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과 글쓰기


 엊저녁에 아이 손발톱을 깎다. 아이 오른엄지발톱이 또 부러졌다. 자주 깎아서 부러지지 않게끔 해야 하는데 늘 갖은 일에 치이니까 손발톱 깎기를 자꾸 잊거나 놓친다. 하기는, 내 손발톱조차 못 깎으니까. 아이 손발톱을 깎았으니 내 손발톱도 깎아야 할 텐데 언제쯤 틈을 내어 깎을 수 있을까. 문득 내 손톱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넷째와 닷째 손톱이 한쪽으로 갈려 있다. 넷째 손톱은 갈린 끄트머리가 꽤 쓰라리다. 날마다 손에 물이 마를 새 없이 집일을 하고 손빨래를 하니까 내 손발톱은 남아날 수 없다. (4343.10.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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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신문


 광벌로 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음성읍사무소에서 충북 신문들을 훑다. 운동경기 소식을 아예 안 싣는 신문이 여럿 된다. 운동경기 소식을 싣더라도 방송편성표하고 주식시세표를 안 싣는 신문이 꽤 많다. 어쩌면 충북 쪽 신문들은 이 세 가지를 거의 안 다루거나 다루더라도 아주 작게 다룬다고 할 만하다. 생각해 보면, 시골사람한테는 박지성이나 추신수나 김연아나 추성훈이나 …… 여자축구나 …… 거의 부질없는 얘기이다. 이런 얘기까지 시골신문이나 지역신문이 다룰 까닭이 없다. 시골신문이나 지역신문이라면, 시골사람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와 지역 살림살이와 자연 터전을 보듬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을 노릇이다. 그러나 충북 신문들은 시골사람 삶이나 지역 살림살이 이야기보다는 지역 정치꾼과 지역 공무원 이야기로 가득하다. (4343.10.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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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38 : 숨을 거둔 교육잡지와 에누리 책잔치

 다달이 나오던 교육잡지 《우리교육》은 첫 책이 나온 지 스무 해가 된 올 2010년에 그예 문을 닫습니다. 돈벌이가 잘 안 된다면서 출판사와 전교조 간부들은 ‘교육 월간지’를 ‘전교조 기관지’로 바꾸었습니다. 잡지 《우리교육》을 만들던 일꾼들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쫓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교사 권리를 지키거나 북돋우자며 일어선 전교조에서 ‘정리해고’를 했습니다.

 1990년 10월에 나온 통권 8호 《우리교육》을 펼칩니다. 지난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님이 쓴 글 하나 실려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문학 교육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시를 머리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쓰나? 시는 머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이다. 아니 손과 발로, 온몸으로 쓴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도 그렇다. 아무것도 겪은 것이 없이 머리로만 재주로만 만들어 낼 수는 결코 없는 것이 시다(95쪽).”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시쓰기뿐 아니라 소설쓰기도 마찬가지이고, 동화나 신문글을 쓸 때에도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아니 글쓰기를 비롯해 집살림을 꾸린다든지 정치를 한다든지 교육운동을 한다든지 환경운동을 한다든지 똑같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머리로 할 수 없습니다.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할 때에는 몸으로 합니다. 손을 쓰고 발을 씁니다. 온몸을 움직여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어린이 글을 읽습니다. 1990년에 경기 금광국 5년인 황미소 어린이는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고 우리 입장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어른이 싫어요. 우리들에게 학원을 몇 개씩이나 보내고, 조금만 잘못해도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잖아요(12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공부만 시키는 어른들 삶은 1990년이나 2010년이나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1980년에도 1970년에도 엇비슷했습니다. 2020년이 다가온대서 나아질 성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온갖 학원에 집어넣는 매무새도 그렇고, 아이들을 두들겨패거나 윽박지르는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우리 어른들 삶은 그리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1990년에 스물이었다면 올해에는 마흔이요, 이무렵에 서른이었다면 올해에는 쉰입니다.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며 예순이 된 2010년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얼마나 씩씩하며 튼튼하고 슬기로운 삶을 일구고 있는지요. 우리 어른들 스스로 씩씩하며 튼튼하고 슬기롭기에 돈벌이 하나 때문에 교육잡지 목숨줄을 끊어도 괜찮은지요.

 교육잡지 목숨줄을 끊은 우리교육 출판사는 “여름방학 어린이책 파격! 균일가전!!”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우리교육에서 펴낸 낱권책을 모조리 2000원씩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서울 홍대 앞에서 벌어지는 와우북페스티벌이라든지 서울 삼성동에서 이루어지는 서울국제도서전이라든지 경기 파주에서 마련하는 북페스티벌 같은 자리는 으레 ‘에누리 책잔치’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책을 싸게 사고판다’고 하지만 좋은 책이라면 알맞춤한 값을 붙여 올바로 사고팔아야 할 텐데, 몸집이 커지는 출판사들은 자꾸 ‘책 팔아 더 많은 돈 벌기’로 쏠립니다. (4343.10.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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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차와 글쓰기


 자전거는 ‘잔차’라고도 일컫는다. 두 글자로 줄여 일컫는 이름인데, ‘잔차’라는 이름을 듣거나 말해야 할 때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다. 이때에는 자전거 또한 여느 자동차와 매한가지로 ‘차’라는 느낌이 짙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내 두 다리와 마찬가지인 자전거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다. 이제 두 돌이 지난 딸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둘이서 신나게 읍내마실을 다니는 꿈을 꾼다. 자전거수레를 산 지 일곱 해 만에 드디어 우리 아이를 여기에 태우고 다닐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혼자 들뜨고 기쁘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놓고 오늘날처럼 자연 터전을 무너뜨리는 흐름을 뒤바꾸거나 거스를 수 있는 환경사랑 탈거리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자전거길을 마련한다며 수백 수천 억이라는 돈을 퍼붓는단다. 그러나 자전거 삶이란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전거를 북돋우는 정책은 돈으로 펼칠 수 없다. 자전거 정책은 사람이 할 정책이고, 자전거 즐기는 삶이란 사람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삶이다.

 아이가 없을 때부터 나랑 한몸이 되어 주던 ‘허머(hummer)’라는 자전거가 한 대 있다. 아마 나하고 십만 킬로미터 넘게 달렸을 텐데, 처음 이 자전거를 헌 것으로 살 때 부속이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자전거를 처음 산 뒤로 여러모로 삐걱거렸기에 여러 자전거집에 들러 꽤 자주 퍽 많이 손질했는데, 들르는 자전거집마다 ‘어, 이 자전거에 왜 이리 싸구려 부속이 붙어 있지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예나 이제나 자전거 부속 급수에는 눈길을 두지 않는다. 튼튼하고 신나며 즐겁게 탈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자전거집 일꾼들은 내가 2004년 즈음에 헌것으로 산 이 자전거에 치른 돈이 너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아마 자전거집 일꾼들 말이 모두 옳으리라. 난 틀림없이 바가지를 썼으리라. 그러나 나로서는 지난 예닐곱 해에 걸쳐 ‘자전거값을 뽑고 남을 만큼 즐겁게 이 자전거와 함께 살았’다. 나로서는 이뿐이다. 내 삶을 즐기고 내 몸을 놀릴 수 있으면 고맙다.

 나로서는 내 삶을 즐기며 내 넋을 담을 수 있는 글쓰기이면 고맙다. 글 한 줄을 써서 돈을 번다든지 이름을 높인다든지 할 수 있겠지. 나는 자원봉사로 여러 매체에 글을 써 주는데, 어제 이들 가운데 한 곳에서 글삯을 보내 주겠다며 전화를 두 차례 걸었다. 손사래치다가 안 되어 글삯을 받기로 했다. 아직 은행계좌를 살피지 못해 얼마나 넣으셨는지 모를 노릇인데, 나한테 넣은 글삯만큼 이 매체에 도움돈으로 돌려주려고 생각한다.

 시골길을 달리며 길가에서 쉬는 나비와 메뚜기와 잠자리를 다치지 않게 하며 서로 오붓한 벗이 될 수 있는 자전거 타기를 오래오래 즐기고 싶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내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대로 아이와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글쓰기를 두고두고 즐기고 싶다. (4343.10.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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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책읽기 삶읽기 7] 성석제, 《농담하는 카메라》



 소설쓰는 성석제 님이 쓴 산문책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다. 책날개를 펼치니 성석제 님이 사진기와 사진찍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찬찬히 나와 있다. 그래, 책이름부터 “농담하는 카메라”이니 사진과 얽혀 성석제 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풀어내지 않았으랴 생각하며 집어들었다.

 언제였더라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는 책을 낸 분이 있다. 책이름에 끌려 하마터면 이 책을 살 뻔했는데, 헌책방이라는 책쉼터를 제대로 즐기며 제대로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섣불리 돈을 치르지 않았다. 먼저 책방에 찾아가 책을 좀 읽어 보았다. 그러니 웬걸, 책이름은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 붙였으나 정작 헌책방 이야기는 한 줄조차 안 적었다. 더욱이 이 책 《헌책방에 관한 명상》은 헌책방을 생각하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좀 흔한(?)’ 문학평론이었다.

 책이름에 ‘헌책방’을 넣는다고 반드시 헌책방을 이야기해야 하지는 않는다. 책이름에 ‘자전거’를 붙인다고 꼭 자전거를 말해야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이름에 ‘카메라’를 적었다고 으레 사진 삶을 다루어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책은 사진기와 사진찍기 이야기를 첫머리에 잔뜩 적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서 몸글에는 사진 이야기는 딱 두 번 나온다. 더군다나 두 번째 사진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카파라치’에게 표시가 불분명한 갓길을 주행하는 장면을 찍혀서 상상도 하지 못한 벌과금을 물었다. 화는 났지만 어떻든 조심하게는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카메라가 미국의 총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속단속 카메라에 곳곳의 CCTV, 수천만 대의 디카, 휴대전화 카메라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인터넷까지 있는데(291쪽).”이다. 책을 덮으며 혼잣말을 한다. ‘제길, 속았군!’ ‘어어, 이봐, 사진기만이 아니라 펜 또한 총 구실을 한다고.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여러 사람 목숨을 앗지만, 글 또한 섣불리 쓰면 여러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책을 장만한 돈이 아깝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란 없다. 내 마음을 건드리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책만 끝까지 읽으려 한다. 내가 책을 장만하는 데에 쓰는 돈은 내 살림돈 가운데 절반 가까이 되니까. 날마다 사들이는 책 숫자는 줄잡아 다섯 권쯤 되니까. 읽다가 ‘제대로 안 살피고 잘못 산 책’이라면 나보고 읽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다른 책을 읽을 겨를을 빼앗기는 셈이다. 그나마 요사이에는 우리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며 가끔가끔 아빠가 아이랑 ‘안 놀아’ 주고 아빠가 읽고픈 책을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읽는다. 아빠가 저 좋다는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는 아빠 무릎에도 앉고(앉아서 읽으면) 등이나 허리나 배에도 앉는다(눕거나 엎드려서 읽으면). 언제나 한손에는 볼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데, 아이는 아빠가 손에 쥔 볼펜을 뺏으려 한다. 집에 볼펜이 수십 자루 곳곳에 널려 있는데 그예 아빠 손 볼펜을 뺏으려 하고, 아이는 아빠가 읽는 책에 뭔가 끄적이고 싶어 한다.

 엊그제 《농담하는 카메라》를 억지로 끝까지 읽는 동안 아이는 아빠한테 달라붙지 않는다. 웬일이라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으며 고작 두어 군데 밑줄을 그었을 뿐, 나로서는 ‘널리 이름있고 사랑받는’ 성석제 님 글이 썩 재미나다거나 놀랍다거나 괜찮다거나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책을 읽으며 자주 밑줄을 긋는다든지,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을 빈자리에 신나게 끄적이다 보면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아빠 손 볼펜을 빼앗으려 한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두 다리나 자전거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자가용 몰기를 즐겨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은 못 읽겠다. 내가 바라보는 누리하고 너무 달라서 못 읽지는 않는다. 내가 꿈꾸는 누리하고 글쓴이가 살아가는 터전이 몹시 동떨어지기에 못 읽지도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먹을거리를 사거나 볼일을 보러 다니다 보면, 요즈음은 날마다 ‘차에 밟히거나 치여 죽은 풀벌레와 나비와 잠자리’를 여러 열 마리씩 본다.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쌀쌀한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이 따뜻하니까 길가에 앉아 쉬는 메뚜기며 사마귀며 뱀이며 나비며 잠자리며 벌이며 …… 자동차는 아무 느낌이나 아픔조차 없이 이들을 짓밟는다. 자전거를 몰면서 길바닥을 잘 내려다보지 않으면 나부터 이들을 밟을까 걱정스럽다.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다닐 때에는 이 버스한테 밟혀 죽는 풀벌레를 느끼지 못한다. 천천히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풀벌레 죽음을 못 느끼는데,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숱한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풀벌레 죽음이나 생채기를 한 번이라도 느끼려는지. 게다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에 내 앞에서 하느작거리다가 자전거나 내 머리나 얼굴이나 몸에 부딪히는 나비나 잠자리는 맥을 못 추고 풀숲이나 길바닥에 뾰로롱 떨어진다. 고작 자전거에 부딪히고도 크게 다치거나 죽는 풀벌레인데 차에 부딪히면 어찌 되겠나.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시골길을 다니며 풀벌레가 내 몸에 부딪힐 때에는 풀벌레가 다치지 않으나, 기껏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풀벌레는 크게 다친다. 다만, 오르막을 낑낑거리며 달릴 때에는 잠자리나 나비가 내 자전거 손잡이에 내려앉곤 한다.

 자동차를 몬다고 몹쓸 사람이라거나 못된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동차를 몰기 때문에 ‘우리 누리와 삶터를 더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으며, 이처럼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음을 ‘아예 못 느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으로 말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삶이 아닌 어긋난 삶이다.

 성석제 님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맛난 밥’을 먹으러 다닌다. 글솜씨가 꽤 있어 성석제 님 글을 좋아할 만한 분이 많겠다고 느끼지만, 사람들은 성석제 님 글에서 ‘글솜씨’ 말고 무엇을 읽거나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솜씨와 글재주와 글멋과 글맛에 앞서 다른 무엇인가를 글줄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성석제 님은 성석제다운 무엇인가 뜨겁고 넉넉한 매무새를 고이 실어야 하지 않을까. “여름에는 면을 몇 번 뽑기도 전에 주인이 입은 옷이 온통 땀으로 젖어 버린다. 면을 뽑는 건 요리사지만 면이 요리사에게서 뽑아내는 것도 있지 싶을 정도다. 주인은 기계를 쓰지 않는다. 기계를 쓰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계를 써서 대량생산을 할 정도로 손님이 많지도 않다. 배달할 사람이 없어 배달도 하지 않는다. 요점은 손으로 면을 뽑아서 음식을 만드는 그곳이 그 면의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19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어딘가 아쉽다. 무언가 더 해야 할 말을 못했구나 싶고, 사람과 사물을 퍽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할 만하지만 참말 꼼꼼히 들여다보며 쓴 글인지 알쏭달쏭하다.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무엇일까? 성석제 님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다가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써서 책으로까지 내놓아 사람들한테 읽히려 하는가?

 내 오랜 골목동네 단골 중국집에 요즈음은 거의 못 간다. 맛이 없어서 못 가지 않는다. 나같이 바보스러운 단골이 괜히 이 단골집 손맛을 이곳저곳에 알리는 바람에 그만 이 집에 손님이 넘치고 말아, 지난해부터였나 아침 열한 시에서 낮 세 시 무렵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어야 하는 데로 바뀌었으며, 이곳 일꾼은 저녁까지 쉴 겨를조차 없이 일하며 밥을 못 드신단다. 하도 일이 많고 일손이 밀려 젓가락 설거지조차 못해 나무젓가락을 쓰는데다가, 낮 두어 시면 일찌감치 짜장면이 다 떨어질 뿐더러 저녁 대여섯 시이면 그날그날 마련하는 밥감(음식재료)마저 다 떨어진다. 예전에는 배달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배달을 나갈 엄두를 못 낸다. 요리사나 잡일꾼을 더 둔다면 한결 일이 수월할 테며 덜 바쁠 뿐 아니라 돈 또한 훨씬 많이 벌 테지. 그러나 내 단골 중국집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하겠는가.

 성석제 님이 《농담하는 카메라》라 하는 자그마한 산문책 하나에서 이 모든 실타래와 이음고리를 밝히거나 풀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타래를 풀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과 얽힌 실타래를 건드릴 수 없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밝히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이 놓인 자리나 뿌리를 보듬을 수 없다.

 나로서는 사랑을 담지 않은 글과 믿음을 싣지 않은 사진을 볼 때만큼 못마땅하며 힘들 때가 없다. 글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써 내는 잘 팔리는 글책은 도무지 못 읽어 주겠다. 손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엮어 내는 꽤 이름값 높은 사진책은 참말 못 봐 주겠다. 글은 손으로 끄적인다지만, 손으로 끄적이기 앞서 마음으로 쓴다. 사진은 손으로 기계 단추를 눌러 찍는다지만, 손으로 단추를 누르기 앞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기록하는 글쓰기”라고 말하는 성석제 님은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서 당신이 들여다보거나 마주하거나 지내 온 삶을 ‘조곤조곤 당신 깜냥껏 말맛과 말치레를 달아’ 풀어 놓는다. 아주 나쁜 책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꽤 팔릴 만하다 싶은 책이다. 그런데 성석제 님은 ‘꽤 읽힐 만’하다는 대목하고 ‘꽤 팔릴 만’하다는 대목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 않는가 싶다.

 글쓰기를 하며 살아간다는 분으로서 ‘요지 + 의’ 말투가 지나치게 자주 나오는 대목이 껄끄럽다. “손전화기를 쓰지 말라는 요지의 안내를 했다(235쪽)”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요지의’를 보는데, 글을 이렇게 쓰면 어떡하나. 88쪽 “사설시조가 있음으로 해서”라든지, 308쪽 “차의 에어컨”이라든지, 37쪽 “지리산에 처음 간 것은”이라든지, 43쪽 “어리석음(貪瞋癡)이 없는”이라든지, 10쪽 “시간을 확인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라든지, 20쪽 “유이무삼(有二無三)하게 인정한” 같은 글월은 곰곰이 돌아보며 스스로 가다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여 ‘막국수’라는 이름 풀이에서 ‘막’은 “마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막’은 “바로 이제”를 뜻하기도 한다. “이제 막 나온 국수”를 가리켜 ‘막국수’라고 할 수 있으며, 막국수집을 하는 분들 가운데 ‘막국수’를 아무렇게나 해서 먹는 국수가 아니라 그때그때 손님이 주문을 할 때에 바로바로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먹도록 하는 국수라 말하며 마련하는 분이 있다. 이름 하나를 풀이할 때에 섣불리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하는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 (4343.10.1.쇠.ㅎㄲㅅㄱ)


―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글,문학동네 펴냄,2008.6.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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