,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고운 사랑은 꿈을 이루도록 이끄는 밑거름이요, 너른 믿음은 꿈을 즐기도록 북돋우는 밑바탕입니다.


..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을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와는 다른 걱정을 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아이가 너무 거칠고 버릇이 없는데다가, 동물들에게 냉혹하고, 사람들에게 못되게 군다는 것이었다. “아, 신께서 아이의 나쁜 마음을 몰아내고 다른 마음을 선물해 주셨으면!” … “내 뿔 위에 올라타고 놀아 보게 해 줄게.” “와 보라니까, 와 보라고. 네가 던진 나막신으로 등을 맞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너도 한 번 제대로 맛봐야지!” … “그 수많은 못돼 먹은 일들에 대해서 단단히 보상을 해 줄 테니까. 너를 걱정하면서 네 엄마가 숱하게 흘렸던 눈물에 대해서도.” ..  (19∼20, 33쪽)


  이른새벽에 누런쌀을 씻어 불립니다. 이른새벽에 누런쌀을 씻어 불려야 비로소 아침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흰쌀이라면 몇 차례 스윽스윽 씻고 나서 곧바로 물을 맞추고 안칠 수 있겠지요. 누런쌀은 잘 불 때까지 제법 기다려야 합니다. 일찌감치 하루를 열며 식구들 맛나게 먹을 밥을 생각해야 합니다.


  쌀을 씻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새벽마다 쌀을 씻는가 하고. 나는 왜 날마다 식구들 밥을 차리고 집일을 도맡는가 하고.


  엊저녁 미룬 설거지를 마칩니다. 오늘 할 빨래가 얼마쯤 되는가 가늠합니다. 이러는 동안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나는 어린 나날부터 ‘집일을 즐겁게 도맡으며 살림을 꾸리는 아버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어요. 내 둘레 어른들 누구나 어머니나 아줌마한테만 모든 집일을 맡기는 아버지나 아저씨였어요. 내 또래 또한 가시내가 집일을 해야 하고 사내는 집일을 안 건드려야 하는 줄 여겼어요. 사촌동생들은 사내이고 가시내이고 아예 집일을 모를 뿐더러 하지 않았어요.


  나는 이 모습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느꼈어요. 집일을 안 하거나 부엌일하고 등을 지는 사내라면 사내 구실을 못 하는 셈이라고, 아니 사람 구실을 안 하는 셈이라고 느꼈어요. 사내라면, 또 가시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스스로 먹고 입고 잠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가누거나 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 닐스는 밝은 녹색의 사각형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것은 지난해 가을 파종한 호밀밭이었다. 겨울 동안 눈에 덮인 채로 녹색으로 자라난 것이었다 … 닐스는 스코네에 대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날 단 하루 만에 볼 수 있었다 … 작은 다람쥐도 자기 집에서 도토리를 꺼내서는 가지 위에 앉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찌르레기가 수염뿌리를 물고 날아갔고, 검은방울새는 나무 꼭대기에서 노래했다. 그때 닐스는 해가 이 모든 작은 생명체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깨어나라, 그리고 너희들의 집에서 나와라. 내가 여기 왔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39, 42, 66쪽)


  꿈이란 스스로 꾸는 대로 이룹니다.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슬프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즐겁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아프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에 살포시 품으면, 이 꿈은 어느 날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꿈을 품는 사람은 스스로 품는 꿈이 어느 길로 나아가는가를 언제나 돌아봅니다. 꿈을 품는 사람은 꿈이 이루어질 길을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살아가며 하나둘 깨닫는데, 꿈이 있기에 사람들 누구나 목숨을 이어요. 꿈을 생각하기에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해요. 꿈을 천천히 이루기에 내 삶은 내가 마음에 담은 모양대로 가만히 빛을 내요.


  셀마 라게를뢰프 님이 쓴 《닐스의 신기한 여행》(오즈북스,2006) 첫째 권을 읽으며 낱낱이 느낍니다.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닐스’는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합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벗어나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못난 짓을 일삼는 닐스는 스스로 참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꿈대로 이루어집니다. 집요정을 괴롭히다가 바야흐로 ‘집요정처럼 자그마한 사람’으로 바뀌어요. 흰거위랑 집을 떠나 멀리멀리 하늘을 날면서 온누리를 떠돌아요.


.. 기러기들은 길들여진 기러기들이 자기들의 말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아래로 내려가 소리쳤다. “함께 가자. 그러면 너희들도 날고 헤엄치는 법을 배우고 싶어질 거야.” 그러나 길들여진 기러기들은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몇 마디 중얼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기러기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자꾸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배고프고 추울 것이다, 당연하다. 닐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일하지 않아도 되고,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 닐스는 자신이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것들과 경험하게 될 모든 모험들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집에서 일이나 하면서 이런저런 욕이나 먹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아, 기러기들의 여행에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몸이 변한 것이 하나도 괴롭지 않을 텐데!’ ..  (43, 93, 94쪽)


  세 권으로 나누어 옮겨진 《닐스의 신기한 여행》 첫째 권에서 닐스는 아직 ‘스스로 꿈꾸었기에 이루어진 삶’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다만, 닐스한테 찾아온 ‘집요정처럼 자그마한 사람’이 된 삶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러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렇게 살며 무언가 새롭게 배워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리하여 닐스한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이제껏 짐승들을 괴롭히거나 들볶던 짓이 어떠한 바보짓인가를 몸소 느낍니다. 짐승과 벌레와 풀과 해와 바람과 구름이 들려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람쥐하고도 여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러기나 황새나 거위 등에 업힌 채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구별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이웃과 동무와 어버이를 새로운 눈으로 마주합니다.


  아, 그래요. 닐스는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닐스는 철부지 어린이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씩씩하며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날마다 개구진 짓으로 말썽을 부리는 바보가 아닌, 언제나 맑게 웃고 환하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맑게 웃는 삶을 누리고 싶기에 기러기들과 먼 길을 돌아다니며 ‘맑음’과 ‘웃음’이 무엇인가를 몸소 겪습니다. 환하게 노래하는 아름다움을 빛내고 싶기에 여러 들짐승을 도와주면서 ‘환함’과 ‘노래’가 무엇이요, ‘아름다움’을 어떻게 읽는가를 몸소 익힙니다.


.. (기러기 우두머리) 아카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다람쥐, 토끼, 피리새, 박새, 딱따구리, 종달새 같은 숲과 들판의 작은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해 봐. 그들과 친구가 되면 위험을 미리 알려주고, 숨을 곳을 일러 주고, 아주 위급한 경우에는 너를 보호해 주려고 함께 힘을 합칠 거야.” … 처음 쿨라베리에 온 모든 동물들은 왜 이 축제를 두루미 대무도회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춤에는 야성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달콤한 동경이 감정을 일깨웠다. 이 순간 싸움을 생각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었다 … ‘어떻게 아카, 이크시, 카크시, 그리고 모르텐 같은 새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새들에게 총을 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아무 생각도 없단 말인가?’ ..  (96, 137, 185쪽)


  닐스한테는 마땅한 스승이 아직 없었습니다. 뭐랄까, 닐스한테는 좋은 동무조차 아직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닐스는 닐스 스스로 마땅한 스승이 되지 않았고, 닐스는 닐스 스스로 좋은 동무가 되지 않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스승이 되고 스스로 동무가 돼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삶을 가르치는 스승이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동무예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이면서 어버이와 함께 노는 동무예요. 그런데 닐스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닐스 스스로도, 또 닐스 어버이도, 또 닐스 둘레 동무들도, 서로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모두들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지 못했어요. 모두들 삶을 사랑스레 껴안지 않았어요. 모두들 삶을 꾸밈없이 마주하지 못했어요. 모두들 삶을 아름답게 어깨동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닐스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닐스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닐스는 꿈을 꾸어야 했고, 꿈을 누려야 했으며, 꿈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 “한 번이라도 저녁에 덤불 속에서 들려오는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기 암벽가에 앉아 저기 저 너머 칼마르 해협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섬이 다른 섬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생겨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 “그렇다고 너희들이나 농부들도 어쩌지 못했던 그 여우들을 설마 나처럼 작고 힘없는 꼬마가 물리쳐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작고 똑똑한 이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숫양이 대답했다 … ‘좋아, 이제 너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너 자신뿐이야, 닐스 홀게르손!’ 닐스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제 네가 야생의 세계에서 보낸 몇 주일 동안 무언가 배웠다는 것을 증명해 봐야 해.’ ..  (208, 227, 271쪽)


  내가 꿈을 꾸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꿈을 꾸는 아이들로 살아갑니다. 내가 좋은 사랑을 빚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좋은 사랑을 빚는 아이들로 살아갑니다. 내가 곱게 노래하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곱게 노래하는 아이들로 살아가요.


  내가 스스로 울타리에 갇힌 바보짓을 한다면, 아이들도 제 어버이한테서 울타리에 갇힌 바보짓을 물려받습니다. 내가 스스로 쳇바퀴를 맴도는 얼간이 꼴을 한다면, 아이들도 제 어버이한테서 쳇바퀴를 맴도는 얼간이 꼴을 이어받습니다.


  환히 웃으며 부엌일을 하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은 환히 웃으며 부엌일을 하는 즐거움을 천천히 물려받습니다. 신나게 노래하며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노래하며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는 재미를 찬찬히 이어받습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빛을 나누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이 빛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사랑을 빚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이 사랑이 더없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꿈을 기쁘게 이루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바야흐로 이 꿈을 꾸면서 아이 깜냥껏 새로운 삶을 엽니다.


.. 닐스 홀게르손은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이 도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뒷골목의 예쁜 집들도 보지 못했다. 검정색 담장과 하얀색 모퉁이, 그리고 번쩍이는 창틀 아래로 빨간 화분받침이 있는 자그마한 집들이었다. 울긋불긋 꽃들이 활짝 피어난 정원과 덩굴로 뒤덮여 있는 폐허의 놀라운 아름다움도 스쳐 지나고 말았다 … 부모들은 모두 이렇게도 간절하게 자기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닐스는 여태껏 그런 줄을 몰랐다. 아니, 아이들이 곁에 없다고, 자신의 삶이 끝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단 말인가! … “어디로 가고 있니? 어디로 가고 있니?”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책도 숙제도 없는 곳으로!” 닐스가 소리쳤다. “오, 우리도 데리고 가 줘! 우리도 데리고 가라고!”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올해는 안 돼. 내년에 보자!” ..  (248, 307, 316쪽)


  가을비가 내립니다. 여러 날 잇달아 내리는 가을비는 나한테 가을비 노랫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을비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가을비 빛깔이 알록달록합니다.


  가을비를 마주하며 가을빛을 느끼는 나라면, 나를 어버이로 삼으며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가을빛을 느끼는 가슴을 물려받아 키웁니다. 가을비를 마주하며 가을빛을 안 느끼거나 못 느끼는 나라면, 나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빗소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가을비가 지붕을 적십니다. 가을비가 도랑을 타고 흐릅니다. 가을비가 후박나무를 적십니다. 가을비가 들판을 덮습니다.


  가을비 맞은 잎사귀는 더 짙게 푸른 빛깔입니다. 가을비 내리는 하늘은 더 하얗고 더 파랗습니다. 가을비 찾아드는 날은 더 선선하고 서늘합니다. 가을비 노랫소리 굵어질수록 들새나 멧새나 풀벌레 노랫소리는 조용히 잦아듭니다.


  불현듯 봄비를 생각합니다. 여름비와 겨울비를 생각합니다. 철마다 다른 이 빗소리는 내 삶에 어떤 무늬로 아로새길까 궁금합니다. 날마다 다른 이 빗물결은 내 넋에 어떤 결로 스며들까 궁금합니다.


  가을비는 나한테 무엇을 가르치려고 찾아올까요. 나는 무엇을 배우고 싶어 가을비를 부를까요. 가을은 나한테 무엇을 보여주려고 찾아올까요.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싶어 가을을 부를까요.
  어버이는 아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가요. 아이는 어버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가요. 어버이는 아이를 어떤 목소리로 부르는가요. 아이는 어버이를 어떤 목소리로 부르는가요.


.. 나무들은 아직 완전히 초록색 옷을 차려입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파릇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웅덩이마다 가득 물이 차올랐고,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머위꽃이 활짝 피어났다 … 전혀 질서와 규칙이 없었지만 토끼들의 놀이는 숨이 가빠질 정도로 큰 흥분을 안겨 주었다. 이제 봄이 온 것이다. 재미와 기쁨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온다. 곧 생명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 첫 번째 봄비가 대지를 후두둑 두드리는 순간, 나무와 초원 위의 모든 작은 새들은 기쁨의 지저귐을 토해 냈다 … 기러기들은 길고 좁다란 그 도시 위를 날아갔다. 여기서도 기러기들은 도시 밖의 교외 지역에서 그랬듯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도시 안으로 들어오니 한참 동안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멈추어 서서 기러기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  (20, 132∼133, 139, 314쪽)


  꿈을 꾸기에 꿈을 이루는 삶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꿈을 꾸기에 즐겁게 이루는 삶을 생각합니다. 바보스레 꿈을 내팽개치기에 바보스레 삶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어리석게 꿈을 짓밟기에 어리석게 삶을 짓밟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다 하는데, 밥이란 꿈이 깃든 먹을거리입니다. 밥이란 사랑이 담긴 먹을거리입니다. 꿈과 사랑이 깃들지 않은 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를 숫자로 늘릴’ 수는 있되, 삶을 빛내는 목숨을 아름다이 누릴 수는 없습니다. 아름답게 빛내는 삶을 누리려고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버는 나날입니다. 은행계좌 숫자를 늘리려고 돈을 버는 나날일 수 없습니다. 연금도 보험도 부질없습니다. 연금이 있어야 할 삶이라 생각하니까 연금을 부어야 합니다. 보험이 있어야 할 삶이라 생각하기에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을 생각하는 삶이라면 사랑을 스스로 빚을 뿐 아니라, 내 둘레 벗님들이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꿈을 꾸는 삶이라면 꿈을 즐겁게 이룰 뿐 아니라, 내 좋은 살붙이들 모두 스스로 꿈을 즐겁게 꾸며 이루도록 북돋웁니다.


  닐스 홀게르손은 날마다 새로운 곳을 날아다니고 새로운 삶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아이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사랑을 빛내고, 새로운 믿음을 가꾸며, 새로운 생각을 갈고닦습니다. 《닐스의 신기한 여행》 첫째 권이 끝날 무렵, 닐스는 아주 놀랍도록 멋스러운 슬기 한 자락을 스스로 빚어 가슴으로 품습니다. (4345.9.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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