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0.10.12.
 : 아기수레에 아이를 처음으로 태우고 달리다



- 지난주에 노란 허머 자전거를 고쳤다. 안장과 앞브레이크와 앞쇼바와 기어줄과 브레이크줄과 뒷톱니와 체인을 갈았다. 나중에 더 고칠 곳이 있으나 먼저 이곳만 고쳤다. 그러나, 말이 몇 곳을 고쳤다뿐, 따지고 보면 몸통을 빼고 모조리 고쳐야 하는 자전거인 셈이다. 높은 급수 부품을 쓰는 사람한테는 아무것 아닐 테지만, 요 몇 가지 부품을 갈아치우는 데에 십팔만 원이 들었다. 여기에 삼만 원을 얹으면 삼천리 R-7 자전거 한 대 값이 나온다.

- 지난주에 자전거를 고치면서 20인치 바퀴 한 벌을 새로 샀다. 아기수레에 달린 자전거 바퀴를 갈려고 샀다. 오늘 드디어 아기수레 바퀴를 갈려고 튜브까지 벗겨 보는데, 바퀴뼈대 안쪽에 대는 고무띠 한쪽이 끊어져 있다. 아기수레 한쪽 튜브가 자꾸 구멍이 나서 까닭을 알 길이 없었는데, 바퀴뼈대 안쪽 고무띠가 끊어진 바람에 바퀴살을 여미는 끝쪽 뾰족한 데에 튜브가 자꾸 찔리며 구멍이 났구나 싶다. 다른 바퀴도 안쪽 고무띠가 살짝 접혀 있는 바람에 튜브에 구멍이 날 뻔했다.

- 고무띠 끊어진 한쪽은 신문지를 작게 접어서 대놓는다. 땜질로 이렇게 해 놓는다. 이렇게 해 놓은 채 자전거집까지 끌고 가서 갈든지, 자전거집에서 고무띠를 사와서 갈든지 해야지.

- 오랜만에 바퀴를 갈아 본다. 손맛이 즐겁다. 옆지기를 만나고 옆지기가 아이를 배며 옆지기가 아이를 낳은 뒤로 자전거를 손질하여 신나게 타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 아기수레를 써 본 지도 퍽 오래되었다. 옆지기가 아직 아이를 낳기 앞서 명절날 가래떡을 뽑는다 하여 수레를 달고 떡집을 오갔을 때가 이태 앞서이다.

- 아이랑 옆지기 모두 마당으로 나오라고 부른다. 바퀴를 달고 수레 안쪽을 닦는다. 수레에 바퀴를 달고 자전거 뒤쪽하고 잇는다. 수레에 담요 한 장을 깔고 아이를 앉힌다. 아이한테 작은 담요 두 장을 얹어 준다. 살짝 졸린 아이인데 꽤 좋아한다. “좋아! 좋아!” 하고 외친다. 어서 달리란 뜻인가.

- 어디까지 달려 볼까. 오늘은 처음 달리는 날이니까 가볍게 큰길가 보리밥집까지 다녀올까. 보리밥집에서 아이 까까하고 보리술 두 병을 사 볼까. 마당을 살며시 반 바퀴를 돌고 나서 옥수수와 고구마를 심은 밭 옆을 달린다. 동네 이웃한테 인사를 하고 논을 옆으로 끼는 시골길을 달린다. 한창 벼베기를 하거나 밭을 갈아엎는 때라 트랙터 바퀴에서 떨어진 논흙이나 밭흙이 시골길에 점점이 떨어진 채 이어져 있다. 흙덩이를 밟을 때마다 자전거는 덜컹덜컹. 뒤를 돌아보며 “괜찮아?” 하고 물으니 “좋아!” 하고 대꾸. 졸립지만 이렇게 수레를 타고 함께 달리니 무척 좋은가 보다.

- 아이 몸무게를 헤아린다면 아이보다 세 곱은 무거운 책짐을 수레에 실을 뿐 아니라 등에는 가방 가득 책을 넣은 채 오르막을 얼마나 오르내렸던가. 등이 홀가분한데다 고작 십 몇 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아이를 태우고 달리니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다.

- 보리밥집에 닿을 무렵 아이는 뒤에서 “다아 왔다!” 하고 외친다. 아이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구나. 자전거를 멈추고 안전띠를 끌러 아이를 내린다. 아이는 아이 까까 하나를 집는다. 엄마 까까를 하나 더 고르고 보리건빵 하나를 또 고른 다음 보리술 두 병을 셈한다. 팔천 원.

- 오던 길을 되짚어 달린다. 집을 나설 때에는 줄곧 “좋아!” 하고 외쳤으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조용하다. 아빠하고 자전거를 처음으로 함께 달린 느낌이 어떠하려나. 아빠는 2005년 무렵에 이 아기수레를 처음 장만했지 싶은데, 드디어 다섯 해 만에 이 아기수레에 참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달렸구나. 요 몇 해에 걸쳐 ‘자전거쪽지’를 좀처럼 못 쓰며 지냈는데, 띄엄띄엄 되더라도 오늘부터 차근차근 적어 보아야겠다. 아이를 수레에 태운 첫 날이 10월 12일, 가을이 무르익으며 겨울이 다가오는 철이라 겨울날 아이를 태우고 달리자면 아이가 애먹을 텐데, 추운 날 수레를 타고 달리다가 봄을 맞이하고 여름을 맞이해 보면, 우리 아이도 이렇게 자전거로 달리는 맛이 어떠한가를 살며시 느끼겠지. 내일은 수레에 깃대를 꽂아 큰길을 달릴 때에 자동차가 우리 수레를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쌓인 짐더미에서 깃대를 얼른 찾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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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어치 2010-10-12 23:21   좋아요 1 | URL
부럽네요, 아기수레를 끄는 아빠나 수레를 탄 아가 모두가. 우리 딸래미도 저 나이 때 저런 거 구해다가 태워줄걸. 그러저나 저 아가는 지금 무얼 생각하나. 좀 뿌듯해하는 얼굴 같기도 하고, 아빠 자전거 타는 솜씨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파란놀 2010-10-13 04:04   좋아요 1 | URL
졸려서 그래요. 낮잠을 자 준다면 한껏 들떠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을 텐데요..
ㅠ.ㅜ
오늘은 방방 뛰면서 놀지 않으랴 싶어요~
요 수레에는 48킬로그램까지 태울 수 있으니
아이가 컸어도 얼마든지 태울 수 있답니다~
 
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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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가 즐긴 아침
 [책읽기 삶읽기 8]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2010년 10월, 《팬티 인문학》이라는 책이 나왔다. 2006년에 숨을 거둔 일본사람 요네하라 마리 님이 쓴 책이고, 이분 책으로는 열 권째 한국말로 옮겨진다. 참 바지런히 옮겨내 주는구나. 그런데 《팬티 인문학》으로 옮긴 요네하라 마리 님 일본책 이름은 “パンツの面目ふんどしの沽券”이다. 우리 말로 고스란히 적바림하자면 “속옷(팬티) 참모습과 훈도시 값어치”가 될 텐데, 한국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앞에 ‘팬티’라는 이름을 붙여야 제법 눈에 뜨이며 잘 읽히는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미식견문록》은 일본에서 어떤 이름으로 나왔을까? 간기를 보면 알파벳으로 일본책 이름을 적어 놓는데, “RYOKOSHA NO CHOSHOKU”이다. 뭔 소리일까. 다시 더 알아보니, 이 일본말은 “旅行者の朝食”을 뜻한단다. 아하, 그러니까 “길손이 먹는 아침”이다. “나그네 아침밥”이든지.

 문득 궁금하다. 이렇게 ‘딱딱’하고 ‘똑똑’해 보이도록 책이름을 붙여야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글을 빛낼 수 있는가. 이처럼 ‘뭔가 그럴듯하게’ 붙여놓는 책이름이어야 “유쾌한 지식여행자” 이야기가 되는가.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붙은 책을 읽으면, ‘일본사람이지만 일본 바깥으로 오래도록 떠돌아다녀야 하던 요네하라 마리 님이 반갑게 먹거나 즐겁게 먹은 밥’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견문(見聞)’, 그러니까 “보거나 들어서 얻은 지식”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라, 요네하라 마리 님이 몸소 겪고 살아낸 이야기가 조곤조곤 나온다. 책 첫머리인 15쪽을 보면, “고전어 소양은 교육받을 수 있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증거요,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그 전통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발언 중에 틈만 나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섞어서 교양을 과시하는 것이 웅변술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별것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리라. 일본인이 고사성어를 즐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같은 대목이 있다. 일본사람이 ‘고사성어(또는 사자성어)’를 즐기는 일이란 거드름을 피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글월을 우리 말로 옮기며 ‘일맥상통’이라는 한자말을 집어넣는다. 딱한 번역이라고 할까. 17쪽에 곧바로 ‘뉘앙스’라는 낱말이 튀어나오는데, ‘느낌-말맛-말느낌-맛-마음’ 같은 우리 말로 옮겨적어야 알맞다. 175쪽 “이거야말로 내가 지으려는 집의 콘셉트가 아닌가”는 뭔 번역이랄 수 있으려나. “집 모양”이나 “집 얼개”나 “집 생김새”나 “집 모습”쯤으로 적어 놓아야 알맞다. 번역이 얄궂은 대목을 하나만 더 든다면, 158쪽 “의학자 디오스코리데스도 양배추의 약재로서의 효능을 칭찬하며”가 있다. “양배추가 약재로 좋다고 칭찬하며”쯤으로 적어 주어야지. 토씨 ‘-의’를 잇달아 쓰는 일본 말투를 그대로 옮기면 어떡하나. 이런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달린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처음부터 요네하라 마리 님 삶과 마찬가지로 애써 치레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흐름에 몸을 맡기어 즐겁게 살아가는 느낌을 북돋는 마음결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번역자는 책이름부터 살포시 붙이는 가운데 한결 따뜻하게 옮겼다면.

 이 책을 읽을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좋을까. 이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무엇을 생각해야 좋은가. 지식을 다루는 《미식견문록》인가? 삶을 말하는 《미식견문록》인가?

 꽤 거추장스러운 이름이요 속이 빈 이름이며 지나치게 부풀려 놓은 이름 때문에 자꾸 곁길로 샌다. 요네하라 마리 님한테는 ‘미식(美食)’, 곧 “좋은 밥”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펼치며 자랑하려고 이런 책을 썼겠는가. “나는 ‘버려진 아이들이 모험 끝에 성장하여 돌아온다’는 구조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그만큼 빈번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부모들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옛날이야기는 그런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142∼14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따사로운 손길을 느낀다. 책이름은 어줍잖게 《미식견문록》이지만, 정작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따숩게 마주하는 ‘밥 한 그릇에 얽힌 웃음과 눈물’이지 싶다.

 요네하라 마리 님으로서는 이 책에서 내내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듯한 요즘이지만, 자신을 조국에 묶어 두는 가장 튼튼한 동아줄은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좀 걱정스럽다. 요즘 와서 편의점 음식으로 크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217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이 어린 날부터 가까이 놓고 즐기던 먹을거리란 바로 ‘배고픔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내 어버이가 지내온 나날을 헤아리고 내 어버이와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여는 실마리가 되어 주는 밥, 한 마디로 ‘이야기 밥’임을 밝히고 싶었구나 하고 느낀다. 미국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에 빠져드는 까닭이란 바로 ‘미국사람 스스로 먹는 밥’ 때문이요, 일본사람 또한 미국사람과 비슷하게 밥을 먹으며 살고 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미국사람처럼 전쟁에 무디어지거나 전쟁에 미쳐 버리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스스로 즐겁게 살고플 뿐 아니라 따뜻하게 살고프며, 스스로 재미나게 살고플 뿐 아니라 아름다이 살고픈 넋을 글줄에 예쁘장하게 엮어 놓은 글쟁이 요네하라 마리 님이겠다고 느낀다. 창작이 아름답다면 번역 또한 아름다울 노릇이다. 다시 번역 얘기를 하고프지 않으나 두 가지를 더 들어 본다. “마음의 갈등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는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는 노릇을 하는지도”로 다듬어 주고,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음식임이 틀림없다”는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즐겨먹는 밥이다”로 다듬어 주고 싶다. 낱말은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말투는 고쳐야 한다. 낱말을 그대로 두고 싶다만 ‘역할’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둘 수 없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야 하니까. 요네하라 마리 님은 늘 생각을 하면서 살아낸 한 사람일 테니까.

 책을 덮으려다가 끝자락에 붙은 글쓴이 말을 거듭 읽는다.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 못 차리지만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전문가도 아니요, 미각에도 자신이 없다(245쪽).” 그런데 책이름은 《미식견문록》이다. 그지없이 슬프다.

 나는 집 바깥보다 집 안에서 더 오래 지내며 아이를 함께 돌본다. 웬만한 집일은 거의 다 한다. 이렇게 할밖에 없는 집 형편이지만, 집일을 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있어도 ‘집살림 잘하는 애 아빠’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대단하다 말할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대단할 구석이 없을 뿐더러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다. 이런 나한테 ‘육아의 달인’이라거나 ‘살림 전문가’란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가시방석일까. 그나저나 《미식견문록》이란 이름이 새겨진 책에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란 말까지 덧달린다.

 끔찍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요네하라 마리 님 글을 읽혀야 하나. 사람들 누구나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좋은 밥을 즐기는 삶을 꾸리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나누는 길을 여는 좋은 책으로 만들어서 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 아무래도 무엇이든 한국으로 들어오면 좋았던 책도 좋게 여기기 힘들고, 고왔던 이야기도 고운 이야기로 아로새기기 어렵구나. (4343.10.12.불.ㅎㄲㅅㄱ)


― 미식견문록 (요네하라 마리 글,이현진 옮김,마음산책 펴냄,2009.7.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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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의 아이 4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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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단한 만화에는 대단한 이름이 안 붙는다
 [만화책 즐겨읽기 4] 이가라시 다이스케, 《해수의 아이 (1∼4)》



 2008년 8월에 1권과 2권이 나온 뒤, 2009년 9월에 3권이 나오고, 2010년 9월에 이르러 비로소 4권이 나온 《해수의 아이》를 차근차근 읽습니다. 《해수의 아이》를 그린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은 《리틀 포레스트》라는 만화를 함께 그렸습니다. 저는 《리틀 포레스트》를 읽고 나서 《해수의 아이》를 읽었고, 집식구가 이이 만화책은 모두 훑고 싶다 해서 《마녀 (1∼2)》(2007)와 《영혼》(2008)을 장만하여 함께 읽었습니다.

 올해에 넷째 권이 나온 《해수의 아이》를 펴낸 출판사에서는 “장대한 스케일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로 이루어진 만화라 말하고, “이야기의 완성도와 대중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넷째 권이라 말합니다.

 출판사에서 누리책방에 보도자료를 띄운 그대로 《해수의 아이》는 틀림없이 큰 판을 짜서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도록 이끌어 가는 작품입니다. 이야기가 한결 빈틈없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곳곳을 가다듬으며 비로소 무언가를 밝히며 끝맺겠구나 싶습니다.

 처음 《해수의 아이》 1권을 집었을 때부터 두 해가 지나 4권을 집은 엊그제까지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 다른 만화에서도 얼핏 느끼지만, 무엇보다 《해수의 아이》를 보면서 이 만화에서는 ‘만화 그림’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만화 《해수의 아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텐데, 바닷물 안팎 이야기를 그리면서 ‘사진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립’니다. 네모난 틀에 나오는 그림결과 짜임새는 으레 ‘사진기로 들여다본 모습’입니다.

 어떠한 만화책이든 뒷그림을 그릴 때에는 사진을 찍어서 그린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서 밑그림을 그린 뒤에 펜으로 마무리하자면 힘드니까요. 사진을 찍어 놓고 일터로 돌아와서 뒷그림을 그리며, 이러한 뒷그림은 흔히 다른 이한테 도움을 받아 그립니다. 널리 알려진 만화 《요츠바랑!》을 잘 살피면, 이 만화에 나오는 뒷그림이나 무대나 자전거 그림 들은 ‘만화로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사진을 만화로 옮긴 그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요츠바랑!》 1권부터 9권까지 보는 내내 ‘처음부터 만화로 여기어 만화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찍은 다음 만화로 옮긴 그림’이었기 때문에 못마땅하다거나 거리끼는구나 하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요츠바랑!》에서는 이러한 그림결이 만화 이야기에 살며시 잘 녹아듭니다. 이와 달리 《해수의 아이》에서는 ‘사진 틀거리에 맞춘 그림’이 작품에 썩 녹아들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에서 옮겨 그린 그림이면서 ‘구도가 깨진’ 그림이 있는가 하면 ‘조화가 어긋난’ 그림이 자주 보입니다. 흔한 말로 ‘데생 연습이 모자란’ 셈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일부러 ‘못 그리는 그림’으로 만화를 그리는 분이 있습니다만, 그림이 좀 어설프더라도 이야기를 슬기로우며 알차고 재미나게 이어가면 ‘어설픈 그림’이 외려 힘이 되거나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만화 《해수의 아이》에 고래가 자주 나옵니다. 고래를 이야기하기로는 소설 《모비딕》이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얼마 앞서 소설 《모비딕》을 새롭게 다시 읽은 적 있는데, 《모비딕》을 읽는 동안 《해수의 아이》가 떠올라 이 만화를 겹쳐 읽고 보니(《모비딕》 새 번역은 2010년 1월에 나왔습니다. 새 번역을 읽으며 《해수의 아이》 1∼3권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은 ‘만화책에서 고래 발자국을 바탕으로 바다와 우주와 사람과 어머니와 자연과 목숨과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 하나 그리고팠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구나 그리고픈 만화를 그려야 합니다. 어느 때에 이르러 나 스스로 그리고픈 만화를 그릴 수 있고, 부딪히고 싶을 때에 부딪히며 그릴 수 있습니다. 한창 무르익은 다음에만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가 지나야만 제대로 무르익는 만화쟁이로 우뚝 서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그리는 내 만화가 나로서는 가장 무르익을 때 그리는 만화로 여길 수 있어요.

 이제 5권이 나올 《해수의 아이》는 5권으로 끝을 맺을는지, 6권이나 7권으로 이어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어떻게든 끝을 내겠지요. 그런데 작품 하나를 끝맺으면서 읽는이한테 말고 그린이 스스로 무엇을 깨닫거나 보거나 헤아릴는지 모르겠습니다. 만화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읽거나 보는 사람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바야흐로 ‘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만, ‘읽거나 보는 사람에 앞서 그리는(또는 쓰거나 찍는) 사람부터 당신 스스로 당신 가슴이 뭉클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 ‘작품’이라고 밝히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한테 《해수의 아이》는 어떤 만화일는지요?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한테 이 만화는 ‘작품’으로 꼽을 만한지요?

 굳이 출판사 보도자료에 적힌 몇 마디를 들었습니다만, 만화 《해수의 아이》는 가없이 크고 넓은 우주와 자연과 바다와 어머니와 삶과 사랑과 목숨 들을 골고루 뒤섞어 알뜰히 보여주고자 힘씁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우주’라는 낱말을 꺼내야 우주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듯 집에서 손수 굽는 빵 하나와 빚는 양념 하나에 얼마든지 너르고 깊은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어, 이 양념은 어릴 적에 어머니하고 …….’라 읊으며 무언가 깨닫는 사이 저절로 어머니 이야기를 너르고 깊이 다룹니다. 생각없이 숲길이나 시골길을 거니는데 ‘사각’ 소리를 내는 가랑잎을 밟은 그때에 나 스스로도 모르게 자연을 밝힌 셈입니다. 힘든 나날이라 도쿄를 떠나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가 지내며 마주하는 사람들하고 시나브로 사랑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섣불리 내세운다고 제대로 내세워지지 않는 삶입니다. 대학교 철학과를 다녀야만 철학을 하지 않습니다. 철학교수여야 생각이 깊거나 너르겠습니까. 데생 솜씨가 온누리에서 첫손을 꼽아야 그림을 가장 잘 그리거나 만화가 가장 아름답다 하겠습니까. 가장 비싼 장비를 써야 사진을 가장 잘 찍지 않는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은 비싼 장비를 쓰고파 하는 마음앓이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더 비싸거나 더 크거나 더 빠른 차를 장만해야 서울이나 부산 같은 도시에서 출퇴근을 더 느긋하며 즐거이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은 두 다리로 출퇴근할 줄 모를 뿐더러 자전거로 출퇴근할 줄조차 모릅니다. 길이 막혀 길에서 기름을 쏟아부으며 버리는 돈뿐 아니라 애먼 시간을 헤아리면서, 아침에 삼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일찍 나서며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가면 내 삶과 삶터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살필 겨를이 없는 한국사람이고 서울사람(도시사람)입니다.

 《해수의 아이》 5권이 나오면 곧바로 장만할 생각입니다. 6권이나 7권까지 나오더라도 기쁘게 장만하겠지요. 그러나 1권을 집었을 때부터 4권까지 오는 동안 ‘만화를 읽는 즐거움’과 ‘작품 하나 만나는 재미’가 자꾸 옅어집니다.

 긴 작품을 그리고 싶으면 참말 길게 바라보며 길게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짧은 작품이라 해서 빼어난 작품이 아닐 수 없을 뿐더러, 짧게 끝맺는 작품을 하나둘 꾸준히 내놓다 보면, 바로 이 ‘짧은 작품이 끈처럼 하나로 이어지며 또다른 긴 작품’ 하나로 새삼스레 태어나거나 거듭나는 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애써 힘겹게 너무 ‘커다란’ 말과 이야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풀숲에 깃든 수많은 들풀 가운데 한 포기만 바라보아도 얼마든지 목숨 하나와 자연 사슬을 밝힐 수 있으니까요.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지구인데, 사람 이야기 하나 못 다루겠습니까. 좋은 끈은 가까이에 있어요. 바다는 늘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 스스로 참다이 느끼려 하지 못하니 못 느낄 뿐이랍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 님이 흘리는 땀방울이 고요하게 묻어나 촉촉해지는 작품 하나를 다시금 만나고 싶습니다. 팔에서 힘을 빼셔요. 머리에서 생각을 지우셔요. 마음에서 아쉬움을 터셔요. (4343.10.11.불.ㅎㄲㅅㄱ)


― 해수의 아이 (1∼4) 

 (이가라시 다이스케 글·그림,김완 옮김,애니북스,2008∼2010/95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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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발바닥과 고무신


 새 고무신을 신으면 보름쯤 발등 끝하고 뒷꿈치가 까진다. 제아무리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혀 있더라도 새 고무신에는 견디지 못한다. 까져서 피가 흐른다. 양말을 신으면 좀 다르겠지. 양말을 안 신는 맨발로 살아가면 새 고무신이 처음에는 퍽 힘들다. 그러나 내가 땅을 늘 밟으며 농사짓는 사람이었다면 발등 끝이랑 뒷꿈치가 안 까지리라 본다. 맨발로 날마다 열 몇 시간씩 흙을 밟으며 풀이랑 살았으면 새 고무신을 신으며 발이 아플 일이 없을 뿐더러, 맨발로 어디로든 홀가분하게 다니지 않겠는가.

 사흘에 걸쳐 인천과 서울을 오락가락하며 참 많이 걸어다니다가 책으로 꽉 찬 큰 베낭을 짊어지고 충주 산골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발바닥을 쪼물딱쪼물딱 만져 준다. 발가락 끝부터 뒷꿈치 위쪽까지 단단하면서 조금 욱신거린다.

 문득 군대에 있을 적이 떠오른다. 군대에서 훈련을 한다며 걸을 때에는 열 몇 시간을 한 차례조차 안 쉬며 걷기도 하는데, 군대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걸을 때에는 발에 물집이 잡힌다. 한겨울에도 군화 신은 발에는 땀이 찬다. 군인들 신발은 바람이 들지 않으며 두꺼운 양말을 신으니까.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몸을 씻고 비로소 느긋이 드러누울 때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면 허연 살덩이가 말랑말랑하다. 군인은 아무리 많이 오래 걸어도 발바닥에 꾸덕살이 박히기 어렵다. 후끈후끈하며 땀이 가득 차는 좁은 데에 갇히는 발은 냄새를 끌어안을 뿐이다. 발이 숨을 쉬지 못한다.

 고무신을 맨발로 신으면 발에 땀이 차지 않는다. 금세 땀이 다 마르니까. 발은 늘 숨을 쉬고 얇은 고무 바닥 하나인 신발은 발바닥이 스스로 단단해지도록 이끈다. 이런 신발 한 켤레가 고작 3000원이니 나로서는 다른 어떤 신을 신을 수 없다. 신나게 고무신을 신으면 열 달이나 열두 달이면 뒷굽이나 바닥이나 옆이나 모두 닳아 더는 발가락을 꿰기 어렵다. 밑창이 찢어져 꿰매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무신인데, 이제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 아니고는 신을 일이 없을 뿐더러 농사짓는 사람들은 으레 손으로 농사짓기보다 기계로 농사를 지어 버릇하기 때문에 웬만한 농사꾼 아니면 발이 까지도록 하는 고무신을 반기거나 찾아서 즐기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할 테지. 진작부터 ‘한국 공장’이 아닌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 들여오는 고무신이다. 그나마 고무신을 애써 찾는 시골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중국 공장에서도 더 만들지 않는단다. 3000원짜리 ‘참 고무신’은 자취를 감추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5000원짜리 ‘무늬만 고무신’을 판다. 이제 내가 몇 켤레 미리 사 둔 고무신이 다 닳아 버리면 나로서는 고무신을 더는 못 신으려나. 참 고무신을 더는 장만할 수 없으면, 내 발바닥은 내가 딛는 땅을 얼마나 살가이 받아들일 수 있으려나. (4343.10.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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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맞이해서 우리 말글 이야기를 하나 더 걸쳐 놓는다. '말'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이 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헤아리리라 믿지 못한다. 말 이야기를 놓고 보면 한국사람은 모조리 엉터리이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통째로 멍텅구리이다. 바탕이 될 생각조차 서 있는 사람은 아예 없다 할 만하다.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963) -의 우려 2 : 카슨의 우려대로

.. (레이첼) 카슨의 우려대로 논은 침묵의 땅이 되었다. 귀 따갑게 울어대던 개구리도 종적을 감추었고 ‘뜸북, 뜸북’ 하며 논에서 울던 뜸부기도 〈오빠 생각〉만큼이나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38쪽

 ‘우려(憂慮)’는 ‘걱정’이나 ‘근심’으로 고쳐써야 알맞습니다만, 우리 말과 글을 옳게 가누는 분이 나날이 줄어 ‘걱정’이든 ‘근심’이든 ‘끌탕’이든 알뜰살뜰 가누어 내놓은 글을 읽기란 몹시 힘듭니다. “침묵(沈默)의 무엇”이라는 말투는 우리 말투가 아닌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다운 말투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 자리에 나오는 ‘침묵의’는 ‘소리를 잃은’이나 ‘소리가 없는’이나 ‘조용한’쯤으로 다듬습니다. ‘종적(?跡)’은 ‘자취’로 손질하고, ‘과거(過去)’는 ‘옛날’이나 ‘지난날’로 손질해 줍니다.

 ┌ 카슨의 우려대로
 │
 │→ 카슨이 걱정한 대로
 │→ 카슨이 근심한 대로
 └ …


 한 번 입에 익거나 몸에 배면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얄궂은 버릇입니다. 예부터 어른들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습니다. 손버릇이든 말버릇이든 어릴 적 익은 대로 어른으로 자랍니다.

 오늘 이 나라 삶터를 헤아리면,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 앞에서 말을 알맞고 바르며 옳게 가누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 앞에서 돈벌이 빼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려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돈을 많이 잘 벌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이들 또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비손하는 어른이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착하고 참되며 고운 마음결을 건사하면서 아이들 또한 착하고 참되며 고운 마음결을 사랑하도록 돕는 어른이란 만나기 어렵습니다.

 참 마땅한 노릇입니다. 아이들 말이 엉터리라면 어른들부터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아무렇게나 망가뜨리며 쓴다면 어른들부터 말을 함부러 망가뜨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그녀’라는 말을 신나게 써대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조차 ‘그녀’라는 말을 쓸 뿐 아니라, 너덧 살짜리 어린이마저 ‘그녀’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과 꾸리는 삶을 송두리째 쏙쏙 잘 빨아들입니다.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으레 좋은 모습을 빨아들이고, 궂은 모습으로 지내는 어른이라면 궂은 모습을 빨아들입니다.

 ┌ 논은 침묵의 땅이 되었다
 │
 │→ 논은 조용한 땅이 되었다
 │→ 논은 고요한 땅이 되었다
 │→ 논은 소리없는 땅이 되었다
 │→ 논은 죽은 땅이 되었다
 └ …


 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른이라면 누구보다 어른 내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겠다는 어른이라면 누구보다 어른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사랑을 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나누며 살아가는 대로 믿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고운 삶보다 돈있는 삶을 바라니까 농사짓는 이들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댈밖에 없어요. 사람들 스스로 좋은 삶보다는 돈되는 삶을 꿈꾸니까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무늬만 국산’이면서 ‘게다가 아주 싼값으로’ 사먹어야 하는 줄 잘못 압니다.

 아름답지 못한 나라에서 아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한국사람이기에, 이와 같은 한국사람이 말이나 글을 아름답게 펼치리라고는 바랄 수 없습니다. 정치나 교육이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입방아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오로지 내가 선 자리에서 내 나름대로 내 땀을 흘리는 만큼 이루는 정치요 교육이요 사회요 경제요 문화입니다. (4343.10.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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