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6. 온누리에는 어떤 책이 나올까


  온누리에 온갖 책이 새로 태어납니다. 한국에서도 날마다 여러 가지 책이 태어납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날마다 나오는 모든 새책을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지구별 모든 나라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로 가르쳐요. 한 학기나 한 해를 두고 교과서 하나로 한 과목을 가르칩니다. 예전에는 참말 교과서가 아닌 책을 학교에서 다루지 않았어요. 오직 교과서 하나만 다루었어요. 오늘날은 예전과 사뭇 달라, 교과서 아닌 책을 제법 다룹니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책’을 따로 장만해서 학교도서관에 두기도 하고 학급문고로 갖추기도 합니다.

  교과서는 ‘간추린 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에 쓴 이야기를 간추려서 엮는 교과서입니다. 책 몇 권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는 고작 한 줄로 간추리기도 합니다. 수천 권이나 수만 권에 이르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는 한 줄로조차 안 다루기도 합니다.

  교과서를 읽으면서 배우는 사람은 ‘교과서를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책을 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책을 보려면 참말 책을 살펴야 합니다. ‘간추린 교과서’가 아닌, ‘그대로 밝히거나 풀어놓은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이 수없이 태어나는데, 교과서 하나에만 기댄다면 우리가 무엇을 배울 만한지 생각해 봐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는데, 간추린 지식을 담은 교과서에만 머문다면 우리 마음밭이 얼마나 자랄 수 있을는지 헤아려 봐요.

  어느 책은 오래도록 사랑받습니다. 어느 책은 그다지 사랑받지 못합니다. 오래도록 사랑받기에 더 아름다운 책이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더라도 덜 아름답거나 안 아름다운 책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권정생 님이 쓴 《몽실 언니》(창작과비평사,1984)는 우리가 어떤 책으로 바라볼 만할까 궁금합니다. 무척 널리 읽히는 책이니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푸름이와 어린이라면 《몽실 언니》를 한 차례쯤 읽었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스무 살이던 1994년에 처음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적이나 중·고등학생이던 때에 이 책을 말하거나 알려주거나 건넨 어른은 없습니다. 스무 살이던 어느 날 책방마실을 하다가 스스로 알아보았어요. 스무 살 나이라면 어린이책은 안 읽을 만하다고 여기는 흐름이 한국 사회에 있지만, 그때 저는 이 책이 문득 끌렸어요. 스무 살이라면 대학생이 되는 나이인데, 다른 동무(대학생)들은 대학교재나 토익책을 옆구리에 꼈지만, 또는 인문사회과학책을 손에 쥐지만, 저는 어린이책 《몽실 언니》를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제 어린 날과 푸른 날에 만나지 못한 어린이문학이 몹시 궁금했어요.

  “이 산골마을 이름은 댓골이라 했다. 뒷산 골짜기로 보리둑나무가 무성하여 달밤엔 은빛 잎사귀가 아름다웠다(18∼19쪽).” 같은 글월에 밑줄을 긋고는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런 글월을 가만히 되읽으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투박하거나 수수한 글줄이라 할 테지만, 이렇게 투박하면서 수수한 글줄이 외려 제 가슴을 톡 건드렸어요.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사는 곳은 어떤 이름인가? 내가 사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사는 곳에는 어떤 나무가 자라는가? 내가 사는 곳에서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만나는가?’ 하는 생각이 잇달아 머릿속을 스칩니다.

  “맑은 개울물에 기저귀랑 저고리랑 담그어 놓고 방망이로 토닥토닥 두들겨 빤다. 몽실이와 순덕은 딴 아이들보다 빨래도 잘한다(33쪽).” 같은 글월에 연필로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다시금 한참 들여다봅니다. 괜히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글월이라 할 테지만, 그냥 그런 삶을 적은 글줄이라 할 텐데, 이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또 책을 덮었지요. 또 한참 생각에 잠겼지요. 예전에는 참말 모두들 맑은 개울물에서 빨래를 했겠다고 떠올렸어요.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그무렵, 또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쯤 앞서, 또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쯤 앞서, 모두들 맑은 개울물에 옷가지를 펼쳐서 척척 비비고 헹구었겠구나 싶었어요.

  맑은 개울물에 옷을 빨면, 옷은 맑은 개울물 빛깔과 무늬를 얻습니다. 맑은 개울물에 빨래한 옷을 마당에 척 널어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도록 하면, 옷은 따순 볕과 싱그러운 바람이 베푸는 기운을 받습니다.

  온누리에는 그야말로 많은 책이 꾸준하게 태어납니다. 수없이 많은 책은 저마다 어떤 삶을 그린 책일까요. 수없이 많은 책은 저마다 어떤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책일까요.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님은 몽실이 입을 빌어 “배운다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젖은 키를 크게 하고 몸을 살찌우는 것이고, 배우는 것은 머리가 깨고 생각이 자라게 한다(68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엄마젖, 또는 어머니젖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베푸는 젖을 먹고 자랍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이녁 어머니한테서 태어나 으앙 울면서 갓난쟁이 나날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시골 이야기를 책에 담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도시 이야기를 책에 싣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 이야기를 책에 쓸 테고, 일본에서는 일본 이야기를 책에 적어요. 한국에서는 한국 이야기를 책에 적바림할 테고, 역사학자는 역사 이야기를 책으로 펼칠 테며, 과학자는 과학 이야기를 책으로 선보일 테지요. 시골에서 자라는 사람은 어떤 책을 찾아서 읽을 만할까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어떤 책을 찾아서 읽을 만한가요. 온누리에는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책이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데, 거의 모든 책은 도시를 겨냥합니다. 시골을 바라보며 태어나는 책은 드뭅니다. 시골을 이야기하거나 시골살이를 밝히는 책은 아주 드물어요.

  두 다리로 걸어서 책방에 가 봅니다. 커다란 책방이든 자그마한 책방이든, 책방마다 가장 많이 쌓인 책은 ‘책이 아닌 교재’입니다. 학교에서 다루는 수험서가 책방마다 가장 많이 있습니다. 문제집과 참고서가 책방에서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을 더 잘 익혀서 시험문제를 더 잘 풀고는 점수를 더 잘 받도록 꾀한다는 교재가 책방마다 가장 많아요.

  《몽실 언니》에서는 “몽실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도 그 애처럼 꽃을 꺾어 팔아서라도 떳떳하게 살까 봐.’ 여태 몽실이 살아온 건 모두 부끄러운 일뿐인 것 같았다. 얻어 먹고 살아온 것만 같았다. 몽실은 찬거리를 사들고 부랴부랴 꽃 파는 애한테 갔다. 그러나 거기 꽃 파는 애는 없었다(188쪽).”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몽실이는 학교 문턱을 밟지 못합니다. 몽실이는 어릴 적부터 배를 곯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어린 동생을 바라지합니다. 늙고 아픈 아버지를 수발합니다. 몽실이한테는 책이 없고, 교과서도 없습니다. 시험공부도 대학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삶이 있습니다. 살아가려는 몸짓이 있습니다. 살면서 누리고 싶은 사랑이 있습니다. 살면서 누리고픈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빛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책방마다 교재가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하니까, 우리들은 문제집과 참고서를 늘 옆구리에 끼면서 지낼 때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지 궁금하곤 해요.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다루니, 열두 해에 걸쳐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과서만 잘 익히면 될는지 궁금하곤 해요.

  온누리에는 왜 새로운 책이 날마다 꾸준히 태어날까요. 이웃나라에서도 한국에서도 왜 꾸준하게 새로운 책을 펴낼까요. 교과서가 있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가르치지만, 왜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라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많을까요.

  《몽실 언니》는 어린 몽실이가 마흔 살을 살며시 넘은 어느 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열다섯 살인 내가 앞으로 마흔 살 언저리에 이르면,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요. 스무 살인 내가 앞으로 마흔 살 즈음이 되면, 어디에서 어떤 눈빛으로 이웃과 마주할까요.

  “난남은 안네를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몽실이도, 죽은 금년이 아줌마도,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고 생각했다(261쪽).”와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되새깁니다. 온누리에서 새로 태어나는 책은 한결같이 한 가지를 밝히려는 뜻이리라 느낍니다. 바로 ‘사랑’을 밝히려고 하지 싶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밝히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길을 밝히며, 나와 네가 우리로 어깨동무하면서 새롭게 빚을 사랑을 밝히려는 책이지 싶습니다. 4347.6.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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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 시를 읽힐 때에



  문학이 태어났을 적에 어른이 써서 어른이 즐길 뿐이었습니다. 어른이 써서 아이한테 들려주는 문학은 따로 없었습니다. 지난 백 해 사이에 비로소 어린이문학이 새롭게 태어나 아이들이 읽을 문학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린이문학이 따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정작 아이들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밝히는 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낱말을 이쁘장하게 엮는 문학이 너무 많습니다. 어른이 만든 제도권 사회 울타리에서 시름시름 앓거나 괴로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들한테 빛이 될 문학은 너무 드물고, 아이들이 스스로 빛을 찾아나서도록 돕는 문학도 너무 드뭅니다.

  어린이문학은 아이들만 읽지 않습니다. 아이들부터 누구나 누리는 문학이 어린이문학입니다. 아이들과 읽을 시와 동화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이문학이라는 이름이 아닌 옛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흐르던 ‘말’은 아이와 어른이 한 자리에 앉아서 누렸어요. 콩쥐와 팥쥐 이야기이든, 풀개구리 이야기이든, 해와 달 이야기이든, 언제나 아이와 어른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서 함께 즐겼습니다. 종이에 글을 쓰던 어른은 으레 중국글로 어른문학만 했지만, 중국글을 모르고 훈민정음조차 모르던 시골사람은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는 ‘말’로 ‘이야기’를 지어서 주고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문학을 하는 ‘새로운 젊은 작가’들이 내놓는 작품을 보면, 으레 ‘이쁘장한 동시’이거나 ‘학교생활 동화’입니다. 오늘날 새로운 젊은 작가들은 좀처럼 ‘삶글’을 못 씁니다. ‘삶빛’을 밝히려 하지 못합니다. 알맹이를 담는 이야기가 아니라, 껍데기를 꾸미는 문학일 뿐입니다. 지난날에는 지식인과 권력자가 중국글로 문학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한글(훈민정음)’을 쓰기는 하지만 아직 ‘이야기’와 같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동시(시)를 읽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 동시집을 장만해서 먼저 읽는데, 좀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거나 이끌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원수, 권정생, 이문구, 윤동주, 이오덕, 임길택, 백석, 권태응 같은 님들이 빚은 이야기는 무척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랑스럽습니다. 이 어른들은 언제나 노래를 불렀고, 이 어른들이 부른 노래는 언제나 삶말입니다.

  왜 오늘날 ‘새로운 젊은 작가’는 삶말을 빚지 못할까요. 왜 오늘날 책마을에서는 삶책을 펴내려 하지 않을까요. ‘말을 갖고 노는 시’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시’를 쓰기가 어려울까요. 아이한테 들려주면서 즐거울 시란, 어른끼리 주고받을 적에도 즐거울 시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시일 때에 비로소 ‘문학’이라는 이름하고도 걸맞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환하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를 읽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밝게 맞아들일 만한 말을 입으로 읊고 싶습니다. 4347.6.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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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을 새로 하나 엽니다.

제 블로그(서재)를 보면

게시판이 길다랗게 많습니다.

그런데 또 새 게시판을 엽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새 게시판을 열리라 느낍니다.


엊저녁부터 생각해서 이 새벽에 마무리지은 글이 하나 있는데,

도무지 이 글을 어느 갈래에 넣어야 할는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어요.


'작품 비평'이 아닌 '문학 비평'으로서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글을 쓸 때가 되었구나 하고.


그래서 [어린이문학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게시판을 새로 엽니다.


나는 어린이였을 적부터 스무 살까지는

어린이문학을 즐기지 못하거나 않았습니다.

스무 살부터 비로소 뒤늦게 어린이문학을 즐겼고,

어린이문학을 즐긴 지 스무 해가 된 올해에

여러모로 이것저것 생각과 이야기가

스스로 샘솟습니다.


우리 어린이문학뿐 아니라

지구별 이웃을 헤아릴 수 있는

삶글이 될 말을 차근차근 길어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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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늘 이야기



  모든 책에는 ‘가르침(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책은 없습니다. 한 가지를 가르치든 만 가지를 가르치든, 모든 책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느 책을 읽든 우리는 배웁니다.


  모든 책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미라든지 엄청나다 싶은 즐거움이 있기도 하지만, 터럭밖에 안 되는 재미라든지 좁쌀만 한 즐거움이 있기도 해요. 재미와 즐거움은 다 다르게 있습니다. 크기나 부피로 따져서 더 크거나 많아야 ‘좋다고 여길’ 책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다 다른 책마다 다 다른 재미와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책을 읽을 적에 늘 한 가지만 헤아립니다. 바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헤아립니다. 어느 책을 고르든 가르침이나 재미나 즐거움은 다 다르게 있기에, 가르침이나 재미나 즐거움이 아닌 ‘이야기’에 따라 책을 고릅니다.


  삶을 밝히는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삶을 빛내도록 북돋우는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이 끌립니다. 삶을 가꾸는 슬기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을 쏟아 차근차근 읽습니다.


  모든 책은 이야기책입니다. 그림책과 동화책도 이야기책입니다. 소설책과 시집도 이야기책입니다. 과학책과 환경책도 이야기책입니다. 자기계발이나 수험서조차 이야기책입니다. 다 다른 이야기를 다 다른 빛으로 담습니다.


  이야기를 받아들여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도록 돕는 책이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살피면서 마음자리에 꽃이 피어나도록 이끄는 책이 반갑습니다. 책은 늘 이야기요, 책은 한결같이 이야기입니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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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8. 쉬운 말
―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하는 말


  《조지 아저씨네 정원》(시공사,1995)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이 무척 멋있다고 느낍니다. 글과 그림이 아주 아름답게 어우러졌거든요. 그림책에 나오는 ‘조지 아저씨’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아저씨네 땅은 넓지 않아요. 아주 작답니다. 아저씨는 조그마한 땅을 일구며 살지만 언제나 흐뭇하고 넉넉해요. 모든 풀·꽃·나무하고 속삭일 줄 알고, 새·벌레·짐승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 마음으로 사귀어요.

  그런데 이 멋진 그림책에 붙은 이름은 ‘정원(庭園)’입니다. 정원이란 어떤 곳일까요. 그림책에 ‘정원’이란 한자말로 이름을 붙인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져 ‘정원’ 말뜻을 살피면, “집 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이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뜰’이나 ‘꽃밭’이라는 소리예요.

  다시금 한국말사전을 살핍니다. ‘뜰’을 “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 화초나 나무를 가꾸기도 하고, 푸성귀 따위를 심기도 한다”로 풀이합니다. ‘꽃밭’은 “꽃을 심어 가꾼 밭”으로 풀이해요. 더 살피면, ‘화초(花草)’는 “꽃이 피는 풀과 나무”를 가리켜요.

  멋진 그림책에 “조지 아저씨네 꽃밭”이나 “조지 아저씨네 앞뜰”이나 “조지 아저씨네 뜨락” 같은 이름이 붙으면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뜰·앞뜰·뒷뜰·옆뜰·뜨락·꽃밭’ 같은 낱말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자랄 수 있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집숲’이나 ‘숲집’ 같은 낱말도 듣고, ‘풀꽃집’이나 ‘나무꽃집’이나 ‘꽃숲집’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자란다면 어떠할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철’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었습니다. 아마 열 살 즈음이었지 싶은데, 일흔 살이 넘은 이웃 할아버지는 열 살짜리 아이한테 “얘야, 철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아니란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지요. “할아버지, 그러면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되어도 철이 안 들면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할아버지, 그러면 할아버지가 아직 철이 안 들었으면 할아버지도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우와, 그러면 철이 들어야 어른이 되네요.”

  이때부터 저는 ‘철’이라는 낱말을 들을 적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어요. 봄철·여름철·가을철·겨울철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괜히 웃음이 나면서 즐거웠어요. 198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철’이라는 낱말과 함께 ‘계절’이라는 낱말이 나오고, 어른(교사와 어버이와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철’이라는 낱말보다 ‘계절’이라는 한자말을 더 즐겨 씁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날씨를 알리든 여느 방송이든, 어른들은 으레 ‘계절’이라는 한자말만 읊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대중노래에서도 언제나 ‘계절’이에요.

  스무 살이 넘은 어느 때, 동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철’이라는 낱말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동무들은 이 낱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저더러 ‘철’이 무엇이느냐고 묻습니다. 어리둥절해서 ‘철’도 모르느냐고, ‘봄철’ 할 때에 철이라고 말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한자말 ‘계절’이 한국말로 ‘철’이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알아듣지만 다시 묻지요. ‘철’이라는 낱말이 참말 있느냐고.

  여느 어른들은 ‘철’이라고 하면 ‘쇠’를 가리키는 한자 ‘鐵’을 떠올립니다. 한국말 철을 그리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쇠를 ‘쇠’라 가리키지 못하니, 쇠를 가시처럼 엮은 그물을 놓고 ‘쇠가시그물’이라 가리키지 못하고 ‘철조망(鐵條網)’이라고만 가리킵니다. 부엌에서 쓰는 수세미도 ‘쇠수세미’라 하는 사람보다 ‘철수세미’라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느껴요.

  철이란 무엇일까요. 철은 날씨를 가리키면서 때를 나타냅니다. 제대로 찾아오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이 든다”고 할 때에는 “옳고 그름과 참거짓을 살피거나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뜻해요.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을 살피거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마음바탕일 때에 ‘어른’이라는 소리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않아요. 성년식을 치렀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가게에서 주민등록증 없이 술이나 담배를 살 수 있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철이 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이 바르게 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아름답게 키워서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짓고 삶을 가꿀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이어 보면, 우리 사회는 ‘철’이라는 낱말을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책이나 교과서에서도 올바르게 안 다룹니다. 아니, 억누르거나 짓밟거나 내팽개친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길을 막는다고 할 만해요.

  ‘하늘’이나 ‘바람’이나 ‘숲’이나 ‘집’이나 ‘사랑’이나 ‘사람’이나 ‘삶’ 같은 낱말을 찬찬히 읽고 들으면서 생각하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이 같은 낱말을 언제 어디에서 어느 만큼 들으면서 생각을 키울 수 있는가요. 껍데기말만 자꾸 퍼뜨리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껍데기말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이들한테 알맹이말하고 멀어지도록 부추기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써야 하늘을 생각합니다. ‘바람’이라는 낱말을 써야 바람을 생각합니다. 깊이 들여다보고 넓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이 아닌 ‘가옥·주택·주거지·부동산’이라는 이름만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집을 잊어요. 집이 어떤 곳인지 잃습니다. ‘사랑’이 아닌 ‘연애·애정·자비·자애·러브’ 같은 이름을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잊거나 잃어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사랑을 지으며 삶을 가꾸는 사람은 어떤 빛일까요.

  쉬운 말 한 마디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주고받는 말 한 마디는 저마다 생각을 꽃피우도록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 한 마디란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이끌거나 돕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스스로 내 모습을 돌아보고 삶을 바라보면서 길을 찾도록 드리우는 빛이 ‘쉬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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