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람이 불어 배추잎 푸르고
바람이 지나가면서 모과알 굵고
바람이 스쳐 씀바귀 봄가을에 자라
바람이 살살
후박잎 간질이며 어느새 가을
살그마니 겨울
시나브로 봄
동백꽃 흐드러지면서
멧새 노랫소리에
개구리 풀벌레 새로 깨어나
까르르 웃고 떠드는 고운 햇볕.

 


4346.10.26.흙.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보슬비 2013-11-01 20:38   좋아요 0 | URL
요즘 모과들을 보면서 한두개 사다가 겨울에 차를 담궈먹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동생이 모과는 노랗게 익어야 맛있다며 지금 파는것들을 보니 다들 연초록빛을 띄고 있더라고요. 아직 덜 익은것들을 따서 후숙으로 익혀가는것들이 늘어가는것 같습니다.

함께살기님 시를 읽다가 '모과'가 나오길래 반가웠어요.^^

파란놀 2013-11-02 02:36   좋아요 0 | URL
가게에서 팔자면 미리 따서 창고에 쌓아서 팔아야 하니 그렇지요.
모과나무에 울퉁불퉁 열린 모과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잎사귀 다 떨어져도 커다란 열매는 대롱대롱 달려요.

모과는 차로 담가 먹어도 좋고,
그저 곁에 두고 냄새만 누려도 좋아요~
 

걷는 길이 가장 바르다

 


  두 다리로 걷는 길이 가장 바르다. 걷는 길이 가장 빠르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서로 같은 곳 바라볼 수 있다. 도란도란 나즈막히 속삭이거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걷는 길에 아무것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걷는 동안 지구별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지 않는다. 걷는 길에서 글·그림·노래·춤이 새로 태어난다. 걷는 길에서 일하고 놀며 이야기 샘솟는다. 4346.10.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버스에서 내리는 마음

 


  버스를 타면, 내내 덜덜 떨리고 바퀴와 엔진 소리 달달달 들어야 합니다. 귀가 멍하고 골이 띵합니다. 버스가 빨리 달리는 만큼 숲내음과 숲노래와 숲빛 모두 잊거나 잃어야 합니다. 시골집 떠나 면소재지나 읍내나 시내로 볼일 보러 나오면, 버스나 기차에서 내려 걷더라도, 골목까지 파고들어 싱싱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넘칩니다. 눈과 귀와 골이 모두 아파요.


  그런데 나는 이런 데에서 스물여덟 해를 보냈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넉 해 반을 살았으나 다시 도시로 돌아와 세 해 반을 살았어요. 이러구러 스물아홉 해째 되던 어느 날 비로소 자동차 없는 시골마을 작은 집에서 풀노래와 풀바람과 풀내음과 풀빛을 만났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자동차 지나가거나 흐르는 소리하고 동떨어진 멧골집에서 새로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무늬를 처음 만났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목숨들인가 돌아봅니다. 우리 넋 살찌우고, 우리 얼 북돋우는 길을 저마다 어떻게 걸어가는가 헤아립니다. 우리 아이는 우리 어른한테서 무엇을 보거나 물려받는가요. 앞으로 우리 어른과 아이는 어떤 꿈과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은가요.


  버스에서 내릴 때로구나 생각합니다. 버스는 그만 달리게 할 때로구나 싶습니다. 사랑할 삶을 사랑하고, 꿈꿀 길을 꿈꿀 때로구나 생각합니다. 어깨동무할 이웃을 사귀고, 손을 맞잡으며 삶 함께 일굴 옆지기를 아껴야 할 때로구나 싶습니다. 4346.10.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빨리읽기

 


  책을 후다닥 읽어서 가슴에 무엇이 남을까. 길을 빨리 달려서 마음에 무엇이 깃들까. 밥을 허둥지둥 먹어서 몸이 얼마나 즐거울까. 여행을 서둘러 다녀서 가슴에 어떤 이야기 남을까.


  시험을 앞두고 온갖 교재와 참고서를 후다닥 읽거나 재빨리 외워야 할는지 모른다. 벼락치기라고도 하지만, 후다닥 살피고 후다닥 외워서 문제풀이 잘 한다 한들, 이렇게 해서 받는 조금 더 높은 점수는 내 삶을 얼마나 살찌울 만한가.


  책 한 권 더 읽으면 내 삶은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책 한 권 덜 읽으면 내 삶은 덜 아름다운가. 돈이 넉넉해 책 한 권 더 장만해서 갖출 수 있으면 내 서재나 책꽂이는 한결 더 아름답다 할 만한가. 돈이 모자라 책 한 권조차 장만하기 힘들면 내 서재나 책꽂이는 한결 허술하거나 모자르다 싶은가.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내릴 적에 보면, 으레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그머니 내 앞이나 내 앞 다른 사람 사이로 끼어든다. 참말, 새치기이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느 때에는 가만히 지켜본다. 저 사람들은 새치기를 하는 만큼 목숨을 그만큼 재촉하는 터라, 슬프게도 스스로 빨리 죽고픈 마음이니까. 여느 때 아닌 아이들이 곁에 있고 아이들이 힘들어 할 적에는 새치기하는 사람을 부른다. 여보소, 이녁 뭐 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아이들이 뒤에서 기다리며 지켜보는데 이녁 뭐 하는 사람인가, 하고 부른다. 이때에 부끄럽거나 창피하다고 느끼면 주춤 물러서며 맨 뒤로 간다. 이때에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모르거나 잊은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를 한다.


  새치기를 해서 한 발 먼저 타거나 내리면 무엇이 즐거울까. 벼락치기를 해서 점수 1점 더 올리면 무엇이 기쁠까. 남보다 더 이룬 열매란 무엇이 반가울까. 힘이 있으면 두레나 품앗이를 할 때에 즐겁다. 이름이 있으면 이름값으로 사랑을 나누면 기쁘다. 돈이 있으면 이웃한테 오순도순 베풀어 함께 쓰고 함께 누리며 함께 가지면서 아름답다.


  지식은 쌓이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하다. 쌓일 때에는 지식이요, 쌓이는 지식은 우리 삶에 이바지를 하지 못한다. 슬기는 쌓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 쌓이지 않고 흐르는 슬기요, 흐르는 슬기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북돋운다. 지식은 쌓여 학벌과 학문이 된다. 슬기는 흘러 사랑과 꿈이 된다. 지식을 쌓으니 인문책 태어나고, 슬기가 흐르니 이야기책 샘솟는다. 4346.10.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 마른 옷가지 개기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는 서천여고에 우리 말글 이야기를 들려주러 마실을 가는 새벽이다. 두 아이를 옆에 끼고 새근새근 재우다가 나 또한 스르르 곯아떨어지는데, 밤 세 시에 눈을 뜬다. 엊저녁에 미리 챙긴 짐을 살피고 글을 몇 가지 쓴다. 엊저녁에 씻어서 불린 쌀을 살핀다. 물갈이를 한다. 새벽 네 시에 머리를 감으며 빨래 몇 점 한다. 묵은 빨래가 없도록 한다. 내 머리를 말리는 천은 시골집으로 돌아와서 빨자고 생각하며 헹굼물에 담가 놓는다. 새로 빨래를 한 옷가지를 옷걸이에 꿰어 넌다. 잘 마른 옷가지를 걷는다. 아침 일곱 시 오 분에 첫 군내버스가 마을 앞으로 지나가니, 그때까지 집일 마무리지어야 한다. 새벽 여섯 시 사십 분부터 옷가지를 갠다. 아이들이 아직 달게 자니, 갠 옷가지를 옷장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여섯 시 오십팔 분에 큰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어제 아버지가 멀리 일하러 간다는 얘기를 듣더니 일찌감치 깨는구나. “아버지 어디 가요? 가게요?” “응, 잘 다녀올게.” 큰아이가 두 팔을 벌린다. 살포시 안는다. 가방을 하나둘 멘다. 앞가방 둘 등가방 하나를 멘다. 또 팔을 벌리는 큰아이를 안아 번쩍 든다. 이제 사진기를 목에 걸고 섬돌로 내려서려는데 작은아이가 부시시 일어난다. 작은아이도 누나 말씨를 흉내내며 아직 안 뜨이는 눈으로 “가게요?” 하고 묻는다. “응, 잘 다녀올게. 자 쉬 해. 벼리야, 동생 쉬 하도록 도와줘.” “알았어요. 자, 보라야, 쉬 하자, 쉬.” 손을 흔든다.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바지런히 달려 마을 어귀 버스 타는 곳으로 간다. 4346.10.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