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이숙의 -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
이숙의 지음 / 삼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60 ― ‘어머니(여성)’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 이숙의, 《이 여자, 이숙의》



- 책이름 : 이 여자, 이숙의
- 글 : 이숙의
- 펴낸곳 : 삼인 (2007.8.10.)
- 책값 : 16000원


 (1) 삶


 사람이 살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겪어 볼 때에는 크게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철없는 어린이가 철이 들어갈 때 새로워지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건너뛰면서 새로워집니다. 풋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첫마음을 간직할 때 새로워지고, 살가운 만남만큼이나 아쉬움 묻어나는 만남에 허우적거릴 때에도 새로워집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면서 대학교에 붙으면 붙는 대로, 붙지 않으면 또 붙지 않는 대로 새로워집니다.

 군대에 끌려가는 사내들과 군대에 안 끌려가는 사내들과 군대하고는 울타리 쌓고 지내는 여자들은 또 다 다르게 새로워집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다가 몸으로도 사랑을 하게 될 때에 새로워지는 한편, 뜻하지 않게 강간이라는 아픔을 받거나 몸 어느 곳이 부러지거나 잘리는 아픔을 겪을 때에도 새로워집니다.

 혼인을 하면서도 새로워지고 헤어지면서도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도 새로워지며 아이가 자라면서도 새로워집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혼인하고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때마다 새로워질 테지요.

 우리 삶은 늘 새로움이 이어집니다. 언제나 새로움이 가득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새로움이란 있을 수 없고, 꼭 치러야 하는 새로움 또한 없으며, 그냥저냥 겪고 지나칠 만한 새로움도 없습니다.


..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추구하면서 진실되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신념과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  (261쪽)


 좋은 짝을 만나서 둘이 걷는 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혼자 걷는 길을 외로움 떨쳐내면서 제 나름대로 꿋꿋이 걸어가면서 새삼스러운 세상을 일구어 내기도 합니다. 짝짓기를 하면서 ‘짝짓기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 ‘짝짓기를 안 하는 아름다움’ 또한 있습니다. 첫사랑을 이루는 일도 아름답지만, 깨지고 또 깨지다가 스무 번이나 서른 번째에 이르러 참사랑을 이루는 일도 아름답습니다. 아예 사랑 한 번 이루지 못하면서 삶을 마치더라도 그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그 한 가지 길을 겪지 않으면 ‘세상을 모른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 “이 선생, 누가 그걸 모르고 있는가?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공박하지 말아야지. 신상에 좋지 못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지적하고 잘 되는 방향으로 애써 보자는 말이 왜 허물이 된단 말인가? 아무 소리 않고 꾸역꾸역 시키는 대로 조작된 통계나 보고하고 만족하는 것이 애국 애족하는 길이요, 정부 시책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평생직이니 천직이니 하고 일컬었던 교직 생활을 떠나게끔 한 동기가 되었다 ..  (248쪽)


 ‘아이 낳기’를 하면, 자기를 낳고 기른 어버이가 다르게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 낳기를 안 하고서도 자기 어버이를 다르게 볼 수 없었을까요.

 그동안 못 보던 모습을 보는 눈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늘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맴돌고 있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톡 하고 터지면서 불거집니다. 마음밭이 기름져 있으니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지, 마음밭이 메마른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보지 못합니다. 기름진 마음밭이니 작은 일 하나를 겪으면서도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나날이 새힘을 얻어요. 메마른 마음밭이니 큰 일 숱하게 겪으면서도 어느 하루도 새로워지지 못하는 한편 나날이 어두워만 갑니다.


.. 삯바느질을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계 수단이었다. 경험이라곤 사범학교 당시 운동복 한 벌을 지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자신은 못 가져도 용기를 내야만 했다. 농번기 바쁠 때라 그래도 신여성이 재봉틀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이웃에서 몇 가지 주문이 들어왔다.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먹고살려면 어쨌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입던 옷을 견본 삼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상의 운동복 하나를 어찌어찌 궁색하게 만들어 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매우 만족하면서 “이렇게 잘하시니, 동네에 알려야겠군요, 공부하고 언제 이렇게 일까지 배웠노…….”라고 용기를 주었다 ..  (107쪽)


 새벽 한 시 사십사 분, 고단하게 잠든 옆지기와 아기를 옆에 누이고 불을 켜 놓습니다. 전등은 소포종이로 갓을 씌워서 불빛이 어둡게 해 두었습니다. 모자라나마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한 밝기입니다.

 조금 앞서 우리 아기가 물똥을 어마어마하게 누어서 기저귀 두 장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넘쳐서 방수담요까지 똥자국이 덕지덕지 묻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아기가 방수담요에 누거나 지린 똥오줌이 솔찬합니다. 이를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지기가 둘둘 말더니 저한테 건넵니다. 빨아야겠다고.

 아기를 낳은 옆지기는 작은 물건 하나 집어들기 힘들고, 설거지나 빨래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불어터지는 젖 짜기에도 고달플 뿐더러, 젖먹이기에도 젖이 아픕니다. 자리에 드러누워서 “여보, 목 말라요.” “여보, 배고파요.” 하고 말할 수는 있으나, “내가 밥해 줄까요?” “당신은 힘드니 내가 기저귀 빨게요.” 하고 나설 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쯤 빨래를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데, 참말 언제쯤 신나게 빨래를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요.

 저도 몸이 고단해서 그냥 드러눕고 싶기는 하지만, 적어도 새벽 두어 시까지는 억지로 잠을 좇으면서 두 사람 곁을 지킵니다. 그나마 옆지기가 새벽 두어 시까지라도 아기 걱정을 않으면서 느긋하게 잠들도록 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도 무쇠가 아닌 피가 흐르는 살덩이 사람인지라, 새벽 세 시쯤 넘기면 눈꺼풀이 천 근 만 근이고, 잠깐 자리에 등을 붙이면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여보, 오줌 쌌어요.” 하는 모기만한 소리에 퍼득 깨어나서 제대로 뜨이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젖은 기저귀를 갈고 새 기저귀를 받친 다음, 젖은 기저귀를 들고 뒷간에 가서 물로 헹구어 목초액 물통에 담급니다. 이때까지 목초액 물통에 담가 놓고 있던 빨래는 다시 물로 헹군 뒤 털어서 빨랫줄에 널고, 옆지기가 뒷간에 가면서 갈고 담가 놓은 피 기저귀도 빱니다.

 조금 앞서까지 똥오줌 범벅이 된 방수담요를 빨았고, 여러 번 거듭 빨아야 비로소 똥기운이 빠지는 똥기저귀를 빨았습니다. 그 김에 몸도 씻습니다. 어제 새벽부터 오늘밤까지 내내 땀에 젖어 있던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제 몸뚱이를 씻을 겨를이란 없고, 아기 몸 씻고 아기 밥 챙기고 옆지기 팔다리 허리 어깨 엉덩이 주무르며, 젖짜기를 거들고,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치릅니다.

 땀과 때를 싹 걷어내니 개운해서 잠을 자면 아주 달게 잘 듯한데, 잠은 좀 미루기로 합니다. 아기한테 읽어 주기도 하고, 함께 누운 옆지기한테 읽어 주기도 하는, 내 가슴에 눈물겨이 파고든 책 하나를 찬찬히 곱씹고 싶어서요. 이제는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삶을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지금 내 삶은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가를 되새기고 싶어서요. 홀몸으로 딸아이를 키우면서 갖은 애를 다 쓰고 갖가지 들볶임과 시달림을 견디어 낸 그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금 내가 겪거나 부대끼는 삶은 어떠한가를 맞대어 보고 싶어서요.


.. 산다는 것이 이렇게 뼈를 깎는 고통으로 쌓여지는 것일까? 놀고먹을 수 있는, 흥청망청하는 자들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잠시 분노에 젖기도 했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앗아 가고 있단 말인가? … ‘너희들은 우리를 짓밟았다고 여기겠지만, 우리의 희망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가엾어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되게 살았던가를 알 날이 있을 것이다.’ ..  (144∼145, 139쪽)


 (2) 사랑


 옆지기 부모님 댁에서 몸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이서 몸풀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부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우리 둘이 낳은 아이요, 우리 둘이 키울 아이입니다만, 이 아이 하나로 옆지기 부모님 댁에 감도는 기운을 살며시 바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리로 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옆지기 부모님은 우리 아이를 보면서, ‘옆지기 어릴 적을 쏙 빼닮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를 제 부모님 댁에 데리고 갔다면, 틀림없이 제 부모님은 ‘제 어릴 적을 아주 빼닮았다’고 말할 테니까요.

 가시버시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는 만큼, 우리 아이는 옆지기를 닮기도 하고 저를 닮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 얼굴은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 자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아도 아기 귀와 발은 제 귀와 발 모양 그대로이고, 눈코입은 지금 옆지기 눈코입인데, 날마다 자라나는 아이 눈코입은 또 날마다 바뀌면서 제 눈코입을 닮았구나 싶기도 하고, 또다른 새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벼리는 고스란히 벼리 얼굴이구나. 벼리는 벼리 그대로 태어났구나.’ 하고.


.. 그러나 나는 냉소했다. 그이에게 견준 나 자신의 무능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  (28쪽)


 아이는 옆지기 몸에서 열 달을 자란 다음, 스물네 시간 배앓이를 거쳐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옆지기가 열 달 동안 아이를 몸에 안는 동안, 옆지기가 먹을 밥을 제 손으로 챙겨 주었고, 옆지기가 스물네 시간 배앓이를 하는 동안, 곁에서 손을 잡고 등과 허리를 주무르고 터져나오는 양수와 피를 제 몸과 이불로 받아 가면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나온 지금은, 서로 번갈아가며 아이를 팔에 안아 주기도 하고 젖을 먹이기도 합니다. 옆지기 한쪽 젖꼭지가 많이 헐어서 곧바로 젖을 먹이기 어렵게 되어, 젖을 따로 짜 놓은 뒤 젖병으로 물려서 먹입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는 아기이고, 옆지기 젖도 두 시간마다 불어서 한쪽 젖을 먹이더라도 다른 쪽 젖을 짜 놓아야 합니다. 밤이라서 안 먹고 낮이라고 더 먹지 않습니다. 밤이라고 안 불고 낮이라고 더 불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밤이건 낮이건 느긋하게 잠들 틈이 없고, 언제나 아기한테 붙어서 아기를 돌보고 자기 몸을 추슬러야 합니다.

 이때 옆에서 아이 어머니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이 어머니는 제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울 뿐더러 아이 돌보기도 몹시 어렵습니다. 아이와 아이 어머니 모두한테 안 좋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산후조리원이라는 곳이 부쩍 늘어나고 있으며, 조리사로 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느 가시버시라면 돈이 많이 들어도 산후조리원에 아이와 아이 어머니를 넣을 텐데, 우리는 산후조리원은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둘이서 기를 생각이었고, 아이를 낳고 세이레가 되는 이날까지도 둘이서 잘 해내고 있습니다(옆지기 부모님 댁에서 장모님도 많이 도와주셨고).


.. 1989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아이들 동화책, 이름 있다는 작가의 소설 등 많은 책을 사 왔다. 그중에는 이전부터 보고 싶었던 이태의 《남부군》도 있었다. 책 몇 군데에서 그의 이름(박종근)이 기재된 것을 보고 놀랐다.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이의 활동 일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 더군다나 그가 1952년 3∼5월경에 전사했다고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아직껏 우리 가족들 가슴에는 박종근이라는 이름 석 자가 어둠 속에 가려져만 있는데, 그렇게나 천연덕스럽게 기록되어 있다니……. 나는 그 책을 읽은 후 너무나 크고 깊은 가슴앓이로 그만 기운을 잃고 말았다. 오랫동안 헤어날 수 없는 사무침과 쓰라림으로 멍하니 보냈다. 다 청산된 마음이라고 여겼던 내 가슴을 날이면 날마다 쑤셔 오던 상처들로 미쳐 날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밤마다 홀로 숨죽여 흐느꼈다 ..  (174쪽)


 아기를 팔에 안고 어르면서, 젖병을 물리면서, 똥오줌 기저귀를 애써 빨아서 널고 다림질을 하면서, 하루에 한 번쯤 책을 읽어 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도 여느 가시버시처럼 ‘돈 더 많이 버는 일’에 몸을 바쳐서 산후조리원에 넣었어야 했느냐고. 여느 가시버시들은 ‘돈을 덜 벌거나 안 벌며’ 한두 달쯤 몸풀이를 하더라도, 두 사람이 늘 함께 있으면서 서로 돕고 북돋우면 한결 낫지 않느냐고.

 스물네 시간을 함께 붙어 있자면, 마땅한 이야기지만, 지아비 되는 사람은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다닐 수 없고, 일터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서도 느끼는데, 아기한테 책을 읽어 준다는 핑계로 다문 열 쪽이나 스무 쪽을 읽기는 하지만, 책을 읽을 짬을 거의 내지 못합니다. 이 심부름 저 심부름 이 주무르기 저 주무르기 이 빨래 저 빨래 ……. 하루가 참 길면서 금세 지나갑니다. 금세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밤입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있는 하루, 옆지기와 함께 지내는 하루는 마음과 몸이 홀가분합니다. 글 한 줄 못 쓰고 책 한 권 못 펼칠 뿐더러 동무들 못 만나고 술자리에 가지 못하는 가운데 돈벌이 일을 한 가지도 할 수 없습니다만, 세 식구가 하루 내내 가까이 붙어서 이야기하고 어르고 안고 씻기는 보람은 무엇으로도 따질 수 없습니다.

 뭐, 저는 다른 이들처럼 여느 일터에 나가지 않는 몸이고 집에서 일하는 몸이니, 하루 스물네 시간 붙어 지내기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꼬박꼬박 일터에 나가야 할 뿐더러, 일터에서 접대라는 일도 해야 하니, 저처럼 아이와 옆지기를 돌볼 수 없다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일터에 나가는 몸이었다고 해도, 아이와 옆지기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한 달, 또는 두 달, 아니면 석 달이나 반 해쯤 말미를 얻어서 집에서만 눌러지냈으리라 봅니다. 일터에서 긴 말미를 받아 주지 않으면 아예 일터를 그만두고 아이와 옆지기하고 함께 지내려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몸이 느낍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 하는 수 없이 시아버지를 찾아가 아이 장래 문제를 의논했고, 나의 입적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때 시아버지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남편이란 자도 없고, 다시 온다는 희망도 없는데 네가 입적을 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은 정말 내가 할 말이었다. 그때까지 무관심 속에 버려 두었던 부모로서의 의무를 정녕 자책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결국 1960년 1월 22일자로 소은이의 출생신고를 하면서 나도 박씨 집 호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21일생이 12년 만에 비로소 뿌리를 찾고 엄연한 박종근의 딸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  (225쪽)





 (3) 세상


 우리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주 고달픕니다. 아이가 의무교육으로 다녀야 할 학교는 아이 마음과 넋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에는 젬병입니다. 갖가지 지식쪼가리와 영어 나부랭이를 머리속에 채우는 데에만 골똘합니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에는 ‘교과서 아닌 책이라도 읽힐 수 있는 때’이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면 ‘교과서 아닌 책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때’가 됩니다. 아이들한테 책읽을 틈을 안 주니까요. 가만히 살피면, 책읽을 틈뿐 아니라 놀 틈도 안 줍니다. 동무들끼리 어울리거나 사귈 틈도 안 줍니다. 숨을 돌리면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틈을 안 줍니다.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들판에 자라나는 꽃을 즐길 틈을 안 줍니다. 파란 바다를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시원함을 느낄 틈을 안 줍니다. 두 다리로 이 나라 구석구석 걸어다닐 만한 길이 없습니다.


.. 경찰서에는 입구에서부터, 마룻바닥, 본당, 시멘트 바닥 할 것 없이 무수한 남녀노소들이 꿇어앉히거나 쓰러져 있고 넘어지거나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신나게 곤봉을 휘두르면서 무어라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정말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사람 몸에 부딪치는 곤봉 소리, 살을 에는 듯한 비명 소리,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팰 수 있단 말인가? 어디에서 배운 솜씨인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의기양양한 금수 같은 인간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을 어찌 사람이라고 부를 것인가? 머리고 가슴이고 얼굴이고 아랑곳없이 발로 차고 사정없이 매질하는, 그러다 죽으면 그만 끌어내 던져 버리는 그런 권리를 대체 누가 주었단 말인가? ..  (51쪽)


 다짐은 하고 있으나, 많이 두렵습니다. 아이가 학교를 좋아한다면 보내겠으나, 아이가 학교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학교에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인 우리 두 사람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가를 놓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차근차근 헤아려 보고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게 되더라도 집에서 우리가 할 몫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로 대안학교에 넣을 마음은 없고,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학교처럼 ‘이름으로도 농사짓는 학교이고 속내로도 농사짓는 참 학교’쯤 되는 곳에는 넣을 마음이 있습니다.

 학교란 지식을 쌓는 곳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커 나가는 길을 익히는 곳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학교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아 나가면서 어울리는 길을 찾고 깨닫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학교란 혼자서 바라보는 틀과 눈을 다스리면서 나 아닌 사람 눈길을 느끼고 나 아닌 사람 얼을 곱씹어 보는 배움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시험점수로 대접받는 곳입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그렇고, 대학교마저도 시험점수로 들어갈 뿐입니다. 시험점수로 들어간다고 하여도, 대학교 강의 얼거리가 사람 됨됨이와 매무새를 추슬러 주도록 짜여 있다면 우리 두 사람 허리가 휘어도 넣을 뜻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 교육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지요? 한 해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바칠 만한 값이 있는가요? 비싼 돈도 비싼 돈이지만, 교수와 또래 동무들은 ‘배우고 가르치는 뜻’을 얼마나 속깊이 깨우치고 있습니까?


..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서에는 내 이름을 맨 윗자리에 썼다. 간첩단의 우두머리로서 수많은 세포를 조직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각 직장에서 쟁의를 일삼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이렇게 꾸며 씁니까?” “하는 수 없지요. 이렇게 해야 우리도 한 건 올리게 되니까요.” 이런 식의 조작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고통 받고 죽어 갔을까? 이렇게 되고 보면 나 또한 살아날 구멍이 없지 않는가? ..  (195쪽)


 아이 앞날을 헤아린다면, 아이가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할 만한 일거리가 무엇일까 싶어 속이 탑니다. 오로지 지식놀음을 해서 지식장사를 하는 일거리를 찾는 보람이란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새로움을 빚어내지 않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장사꾼 틀을 깨기 어렵다면 구태여 도시에서 살아갈 까닭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고, 아이가 돈을 버는 일자리가 세계평화와 사회복지와 지구환경 모두한테 이바지할 만한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가 되더라도 자동차공장이나 화학공장에서 일한다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지식인이 되더라도 책상물림이 되고 만다면 그지없이 불쌍합니다. 월급쟁이 교사로 일한다면 꼴도 보기 싫어질 테지요. 쇠밥그릇 공무원이 되어 탱자탱자 먹고산다고 하면 한숨만 푹푹 나옵니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에 나오는 씩씩한 딸내미처럼 ‘자전거가게 기능공’을 꿈꿀 수 있다면,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이오덕, 임종국, 미승우 님들처럼 꼿꼿한 선비이자 학자로 제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습니다.


.. 1984년 8월 1일, (손주) 슬기와 보람이를 데리고 나선 8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별천지에 온 듯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변하고 발전했다. 경주, 대전, 서울로 다니면서 두 놈을 마음껏 즐기게 했다. ‘여기가 너의 조국이다. 너희들의 고향은 이렇게 아름답단다…….’ 그때도 대구에 닿은 지 일 주일이 채 되지 못했을 때, 정보부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 과장님이 참으로 서운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이 여사님께서 왜 딸과 사위를 올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해 서독에서 반정부운동에 가담하게 하고 있느냐고요.” “언니야, 어쩌노? 그 지긋지긋한 일이 또 닥치는구나.” 동생은 벌벌 떨었다. 그때 그 과장은 나에게 누님, 누님 하던 의성 원당동 출신의 김창학 씨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독이라면 적색분자가 우글거리는, 동독을 끼고 북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  (253쪽)


 아이가 ‘끄으응’ 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척입니다. 밤하늘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아파트 마을 깊은 밤.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고, 옆지기도 식식 콧소리를 내면서 고단히 잠들어 있습니다. 젖먹고 크느라 바쁜 아이입니다. 젖먹이며 키우느라 힘겨운 옆지기입니다. 아이 소리로 보아하니 오줌이구나 싶어 기저귀에 손을 대 보니 촉촉합니다. 아직 따끈하니 오줌 눈 지 얼마 안 된 듯 싶습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잊지 않고 오줌이나 똥을 누어 줍니다. 아이는 자느라 바빠서 지 아버지가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눈을 비비고 있을 줄 알려나요. 어쩌면, 먼 뒷날,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쯤 지나고 나면 알는지 모릅니다. 또, 몰라도 괜찮습니다. 굳이 아이가 지 아버지 일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올곧게 살아갔다고 느껴진다면, 그때에 이르러서 지 아버지 걸음걸이를 곱씹어 주면 됩니다.


..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을 부르짖기 시작하고부터 교육계에도 새마을 바람이 휘몰아쳤다. 새마을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소위 교육을 발전시키고 교사들을 위해 연구하고 일해야 할 장학사들이, 날이면 날마다 밤나무 심는 묘포장이 어느 정도인가 확인하고 그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통계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예고도 없이 불시에 아이들 점심시간에 습격해 혼분식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렇게 웃지 못할 거짓 통계, 조작된 보고를 꾸미기에 급급했으니 날이 갈수록 견디기가 힘겨웠다 ..  (239쪽)


 오늘은 밤에도 더위를 느낀다는 옆지기는 이불도 안 덮고 잡니다. 이제 깊은밤으로 접어드는 만큼 얇은 이불 하나 살며시 펼쳐서 배 언저리까지 덮습니다. 아이도 옆지기도 이불을 걷어차지는 않습니다. 옆지기 동생은 이제 막 일터에서 돌아와서 씻습니다. 일산에서 용산까지 날마다 오가며 일하는데, 이렇게 느즈막하게 돌아오고 나서도 이튿날 새벽바람으로 또다시 일터에 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이 깊은밤에 잠들지 못하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내일이 마감인 잡지사 청탁 글을 마무리지어야 하고, 제 나름대로 책 하나 엮어내려고 쓰는 글도 갈무리해야 합니다. 읽어 주는 이는 거의 없지만, 우리 말을 알맞춤하게 쓰도록 도와주는 글도 쓰고, 헌책방 문화를 돌아보는 글도 써야 합니다. 제 가슴에 깊이 파고든 책 이야기도 쓰고, 참 형편없었다고 느낀 책 이야기도 써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아이를 낳는 동안 겪은 이야기, 아이를 기르면서 느끼는 이야기, 아이 앞날을 내다보는 이야기도 써야 합니다. 이번까지 열두 번째가 되는 사진잔치 이야기도 글로 쓰고, 9월 마지막 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벌이는 ‘보수동 책방골목 잔치’에 사진을 보내면서 붙이는 글도 써야 하고요.

 이 글 저 글 쓰는 글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 저 글 부지런히 쓰는 동안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습니다. 어제 낮, ㅍ이라고 하는 영화잡지사에서 제 사진을 몇 장 쓰고 싶다면서 허락해 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사진을 쓴다니 마땅히 사진값을 치러야 할 텐데, 육 분 가까이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진값 치르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거저 먹으려는 셈인가? 지들이 만드는 잡지가 무료잡지도 아니고, 잡지사 직원이 일삯 안 받고 일하지 않을 테며, 잡지에 글 쓰는 사람들한테 글삯도 안 주는 일은 없을 텐데, 사진 몇 장은 대가 하나 안 치르고 가져가서 써도 되는가?’ 스스로 ‘진보’ 쪽에 있다고 밝히는 분들이 오히려 ‘다른 이가 땀흘려 일구어 낸 보람’을 대가 한 푼 치르지 않고 가져가려고 하는 일이 잦아서 몹시 슬픕니다.




 (4) 사람


.. 해방 직후 내가 의성 중부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그해부터 여름이면 삼베로 불라우스를 해 입었고, 겨울엔 여덟 세나 되는 무명에 물감을 들여서 치마저고리를 해 입었다. 어머니는 내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예쁜 옷감으로 치장하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드디어 딸을 자랑스러운 여교사로 만든 어머니로서의 마땅한 욕심이었으리라. 여름은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옷차림은 곧 아이들에게는 대환영이었고, 선생들에게도 대단한 인기였다. 아이들은 “야! 이것 봐라! 우리 선생님도 삼베옷 입었다!” 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베옷밖에 입을 수 없었던 그들의 찌든 가난을 더는 탓하지 않게 되었고, “이런 옷을 입어도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계기로 삼았다 ..  (301쪽)


 어제 ㅇ이라는 언론사 취재를 받았습니다. 촬영기를 들고 와서 제 ‘인천 골목길 사진잔치’를 찍어 갔습니다. 사진을 왜 찍느냐 묻고, 골목길이란 낡은 대상이 아니냐 묻고, 또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사진은,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이니 찍는다고, 먼 데로 찾아가서 찍는 사진도 나쁘지 않을 터이나, 무엇보다도 자기가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알고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제법 많기는 한데 모두들 그럴싸한 그림만 찍으려 할 뿐, 정작 골목길에 깃든 사람들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겉치레 사진에다가 추억이니 풍경이니 사라져 가는 곳이니 하는 대상으로만 본다고, 골목에 사는 사람 스스로도 골목을 제대로 말하고, 골목 바깥에 사는 사람도 골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헌책방이나 골목길은 ‘오래오래 시간을 먹은’ 곳이지, 헐어 가는 ‘낡은’ 곳이 아니며, 지금부터 앞으로도 죽 읽힐 만한 값어치가 있으니 헌책방이나 도서관 책들에 뜻이 있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골목집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물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아파트는 때 되면 재개발을 안 하면 위험한 곳이라서, 두 집터에 깃든 문화와 느낌이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ㅇ뉴스 사람들은 이날 저녁 아홉 시에 곧바로 방송을 내보냅니다. 저는 이들한테 틀림없이 ‘골목길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하고 몇 차례 힘주어 이야기했으나, 방송에 나온 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추억’인 골목길을 찍은 사진잔치라고 소개해 놓습니다.


.. 윤이를 희생 도구로 삼아 전 학급의 수업 분위기를 구제해 보고자 했던 나의 안일함, 어른이라는 무기로 아이들을 휘잡아 보고자 했던,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잘못된 성취감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어른의 권위로 어린이를 대한다는 것, 교사의 권위에 학생들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진정한 교육자의 길이 아니며, 권위 의식에 젖어 있는 한은 선생과 아동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이는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을 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  (314쪽)


 사람을 믿으면서 살고 싶은데, 고운 믿음을 선보이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데, 아름다운 마음씨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너무도 좋은 핑계인 ‘먹고살기 힘들다’ 한 마디로 자기 삶을 아주 망가뜨린다고 느낍니다. 먹고살기 힘들면 대충 막 살아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전쟁무기 만드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해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이 나라 삶터와 자연을 무너뜨리는 개발을 끊임없이 일으켜도 되나요. 먹고살기 힘들면 기름값이 하늘 높이 치솟아도 자가용 끌고 다니기를 안 멈추어도 되나요.


.. 변화된 현실을 무시하고 막연한 통념에 사로잡힌 반쪽의 진실을 가르치는 교과서, 그리고 그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과 위선에 환멸을 느꼈다. 올바른 사회생활에 관한 교육이라면 분명 이렇게 변모한 사회에서 그에 따라 역시 변화한 여성상을 새로이 정립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전해야 함이 마땅한데, 살림 잘하는 여성만을 고마운 어머니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것은 일종의 눈가림이거나 안일하고 보수적인 태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  (355쪽)


 제가 느끼기로는, 오늘날 이 땅 사람들은 조금도 ‘먹고살기 힘들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기 싫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기 싫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콩 한 알 반으로 가르는 넉넉한 마음은 내다 버리고 싶을’ 뿐이지 싶습니다. 가슴을 툭 터놓고 어깨동무하기는 도무지 내키지 않구나 싶어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돈굴리기 하는 아파트만 짓잖아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더 빠르고 큰 차가 씽씽 내달리기만 하는 찻길만 닦잖아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정책이 아닌, ‘경제 살리기’라는 허울을 내걸면서 우리 모두가 ‘돈버는 기계’가 되도록 길들이고만 있잖아요.

 따뜻한 마음 없이는 통일운동이란 없습니다. 너른 넋 없이는 진보운동이란 없습니다. 애틋한 사랑 없이는 사회운동이란 없습니다. 즐거운 보람을 느끼는 가슴 없이는 환경운동이란 없습니다. 고즈넉한 믿음 없이는 교육운동이란 없습니다. 부드러우면서 씩씩한 매무새를 가꾸지 않고서는 언론운동이란 없습니다. 혁명은 총을 들고서 이룰 수 없습니다. 혁명은 펜을 들고서도 이룰 수 없습니다. 혁명은 맨몸뚱어리로 이룹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맨몸을 온통 내맡길 때 비로소 이룹니다.


 (5) 《이 여자, 이숙의》라는 두툼한 책


 남녘에서는 ‘빨갱이’요, 북녘에서는 ‘혁명운동가’ 대접을 받는 박종근 님 옆지기로 살아낸 이숙의 님이 피와 눈물로 적바림한 책 《이 여자, 이숙의》를 읽습니다. 《이 여자, 이숙의》를 쓴 이숙의 님 글을 덤덤하게 읽다가 얼결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고, 옆지기한테 몇 대목 읽어 주면서 울먹울먹하여 그예 다 읽지 못하고 책을 덮습니다.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이숙의 님 딸아이 박소은 씨가 적은 글과 글쟁이 김형수 님이 붙인 글도 아울러서, ‘이 책은 주제가 이렇습니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서전이지만 자서전이 아니고, 역사이지만 역사가 아닙니다.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니고, 믿음이지만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옳다고 느껴진 길을 걸으려고 했던 사람들 몸부림입니다. 그예 아름답다고 느껴진 길을 놓지 않던 사람들 몸짓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훌륭하게 갈고닦고프던 꿈을 고이 가꾸면서 당신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하나한테까지도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하려고 했던 사람들 움직임입니다.

 길지만 길다고 느껴지지 않고, 눈물겹지만 눈물로만 읽을 수 없으며, 아프지만 아픔을 곱새기면서 더욱 튼튼한 나무로 자라도록 다그치는 이야기 매무새입니다.

 지아비한테 옆지기로서, 딸한테 어머니로서, 어머니한테 딸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집에서 며느리로서, 무엇보다도 이 땅을 당차게 디디고 일어서고 싶었던 여성으로서, 이숙의 님은 당신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냈습니다. 고향나라이지만 조금도 고향냄새를 맡을 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당신 손주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연필을 꾹꾹 눌러 쓰면서 이야기 한자락 세 올 네 올 엮어냈습니다.

 온삶을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채 버티고 버티다가, 당신을 버티게 한 옆지기 마지막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병원에서 맑은 웃음 한 번 딸아이한테 보여주고 새벽녘 아주 조용하게 숨을 거둔 이숙의 님. 이 땅에서 어머니(여성) 되는 사람들 삶이란 무엇인가를 어느 누구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으니, 당신 두 손으로 이렇게 책 하나 여미어 냈군요. 이 땅에서 어머니(여성) 되는 사람들 발자취란 어떠했는가를 어느 누구도 느끼려고 하지 않으니, 당신 두 다리로 이렇게 걸어왔다고 통째로 내보이면서 살포시 껴안아 주는군요. 우리 어머니도 당신 삶을 풀어놓을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먼 뒷날, 우리 옆지기도 자기 삶을 펼쳐놓을 겨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1.9.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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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골목길과 부산 골목길
 ― ‘부산 책방골목잔치 마실’을 앞두고 쓰는 편지



 열 해쯤 앞서부터 해마다 한두 차례 부산 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부산사람이 아니면서 부산을 바라보는 동안, 부산 삶터가 나날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해마다 새삼 느낍니다. 인천과 마찬가지로 산등성이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골목집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층층집들만 가득가득 솟아나고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데에도 층층집만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 층층집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허물린 골목집은 ‘오래되어서 위험하기’ 때문에 허물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돈을 뽑아내려는 건설업자와 공직사회가 ‘재개발 법’에 따라서 밀어냈을 뿐입니다. 골목길에서 살던 사람들 또한 몇 푼 안 되는 돈에 휘둘리면서 스스로 제 삶터를 내동댕이쳤습니다. 무턱대고 밀어대는 사람도 딱하지만, 밀어댄다고 해서 돈에 휘둘리는 골목사람도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은 이 짧은 한삶을 보내는 동안 왜 그리도 돈에만 목을 매달아야 하는지요? 러시아 큰스승 톨스토이 말을 빌지 않더라도, ‘한 사람한테는 얼마나 넓은 땅과 많은 돈과 높은 이름이 있어야 하는가?’ 하고 묻고 습니다.

 막말로, ‘재래시장’을 없애고 ‘쇼핑센터’를 들이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만, 쇼핑센터를 짓기까지 쏟아부어야 하는 돈은 돈이 아닌가요. 쇼핑센터를 굴리는 데 들어갈 어마어마한 전기와 자원은 돈이 아닌가요. 물건을 사고파는 시세차익으로 돈을 뽑아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을 고이 일구면서 알맞춤하게 얻고 넉넉하게 나누며 살아가는 일이란 아무 보람이 없을는지요.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넉넉한 사랑이 그립습니다. 더 큰 집이 아닌 더 따스한 믿음이 그립습니다. 더 빠른 자동차와 고속철도가 아닌 더 애틋한 나눔이 그립습니다. 더 높은 이름이 아닌 더 아름다운 마음결이 그립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나쁘지 않을 터이나, 착한 사람이 훨씬 반갑습니다. 얼굴 예쁘장한 사람도 싫지 않으나, 다소곳하게 이웃을 헤아리거나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더욱 고맙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서는 돈보다는 사랑을, 큰 집보다는 따스한 믿음을 느낍니다. 날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동네 마실(제가 사는 집이 골목집이니 사진 찍으러 다니는 일은 동네 마실이 됩니다)’을 다니면서, 둘레 이웃들한테 반가운 사진 한 장 고맙게 얻습니다. 아기자기 꾸민 꽃그릇을 보고, 예술품과 다를 바 없이 매만진 꽃줄기와 벽과 울타리와 문간을 봅니다. 손때 묻은 이름패를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이 땅에서 뿌리내린 사람들 숨결을 느낍니다. 우체통이 비맞아 슬지 말라며 플라스틱 달걀판을 얹은 모습을 보면서, 그저 꾸밈없이 즐기면서 살아가는 맛이 무엇인가를 곱씹습니다. 시멘트 길바닥이지만 아이들이 맨발로 뛰놀아도 발을 다치게 할 병조각이나 쓰레기가 없도록, 골목사람 스스로 아침저녁으로 골목길을 비질하는 그 품새가 거룩하여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따라 배운다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오순도순 어울리는 골목집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웃사랑과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배웁니다. 이웃이 누군 줄도 모르며 쇠문 철컥철컥 닫아걸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만 빠져들게 되는 층층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나 하나만 잘 되기’를 배우면서 외돌토리가 되어 갑니다. 아이들이 ‘이름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야 ‘인생 성공’은 아닐 테지요. 아이들이 ‘이름나고 서울에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가 억대 연봉을 받아야 ‘인생 역전’은 아닐 테지요.

 부산 광안리 모래밭이 어느새 시멘트로 덮이고 찻집과 술집으로 떡발린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맨발로 디딜 모래밭이 차츰 줄어들고, ‘비싸디비싼’ 기름을 먹는 자동차를 굴려서 기나긴 다리를 건너야 바다를 내다보며 즐길 수 있게 되는 부산 삶터가 가슴을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가 즐기는 문화라 한다면, 자동차가 없는 사람도 즐기고 돈이 없는 사람도 즐기며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는 사람도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전거가 지나갈 수 없을 뿐더러, 걸어서 오갈 수 없는 다리도 다리일까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가 느긋하게 달릴 수 없을 뿐더러, 아이들이 길바닥에 금을 긋고 놀이를 할 수 없는 동네가 참말 사람 사는 동네가 맞는지 여쭈어 봅니다. 아이들한테 고무줄놀이를 빼앗고 인터넷게임을 가르친 이들은 바로 우리 어른입니다. 아이들한테 술래잡기를 빼앗고 텔레비전에 푹 빠지게 가르친 이들은 바로 우리 어른입니다. 아이하고 손을 마주하면서 실뜨기놀이를 하는 틈조차 내지 못하는 우리 어른입니다. 아이한테 책 하나 읽어 주지도 못하도록 돈 버느라 바쁘지만, 아이한테 들려줄 ‘우리 어른들 살아온 이야기’ 하나 제대로 되새기지 못하는 우리 어른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쩔 수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들한테는 우리 삶이 없으니, 우리한테 고유한 문화 또한 없습니다. 부산에 가 보아도 ‘여기가 부산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집이나 길이나 사람이 없습니다. ‘했어예’ 하는 말투 하나로, 말 높낮이(억양) 몇 가지로만 부산을 느껴야 한다면, 인천사람이 구태여 부산까지 나들이를 가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거꾸로, 제 고향 인천이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저 같은 사람이 깃들어 사는 골목집을 와장창 때려부수고, 맨숭맨숭 재미도 없고 비싸기는 우라지게 비싼 층층집만 잔뜩 짓는 재개발을 밀어붙여서 끝내 뜻을 이루어 버린다면, 부산에 계신 여러분들을 인천으로 부를 수 없을 뿐더러, 불러도 재미가 없습니다. 지금은 돈 한푼 안 들이고도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얼마든지 ‘인천 마실’을 즐길 수 있지만, 앞으로는 자가용을 끌고 돈 쓰고 다녀야 비로소 ‘인천 마실’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부산에는 자갈치시장이 있고 어마어마한 개미소굴 같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저잣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습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서울 청계천에서도 사라지고, 대구와 광주와 대전에서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있는 헌책방골목이 꿋꿋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책방골목잔치’까지 엽니다. 부산국제영화잔치도 볼 만한 자리일 텐데, 저로서는 부천에서도 하고 전주에서도 하고 또 어디어디에서도 똑같은 꼴로, 그예 판박이로 이루어지는 영화잔치보다는, 제주는 제주대로 강릉은 강릉대로 청주는 청주대로, 인천은 인천대로, 또 부산은 부산대로 모두 다른 맛으로 꾸려 나가고 있는 헌책방이 깃든 그 골목 그 거리를 두 다리로 사붓사붓 걸어다니며 사진도 몇 장 찍고 책도 몇 권 고르면서 마음과 생각과 얼과 넋을 살찌우는 ‘부산 마실’이 더없이 반갑고 신납니다. 그래서, 이참에 ‘인천 골목길’을 찍은 사진을 들고 부산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그러면서, 다음해에는 부산에서 ‘부산 골목길’을 사진으로 찍는 분들이 사진꾸러미를 어깨에 짊어지고 인천으로 나들이를 와서 사진잔치 한 번 열어 주면 얼마나 재미날까,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까 하면서 혼자서 꿈을 꾸고 웃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돈을 갖다 앵겨도 바꾸지 않을 아름다운 골목에서 왁자지껄한 놀이마당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이 놀이마당을 앞으로도 이 나라 아이들한테, 이 가운데 누구보다도 부산 아이들한테 싱그럽고 푸르게 물려주면서, 먼 뒷날에는 아이들이 제 나름대로 새롭게 꾸며 나가도록 널리 베풀어 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4341.9.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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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서갑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 책에 담긴 참된 속마음을 읽어 주기는 너무 힘들까


- 책이름 :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 글쓴이 : 서갑숙
- 펴낸곳 : 중앙 M&B (1999.10.15.)



 우리 집에서 딸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지기 어머님이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궁금하고 당신 딸아이가 딸을 낳은 모습이 대견스러워서 몸풀이를 거들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우리 집에 함께 머무는 동안, 낮 나절에 곧잘 책을 펼치시곤 했는데, 제 책꽂이에 꽂힌 책 가운데 서갑숙 님 책 《추파》를 읽으셨습니다.


.. 그래, 나약한 나의 젊은은 이렇게 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내 곁에서 친구들도 각자의 삶에 절망한 듯 고개를 꺾고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새어나갔는지, 친구의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쯧쯧쯧, 벌써부터 이러면 되니?” 너저분해진 방을 보고 친구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대학은 떨어졌고, 나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국문학과를 지망했지만,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바꿨다. 어차피 짧게 살 목숨이라면, 연극을 통해 다양한 인생이나 경험해 보고 죽자는 생각이었다 ..  (29쪽)


 벌써 퍽 여러 해가 된 일입니다. 책마을 선배한테 이끌려서 서울 인사동에 있는 ㅍ이라는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날 그곳에는 여러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손님들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 나중에 술값은 어찌할까 걱정스럽지만, 이런 걱정은 저 혼자뿐, 모두들 웃고 떠들며 어울립니다. 한참 술잔을 부딪히다가, 책마을 선배가 제 옆에 앉은 분이 서갑숙 씨라고 소개해 줍니다. 처음에 따로 소개를 안 한 까닭은 최종규 씨라면 으레 알겠거니 싶어서. 그러나 텔레비전 안 보는 제가 서갑숙 씨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원더걸스도 모르고 채연도 모르고 하는데.


.. 어쨌든 그런 폭력적인 경험들을 겪으며, 역시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심어린 사랑이 없는 한, 그 어떤 섹스나 스킨십도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45쪽)


 이름을 알게 되며 조금 더 찬찬히 이야기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분이 저를 어찌 속깊이 알겠으며, 저 또한 그분을 어찌 속깊이 알랴마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허물없이 술과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만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하나 찾아봅니다. 어느 헌책방에 가 보아도 여러 권씩 꽂혀 있는 이 책을, 꽂히기는 많이 꽂혀도 애써 끄집어내어 읽는 이 없는 이 책을.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 띠가 둘러져 있는 이 책을 찬찬히 넘겨봅니다(책을 읽어 보면, 이 책이 이런 빨간 딱지를 받아야 할 까닭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름을 출판사에서 이렇게 붙여 버렸으니…….). 그날 그 술집에서 보고 느낀 서갑숙 씨 외로움과 고단함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사귀고 싶어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느끼면서 어우러지고 싶어하던 그 눈매를 곱씹어 봅니다. 사람 많은 세상이고, 사람 넘치는 서울이며, 사람 복닥이는 이 땅인데, 왜 서갑숙 씨 여린 가슴에 사랑과 믿음이 고이 내려앉아 열매를 맺도록 어깨동무를 하려는 손길이 보이지 않을까 뒤돌아봅니다.


..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 멀었나요?” 그러다 진통이 잦아지고 심해지자, 나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이리 좀 와 봐요!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런 내 곁을 냉랭한 태도로 지나치는 간호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 간간이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고마워요.”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  (85∼86쪽)


 비 퍼붓던 어제 아침, 인천으로 볼일 보러 가려고 부지런히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저는 2000번 빨간버스가 씨잉 빠르게 지나가며 거님길 안쪽 깊이까지 튀겨 주는 물보라를 흠씬 뒤집어씁니다. 저녁나절 일산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 건너는데 아랑곳않고 제 앞으로 휭 지나가는 까만 자동차를 몰며 한손으로 손전화로 수다를 떠는 아줌마를 봅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탈 때에는 마구 밀치기까지는 안 하지만 먼저 타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버스에서는 둘레 사람이 시끄러워하거나 말거나 작지 않은 목소리로 “존나 씨발 짜증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으면서 자기 남자친구가 지저분하네 뭐네 하고 수다를 떠는 아가씨를 봅니다. 전철로 갈아탄 자리에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 가방을 영차 하며 메는데 내 뒤쪽으로 갑자기 지나가면서 가방을 툭 쳐서 미는 아저씨를 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분들 마음결이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이대로 살아도 당신들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지 모르겠는데, 이대로 살아가는 당신들 모습은 아름다움하고는 자꾸만 멀어지는구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동안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고통을 한탄하며 자기를 학대하고 비하해 왔기 때문이다. 나의 노화는 세월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노화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섹스에 대해 무지했던 것일까? 그저 상대방이 이끄는 대로 섬세한 교감 없이 치러내는 섹스, 소극적인 섹스만 나누다 보니 진정한 육체적 사랑이 찾아왔을 때 적응을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  (169쪽)


 헌책방 책시렁에서 찬대접을 받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한 권 장만해서 읽은 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마다 이 책이 보이면 한 권씩 더 사 두게 됩니다. 가방에 한 권씩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이들한테 이 책을 아느냐고 물어 본 다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면 선물로 내밉니다.

 이 책을 고맙게 받아들고 읽어 줄는지, 귀찮게 뭔 책이냐 할는지, 썩 재미도 없어 보이는 책을 왜 주느냐고 할는지, 얄딱구리한 책을 자기한테 선물하는 꿍꿍이가 뭐냐고 할는지 모릅니다만, 조용히 내밀고 조용히 서갑숙 씨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용히 우리가 걸어가는 삶과 가꾸는 삶을 짚어 보자고 말합니다.


.. 내가 그렇게 흥분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한 개인의 삶이 구겨지든 찢어지든 상관않고 멋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어. 돌아서서는 금세 잊어버릴 말들을, 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내뱉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  (212쪽)


 《추파》를 읽은 옆지기 어머님은 어떤 느낌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옆지기 어머님한테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선물해 드리면 즐겁게 읽으실지, 그냥저냥 받아들이실지 궁금합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즐겁게 읽어 주신 분이 있으면 《추파》도 선물해 주고 싶은데, 여태껏 스무 권 가까이 선물해 오는 동안, ‘읽은느낌’을 들려주는 분이 없습니다. 책이름만 보고 덮었을지, 머리말 몇 줄 읽다가 덮었을지, 책 몸글 몇 쪽이나마 읽다가 덮었을지, 아예 들여다보지 않고 덮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 한몸 먹고살기에도 바쁘고 빠듯한데, 서갑숙이든 누구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껴안고 있는지 돌아볼 틈이 어디 있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드시 서갑숙 씨를 알라고 이 책을 건네지 않았습니다만. 구태여 서갑숙 씨 삶이나 생각을 알라고 이 책을 내밀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서갑숙 씨 길을 돌아보라고 이 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4341.9.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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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란 사람들은 왜


 우리 딸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몇 가지 글로 써서 띄워 놓았더니, ‘독특하게 키우는 육아 이야기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몇 군데에서 옵니다. 제 글을 읽었으면 틀림없이 ‘세이레가 되기까지 아기 사진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적은 대목도 보았을 터인데, 사진기도 아닌 촬영기를 들이밀려고 하는 마음을 어떻게 품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아찔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방송 타는 일을 대단한 자랑으로 알 뿐더러, 방송을 타 보려고 너나없이 나서는 판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은 그깟 방송에 나간들 어떠하고 안 나간들 어떠하랴 하고 생각합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속깊이 제대로 취재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서 조금도 믿지 못하고 있는 판이고요.

 전화번호는 어떻게들 용하게 알아내는지 놀랍습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그 마음씀과 손놀림만큼이라도, 아니 그 반이나 반만큼이라도, 자기들이 취재를 하고 싶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삶이며 어떤 매무새인지를 곱씹어 볼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4341.9.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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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소 2008-09-03 15:57   좋아요 0 | URL
인천 배다리 못간지 몇 해 훌쩍~...^^ 96년인가 그랬을겁니다 아마도 님께서 혼자 만들어 놓으신 책자를 만난게..아벨서점에서요 늘 건강하세요~ 맘몸삶
 


 68킬로그램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군대에 가기 앞서까지 내 몸무게는 68킬로그램이었다. 이때 내 몸은 퍽 호리호리했고 어깨와 가슴만 크고 넓었다. 군대에서는 ‘괴물’처럼 살아야 하다 보니까, 군대를 마친 뒤 몸무게가 조금 불었고, 이 몸무게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래도 군대를 마친 뒤 신문딸배를 하면서 살았으니 69∼70킬로그램을 오갔는데, 신문딸배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들어간 1999년 8월부터 몸이 꽤 불었다. 몸쓰기보다는 머리쓰기를 많이 하는 일이 되다 보니까, 74∼75킬로그램, 한때 78킬로그램까지 나가기도 했다.

 군대에서 80킬로그램이 된 적이 한 번 있는데, 75킬로그램이라는 무게를 넘어가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여겨졌다. 몸무게만큼 힘은 더 잘 써서 무거운 짐도 너끈히 나를 수 있기는 하지만, 몸은 굼떠서 자전거를 타거나 가방 너덧 개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여러 시간 거닐며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면 퍽 고달팠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충주 산골짜기에서 일하게 된 2003년 9월 무려부터는 72∼74킬로그램을 오갔다. 가볍지는 않으나 무겁지도 않은 몸무게였고, 이 몸무게는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싱 하고 달리면 2킬로그램쯤 빠졌다가, 사나흘 쉬며 몸풀이를 하면 도로 제자리를 찾고, 다시 서울에서 충주로 자전거를 달리면 또 2킬로그램쯤 빠졌다가, 사나흘 느긋이 지내면서 다시 돌아오곤 했다.

 충주 살림을 접고 고향마을 인천으로 온 2007년 4월, 3.5톤 짐차로 석 대를 꽉꽉 눌러서 채운 책짐을 실어나르고 무거운 책장을 새로 들이고 책 자리를 새로 잡고 하는 동안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몸무게는 70∼72킬로그램 사이를 오가게 된다. 어느 하루도 몸 홀가분히 쉬는 날이 없으니, 책상맡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이 열 시간이 넘어간다고 해도 뱃살이 나올 겨를이 없다. 날마다 손빨래를 하고, 방바닥 걸레질을 하며, 밥하기와 설거지를 쉬지 않으니까, 내 몸에 군더더기살은 붙지 않는다. 게다가 틈틈이 자전거 마실을 하지, 서너 시간씩 걸으면서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하지, 외려 얼굴이 말랐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올 팔 월 십육 일. 아기가 태어날 무렵. 옆지기와 함께 배앓이를 나누어 하면서 밤잠도 낮잠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밥해 먹이랴 집 치우랴 무어 하랴 아주 바쁘게 돌아치는 동안 몸무게는 68킬로그램으로 떨어진다. 아기가 태어나고 기저귀 갈랴 빨랴 치우랴 밥하랴 청소하랴, 몸무게가 66킬로그램으로 떨어진다. 눈자위는 푹 꺼지고 눈밑이 꺼매진다.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면서 밥맛을 잃고, 밥을 먹지 못하면서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루에 한 시간 자기도 어려운 가운데 잠깐 드러누워 등허리를 펼라치면, “여보, 벼리가 오줌 누었어요.”나 “여보, 벼리가 똥 누었어요.” 하는 소리.

 아이를 막 낳은 어머니가 아기 기저귀를 갈 수 있으랴, 빨 수 있으랴, 더욱이 손수 미역국을 끓여먹을 수 있으랴. 옆에서 지아비 된 사람이 모든 시중을 들어야 한다. 옆지기는 깊은 밤 젖먹일 때를 빼놓고는 새근새근 잠이 들지만, 지아비는 맥주잔이라도 붙잡으면서 잠을 좇으며 기저귀를 갈고 빨고 널고 다림질을 한다.

 요 며칠, 일산 옆지기 어머님 댁에 와 있어서, 옆지기 밥해 주는 몫은 크게 덜었다. 어느 만큼 몸이 느긋해지니 마음도 풀어져서, 이른저녁에 일찌감치 눈을 감아 본다. 밤새 잠을 못 잘 테니까.

 그러나 한 시간 반쯤 눈을 붙였을까. 아기 오줌 기저귀를 한 번 갈아 받친 저녁 열한 시부터 새벽 여섯 시 삼십칠 분까지 내처 뜬눈으로 보낸다. 새벽 두어 시쯤 갑작스레 똥을 무더기로 내보낸 어린아기는 기저귀를 여섯 장 한꺼번에 쏟아내었고, 미리 다림질해 마련해 둔 기저귀가 꼭 한 장이 남았을 때가 새벽 여섯 시 삼십칠 분. 미리 빨아 널어둔 기저귀도 이즈음 거의 마르고. 아기도 더는 똥질과 오줌질을 하지 않으면서(그래도 한 시간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지만, 그 뒤로는 왕창 쏟아내지는 않았다) 한숨을 돌렸는데, 새벽 네 시쯤 한창 힘들어 다문 십 분이나 삼십 분이라도 눕고 싶던 때, 옆지기가 나를 부른다. “여보, 착유기 좀 가져다 줘요. 아무래도 젖을 짜내야겠어요.”

 아기가 아무리 신나게 젖을 먹어도 한쪽 젖은 퉁퉁 불기 마련. 남자인 내가 젖몸살 아픔을 얼마나 알겠느냐만, 잠들지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아픈가를 살갗으로 느낀다.

 익숙하지 않던 젖짜기 기계를 안 아프게 쓰는 길을 어렵사리 알아냈고, 지아비 된 사람은 기저귀가 모자랄세라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도록 다림질을 한다.

 이틀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했다. 씻을 겨를이 없다. 잠깐 아기가 우리한테 평화를 선사하는 때에는 씻을 힘이 없어서 그냥 드러누워서 눈을 붙인다. 그렇지만 ‘으 끙 끄’ 하는 나즈막한 외마디소리를 듣고 화들짝 깨어나서 똥기저귀와 오줌기저귀를 간다. ‘어차피 다시 땀으로 젖을 텐데 뭐 하러 힘들게 씻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찬물로 기저귀를 빨지만 하나도 안 시원하다. 널어 놓은 기저귀는 보송보송 말라 가는데, 내 목덜미며 허벅지며 때가 밀릴 만큼 땀이 범벅이 되었다.

 날이 밝고 한잠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아침을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나서 옆지기 어머님이 아기방을 치우자고 이야기한다. 방에 먼지가 많을 테니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쓸고 닦잔다. 아기를 옆방으로 옮긴다. 옮길 때 햇볕으로 눈이 부시지 않도록 잘 가리고, 옆방에서도 햇볕을 쐬지 않게 가려 놓는다.

 부지런히 쓴다. 신나게 걸레질을 한다. 걸레를 빤다. 다시 걸레질을 한다. 이불을 턴다. 팡팡팡 두들기며 턴다. 또다시 온몸을 땀으로 씻어냈다. 낮 열두 시 십 분. 옆지기가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한다. 낮밥을 먹기로 한다. 벌써 밥때인가? 옆지기 부모님 사는 집으로 온 다음부터, 밥때를 놓치기는 해도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다. 좋다. 밥 먹고 보자.

 밥상 차릴 즈음 후다닥 씻는다. 씻는 김에 똥오줌 기저귀도 빤다. 옆지기 기저귀도 함께 빤다. 부랴부랴 씻고 빨래한 뒤 널고 말리면서 밥술을 든다. 밥술을 뜨기 앞서 아기방에 들어가 엉덩이에 살며시 손. 촉촉하다. 오줌이군. 기저귀를 간다. 겉싸개 기저귀는 다리미로 말린다. 다리미로 말린 겉싸개 기저귀가 이번에는 엉덩이 기저귀가 된다. 엉덩이 기저귀는 씻는방 대야에 담긴다. 밥먹고 나서 빨자.

 빨아 둔 기저귀가 다 말랐다. 하나하나 걷는다. 이제 또 다림질을 해야지. 그러는 동안 또다시 똥오줌 기저귀는 새로 나올 테고, 빨래감은 또 나올 테며, 새로 너는 빨래는 자꾸자꾸 나오리라. 아기는 때맞춰 똥오줌을 누고 젖을 먹으며, 지아비 된 사람은 밀리지 않고 빨래질을 해낸다. 한 번 밀리면 죽음은 아니고, 두어 번 밀린다고 해서 기저귀가 모자라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밀렸을 때에는 어김없이 똥벼락이 내려서 기저귀가 바닥이 날 때가 있기에, 한 번이라도 빨래를 밀리지 않으려고 한다.

 갈고 빨고 다림질하고 어르고 안고 달래고 쓰다듬고 하는 데에 한 시간 가운데 오십 분쯤 쓴다. 한 시간에 10분쯤 쉴 틈이 난다. 이때에는 수첩에 아기 매무새와 움직임 들을 적어 놓는다. 옆지기 가슴 주무르기를 한다. 팔다리 주무르기를 한다. 이러다 보면 ‘빼기 시간’이 되어서, 다음번 기저귀 빨래 시간을 갉아먹는다. 가끔가끔, 아기는 한 시간에 한 번이 아닌 두 시간에 한 번 오줌을 지리면서 빨래감을 줄여 주곤 한다. 이때에는 얼마나 고마운지 넙죽 절을 하게 되고, ‘빼기 시간’으로 갉아먹었던 모자람을 넉넉히 채우게 된다. 잠깐이나마 마루에 나와 허리돌리기를 하고 기지개를 켜며 효소를 타서 물 한 잔 마신다.

 그런데 이렁저렁 하루를 보내는 동안 책 한 번 펼치지 못한다. 옆지기 어머님이 세탁기로 한 집식구들 빨래가 마루에 나오면, 옆지기 어머님도 바빠서 미처 개키지 못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다니는 어린 옆지기 동생은 빨래 개기를 안 한다. 시키면 할 테지. 이래저래 바쁜 가운데 빨래가 마루에 널브러진 지 두 시간쯤 지나서 겨우 짬을 내어 빨래를 갠다. 빨래를 개면서 ‘집안일로도 이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으신데, 우리가 아이를 데려와서 더 힘드실 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도, 옆지기 어머님도 할머니가 된 즐거움을 누리는 맛’이 힘듦보다 더 크지 않으랴 싶다. 오늘 아침에도 아기를 씻기면서 옆지기 어머님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아기 돌보기를 더 거들어 주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저러나, 나도 옆지기도, 또 옆지기 어머님도 책을 읽지 못한다. 모든 일을 다 끝난 늦은 저녁에는 몸이 고단하니 책장을 못 넘기고, 햇볕 좋은 아침과 낮에는 이 일 저 일 부대끼느라 책장을 못 펼친다. 나 또한 밤늦게 다림질을 하고 겨우 숨을 돌리면서 불빛에 기대어 책장을 한두 쪽 넘기는데, 그러다가 기저귀 갈이를 하다 보면, 책은 어느새 덮어놓게 된다.

 책 좀 읽고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책 좀 읽으며 내가 아직 모르는 세상 이야기를 배우고 싶어도, 책 좀 읽으며 여러모로 어리숙한 내 마음밭을 푸근히 가꾸고 싶어도, 책과 가까워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끈은 놓지 않는다. 아직은 책을 펼치기 어렵다고 하지만, 지금은 책과 떨어진 채 지내야 하지만, 우리 아이가 책이요 우리 옆지기가 책이며 우리 옆지기 어머님이 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려가자. 어제그제는 그나마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잠을 더 자 주었다고 몸무게가 2킬로그램 늘어서 68킬로그램이 되었다. (4341.8.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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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8-30 09:24   좋아요 0 | URL
읽어가며 제가 다 힘이 드네요.ㅎㅎ
벼리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더운날 고생이 많으세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남편 잘 없어요.
옆지기님이 아주 고마워하고 계실겁니다.

파란놀 2008-08-30 16: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제대로 못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더구나, 제가 일이 많아서
일산과 인천을 오가야 하니 더 고달픕니다.
인천에서만 아기를 낳고 돌볼 수 있기를 바랐으나,
이 일이 어그러지면서
참 쉽지 않은 부모요 아이가 되었어요.

에구... 아무튼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