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문자리
신미식 지음 / 처음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35

 


사진을 찍는 자리
― 머문 자리
 신미식 사진·글
 처음 펴냄,2002.10.15./5800원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신미식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곳 이름을 붙여 ‘갤러리카페’를 엽니다. 먼저 ‘마다가스카르’를 서울 효창동에 열고, 다음으로 ‘에티오피아’를 서울 홍대앞에 엽니다. 사진을 찍으러 여행길에 나서면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들 텐데, 살림돈 푼푼이 아끼고 그러모아 당신 꿈 가운데 하나를 이루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 삶길을 스스로 씩씩하게 걷고 싶어 2007년부터 ‘사진책 도서관’을 열어서 꾸립니다.


  나는 신미식 님 갤러리 카페에 가 보지 못합니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까지는 한참 머니까요. 먼발치에서 다른 사람들 누리사랑방 기웃거리며 어떻게 생기고 어디에 있는가 하는 대목만 구경합니다. 우리 집 어린 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이들 스스로 저희 짐을 저희 가방에 짊어지며 함께 돌아다닐 수 있다면, 갤러리 카페뿐 아니라 온누리 어디라도 서로 어깨동무하며 찾아갈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시골마을에서 시골바람 마시며 튼튼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인 만큼, 아이도 아이 어버이인 나도, 시골집에서 시골흙 보듬는 삶을 누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미식 님이 2002년에 당신으로서는 처음 내놓은 사진책 《머문 자리》(처음,2002)를 읽습니다. 신미식 님은 “처음으로 사진을 접하게 됐던 시절, 화려함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면 늘 있는 하늘, 그 드넓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습니다(6쪽).” 하고 말합니다. 풋풋한 마음 잘 드러내는 말이로구나 싶으면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참다운 평화를 ‘수수한 사람들 삶’에서 느꼈다고 하지만, ‘눈부신 사람들 삶’이라 해서 참다운 평화가 없을 까닭은 없어요. 눈부신 사람이란,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이 아니거든요. 눈부신 사람이란, 삶을 즐기고 사랑하며 아름답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드넓은 하늘 같은 사람이 수수한 사람이면서 눈부신 사람입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 같고, 따스히 내리쬐는 햇살 같으며, 시원하고 맑은 물 같은 사람이 바로 수수한 사람이면서 눈부신 사람이에요.

 


  수수한 사람이란, 돈이 적거나 이름이 안 났거나 힘이 여린 사람이 아닙니다. 수수한 사람은 그야말로 삶을 즐기는 사람이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삶을 아름답게 일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미식 님은 ‘수수한 사람’을 만나거나 ‘눈부신 사람’을 마주하면서도 더러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맙니다. “페루의 인디오 소년이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쩌면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 어린 소년의 미소는 어떤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요? 자주 웃지 못한 환경 탓인지 어색한 표정의 미소는 못내 아쉬움을 남깁니다(19쪽).” 하고 말하는데, 왜 페루 사내아이 얼굴빛이 ‘만들어진 웃음’이라 여길까요. 페루 사내아이 삶을 얼마나 들여다보거나 함께하거나 마주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찡그린 웃음이건 고단한 웃음이건, 웃음이란 모두 웃음입니다. 이를 환히 드러내고 까르르 터뜨려야만 웃음이 아닙니다. 실웃음이 있고 함박웃음이 있어요. 눈웃음이 있고, 이웃음(이를 드러내는 웃음)이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낯빛은 웃는 얼굴에만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며 땀흘리는 얼굴에도 사랑스러운 낯빛이 있습니다. 나물을 뜯고 쟁기질을 하는 얼굴에도 아름다운 낯빛이 있습니다. 아기를 안고 밥을 짓는 얼굴에도 고운 낯빛이 있어요.


  신미식 님은 사진을 찍을 적에 더 생각하고 살펴야지 싶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라든지 길손으로서 찍는 사진인지, 아니면 서로 이웃으로서 사귀거나 만나려고 어깨동무하면서 찍는 사진인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서로서로 스스럼없이 헤아리면서 어깨동무할 때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다 함께 웃고 울면서 밥을 나눌 적에 사진꽃 피어납니다.

 

 


  어쩌면, 스치고 지나가는 눈썰미로도 ‘저 아이가 외로운 아이’인지 ‘저 어른이 힘든 삶을 견디는지’ 읽을 수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참말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에요. 겉으로 스치는 얼굴이 그 사람 온 삶은 아니니까요. 무거운 짐을 나르고 살짝 쉬며 한숨을 고를 적에 찍는 사진이라면, 늦잠 자고 일어나 부시시한 얼굴을 찍는 사진이라면, 비탈길에서 넘어진 아이가 무릎이 아파 낯을 찡그렸을 적에 찍는 사진이라면, 그런데 이런 흐름 저런 뒷모습을 나그네나 길손으로서 하나도 모르는 채 사진만 얼른 찍고 지나간다면, 무엇을 얼마나 옳거나 바르게 안달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삶을 일구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보금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는 곳에서는 어떤 사진을 찍는가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도시나 시골이나 자연이나 푸나무를 만날 적에는, 얼마나 깊이 사귀거나 넓게 바라보면서 어떤 사진을 찍는가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는가요. 오래도록 사귄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섞으며 사진을 찍는가요.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살붙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며 사진을 찍는가요. 내 마을에서 내 이웃하고 어떤 이야기를 펼치며 사진을 찍는가요.


  신미식 님은 “어디든 가야 한다면 그곳은 내 집이 됩니다(83쪽).” 하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디든 내 집이 됩니다. 그러나, 내 집이 된대서 얕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내 집이 되기에 더 오래 머뭅니다. 내 집이 되기에 섣불리 사진기를 들지 않습니다. 내 집 내 이웃 내 살붙이 내 동무, 그리고 바로 나 스스로가 되기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아요.

 


  서울 어디메에서 “그곳은 내 집”이라고 여기는 마음과 페루 어디쯤에서 “어설픈 웃음”이라고 느끼는 마음은 한동아리입니다. 맞고 틀리고 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옳고 그르고 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신미식 님은 신미식 님 삶을 신미식 님 사진으로 담고, 신미식 님 사랑과 꿈을 신미식 님 글로 옮깁니다. 페루에서 “어설픈 웃음” 짓는 사내아이 만났다면, 바로 신미식 님이 이와 같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설픈 웃음을 짓는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노릇이 아니라, 말을 섞고 이야기를 들어야지요. 서울 어디메에서 “그곳은 내 집”이라 느끼기에 이 마음 그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듯, 페루 어디쯤에서도 “그 아이는 내 아이”요 “그 아이 모습은 내 모습”이라 느끼면서, 서로를 살가이 껴안도록 사귀고 나서 사진을 찍어야지요.


  머문 자리를 헤아리듯 사진 찍는 자리를 헤아립니다. 머물 자리를 돌아보듯 사진 찍을 자리를 돌아봅니다. 머무는 자리를 사랑하듯 사진 찍으려는 자리를 사랑합니다.


  마음 깊이 사랑을 담으면 무엇을 언제 찍어도 사랑을 나눕니다. 마음 깊이 꿈을 심으면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찍더라도 꿈을 길어올립니다. 신미식 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웃들을 한결 너르고 살가운 품으로 껴안으면서 사진이야기 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미식 님이 꿈꾸는 길을 늘 즐겁고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고운 벗님들한테 꿈씨앗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꼭 웃는 얼굴만 사진으로 찍지 않아도 됩니다. 꼭 웃기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하루가 아니어도 됩니다. 비틀거리다가 넘어져도 돼요. 아이들은 걸음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곧잘 넘어져요. 달리다가 돌에 걸려 자빠져도 돼요. 툭툭 털고 일어서면 돼요. 언제나 착한 넋 아끼면 넉넉하다고 느껴요. 늘 고운 얼 보살피면 따스하다고 느껴요. 사진을 찍는 자리는 착하게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사진을 읽는 자리는 곱게 손을 내밀며 어깨동무하는 자리입니다. 4346.3.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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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야 할 책

 


  아이들은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실컷 놀아야 합니다. 뒹굴거나 구르거나 달리거나 소리지르거나 뛰면서 놀아야 합니다. 온몸 구석구석 움직이고 놀려야 합니다. 이곳저곳 움직이고 놀리며 아이들이 자랍니다. 이쪽저쪽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큽니다. 골고루 놀고 골고루 먹으며 아이들은 사랑과 꿈을 골고루 북돋웁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도 놀아야 합니다. 어른들 또한 신나게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마냥 티없는 넋 되어 스스럼없이 홀가분하게 놀 노릇입니다. 술잔치 담배잔치 아닌, 이야기잔치를 꾸리며 놀 노릇입니다. 생각이 고이지 않도록 이야기 나눌 노릇입니다. 몸이 무디거나 더디거나 굼뜨거나 처지지 않게끔 언제나 온몸 즐겁게 움직이면서 놀 노릇이에요. 놀지 못하는 어른은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고,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은 마음에 울타리를 쌓고 말아 재미없는 어른이 됩니다.


  아이들을 놀도록 풀어놓으면서 이끌 줄 알 때에, 아이들도 놀고 어른들도 놉니다.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합니다. 노래하면서 일하고, 노래하면서 놉니다. 웃으면서 일하고, 웃으면서 놀아요.


  삶은 일과 놀이를 똑 금을 긋지 못합니다. 일하고 놀이는 언제나 한몸 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한몸 되는 삶인 일과 놀이는 노상 웃음으로 어우러집니다. 웃음으로 어우러지는 삶은 노래와 춤으로 잔치판이요, 이야기가 깨처럼 쏟아지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입니다.


  책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책은 웃고 떠들며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삶에서 태어납니다. 책은 삶으로 읽습니다. 책은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일하고 노는 사람들 어여쁜 하루를 빛내어 읽습니다. 얘들아, 우리 숲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웃자. 4346.3.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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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3-14 11:26   좋아요 0 | URL
술잔치는 좋던데 하하하;;; 물론 도만 넘지 않는다면요.
책 잔치도 참 좋아요. 근데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걸요. 한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파란놀 2013-03-14 12:2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좋지요.
참말, 지나치게 마시다가 술에 절어
해롱거리며 쓰러지는 사람만 안 나오면!

그런데, 해롱거리다가 쓰러지는 사람 나오는 재미에
술잔치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
 

지호 출판사에서 2002년에 나온 튤립 책이 절판되어 헌책방에서 어렵게 만난 2013년, 그동안 지호 책에 눈길을 제대로 못 두었구나 싶어 찬찬히 살피니, <먼지>라는 예쁜 책도 절판이 되었다. <풀 위의 생명들>은 아직 절판이 아닌 듯싶다. 그때그때 돌아보지 못하면, 몇 해라는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몇 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나면 예쁜 책들도 하나둘 사라지는구나. 책은 돈이 있을 때에 산다기보다, 눈에 뜨일 때에 사야 한다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풀 위의 생명들
한나 홈스 지음, 안소연 옮김 / 지호 / 2008년 4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2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3년 03월 14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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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놀이, 똥놀이

 


  작은아이가 사흘 잇달아 바지에 똥을 안 싼다. 오줌그릇에 앉아 똥을 눈다. 작은아이가 씨익 웃으며 바지를 홀랑 벗고는 오줌그릇에 앉는다. 그러고는 “똥, 똥.” 하고 말한다. 뭔 소리인가 하고 아이를 바라보며 “바지 입어야지.” 하다가 구수한 똥내음 맡는다. 옳거니. 이제 똥바지 빨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작은아이가 똥을 누고 나서 바지를 안 입으려 한다. 날이 폭하니까 바지 벗고 다녀도 그럭저럭 낫다 할 테지만, 바지는 입어야지? 애써 바지를 입혀도 어느새 또 바지를 벗고 돌아다닌다. 쉬를 누이고 다시 바지를 입히면 또 아버지 안 보는 사이에 홀랑 바지를 벗는다. 쳇, 하고 말하다가 사진을 찍는다. 네 이 모습 사진으로 똑똑히 남기겠어. 너 나중에 커서 네 어린 날 이 모습 얼굴 벌게져서 들여다보도록 해 주겠어. 4346.3.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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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 쉼터와 후박나무길 (13.2.22.)
고흥 길타래 4―할매 할배는 자가용 안 몬다

 


  풍양면 송정리 냉정마을에는 팽나무 우람하게 한 그루 있습니다. 여러 백 해 묵은 팽나무까지는 아니지만, 논자락 한복판에 팽나무 한 그루 덩그러니 있어요. 어쩜 이렇게 팽나무 한 그루가 논자락 한복판에 있을까 알쏭달쏭한데, 논둑길 돌아 이 팽나무 앞에 서면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팽나무 앞에 돌로 세운 푯말 하나 있거든요.


  돌푯말을 읽으면, 1946년에 유박준 님이 당신 집 안뜰에서 자라는 일곱 해 된 팽나무를 당신 둘째 아들 유일성하고 지게로 짊어지고는 연못 뚝에 옮겨심었다고 해요. 너른 들판에서 한여름 땡볕 받으며 일하는 흙일꾼들이 쉴 나무그늘 하나 없었다 하는데, 이 팽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니, 이 언저리에서 일하던 흙일꾼은 연못 뚝 팽나무 그늘에 앉아서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합니다. 1990년에 경지정리를 한다며 구불구불 논을 반듯하게 펼 적에 팽나무를 치우면 논을 더 넓힐 수 있다고 말이 많았다 하는데, 이 팽나무 한 그루만큼은 오랜 나날 시골 흙일꾼한테 좋은 그늘 드리우는 쉼터요 벗이 되었기에 베지 말고 건사하자 해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해요. 돌푯말은 이무렵에 세웠다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고흥 곳곳에 너른 들판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너른 들판만 있고 우람한 나무그늘 하나 없는 곳이 퍽 많아요. 갯벌을 메운 논자락에는 아예 나무그늘이 없습니다. 마을마다 정자나무는 으레 있지만, 논 언저리 나무그늘은 드물어요. 밭 언저리 나무그늘도 드물고요. 나무 한 그루 우람하게 서면 줄기 굵어지고 뿌리 뻗으며 논밭 몇 평쯤 줄어든다 할 테지만, 나무 한 그루 튼튼하고 굵게 서면 좋은 그늘이 되고, 꽃과 열매를 베풉니다. 팽나무나 느티나무뿐 아니라 감나무나 능금나무, 또 살구나무나 복숭아나무 한 그루씩 논둑이나 밭둑에 있어 흙일꾼 누구한테나, 또 길손한테까지 쉼터 구실을 하도록 마음을 기울인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생각해요.

 

 

 


  풍양면 동적·백석마을이랑 천등마을로 갈리는 세거리에 섭니다. 동적·백석마을 어귀 큰돌이 쓰러졌습니다. 지난해 큰바람 불 적에 쓰러졌을까요. 마을 어귀에 세우는 돌은 워낙 크고 무거우니 사람들 손힘으로는 다시 세우기 힘들 테니, 기계를 써야겠지요. 큰바람 몰아치며 무너진 집이나 울타리나 쓰러진 나무를 모두 되돌리지 못했다 하니, 아직 마을돌 하나 다시 세우지 못했겠지만, 마을에서 세우지 못하면, 군청이나 면사무소 일꾼들이 앞장서서 다시 세워 주면 좋을 텐데 싶어요. 큰돈이나 목돈이 들어야 해 주는 일이 아니라, 따사롭게 마음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보듬으며 아낄 수 있는 마을살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볕 좋은 자리 솔숲 사이 깃든 무덤을 바라봅니다. 뚜껑을 씌우지 않고 커다란 돌을 실어나르는 짐차를 바라봅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시골 모습을 보는 한편, 안타깝고 아쉬운 모습을 나란히 마주합니다. 저 짐차 일꾼은, 또 저 짐차에 큰 바위 실은 일꾼은, 또 고흥군청 공무원은,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어 이곳에서 일을 하며 살림을 꾸릴까요. 서로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거나 아끼는 마음 되어 일을 하거나 살림을 일굴까요.


  천등산 끝자락과 맞물리는 조그마한 천등마을 바라봅니다. 넓게 펼쳐진 논자락 빛깔은 아직 노르스름합니다. 삼월 한복판에 접어들면 노르스름한 논자락마다 새해에 새로 깨어난 멧개구리 골골골 울 테고, 유채씨 뿌린 논에서는 푸릇푸릇 유채싹과 유채잎 오르다가 노란 물결 이룰 테며, 논갈이를 하고 나서 물을 대면 개구리알 신나게 까서 새로 태어난 개구리 노랫소리로 온 고을 가득할 테지요.

 

 

 

 


  군내버스는 별학산 따라 구비구비 돌다가 천등마을, 냉정마을, 영호마을 곁을 스칩니다. 조용한 시골자락 조용히 지나갑니다. 봄바람 일으키며 봄버스 달리고, 봄내음 물씬 풍기는 봄흙이 녹습니다.


  냉정마을에는 논자락 한복판에 팽나무 있으면, 영호마을에는 논자락 한켠에 빗돌이 섭니다. 누구를 기리는 빗돌을 이곳에 세웠을까요. 어떤 삶 누리던 사람이 이곳에 빗돌 하나로 남았을까요. 무덤 앞에도 빗돌이 서고, 마을 한켠과 논 한쪽에도 빗돌이 섭니다.


  길가에서 자라는 후박나무 줄기를 빙 둘러 시멘트가 덮습니다. 처음부터 시멘트 바닥이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후박나무 심은 흙땅에 시멘트를 부었구나 싶습니다. 길바닥 고르게 편다는 뜻이었을 텐데, 나뭇줄기 촘촘히 시멘트를 부으면, 나무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까 근심스럽습니다. 앞으로 나무가 자랄 나이를 헤아려 시멘트를 알맞게 깔든지, 나무 자랄 자리는 빼고 시멘트를 바르든지 해야 할 텐데요. 아니, 나무 자라는 자리에 왜 시멘트를 바르려 했을까요. 나무는 흙땅에서 자라고, 나무 곁은 여러 풀이 스스로 씨앗 내려 자라도록 하면, 이 길섶은 사람이 걷기에도 좋고, 큰비에도 쓸리지 않을 텐데요.

 

 

 

 


  풍남항 있는 남당마을에 닿습니다. 풍남초등학교 둘레로 양식일 하는 분들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소리 무척 큽니다. 집집마다 커다란 전압기를 매답니다. 그만큼 전기를 많이 쓴다는 뜻일 텐데, 양식일 하느라 하루 내내 기계가 돌아가며 저렇게 커다란 소리를 내면, 여느 살림집 분들은 시끄러워 제대로 잠이나 들까 궁금해요. 돈벌이도 좋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삶이 메마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더 크거나 많은 돈을 바라기 앞서, 더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바랄 때에 빛나는 하루가 되리라 싶습니다.


  남당마을 버스 타는 곳 앞에 섭니다. 버스 타는 곳 앞에 소나무 몇 그루 자랍니다. 남당마을 큰돌도 지난 큰바람에 쓰러진 듯합니다. 바람은 힘도 세지요. 큰돌도 쓰러뜨리고, 체육관 지붕도 벗깁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나무를 쉬 꺾지 못해요. 큰바람에 꺾인 나무도 더러 있지만, 훨씬 많은 나무들은 큰바람이 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리고, 들풀은 큰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뽑히지 않습니다. 꽃송이가 바람에 떨어지기는 하지만, 풀포기는 제아무리 큰바람 몰아쳐도 흙땅에 단단히 버팁니다.

 

 

 


  남당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탑니다. 도화면 소재지로 갑니다. 중절모에 빨강 노랑 풀빛 깃털 꼽은 할아버지가 내 앞자리에 탑니다. 풍남항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강동마을, 여의천마을, 이목동마을 곁을 스칩니다. 이목동마을 옆으로 난 조그마한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원도동마을과 전어포마을로 들어서는 가화리 멧길입니다. 가화리 멧길은 바다를 옆으로 끼고 숲 사이를 지나가는 고즈넉하며 예쁜 길이에요. 고즈넉하며 예쁜 숲길 곁에 보금자리 틀어 살아가는 분들은, 숲과 길과 들과 바다처럼 예쁘며 고즈넉한 삶 꾸리시겠지요.


  지등마을과 서오치마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도화면 소재지에 닿습니다. 버스에서 내립니다. 고흥읍에서 풍남항 거쳐 도화면으로 온 군내버스는 사동마을과 풍남항 거쳐 다시 읍내로 가겠지요. 마을 할머니 한 분 버스기사한테 길을 여쭌 뒤 버스에 오릅니다. 나는 면소재지 가게에서 먹을거리 몇 가지 장만하고는 조금 기다려, 신호리 동백마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탑니다. 풍남항에서 도화면까지 1100원, 또 도화면에서 동백마을까지 1100원. 느긋하고 한갓지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마을 저 고을 천천히 거치는 군내버스는 골골샅샅 할머니 할아버지 태우며 온갖 이야기를 실어나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군내버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웁니다. 마을회관에서도 당신 보금자리에서도 도란도란 이야기숲 돌보실 텐데, 버스에서 이웃을 만나고 면내나 읍내에서 동무를 만납니다. 자가용을 모는 분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더 빨리 한달음에 갈 수 있을 테지만, 자가용에서는 이웃도 동무도 만나지 못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지도 못합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 시골길을 천천히 거닐면 들판과 멧숲을 느끼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고, 군내버스 타고 구불구불 여러 마을 지나노라면, 먼 데 사는 이웃과 동무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겁습니다. 고흥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도 군내버스로 고흥 곳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곳에 내려 한두 시간쯤 거닐며 이웃마을 느끼다가, 다시 군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들이를 해 보면, 고흥 시골마을을 조금 더 깊이 마주하며 헤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6.3.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 길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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