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꽃 1
시무라 타카코 지음, 오주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고운 삶
 [살가운 만화 53] 시무라 타카코, 《푸른 꽃 (1)》



- 책이름 : 푸른 꽃 (1)
- 글ㆍ그림 : 시무라 타카코
- 옮긴이 : 오주원
- 펴낸곳 : 중앙북스 (2009.12.23.)
- 책값 : 7800원



 (1) 다짐


.. “미안해. 말 안 해서.” ..  (41쪽)


 《섹시 가이 (1∼7)》(세주문화,2000∼2003)와 《방랑 소년 (1∼8. 앞으로 더 나옴)》(학산문화사,2007∼2010)이 나라안에 옮겨진 일본 만화쟁이 시무라 다카코 님 《푸른 꽃》 1권이 나왔습니다. 일본에서는 3권까지도 나와 있고 만화영화로도 나오고 있으나, 아직 우리 나라에는 1권만 나와 있습니다. 《방랑 소년》은 새로운 권이 옮겨질 때마다 띠종이에 새 말이 하나씩 붙는데, “우리들의 비밀”과 “우리들의 꿈”에 이어 8권째에는 “우리들의 결단”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방랑 소년》은 이야기가 마무리된 다음에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하는데, 8권째에 이르러 ‘힘들게 헤매던 아이들’이 굳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방랑 소년》에서 주인공인 여자아이는 중학생 2학년이 된 때에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고, 또다른 주인공인 남자아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단짝동무였던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온 모습을 보고 여러 날 마음앓이를 한 끝에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기로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 정체성이 흔들리는’ 삶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여느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킬는지 궁금합니다. 이 아이들 눈길에서는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걷고 싶은’ 삶입니다. 이 아이들 또한 여느 아이요 여느 사람이며 여느 길을 걷는 고운 목숨입니다. 다만, 이 아이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걷고 싶기 때문에 갈팡질팡합니다. ‘여느’라는 이름을 앞에 내거는 어른이나 동무들은 하나같이 겉보기로만 ‘여느’이지, 알고 보면 틀에 박히거나 판에 박힌 제도권만을 쑤셔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에는 무얼 하고 저 나이에는 무얼 하며, 이때에는 무슨 옷을 입고 저 자리에는 무슨 일을 하며 …… 하면서 모든 자리 모든 때에 맞추어진 틀이 있습니다. 이 틀을 따라야 ‘여느’ 삶이라 하고, 이 틀을 따르지 않으면 ‘미친’이나 ‘얼빠진’이나 ‘바보스런’이 되고 맙니다. 좋아하는 야구단이 있어야 하고, 체육 시간에는 다 같이 뜀박질을 해야 하며, 학교에서는 공부에만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여느’가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렇게 꾸리는 삶이 ‘여느’라 할 수 있을까요.

 만화책 《방랑 소년》 8권은 주인공인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을 때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으나, 스스로 누구임을 밝히자 학교가 온통 뒤집어지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을 때에는 거의 아무런 말썽이 되지 않았으나,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니 더없이 크게 말썽이 됩니다. 그래도 일본이니까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어도 그렁저렁 지나가지, 우리 나라였다면 똑같이 뒤집어졌겠지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면 아홉 시 새소식에서도 다루고 기자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법석을 이루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흑……, 으…….” “또 뭔가 생각이 났구나? 울음 뚝! 밤엔 자는 거야! 알았어?” “응……. 옛날에도 이렇게 너한테 자주 혼났지.” “너네 할머니만 할까?”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대단했지.” “난 옆집 애였는데 맞았다니까!” “그 할머니도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  (66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가 머리를 ‘단발머리’만큼이나마 기르는 일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사이야 다들 흔히 머리를 기르곤 합니다만, 우리 나라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머리카락을 아예 안 깎으며 살던 겨레였으며, 고작 백 해 앞서는 누구나 이렇게 살았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는 사회문화는 일제강점기에 스며들었고 군사독재정권이 정부권력을 붙잡았을 때 뿌리내렸습니다. 반드시 독재정권과 ‘머리길이’ 이야기를 맞댈 수 없습니다만, 사회와 문화와 제도와 법이 차갑게 틀어막힌 나라에서는 ‘머리길이를 짧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못하도록 다스리고, 사람마다 다 다른 머리결을 다 다른 모양새로 손질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릅니다. 운동선수라 하여 머리를 다 짧게 쳐야 하지 않고, 운동선수로 뛰면서도 긴머리를 휘날릴 수 있습니다. 물에서 헤엄을 칠 때에 ‘전신수영복’을 입을 수 있고 ‘아주 짧은 헤엄옷’을 입거나 아예 알몸일 수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도 저마다 입고픈 옷을 입기 나름이고, 달리면서 흩날리는 머리결 느낌을 좋아할 수 있으며, 흐르는 땀을 머리띠로 막을 수 있는 한편, 박박 민 머리에 와닿는 바람 느낌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카락 길이를 우격다짐으로 틀에 박아 버립니다. 초등학생은 어떠하고 중학생은 어떠하며 고등학생은 어떠하도록. 대학교에서조차 교수에 따라 학생들 머리길이를 놓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곤 합니다. 요즈음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한데, 1994∼1998년에 대학교에 한동안 머물고 있을 무렵 저는 ‘남학생 주제에 머리가 길다고 학점이 깎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딱히 눈총을 안 받지만 2000년대를 넘어서는 때까지 고향동네 인천에서든 서울로 마실을 나올 때이든 ‘저 남자는 뭔데 머리를 길러? 미쳤나 봐?’ 하는 수군거림을 뒤에서 숱하게 들었습니다. 길 가던 할배나 전철길 할배 가운데에는 저를 붙잡고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놔 두고 고무줄로 한 번 묶어 주었을 뿐인데에도.

 하리수 님이야 성을 바꾸는 수술을 받았다지만, 성을 바꾸는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이 치마를 입고 다닌다면 틀림없이 경찰이 달려와 붙잡아 가지 않으랴 싶습니다. 영어로 ‘커밍아웃’이라는 일을 하든 스스로 ‘성 정체성 밝히기’를 하든 ‘남자가 남자 사랑하기’나 ‘여자가 여자 사랑하기’를 하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등을 돌리거나 손사래를 치거나 손가락질을 하리라 봅니다.

 우리한테는 꿈 같은 소리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는데, 삶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든 만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이든, 《방랑 소년》 두 주인공은 8권에서 굳게 다짐을 하고 저희들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자 합니다. 《푸른 꽃》에서는 8권까지 안 가고 바로 1권부터 주인공이 ‘나(여자)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이러한 마음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2) 사랑


.. “확실히 나무 쪽이 정취가 있지.” “후지가야(고등학교) 멋있던데요.” “그야말로 도서관이라는 느낌이랄까.” “아키라가 그 학교를 고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아, 아키라는 그때 있던 제 …….” “후지가야에는 ‘도서관의 그대’라는 게 있었는데.” “머, 멋있네요.” “물론 선생님은 장난으로 그렇게 부른 거였지만, 그걸 몰래 들은 학생이 있어서 소문이 났지. 그것뿐이야. …… 왜 울어?”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딱 붙지 마세요.” “그럼 심호흡해.” “하아아아.” ‘철제 책장에 둘러싸인 도서실이 나와 선배가 처음으로 키스한 곳.’ ..  (114∼116쪽)


 사랑은 어떻게 느끼는 마음일까요. 사랑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마음일까요. 사랑은 누구한테 느끼고 누구한테서 배울까요. 사랑은 어떻게 드러내거나 나타내면서 손길을 내밀까요.

 어버이 된 사람들은 아이들이 느끼며 맺으려고 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이 느끼며 맺으려고 하는 사랑이 철없어 보이는 짓이라 느끼기에 뜯어말려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예전에 다 겪은 어른들인 까닭에 아이들은 당신들처럼 잘못되거나 어수룩하거나 못난 길을 다시 안 밟기를 바라며 ‘한 번에 척 하고 멋진 사랑을 이루’라고 다그칠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누구나 맨 처음 붙잡는 사람하고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더없이 흔히 쓰는 말마디 ‘사랑’은, 흔하고 또 흔하고 다시금 흔하게 쓰더라도 조금도 닳거나 낡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욱 빛나고 고운 결로 살며시 내려앉으며 우리들 삶에 스며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설프게 외치는 사랑이든, 겉발림으로 들먹이는 사랑이든, 참다이 어루만지는 사랑이든, 기쁘게 나누는 사랑이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자 할 때에는 맑음과 밝음이 알맞게 어우러진다고 느낍니다.


.. “괜찮은데, 그 머리. 잘 어울려.” “선배.” “응?” “저, 선배랑 같이 등교하는 거 그만둘래요.” “뭐, 그래도 괜찮긴 한데. 아! 아키라 때문이구나! 아키라한테 혼났어?” “아키라는 그런 애 아니에요.” “정리하자면 아키라와 먼저 약속했는데 나랑 마주친 거구나.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래,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죄송해요.” “등교는 아키라한테 양보할게. 하교는 나를 위해 남겨 놔. 내일부터라도 좋으니까.” “선배.” “여자애는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  (126∼128쪽)


 만화책 《푸른 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고등학생 나이로 사랑을 느끼고 말하고 아파하며 기뻐합니다. 이 나라에서 고등학생이라면 중학생 때보다 한결 모질고 끔찍하게 대입 시험에 매달리며 세상하고는 담을 쌓을 뿐 아니라 옆에 앉은 동무를 쳐다보아서도 안 되는 듯 내몰리는 가녀린 아이들입니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 다음에 비로소 집인 아이들이나, 집에서 식구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동무들하고 속을 터놓는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습니다. 동아리에 들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동아리에 들어간들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모든 꿈이든 뜻이든 대학교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는 듯이 짜여 있는 이 나라입니다. 옌예인이 되고자 하여도 대학 졸업장이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이며, 농구를 하거나 야구를 하거나 축구를 하거나 할지라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농사를 짓는다든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룬다든지 버스나 택시를 몬다든지 빵을 굽는다든지 물고기 살을 가른다든지 떡을 찐다든지 할 때에도 대학 졸업장이 먼저입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출판사에 들어가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신문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대학 졸업장이 없을 수 없겠지요. 법관이 되거나 판사가 되고자 한다면 아주 마땅하게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일터에서 함께 지내면서 차근차근 배우고 몸과 머리 모두 다스리는 삶이란 아예 막혀 있습니다. 늘 졸업장을 먼저 내밀어야 합니다. 늘 사람이 아닌 서류를 봅니다. 늘 겉모습과 겉차림을 살핍니다. 늘 속마음이나 속뜻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만화책 《푸른 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건 3학년이건 스스로 꿈꾸고 바라는 길을 깊이 돌아봅니다. 연극부에 몸을 담든 도서관에서 책을 살피든,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스스로 생각하여 말을 꺼냅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이니까요. 스스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 전철역에 가고 전철을 타며 학교에 간 다음 스스로 귀를 기울여 수업을 듣는 삶이니까요. 스스로 찾아서 듣고 익히는 하루하루이니, 사랑을 느낄 때에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에 따라 느낍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이니, 사랑을 나누고자 할 때에도 스스로 바라는 마음결에 따라 움직입니다. 엄마한테 얘기하고 입맞춰야겠습니까. 아빠한테 말하고 손을 잡아야겠습니까.

 내 힘으로 붙잡습니다. 내 넋으로 곱씹습니다. 내 말로 나타냅니다. 내 몸으로 어루만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봅니다.

 사랑이란 바로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힘과 넋과 말과 몸과 눈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찾아왔구나’ 하고 느끼는 따스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란 다름아닌 나 스스로 깨달으면서 ‘이런 마음이 내 속에 있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넉넉함이 아니랴 싶습니다.
 







 (3) 한 사람이 되어 걷는 길


..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 내 사고방식이 너무 단순한 건가?’ …… “이쿠미, 있잖아.” “응.”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떡할 거야?” “저, 정말?” “만약의 이야기라니까.” “아! 그래서 코우 오빠랑 안 만나는구나.” “만ㆍ약ㆍ에! 그리고 코우 오빠 문제는 이거랑 별개의 문제고!” “아, 그래? 만약이란 말이지.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떡할래?” “응? 으응, 응원?” “고마워. 그럼 그게 최선이 아닐까?” “음.” ..  (144∼146쪽)


 만화책 《푸른 꽃》을 이루는 주인공 둘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둘은 어릴 적 단짝동무입니다. 서로 열 해 만에 만났는데, 단짝동무 하나가 다른 단짝동무한테 ‘여자 선배를 좋아한다’고 털어놓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단짝동무는 어떡해야 좋을까를 한참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풀이법을 찾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나란히 앉는 옆 동무한테 물어 봅니다. 스스로 풀이법을 찾지 못하기에 옆 동무한테 도움을 바랍니다. 옆 동무 또한 마땅한 풀이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풀이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이란 늘 뾰족하고 또렷한 풀이법이 있지는 않으니까요. 다가오는 대로 부딪히면서 딱지가 나고, 밀려오는 대로 부대끼면서 새살이 돋으니까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이든 우정이라는 이름이든 믿음이라는 이름이든, 늘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일만 생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일이 함께 생깁니다. 반가울 때에는 반가운 대로 받아들이고 슬플 때에는 슬픈 대로 받아들이면서 단단해집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대로 껴안고 괴로울 때에는 괴로운 대로 껴안으면서 부드러워집니다. 고마울 때에는 고마운 대로 함께하고 어려울 때에는 어려운 대로 함께하면서 아름다워집니다.


.. “아침에 날 바람 맞혔더라.” “아! 그게! 그건 그 …….” “나, 어떡해야 돼?” “……” “응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 “……” “음, 그냥 그대로?” “아! 그대로!” ..  (152∼153쪽)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대끼고 부딪히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아파하면서 자라고, 괴로워하면서 큽니다. 아파하면서 단맛과 함께 쓴맛이 있음을 느끼고, 단맛만 있지 않고 쓴맛이 있어서 좋은 사랑이요 삶이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쓴맛이 있어 단맛이 좋음을 느끼고, 단맛이 있어 쓴맛이 닥칠 줄을 내다봅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기까지 아이인 때를 거쳤고, 우리 또한 오늘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때와 곳에서 스스로 길을 찾느라 헤매고 떠돌고 갈팡질팡하면서 내 길을 붙잡았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속내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이인지 모릅니다. 우리보다 나이든 어른 또한 웃어른이라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이인지 모릅니다. 웃어른이라고 더 세상을 부대끼거나 겪으며 단맛 쓴맛을 고루 안다고 하기 힘듭니다. 아이라고 덜 세상을 부대꼈거나 겪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이이든 어른이든 똑같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부대끼거나 겪습니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사랑을 만나고 어루만집니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손을 내밀고 맞잡으며 쓰다듬습니다.


.. “후미, 아까부터 얼굴이 빨개.” “진짜? 그렇게 빨개?” “혹시 야한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냐!” “농담이야. 얼굴 빨간 건 진짜야.” …… 너무나도 작은 그 꽃은 너무나도 작아서 바로 곁에 있지만 알지 못하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그런 꽃 ..  (186∼187쪽)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운 삶이지만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운 삶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든, 서로를 달뜨게 하며 기쁘게 하는 마음결이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일 때일 테니까요.

 만화책 《푸른 꽃》은 내가 한 사람으로서 다른 한 사람한테서 아름답고 보드라운 넋을 느끼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삭트는 푸르고 풋풋한 고등학생 아이들 삶을 그려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과 어울림은 이 만화에서 드러나듯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고운 삶’으로 보여질 수 있고, 또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호미를 쥐고 밭뙈기를 일구는 땀방울에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고운 삶’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흘리는 땀방울에서 이 마음자락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헌책방 책시렁을 조용히 헤아리면서 내 손길이 새롭게 탈 좋은 책 하나 찾는 땀방울에서 이 마음밭이 샘솟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우리 둘레 어디에나 있으며, 사랑이란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이든 얕은 자리이든 노상 머물고 있는 가운데, 사랑이란 우리 터전과 자연과 뭇목숨 어느 한켠에 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러한 사랑을 느끼느냐요, 언제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랑한테 손을 내밀며 뜨거워지느냐입니다. (4343.2.1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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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의 소년 카르페디엠 21
제임스 램지 울만 지음, 김민석 옮김 / 양철북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37 ― 멋진 삶, 멋진 사람, 멋진 길
 : 제임스 램지 울만, 《시타델의 소년》



- 책이름 : 시타델의 소년
- 글 : 제임스 램지 울만
- 옮긴이 : 김민석
- 펴낸곳 : 양철북 (2009.10.29.)
- 책값 : 9500원



 (1) 세 사람이 함께 걷는 길


 한 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세 식구이지만, 저와 옆지기는 서로 살아온 길이 다릅니다. 그런데 살아온 길만 다르지 않고 생각하는 길도 다릅니다. 좋아하는 길도 다르며 바라보는 길도 다릅니다. 어느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만, 다 다르게 살아오고 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일이란 대단한 어깨동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미처 못 느꼈습니다. 저와 형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일도 놀라운 어깨동무였습니다. 저와 형 스스로도 놀라운 일일 테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도 놀라운 일입니다. 제아무리 어버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당신하고 다른 사람이요 삶이니까요.

 날마다 아이를 보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이 아이가 옆지기하고 살을 섞은 다음 태어난 목숨이요 우리가 키우는 아이이지만, 이 아이가 스스로 꾸리는 삶이나 이 아이가 바라보는 삶은 엄마 아빠하고 다릅니다. 엄마 된 옆지기나 아빠 된 제가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눈길 그대로 아이가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마음읽기를 할 때가 있으나, 마음읽기를 한달지라도 서로 같은 길을 걷는 삶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용하게 세 식구가 어우러지며 한 집안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더없이 재미나게 세 식구가 얼크러지며 한 살림을 꾸린다고 하겠습니다.

 아침에 옆지기가 빗자루를 들고는 집안을 청소하겠다고 외쳤습니다. 한 엿새쯤 서로 집 치우기를 못한 탓에 먼지가 꽤 쌓였고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힘들었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힘들어 여러 날 그냥 손 놓고 지냈습니다. 옆지기가 건넌방부터 슥슥 쓸기에,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을 안고 앞마당으로 나와서 탕탕 텁니다. 이불을 다 털고 나서는 걸레를 빨아 바닥을 훔칩니다. 쓸고 닦기를 마친 다음에는 국수를 끓여 아침 밥상을 차립니다. 밥을 안 먹고 땡깡 부리고 칭얼대기만 하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어 겨우 잠재웁니다. 애 아빠는 아침부터 여러모로 시달리고 바쁘기만 해서 아무 일손을 못 잡는다고 푸념합니다. 옆지기는 애 아빠 푸념을 듣고는 ‘내가 혼자 느긋하게 치우고 쓸고 닦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애 아빠가 걸레질을 하면 머리카락을 다 훔치지 않는다 합니다. 당신은 걸레를 새로 빨아 발로 슥슥 문지르면서 다시금 닦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라고 걸레질을 하며 새로 빨고 다시 닦기를 안 하겠습니까. 먼저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훔치려고 한 번 닦고, 한 번 빨아서 다시금 닦으며, 또 한 번 빨아 마무리 걸레질을 하곤 합니다. 서로서로 쓸고 닦기를 해 온 버릇이 다르니, 애 아빠는 애 아빠대로 옆지기 청소 매무새를 못마땅해 하고,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애 아빠 청소 매무새를 마땅찮아 합니다. 그러나, 이모저모 헤아리면서 애 아빠 마음대로 집안 치우기를 하기보다는 애 엄마 마음이 홀가분하도록 집안 치우기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이 다음에 함께 집안 치우기를 할 때에는 제 버릇을 조금씩 고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아이한테 일감 하나 맡길 수 있습니다. 아빠가 빨래를 할 때에 어느새 물소리를 듣고는 후다닥 달려와서 옆에서 빨래하는 시늉을 하며 물놀이를 하는데, 집안을 쓸고 닦을 때에도 아이가 쥘 만한 빗자루나 걸레를 따로 마련해 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애 아빠 된 사람은 ‘얼른 치우기를 마치고 아빠 일 좀 하자’는 생각으로 혼자 바빠맞습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집안을 치울 때 무엇을 생각할까요?

 엊저녁 밤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옆지기가 한 마디를 합니다. “바쁘면 당신 먼저 집으로 들어가요.” 따로 바쁘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잘 안 따라온다고 골 부리는 모양새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해야 하는 듯 보인 듯합니다. 틀림없이 밀린 일이 많아 집에 돌아가면 아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함께 마실을 나올 때에는 ‘숱한 일이 더 밀리면 식구들이 다 잠든 결에 조용히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고자 따로 여느 회사나 모임에 몸을 안 담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제 걸음 매무새는 ‘아주 바쁜 사람’으로만 보이겠구나 싶어, 걸음을 더 늦추고 옆지기 뒤로 처지며 밤골목 사진을 몇 장 찍습니다. 그런데 아빠를 앞질러 가던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아빠를 쳐다보며 “어! 어!” 하고 부릅니다. 아빠 왜 안 오느냐고 부르며 기다립니다. 아빠가 부르든 엄마가 부르든 저 보고픈 것 다 볼 때까지 꼼짝 않기 마련이고 저 가고픈 대로 가려고 발버둥이면서, 아빠가 저 뒤에서 뭔가 꾸물거린다고 부릅니다. 엄마 생각 다르고 아빠 생각 다르며 아이 생각 다릅니다.

 날마다 아이 사진을 서른∼마흔 장 남짓 찍고 있습니다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이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철든 나이가 될 때에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 개인생활을 건드렸다거나 아이 인격과 인권을 쑤석거렸다고 아빠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을는지요. 왜 멋대로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안 가리고 다 찍어 놓았느냐고 성을 내지는 않을는지요. 애 아빠 된 몸으로 아이를 사랑한답시고 아이 사진을 누리사랑방(블로그) 같은 데에 올려놓는다지만, 아이 눈높이와 아이 삶으로 돌아볼 때에 이렇게 하는 일은 아이한테 못할 짓이 될 수 있겠다고 깨닫습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바라지 않던 ‘제 모습 공개되기’가 사람들 앞에 떡하니 내보이는 셈이니까요.

 이제 고작 두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생각을 하는 일이 섣부른지 모릅니다. 앞으로 아이가 자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여길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은 하루하루 참으로 금세 지나갑니다. 몇 해 사이에 ‘엄마 아빠’라는 낱말 말고도 숱한 말을 재잘재잘 종알종알대는 어린이로 자라날 테고, 동무들하고 사귀며 뛰어논다며 어린이집에 보내 달라 할 터이며,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나날(또는 학교를 안 다니며 푸름이를 보내는 나날) 또한 화살과 같으리라 봅니다. 오늘이야 이 집에서 함께 뿌리내리며 살아간다지만, 앞으로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될 때에는 어엿하게 제금을 나며 따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이 삶자락을 하루에 서른∼마흔 장쯤 담아내는 사진찍기는 마땅히 못 할 뿐 아니라, 한 달에 한두 장 담아내는 사진찍기마저 힘들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 삶을 꾸리는 아빠이기에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하겠지만,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아빠한테만 좋자고 하는 일인지 아이와 함께 좋자고 하는 일인지 아이한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일인지 제대로 갈피를 잡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저대로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꿈을 품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이면서 아빠 자리에 서야 하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당신이 사랑하는 뜻을 붙잡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이면서 엄마 자리에 서야 할 테고,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찾으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 서야 하니까요.

 날마다 숱한 집일을 부대끼면서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면?’ 하고 생각할 겨를이 있을 턱이 없으나, 밤에 아이가 잠든 뒤에 옆지기가 때때로 묻곤 합니다. ‘우리한테 아이가 있지 않던 때가 생각나요?’ 하고.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고. 졸리고 고단하니 생각마저 귀찮습니다. 그러나 졸리고 고단해서라기보다 ‘아이가 없는 삶’을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아이가 없는 삶’이었다면 그러한 삶결대로 우리 두 사람이 새로운 길을 다투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보냈겠으나, 고운 빛살 하나를 살뜰히 어루만지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니, 옆지기는 옆지기 나름대로 어루만졌겠지요.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나 살도록 짜맞추어진 애 아빠는 목숨 하나가 이루어지는 흐름과 목숨 하나를 느끼는 넋하고 목숨 하나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눈길이 무엇인지를 늘그막까지 옳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2)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푸름이문학


 푸름이문학(청소년문학)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시타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깎아지른 묏부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산쟁이가 아직 없던 지난날, 이 묏부리 꼭대기에 이르고자 했다가 죽은 사람네 어린 아들이 ‘산에서 부르는 소리’가 아닌 ‘산이 산 그대로 곱게 서 있으면서 보여주는 모습’에 차츰 젖어들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는 삶을 보여주는 빼어난 문학작품입니다. 어린이한테든 푸름이한테든 저마다 가슴에 고이 껴안을 꿈이란 어떻게 다스리면 좋고, 이렇게 다스리는 꿈을 어떠한 결로 차근차근 이루어 가는가를 살뜰히 보여주는 문학작품입니다. 저는 이 책 《시타델의 소년》을 덮으며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작품 《숲속 나라》가 떠올랐습니다. 다루는 줄거리가 다르고 이야기 펼침새가 다르며 나타내려는 넋이 다른 두 작품이지만, 두 작품을 읽을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보여주는 매무새는 매한가지입니다. 바로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입니다.

 꿈이란,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앞으로 맞이할 새날을 비롯해 오늘 하루요 어제까지 보낸 나날입니다. 머나먼 앞날에 이루어진다는 꿈이지만 않습니다. 지나온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차츰 마무를 수 있는 꿈입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면서 비로소 이루어 내는 꿈입니다.

 사랑이란,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가장 아름다울 마음입니다. 착함도 너그러움도 다소곳함도 따스함도 넉넉함도 바지런함도 올바름도 모두 사랑에서 샘솟습니다.

 사람이란, 아이이든 어른이든 똑같은 목숨이요 아름다운 숨결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도 사람, 어른도 사람입니다. 여덟 살배기도 사람, 여든 살 할매도 사람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사람이고, 우리들이 날마다 차려서 먹는 밥상에 오르는 풀이나 곡식이나 고기 또한 ‘사람과 같은 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문학이란, 서로서로 어우러지는 목숨고리를 깨닫도록 이끕니다.

 꽃이란, 아이하고 어른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어깨동무란, 아이가 어른하고 같다는 소리, 곧 서로 평등하다는 소리입니다. 평등은 평화와 이어지고 평화는 통일하고 끈이 닿습니다. 통일은 민주하고 한동아리이고, 민주는 자유와 벗삼습니다.

 《시타델의 소년》이라는 작품은 시타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묏봉우리 하나를 바라보는 아이와 어른한테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는 어떻게 얽히고 설키면서 곱게 빛을 내는가 들려줍니다. 《숲속 나라》라는 작품은 아이들이 이루어 가는 ‘숲속 나라’와 이 숲속 나라를 망가뜨리려는 어른들을 견주어 보여주면서 허물과 스스럼이 없이 이룰 참답고 아름다운 꿈과 사랑과 사람과 꽃과 어깨동무는 어느 나라에서 어떠한 땀방울로 일굴 수 있는지 들려줍니다.

 멋진 삶이란 누가 언제 어떻게 꾸리는지를 보여줍니다. 멋진 사람이란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알려줍니다. 멋진 길은 어느 곳에 어떻게 마련되어 있는가를 밝히고 일러 줍니다.


 (3) 하나하나 곱새기며 읽기


 푸름이문학 《시타델의 소년》은 묏부리를 온몸으로 껴안는 산쟁이들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감은 묏부리와 산쟁이입니다. 그러나 묏부리와 산쟁이를 빌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가를 차근차근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훌륭한 문학에서도 비슷할 텐데, 이야기감을 무엇으로 삼느냐는 그리 눈여겨볼 대목이 아니고, 이야기틀을 어떻게 다루느냐 또한 그다지 살펴볼 대목이 아닙니다. 판타지여야 더 훌륭하다거나 생활문학이라야 더 알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대목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이고, 찬찬히 되새길 대목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좋은 문학이라면 바로 이 두 가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와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짚어내는 매무새가 알차면서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시타델의 소년》을 읽으며 가슴 깊이 뭉클하다고 느낀 글월을 한 줄 두 줄 되읽어 봅니다. (4343.2.13.흙.ㅎㄲㅅㄱ)


[12, 113쪽] 루디는 골짜기를 따라 솟구친 웅장한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광경을 호텔 주방의 창문으로 보았다 … 루디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고, 삼가 분 뒤에는 시냇물을 가로질러 맞은편 길을 따라 걸어갔다. 루디는 조명이 필요없었다. 별빛으로 충분했다. 풀밭의 거무스름한 비탈 사이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보였다.

[15, 35, 90, 97쪽]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을 정복했다 … “외삼촌은 아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럼. 프란츠 러너 씨는 네 아빠를 기억하지. 모두들 네 아빠를 기억해. 사람들은 네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한편으론 네 아빠가 미쳤다고 생각해.” 캡틴 윈터는 소리를 낮춰 웃었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들 생각이 맞을지도 몰라.” … “하지만……, 그걸 메면 균형을 잃을 텐데요.” “그렇겠지. 이걸 메면 균형을 잃겠지. 실제 산행이라면 어떤 게 나을까? 균형을 조금 잃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면 춥거나 배가 고파 죽는 게 낫겠어?” … “이제 알겠니?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지? 네 아빠는 산이 너무 가팔라서 죽은 게 아니야. 네 아빠는 정복욕이나 명예욕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어. 네 아빠는 그 능선에서 산으로 오르내릴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어. 하지만 자기를 고용한 에드워드 경을 버려 두고 갈 수 없었던 거야. 네 아빠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 거야. 시타델 산의 정상에 나부껴야 할 네 아빠의 빨간 셔츠가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아니? 에드워드 스티븐슨 경한테서야. 네 아빠는 얼어죽어 가면서 셔츠를 벗어 스티븐슨 경의 몸을 덥혔지.”

[19∼20, 101쪽] 루디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루디는 빙하로 올라가서 살펴보고 연구하고 측정하는 일을 계속했다. 루디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교회 예배를 빼먹기도 했다. 지금은 호텔 주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루디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엄마는 눈물로 호소했고, 외삼촌 프란츠는 모진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디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루디는 언제 두려움을 떨쳤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건 테오 아저씨가 암벽 아래에 매달린 채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칠 때였다. 그리고 테오 아저씨가 불평 한 마디 없이 자기 생명을 루디한테 맡겼을 때였다.

[37, 63, 219쪽] “젊을 때는 꿈을 꿔야 해.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 꿈을 잊지 말아야 하지.” … 테오 아저씨가 루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 이 개구쟁이야! 네 아빠의 아들답게 산을 타지 못한다면 힘들게 돌아올 필요도 없어.” … “한 가지 더. 문제에 부딪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네 자신에게 물어 봐.”

[171쪽] 루디는 베낭을 둘러멘 뒤 등반을 시작했다. 루디는 혼자서 광대한 침묵을 뚫고 등반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제 루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진짜 아빠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다 … 루디는 감정이 복받쳤다.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미친 듯이 기뻐하지도, 요들을 부르지도, 승리에 들떠 고함을 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더 낮은 산을 정복하고 기뻐 날뛰던 때와는 달랐다. 그러기에는 너무 깊고 강력한 감정이었다. 루디가 마침내 도착한 높고 신비스러운 장소에서 고함을 지르는 건 불경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311쪽] “올라가. 목표를 향해. 승리를 향해. 쿠르탈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네 이름을 부를 거야. 스위스가 네게 축하의 인사를 건넬 거야. 영웅이 되는 거야. 시타델 산을 정복한 영웅 말이야. 네 아빠가 못 이룬 꿈을 이루는 거야.” 아빠가 못 이룬 꿈을 이룬다. 루디가 눈길을 떨구었다. 시타델 산의 정상은 사라졌다. 꿈도 사라졌다. 무감각한 꿈의 세계가 서서히 걷히며 현실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의 세계는 산에서 바라보는 하늘만큼이나 깊고, 차갑고, 깨끗했다. 루디는 고개를 돌려 삭소를 쳐다본 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팔걸이 붕대를 만들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함께 내려가는 거예요.” 루디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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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어느 지하생활자의 행복한 책일기 1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헌책방은 삶이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1]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1) 헌책방은 어떤 곳인가


 책은 책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자연은 자연입니다. 책을 놓고 책이라 이름을 붙인다고 이름이 더 높아지거나 더 낮아지지 않습니다. 사람한테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이라 한다고 이름이 더 높아지지 않으며 ‘사람’이라 한다고 이름이 더 낮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귀에 익숙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이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지식으로 괜찮다고 여기면서 반가이 맞이하는 이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보기에 따라 겉느낌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밑바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밑바탕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밑틀이 흔들리거나 밑돌이 뽑히지 않습니다.

 ‘헌책’이라는 낱말이 꽃등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예부터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모습을 헤아린다면 퍽 역사가 깃든 낱말입니다. 이와 달리 새로 나온 책을 가리키는 ‘새책’은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합니다. ‘헌책’이 있으면 마땅히 ‘새책’이 있어야 하고, 새로 나오는 책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어야 ‘신간 소개’이니 ‘북리뷰’이니 하는 자리에 알맞게 쓸 텐데, 2010년을 맞이한 오늘날에도 ‘새책’은 한 낱말이 못 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한 낱말이 ‘새책’ 하나뿐이겠습니까만, 사람들은 국어사전에 안 오르면 어쩐지 꺼려 합니다. 사람들은 국어사전에 오른 낱말이면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이를테면, ‘파티’나 ‘프라이’는 국어사전에 실려 있습니다. 이 낱말은 국어사전을 엮은 분들 스스로 ‘국어순화 대상’이라고 일컫는 낱말인데 국어사전 올림말로 다루고 맙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생일잔치’라 하면 시골스럽고 ‘생일파티’라 해야 멋스럽다고 여깁니다. ‘달걀부침’이나 ‘달걀지짐’은 먹지 못할 밥거리라 여기고, ‘계란프라이’나 ‘에그후라이’쯤 되어야 군침이 돈다고 느낍니다.


.. 그래, 진짜 책들은 헌책방에 있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거기에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의 책장에서 이사할 때 버려지고, 유학 갈 때 정리돼 고물상이나 쓰레기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을 들추고 파내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책을 깨끗이 닦고 다듬어 다시 서가에 넣어 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그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모험을 거친, 거기서 살아남은 강인한 책들이다 … 헌책방에는 책과 사람이 함께 머물면서 동시에 같은 꿈을 꾸어야 한다고 믿었다. 책방에 책만 있어도 안 되고, 반대로 사람만 있어도 안 된다 ..  (30∼31, 33쪽)


 열 해쯤 앞서 중국 연변에 갔을 때에 중국사람이 연 ‘헌책방’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 중국 헌책방이 아직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중국사람이 중국 조선족 책손을 맞이하려고 붙인 한글 이름은 ‘낡은서적전매’였습니다. 이분이 ‘낡은서적전매’를 연 날 우연하게 이곳을 찾아갔더니 우리를 보고는 ‘낡은책방’이라고 붙인 이름이 맞느냐고 묻더군요. 중국과 북녘에서는 ‘낡은책’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남녘에서는 ‘헌책’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척 많지만, 남녘에서는 ‘거위’가 날짐승이지만, 북녘과 연변에서는 ‘게사니’가 날짐승입니다. 북녘과 연변에서 ‘거위’라는 낱말은 ‘회충(蛔蟲)’이라고 하는 기생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남녘사람이 “거위를 길러서 고기로 먹기도 한다”고 말하면 소름이 돋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북녘사람한테는 “기생충을 길러서 먹는다”는 소리가 되니까요.

 북녘과 연변에서 ‘낡은책’이라고 이름 붙인 모습을 놓고 남녘사람은 소름이 돋거나 끔찍하다고 여길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남녘땅에서 ‘낡다’라는 낱말은 몹시 나쁜 뜻과 느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낡은 집’이나 ‘낡은 건물’이나 ‘낡은 생각’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북녘이나 연변에서는 ‘헌’이라는 낱말이 남녘사람한테 ‘낡은’과 매한가지입니다. 북녘과 연변에서는 ‘낡은 건물’이라고 하면 좋고 나쁨을 떠나 “그냥 햇수를 조금 묵은 건물”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북녘과 연변에서 ‘낡은책’이든 남녘에서 ‘헌책’이든 “햇수를 조금 더 먹은 책이거나 사람 손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조금 닳은 책”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름 하나를 놓고 너무도 말이 많습니다. 이름 하나 때문에 너무도 얽매입니다. 더 좋다고 하는 이름을 찾으려고 하는 매무새를 나쁘다 할 수 없지만, 이름찾기에 얽매이면서 정작 우리가 마음을 쏟아야 할 곳에 들일 품과 땀과 시간을 길에 흘리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 이름이 돌쇠이든 먹쇠이든 마당쇠이든, 나는 나대로 내 길을 튼튼하고 씩씩하고 즐겁게 걸어가면 됩니다. 내 이름을 빛내려고 꾸리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빛내려고 하루하루 즐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헌책방’과 ‘헌책’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거나 창피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이든 한동안 대학생이던 때이든 출판사 영업직원이었든 편집직원이었든 늘 “저녁에 헌책방에 책 보러 가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빠지고 책을 보러 가고자 하는 마음에 담임 교사한테도 “저는 헌책방에 가야 하기 때문에 보충수업을 안 받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에나 이때에나 고등학교 교사들치고 헌책방으로뿐 아니라 새책방으로도 책 보러 다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만, 여느 새책방도 아닌, 또 도서관도 아닌 헌책방으로 책을 보러 간다고 하니 담임이며 둘레에 있던 다른 교사들이며 킬킬거립디다. 그러나 헌책방에 찾아가 헌책을 읽겠다고 하는 일은 창피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요 더없이 알찬 책읽기입니다.


.. 어릴 때는 책이 그냥 옆에 있으면 좋았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책에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책도 나한테 무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와 책은 친구였다 … 책은 보고, 읽고, 느끼는 것이다 … 책은 숨쉬는 생명이고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다. 책은 사람 아래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 이오덕 님 말씀대로 글이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당연한 기본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를 부여하고 함께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그런 삶과 생각이 어렵다는 말이 된다 ..  (32, 34, 53, 69쪽)


 우리는 겉읽기 아닌 속읽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책상맡에 반듯하게 앉아서 읽는 분이 있는 한편, 신문지를 책 위에 얹고 라면냄비를 올린 다음 후루룩 짭짭 하면서 보는 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 똑같은 책읽기입니다. 반듯한 매무새로 책을 마주한다고 하여 더 속깊이 읽거나 ‘줄거리에 깃든 넋’을 샅샅이 헤아린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누워서 읽더라도 얼마든지 속읽기를 합니다. 지옥철에서 책읽기를 하든 발 디딜 틈 없는 버스에서 책읽기를 하든 누구나 속읽기를 합니다. 한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며 젖을 물리는 엄마들이 다른 한손으로 책읽기를 하면서도 속읽기를 합니다.

 책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은 속내를 살필 노릇이고, 책에 담은 속내가 어떻게 태어나 이렇게 종이뭉치에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담긴 예술품이 되었는지를 받아들일 노릇입니다. 글쓴이 이름값에 따라 골라 읽는 책이겠습니까? 이렇게 책을 찾아서 읽는 사람도 있을 터이나, 우리가 깊이 살필 대목은 ‘글쓴이가 누구냐?’하고 ‘펴낸곳이 어디냐?’가 아닙니다. ‘책 갈래가 무엇이냐?’ 또한 아닙니다.

 처세책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삶읽기를 하는 책읽기가 됩니다. 소설책이든 어린이책이든 인문책이든 예술책이든 과학책이든, 우리 스스로 우리 넋을 바쳐서 받아들이는 만큼 내 마음밭으로 스며드는 책읽기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을 사서 읽는다고 책읽기가 엉터리가 될 리 있겠습니까. 새책방에서 새책을 사서 읽는다고 책읽기가 훌륭하게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백만 권을 읽었어도 세상을 잘못 읽는 사람이 있고, 만 권을 읽었어도 어줍잖은 말마디만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작 열 권을 읽고 백 권을 읽었음에도 아름다운 생각밭을 고이 일구면서 이웃사랑을 듬뿍 나누는 멋쟁이가 있습니다.


.. 책방을 만들기로 생각한 순간부터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남들에게 권할 만한 책을 팔자’가 그것이다 … 어쨌든 어린이용 책들은 꼭 필요하고 좋은 책이지만, 이런 이유로 이상북에서는 팔지 않는 책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이용 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백지 상태다. 하얀 바탕 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특히 청소년과 꿈을 잃지 않은 어른들이 많이 와서 ‘이상한’ 일을 많이 하면 좋겠다 ..  (42, 45, 83쪽)


 헌책방이란 모름지기 열린 곳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으레 ‘퀴퀴하’거나 ‘낡은’ 곳처럼 보이니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낱말조차 부끄러워 한달지 못마땅해 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름과 얼굴과 겉모습이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책 하나를 만나 좋은 앎을 얻고 좋은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면, 남들이 무어라 떠들든 말든 내 옳고 바르며 기쁘고 신나는 좋은 길을 당차게 걸어갑니다. 우리가 훌륭한 책 하나를 장만하여 훌륭한 얼을 깨닫고 훌륭한 몸가짐을 다스릴 수 있으면, 세상 흐름이 어떻게 휘감고 있든 내 슬기를 빛내는 보람차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길을 오순도순 걸어갑니다.

 조세희 문학을 새책으로 읽어도 좋고 헌책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곧 노래하는 삶 마흔 돌을 맞이하는 양희은 님이 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헌책방 아니면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도서관 가운데 이 책을 갖춘 곳은 몇 군데나 될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까요? 노래 삶 마흔 해를 빛낼 양희은 님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음대 교수’나 ‘음대 학생’이 논문을 쓰고자 할 때에, 양희은 님 자료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시디로 듣는 노래와 테이프로 듣는 노래와 레코드판으로 듣는 노래가 다르다고 하는데, 양희은 님 노래 테이프와 레코드판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 곳만은 지키자》 두 권을 펴낸 지 열두 해가 지난 다음 다시금 찾아가서 느낀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러면 열두 해 앞서 처음 나왔던 《이 곳만은 지키자》라는 책을 찾아보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츠보이 사카에 문학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1997년에 정식번역으로 나온 판이 끊어졌을 뿐 아니라 2004년에 나온 판도 사라졌고, 1986년에 나온 어린이책도 새책으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1961년에 우리 말로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번역 문학과 번역 문화를 살피며 논문이나 책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츠보이 사카에 문학을 살펴보자고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학문을 하든 뭐를 하든 ‘책’과 얽힌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누구나 반드시 ‘헌책방에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 가지 않고서는 우리 스스로 바라는 자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947년에 처음 찍은 《조선말 큰 사전》 1권과 2권을 도서관에서 구경할 수 있을까요? 1957년에 여섯 권으로 마무리된 《큰 사전》은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1950년대 국어사전과 1960년대 국어사전뿐 아니라 1940년대와 1930년대 국어사전을 어디에서 찾아볼까요? ‘문세영 국어사전’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헌책방에 가야 합니다. 새책방을 꾸준히 찾아가면서 헌책방을 바지런히 찾아가야 책이 있습니다. 헌책방이 아니고는 이 나라에서 학문을 할 길이 없고 책을 만날 길이 빠듯합니다.

 그렇지만, 헌책방에 찾아간다고 해서 ‘내가 헌책방에 찾아간 그날’ 바로바로 내가 바라는 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지런히 찾아가고 꾸준하게 찾아가며 찬찬히 둘러보고 샅샅이 헤아리는 눈썰미를 키워야 합니다. 돈으로 긁어모으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책이어야 합니다. 지식으로 쌓는 책이 아니라 삶과 슬기로 보듬는 책이어야 합니다.


.. 청소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가장 필요한 과목이 무엇일까?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아니다. 청소년은 물론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수학도 영어도 아니다. 수능 점수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토익, 토플 점수가 이것만큼 결정적이지도 않다. 바로 평화다 ..  (110쪽)


 헌책방이라는 곳은 책 문화에서 한 자리를 다부지게 차지해야 합니다. 대학교 문헌정보학과에서는 헌책방을 옳고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헌책방을 찾아가는 매무새를 함께 가르치고, 틈틈이 헌책방을 찾아가는 버릇을 길러 주는 한편, 전국 헌책방 지도를 마련해야겠지요. 이런 일은 저 같은 쥐데기 하나가 할 일이 아니요, 이 나라 문헌정보학과 교수와 학생이 할 몫입니다. 이 나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할 몫이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소매를 걷고 할 몫이고, 국립중앙도서관이 나라돈을 들여 할 몫입니다.

 정작 참다운 일을 할 사람이 일을 안 하고 있으니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업신여기거나 깔보고 맙니다. 우리 스스로 책길을 튼튼하게 마련하면서 즐겁게 걷지 않으니 ‘헌책’을 자꾸자꾸 ‘古書’라 가리키거나 ‘old book’이라고 일컫는 어줍잖은 일이 생깁니다. 좀더 오래되면서 값어치있는 책일 때에는 ‘옛책’이라 하면 되지만, ‘헌책-옛책’ 얼거리를 옳게 깨달으며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책쟁이가 그지없이 드뭅니다. 아무래도 우리들 스스로 책을 책 그대로 껴안는 몸짓이 못 되기 때문에 새책방은 새책방대로 할인률과 마일리지 다툼을 벌이며 책값을 뻥튀기하거나 후려치기를 멋대로 하고 있으며,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또 이대로 우리네 책마을에서 ‘새책방-도서관-헌책방’으로 이어지는 세모꼴 이음고리를 옹글게 엮어내는 데에는 등돌리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바로잡아야 할 이야기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줄여서 이상북)’을 꾸리고 있는 윤성근 님이 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흔히 ‘이상북’이라 한다는데 책방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북’이 아닌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입니다.

 동네 한켠에서 사람들한테 책이란 무엇이고 책을 마주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누면서 한 해 두 해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야기를 책 하나에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헌책과 헌책방을 다루는 슬기로운 책을 만나기 어려운 터에(저 스스로 쓰기도 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아직 어줍잖다고 느낍니다), 헌책과 헌책방을 잘못 알거나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대목이 곳곳에 있어서 놀랍니다. 자칫 사람들한테 헌책과 헌책방을 잘못 이야기하거나 엉뚱하게 알도록 이끌지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나하나 들면서 바로잡아야 할 대목을 바로잡아 봅니다.


ㄱ. 이런저런 종류 책을 다 팔고 싶었다면 헌책방이 아니라 애초에 새책 파는 서점을 했을 거다. (47쪽)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책방이란 “이런저런 종류 책을 다 파는 곳”이 아닙니다. 책방이라고 해서 모든 책을 다 다루지 않습니다. 첫째, 크기가 작든 크든 어느 책방이든 저마다 제 깜냥에 맞게 “다룰 수 있는 갈래 책만 다룹”니다.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아무 책이나 마구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헌책방 또한 온갖 책을 골고루 다룹니다. 오히려 새책방보다 더 넓은 갈래와 깊은 갈래 책을 샅샅이 다루기까지 합니다. 윤성근 님이 꾸리는 책방 이야기를 하는 자리입니다만, 당신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자칫 책방 성격과 갈래를 얄궂게 바라보지 않도록 다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ㄴ. 책, 특히 헌책이라고 하면 말에서 풍기는 느낌부터 싸구려다. ‘헌책’이라니! 요즘에는 남이 입던 옷을 파는 가게도 생겨났다. 그러면 남이 입던 옷을 부를 때 ‘헌옷’이라고 부를까? 아니다. ‘구제’라는 말, 혹은 ‘빈티지’라는 멋진 단어를 쓴다. 그런데 책은 ‘헌’책이라고 부른다. 나는 헌책이라는 말보다 ‘중고 도서’, 아니 그것도 너무 초라하다. 그냥 똑같이 ‘책’이라고 불렸으면 한다. (51쪽)


 앞서 죽 이야기했습니다만, ‘헌책’이라는 낱말이 왜 싸구려일까요? 왜 ‘헌책방’이 초라해야 할까요? 스스로 헌책방을 꾸린다는 분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군말 없이 그냥 ‘책방’이라고 해야 한다면, 윤성근 님이 연 책쉼터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아닌 ‘이상한 나라의 책방’이어야 합니다. 윤성근 님은 여러 매체와 만난 자리나 당신 개인 누리집에서 “나는 헌책방을 하는 사람이다” 하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퍽 자주 ‘헌책과 헌책방이라는 낱말은 싸구려요 초라하다’고 적고 있으니 여러모로 모순이 되기까지 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윤성근 님은 당신 책방 이름부터 ‘이상한 나라의 책방’으로 하루빨리 고쳐야 할 줄 압니다.


ㄷ. 나는 그 헌책 전문가 얼굴을 잘 알고 있다 … 나와 그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 가장 유감이었던 건 그 사람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도 아니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물론 다른 전통적인 헌책방하고는 겉모습이 좀 다르지만 세무서에 헌책방으로 신고를 했고 실제로 중고 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곳이다. 〈숨어있는 책〉이나 〈아벨서점〉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건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오래된 서가에 책이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청소년 문화 행사를 열고 가끔은 노래하고 연주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헌책방이 맞다. (139∼140쪽)


 이 글에서 윤성근 님은 스스로 ‘헌책방’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싸구려요 초라하다고 여기는 ‘헌책방’을 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오래된 서가에 책이 켜켜이 쌓여” 있어야 헌책방일는지요?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헌책방이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책은 헌책이다》와 《헌책방에서 보낸 1년》과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책뿐 아니라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글에서도 ‘먼지 묵은 책이 켜켜이 쌓인 곳’을 헌책방이라고 못박는 말은 잘못이라고 수없이 되풀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숨어있는 책〉은 2010년으로 해서 고작 열한 해를 맞이하는 곳입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곳이 아닙니다.


ㄹ. 불과 십 몇 년 전만 해도 헌책방 주인도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책을 찾으려면 손님이 직접 책방에 비집고 들어가서 책먼지 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214쪽)


 헌책방 일꾼을 섣불리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헌책방 일꾼뿐 아니라 새책방 일꾼도 당신들 책방에 어느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교보문고 일꾼이라고 다 아는지요? 새책방 일꾼은 셈틀로 찾아본 다음 책꽂이로 달려가지, 책이름을 듣고 곧바로 어디에 있다고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히려 헌책방 일꾼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책이 이리저리 쌓이다 보면 잊을 수 있고, 헌책방을 찾아오는 책손들이 책을 보고 나서 아무 데나 쌓거나 꽂아 버리면 헌책방 일꾼은 ‘당신이 어디에 꽂았는지 알고 있던’ 책을 모르고 맙니다. 으레 이런 일이 벌어져서 헌책방 일꾼이 ‘책을 못 찾는’ 일이 생깁니다. 웬만한 헌책방마다 ‘보신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쪽지를 붙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들부터 내 집에서 내 책을 못 찾아서 같은 책을 다시 사는 일이 생기기까지 합니다. “책먼지 속을 헤매고 다녀야” 같은 말은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 헌책방 모습을 엉터리로 나타내는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먼지구덩이 헌책방’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거의 없습니다.


ㅁ. 인터넷 헌책방은 많지 않다. 중고 책을 다루는 특성 때문에 전산 입력이 쉽지 않다 … 그런데도 몇몇 헌책방들은 몇 해 전부터 인터넷으로 책을 팔고 있다. 하지만 대형서점들이 헌책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알라딘’에서 시작한 전문 헌책 거래 시스템은 빠른 속도로 다른 서점에 영향을 줬다. 깔끔하고 정확한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헌책 거래에 신뢰를 주었고,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73쪽)


 인터넷 헌책방이 많지 않다니요? 제가 2006년에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써내면서 전국 헌책방 통계를 죽 그러모았을 때에도 쉰일곱 군데쯤 되었고, 2010년에는 백 군데가 훨씬 넘습니다. 어쩌면 인터넷 헌책방은 여느 ‘새책방 숫자’보다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라딘이나 인터파크가 헌책 팔기에 ‘끼어들었’지만, 예전부터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헌책방은 꾸준히 잘하고 있습니다. 1998년부터 우리 나라에 생겨난 인터넷 헌책방들은 ‘헌책을 다루는 헌책방 특성’을 당신들 나름대로 알맞게 잘 키워 놓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느 인터넷 헌책방은 깔끔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는 듯한 느낌을 풍기니 기막힙니다. 여느 인터넷 헌책방들은 지난 열 몇 해에 걸쳐 꾸준하게 ‘누리집 고치기’와 ‘검색기 손질하기’를 해 왔고, 이제는 어느 곳이나 아주 훌륭한 얼거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ㅂ. 최종규 씨 같은 분이 책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열심히 배다리 헌책방 거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경기 침체 탓인지 안 그래도 어려운 헌책방 살림이 더욱 초라해지고 있다. (273쪽)


 저는 “배다리 헌책방거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헌책방 문화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서 나누는 사람입니다. 엉뚱한 감투를 씌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천 배다리 골목동네’에 살림집이 있고, ‘사진책 도서관’을 동네도서관으로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제 고향동네가 인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헌책방을 “더욱 초라하”게 다루는 모습이 슬픕니다.


 (3) 헌책방은 삶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쓴 윤성근 님은 저를 놓고 ‘헌책방 전문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저한테 ‘헌책방 전도사’라고 하고 ‘헌책방 매니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까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엉뚱한 이름을 붙이는가 싶은데, 저는 저 스스로 저를 말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듣지 않고 어디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듣고 엉뚱한 말을 붙이니 알쏭달쏭합니다. 저는 늘 ‘헌책방 즐김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헌책방 이야기꾼’이 됩니다.

 왜 헌책방을 즐기고 왜 헌책방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헌책방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진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책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말은 삶이다” 하고도 말합니다. 모두모두 우리 삶입니다. 빵굽기를 하는 분들한테는 “빵은 삶이다”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늘 손빨래를 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빨래는 삶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삶이다”라 외칠 분이 있고, “노래는 삶이다”라 외칠 분이 있겠지요. “자전거는 삶이다”가 되기도 합니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은 삶”입니다.

 초라해 보여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구지레하다고 여겨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책이 쌓여 있어도 헌책방은 삶입니다. 언제나 책삶이요 노상 책방삶이며 한결같이 헌책방삶입니다.

 앞에서 다룬 이야기를 한 번 더 되풀이하자면, 책을 다 읽는 사람 또한 제 집 책꽂이에서 제가 읽은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못 찾아내곤 합니다. 다시 사는 일이 흔합니다. 더욱이, 헌책방 일꾼은 “무슨 책 있어요?” 하는 말을 몹시 안 좋아합니다. 헌책방은 ‘책 자판기’가 아니라 ‘스스로 책을 살피고 찾아내어 손수 읽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헌책방 일꾼 가운데에는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물어 보는 책손한테 ‘이 책손이 찾는 책이 버젓이 있어’도 모르는 척 “그런 책 없어요!” 하고 쌀쌀맞게 대꾸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헌책방 일꾼은 책을 아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책을 싸구려로 함부로 다루려 하면 책을 안 팝니다. 형편없는 책손 앞에서 책을 찢어 버리는 헌책방 일꾼이 있고, 어이없는 책손은 큰소리치며 내쫓는 헌책방 일꾼이 있습니다. 아무리 웃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책을 보는 몸가짐이 모자란 사람한테는 책을 안 파는 헌책방 일꾼이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책이 우리네 책 문화를 조곤조곤 다루면서 우리들한테 책사랑을 널리 나누려 하는 뜻을 담고 있다면, 부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를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더 고개를 숙이며 한결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헌책이나 헌책방을 구태여 더 높은 데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습니다. 밑바닥에 짜부가 되어 깔려 있더라도 헌책방은 헌책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헌책을 얕잡아보더라도 헌책은 헌책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책 문화는 더 굴러떨어지며 사람들은 책을 더 안 읽고 말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고, 헌책을 헌책 그대로 껴안으며, 헌책방은 헌책방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틀림없이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입니다. 이런 이상한 나라에서 책을 다루는 사람은 바보라 합니다. 헌책을 다루는 사람은 더 못난 바보라 합니다. 그런데 참 바보는 누구일까요? (4343.2.12.쇠.ㅎㄲㅅㄱ)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 펴냄,2009)
 ├ 글 : 윤성근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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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랑한 사진 - 마이 러브 아트 3
김석원 지음 / 아트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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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사랑하는 사진 이야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3] 김석원, 《영화가 사랑한 사진》



- 책이름 : 영화가 사랑한 사진
- 글 : 김석원
- 펴낸곳 : 아트북스 (2005.11.5.)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이야기하기


 뭇 사진쟁이들이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면서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가를 읽어내는 삶이 바로 ‘사진책 읽기’ 또는 ‘사진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읽기라면 책 하나에 담은 줄거리만을 헤아리는 일이 아니라, 책 하나를 써낸 사람과 엮은 사람 들이 당신들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당신들 삶을 어떻게 담아냈느냐를 읽어내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림읽기에서도 매한가지이고 노래읽기와 영화읽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줄거리나 소재나 주제를 헤아리거나 알아차리기도 해야겠지만, 이에 앞서 예술쟁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면서 껴안았는가를 먼저 가슴으로 느끼야지 싶습니다. 가슴으로 느끼자고 하는 사진이요 책이요 노래요 영화이지, 머리속에 지식쌓기를 하자는 사진이거나 책이거나 노래이거나 영화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사진읽기를 다룬 글을 읽다 보면, ‘사진쟁이 한 사람이 이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 앞에 내보이기까지 얼마나 웃고 울며 기쁘고 슬펐는가’를 느끼는 가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날선 이론과 딱딱한 논리로 비평과 평론을 할 뿐입니다. 따순 손길과 넉넉한 눈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어느 갈래보다 사진읽기가 메말랐다고 느끼는데, 곰곰이 헤아려 보면 책읽기를 다룬 글이나 노래읽기를 다룬 글이나 영화읽기를 다룬 글에서도 이런 딱딱함과 메마름은 엇비슷합니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아닌 학문을 쌓고 이름값을 올리는 비평과 평론이 되기 때문인가 싶으나, 다름아닌 문화요 예술을 함께하자는 사진이거나 책이거나 노래이거나 영화임을 떠올린다면 퍽 슬픕니다.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오고 아무아무 스승한테서 배웠으며 나라밖 어디를 다녔고 하는 발자취로는 사진쟁이 삶을 읽을 수 없습니다. 소재가 어떻고 주제는 무엇을 다루려 했다는 지식조각으로는 사진쟁이 마음을 껴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눈앞에 마주한 사진 한 장으로 사진읽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손에 쥐어든 사진책을 차근차근 넘기면서 사진읽기를 해야 합니다.


.. 사진은 결코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진이란 도구를 통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될 수도 있다 ..  (6쪽)


 어제 서울마실을 하면서 사진잡지를 내는 포토넷 출판사에 살짝 들렀습니다. 이곳 일꾼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포토넷 출판사 최재균 대표하고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고, 최재균 대표 옆지기가 엊그제까지 했던 사진잔치 소식을 여쭈었습니다. 최재균 대표 옆지기 최정혜 님은 2010년 1월 27일부터 2월 9일까지 〈최정혜 with ye-ahn〉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신이 낳아 키우는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을 사진 서른 점으로 추려서 보여주었는데, 집에서 아이 키우는 아빠 된 몸으로서 이 사진잔치를 꼭 보고 싶었으나 갖은 집일에 얽혀 사진잔치 나들이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사진잔치 안내종이를 한 장 얻어서 읽습니다. 사진잔치 안내종이에는 ㅂ대학교 사진과 ㅈ교수님 글이 실려 있습니다. ㅈ교수님은 “그녀가 보여주는 대상과 상황에 우리는 초대되어 조밀한 감정을 고르게 펴면서 그 <사/아/이>를 배회할 기회를 얻는다. 침실의 벽과 거실에 놓인 탁자, 그리고 정원으로 향하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장난감의 순서, 그리고 자고 일어난 침대의 여전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낱낱한 시선의 증명은 곧 작가의 배회가 이룬 것이다. 그녀의 배회와 우리의 배회가 공유되면서 비로소 초대의 의미가 완성될 터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진잔치 안내종이에 잔글씨로 찍힌 글을 읽으며 숨이 턱턱 막힙니다. 사진을 보라는 소리인지 사진읽기를 즐기라는 소리인지 알쏭달쏭하면서 가슴이 꽉꽉 눌립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 손길과 눈길이 고루 스며든 사진 한 장 앞에서 이런저런 말잔치를 늘어놓아야 비로소 ‘사진비평’이거나 ‘사진평론’이 될는지요? 사진 한 장은 이런 사진비평이나 사진평론이 붙어야 바야흐로 ‘사진작품’이라는 딱지가 붙을는지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를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영화 시디를 종이접기를 하는 어린 벗한테 빌려주었습니다. 영화 시디를 돌려받으면 틈틈이 이 영화를 다시 볼 테지요. 여러 차례 본 영화임에도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고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시디를 셈틀에 넣고 다시 돌릴 때마다 예전에 보았던 모습이 더 짙은 느낌으로 가슴으로 스며들고, 예전에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을 새록새록 곰삭입니다. 문화예술 갈래로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빚은 사람은 우리한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란 다름아닌 우리들 누구나 다 다른 땅에서 다 다른 모양새로 다 다른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는 ‘삶’이구나 싶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노래쟁이이든 아바나에서 살아가는 수수한 사람들이든 그저 그대로 그곳에서 그 모습이 곱습니다. 그 목소리가 살아 있고 그 손길이 살아 있으며 그 눈빛이 살아 있습니다. 이들은 당신들 삶에서 무엇을 붙잡고 사랑하고 껴안으면서 즐거움을 나누면 좋을까를 잘 알고 있다고 느낍니다. 원추리도 진달래도 아닌 치자꽃 한 송이를 노래하는 할배 노래결에서, 우리들 스스로 고운 빛살이 담긴 노래를 늘 놓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한테는 언제나 우리 삶을 빛내는 고운 빛살 담긴 노래가 가득가득 있었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빛살을 뿌리치고 우리 노래를 내팽개치면서, 우리 두 눈으로 바라보는 삶터를 우리 눈결로 담아내는 사진찍기하고도 차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사진찍기를 이야기하는 사진읽기에서도 한결 반갑고 알차고 아리따운 길을 놓칠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나한테 깃든 넋을 보지 못하니, 나 스스로 무슨 글을 쓰고 무슨 그림을 그리며 무슨 사진을 찍겠습니까. 나한테 서린 얼을 감싸지 못하니, 나 스스로 무슨 영화를 찍고 무슨 춤을 추며 무슨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만화책 《한낮에 뜬 달》(요시다 아키미 그림,애니북스 펴냄,2009)을 읽으면 끄트머리를 매조지하면서 “서로 건강하게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193쪽).” 하고 속말을 합니다. 말 그대로 서로 몸 튼튼히 지내면 이대로 넉넉합니다. 내 몸이 튼튼하고 옆지기 몸이 튼튼하며 딸아이 사름벼리 몸이 튼튼하면 이대로 넉넉합니다. 나한테 대학교 졸업장이 없고 옆지기한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딸아이가 나중에 학교에 가고파 할지 안 가고파 할지 모릅니다만, 초등학교조차 안 간다 하여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삶을 따사롭게 보듬는 손길이란 종이조각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영화는 사진을 사랑했다지만


 영화를 보는 눈은 영화를 보는 사람 숫자만큼 갖가지입니다. 사진을 보는 눈 또한 사진을 보는 사람 숫자만큼 갖가지입니다. 그런데, 참말로 영화를 보는 눈이 갖가지요, 사진을 보는 눈 또한 갖가지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다 다른 영화를 다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요. 우리는 다 다른 사람으로 영화를 보아도 어슷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는지요.

 지난 2005년에 나온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는 책을 뒤늦게 읽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글쓴이는 당신 글을 어떻게 바라볼는지 궁금합니다. 글쓴이가 당신 글을 돌이켜보았을 때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돌아보아도 괜찮다고 여길는지 어딘가 아쉽다고 바라볼는지 무언가 모자라다고 생각할는지 궁금합니다. 2005년에 쓴 이 글을 올 2010년뿐 아니라 다가올 2020년이나 2050년에 돌아보아도 괜찮다고 여길는지 궁금하며, 당신 글을 손질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올 2010년에 한 번 손질하거나 고치면 된다고 여길는지 궁금하고, 앞으로 2020년에 다시금 2050년에 새롭게 다시금 손질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여길는지 궁금합니다.


.. 사진가들은 어떤 여자를 예쁘게 찍어야 될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상대방의 외모에 관계없이 자신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얘기를 ㄷ르은 적이 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억지로 그런 감정을 만드는 것인데, 정원처럼 좋아하는 사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이 최고의 사진으로 찍힐 것이다. 찍히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찍어 줄 때 가장 예쁘고, 아름답고 보기 좋은, 사랑이 느껴지는 사진이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가들이 사진사들보다 기술적ㆍ감각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찍은 사진보다 더 좋다 혹은 야박하게 나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머니를 가장 아름답게 찍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사랑하는 여인을 가장 예쁘게 찍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진가들이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닐까? ..  (99쪽)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는 책에는 ‘사진기나 사진이 소재가 된 영화’를 다룹니다. 또는 영화에 언뜻선뜻 스치거나 나타나는 사진기나 사진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이름은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지만, 하나하나 파고들어 살핀다면 영화들마다 꼭 ‘사진을 사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진을 사랑한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영화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펼치는 동안 ‘사진도 한 가지 살며시 곁들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가 주인공이 된 영화이든 사진기나 사진이 줄거리에서 굵직한 고빗사위를 이루는 영화이든, 영화감독이 들려주고픈 이야기는 ‘사진이나 사진기하고는 다른 자리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틀림없이 사진기 하나와 사진 한 장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여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듭니다. 만화 《슬램 덩크》 주인공이 읊은 한 마디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말처럼, “사진은 거들 뿐”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사진은 영화작품에서 ‘거드는 노릇’을 하면서 우리한테 저마다 다 다른 뜨거움과 뭉클함과 애틋함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어요.


.. 사진첩을 대충 보는 폴에게 오기는 “천천히 보라”고 충고한다. 폴이 “다 똑같지 않냐”고 반문하자 오기는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 맑은 날 아침, 흐린 날 아침, 여름 햇볕, 주말, 주중, 우산을 든 사람, 겨울 코트를 입은 사람, 짧은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 등등, 다른 사람이 같아질 때도 있고, 똑같은 사람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햇빛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지나가는 차가 다르고, 심지어 바람의 움직임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매일 다른 각도로 지구를 비추니, 결국 같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 ..  (111쪽)


 저는 영화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느긋하게 볼 겨를이 없다고 해야 맞다고 느낍니다. 영화를 안 즐긴다기보다 영화를 즐길 겨를이 없습니다. 책읽기를 할 때에 늘 느낍니다만, 책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느긋하게 즐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철을 타고 먼 마실을 할 때에 여러 권을 읽어치우기도 하지만, ‘읽어치우기’이지 ‘즐기기’는 아닙니다. 아니, 이렇게 바쁜 틈을 쪼개어 읽는 책이 바로 ‘즐기기’요 ‘읽어치우기’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조각읽기가 됩니다. 나눠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겹쳐읽기를 얼마든지 합니다. 어제 옆지기가 묻더군요. “당신은 (만화쟁이가 연재를 띄엄띄엄 하느라 뒤엣책이 여러 해 만에 나와서) 몇 해 만에 보는 만화도 예전 줄거리가 다 생각나요?” “그럼.” “나는 하나도 생각 안 나는데.” 대답을 해 놓고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참말로 책읽기를 조각읽기를 하고 나눠읽기에다가 겹쳐읽기를 숱하게 하는데, 새로 이 책을 집어들어 읽으며 ‘예전에 보던 대목’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어쩌면, 영화를 볼 때에도 십 분 보다가 끊고 다음에 또 십 분을 보고, 또 다음에 십 분을 보아도 잘 떠올리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텔레비전 연속극 또한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 않고 꾸준히 이어서 보여주는 셈이니, 책으로는 조각읽기라면 방송으로는 ‘조각보기’가 됩니다.

 제 깜냥껏 생각을 갈무리하며 영화읽기와 사진읽기와 책읽기를 나란히 놓고 곱씹어 봅니다. 영화이든 사진이든 책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저한테 가장 반갑고 즐겁고 흐뭇하며 살가운 이야기를 찾아나섭니다. 사랑 나누는 이야기이든, 수수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이든, 아이 키우는 이야기이든, 나라밖 이야기이든, 전쟁 이야기이든, 꿈나라 이야기이든 …… 좋아하는 갈래가 다르지만, 모두들 ‘다 다르게 좋아하는 갈래’에서 ‘다 다르게 좋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다 다르게 좋아하는 다 다른 갈래 다 다른 문화예술 매체 이야기라 할 때에는, 이 문화예술 매체를 즐긴 다음에 풀어내는 ‘느낌글’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이 적바림하는 느낌글이라 할지라도 이 책과 저 책에서 다 다른 삶과 눈길과 생각에 따라 다 다른 틀거리와 짜임새와 매무새로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비슷하거나 어중간한 느낌글이란 나올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아름다운 눈물과 빛나는 웃음 하나 선사한 작품일 테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는 책에서는 바로 이 ‘눈물’과 ‘웃음’을 찾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눈물과 웃음이 빠져 있구나 싶습니다. 영화를 즐길 때에는 영화를 즐기는 나름대로 어떻게 눈물과 웃음을 즐겼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사진을 만나며 부둥켜안을 때에는 영화에 나오는 사진 이야기가 당신 가슴에 어떻게 눈물과 웃음으로 아로새겨졌는가 하는 대목이 빠져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고, 책을 덮으면서 갑갑했습니다. 교수님이든 평론가이든 비평과 평론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내놓기 앞서, 무엇보다도 당신들 가슴을 적시는 아름다운 빛줄기를 우리한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착한 사람들 일색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가장 착하게 여겨지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이다 ..  (204쪽)


 글쓴이 김석원 님은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는 책에서 영화를 말하고 싶었을까요? 사진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영화와 사진을 아울러 말하고 싶었을까요? 사진과 영화가 어깨동무하는 삶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이 다르고, 사람마다 사진기로 들여다보는 눈썰미가 다릅니다. 똑같은 기계요 장비라 할지라도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매무새로 사진을 이루어 냅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장비로 일구어 낸 작품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두 작품을 바라보면서 다른 느낌입니다. 한 사람 한 작품일지라도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른 눈물과 웃음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사랑한 사진》이라는 책은 어떤 ‘다 다른 영화와 사진이 어우러지는’ 이야기일까요. 어떤 목소리를 어떤 결로 어느 자리에서 누구하고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일까요. 사진기와 사진을 다루며 영화 하나에 깊은 사랑과 너른 믿음을 담은 영화감독들 땀방울과 꾸덕살을 《영화가 사랑한 사진》에서는 어느 만큼 건드리거나 어루만지고 있다고 해야 좋을까요. (4343.2.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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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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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사람한테 빛줄기 선사하는 책이 되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3] 김규항, 《예수전》


 이삿짐 나르기를 거들려고 인천에서 일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집을 나섰고, 밤 열두 시 반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옆지기는 아침부터 밤까지 홀로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지냈습니다. 요즈음은 바느질로 인형 만들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혼자 아이를 보자면 바느질하기란 만만하지 않으며 밥 차리기에다가 밥 먹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 둘이 함께 아이를 보아도 버겁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앞서도 언제나 집일을 많이 맡아서 하기는 했으나, 아이를 키우면서 맡는 집일이란 더없이 고단합니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오로지 고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무거워도 아이 볼따구를 쓰다듬고 궁둥이를 어루만지며 “우리 돼지야, 우리 돼지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즐겁습니다. 아이한테서 새 얼굴을 보고 아이와 함께 새 모습을 느낍니다. 고단하게 아이를 보기 때문에 얻는 보람은 아니나, 아이는 아이대로 늘 맑고 웃는 얼굴이 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지킬 수 있는 한편, 어른들이 잃기 쉬운 웃음과 느긋함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길동무가 아니랴 싶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말이란, 아이를 낳는 경험이 몹시 크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할 터이나, 이보다는 우리 스스로 더욱 고단한 새삶을 열면서 더욱 고단하기에 더욱 기쁘며 새삼스러울 수 있는 새길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우리들 목숨이기에, 이 목숨값이 얼마나 크며 거룩하고 아름다운가를 깨닫는 일은,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되는 데에 있을 테니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를 생각하고,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된 뒤, 내 아이 또한 어버이가 될 앞날을 헤아리면서, 우리들은 저마다 우리 목숨이 얼마나 곱고 거룩하며 놀라운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민주화 정권’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온전한 부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참혹한 풍경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짓이라고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  (9, 160쪽)


 하루하루 쉬지 못하고 보내는 나날인 채 일요일 아침부터 이삿짐을 나른다며 먼길을 나선 다음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전철길에서 도무지 눈을 뜨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3호선 첫역 대화역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눈이라도 감기는 감았으나, 인천으로 돌아가자면 종로3가에서 갈아타야 하니 느긋하게 눈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무릎에는 책 하나 올려놓고 잠깐 잠들었다 깼다를 되풀이합니다. 안국역에서 가까스로 깨어나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종로3가에서 인천 가는 전철을 겨우 잡아탑니다. 막차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철을 올라탑니다. 빈자리가 있으나 앉지 않습니다. 자칫 동인천역에서 못 내리고 인천역까지 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졸음을 멀리하면서 책을 붙잡습니다. 어떻게든 한 시간 이십 분을 책읽기로 버티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마침 오늘 들고 나온 책은 ‘읽다가 잠들기 좋은 지루한’ 책입니다. 그나마 마음에 쏙쏙 스며드는 이야기책이었다면 잠이 확 깰 수 있으련만, 더 고됩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무거운 몸으로 동인천역까지 잘 버티어 냅니다. 드디어 전철표를 끊고 밖으로 나옵니다. 자정을 훌쩍 넘고 한 시로 달려가는 때이니 술집을 빼놓고 문을 연 가게가 없습니다. 술 얹힌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 하며 고요한 골목을 걷습니다. 우리 집이며 이웃집이며 모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습니다. 먼지 잔뜩 묻은 옷은 모두 벗어 담가 놓습니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는데 옆지기가 깼습니다. 오늘 있던 일을 짤막하게 들려주고 옆지기 다리를 조금 주무릅니다. 곧바로 곯아떨어져야 하지만, 오늘 하루치만큼 밀린 일이 있어서 셈틀을 켭니다. 한 시간 반쯤 다시금 졸린 눈을 비비며 일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제 깜냥으로는 곯아떨어진다고 곯아떨어지지만, 간밤에 아이가 오줌을 누어서 잠을 깰 때에 함께 깨고, 새벽 다섯 시에 아이가 똥을 눌 때에도 함께 깹니다. 어제도 새벽에 똥을 누더니 오늘도 새벽에 똥을 누는군요.

 아침 여덟 시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부시시 일어나서 조금 일손을 붙잡자니, 아이는 어느새 따라서 깨어 납니다. 함께 놀자며 엄마한테 붙고 아빠한테 붙습니다. 거의 아무런 일손을 붙잡지 못한 끝에 아침 열한 시 넘어갈 때에 아침밥을 마련합니다. 어제 새벽에 해 놓은 밥에다가 떡과 당근과 고구마를 썰어 넣은 볶음밥을 합니다. 아이는 어제처럼 밥은 안 먹겠다고 도리질을 하고, 두부만 낼름낼름 집어먹습니다. 죽을 줘도 밥을 줘도 왜 이렇게 안 먹는다고 떼를 부리는지 힘겹습니다. 그래도 용케 콩은 아주 좋아하고 두부나 묵은 신나게 잘 먹습니다.


..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 예수는 특이하게도 바느질, 술 담그기 등 여성이 전담한 노동의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성 노동을 부각함으로써,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집중하는가를 좀더 분명히 드러낸다 … 예수는 마음의 귀가 열려야 한다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새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  (32, 39, 52, 77, 98쪽)


 머리가 지끈지끈하다고 느끼며 낮나절에 다시금 일손을 붙잡습니다. 이웃 누리집 마실을 하다가 김규항 님 누리집에서 “《예수전》 읽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정중히 부탁합니다. 천천히 한 번 더 읽어 주시길.”이라는 짤막한 글월이 며칠 앞서 올라와 있습니다. 피식 웃고는 책상맡에서 노란 책 《예수전》을 다시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며 제 나름대로 밑줄을 그은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훑습니다. 이 책을 한 번 다 읽었던 지난 11월 25일에 적바림한 한 줄이 맨 마지막 쪽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 남아돌면 딱 한 번 슥 읽어 줘도 되는 책이란. 참 얕다.’

 김규항 님이 쓴 《예수전》을 놓고 섣불리 ‘얕다’느니 ‘깊다’느니 하고 따지는 일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예수전》을 다 읽고 나서, 이 부피 자그마한 책을 이렇게 엮어내어 만삼천 원이나 붙여야 했는가 싶어 몹시 슬펐습니다. 글부피도 적은데 굳이 양장으로 꾸며야 했느냐 싶습니다. 이 책을 이렇게 엮거나 꾸민 뜻은 알겠으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믿음을 나눌 수 있어야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180쪽).”라는 꾸지람을 꾸지람 그대로 나눌 만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책을 한결 보기 좋게 꾸미거나 엮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하여 반드시 수수하거나 풋풋하거나 단출하게만 엮거나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야기하거나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 할 때에 좀더 수수하거나 한결 풋풋하거나 더욱 단출하게 엮거나 꾸밀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아침에 일산으로 가는 길에 다 읽은 《양희은-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우석,1993)이라는 책에서, 양희은 님은 “왜 성당들은 번쩍이는 장식,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걸까? 엄청나게 꾸며진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이 새끼손가락만 하게 찌부러져서 초라해만진다. 그 엄청난 장식들이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오히려 두터운 벽을 쌓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많은 이들과 같이 계셨던 곳은 들판이나 언덕 위였을 텐데. 들꽃 내음이나 밀 내음이 은총처럼 퍼지는 야외였다는데(26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양희은 님은 “비싼 장식으로 화려한 교회를 지을 그 돈이면 많은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수도 있건마는(264쪽).” 하고 말을 잇습니다.

 저 또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 하나 만들거나 내놓을 때에 늘 ‘책 하나에 드는 돈’과 ‘이 책 하나에 붙이는 값’을 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책값 500원이나 1000원을 더 붙이면 저한테 떨어지는 고물은 조금 더 커집니다. 반양장이 아닌 양장을 하고, 겉종이에 코팅을 입히거나 금박을 넣거나 누름글자를 넣으면 그만큼 인쇄ㆍ제작ㆍ편집ㆍ디자인에 돈이 더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값을 조금 더 올려붙여도 사람들은 덜 투정’합니다. 뭔가 ‘고급스러움’을 느끼고 ‘책꽂이에 꽂았을 때에 품위가 느껴진다’고 하니까요.

 책 줄거리를 놓고 따지는 말이 아니라, 책 만듦새를 놓고 따지는 말이란 부질없을 수 있습니다. 아니, 부질없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나 개성을 건드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 줄거리가 괜찮은 책이라 할 때에는 책 만듦새 또한 안 살필 수 없습니다. 더 너른 사람한테 더 낮은 삶자락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책이 껍데기를 더 들쓰고 있다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지요? 더 속깊은 사람한테 좀더 너른 마음씀을 바라는 이야기를 펼치려 하는 책이 겉치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요? 《예수전》 같은 글부피라면 만삼천 원짜리 책이 아닌 만 원짜리 책이나 팔천 원짜리 책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책 줄거리에 앞서 책 만듦새를 돌아볼 때에, 이 책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느꼈습니다.


..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  (69, 73, 96, 103쪽)


 옆지기와 함께 《예수전》을 읽었습니다. 나 혼자 외곬로 바라보는 눈길이 될까 걱정하면서 옆지기 이야기를 묻고, 내 생각을 들려주면서 우리 세상에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어떤 매무새와 눈길로 헤아리며 받아들이고 곰삭이는 삶이어야 좋을까를 돌아보았습니다. 옆지기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마땅한 이야기를 아주 마땅하게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책을 애써 써냈어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옆지기와 책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은 참다운 길보다는 유행이라고 하는 물결에 쉽게 휩쓸립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이 성경읽기를 너무 못한다’고 느끼며 《예수전》을 썼는데, 김규항 님이든 미우라 아야코 님이든 우찌무라 간조 님이든 김교신 님이든 하는 사람들이 풀이한 ‘성경읽기 책’을 읽지 않고 ‘우리 스스로 성경을 옳게 읽으’면 되는 노릇입니다. 성경에는 온갖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만, 한결 쉽게 알려주고자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다루지, 무슨 꿍꿍이가 있다거나 무슨 속셈이 있어서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제가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성경말씀을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가슴이 따끔하도록 건드리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따끔하다고 느끼고, 눈물겨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웃음이 터지는 대목에서는 웃으면 됩니다. 내 잘못을 뉘우쳐야겠다 싶은 대목에서는 내 잘못을 뉘우치면 됩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이나 제대로 못 느끼고 있었다면 ‘자랑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내가 잘하는 일을 흐뭇하게 섬기면 되며, 앞으로도 꾸준히 잘해 나가면 됩니다.

 성경뿐 아니라 교과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교과서에 이런저런 말썽거리가 있습니다만, 말썽거리가 있는 책이라 한달지라도 이 교과서를 다루는 사람이 슬기롭게 다루면서 올바르게 가르치는 도움이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한테는 빈틈과 모자람 하나 없이 옹근 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훌륭하거나 거룩한 길을 모르거나 지나치거나 등돌리지 않으니까요. 책을 책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경은 성경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잘한다고 북돋우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못한다고 나무라면 됩니다. 잘한다고 북돋우되 눈먼 채 뒤따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다고 나무라되 그이 마음밭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한겨레신문 홍세화 님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더 섬겨야 하지 않고, 누구를 마냥 깎아내려야 하지 않습니다. 왼날개이든 오른날개이든, 옳고 바르고 아름답게 잘한다면 손뼉칠 일이요, 그릇되고 엉터리에다가 어줍잖게 하고 있으면 따끔하게 꾸짖으며 바르게 접어들도록 도와줄 노릇입니다.


..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돈과 물질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수록 이상하게도 정작 자유는 점점 멀어져 간다 …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 간다 ..  (162∼165쪽)


 김규항 님은 《예수전》이라는 책을 비롯해 강연자리나 다른 책에서 빠짐없이 ‘우리 마음속에 깃든 이명박(또는 대운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저어기 노옾으신 자리에 궁뎅이 붙이고 있는 양반 한 사람한테 손가락질을 한다고 풀리는 우리 삶터 말썽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옳게 가꾸며 아름답게 일구어야만 풀리는 우리 밝은 앞날이라고 힘주어 거듭 말합니다. 이는 권정생 님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을 비롯한 모든 책에 어김없이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님뿐 아니라 이오덕 님이나 이원수 님도 늘 펼치던 이야기요, 송건호 님 글이나 리영희 님 글이나 성내운 님 글에서도 한결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게을러서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내가 부지런해야 부자가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난이든 넉넉한 살림이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으면 좋은 삶’이라는 소리이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몫을 다 하면서 아름다움을 이웃들과 꽃피우면 좋다’는 소리입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어 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늘 즐겁고 아름다이 붙잡는 바탕이 먼저 튼튼하게 서 있은 다음에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든 백 해나 즈믄 해에 걸쳐 세상을 바꾸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옳은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다음 혁명을 외치든 개혁을 말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맑은 길을 찾고 밝은 꿈을 품으며 고운 넋을 건사하면서 정치를 하든 학문을 하든 운동을 하든 문학을 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 구원은 가진 게 없는 사람, 가진 것을 스스로 모두 비운 사람들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 ..  (114쪽)


 《예수전》을 다시 덮으며 생각해 봅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한테 당신 책을 다시금 천천히 읽어 주기를 바라지만, 천천히 다시 읽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두 번째 예수전’과 ‘세 번째 예수전’을 더욱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네 번째 예수전’과 ‘다섯 번째 예수전’을 더더욱 낮은 매무새로 조곤조곤 들려주면 넉넉할 테고, ‘여섯 번째 예수전’과 ‘일곱 번째 예수전’은 훨씬 더 다소곳하면서 쉽고 부드러운 우리 말글을 한껏 빛내면서 수수하고 풋풋하게 나누는 길을 찾으면 되리라 봅니다. (4343.2.8.달.ㅎㄲㅅㄱ)


 ┌ 《예수전》(돌베개 펴냄)
 ├ 글 : 김규항
 └ 책값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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