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네는 ‘작은’ 것만 쓰나

 


  열아홉 살에 처음 글쓰기를 했고, 이제 서른아홉 살을 살아간다. 열아홉 살에 처음 하던 글쓰기를 돌이켜보면, 늘 ‘큰’ 것을 좇았다. 스물다섯 살 될 무렵, 내 삶을 따스하게 바라보아 주는 어느 분이 ‘큰’ 것은 내려놓으라고 넌지시 이야기해 준다. 며칠 아니 사흘 아니 이틀 아니 꼭 하루 생각했다. “왜요? 큰 것을 말해야지요?” 하는 목소리 나오려다가 하루 사이에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서른 살에 모든 신문을 끊는다. 서른 살부터 아무 신문도 읽지 않는다. 이제 서른 살쯤 되고서야 비로소 ‘작은’ 것을 참말 작게 글쓰기로 담는 눈길을 조금 연다.


  곰곰이 돌아보면, 내가 글쓰기를 열아홉 살에 할 수 있던 까닭은, 내 둘레에 있던 ‘큰’ 것 가운데 텔레비전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열아홉 살부터 텔레비전을 안 보았기에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스물다섯 살에 ㅈㅈㄷ신문을 모두 끊으며, 시나브로 내 삶길에서 붙잡을 글쓰기를 헤아릴 수 있었다. 서른 살에 다른 모든 신문 아낌없이 끊으며, 작은 것을 쓰는 삶길 바라볼 수 있었다. 다만, 바라보기는 하되, 아직 사랑하지는 못했다.


  서른네 살 무렵, 큰 것을 살짝 건드리다가 그만 살림 쫄딱 무너질 뻔했다. 서른아홉 살 된 오늘, 나는 맨 처음부터 작은 것 아니고서는 글쓰기를 할 수 없던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작은 것 쓰는 사람이 되려고, 지난 스무 해를 살았을까. 이제부터 작은 것 조곤조곤 쓰는 길 신나게 걷자며 지난 스무 해 있었을까.


  날마다 작은 것 사랑하며 작은 것 노래하고 작은 것 이야기하는 글을 쓰는데, 틈틈이 나더러 작은 것 이제는 그만 쓰고 큰 것 쓰라 하는 사람 있다. 나쁜 뜻 아닌 참 좋은 뜻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런데, 나는 작은 것이 참 좋다. 나한테는 작은 것이 꼭 걸맞는다. 작은 것을 말해도 얼마든지 큰 것을 빗댈 수 있기도 하고, 작은 것을 말하면서 지구별 이웃하고 사귈 수 있다. 작은 것을 말하면서 어느 결에 먼먼 옛날 옛적 내 한아비를 떠올리기도 한다. 작은 것을 말하던 어느 날, 아하 하면서 내 어머니 어린 나날을 그리고 내 어머니 나와 형을 낳아 돌보던 모습을 되새긴다.


  큰 것을 쓰면서도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 젊은 나날이나 어린 나날 헤아려 볼 수 있을까. 큰 것을 쓰다가도 우리 형 어린 나날이나 우리 옆지기 어린 나날 돌아볼 수 있을까. 아무렴, 하려면 할 수 있으리라. 큰 것을 쓰는 동안 우리 아이들하고 싱그럽게 웃으며 놀 수 있겠지. 아무렴, 하고프면 할 수 있을 테지.


  큰 신문사에서 기자를 할 수 있었고, 큰 신문사에서 큰 이름과 큰 돈과 큰 힘 거머쥘 수 있었다. 시골자락 시골사람으로 지내는 오늘 되돌아보면, 큰 신문사와 큰 기자와 큰 글쟁이 안 된 대목이 바로 내 오늘 일구는 사랑스러운 밑거름 되었다고 느낀다. 큰 글을 썼다면, 글을 쓰다가도 아이들 오줌기저귀를 간다든지 똥바지 갈아입히고 손빨래 한다든지, 하루 두 끼니 밥 차리느라 글쓰기 젖힌다든지, 아이들과 놀고 시골도서관 꾸리면서 헐레벌떡 하루하루 눈알 핑핑 돌아가는 나날 보낼 수 없었으리라. 큰 글을 썼다면, 자전거마실 누리며 두 아이 자전거수레와 샛자전거에 태우며 봄들 여름숲 가을메 겨울시골 즐기지 못했으리라. 큰 글을 썼다면, 우리 옆지기는 나랑 두 아이 시골집에 두고 스무 날 남짓 혼자 미국까지 공부하러 다녀오지 못했겠지. 큰 글을 썼다면, 그야말로 반쪽이조차 아닌 반반쪽이나 반반반쪽이마냥 서울에 남아 시골자락 숲지기 삶은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는 문자중독자 되었으리라 느낀다.


  작은 글 보듬으며 달빛 누린다. 작은 글 어루만지며 풀잎노래 듣는다. 작은 글 쓰다듬으며 제비똥 바라본다. 작은 글 얼싸안으며 쑥 뜯으며 쑥국 끓인다. 우리 아버지 오랜 글동무이자 동시와 동화 꾸준히 쓰는 고향동네 어르신이 몇 해 앞서 막걸리 한 사발 나한테 따라 주며 들려준 말, “왜 자네는 작은 것만 쓰나?” 하는 물음에 오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 한 자락 들려줄 수 있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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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12 10:54   좋아요 0 | URL
'작은 것이 아름답다'.-*^^*

파란놀 2013-04-12 11:42   좋아요 0 | URL
'살아가는 이야기(일상)'는 작은 것이라서
삶 이야기를 쓰면
'문학이 안 된다'고들 말하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저는 문학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책꽂이 깊이

 


  책꽂이는 깊다. 책을 꽂으니,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책 하나마다 사람들 오랜 삶과 꿈과 사랑이 깃들기에, 책꽂이는 깊다. 책꽂이는 깊다. 손을 뻗어 책 하나 쥐면, 책마다 내 눈길 틔우고 내 마음 열어젖히는 이야기 쏟아지니, 참말 책꽂이는 깊다.


  책방에 서면, 맨 먼저 책방 일꾼한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다음으로 책꽂이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책방에 서면, 책꽂이마다 가득한 책을 손으로 쥐면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 골마루와 책방이 좁아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헌책방 책꽂이를 만진다. 밑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빼곡할 뿐 아니라 책탑 잔뜩 쌓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며 비로소 책을 읽는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책을 읽자면 외려 목아지 아프고 책 든 손 저리기 때문이 아니다.


  고개를 숙이니 헌책방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니 책꽂이가 환하게 보이며, 고개를 숙이니 책마다 서린 아름다운 사랑이 해맑게 보인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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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 손문상이 그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속살
손문상 지음 / 우리교육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32

 


내 살가운 이웃을
― 얼굴
 손문상 글·그림
 우리교육 펴냄,2005.8.25./12000원

 


  손문상 님이 사람들 ‘얼굴’을 그려 어느 매체에 실은 뒤, 이 그림을 그러모아 낸 만화책이랄지 그림책이랄지, 《얼굴》(우리교육,2005)이라는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강우근 님이 쓴 글과 그린 그림이 떠오릅니다. 강우근 님은 서울에서 지내며 꽃 그림을 그렸어도 장미나 튤립 같은 꽃이 아닌, 조그맣고 씩씩한 들꽃 그림을 그렸어요. 강우근 님은 이녁 곁에 있는 가장 가깝고 살가운 풀과 꽃을 바라보았어요.


  손문상 님 얼굴그림에도 들꽃 같은 사람들 모습이 더 자주 나왔으면 하고 헤아려 봅니다. 다만, 매화꽃 같은, 배꽃 같은, 모과꽃 같은, 동백꽃 같은, 배롱꽃 같은, 수선화 같은, 함박꽃 같은, 이런저런 아름다운 사람들 얼굴그림도 그릴 만해요. 이를테면 지율 스님 얼굴그림은 함박꽃 같다고 할까요.


  사진을 놓고 얼굴그림 그리기보다는, 손문상 님 살아가는 마을에서 이웃집 아재를 곧바로 종이 펼쳐서 그리면서 막걸리 한 잔 나누면 이야기 사뭇 달라졌으리라 생각해요. 옆집 아지매하고 국수 한 그릇 함께 말아먹으며 종이 펼쳐서 그림 그렸으면 이야기 또 달라졌으리라 생각해요.


  이야기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얼굴을 그리더라도 샘솟아요. 꼭, 김대중 전두환 같은 사람들 얼굴을 그려야 이야기를 빚을 수 있지 않아요.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동네 어린이를 그리면서도 임수혁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꽃피우는 얼굴그림으로 살포시 거듭난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가까운 곁을 바라봐요. 손문상 님 곁에서 살가이 웃는 살붙이를 바라봐요. 언론에 높이 이름 오르내리는 사람들 바라보아도 이런저런 이야기 나올 텐데, 손문상 님 지내는 마을 중학교 가시내 바라보며 그림을 담아도 효순이와 미선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답니다.


  더 낮게 내려오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바로 내 곁을 바라보자는 소리예요. 내 곁부터 바라보며, 이웃이 누구인가를 느끼자는 소리예요.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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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1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호석님의 얼굴 그림이 참, 좋아요.^^
문득 저는 무슨 꽃같은 얼굴일까, 생각해보니..'쥐똥나무꽃'아닐까? ^^
작지만 보이지 않는 향기가 지나가는 이들의 코를 적시는..^^;;;
음 오늘은 사랑하는 이들과 나의 얼굴은 무슨 꽃을 닮았나, 즐겁게 생각해봐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함께살기님!

파란놀 2013-04-12 11:43   좋아요 0 | URL
콩배나무 꽃도 좋아요.
곧 콩배나무 꽃 보여드릴게요~
 
똥개가 잘 사는 법 - 김응 동시집
김응 지음, 박정섭 그림 / 창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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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12

 


동시를 왜 쓰는가
― 똥개가 잘 사는 법
 김응 글,박정섭 그림
 창비 펴냄,2012.12.31./8500원

 


  ‘주례사 비평’이라는 이름을 어느 분이 처음 꺼냈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이 ‘주례사 비평’이라는 이름은 으레 어른문학에서 오르내렸습니다. 어린이문학에서는 좀처럼 이 이름이 오르내리지 못했습니다. 한때 딱 한 사람, 이오덕 님 홀로 ‘주례사 비평 비판’을 했으나, 이제 어린이문학에서 ‘주례사 비평 비판’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분들은 거의 모두 ‘주례사 비평’을 하면서, 이 나라 동시문학을 깊거나 넓게 다스리는 길에 한몫 거드는 구실을 못 하거나 안 하는구나 싶습니다.


  김응 님 동시집 《똥개가 잘 사는 법》(창비,2012)을 읽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들려주며 즐겁게 놀 만한 싯노래는 따로 없구나 싶어 살며시 덮습니다. 책을 덮기 앞서 책끝에 붙은 어린이문학 평론가 김제곤 님 글을 읽어 봅니다. 김제곤 님은 이 동시집을 놓고 “시인은 스스로 창안해 낸 이야기를 자신만의 속도감 있고 자연스러운 호흡에 실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시’를 만들어 내지요.” 하고 말합니다. 이 동시집이 ‘이야기시’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동시이고 어른시이고 이야기 없는 시가 있는가요? 이야기가 없이 시가 태어날 수 있나요? ‘이야기산문’이나 ‘이야기소설’이 있는가요? 이런 말마디는 문학평론 아닌 말장난 아닌지요? 모든 동시와 어른시는 이야기 아닌가요? 이야기가 없으면 시가 아닌데, ‘이야기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요?


  어느 동시인이든 어른시인이든 ‘이녁 이야기를 이녁 목소리에 따라 빚’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담아 동시를 쓰거나 어른시를 쓰지요. 내 이웃은 내 이웃인 이녁 이야기를 이녁 목소리로 담아 동시를 쓰거나 어른시를 써요. 스스로 제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펼치지 못한다면 시도 문학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다도 아니고, 그저 혼잣말이라 할밖에 없어요.


  어른문학이든 어린이문학이든, 문학평론을 하면서 ‘이야기시’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너무 덧없습니다. 평론가 스스로 동시 하나를 놓고 할 말이 없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김제곤 님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김응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말솜씨 또한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의 시에 쓰인 ‘한 바퀴 돌고 또 돌고’ 같은 제목도 재미있지만, 가족끼리 쓰는 호칭을 죽 나열하다가 ‘이러다 지구 한 바퀴 다 돌겠네’ 하고 눙치는 솜씨가 제법 웃음을 줍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동시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동시를 쓰듯, 다 다른 사람들은 동시 하나를 두고도 다 다르게 읽겠지요.


  나는 ‘식구와 친척 일컫는 온갖 부름말’을 읊는 동시가 따분했습니다. 우리 겨레한테는 이런저런 부름말이 따로 없었어요. 촌수를 따지는 일은 양반이나 권력자가 하던 일이지, 여느 흙사람은 이런 촌수 없어요.


  조금만 헤아려도 알 수 있어요. 개화기 언저리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고, 갑작스레 촌수이니 호칭이니 하면서 퍼져요. 신문사와 방송사에서는 ‘국민교육’이라고 앞세우면서 촌수이니 호칭이니 하는 ‘한자로 된 어려운 부름말’을 외우도록 시켜요. 학교에서도 이런 짓을 시키지요. 되게 어렵고 딱딱할 뿐더러, 우리 삶하고 걸맞지 않은 한자로 된 부름말인데, 이런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도록 한대서 예의나 예절이 살아나지 않아요.


  한집에서 살면 아버지와 어머니 있고, 언니 오빠 누나 동생 있어요. 아저씨와 아주머니, 또는 아재와 아지매 같은 이름은 아무한테나 붙이는 부름말 아니었어요. 모두한테 이름과 아울러 무슨 할머니 무슨 아저씨 하고 불렀지요. 삼촌이니 오촌이니 칠촌이니 하고 따지지 않았어요. 더 헤아리면 누구나 알 텐데, 지난날 마을살이는 거의 다 한식구 이루는 마을이에요. 촌수를 따지는 일이 부질없어요. 곧, 한 마을이 한 집안이요, 한 사람이에요. 이러한 너비와 깊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이야기 한 자락 들려준다면, 나도 김응 님 동시가 재미있네 하고 생각할 테지만, 우리 겨레 우리 이웃 살아온 발자국 가만히 짚는 흐름은 찾아볼 수 없기에, 그닥 재미있지 않구나 싶어요.


  김제곤 님은 “이런 시에서 보듯 김응의 동시는 어린이부터 어른에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응의 동시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고 감동할 수 있는 ‘품이 넓은 시’란 생각이 들어요.”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같은 말은 얼마나 알맞을까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 김응 님 동시를 들여다볼 때에, 그리 ‘마음이 잘 맞지’ 않습니다.


.. 나비와 잠자리는 / 풀잎 돗자리 펼쳐 놓고 / 도시락 까먹고 / 맘껏 떠들며 노는데 // 왜 우리는 / 잔디밭에 들어가면 안 돼요? ..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를테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짧은 동시는 언뜻 보기에 재미나 보여요. 그렇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니 살짝 서글프달까, 어딘가 얄궂달까, 참 재미없구나 싶더군요.


  도시에서는 공원에 울타리 박고는 못 들어가게 하지요. 사람들이 흙땅이나 풀밭 못 밟게 해요. 그나마 풀포기 한 줌 없는 메마른 도시인 나머지,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도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 까먹는 즐거움 못 누리게 해요. 사람들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에 앉아야 해요. 아파트이건 골목집이건 다세대주택이건 빌라이건, 아무리 멋진 장판과 양탄자 깔았어도 ‘살림집조차 시멘트바닥’이에요.


  가만히 보면, 나비와 잠자리는 아무런 돗자리 깔지 않아요. 나비와 잠자리는 그냥 맨몸으로 풀밭에 앉을 뿐이에요.


  사람도 굳이 돗자리 안 깔아도 돼요. 맨몸 맨발로 풀밭에 앉으면 돼요. 아침에는 이슬이 내려 아직 땅이 촉촉하니 돗자리 깔 만하지만, 시골에서 논일 밭일 하는 사람 모습을 잘 보셔요. 아무도 돗자리 안 깔아요. 그냥 맨 흙바닥에 앉아서 샛밥 먹고 쉬지요. 시골에서는 논둑이고 밭둑이고 그냥 앉아요. 풀밭이고 잔디밭이고 가리지 않아요. 더 들여다보면, 지난날 시골집은 모두 흙집이요 나무집이었어요. 밖에서 들일 할 적에도 흙땅에 앉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울 적에도 ‘흙으로 지은 집 바닥’에 몸을 누였어요.


.. 그 옛날엔 할아버지도 / 여드름쟁이였대 / 먼 훗날엔 삼촌도 / 할아버지가 될 거야 ..  (오이와 오이지)

 
  김응 동시인이 말솜씨 좋게 동시를 쓰는가 안 쓰는가도 잘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한 가지 궁금해요. 김응 동시인은 동시를 왜 쓰는가요. 김응 동시인은 누구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더 많은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어느 한 아이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도시와 시골을 아울러 모든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한국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재일조선인이나 연변조선족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모든 한겨레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이웃 중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베트남이나 버마나 네팔이나 부탄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쓰는가요. 어떤 아이들이 읽을 어떤 동시를 쓰는가요.


.. “박씨 혼자 있으면 / 어떻게 커다란 박이 열리겠니?” / 할머니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  (박꽃 피는 집)


  동시쓰기와 동시읽기를 하기 앞서, 동시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야지 싶어요. 동시는 어른이 써서 아이가 읽도록 하는 시라서 동시일 테지요. 어른이 써서 아이가 읽는 동시란, 아이들한테 어떤 글밥, 마음밥, 삶밥, 사랑밥, 이야기밥, 꿈밥, 믿음밥, 책밥, 말밥, 꽃밥 들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 읽을 동시를 쓰는 어른은 이녁 스스로 어떤 글을 일구고, 어떤 마음을 다스리며, 어떤 삶을 짓고, 어떤 사랑을 나누며,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어떤 꿈을 꾸며, 어떤 믿음을 펼쳐,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말을 가다듬고, 어떤 꽃을 흙땅에서 보살피는 하루를 누리는가요.


  동시는 말솜씨로 쓸 수 없어요. 말솜씨로 쓰는 글이라면 동시도 못 되지만, 어른시도 못 돼요. 말솜씨는 말솜씨일 뿐, 이야기도 아니고 글도 아니에요.


  기계를 잘 다룬대서 사진을 잘 찍지 않아요. 이때에는 기계질만 하는 셈이에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이에요. 사진 하나란 기계질로 만드는 작품이 아니에요. 사진 하나란, 사진기라는 연장 하나 손에 쥔 누군가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아름답게 일구며 빚는 이야기 한 자락이에요. 시골 흙일꾼이 호미라는 연장 하나로 나물을 캐고 밭을 보듬듯, 동시를 쓰는 어른은 연필 한 자루로 종이 한 쪽에 정갈한 넋 즐겁고 신나게 노래를 해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노래로 삶을 밝힐 때에 시나브로 동시 하나 태어나요.


.. 하루는 집에 와서 / 숙제를 하려는데 / 숙제가 뭐였는지 / 까먹었지 뭐야! // 그래서 그냥 놀았어 / 온종일 노니까 즐거웠지 ..  (아홉 살 할머니)


  온 하루 놀면 재미나요. 숙제를 해야 하면 온 하루 고단해요.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숙제를 내요. 나도 어린 나날 숙제라는 큰짐 때문에 날마다 몸살을 앓았어요. 숙제를 안 하면 안 하는 만큼 교사들은 몽둥이를 들거나 손찌검을 했고, 이로도 모자란지 골마루에 나가라 소리를 꽥 질렀고, 새 숙제를 내서 헌 숙제까지 다 해내지 않으면 이듬날 때리는 횟수와 세기는 더 무시무시하지요. 한 주쯤 숙제를 밀리고 안 하면 교무실로 불러서 온갖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교감과 교장까지 나서서 때려요.


  오늘날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니고, 학교에서 어쩔 수 없이 숙제를 받겠지요. 학원에서도 숙제를 받고, 집에서도 어버이가 여러 교재와 문제집 들여놓고 숙제를 안기겠지요.


  참 끔찍해요. ‘숙제’라는 말소리만 들어도 몸서리를 쳐요. 동시 〈아홉 살 할머니〉는 이런 얘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참말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아홉 살 아닌 아흔 살 할머니라도 되도록 어른들은 숙제 짐덩이를 안기며 괴롭혀요.


.. 꽃눈 속에 숨어 있던 / 하얀 나비들 / 하나둘씩 날개를 펴고 / 활짝 날개를 펴고 ..  (사월)


  동시란 무엇일까요. 동시는 어른이 쓰니까 어른 삶을 드러낼까요. 동시는 어린이가 읽으니까 어린이 삶을 보여줄까요.


  동시를 쓰는 분이나 동시를 읽는 분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빌어요.


  자, 눈을 감고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요.


  동시를 쓰는 어른도 얼마 앞서까지 어린이였어요. 동시를 읽는 어린이는 바로 오늘 어린이예요. 곧, 어제 어린이로 살아온 어른이 오늘 어린이하고 만나서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일하고 어울리고 누리는 하루를 글로 담을 때에 동시예요. 어른이 억지스레 어린이 눈높이로 ‘낮춘’대서 동시가 되지 않아요. 재미난 말솜씨 보여준대서 동시가 될 수 없어요. 뭔가 남다르거나 새롭다 싶은 이야기를 섞는대서 동시라는 이름 붙일 수 없어요.


  말솜씨는 말솜씨일 뿐이에요. 꾸민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일 뿐이에요.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김제곤 님은 김응 님 동시를 읽고 나서 “시인이란 모름지기 변신 마술의 대가입니다.” 하고 말하지만, 시인은 몸을 바꾸는(변신) 사람도 아니고, 마술 부리는 사람도 아니에요. 시인은 그저 삶을 누리는 사람이에요. 삶을 사랑으로 누리지요. 삶을 즐겁게 누리지요. 삶을 아끼고 보살피면서 이웃이랑 동무하고 어깨를 겯지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동시도 어른시도 못 써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진도 못 찍고 그림도 못 그리며 노래나 춤도 못 해요. 삶을 누리니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요.


  멋들어지게 불러야 노래가 아니에요. 전문가수가 되어야 노래가 아니에요.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즐거움과 사랑을 환하게 담아 목소리 뽑으니 노래가 돼요. 마음 깊이 피어나는 기쁨과 꿈을 맑게 엮어 글줄에 실으니 동시도 되고 어른시도 돼요. 전문시인이 되어야 시를 쓰지 않지요. 전문사진가 되어야 사진 찍지 않아요. 전문화가 되어야 그림 그리지 않아요.


  어린이마음 되어 쓰기에 동시는 아니에요. 어른도 어린이도 딴 목숨 아니에요. 어린이는 곧 어른으로 자라고, 어른은 어린이로 살아낸 숨결을 언제나 가슴속으로 품은 목숨이에요. 어른이 쓰는 동시란, 다른 누구보다도 어른 스스로 읽고 즐기는 동시예요. 어른인 내가 어린이로 살던 나한테 베푸는 글이 바로 동시예요.


  김응 님 세 번째 동시집이 나온다면, 이러한 대목 슬기롭게 돌아보면서 말빛 일굴 수 있기를 빌어요. 한 가지 덧붙이면, “하나둘씩 날개를 펴고”는 알맞지 않아요. “하나둘 날개를 펴고”나 “하나씩 둘씩 날개를 펴고”로 적어야 올발라요. 하나 더 말하자면 “꽃눈 속에 숨어 있던”이 아닌 “꽃눈 속에 숨은”으로 적어야 올발라요.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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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아버지하고만 열엿새

 


  아이 어머니가 람타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간 지 열엿새 지나고 열이레째 된다. 앞으로 나흘 뒤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밥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잘 노래하며, 둘이 서로 다투다가도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하루를 누린다. 아이들과 들마실이나 숲마실 틈틈이 다니는데, 아이들한테 따순 밥 먹이려고 미리 밥을 지어 놓지는 않고, 끼니에 맞추어 밥을 지으니, 여러모로 손 쓸 일 많으며,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배고프다 낑낑대는 고비를 살짝 맞이하곤 한다. 배고프다 낑낑거릴 즈음 밥을 다 차리고, 아이들은 밥상 다 차릴 때까지 예쁘게 기다리다가는 참말 맛나게 밥그릇 싹싹 비운다.


  아이 아버지 혼자 열엿새째 아이들 돌보며 먹이고 지낸 엊저녁, 두 아이 재우느라 한 시간 반 남짓 자장노래 부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큰아이가 드디어 도란도란 읊던 말 멈추고 꼬물락꼬물락 하던 몸짓 그칠 즈음, 슬슬 일어나서 내 일을 할까 싶었으나, 등허리가 안 펴져 나도 아이들 곁에서 곯아떨어진다. 얼추 네 시간 이런저런 꿈을 꾸며 잠에 빠진다.


  작은아이 안던 팔을 뺀다. 조금 저리지만, 이렇게 안아야 작은아이가 잘 잔다. 큰아이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제 발을 내 몸에 척 얹으며 잔다. 큰아이 발을 살살 들어 옆으로 내려놓는다. 두 아이 이불깃 여미고 옆방으로 나온다. 아이들 오줌그릇 들고 마당으로 내려온다. 밤별 올려다본다. 묵히는 밭에 오줌을 뿌린다. 기지개를 켜니 등허리 뼈에서 우두두둑 소리 난다. 물 한 모금 마신다. 새벽 두 시 오십오 분. 달게 잤는가. 좀 쉬었는가.


  지난밤 큰아이하고 백쉰까지 숫자를 셌다. 쉰 즈음 숫자를 셀 무렵, 아하 내 어머니도 나하고 형한테 잠자리에서 이렇게 숫자를 세며 잠을 재우기도 하고, 숫자를 익히도록 이끌기도 했다고 떠오른다. 꽤 오래된 일 아련하게 떠오른다. 꽤 많이 어리던 날에는 숫자 이백을 가까스로 셌고, 좀 자라고 나서는 천이나 이천까지 셌다고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큰아이가 여섯 살로 접어든 올 일월이나 이월만 하더라도 숫자를 똑바로 못 셌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며 으레 일곱이나 여덟이나 아홉을 거꾸로 센다든지, 숫자를 적을 때에도 앞뒤가 바뀌거나 뒤집어 그린다든지 했다. 삼월에 접어들고 사월이 되니, 큰아이는 숫자를 스물까지 똑바로 셀 수 있고, 숫자쓰기도 알맞게 잘 한다. 숫자를 백마흔다섯 셀 무렵 큰아이가 갑자기 많이 힘들어 해서, 꼭 백쉰까지 맞추고 그만 셌다.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도 스무 가락쯤 부르니 잘 듯 말 듯하더니 더 불러 달라 하고, 또 열 가락쯤 부르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더 불러 달라 하고,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아버지도 침이 말라 더는 못 부르고, 큰아이도 더 불러 달란 말 없이 다 함께 까무룩 곯아떨어진다.


  하루가 흐른다. 하루가 저물고, 하루가 열린다.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고,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간다. 오늘 밤에는 휘파람새 노랫소리 안 들린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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