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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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다섯 붙였지만, 장석봉 번역이 엉터리라서 내 점수는 9점이다) 

 
 이 책 하나 136 ― 묻힌 삶, 묻힌 사람, 묻힌 터
 : 팔리 모왓, 《잊혀진 미래》


- 책이름 : 잊혀진 미래
- 글쓴이 : 팔리 모왓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달팽이 (2009.11.12.)
- 책값 : 15000원


 (1) 아이를 키우는 힘든 삶이란


 아이와 함께 마실을 다니면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때때로 만납니다. 어르신들은 아이한테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탕이나 과자를 쥐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둘레 어른들한테서 사탕이나 과자를 곧잘 얻어먹었지 싶습니다. 이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안 좋아하셨고, 둘레 어르신들한테 아이한테 사탕이나 과자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집에서 먹지 못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고 싶었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가 아이였을 나이에서 서른 해가 훌쩍 지난 오늘날은 지난날과 뒤집어진 일이 나타납니다. 우리 아이가 둘레 어르신한테서 사탕과 과자를 받아먹고, 저는 아버지 된 몸으로 이런 사탕 선물과 과자 선물이 못마땅하고 힘겹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사탕 하나 준다고 뭐 어때서?’이고 ‘사탕 때문에 이가 썩을까 봐 걱정하나?’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깥에 나와 사람들한테서 자꾸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어 버릇하면 무엇보다 ‘밥을 잘 안 먹으려’ 합니다. 다음으로, 바깥에 나오면 으레 누군가 무엇을 먹으라고 준다고 생각합니다. 밥때에 맞추어 한창 밥을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할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아이가 얼마나 땡깡을 부리는지를 사람들이 옳게 느껴야 하고, 선물받는 고마움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면서 무언가를 쥐어 주든 해야 할 줄을 어른들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깟 사탕 하나인데 뭐?’ 하고 생각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아니거든요. 당신 같은 어르신을 한 사람만 만나지 않거든요. 어느 날은 사탕만 자그마치 열 알이나 받아야 한 적이 있거든요.’ 하고 대꾸를 하지만, 늘 이렇게 대꾸를 하자니 고단하고 지칩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짐을 꾸려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아픈 옆지기가 조용히 명상 수련을 다녀오고 속 다스리는 약을 먹을 수 있게끔 아이는 아빠가 데리고 아빠 볼일 보러 가는 자리에 갑니다. 계단만 보면 꼭 저 스스로 하나씩 디뎌야겠다는 아이는 아무리 힘들어도 계단 끝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다 오르거나 내려가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사탕 한 번 과자 한 번 받아먹은 아이는 밥때가 되어도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젠장 제기랄 하고 구시렁댑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이는 제 아빠가 사탕이나 과자가 아닌 밥을 주니까 고개를 도리질하거나 홱 돌리는데, 다른 사람이 밥술을 떠서 냠냠 하고 말하면 새끼 새들처럼 입을 쩍 벌립니다. 아주 말괄돼지인 녀석이 이때만큼은 고분고분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출판사 분들한테 말씀해서 한 숟갈씩 아이한테 내밀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먹을까요?’ 하고 궁금해 하던 분들이지만, 막상 숟갈을 아이한테 내미니 도리질 한 번 없이 곧바로 밥을 낼름낼름 먹으니 놀라 합니다.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어머니가 떠 주는 밥술은 잘 안 먹고, 둘레 다른 어른들이 떠 주는 밥술은 낼름낼름 받아먹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심통이지만 심통을 부리고, 둘레 어른들한테는 귀여운 척을 떨지 않았느냐 싶어요. 어머니가 골을 내거나 힘들어 할 만큼 미운 짓을 했달까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젓가락질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나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했을 테고요. 깔작깔작거리면서.

 낮잠을 넘기고 졸음을 참아 가며 놀던 아이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듭니다. 팔이 저릴 무렵 잠든 아이를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으려 하니 스르르 눈을 뜹니다. 좀 누워서 잠을 자 주면 아빠가 서울 마실 나와서 볼일을 마저 보고 얼른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쩌는 수 없구나 싶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빠가 아이한테 미안한 노릇이며, 이래저래 일을 얼추 마무리짓고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쯤에 서울 홍대앞에서 전철을 탑니다. 삼십 분쯤 일찍 일어설 수 있었으면 신도림역에서도 한결 느긋했을 터이나 이때를 놓쳐 꽤 북적이고 미어터집니다. 이런 ‘반쯤 지옥철’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린이한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아마 ‘뭐야, 이런 때에 왜 아이를 데리고 타고 법석이야?’ 하고들 여깁니다. 그렇지만 누군들 좋아서 미어터지는 때에 아이와 함께 전철을 타겠습니까. 제가 뭔 부자라고 인천까지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겠습니까.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 담은 가방은 겨우 짐칸에 올렸지만, 아빠 책과 다른 짐이 든 무거운 가방은 등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이한테 자리 하나 내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어르신 아닌 분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고, 여느 자리에 앉은 젊은 사람들은 손전화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저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 아이나 조카나 아는 사람 아이가 앞에 있다면 이렇게 모른 척하거나 남 일로 여기지 않았겠지요. 생각하기를 잊은 사람들이고, 마음쓰기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어른들도 지옥철이나 반쯤 지옥철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갓난아이나 어린이라면 훨씬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더구나 아이는 키가 작으니, 바닥에 서 있으면 캄캄한 우물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는 꼴입니다. 내내 안겨야 해서 더 답답한 아이가 바닥에 서고 싶다며 하도 찡얼거려 내려 주니, 바닥에 서 있기가 훨씬 괴롭다며 다시 안아 달라 해서 안습니다. 틀림없이 아이 찡얼거리는 소리를 아이 둘레에서 ‘밀치는’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 쪽으로 ‘안 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인 저한테 밀치면 그저 그럴 수밖에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이한테 밀치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만큼은 맨앞과 맨뒤가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여성 전용칸’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았다고 느끼는데,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 ‘여성 전용칸’이 생긴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전용칸’을 마련하는 움직임만큼 ‘어린이 칸’을 마련해야지 싶습니다. 자전거를 실을 칸을 마련한다 하고, 바퀴걸상 타는 자리는 일찌감치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이이든 어린이이든 아이를 데리고 타는 어버이가 아이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 오줌을 누이거나 잠든 아이를 눕히거나, 또는 힘든 아이를 안고 어버이 한 사람이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합니다. 고단한 두 사람은 먼저 잠들고 아빠는 좀더 깬 채 책 한 권을 읽고 잠자리에 듭니다. 잠자리에 누워 거듭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서울 마실을 나와 만난 책마을 일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말을 했지만, 아이키우기란 참 힘들고 참 힘든 하루하루가 보람입니다. 힘들게 아이를 키우며 늘 새롭게 배우고 늘 고맙게 고개를 숙입니다. 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기 때문에 지옥철이 아이한테 얼마나 안 좋은가를 새삼스레 깨닫는 한편, 허울좋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라고 하는 긴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몸으로 느낍니다. 이런 이름표를 붙인다 한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여느 도시사람들은 장애인한테든 노약자한테든 영유아한테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한테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이런 딱지를 붙지지 않고서는 이웃사람을 살피지 못하는 도시사람이란 소리입니다. 이런 딱지를 붙인다 한들 가난하거나 힘든 이웃을 헤아릴 줄 모르는 도시사람이란 뜻입니다. 도시란 삶터는 한 사람이 고운 목숨 선물받은 아름다운 삶임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셈입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바라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도시라면, 이웃에 앞서 나 스스로 내 목숨이 얼마나 고운지를 느끼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자연을 밀어내고 시멘트와 쇠붙이만 가득 채운 도시이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이 깃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 제아무리 자연이 어떠하고 생태가 어떠하며 환경이 어떻고 저떻고 떠든들, 도시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란 힘듭니다. 아니, 도시사람은 ‘자연스럽게(생태적으로)’ 살 수 없어요. 자연이 없는 곳에서 어찌 자연스레 살겠습니까. 자연이 있는 곳에서조차 숱한 공장과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얼룩져 있는걸요. 게다가 한국땅에 골프장이 좀 많습니까. 한국땅 국립공원에조차 하늘차와 주차장과 기차길 구멍과 고속도로 고가도로 따위가 오죽 많습니까.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는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용을 쓰는 꼴이고 몸부림을 치는 판입니다. 좀더 밝은 앞날을 생각하자고, 더욱 따뜻한 터전을 일구자고 애쓰는 흐름이 얕게나마 있습니다.

 다만, 일찍 눈을 뜬 분들 말마따나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는 분들마저 당신 아이들을 학원에 넣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일류대학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내몹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읽은 사람치고 이이를 우러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막상 권정생 할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자가용을 버려서 이라크 파병을 막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촛불만 든다고 이라크 파병을 막겠습니까.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지요. 우리들은 촛불은 들었어도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국가보안법이든 막지 못합니다. 더욱이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무어나 외치기 앞서 내 삶터에서 자가용을 버려야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가용을 버리고, 다음으로는 아파트를 버리며, 차근차근 졸업장과 명예와 권력과 은행계좌를 버려야 합니다. 자가용부터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파트를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좋은 책 읽는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졸업장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호미질하여 푸성귀 얻는 보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은행계좌를 놓지 못하는 사람한테 ‘아이 똥기저귀를 손빨래하는 재미’를 나눌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와 가까이 맞닿거나 도시 둘레에서 복닥이는 삶자리로서는 잃어버린 하루로 머뭅니다. 잃은 어제요 잃는 오늘이요 잃을 앞날입니다. 처음에는 잃지만 차츰차츰 잊는 어제가 되고 잊는 오늘이 되며 잊는 앞날이 됩니다.


 (2) 묻힌 삶을 아로새겨 놓은 《잊혀진 미래》


 1921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이곳저곳을 마실하면서 자랐다고 하는 팔리 모왓 님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두 번째 유럽전쟁에서 총을 들었고, 전쟁이 끝난 뒤 북극땅에 머물며 글쓰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무렵 처음 쓴 책이 《잊혀진 미래》입니다. 당신 스스로 흰둥이이면서 당신과 같은 흰둥이들이 북극땅을 비롯한 온누리 토박이 삶을 어떻게 헤집고 토박이 삶터를 얼마나 일그러뜨리거나 무너뜨리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팔리 모왓 님 책이 2003년에 《울지 않는 늑대》(돌베개)라는 이름으로 처음 옮겨졌습니다. 2005년에 《걸어다니는 부엉이들》(북하우스)과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북하우스)가 옮겨졌으며, 2009년에 《안 뜨려는 배》(양철북)가 옮겨졌습니다. 《잊혀진 미래》는 다섯 권째 옮겨진 팔리 모왓 님 책입니다.

 당신 책을 즐겨읽거나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한 권 두 권 꾸준히 우리 말로 옮겨집니다. 흔한 말로 잘 팔리는 책은 아닌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인데, 잘 팔리지는 못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많이 읽히지 못하는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이지만, 다문 천 사람이든 만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에 깃든 깊은 넋과 너른 얼을 고맙게 받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싶습니다.

 팔리 모왓 님이 태어난 1921년을 헤아려 봅니다. 이무렵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아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1921년이 아니라 2010년을 돌아보았을 때에도 ‘학교에 안 넣고’ 세상을 넓고 깊게 배우도록 이끌어 줄 어버이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2007년에 제 고향 인천에 돌아온 뒤로 가끔 학교(고등학교) 후배를 만납니다. 학교 후배들은 대학 입시를 걱정합니다.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 무슨 학과에 가야 좋을지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무슨 꿈을 이루고 싶은지는 제대로 걱정할 줄 모릅니다. 아주 드물게 한두 젊은 넋들은 ‘학교 아닌 꿈’을 이야기합니다. 거의 모든 젊은 넋들은 ‘꿈 아닌 학교’를 이야기합니다. 아니, 꿈이란 없이 학교에 매여 있다고 할까요. 젊은 넋 스스로 너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이요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 넋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스스로 못 깨닫기도 하고, 둘레에서 일깨우지 못하기도 한달까요.

 후배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가지 말며 꿈이 있으면 대학교에 가든 말든 네 길을 찾으라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어디에서든 알바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어 네 살림돈은 네 스스로 벌라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한 해쯤은 길게 휴학을 하며 한 해치 등록금만큼을 너희 어버이한테 얻어서 ‘나중에 갚을게요’ 하고 말씀드리며 한 해치 등록금 천만 원으로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한 해 동안 샅샅이 누벼 보라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학부모나 청소년이나, 누구라 할 것 없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바쁩니다. 참으로 바쁜 나머지 이웃이고 살붙이이고 동무이고 나 스스로이고 돌아보지 못합니다. 팔리 모왓 님은 당신 이름과 돈과 힘을 내려놓고는 추운 땅 사슴겨레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살았습니다만, 오늘 이 나라에서 내 이름과 돈과 힘을 이렇게 고이 내려놓고 지내고자 하는 분이란 거의 없습니다. 더 붙잡으려 하지 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거머쥐려 하지 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치를 때에 내 앎을 살핀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보다 나은 점수를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나한테 살기 좋은 집이면서 내 이웃하고 어우러지는 집을 찾지 않는 매무새입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자가용을 씽씽 내달리는 사람은 저 혼자만 살겠다는 몸짓입니다. 좁은 골목길에는 처음부터 자가용을 들이밀지 말았어야 했고, 어쩌는 수 없이 자가용을 들이밀었다면 골목사람 발걸음 빠르기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려야 합니다. 학교 앞에서는 30킬로미터 넘게 달리면 안 된다고 못박아 놓고 있는데 학교 앞에서 30킬로미터 밑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골목길에서는 30킬로미터가 아닌 15킬로미터쯤으로 달려야 옳습니다. 학교 앞에는 아이들만 있으나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못한다는 우리들이기 앞서 생각을 버린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생각을 잃은 우리들이요, 그예 생각을 잊고 마는 우리들이구나 싶습니다.

 생각을 못하는 동안 우리한테 아름다울 삶을 차츰 멀리합니다. 하루하루 멀리하다가는 이내 멀어지고, 이내 멀어지면서 저절로 등을 돌리며, 등돌린 채 지내다가는 아예 파묻습니다.

 착한 마음밭을 파묻습니다. 참된 마음결을 파묻습니다. 고운 마음씨를 파묻습니다.

 듣기 좋아 무슨무슨 공동체인데, 공동체이기 앞서 착한 사람 참된 사람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 해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이 되면 무슨무슨 정책이나 반대이다 무어다 하고 떠들썩한데, 스스로 얼마나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후보를 아직 본 적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착하게 살면 돈을 못 벌겠지요. 참되게 살면 이름을 못 얻겠지요. 곱게 살면 힘을 늘릴 수 없겠지요. 돈도 좀 벌고 이름도 좀 얻고 힘도 좀 키우고 싶으니, 우리 스스로 저절로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길을 걷겠지요.

 1940년대까지는 어찌저찌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슴겨레 사람들이 2010년대에 살아남아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한국땅에서는 이런 소식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조금은 살아남았을는지, 다시 살아났을는지, 그예 씨가 말라 버렸을는지, 아주 박물관 유물처럼 목숨만 가까스로 이으면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슴겨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당신들 살림살이를 그토록 추운 땅에서 수천 해에 걸쳐 이어왔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은 살아남았습니다. 도톰한 책 《잊혀진 미래》에 잊혀질 수밖에 없던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 이야기가 눈물겨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한국땅에서도 우리들 착하고 참되고 곱게 살아갈 이야기를 눈물겹거나 웃음짓도록 아로새길 만한 슬기로운 글쟁이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3) 못내 아쉬운 번역인 《잊혀진 미래》


 《잊혀진 미래》를 내놓은 ‘달팽이’ 출판사는 지난 2003년부터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바지런히 펴내고 있는 1인 출판사입니다. 요사이야 1인 출판사가 꽤 늘었지만, 2003년 즈음부터 1인 출판 외길을 걷는 곳은 드뭅니다. 이무렵 1인 출판사를 꾸린 달팽이 출판사는 책마을에서 ‘저러다 그만두겠지’라든지 ‘미친 짓이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출판사 이름 ‘달팽이’마냥 느릿느릿 책살림을 꾸리면서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한 권 두 권 내놓고 있습니다. 달팽이 걸음 출판사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달팽이 출판사 책은 꼭 달팽이 걸음만큼 팔리고 읽히며 받아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홀로 온갖 일을 다 해내야 하는 만큼 벅차기도 할 텐데, 이래저래 헤아린다 하여도 이번에 나온 《잊혀진 미래》는 번역이 몹시 엉성합니다. 아무래도 번역하신 분이 애벌 원고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넘기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틀림없이 한글로 된 책인데 앞뒤 흐름이 엉성한 글월이 대단히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이런 엉성한 번역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채 책을 내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와 함께 오탈자가 꽤 많습니다. 출판사 살림이 많이 힘들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될 텐데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힘들면 둘레에서 자원봉사를 받아 교정교열을 한 번쯤이라도 더 거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래도 워낙 줄거리가 탄탄하고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제 마음속으로는 ‘애벌 번역 책’을 ‘두벌 번역’ 하면서 읽습니다. 종이에 찍힌 글월 그대로 읽지 않고 이 글월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곱씹으면서 더욱 더디게 읽습니다.

 말끔하고 정갈하게 추스른 책이었다면 이 놀라운 이야기 《잊혀진 미래》를 금세 읽어치우고 덮었을 수 있겠다고 봅니다. 꽤 엉성궂은 애벌 번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탓에, 더욱 더디게 곱씹으며 읽고, 몇 번 읽은 글월을 다시금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면서 지난날 사슴겨레 사람들 슬기와 삶을 제 마음자리에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좋은 번역이었다면 좋은 번역대로 고맙고, 얄궂은 번역일 때에는 얄궂은 번역대로 고맙습니다. 그래도, 애써 읽는 책이라면 얄궂은 번역보다는 좋은 번역이기를 바랍니다. 책을 낸 출판사 사장님과 번역을 한 분께서 아무쪼록 우리 말과 글을 새삼스레 뒤돌아보며 새로 배우시면 기쁘겠습니다. 서툰 번역일지라도 이런 책 하나 묻히지 않고 우리 말로 나온 일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4343.4.29.나무.ㅎㄲㅅㄱ)


[12, 27, 56쪽] 대략 1960년대부터 우리는 에스키모들의 생존을 보증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정책을 추구해 버렸다. 옛날부터 내려온 에스키모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빼앗아 버리고는 우리의 근대적 기술사회의 틀로 억지로 끼워맞추는 데 가혹하고 획일적인 노력을 해 온 것이다 … 분명 이들은 배런스의 무자비한 자연에 대항하여 힘들게 투쟁하며 사는 데 온힘을 쏟아부어온 사람들이어서, 서로를 해치는 데 그 힘을 사용하려는 결심이나 바람은 가져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스쳤다 … 눈보라는 단지 하루 동안 불었지만, 스텔라가 캠프로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이 소녀가 거의 아무 음식도 없고 침구도 없이 2주 이상을 지내며 툰드라의 한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아이들이 이 땅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척도다.

[24, 67, 311쪽] 공부를 해 가면서, 북극이 얼어붙은 강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강과 호수의 세계여서 그곳의 푸르고 깊은 물 양 옆으로 여름철 꽃과 넓게 뻗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북극이 얼음 덮인 세계의 꼭대기이기도 하지만, 한여름 더위 속에서는 생명으로 우글거리고 수없이 많은 만개한 식물의 빛깔로 빛나는 거의 200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완만한 평원지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누이트’는 이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고유한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로써, 인디언들이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그제야 나는 배런스에서는 부식과 부패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기억했다. 깨끗한 태양과 바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돌무더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된 순간의 모습 그대로 수세기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도록, 나무와 뼈가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71, 93, 105∼106, 150쪽]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보장받는 기간에만 짧게 머물다가 이 땅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파괴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사슴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제 그 사슴 무리들을 보고 나니, 내가 사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이제는 그 거대했던 사슴강은 사라지고 졸졸 흐르는 작은 사슴 시내만 그 지역을 통과한다. 사슴이 그들의 길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 사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슴을 멸망시킨 소총은, 마치 자기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냥한 듯 그 소총을 사용했던 인디어들마저 멸망시켜 버렸다 … 이드텐 부족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기 무역을 위해 사슴을 살육하도록 부추겨졌고, 대규모로 살상되는 사슴은 필연적으로 버펄로에게 일어난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12, 115, 140, 216쪽] 이할미우트 부족은 가볍게 여행하기 때문에 그 부족 사람이 여름에 평원지대를 건널 때면 칼, 담배 파이프, 그리고 카미크라 불리는 가죽부츠 여벌만 챙긴다. 먹을 것은 찾아서 먹는다 … 기계에 대한 본능에 의해 조종되는 백인은 모터로 가는 배처럼 바람과 파도를 뚫고 나가지만, 자신이 타고 있는 복잡한 장비가 완벽하게 기능을 다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환경과 항상 불화하며 산다 … 이할미우트 부족은 사슴의 모든 부분을 먹어야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음식을 섭취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심장, 콩팥, 내장, 간, 그리고 다른 장기도 중요하다 여기며 종종 먹는다 … 그들의 삶 속에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물건을 창조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채우거나, 돌 위에 모양을 파 넣지도 않고, 돌이나 진흙에다 새겨 넣지도 않는다. 배런스 땅을 길고 힘들게 여행해야 할 때마다 아름다운 것을 내버려야 한다면, 그것을 창조하는 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118, 135, 163쪽] 그들을 보고 냄새를 맡은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역겨움이었다. 내 눈에 그들은 너무나 더럽게 보여, 도대체 왜 입을 옷 하나 깨끗한 걸로 찾지 못했는지 의아해 하며 속에서는 백인의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솟구쳐올랐다 … 내가 조금은 까다롭게 고기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그래서 나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내 두 손으로 고기를 잡아 이빨로 물어뜯어 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 이할미우트 부족의 언어에는 ‘사슴’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데 수십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가 지닌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차이를 내 충분치 못한 기억력에다 과도하게 집어넣는 것을 현명하게 자제한 우테크는 내가 사슴에 대해 말해야 할 때 가능한 모든 경우에 사슴의 총칭만을 사용하도록 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른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줬다.

[166, 200, 215쪽] 우테크의 설명으로, 영구적인 캠프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우선 세 가지 주요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의 생명인 사슴이 찬성할 것인가?’이다 … 그녀의 바느질은 바라보고 있으면 경이로운 작업이다. 여름용 부츠는 반드시 방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바느질 솜씨로 꿰맨 솔기 부분 틈에 완벽하게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렇게 꿰맨 부분이 너무나 섬세해서 육안으로는 전혀 바느질 땀수를 셀 수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호우미크가 이렇게 바느질을 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 그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창조의 노동이다. 새 카약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나이 많은 헤크와우는 자신의 일 속에 빠져 무아지경이 돼 버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창조해 낼 때 누리는 미묘한 즐거움을 그는 알고 있다.

[206∼208쪽] 이할미우트 아이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절대로 체벌을 받지 않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을 결코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듯 그는 격렬하게 응수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까?” … 그 아이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결코 배운 적이 없다. 그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관찰하고 흉내를 내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뿐이다 … 어떤 지배나 엄격한 일과도 아이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다. 졸리면 잔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있는 한 언제나 먹는다. 말이나 훈련으로 배우는 것보다 놀이를 통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놀고 싶어하면 아무도 막지 않고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준다 … 아이는 부모의 반대라는 그림자나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 없이 놀면서 배우는 것이다.

[245, 255, 368쪽]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내 어린애 같은 이기성의 폭발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나란 사람이 암컷 늑대가 자기 새끼를 소중히 지키듯 내 물건에 몹시 집착하는 불행한 미개인쯤으로 이해되었다 … 장로회도 경찰도 없다. 입법 기관 같은 것도 없으며, 엄밀히 말하면 이할미우트 부족은 무정부 상태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법이라는 경직된 규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족은 서로 사이좋게 사는데, 이것의 비결은 인간의 의지와 인내의 힘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협동이다 …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426, 428, 439쪽] 구호품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들이 직접 먹고살 수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만 한다.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원시 부족들에게도 자선은 파멸을 초래한다 … 우리는 반드시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줘야 한다 … 북쪽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식단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먼 지역에서 수입한 이상한 식품을 위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기초 생산품을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몰상식한 이야기다 … 우리의 극지방처럼, 그린란드 땅 대부분이 유럽인이 거주하기에는 불리한 자연 그대로의 땅이다. 그러나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 땅의 일부인 까닭은, 그 황폐한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번성하는지 오래 전 배웠던 에스키모의 육체적, 정신적 유산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백인의 경제적 욕심을 위한 농노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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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 - 2010년 칼데콧 상 수상작 별천지 제리 핑크니
제리 핑크니 글.그림, 윤한구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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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을 읽는 어른과 어린이
 [그림책이 좋다 78] 제리 핑크니, 《사자와 생쥐》



- 책이름 : 사자와 생쥐
- 그린이 : 제리 핑크니
- 옮긴이 : 윤한구
- 펴낸곳 : 별천지 (2010.3.10.)
- 책값 : 9000원



 (1)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이란


 엊그제부터 《이누야사(犬夜叉)》라는 만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일본 만화쟁이 타카하시 류미코 님이 1996년부터 그린 쉰다섯 권에 이르는 긴 만화인데, 1986년부터 그린 《란마 1/2》보다 훨씬 길고, 이보다 앞서 그린 《1파운드의 복음》이나 《도레미 하우스》보다 훨씬 긴 작품입니다. 《시끌별 녀석들》하고 견주어도 참 깁니다. 쉰 권이 넘는 만화로 예전에 《4번 타자 왕종훈》을 본 적이 있고, 처음 옮길 때 42권까지 나왔다가 뒷이야기로 새로 이어지는 《드래곤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만화 가운데에는 열 권이 넘어가는 만화가 퍽 드문데, 일본 만화에서는 스무 권은 아주 가벼운 셈이고, 마흔 권이나 쉰 권은 으레 찾아볼 수 있으며 백 권이 넘는 만화 또한 꽤 많습니다.

 일본은 만화나라라 하니 이렇게 긴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일본 못지않은 만화나라요, 만화를 즐기거나 그리는 사람 또한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짜임새있고 탄탄하며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만화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듭니다. 더욱이 우리 둘레 여느 삶에서 수수한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알뜰살뜰 만화감으로 잡아채거나 삭여내는 손끝을 만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용구슬 이야기이든 농구 이야기이든 야구 이야기이든, 또 요괴 이야기이든 격투나 무술 이야기이든, 길디길게 이으면서 빈틈이 엿보이지 않도록 그리는 만화결이란 손재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손재주 아닌 훌륭한 솜씨를 바탕으로 그린이부터 스스로 눈물과 웃음으로 젖어들도록 빚어낼 수 있는 생각밭이 있어야 합니다.

 환상이나 판타지 갈래라 해서 오래도록 이어 그릴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초원의 집”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큰 숲 작은 집》 같은 문학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빨간머리 앤》 같은 문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우리들 여느 삶에서 흔히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나 스스로 처음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은 고운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즐거이 살아가면서 뒤돌아본 발자국을 발판 삼아 신나고 멋지고 아름다우며 눈물겨운 이야기를 엮습니다. 하루하루 고단하고 복닥이는 삶을 웃음나는 이야기로 거듭나도록 이끕니다. 나날이 부둥켜안는 사랑스러운 식구와 동무와 이웃 삶자락을 싱그러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북돋웁니다.

 이제 21권째 읽고 있는 《이누야사》 18권 145쪽부터 152쪽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다시금 펼쳐 봅니다. “나는 키쿄에게 생명을 걸고 보답해야 해.” “응. 키쿄는 나와 비교할 수 없어. 그건, 난 살아 있으니까. 키쿄의 일도 많이 생각했어. 키쿄와 난 전혀 달라. 내가 키쿄의 환생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그렇다고 해도 난 키쿄가 아니야. 마음은 내 마음이야. 하지만 한 가지만은 키쿄의 마음을 알았어. 나와 같이, 한 번 더 이누야사를 만나고 싶다는. 키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을 거라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이누야사를 만나러 왔어.” ‘카고메, 나도 너를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나, 이누야사와 같이 있고 싶어. 잊을 수 없어.” ‘카고메,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지?’ “이누야사,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응.” “함께 있어도 좋아?”

 만화책 《이누야사》를 이루는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카고메는 중학교 3학년 아이입니다. 카고메는 1990년대 일본 도쿄에서 고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면서 집안에 있는 오래된 우물을 거쳐 일본 옛 전국시대를 드나드는 동안 새로운 사람과 삶을 만나며 새로운 넋과 몸으로 거듭납니다. 이러는 사이 차근차근 무르익는 마음밭은 ‘나는 이누야사와 살아가고 싶어. 즐거운 일이 있어도 좋아. 맘껏 웃고 싶어. 나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계속 옆에 있을 거야.’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이누야사 손을 꼬옥 잡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중학생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하느냐고 바라볼 만합니다. 열여섯 나이에 무슨 사랑을 아느냐고 비웃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풋사랑이든 깊이 익은 사랑이든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어린 사랑이든 늙은 사랑이든 똑같은 사랑입니다. 열여섯 나이에도 사랑이고 여든여섯 나이에도 사랑입니다.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 되어야 사랑을 알까요. 아니,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면서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노래패 한스밴드는 중학생 나이에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며 노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노래하는 한스밴드 세 사람으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나, 이들 노래를 듣는 사람은 중학생이 부르는 노래에 놀라워 했습니다. 한스밴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노래를 좋아하면 열너덧 살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쉰너덧이나 예순너덧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열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열너덧에도 사회를 나무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서 사회를 꾸짖는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대목은 얼마나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가입니다. 우리가 만화책 하나를 넘기며 헤아릴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얼거리로 아름답게 엮이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노래 하나를 귀기울여 들으며 살필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목소리를 타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입니다. 고갱이는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입니다. 사람마다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맞아들이는 테두리와 깊이는 다를 텐데,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에 따라 얼마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가를 느끼면서 어루만져야 합니다.

 스물한 달째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 노릇을 하는 동안 날마다 같은 그림책을 아이한테 수없이 되풀이하며 읽히고 보이고 쥐어 줍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같은 그림책을 날마다 수없이 되읽고 또 넘기고 새로 쥐어들곤 합니다. 인형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놀잇감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새로 만지고 새로 늘어놓으며 새로 쌓아 놓습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며 만나는 엄마 아빠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맞이하듯, 날마다 같은 책 하나를 놓고도 새로운 느낌과 마음으로 마주합니다. 어버이 된 저나 옆지기 또한 아이를 날마다 새로운 눈길과 손길로 마주합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힐 때에도 날마다 다른 목소리와 매무새로 읽힙니다. 날마다 해서 먹이는 밥이든 날마다 빨래해서 입히는 옷이든 겉보기로는 똑같은 흐름이요 물건이며 살림새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똑같은 살림새라 할지라도 이 살림새를 다루는 어버이 마음은 늘 똑같지는 않습니다. 늘 새로운 하루에 발맞추어 새로운 마음이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결 하나만큼은 늘 똑같을 뿐입니다.

 아이와 읽을 책이든 어른 혼자 스스로 읽을 책이든, 날마다 새롭게 쥐어들어 새 넋과 얼을 키울 만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알차야 비로소 좋은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아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 책이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우리 스스로 날마다 쥐어들 만해야 하며, 날마다 다시금 쥐어들면서 새삼스럽고 새로운 느낌을 선물받을 만한 얼거리야 한다고 느낍니다.
 





 (2) 이야기하는 그림책 《사자와 생쥐》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말 한 마디 나오지 않고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서울 혜화동 〈책방 이음〉 나들이를 하던 이달 첫머리에 옆지기가 이 그림책을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서 장만하여 읽습니다. 이 책은 비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속그림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속그림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장만했다가 ‘이런, 겉과 속이 다르잖아?’ 하면서 짜증스러웠던 책이 꽤 있던 만큼 못내 걱정스러웠으나, 책 겉장을 이룬 사자 그림과 생쥐 그림으로도 ‘이만한 책이라면 속그림이 우리를 짜증스레 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먼저 책방에서 책값을 셈한 다음 곧장 비닐을 뜯어 책을 펼칩니다. 겉장을 이룬 그림만큼 속을 채운 그림이 어여쁩니다.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사자가 사람이 친 그물에 걸려 버둥거릴 때에 생쥐가 이빨로 그물을 갉아서 살려내는 줄거리란 그림으로만 보여줄 때에 한결 걸맞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에 말로 이야기를 넣었다면 재미나 즐거움이 크게 줄었겠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훤히 알 만한 옛이야기이기에 굳이 글을 안 넣었다기보다, 이 옛이야기란 따로 글 없이 그림으로 넉넉히 보여줄 만합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글을 써서 이야기를 읽힌다 할 때에는 그림이나 사진 하나 없이 이 옛이야기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할 노릇이요, 그림으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할 때에는 오로지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느끼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그린이로서는 생각힘을 한껏 북돋우면서 펼치는 그림책이고, 읽는이로서는 생각힘을 찬찬히 가다듬으면서 즐기는 그림책입니다.


.. 고전을 읽기 책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 드물어진 이후, 고전을 글이 없는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까지도 이처럼 매력적인 고전의 등장인물들이 가족과 설정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 주고 나로 하여금 이야기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도록 하니까 ..  (그린이 말)


 《사자와 생쥐》를 그린 제리 핑크니 님은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제리 핑크니 님이 살아가는 동물원이란 쇠창살 우리에 짐승을 가두어 놓는 동물원이 아니라 ‘자연 동물원’입니다. 쇠가시울타리나 쇠창살이 있지 않은 자연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레 살아가는 짐승을 늘 바라보고 부대끼는 느낌 그대로 그림을 즐긴다고 합니다.

 책끝에 붙은 그린이 소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을 돌아보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연으로 스며들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는 분은 드물고, 도시에 뿌리를 내리거나 한 다리를 걸치거나 온몸을 내맡기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서는 자연다운 자연을 자연스럽게 건사하기 어렵습니다. 국립공원에 하늘차(케이블차)를 버젓이 놓는가 하면, 국립공원을 꿰뚫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아무렇지 않게 뚫습니다. 국립공원에서 고기잡이 밥장사 술장사 번듯하게 이루어지며, 국립공원 아닌 데에서는 아주 막 나갑니다. 시골 논밭을 갈아엎으며 아파트를 세우거나 공장을 짓습니다. 시골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거나 공장을 들입니다. 갯벌을 메워 아파트를 올리거나 공장을 키웁니다. 자연이 자연다울 수 없고, 자연이 자연스러울 수 없습니다. 자연이 조금도 자연다움을 보듬지 못하도록 나동그라지는 곳에서 자연을 싱그럽고 아름다이 펼치는 이야기를 엮기란 몹시 힘듭니다. 자연을 하나도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않는 우리들 터전에서 자연을 사랑스럽고 알차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 그림책을 그리기 힘듭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을 받아들이는 마음그릇 채우며 나라밖 그림책을 옮기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 있어도 지식으로 삼을 뿐입니다. 훌륭한 자연 그림책 하나 옮겼어도 초등학교 낮은학년 때까지만 읽히지,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고등학교 때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길이길이 이어갈 자연을 굽어살피지 않고, 오래오래 사랑할 자연을 껴안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즐긴다는 초등학교 낮은학년이라지만, 이때에도 영어와 한자와 갖가지 지식과 학원 교육에 휘둘립니다.

 애틋한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지만, 이 그림책 하나에 얼마나 애틋함이 묻어 있는지를 느낄 가슴이 자라날 겨를이 없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입니다. 살가운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고 느낍니다만, 이 그림책 하나를 기쁘게 장만하여 넉넉히 나눌 품이 없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한 번 보고 덮는 그림책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한 해에 걸쳐 천 번 넘게 살피는 그림책임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가끔 한 번 넘기면 될 그림책이 아니라, 책꽂이에 꽂힐 겨를이 없이 손길을 타면서 닳고 때가 타야 할 그림책임을 돌아보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만 닳고 낡으며,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좋은 그림책이나 고운 그림책이나 멋들어진 그림책이 닳고 낡지 못합니다. 그림책은 처음 이 책을 쥐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이어가는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희 아이가 다시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을 때에도 물려주는 책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 나는 자연보호구역 바로 옆에 살면서 주변의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에 매료되었다. 특히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면 동물들의 소리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과 함께 서사를 끌어가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  (그린이 말)


 스물한 달을 살아낸 우리 아이한테는 《사자와 생쥐》가 아직 재미난 이야기책이 되기는 힘듭니다. 아이 스스로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고, 엄마나 아빠가 아이 한손을 쥐어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생쥐!” “사자!” “밧줄!” “꽃!” “나무!” “새끼 쥐!” 하면 하나하나 알아듣습니다만, 이 그림책을 자주 펼쳐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 또한 스스로 이 그림책을 펼치는 일은 드뭅니다. 다만, 사자나 생쥐 꼬리를 가리키며 “꼬리!”라 할 때에는 잘 알아듣고, 요 며칠 사이 아이한테는 ‘꼬리’라는 낱말이 재미있는지 이 낱말을 곧잘 읊습니다.

 아이가 제 삶터에서 사자나 생쥐를 만나기란 힘들고, 나중에 시골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쥐 한 마리 만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흔하던 쥐마저 요즈음은 퍽 드문 목숨으로 바뀌었습니다. 귀엽다며 따로 키우는 몇 가지 개나 고양이를 빼놓고 여느 짐승을 도시나 시골 삶터에서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를 넉넉히 나눌 만하지 않고, 우리 자연 벗님을 살가이 담은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자연 벗님 살림살이와 한살이를 꾸밈없이 헤아릴 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도시 물질만능 문명 사회인 탓에 지식을 다루는 이야기책과 그림책만 넘치는지 모릅니다. 사람 또한 자연임을 느끼지 않는 사회인 까닭에 자연을 옳고 바르게 풀어내는 이야기책과 그림책이 제대로 사랑받기 힘드는지 모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서까지 처세를 다루고 경영을 밝히고 돈벌이를 말해야 팔립니다. 아름다운 삶과 착한 사람과 참된 넋을 다루거나 밝히거나 말하는 책인 시시하거나 지루하다고 여깁니다.

 애 엄마와 애 아빠가 이야기를 그때그때 새로 짜내어 읽어 줄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그때그때 늘 새롭게 읽어야 할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읽힐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2020년이 되고 2030년이 되어도 제리 핑크니 님 《사자와 생쥐》는 고이 목숨을 이을 수 있을는지, 우리 나라에서 이 그림책 넋을 깊이 되새기며 우리 땅과 사람한테 발맞춘 새로운 그림책 하나 그릴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4343.4.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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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
김경애 지음, 현진오 감수 / 수류산방.중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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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을 지킨 우리들은 어디를 지켜야 할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2] 김경애,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



 인천에는 인천대학교가 있습니다. 국립이 아닌 시립으로 꾸리는 대학교인데 예전에는 시립이 아닌 사립이었고,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 학교는 두 사람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곳이었습니다. 열 몇 해 앞서 이들 두 권력자 잘잘못을 다스리며 사립재단을 인천시가 거두어들였습니다만, 인천시는 끝없는 재개발과 새도시 만들기에 힘을 쏟아부으면서 대학교 자리까지 파내어 올봄에 송도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학교를 옮기는 가운데 인천대학교 둘레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은 거의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 둘레 골목동네는 아파트 재개발에 휩쓸립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큰나무 수백 그루를 파내어 이 나무들까지 송도로 옮기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도깨비집처럼 뒤숭숭한 인천대학교 건물이 되었고, 인천대학교 뒷문은 아예 쓰레기터가 되고 있는 판에, 나무들까지 파내어 간다먄 동네 모습이 더없이 볼품없이 되고 맙니다.

 언덕길이 있는 동네 언덕받이에 세운 스무 군데쯤 되는 학교들이기에, 선인재단 어느 학교 건물에 들어가서 동네를 휘 둘러보아도 온통 ‘내려다보는’ 모습입니다. 위로 우람하게 솟은 건물들이 텅텅 비며 을씨년스럽게 되니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 어떠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래도 동네 골골샅샅 봄맞이 꽃이 피고 꽃나무 새 가지가 나며 새잎이 움틉니다. 우람한 건물이 있든 없든 골목사람은 예나 이제나 조용하고 나즈막하게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인천대학교 벚꽃길은 사라지지만 도화2ㆍ3동 골목길은 그대로 있고, 빈터에 일구는 텃밭과 꽃그릇 가지런히 그러모은 손길은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높직하게 쌓아올린 학교 돌담 위쪽에서는 동네텃밭이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학교에서 동네 낮은 땅으로 내려와 두 다리로 천천히 거닐면 비로소 동네텃밭이 보이고, 동네텃밭 둘레에서 막 피어나고 있는 꽃봉우리 내음이 온몸으로 스며듭니다. 잘 갈아 놓은 텃밭마다 갖가지 푸성귀가 뿌리를 내리면서 곧 첫 싹을 틔우려 하는 한편, 차츰 지고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에 이은 다른 꽃들, 이를테면 매발톱이나 금낭화나 동백꽃 들이 조금씩 봉우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숨쉬는 동네이고 숨결 고른 동네이며 숨가쁘지 않은 동네입니다.


.. 정선 귤암리에 사는 토박이 최도순 씨는 “생태계 보전이다 생태 관광이다 하면서 정작 사람이 편안하게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굽이굽이 130리를 즐기던 옛길을 없애고 자동차로만 넓히고 있다. 그 길로 외지 자본가들이 먼저 달려와 펜션이니 모텔이니 찜질방이니 돈벌이 공사를 벌이는 것 아니냐”고 꼬집는다 … 바로 그때 상류에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뿌연 흙탕물이 흘러내려 왔다. 군에서 ‘운일암 반일암 국민 관광지 개발 사업’을 벌인다며 다리를 놓고, 정비 공사를 하는 것이라 했다. 이제 막 알을 낳은 감돌고기와 다른 민물고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  (85∼87, 191쪽)


 동네 골목집이 하나둘 헐린 자리에 곧바로 빌라가 올라서거나 주차장이 생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골목집 하나가 워낙 작기 때문입니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골목집이 많고, 조금 넓다 하여도 스무 평이 안 되는 집이 많습니다. 동네를 모조리 쓸어내야 비로소 아파트를 세울 수 있습니다. 동네를 모조리 쓸어내기 앞서는, 하나둘 헐린 집자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터 돌을 고르고 흙을 새로 쏟고 갈아 텃밭을 일굽니다. 이 텃밭이 몇 해를 갈 지 알 수 없어도 텃밭을 일굽니다. 이 텃밭 가장자리에서 몇 해를 살 지 몰라도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습니다. 매실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오동나무 수수꽃다리 엄나무 들을 심습니다.

 인천이라는 도심지에서만 자라는 나무는 없습니다. 인천이라는 터전에서만 살아 있는 풀이나 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 손길을 타고 자라는 나무와 풀과 꽃이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삼을 만한 푸나무는 아니요, 깊은 두메산골 깨끔한 터에서만 구경할 만한 푸나무 또한 아닙니다. 어디에나 흔하고 너른 푸나무입니다.

 개구리 같은 나무랄까요. 맹꽁이 같은 나무랄까요. 두꺼비 같은 나무랄까요. 도룡뇽 같은 나무랄까요. 이제 서울이고 부산이고 광주이고 어디에서고 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도룡뇽처럼 흔한 목숨붙이를 구경할 길이 없을 뿐더러 여느 시골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목숨붙이마냥, 어쩌면 매실나무 오동나무 수수꽃다리 또한 여느 땅에서는 자취를 감추는 나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수한 목숨이 설 자리를 빼앗기면서 나중에는 천연기념물이 되고, 이 천연기념물은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 둘레 고운 동무 하나 다시금 세상을 등지고 말았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로지 사람만 살아남고, 사람 가운데 힘-돈-이름 있는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좋은 책이기에 살아남는 책이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어야 살아남는 책이 됩니다. 좋은 영화이기에 오래도록 다시 보며 사랑받는 작품이 아니라 많이 팔려야 사랑받을 만한 영화가 됩니다.


.. 정작 제주도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관광 활성화를 명분으로 윗세오름에서 정상까지 삭도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백록담이 말라 가는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 전역의 지하수 고갈 현상도 심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골프장 탓이다. 2004년 한 해 지하수 사용량 1811만 9000톤 가운데 25퍼센트(446만 1000톤)를 제주도 내 14개 골프장에서 퍼내 썼다. 생수 회사인 ‘제주 삼다수’의 30만 9000톤보다 골프장 한 곳의 평균 사용량이 더 많았다. 2008년이면 골프장이 40곳으로 늘어난다 ..  (249, 250쪽)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이어싣던 ‘이 곳만은 지키자’ 꼭지를 그러모아 책 두 권이 나온 적 있는데, 이 신문과 책에서 다룬 ‘꼭 지켜야 할 이 땅 아름다운 곳’이 열두 해가 지난 뒤에는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돌아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모두 서른세 꼭지를 다루는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입니다. 이들 서른세 꼭지, 그러니까 서른세 군데 이 땅 아름다운 곳 가운데 예나 이제나 아름다이 건사하면서 아름다이 살아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애쓰는 분들 땀방울에 힘입어 조금 나아진 곳이 있다지만 어느 곳이나 한결같이 몸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몸앓이라기보다 돈앓이라 해야 옳지 싶습니다. 우리 나라에 돈이 없어서 ‘이 곳만은 지키자’를 못한다고 할 수 없거든요. 우리 나라에 참된 일꾼이 없기에 ‘이 곳만은 지키자’하고 자꾸 동떨어진다고 할 수 없거든요.

 자연 삶터뿐 아니라 사람 삶터를 아름답게 건사하는 데에 쓸 돈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은 우리들입니다. 자연 삶터뿐 아니라 사람 삶터를 아름답게 추스르는 데에 일할 사람이란 그지없이 많은 이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돈이 돈다이 쓰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일할 자리가 없습니다. 애먼 곳에 돈이 흘러넘치고 엉뚱한 곳에 사람들이 득시글합니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꿈을 꽃피우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더없이 드뭅니다.

 시인 김남주 님은 〈똥파리와 인간〉이라는 시에서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하는 이야기를 읊습니다. 이 이야기마따나 사람들은 돈이 많이 쌓인 서울에 무리지어 웅성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돈이 적게 쌓이거나 없다 싶은 작은도시나 시골에는 좀처럼 뿌리를 내리거나 깃들려 하지 않습니다. 김남주 님은 이 싯말에 이어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난한 자리에서 조용히 일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으나 몇몇 아름다운 분들만 조용히 일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 다름아닌 우리들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길과 삶을 알고 있으나 아름다운 길과 삶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아름다운 길과 삶하고는 어긋난 자리에서 아름다움보다 돈에 따라, 사랑스러움보다 힘에 따라, 믿음직스러움보다 이름에 따라 움직입니다.


.. 충청남도는 숲을 키우는 데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1억 원을 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정책의 초점은 관광 개발에 쏠린다. 2014년까지 같은 지역에서 추진되는 국제 관광지 개발 사업에는 그 100배인 7408억 원을 들인단다. 승언리, 중장리 일대 꽃지해수욕장 주변 115만 400여 평에 골프장, 호텔과 콘도, 워터파크를 저성하고 있다 ..  (262쪽)


 《이 곳만은 지키자》이든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든 우리가 우리 터전을 얼마나 더럽히거나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우리 스스로 무너뜨리는 우리 삶을 말합니다. 두 가지 책은 나란히 우리 넋과 얼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우리 매무새요 더없이 엉터리인 우리 몸짓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우리 몸가짐을 밝히는 책입니다.

 입으로는 국산을 외치지만 정작 국산 푸성귀가 자랄 땅이 없을 뿐 아니라 국산 푸성귀가 깨끗하게 자랄 터전이 안 됨을 살피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터전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란 몇몇 엉터리 정치꾼이나 개발업자인 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우리 터전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 밥그릇을 챙기는 우리들이고, 내 밥벌이를 키우는 우리들입니다. 느긋하게 걷지 못하고 넉넉하게 자전거를 타지 못하면서 자가용을 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 “천만 원이 넘어도 잡아만 달라고 주문하는 수요가 있는데 주민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보호 의식만 강요한들 지켜지겠습니까.” 주민들은 환경부와 지자체가 탁상공론과 책임 떠넘기기로 보호 구역 지정을 미루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산양과 야생 동물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  (353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한겨레신문에서는 다른 어느 신문에서도 하지 않은 좋은 기획을 선보이며 우리가 지키고 건사할 우리 아름다운 땅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이러한 마음을 이으며 우리 아름다운 땅을 알뜰살뜰 지키거나 건사하는 매무새를 어떻게 추슬러야 할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자연과 생태를 지키는 골프장이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데, 한겨레신문에서조차 골프 기사와 광고가 넘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살리는 재개발 정책이 아님이 뻔한데, 한겨레신문마저 아파트 기사와 광고가 넘칩니다. 비싼 자가용 시승기가 넘치고, 끝없는 소비물질주의를 북돋우는 기사와 광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좋은 기획 한두 가지란 말 그대로 좋은 기획이요, 좋은 기사 한두 가지란 말 그대로 좋은 기사입니다. 그런데 좋은 넋이나 얼이 한두 가지 기획과 기사로 그치고, 신문은 통째로 좋은 길하고는 벗어나 있다면 어떡하지요. 이곳은 지킨다 하지만 이곳 아닌 다른 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을 지키기조차 까마득한데 다른 곳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지킬 곳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국립공원을 지키면 되는지, 도립공원을 지키면 되는지 궁금합니다. 공원 아닌 자연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천연기념물 아닌 목숨붙이는 어찌해야 좋을는지 궁금합니다.

 미선나무가 애틋한 만큼 골목동네 개나리 한 그루가 애틋합니다. 금강제비꽃이 소담스러운 만큼 동네텃밭 한켠 도라지꽃이 소담스럽습니다. 우리가 지킬 우리 땅이란 어디이며, 우리가 건사할 우리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이웃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 뿌리내리는 고향이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4343.4.23.쇠.ㅎㄲㅅㄱ)


 ┌ 《이 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수류산방,2008)
 ├ 글 : 김경애
 └ 책값 :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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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책 하나를 추릴 수 있을까
 ― 지난 열 해 따스히 보듬은 140가지 책을 돌아보며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읽은 책 가운데 꼭 한 가지만을 추려서 지난 열 해에 걸쳐 이 책 하나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묻는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한 가지 책을 어떻게 추릴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동안 만나고 읽은 책을 들라고 하면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온누리에는 참으로 좋은 책이 아주 많은데, 이 좋은 많은 책들 가운데 꼭 한 가지만을 가장 좋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손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터는 1등만을 내세우거나 앞세웁니다. 2등조차 살피지 않을 뿐더러, 등수에 들지 않으면 아예 없는 사람 다루듯 합니다. 이는 책마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수에 드는 책들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히며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 책 = 좋은 책’처럼 여깁니다. 언론사들은 ‘지난날 베스트셀러 통계’는 내지만,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가슴에 아로새겨진 다 다른 아름다운 책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아름다운 책이라 할 때에는 이 책이 고작 10권만 팔린 책일 수 있고, 첫판 1000권을 가까스로 찍었으나 열 해 동안 1000권조차 안 팔리며 조용히 사라진 책일 수 있습니다. 1000만 사람 가슴을 울린 책 또한 아름답지만 1000사람도 아닌 열 사람 가슴을 울린 책 또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꼭 한 사람 가슴을 울린 책 또한 아름답습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설문받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열 해에 걸쳐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책을 묻고 있습니다. 저도 이 설문에서 세 가지 책을 골라서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는 수 없이 세 가지 책을 추렸습니다. 제가 추린 세 가지 책은 만화책과 글책과 사진책,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하나씩 적바림했습니다.

 먼저 만화책으로는 호연 님이 그린 《도자기》를 추렸고, 《도자기》를 추린 까닭을 “한국에서 나오는 만화책들은 거의 모두 일본 만화입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만화라 하여도 ‘한국 문화와 삶과 터전과 이야기’를 살뜰히 삭여내어 빚어낸 작품은 열손가락이 아닌 다섯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만큼 일본 만화에 젖어들거나 흉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만화쟁이 깜냥껏 당신 그림결을 이룬 분들마저 언제나 새로우면서 재미있고 멋진 작품을 일구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우리 만화 흐름에서 ‘호연’ 님은 당신이 배운 고고미술학을 바탕으로 도자기 하나와 얽힌 이야기를 살갑고 알차게 엮어서 보여줍니다. 우리네 만화 문화가 나아갈 좋은 길을 보여주는 작품이요, 이 작품 《도자기》 하나로도 뭉클함과 아름다움이란 어떠한가를 알려줍니다.” 하고 적었습니다.

 다음으로 글책으로는 이숙의 님이 쓴 《이 여자, 이숙의》를 추렸으며, 《이 여자, 이숙의》를 추린 까닭으로 “옳고 곧게 꾸리는 삶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을 지키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더없이 아름답고 곱게 갈무리한 책입니다. 주의주장이나 이념을 훌훌 넘어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마무리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미국땅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한테서만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마무리’를 들여다보면서 엿보며 배운다고 하는데, 바로 이 땅에서 그지없는 아름다움을 꽃피우면서 눈물과 웃음을 남긴 한 사람 발자국을 찾아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나온 책 가운데 저한테 가장 깊이 울린 책 하나를 꼽으라면 《이 여자, 이숙의》를 망설이지 않고 꼽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바라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갈무리하고프다면 이 책을 세 번쯤 읽으며 내 삶을 바꾸어 주면 됩니다.” 하고 적바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책으로는 김기찬 님이 찍은 《역전 풍경》을 추렸는데, 《골목 안 풍경》이 아닌 《역전 풍경》을 추린 까닭으로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 작품을 남긴 김기찬 님이 일군 또다른 사진 눈길이 《역전 풍경》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기차역인 서울역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어떻게 부대끼고 섞이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줍니다. 긴말과 군말 없이 사진 한 장으로 우리 마음밭에 이야기 한 자락이 촉촉히 젖어드는 손길을 건넵니다. 사진이란 어떻게 찍고, 사진이란 무엇을 담으며, 사진이란 누구와 만나는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하고 붙임말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문받기를 했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세 권으로 추린 책이 아닌 다른 수많은 책들이 서운하게 느낄밖에 없으니까요. 제 어설프고 어줍잖고 어리숙한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며 돌보아 준 그 많은 책들을 모르는 척 등돌릴 수 없으니까요. 해가 갈수록 지난날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반가운 책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2011년이나 2012년에 이 글을 다시 여민다면 이 목록에 새 책을 넣을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새로 맞이할 때마다 새삼스레 느끼는데, 한 해 한 해 새로운 좋은 책을 만나며 제 삶은 나날이 넉넉하게 거듭나고 곱게 다시 태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앞으로 열 해를 새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이동안에 또다시 새삼스레 만날 책들이 무엇이 있을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2010년 4월 20일 잣대로 지난 열 해에 걸쳐 저하고 복닥인 책들 가운데 제 둘레 이웃한테 즐거이 선물해 주고 있는 한편, 제 책꽂이에 곱다시 꽂혀 있는 책들을 가려서 책이름만 밝혀 봅니다. 이 140가지에 이르는 책들 이름을 밝히면서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면서 제 넋에 사랑과 믿음을 심은 고마운 분들 마음씀을 기리고 싶습니다. (4343.4.20.불.ㅎㄲㅅㄱ)
 





● 2009년 - 14가지
 《우애의 경제학》(가가와 도요히코 씀,그물코 펴냄)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숲속여우비 펴냄)
 《흐느끼는 낙타》(싼마오 씀,막내집게 펴냄)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필립 퍼키스 말,안목 펴냄)
 《아돌프에게 고한다 1∼5》(데즈카 오사무 그림,세미콜론 펴냄)
 《리틀 포레스트 2》(이가라시 다이스케 그림,세미콜론 펴냄)
 《민들레솜털》(오자와 마리 그림,북박스 펴냄)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요시다 아키미 그림,애니북스 펴냄)
 《여자의 식탁 1∼5》(시무라 시호코 씀,대원씨아이 펴냄)
 《지로 이야기 1∼3》(시모무라 고진 씀,양철북 펴냄)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글,달팽이 펴냄)
 《희망을 여행하라》(이혜영과 임영신 글,소나무 펴냄)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글,양철북 펴냄)
 《소꿉》(편해문 사진,고래가그랬어 펴냄)

● 2008년 - 12가지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 씀,달팽이 펴냄)
 《니사》(마저리 쇼스탁 씀,삼인 펴냄)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폴 콜먼 씀,그물코 펴냄)
 《도자기》(호연 그림,애니북스 펴냄)
 《페르세폴리스 2》(마르잔 사트라피 그림,새만화책 펴냄)
 《내 어머니 이야기 1》(김은성 그림,새만화책 펴냄)
 《PONG PONG 1∼3》(오자와 마리 그림,대원씨아이 펴냄)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씀,양철북 펴냄)
 《음주가무연구소》(니노미야 토모코 그림,애니북스 펴냄)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마틴 프로벤슨+앨리스 프로벤슨 그림,북뱅크 펴냄)
 《우리가 바꿀 수 있어》(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그림,보림 펴냄)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구와바라 시세이 사진,눈빛 펴냄)

● 2007년 - 9가지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 씀,달팽이 펴냄)
 《이 여자, 이숙의》(이숙의 씀,삼인 펴냄)
 《산다는 것의 의미》(고사명 씀,양철북 펴냄)
 《청개구리》(이금옥+박민의 글ㆍ그림,보리 펴냄)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최금희 씀,민들레 펴냄)
 《지는 꽃도 아름답다》(문영이 씀,달팽이 펴냄)
 《숲에서 크는 아이들》(이마이즈미 미네코+안네테 마이자 씀,파란자전거 펴냄)
 《잘 먹겠습니다》(요시다 도시미찌 씀,그물코 펴냄)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김정희 씀,문학의전당 펴냄)

● 2006년 - 11가지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모이치 구미코 씀,한림출판사 펴냄)
 《낫짱이 간다》(김송이 씀,보리 펴냄)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피우진 씀,삼인 펴냄)
 《나무소녀》(벤 마이켈슨 씀,양철북 펴냄)
 《청소녀 백과사전》(김욱+나오미양 글ㆍ그림,낮은산 펴냄)
 《백성백작》(후루노 다카오 씀,그물코 펴냄)
 《삶은 기적이다》(웬델 베리 씀,녹색평론사 펴냄)
 《들꽃 이야기 1》(박연 글ㆍ그림,허브 펴냄)
 《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오드리 설킬드 씀,마티 펴냄)
 《김영갑 1957∼2005》(김영갑 글ㆍ사진,다빈치 펴냄)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고시미즈 리에코 씀,산하 펴냄)

● 2005년 - 23가지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씀,양철북 펴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섬》(전민조 사진,눈빛 펴냄)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씀,야간비행 펴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조안 말루프 씀,아르고스 펴냄)
 《사진이란 무엇인가》(최민식 씀,현문서가 펴냄)
 《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모리스 드리용 씀,길벗어린이 펴냄)
 《나의 수채화 인생》(박정희 글ㆍ그림,미다스북스 펴냄)
 《바보 만들기》(존 테일러 개토 씀,민들레 펴냄)
 《해피투게더 1∼6》(가와쿠보 카오리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내 나이가 어때서?》(황안나 씀,샨티 펴냄)
 《재활용 아저씨 고마워요》(알리 미트구치 그림,풀빛 펴냄)
 《초록의 공명》(지율 씀,삼인 펴냄)
 《항생제 중독》(고와카 준이치 씀,시금치 펴냄)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기류 유미코 씀,샨티 펴냄)
 《푸른 하늘 클리닉 1∼8》(카루베 준코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사계절 생태놀이》(붉나무 글ㆍ그림,돌베개어린이 펴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씀,아름다운사람들 펴냄)
 《검지에 핀 꽃》(조혜영 씀,삶이보이는창 펴냄)
 《숲속의 꼬마 인디언》(루터 스탠딩 베어 씀,갈라파고스 펴냄)
 《아버지와 아들》(에리히 오저 플라우엔 그림,새만화책 펴냄)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이오덕 씀,삼인 펴냄)
 《무너미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이오덕 씀,한길사 펴냄)
 《도토리의 집 1∼7》(야마모토 오사무 그림,한울림 펴냄)

● 2004년 - 18가지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 로이 씀,녹색평론사 펴냄)
 《즐거운 불편》(후쿠오카 켄세이 씀,달팽이 펴냄)
 《제7의 인간》(존 버거+장 모르 글ㆍ사진,눈빛 펴냄)
 《행운아》(존 버거+장 모르 글ㆍ사진,눈빛 펴냄)
 《다시 야생으로》(어니스트 톰슨 시튼 씀,지호 펴냄)
 《곰아》(호시노 미치오 사진,진선출판사 펴냄)
 《요츠바랑! 1∼8》(아즈마 키요히코 그림,대원씨아이 펴냄)
 《희망은 있다》(페트라 켈리 씀,달팽이 펴냄)
 《잃어버린 풍경》(김기찬 사진,눈빛 펴냄)
 《추억의 학교》(조반니 모스카 씀,우리교육 펴냄)
 《1% 당신은 그 안에 있습니까?》(자이쓰 마사키 씀,창조문화 펴냄)
 《남쪽 손님》(오영진 그림,길찾기 펴냄)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정송희 그림,새만화책 펴냄)
 《미스터 레인보우 1∼2》(송채성 그림,시공사 펴냄)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임길택 씀,보리 펴냄)
 《곡마단 사람들》(오진령 사진,호미 펴냄)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이희재 그림,청년사 펴냄)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데이비드 스즈키+오이와 게이보 씀,나무와숲 펴냄)

● 2003년 - 17가지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
 《꼬마 인형》(가브리엘 벵상 그림,열린책들 펴냄)
 《로빙화》(중자오정 씀,양철북 펴냄)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모니카 도페르트 글ㆍ그림,동쪽나라)
 《마흔에 길을 나서다》(공선옥 씀,월간 말 펴냄)
 《한국의 일상 이야기》(에릭 비데+니코비 글ㆍ그림,눈빛 펴냄)
 《천천히 읽기를 권함》(야마무라 오사무 씀,샨티 펴냄)
 《어머니의 손수건》(이용남 사진,민중의소리 펴냄)
 《녹색세계사》(클라이브 폰팅 씀,그물코 펴냄)
 《기생수 1∼8》(히토시 이와키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우리 동네 사람들》(양해남 사진,연장통 펴냄)
 《코끼리를 쏘다》(조지 오웰 씀,실천문학사 펴냄)
 《현대 어린이문학》(우에노 료 씀,사계절 펴냄)
 《라다크 소년 뉴욕에 가다》(헬레나 노르베리-호지+스티븐 고어릭+존 페이지+메튜 운터베르거 글ㆍ그림,녹색평론사 펴냄)
 《골목안 풍경 6, 1972~2002》(김기찬 사진,눈빛 펴냄)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츠보이 사카에 씀,우리교육 펴냄)
 《슬픈 나막신》(권정생 씀,우리교육 펴냄)

● 2002년 - 15가지
 《역전 풍경》(김기찬 사진,눈빛 펴냄)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 씀,그물코 펴냄)
 《나무 위 나의 인생》(마거릿 D.로우먼,눌와 펴냄)
 《백 가지 친구 이야기》(이와타 겐자부로 그림,호미 펴냄)
 《종이 인간》(페르난도 알론소 그림,해나라 펴냄)
 《회색곰 왑의 삶》(어니스트 톰슨 시튼 씀,지호 펴냄)
 《빈민의 식탁 1∼5)》(마키 오츠보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에어리어88 1∼23》(신타니 카오루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산골 아이》(임길택 씀,보리 펴냄)
 《녹색 시민 구보 씨의 하루》(존 라이언+앨런 테인 더닝 씀,그물코 펴냄)
 《어린이의 권리》(레지오 에밀리아 시립 영유아센터 아이들 씀,다음세대 펴냄)
 《닥터 노구찌 1∼9》(토시유키 무츠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괜찮아》(고정욱+최호철,낮은산 펴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 씀,녹색평론사 펴냄)
 《우리 할머니》(오니시 히로미 그림,필북 펴냄)

● 2001년 - 13가지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 1∼10》(준코 카루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1∼13》(준코 카루베 그림,세주문화 펴냄)
 《내 마음속의 자전거 1∼13》(미야오 가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GREEN 1∼4》(니노미야 토모코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 씀,따님 펴냄)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호리 신이치로 씀,민들레 펴냄)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이오덕 씀,소년한길 펴냄)
 《취중진담 1∼3》(송채성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B급 좌파》(김규항 씀,야간비행 펴냄)
 《라스무스와 방랑자》(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씀,시공사 펴냄)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박정희 글ㆍ그림,한국방송출판 펴냄)
 《싸우는 아이》(손창섭 씀,우리교육 펴냄)
 《다르게 보는 아이들》(게르다 윤 씀,백의 펴냄)

● 2000년 - 8가지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야누스 코르착 씀,내일을여는책 펴냄)
 《블루백》(팀 윈튼 씀,눌와 펴냄)
 《토토로의 숲을 찾다》(요코가와 세쯔코 씀,이후 펴냄)
 《주명덕 초기 사진들》(주명덕 사진,시각 펴냄)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송두율 씀,한겨레신문사 펴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1∼7》(미야자키 하야오 그림,학산문화사 펴냄)
 《연변으로 간 아이들》(김지연 사진,눈빛 펴냄)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에버하르트 뫼비우스 씀,보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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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사랑 2010-04-24 22:44   좋아요 0 | URL
멋진 책들이네요 ^^
 
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살갑고 고운 사람들 살림집과 어깨동무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6] 노익상, 《가난한 이의 살림집》



- 책이름 : 가난한 이의 살림집
- 글ㆍ사진 : 노익상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10.1.20.)
- 책값 : 18000원


 (1) 가난한 이들 살림동네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은 언제나 사진쟁이와 글쟁이와 그림쟁이 들한테 ‘좋은 취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멸찬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사진감이 되거나 글감이 되거나 그림감이 된 적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벌써 열 몇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 예전에 대통령 뽑는 자리에 나왔던 이회창 님이 살던 서울 가회동 달삯 2000만 원짜리 빌라를 두고 사진감이나 글감이나 그림감으로 삼는 문화예술쟁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아파트 사진을 찍으러 다니거나 수십억 원까지는 아니어도 몇 억짜리 아파트를 골골샅샅 살피며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는 사람 또한 못 보았습니다. 아파트 발자취를 다룬 학술책이 더러 나오기는 했으나 겉보기로 돌아보는 논문일 뿐, 어떤 이야기를 뽑아내거나 얻어내는 곳으로 삼은 적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이름난 맛집이나 멋집이라는 틀거리로 다루기는 합니다. 서울 홍대라느니 테헤란길이라느니 명동길이라느니 하면서 도심지 사람 북적이는 길거리를 다루는 이야기는 꽤 많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치고 ㅅㅋ을 달거나 ㅋㅅ를 놓으면서 ‘무인경비 시스템’을 갖추는 데란 없습니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집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기 일쑤요, 가난한 이들 골목동네에서는 속옷 빨래조차 골목 담벼락에 줄을 드리워 해바라기를 하기 마련입니다. 아무 아파트나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이내 지킴이 할배가 달려와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하고 팔뚝을 잡아끌겠지요. 중국에서 사진을 함부로 찍다가는 공안한테 붙잡힌다고 하는데, 중국이 아닌 한국땅 아파트마을에서도 사진을 함부로 찍다가는 아파트 지킴이한테 붙들려 갑니다. 그러나 골목동네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들 가운데 골목사람한테 붙들려 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란 없습니다. 집살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난한 이들 살림동네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속옷 고쟁이까지 송두리째 내보이는 가난한 이들 살림집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제 살림살이를 사진으로 담기 어렵습니다. 먼저 느긋하게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싼 사진기나 장비를 장만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서 뽑을 돈이 없습니다. 굳이 제 살림동네와 살림집을 사진으로 찍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 살림동네나 살림집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다루며 그림으로 그려서 보이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지 않은 동네에서 가난하지 않은 살림을 꾸리는’ 이들입니다. 똑딱이 사진기이든 값싼 캠코더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사진장비를 갖추면서 살아가는 골목동네 사람은 드뭅니다.

 가난, 가난, 가난 ……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자니 더없이 멋쩍습니다만, 가난이란 잘못이 아니고 허물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이 아니고 창피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딱히 가난이라는 낱말을 들먹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다들 똑같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꾸자꾸 가난을 들먹이면서 ‘가난하다는 골목동네 사람들 삶’을 일컫거나 빗대곤 합니다.

 디제이디오시 노래 〈삐걱삐걱〉을 들으면 “몇 십 억이 애들 껌값인가요. 그중에 백만 원만 우리 줄 생각 없나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난이 어쩌느니 저쩌느니 하기 앞서 돈이 있는 이들이 당신들 수십 수백 수천 억 원에서 백만 원을 덜어 나누어 주면 될 노릇입니다. 보증금 30만 원 달삯 6만 5천 원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장기방 여인숙에서 보증금 없이 15만 원에 살아가는 이들한테는 한 해 백만 원이라는 돈만 하여도 아주 어마어마합니다. 도시미화이니 관광개발이니 하면서 도심지에서 바닥돌을 갈고 무엇무엇을 하느라 수십 수백 억 원을 아주 껌값처럼 쓰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 달삯을 얼마쯤 보태어 준다면 도시는 저절로 깨끗해지며 도시에서 가 볼 만한 곳은 자연스레 늘어납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도시에서 왜 아파트를 사진감으로 삼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같은 아파트일지라도 5층짜리 옛날 아파트는 아파트로 치지 않는데다가 꾀죄죄하다고 보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아파트숲 사람들이라고 해서 ‘살가운 이야기’가 없을 턱이 없는데, 왜 아파트숲에서 조곤조곤 올망졸망 오순도순 살 섞고 부대끼는 이야기를 엮어내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당신들 삶자리에서는 사진과 글과 그림을 엮어내지 못하면서, 마치 인도 순례를 하고 티벳 순례를 하듯이 ‘가난한 사람들 골목동네’로 출사나 취재를 나오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누구나 저마다 살고 있는 터전을 아끼고 사랑할 노릇인데, 시설 좋고 문화마당 많다는 아파트와 도심지 한복판에서 굳이 도시 변두리 골목길로 다리품을 팔면서 취재를 다니고 출사를 나오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산이 좋으면 산에서 살면 될 텐데, 산에서 안 살면서 산으로 자가용을 몰고 찾아가거나 기차나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곳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사랑스러운 곳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연이나 전원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껴 자연이나 전원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면, 아파트에서 살 노릇이 아니라 자연이나 전원에서 살 노릇입니다. 자연이나 전원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이나 전원을 사진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사진이 태어날 테니까요. 제주 오름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김영갑 님이 스스로 제주 오름으로 녹아들면서 이곳에서 살아내는 가운데 사진을 담았듯이 말입니다.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준다든지 골목동네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나눈다든지 골목동네 터전을 그림으로 그려 펼친다든지 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썩 반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골목동네 사람(정주민)이 아닌 구경꾼(관광객)처럼 어쩌다 한두 번 찾아와 한두 시간 후다닥 사진 찍고 낼름 내빼기 때문입니다. 자연 사진을 찍더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스란히 담는 한편, 새벽 아침 낮 저녁 밤을 고루 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살림동네나 살림집인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자고 한다면, 이때에도 마땅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스란히 담는 한편, 새벽 아침 낮 저녁 밤을 골고루 담아야 합니다. 맑은 날 흐린 날 비오는 날 눈오는 날 안개 낀 날을 찬찬히 담아야 합니다. 안개 서린 소나무숲만 그윽하겠습니까. 바다안개 낀 인천골목길 또한 그윽합니다.

 스튜디오에서 만듦사진을 일구거나 모델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네들 사진쟁이 살림살이하고 스튜디오 얼거리하고 한동아리입니다. 스스로 만듦사진이나 모델사진 얼거리와 같은 삶을 꾸립니다. 다큐사진을 한다고 말하려면 스스로 다큐사진 주제가 되는 터전에서 이곳 사람들하고 복닥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는 가운데 나오는 사진이고, 살아가기 때문에 찍는 사진이며, 살아가는 그대로 보여주거나 나누는 사진입니다.

 가난한 사람 살림집을 사진으로 담고자 한다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어야 하고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살림집을 얻어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일하면서 가난하게 나누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사진이 아니라, 땅에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찍는 다큐사진입니다. 먼발치에서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사진이 아니라, 곁에서 손 마주잡으면서 담는 다큐사진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살아가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스며드는 다큐사진입니다. 같이 일하고 같이 놀면서 어우러지는 결이 꾸밈없이 녹아드는 다큐사진입니다.


 (2) 노익상 님과 다큐사진책 《가난한 이의 살림집》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로 일하는 노익상 님 책 《가난한 이의 살림집》을 읽었습니다. 책 머리말에서 노익상 님은 “물론 이런 집들에 대한 연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 회사의 도움을 받아 낸 《한국의 주거 민속지》나 민속박물관에서 학예연구로 조사한 민가의 기초조사들이 있다. 이 책들은 편중된 연구와 발표에서 그나마 가뭄에 단비처럼 여겨지는 귀한 연구서들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돌려 읽으며 무릎을 치고 감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렵고 학술적이었다. 우리 이웃들에게 섞여 들어가 가난한 이들의 안타까웠던 현실을 함께 공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게 아쉬움이었다(8쪽).”고 밝힙니다. 가난한 사람들 눈높이에서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길어올리는 사람들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가난한 이의 살림집》을 썼다고 합니다.

 노익상 님 말마따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느 살림집을 학문으로 다룬 책은 몹시 드뭅니다. 나라나 기관이나 큰 회사에서 돈을 받아 학술논문을 내는 일은 더러 있기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요모조모 깊이 살피고 어깨동무하며 ‘이웃사촌’으로서 이야기를 엮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살림동네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당신 삶을 알알이 담아내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 이는 밀쳐내고, 가르며, 하대를 일삼았던 오래된 상처였다. 쌀밥이 아닌 조 따위로 제사상을 차리는 ‘천한 것’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었다는 말에 이르러선, 금수강산 맑은 물이 새롭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농악은) 쌀밥 농사에서만 가능한 놀이였고 잔치였던 셈이었다. 조나 수수로 부꾸미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백설기, 송편과 같은 떡을 만들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는 이를 준엄히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전통마을에서 치루는 세시행사는 밭농사를 중심에 두고 벌이는 게 아니라, 바로 논농사를 맘에 두고 즐기는 전통마을만의, 그 공동체에 순응하는 사람들만의 주류 행사였음을 그들을 만나 가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  (74쪽)


 《가난한 이의 살림집》이라는 책은 사진쟁이 노익상 님이 만난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러나 노익상 님이 만난 사람들 살림집 이야기를 담았다기보다는 노익상 님 스스로 살아내지 못했으며 살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다가 마주해 본 적이 없던 삶자락을 귀동냥으로 얻어들으면서 엮은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노익상 님은 틀림없이 가난한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고 여러 날 함께 어울리면서 바야흐로 깨닫거나 ‘처음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한 살림집에서 마주하기 앞서까지는 이들이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아가는지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네 번 잇달아 들은 끝에 아주 조금씩 알아듣습니다. 한 해가 흐르고 두 해가 지나며 세 해 네 해가 흐른 끝에 비로소 살짝 알아차립니다.

 책을 읽는 동안 자꾸 끊깁니다. 내처 읽지 못하고 자주 덮습니다. 노익상 님은 나라안에 손꼽히는 빼어난 다큐멘터리 사진쟁이입니다만, 이 책 《가난한 이의 살림집》 하나는 덜 여물었고 덜 무르익었으며 덜 고개숙였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가난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만큼,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적바림하는데다가 때로는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노익상 님 또한 어쩔 수 없는 구경하는 사진쟁이일까요. 노익상 님한테 길손이나 사진손 같은 자리가 아닌 동네이웃이나 마을이웃 같은 자리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일까요.


.. 교과서에 실린 이름 자체도 철수야! 영희야! 하고 부르며 논다는 사실이, 산간의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아이들에겐 제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논리밖에는 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이기도 했다. 더욱이 당시 외딴집이나 화전촌의 아이들에겐 ‘논다’는 말이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만큼, 제 아비어미를 도와야 겨우 호구를 지탱하는 절박한 노동의 현실이었음을 감안할 때, ‘철수야 영희야’는 이러나저러나 아이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아픈 바늘 끝이었던 것이다 ..  (126쪽)


 저는 중학생이 되어 신문을 읽기 앞서까지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그토록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인 줄 몰랐습니다. 중학생 세 해를 거치고 고등학생 세 해를 거치는 동안 제 동무들 살림동네가 나라안에서 손꼽히도록 밑바닥 살림동네인 줄 몰랐습니다. 다른 도시 사람들이 인천 만석동과 화수동을 그토록 가난뱅이 동네로 바라보는 줄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며 처음 알았고, 인천사람 스스로 인천 골목동네를 제대로 모를 뿐더러, 인천 바깥사람은 인천 골목동네를 가엾고 딱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음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다닌 ㅅ국민학교는 이웃한 ㅅ국민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이 몰린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두 ㅅ국민학교이지만 학급 숫자이며 살아가는 집이며 아이들 부모 신분이며 하늘땅처럼 벌어져 있었습니다.

 인천 만석동과 화수동에는 만석부두와 화수부두 품팔이 일꾼들 살림집이 ‘게딱지처럼 촘촘하게’ 붙어 있습니다. 노동운동 한다는 사람은 모두 아는 동일방직이라는 공장은 인천 만석동에 있습니다. 여공한테 똥물을 뒤집어씌운 자리는 골목동네 사람들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입니다. 여공들은 저한테 동네 누나이거나 이모이거나 고모인 분들이요, 제 동무한테도 동네 누나이거나 이모이거나 고모인 분들입니다. 불쌍하게 바라본다면 하염없이 불쌍할 테지만, 동네사람으로서 바라보기에는 불쌍하고 아니고가 아닌 그예 좋은 동무이고 이웃이고 누나이고 어머니이고 아주머니인 사람들입니다.


.. 만석동 막살이촌이나 여인숙 고을을 다녀 보면서도 든 생각이지만 하나같이 그 집과 방들은 어른이나 가족이 들어가 살았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아이들 장난감 집처럼 오밀조밀 작고, 심지어 앙증맞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그림을 보면서도 아이들이 저 집에 들어가 숨기도 하고 논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볕이 들지 않아 꿉꿉하기만 한 좁고 어두운 골목길은, 아이들에겐 호기심 많은 미로로 비치기에 충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당장 편을 갈라 숨바꼭질하기에 좋고, 작고 여린 몸을 숨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인다. 특히 그림에서처럼 허리를 구부려야 겨우 운신할 만큼 낮은 다락방을 보면 나는 벌써 가슴이 뛴다. 거기에 숨어 들어가 제 새가슴을 한껏 부풀리며 재미지게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막살이집들이 현실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었으면 그이들이 처음 정착하여 일터로 나갔던 엄혹한 살림집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  (262쪽)


 《가난한 이의 살림집》이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여러모로 반갑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습니다. 가난이라는 잣대가 무엇일까 궁금했고 걱정스러웠습니다. 가난하면 못사는 살림인가 궁금했고 걱정스러웠으며, 가난하지 않으면서 슬프고 괴로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살림집을 바라보는 눈매가 ‘가난인가 아닌가’이니 두려웠습니다. 그저 ‘여느 살림집’이요 ‘이웃 살림집’이며 ‘도시 골목 살림집’이나 ‘시골 고샅 살림집’으로 바라보면 넉넉하지 않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느 살림집”이라 하거나 “살림집”이라고만 해도 넉넉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골목동네 살림집이든 이웃사람 살아가는 골목동네 살림집이든 누구네가 더 가난하거나 더 가멸차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마당 넓고 돈 많은 집이 있고, 설핏 보아도 루핑에 차바퀴를 얹어 비가림을 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에서 살아가는 동네사람이고 동네이웃이며 골목사람이고 골목이웃입니다. 한결같은 이웃이고 똑같이 고운 목숨 꾸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두 해에 뚝딱 하고 해치우듯 엮은 《가난한 이의 살림집》이 아니라 한다면 이와 같은 대목을 곰곰이 살펴야 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살림집 사진들은 거의 모두 ‘추운 겨울 추운 모습’인데, 가난한 이 살림집이든 가멸찬 이 살림집이든 이 땅에 찾아드는 철과 날씨에 따라 다 다른 살림새를 고이 담을 수 있어야 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더욱이 만석동 쪽방골목에 나무 한 그루 없다는 대목에서는 쓴웃음이 납니다. 만석동 쪽방골목에 참말 나무 한 그루 없는지요? 이곳 골목이웃이 가꾸는 꽃그릇에서 피어나는 꽃과 푸성귀는 그토록 초라해 보이기만 하는지요? 바깥 구경꾼 눈에는 ‘처연’하거나 ‘병약’할는지 몰라도, 이 동네에서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푸른나무’요 ‘푸른잎’입니다.


.. 또 다른 그림은 가까이에 헐벗은 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막살이집들이 그려져 있다. 잎 진 앙상한 나무는 묘하게 뒤편 집들과 어울리며 그래도 살아 있음을 처연히 내세우고 있다. 만석동에 그런 나무는 없었지만 벽에 그린 꽃과 나무는 여럿 보았다. 강한 원색 페인트로 그려 넣거나, 미장으로 마감한 담벼락에 쇠못으로 긁어 그린 것이었다. 추레하고 볼품없는 바탕에 빼어난 선과 점으로 이어나간 그림은, 어느새 큰 면이 되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 인천 만석동이나 서울 거여동 막살이촌을 다닐 때만 해도 관목으로 피는 꽃나무를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그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의 병약해 보였던 화초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어서 우선 반가웠다 ..  (272, 283쪽)


 외주물집이든 미관주택이든 막살이집이든 하고 살림집 갈래를 나누는 뜻과 값이 없지 않습니다. 학자님들이 알뜰살뜰 나누어 놓지 못하는 살림집 갈래를 차근차근 살피면서 올바로 갈무리하는 일이란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은 당신들 살림집을 이렇게 외주물집이라느니 미관주택이라느니 막살이집이라느니 하고 나눌는지요? 가난한 살림집 식구들 눈높이에서도 이렇게 나누는 살림집 갈래가 올바르다고 할 만하지요? ‘my sweet room’이라는 글씨를 떠서 커텐으로 삼기도 하는 골목사람들 막살이집이라면 그저 가난한 살림집이라는 틀에 뭉뚱그리거나 때려넣어도 괜찮은지요?


.. 하지만 철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이 땅에서 살며 사랑한 이들에게 그것은 정겹고 평화로운 풍경일 수 있으나, 가까운 일본이나 서구로 유학을 하거나 한 번이라도 구경을 해 본 이들에게 그것은 제법 성가신 풍경으로 비칠 수 있는 미개하고 낙후된 모습이었다 … 아이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기고 도심 속 문화와 생활로 섞여 드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게 비쳐진 일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도심에 살면서도 결코 합류할 수 없는 주변부적 삶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남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시민아파트는 체념 어린 미래가 익숙하게 녹아 있는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이 또한 시민아파트가 지닌 본질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었는데, 우리 근현대사의 적나라한 자화상이었던 체념이, 가난한 이의 살림집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  (290, 356쪽)


 날이면 날마다 시끄러운 기차와 전철 소리를 듣고 컸어도 우리들한테는 평화로운 터전이었고 보금자리였습니다. 공장에서 매연과 석탄가루와 쇳가루 따위가 끝없이 날려 빨래를 못 널게 할지라도 우리들한테는 좋은 삶터였고 둥지였습니다. 그 좁다는 골목길에서 공차기를 하고 공치기를 했습니다. 야구방망이 없어도 부러진 각목을 주워서 방망이로 삼고, 철길가 돌멩이로 공을 삼았습니다. 굴러다니는 우유곽에 돌 하나 넣어 공으로 여기며 공차기를 했고, 갖가지 돌치기와 돌놀이를 즐겼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아름답거나 싱그러운 지난날이거나 오늘날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은 지난날대로 아픔이 있는 가운데 기쁨이 있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웃음이 있는 가운데 울음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집에는 빛과 그늘이 함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삶터에는 웃음과 눈물이 나란히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동네에는 생채기와 주름살이 아롱져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우리 삶이고 우리 발자국이요 우리 이야기입니다. 집에 따로 뒷간이 없어 주인집 눈치를 보며 똥오줌을 누는 삯집 사람들 이야기가 있고, 주인집에조차 뒷간이 없고 동네에 공동뒷간이 있을 뿐이라 줄을 서서 아랫배를 누르며 견디어야 하는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가멸찬 이하고 같은 시간을 일해도 같은 일삯을 받지 못했을 뿐더러 가멸찬 이와 견주어 더 오래 힘겨이 일해도 훨씬 적은 일삯을 가까스로 받으며 목숨을 잇고 살림을 꾸리며 딸아들을 보듬었습니다. 이런 살림살이가 막살이집이든 외주물집이든 미관주택이든 무엇이든, 저마다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믿음직하고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노익상 님 다음번 다큐사진에서는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살이와 여느 이야기를 여느 자리에서 좀더 여느 사람다운 목소리와 결과 높낮이로 수수하게 들려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막살이집 식구들이 제 살림집과 살림동네에서 사진 한 장 찍으려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어디에서 어느 때에 담을까를 한번 곰곰이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4343.4.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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