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의 twitter facebook 잠언록 4
조정민 지음, 추덕영 그림 / 두란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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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길을 찾는 삶

―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 글

 추덕영 그림

 두란노 펴냄, 2013.11.25.



  조정민 님이 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두란노,2013)이라는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조정민 님은 이 책을 쓰면서 ‘아직 예배당에 가지 않는 사람’을 ‘예배당으로 이끌 마음이 가득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예배당이든 학교이든 시골이든 도시이든, 누가 이끈다고 해서 갈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갈 수 있습니다. 달콤한 말이나 멋있는 말이나 훌륭한 말을 들려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삶을 바꾸거나 새롭게 다스릴 적에 비로소 움직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첫머리에는 멧기슭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을 여는 ‘잠언’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참말 그러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글쎄 하고 고개를 가로젓기도 합니다.



.. 산 정상에 올라가야 숨 막히는 전경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일상은 대부분 산기슭의 삶입니다 ..  (13쪽)



  “숨 막히는 전경”이란 무엇일까요.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도시에서 사람들은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40층이니 50층이니 하는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서 높다란 꼭대기에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을까요?


  우리는 ‘꼭대기’가 아닌 ‘기슭’에서 산다고 조정민 님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집을 꼭대기에 둘 수 있습니다. 꼭대기 가까운 데에 둘 수도 있습니다. 도시나 마을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높은 곳에 마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공장이나 짐승우리 곁에 집을 마련하면 물을 마음껏 마시지 못합니다. 들이 가까이에 있는 시골집에 집을 마련하더라도, 시골사람이 모두 들에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면, 이때에도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기운이 스며든 물은 못 마십니다. 공장에서 내보내는 쓰레기가 섞인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도시에서는 모두 수돗물을 마셔요. 도시 언저리에서 흐르는 냇물이 있어도, 냇물을 길어 마실 수 없어요.


  기슭에서 마을을 이루며 산다고 할 때에는 어떤 하루가 될까요. 물을 싱그럽게 마시지 못한다면, 바람도 맑지 않겠지요.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나 마을에서만 보금자리를 꾸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 같은 장소인데, 한 사람은 쓰레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꽃이 활짝 핀 정원으로 가꿉니다. 같은 마음인데, 한 사람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고, 한 사람은 생명의 씨앗들로 넘칩니다 ..  (23쪽)



  쓰레기란 무엇일까요. 쓰레기는 왜 생길까요. 스스로 흙을 일구어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얻는 사람은 쓰레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쓰레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돈을 들여 사다가 쓰는 사람은 언제나 쓰레기가 나옵니다. 쓰레기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도시사람이 누는 똥오줌은 모두 쓰레기입니다. 거름으로 되살려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이 설거지를 하며 흘리는 구정물도 쓰레기입니다. 흙으로 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감을 때에 쓰는 샴푸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자가용을 굴리며 내뿜는 배기가스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도시에서 쓰레기 안 내보내고 살 수 있을까요. 백 해쯤 거뜬히 쓸 수 있는 냉장고나 세탁기나 텔레비전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백 해를 쓰더라도 백 해 뒤에는 쓰레기가 됩니다.



.. 담이 감옥을 만들고 철창이 감방을 만들지만 더 힘든 곳은 내 욕심이 만든 감옥이고 내 편견이 만든 감방입니다 ..  (32쪽)



  학교는 담을 세웁니다. 그래서, 담을 세운 학교는 감옥과 같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나 법원 같은 데는 경찰 같은 문지기가 지키고 담도 높습니다. 그래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같은 데는 감옥하고 닮습니다.


  왜 학교는 감옥과 같은 모양새가 될까요? 왜 학교는 아이들한테 똑같은 옷을 똑같은 빛깔과 모양대로 입힐 뿐 아니라, 머리카락과 신과 속옷까지 하나하나 따질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르게 살찌우면서 가르치지 못할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죄수로 바라보면서 입시지옥에 내몰기만 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열린 터가 아닌 닫힌 감옥과 같은 얼거리인 터라,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나오는 정책이나 행정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회와 문화가 더 열리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길보다는, 더 닫히고 더 막히며 더 경쟁을 부채질하기만 합니다.


  예배당도 다르지 않아요. 예배당은 담이 없을까요. 담이 없이 누구나 맞아들여 밥을 나누어 주고, 돈을 널리 베푸는 예배당은 몇 군데가 될까 궁금합니다.



.. 젊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순수해서 아름다운 것이고, 늙어서 추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서 추한 것입니다 ..  (48쪽)



  마음이 맑을 때에 맑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에 때가 묻으면 때가 묻은 삶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삶입니다.


  아주 마땅한데, 마음은 숫자로 못 따집니다. 경제성장률은 숫자로 나오고, 시험성적과 등수는 숫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등수와 성적으로 매기는 숫자는 아이들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리는 잣대가 될까요.


  시험을 없애지 않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맑지 못한 길로 내모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자격증을 새로 만들고, 졸업장을 보여주라 말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름다움과 동떨어지도록 몰아붙이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눈뜨게 하고, 사랑은 뻔히 보이는 것에 눈멀게 합니다 ..  (111쪽)



  믿음이 있기에 ‘눈으로 못 보는 것을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뻔히 보이는 것을 못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사랑입니다. 참다운 사랑이란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둘로 가르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믿기에 내가 너를 사랑해요. 네가 나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를 믿어요. 둘은 늘 같아요.


  이른바 ‘맹신’과 ‘광신’일 때에는 눈이 멉니다. 숫자와 성적에 목이 매일 때에도 눈이 멉니다. 즐겁게 벌어서 즐겁게 쓰는 돈이 아닌, 더 많이 거두어들여 마구마구 쓰려는 돈일 때에도 눈이 멀어요.



.. 내가 분노로 지은 것은 남을 분노하게 만들고, 내가 슬픔 속에 노래한 것은 남도 슬프게 하고, 내가 목말라 디자인한 것은 남까지 목마르게 합니다. 나는 세상에 반드시 투영됩니다 ..  (184쪽)



  조정민 님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리라 생각합니다. 맑은 사랑으로 착하게 삶을 가꾸어 참다운 아름다움을 누리자는 뜻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더 깊이 살펴서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조정민 님이 스스로 생각해서 지은 여러 ‘잠언’을 묶은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을 읽으면, 이것과 저것을 갈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틀을 세웁니다. 이쪽으로 가야 맞고 저쪽으로 가면 그르다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 속에 살고, 해답을 바라보는 사람은 해답 속에 삽니다 ..  (255쪽)



  굳이 둘로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가를 만한 일이란 없습니다. 어떤 길이든 우리들이 스스로 걸으면서 삶을 겪습니다. 어떤 삶을 누리든 저마다 사랑을 배우고 나누면서 새롭게 눈을 뜹니다.


  길을 찾을 적에, 어떤 이는 하루만에 찾을 수 있어요. 어떤 이는 백 해는커녕 즈믄 해가 흘러도 길을 못 찾을 수 있어요. 그러면, 하루만에 길을 찾으면 훌륭하고, 즈믄 해가 걸려도 길을 못 찾으면 어리석을까요?


  이틀만에 길을 찾는 사람은 하루만에 길을 찾은 사람보다 어리석을까요? 구백 해만에 길을 찾은 사람과 구백 해하고 열흘이 걸려 길을 찾은 사람이 있으면, 누가 슬기롭고 누가 어리석을까요?


  그예 사랑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예배당이나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이야기하기보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내 마음속에 깃든 푸른 숨결을 사랑하며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일구는 삶을 사랑하는 길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그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있을 테니까요. 사랑은 늘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나니까요.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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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아이들



  가을로 접어들어 동이 느즈막하게 트는데, 이러한 날에도 아이들은 새벽 일찍 일어난다. 한 녀석이 일어나면 다른 녀석이 이내 일어난다. 아이들 몸에도 시계가 있을는지 모른다.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봄이건 날마다 거의 비슷한 새벽에 잠이 깨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롭게 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다. 언제나 즐겁게 놀 생각을 하니 일찍 일어난다. 참말 그렇다. 놀 생각이 아니라면 일찍 일어날 수 없다. 놀고 싶지 않다면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노는 아이들은 즐거울 테지. 신나게 놀면서 꿈꾸는 아이들은 하루가 아름답겠지. 지겨운 아이들이라면 늦잠을 자리라. 아침부터 또 수험공부를 하러 가야 한다면 아이들은 일어나기 싫으리라. 단꿈에 젖어 그예 꿈밭을 거닐고 싶으리라.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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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43. 내가 너한테 다가설 적에



  마음에 쏙 드는 동무한테 다가설 적에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무척 아끼는 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적에 어떻게 하는지 헤아려 봅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동생 언니 누나 오빠한테 어떻게 마주하는지 되뇌어 봅니다.

  어떻게 하는가요? 내가 마음으로 아끼는 동무와 이웃한테 어떻게 하지요? 사랑스러운 한집 사람들하고 어떻게 말을 섞지요? 동무가 하는 말을 사이에 싹둑 끊나요? 이웃한테 다짜고짜 한참 내 말만 늘어놓나요?

  사진을 찍는 매무새는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매무새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이러한 밑마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을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요?

  그런데, ‘사진을 찍는 내’ 눈높이나 눈길에 맞추는 아낌이나 좋아함이나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네’ 눈높이와 눈길을 헤아리고 살필 줄 아는 아낌이나 좋아함이나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 넉넉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려면 서로 즐거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알콩달콩 이야기잔치를 누리려면 서로 따사로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으로 찍힐 사람’을 바라보거나 마주할 적에는, 늘 내 마음이 넉넉하면서 즐겁고 따사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넉넉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될는지 생각해 보셔요.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는지 생각해 보셔요. 따사롭지 않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면 누가 이 사진을 보면서 반갑다고 할는지 생각해 보셔요.

  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꽃을 밟거나 함부로 꺾는 사람이 아닙니다. 꽃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 꽃을 찍습니다.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골목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 척하거나 등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골목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골목동네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면서 늘 즐거이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서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요.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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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42. 사진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진은 우리 마음에서 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야기가 사진으로 태어납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밝히는 길은 늘 이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야기가 태어나는 사진인 줄 느끼거나 깨닫거나 알 수 있으면, ‘사진 배우기’를 다 마친 셈입니다. 사진강의를 듣기 앞서 이를 알았다면 굳이 사진을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을 배울까요. 다만, 사진기라고 하는 기계를 다룰 줄 모르니, 기계 다루는 솜씨는 배울 수 있겠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기계 다루는 솜씨만 배워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진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기계 다루는 솜씨만 알려주는 ‘사용 설명서’ 노릇이 아닌, ‘삶을 밝히는 길잡이’ 구실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에 없는 이야기는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마음에 없는데 어떻게 찍을까요. 마음에 없으니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이야기는 느끼지 못해요. 느끼지 못하는 이야기는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가난’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옆에 있어도 알아차리거나 느끼지 못해요. ‘웃음’을 모르는 사람은 둘레에서 여러 사람들이 웃고 떠들어도 알아차리거나 느끼지 못해요. 풀벌레를 모르는 사람은 풀숲에서 풀벌레가 노래하더라도 그 노랫소리가 풀벌레가 들려주는 소리인 줄 알아차리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찍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기를 다룰 줄 알아도 사진을 못 찍습니다. 그러니까, 사진기를 손에 쥐기 앞서, 나한테 이야기가 있는가 없는가 살필 노릇입니다. 사진으로 담을 이야기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사진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가 달라져요.


  잘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 마음에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글쓰기를 배워도 글을 못 쓰고, 그림그리기를 배워도 그림을 못 그려요. 언제나 이야기가 맨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삶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니까, 내 삶을 읽을 때에 내 마음에 깃든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내 마음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를 제대로 읽을 때에, 사진을 한 장 찰칵 하고 찍을 수 있습니다. 나는 시골마을에서 지내며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날마다 기쁘게 누리기에, 이 기쁨이 우러나오는 마음을 사진으로 고맙게 옮깁니다.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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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明心 이것은 사진이다
육명심 지음 / 글씨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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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3



사진이 아니면 뭘까

― 이것은 사진이다

 육명심 사진·글

 글씨미디어 펴냄, 2012



  가을볕은 곡식과 열매가 무르익도록 돕습니다. 가을볕은 가을에 내리쬐는 볕입니다. 봄에는 봄볕이 내리쬐겠지요. 그러면 겨울에는? 겨울볕이 내리쬡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에는 ‘봄볕·가을볕’ 두 낱말만 나오고 ‘여름볕·겨울볕’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름과 가을에 쬐는 볕을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봄에는 봄비요 가을에는 가을비입니다. 여름에는 여름빛이고 겨울에는 겨울빛입니다. 한가위를 앞둔 가을에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을하늘’은 그지없이 파랗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여러 날 지나면 도시에서는 ‘파란하늘’이 아닌 매캐한 하늘이 될 테지만, 시골에서는 비가 오지 않고 여러 날 지나더라도 ‘파란하늘’이 눈부십니다. 참으로 가을에는 겨울이나 봄이나 여름보다 한결 새파랗습니다.


  그런데, 손바닥만큼 조금만 하늘을 볼 수 있다면 하늘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가을에는 하늘이 눈부시고 높다 하지만, 막상 하늘을 넓게 누리지 못한다면 이런 말은 ‘그저 말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해요.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매우 적고, 시골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도 매우 적어요. 전문직이든 예술가이든 작가이든 누구이든 모두 도시에서 산다고 할 만합니다. 이 가을에 가을내음을 그윽히 맡지 못합니다.



.. 어찌 된 일인지 내 말은 학생들에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정말 막무가내로 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패션계에 부는 바람에 휘말리듯 세계적으로 뜨는 외국의 사진풍을 따라가기게 급급했다 … 나는 기질적으로 군대생활이 맞질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걸핏하면 기합 받던 악몽이 되살아나서 몸서리가 난다 ..  (8, 14쪽)



  가을에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하는 사람한테 ‘가을하늘’이나 가을빛이나 하늘빛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겨울에 새하얀 눈을 집어서 먹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도시내기한테 들려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새봄에 동백꽃잎을 부쳐서 먹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도시 이웃한테 알려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들딸기를 날마다 훑어 끼니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도시사람한테 속삭이기는 쉽지 않아요. 이러한 삶을 모르고, 이러한 삶을 헤아리지 않으며, 이러한 삶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합니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사는 아이들은 슥 바라보아도 어떤 아파트인지 압니다. 두멧시골에서 태어나 사는 아이들은 개똥벌레와 다슬기를 곧바로 알아챕니다. 도시 아이들은 깜깜한 밤을 알지 못하고, 시골 아이들은 해가 지면 바로 깜깜해지는 줄 압니다.


  사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느끼며, 느끼는 대로 압니다. 아는 대로 배움길을 나서고, 배움길을 나서는 대로 다시 삶이 됩니다. 이 얼거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육명심 님은 《이것은 사진이다》(글씨미디어,2012)라는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대학교에서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데 ‘쇠귀에 경 읽기’처럼 이녁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왜 못 알아들을까요? 어쩔 수 없어요.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본 적이 없으니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한’ 적이 없어요. 육명심 님은 군대가 이녁한테 얼마나 끔찍하고 몸소리까지 쳐지는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삶으로 이루어졌지만, 군대에 간 적이 없는 젊은이는 하나도 모릅니다. 본 적도 느낀 적도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요. 군대에 갔어도 널널한 데에서 폭력이나 얼차려 하나 없이 지냈으면, 이때에도 ‘군대’ 이야기를 못 나눕니다.



.. 신혼여행 가서 삼각대를 받쳐놓고 둘이서 정답게 사진을 찍으면서 아내에게서 카메라의 조작법을 생전 처음 배웠다 … 아내는 사진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사진을 통한 정신적인 해방의 길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 마음이 열리니 지혜의 눈도 아울러 떠지는 것 같았다 … 신기한 것은 쉽게 찍힌 사진은 그 결과도 좋다. 그리고 당연히 어렵게 찍힌 사진은 그 결과가 뻔하다 ..  (19, 73, 76쪽)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이녁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찍습니다. 이녁 삶이 그대로 사진이 됩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늘 이녁 삶자리에서 글과 그림을 빚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삽니다. 도시에서 살며 사귀는 이웃도 도시사람입니다. 도시에서 살며 도시사람만 만나고, 도시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을 가도 그 나라 도시에 머뭅니다. 다른 나라 시골은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로 씽씽 가로지를 뿐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래요. 한국에서도 시골은 고속도로로 씽씽 가로지르는 곳일 뿐이지요.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좋거나 나쁘다고 가를 까닭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될 뿐입니다. 작가도 평론가도 모두 도시에서 삽니다. 전시관이나 갤러리도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도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대학교도 도시에만 있고, 사진관이나 스튜디오 일자리를 얻으려면 도시로 가야 합니다. 시골자락에 스튜디오나 갤러리를 여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어요. 그러니,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은 언제나 ‘도시’ 테두리에만 있습니다. 가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사진을 찍더라도, 시골을 시골대로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면서 사진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찾아온 다음 볼일을 마치면 곧장 고속도로를 다시 타고 도시로 돌아가듯이, 시골자락에서 사진 몇 장 찍더라도 ‘목적 달성’이 끝나면 시골내음을 맡거나 시골빛을 보거나 시골살이를 누릴 일이 없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사는 대로 찍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읽는가요? 스스로 사는 대로 읽습니다. 육명심 님은 한국사 전공 교수한테 ‘국토순례’를 젊은이한테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진뿐 아니라 역사를 할 적에도 ‘스스로 사는 만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일행은 달리던 차에서 모두들 후다닥 카메라를 들고 뛰어내렸다. 나는 차 안에서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앉아 있었다. 물론 남들이 다 달려들어 사진을 찍으면 안 찍는 평소의 버릇도 있지만, 그 당시 찍고 있는 한 주제와 다른 대상이라 외면했던 것이다 … 어느 날 한국사를 전공하는 대학 교수를 만나 한가하게 시간을 함께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교수에게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전공필수과목으로 반드시 ‘국토순례’를 넣어야 한다고 주문을 했었다. 일절 차를 타지 말고 직접 발로 걸어서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조리 돌아보는 실습과목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을 했다 ..  (183, 227쪽)



  사진은 ‘보는 대로 찍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는 대로’란 ‘눈에 들어오는 모습대로’가 아닙니다. 저마다 ‘사는 대로’ ‘눈에 어떤 모습이 들어옵’니다.


  시골에서 살며 멧새나 풀벌레 소리가 익숙한 사람은 가느다란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새나 벌레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이러한 소리와 숨결도 함께 담습니다. 도시에 살며 멧새나 풀벌레 소리가 낯선 사람은 아무리 큰 소리를 들어도 어떤 새나 벌레가 어디에 있는가를 모릅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이러한 소리나 숨결을 조금도 못 담습니다.


  똑같은 자리에 두 사람이 섰어도 ‘사뭇 다른 사진’이 나오는 까닭이 있지요. 삶이 다르니까요. 삶이 달라 바라보는 눈이 다르니까요. 육명심 님은 “대화를 진행할수록 사진가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차가운 편견만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럴 때, 상대와의 대화에서 기선을 잡아 심리적인 주도권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정신적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고는 참다운 인물사진을 얻을 수 없다(81쪽).” 하고 말씀합니다. 육명심 님은 ‘주도권 잡기’로 사진을 찍으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삶이 다르니, 찍히는 쪽에서 찍는 쪽을 얕잡을 수 있어요. 때로는 우러를 수 있어요. 얕잡는 사람은 나쁠까요? 우러르는 사람은 좋을까요? 이도 저도 아닙니다.



.. 특히 ‘신지형학 사진’의 무대를 돌아보면서 그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존 팔의 폭포 사진에서도 그것은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의 발견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그렇게 사진을 찍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들대로 우리 눈을 통한 사진을 찍을 일이다. 몇 년 전 외국의 좋은 사진을 많이 소개하는 한 신문사가 기획한, ‘매그넘’ 사진가들이 직접 한국을 찍은 사진전을 보고 우리나라는 역시 우리가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불교 사진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진가에게 불교 사진을 당장 찍으라 하면 과연 그만큼이라도 찍을 수 있을가. 우리가 우리 문화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깊은 이해를 갖추지 않으면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  (270∼271쪽)



  사진을 찍을 적에는 한 가지로만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육명심 님은 육명심 삶결대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도권 잡기’를 해서 ‘모든 사람(찍히는 사람)’을 육명심 님 숨결이 드러나도록 찍었습니다. 찍히는 사람 숨결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보다는 찍는 사람 숨결이 확 풍기도록 찍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도권 잡기’를 할 만합니다. 누군가는 굳이 ‘주도권 잡기’를 안 합니다. 나(찍는 사람)를 얕잡아보거나 깔본다면 얕잡아보거나 깔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아를 잔뜩 내는 처칠을 찍은 사진처럼, ‘찍히는 사람 삶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이처럼 ‘찍히는 사람 삶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을 찍으면 겉보기로는 ‘찍히는 사람 숨결’만 드센 듯 여기기 쉽지만, 오래도록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찍는 사람 숨결’이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사람을 찍든 숲을 찍든 정물을 찍든 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내 삶결대로 찍는 사진인 만큼, 내 삶결부터 제대로 읽은 뒤에 즐겁게 찍을 노릇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사진을 찍으면서 ‘무지개’가 됩니다. 한국에서 사진문화가 무지개빛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저마다 다른 사진이기에, 사진이 아닌 사진이 없습니다. 사진이, 사진이 아니면 뭘까요. 이것은 이 사진이고 저것은 저 사진입니다.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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