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지렁이


 음성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가서 돌아오는 길에 나비 한 마리를 칠 뻔했다. 2·7 날에 음성 읍내에서 장날이 열리기에 이날에 맞추어 나들이를 하면서 수박과 무우와 애호박 들을 장만하고 퍽 무거운 가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찻길 구석자리에 앉아 하늘하늘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보았는데, 자전거로 달리며 거의 1미터 앞에서 알아챘기 때문에 찻길 구석자리에서 그냥 달렸으면 나비 몸통을 고스란히 짓밟았겠지. 뒷거울로 뒤따르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이 손잡이를 틀어 아슬아슬 나비 옆 3센티미터를 비꼈다.

 그러구러 한숨을 돌리며 저수지 옆길을 달리는데, 어제 이 길을 달리며 지렁이 한 마리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죽은 지렁이라 하지만 나까지 주검을 밟고 지나가기는 싫어 살금살금 살피며 달리는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지렁이 주검은 아무런 자국이 남아 있지 않다. 지난밤에 비가 잔뜩 퍼붓기도 했지만, 비 때문에 지렁이 주검이 쓸려가지 않았다. 비 때문에 지렁이가 차에 밟히고 거듭 밟혀 묵사발이 된 모습이 많이 씻겼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제만 해도 지렁이가 처음 밟혀서 죽은 모습이 통통하게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짓이겨진 자국이 보였기 때문.

 가파른 언덕을 낑낑대며 오르는 동안 길가에서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한 마리 더 본다. 아까 나비는 자전거가 달리는 찻길 구석자리 흰줄에 앉아 있었고, 이번 나비는 찻길 한복판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 이번 나비는 내가 칠 일이 없으나, 자동차들이 달리며 ‘스스로 친 줄조차 모르는’ 채 치여 죽을까 걱정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그나마 코앞에서 알아채는데,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길가에 사마귀가 있는지 귀뚜라미가 있는지 지렁이가 있는지 나비나 나방 애벌레가 볼볼볼 기고 있는지, 무당벌레나 딱정벌레가 뜀밤질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챌 수 없는 자동차이다. 자전거 아닌 두 다리로 걷는다면 이 모든 작은 목숨을 낱낱이 알아채며 하나하나한테 인사할 수 있겠지. 줄줄줄 기어가는 개미한테도 인사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개미까지 알아채지는 못한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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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월에 나온 책이 드디어 배본이 되었구나. 

ㅜ.ㅠ 

왜 이렇게 오래오래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래도 겨우 나오고, 가까스로 배본이 되니 한숨을 돌리며 

고맙다고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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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7-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파란놀 2010-07-22 17:59   좋아요 0 | URL
(__)

고맙습니다.
이 책이 제대로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악동들의 주머니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최정인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눈물과 웃음이 없다면 학교일 수 없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1] 하이타니 겐지로, 《악동들의 주머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자니 팔뚝이 근지러워 비비다가 모기 한 마리를 잡습니다. 모기는 제 팔뚝에 앉아 피를 빨아먹으려다가 그만 으스러지고 맙니다.

 며칠 앞서부터 모기가 하나둘 보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때면 모기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끔찍했는데, 올해에는 좀처럼 모기 구경이 어려웠습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으니 모기라는 녀석이 퍽 늦게 깨어나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제 저녁이나 그제 저녁에는 달빛이 무척 밝았습니다. 보름달이 아닌 반달이었으나 집안으로 달빛이 곱다시 비쳐들더군요. 보름달 빛이었다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았겠구나 싶습니다. 반달 빛으로는 책을 읽기에는 모자라지만, 길가에 켜 놓는 등불만큼은 밝다고 느낍니다.

 우리 세 식구 깃든 산골마을에는 둘레 길가에 따로 등불이 없으니까 오로지 달빛에 기댑니다. 따로 손전등을 켜고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어두운 길에서는 얼마쯤 기다리고 있으면 밤눈이 트여 다 보이기에 굳이 손전등이 없어도 됩니다. 손전등을 켜면 오히려 잘 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지낼 때에도 달은 늘 올려다보기는 했으나,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달빛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깊은 밤에도 길마다 등불이 환히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골목이란 어디에도 없기에, 그나마 좀 어둡겠다 싶으면 자동차 불빛이 들이치면서 어두움다운 어두움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밝은 낮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밝은가를 느끼지 못하는 도시요, 어두울 저녁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어두워야 하는가를 느낄 수 없는 도시인 셈입니다.

 요즈음 같은 찜통 더위에는 그야말로 푹푹 찌는 더위를 느껴야 할 텐데, 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후줄근하게 땀을 쏟으며 더위를 느낄 테지만,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낮게 맞춘 에어컨 때문에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도 춥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시골이라 해서 이런 날씨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도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다 보니, 건물 안팎 느낌이 지나치게 다릅니다. 시골에서 차를 몰 때에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면 될 텐데, 시골에서 차를 몰며 창문을 열고 알맞게 달리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우리 스스로 살짝이나마 생각하는 기운이 남아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에어컨을 많이 쓴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름날 ‘더위를 식히려’고 도시사람이 찾아가던 곳은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관공서조차 에어컨을 들여놓고 펑펑 틀어대지 못했어요. 고작 1980년대를 헤아리고 1970년대를 더듬자면, 선풍기 한 대 들여놓는 일마저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1994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동안 대학교를 다녔는데, 이무렵 인천에서 서울로 전철을 타고 오가면서 ‘에어컨 달린 국철’은 타 보지 못했습니다. 이무렵 국철은 ‘선풍기 달린 국철’이었고, 선풍기조차 안 달려 있어 창문을 여는 국철이 수두룩했고, 선풍기가 달려 있어도 망가져 있거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제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이무렵 서울 지하철은 모두 에어컨이 달려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부채로 더위를 식혔고, 등물을 한다든지 모시옷을 입는다든지 제철 열매를 먹는다든지 하면서 땀을 식히려 했습니다. 모두모두 선풍기나 에어컨을 쓰는 삶이 아닌, 거의 모두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 더위를 받아들이는 삶이 우리 삶이었습니다. 지난날에도 오늘날처럼 도시가 있었으나, 도시라 할지라도 전기이며 물질이며 되도록 쓰지 않는 가운데 서로서로 엇비슷하게 가난하면서 오붓한 살림살이였습니다.


.. “이 아이들은 1학년 동생들이 정성껏 기르는 화분을 발로 차서 깨뜨리고 지나갔어요. 대체 이 아이들한테도 따뜻한 마음이 있을까요?” 1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때는 어벙이가 어쩌다 화분에 발이 걸려 화분을 깨뜨려 버렸어. 어벙이 혼자 야단맞으면 너무 불쌍하니까 우리도 같이 화분을 찬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 해 선생한테 변명하는 녀석은 인간쓰레기야.’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저희 반 아이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돈을 빼앗은 적이 있어요. 그 아이는 워낙 성격이 소심해 그 뒤로는 겁이 나서 학교에도 잘 나오지 못할 정도라고요.” 5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 자식은 집에서 몰래 돈을 갖고 나와 아이들한테 한턱 쓰고는 그 아이들을 자기 부하처럼 부려먹는 나쁜 놈이란 말야. 그래서 우리가 대신 벌을 준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해. 선생한테 변명을 하면 그 자식이랑 똑같아져 버리니까.’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  (15∼16쪽)


 여름날 흙길을 걸어가며 느끼는 더위하고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을 걸으며 느끼는 더위는 사뭇 다릅니다. 숲길을 거닐 때 느끼는 더위 또한 크게 다릅니다. 더 많은 돈과 끝없는 경제개발을 바라면서 온 나라가 도시로 바뀌고 갖가지 회사가 생겨납니다. 농사지을 터전은 줄고, 농사짓겠다는 사람 또한 줄며, 회사일 하겠다는 사람이나 셈틀 자판 만지작거리겠다는 사람은 늡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시험 공부만을 시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참다운 환경 공부를 시키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라든지 기후변화 같은 낱말을 가르치고, 이러한 환경 문제를 지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정작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풀어낼 길을 우리 삶에서 우리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찾아 고치거나 다독여야 할는지를 일깨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모조리 부자가 되어 ‘더 많이 벌어들인 돈’으로 ‘생태에너지’를 만들거나 ‘환경 지키기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우리 터전이 나아질 수 없습니다만, 학교에서 이러한 틀거리를 올곧게 가르치거나 받아들이는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농업고등학교’는 몇 군데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아도, 농업고등학교라 해서 농사꾼 되는 길을 가르친 학교는 드물었습니다. 시골학교조차 농사꾼을 키우는 배움마당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온통 도시로 나아가도록 내몰고,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도록 몰아쳤을 뿐입니다.

 사람들 누구나 몸으로 내 삶을 느끼거나 헤아리며 내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찾도록 이끄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라 할지라도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 되는 길로 나아가지, 대안학교 가운데 농사꾼을 말하거나 농사꾼으로 가르치는 곳이 몇 군데 있을까요. 당신 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면서 ‘우리 아이는 흙과 물과 바람과 벌레와 풀을 사랑하는 농사꾼이 되면 좋겠어요’ 하고 꿈꾸는 어버이는 있기나 있는지요. 아니, 어버이부터 스스로 농사꾼이 되고자 꿈꾸기는 하는지요.


.. 수수깡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수수깡의 아버지는 공해병을 앓았지만 공해병 환자로 인정받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공해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지 않은 탓에 보상도 전혀 받지 못했다. 수수깡은 키가 작고 야윈 것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너는 정말 효녀구나.” 수수깡은 엄마한테 이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수수깡은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먹을 것이 생기면 반은 자기가 먹고 반은 반드시 집에 가져가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  (17∼18쪽)


 우리 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살아가면서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찾는 가운데, 사람을 사귀고 문화와 예술을 누리는 한편, 보금자리를 빌라나 아파트로 마련하는 도시라고 하는 터전입니다. 이러한 도시인 탓에 도시 학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에 알맞춤한 지식을 베풀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우리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목숨 하나 곱게 선물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학교에서 익히고 배우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어야지, 돈만 잘 번다거나 이름값만 드높인다거나 권력을 움켜쥔다거나 해서 무슨 즐거움이나 보람이 있을는지요. 다 같이 물을 사다 마시는 도시 삶터가 아닌, 모두 다 물을 ‘흐르는 냇물에서 얻어 마시는’ 시골 삶터로 거듭날 수 없을는지요.

 학교는 언제까지 모든 아이들한테 지식조각만 쑤셔넣는 감옥소 같은 데로 남아 있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학교는 왜 모든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몇 가지 권장도서만 읽히며 아이들 넋과 얼을 짓누르는 감옥소 노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학교는 이름 그대로 ‘배우는 터전’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 공부는 못 하지만 쓸모없지는 않아.” 다보가 말했다. “공부 못 하는 게 반을 욕먹이는 짓이냐? 말도 안 돼.” 오탸양도 맞장구를 쳤다. “선생한테 알랑방구나 뀌고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고 만날 낑낑대기나 하지.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식이 큰소리치기는. 그런 자식이야말로 쓸모없는 인간 아니냐? 바보, 머저리 아니냐고!” 세이조는 화가 점점 더 치미는 모양이었다. “가바시마 선생님은 우리를 나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겠지?” ..  (31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짤막한 어린이책 《악동들의 주머니》라는 작품을 읽으면, 1970년대 일본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복닥이는 삶이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아이들이라면 겪기 힘들 만한 삶이요, 2010년대 한국땅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느끼기 어려운 삶이 아니랴 싶은데, 이웃나라 지난날 삶이든 이웃나라 가난한 마을 아이들 삶이든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이 마주할 법한 사람내음 묻어나는 삶일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놓인 자리와 살아가는 자리는 틀림없이 다르지만, 학교가 학교답지 못한 곳이라면 사회가 사회답지 못할 뿐더러 사람들이 사람들답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던져 놓는다고 아이들이 온갖 지식을 잘 받아들여 시험 잘 치르는 아이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맡겨 놓고 돈벌이를 하는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다이 꾸리는 삶이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어버이 스스로 당신 살림터와 마을에서 언제나 아이들하고 오붓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굳이 학교라는 데에 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며 슬기롭게 자라날 수 있는 배움마당을 늘 베풀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참다이 배우고 올바로 배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지 않다면 학교는 감옥소에 머물 테니까요. 이렇게 할 수 없다면 학교는 감옥소 노릇만 알뜰히 할 테니까요. 생김새도 감옥소이고, 아이들한테 붙이는 이름(번호) 또한 감옥소다우며, 아이들한테 시키는 공부 또한 감옥소 얼거리입니다. 하루 내내 시멘트 교실에 가두어 놓은 채 바깥바람 쐴 겨를조차 주지 않기 일쑤인 학교 아닙니까.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앎과 슬기를 나누는 열린 터전이 아닌, 교사가 학생한테 온갖 지식을 쑤셔박는 외곬 늪이 아닙니까. 아이 하나하나를 골고루 헤아리는 학교를 본 적이란 없습니다. 아이가 서른이든 예순이든, 서른 아이이든 예순 아이이든 저마다 다른 삶이고 목숨이며 넋입니다. 이 다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아름다운 일꾼이 되고 살림꾼이 되며 어른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할머니는 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었다. 그런데 음식을 모두 열 개씩 샀기 때문에 종류마다 하나씩 남았다. “할머니, 그건 할머니 아들 몫이야?” “오냐.” 할머니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 다음에 할머니 아들이 외국에서 돌아오면 꼭 같이 살아야 돼요.” 하고 도메코가 말했다. “오래오래.” 세이조도 말했다. “아아아아, 아아, 아아…….” “오냐오냐.” ..  (136쪽)


 《악동들의 주머니》에 나오는 ‘악동’들은 교사가 붙여 준 이름대로 ‘악동’입니다. 이 악동들은 저희 스스로라든지 마을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착한 ‘아이’입니다.

 이 나라 숱한 제도권학교는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푸름이를 푸름이로 보지 않습니다. 이 나라 대학교 가운데 젊은이를 젊은이 그대로 바라보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이는 이 나라 대안학교 또한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푸름이는 푸름이이지 학생이 아니며, 젊은이는 젊은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학생만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교사 또한 배우는 사람입니다. 서로 배우는 사람이고, 서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교사라고 하는 전문지식인이 학생이라고 하는 덜 여문 풋내기한테 숱한 지식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로서로 어른과 아이, 또는 어른과 푸름이, 또는 늙은이(어르신)와 젊은이라는 사이로 만나면서 서로서로 다른 삶과 넋과 말을 느끼는 가운데 서로서로 아름다울 길을 깨달아 다 함께 발돋움하며 즐거울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 “깡패도 착한 깡패, 나쁜 깡패가 있어?” “당연하지. 아양 형은 착한 깡패야. 이것 봐, 우리한테 초콜릿도 주잖아. 선생들이 우리한테 초콜릿 준 적 있어?” ‘치, 거기서 초콜릿 이야기가 왜 나와? 그치만 아양 오빠는 늘 우리 친구였어. 선생님 중에 우리 친구는 한 명도 없어.’ 하고 도메코는 생각했다. “그치만 세상에 정말로 착한 깡패가 있을까?” ..  (37∼38쪽)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교사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길 수 있어야 교사입니다. 무엇이든 모르고 있는 학생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기는 마음을 키우는 학생입니다.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다니며 내 동무하고 이웃하고 살붙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배운 적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열두 해를 거쳐 들어갔던 대학교에서도 ‘함께’ 살아가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배울 수 없었다고 느낍니다. 중학교라는 문턱을 밟자마자 이런 곳은 곧바로 때려치워야 한다고 느꼈으나 여섯 해를 마지못해 참았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네 해를 더 감옥소살이를 해야 한다고 느끼니 몹시 아찔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은 아주 마땅히 다니지 말아야 할 곳이어서, 다섯 학기까지 참다가 그예 그만두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학교라는 곳은 내 동무와 이웃과 살붙이하고 아름다이 부대낄 삶을 가로막는 슬픈 울 안이라고 느낍니다. 기쁜 열린 마당이 될 수 있고, 신나는 열린 배움터가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돈과 큰 힘과 높은 이름을 꿈꾸면서 학교를 자꾸자꾸 더 굳센 감옥소로 다져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눈물을 잃고 웃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 《악동들의 주머니》(양철북,2006)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그림 : 최정인
 └ 책값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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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씻김


 다음달에 두 돌을 맞이할 딸아이가 제 아빠 발에 물을 묻힌 다음 비누를 바르고 다시 물을 뿌려 씻어 준다. 아빠랑 엄마가 갈마들며 아이를 씻기곤 하지만, 으레 아빠가 아이를 훨씬 자주 씻어 주고 있는데, 아빠 발을 아이가 씻어 주기는 오늘이 처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엄마 발이라든지 할머니 발은 일찌감치 씻어 주었다고. 이런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 앞에서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말을 늘어놓는데다가 어떤 사람을 사귀고 어떤 물건을 쓰는 가운데 어떤 매무새로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가를 제대로 따지거나 살피거나 다스리거나 곧추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들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 나라를 쉬 망가뜨리고 말겠다고 느낀다. 책은 한 권조차 없어도 되고, 책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안 읽어도 된다. 학교는 꼭 하루뿐이어도 안 다녀도 그만이고, 학교란 곳은 아예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이한테는 어버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스승이다. 아이한테는 제 살림집과 마을과 골목이 바로 배움터이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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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7-20 15:00   좋아요 0 | URL
뒤집어 말하면 아이도 우리 어른들의 스승이지요.
저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파란놀 2010-07-20 15:38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랑 함께 살아가면서
그예 서로 좋은 동무로 지내며
즐겁구나 싶답니다...
 


 동화와 글쓰기


 권정생 할배만큼 온삶을 알콩달콩 재미나게 꾸린 분이 얼마나 있을까. 여느 할매와 할배는 당신처럼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았겠지. 그러나 글 좀 쓴다는 사람들치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간 사람이 있었을까. 권력이나 돈힘을 부리던 사람들 가운데 알콩달콩 재미난 삶을 꾸린 이가 있었을까.

 자가용을 버리면 이라크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던 권정생 할배 말은 자가용을 버리는 데에서 내 삶을 맑고 밝으며 즐거이 가꾸는 새날과 새길이 열린다는 슬기로움 묻어난 이야기 한 토막이었다. 우리 스스로 옳은 삶을 재미나게 꾸리면서 옳은 넋과 옳은 말로 서로서로 사랑하며 지낸다면, 어떤 못된 권력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짓을 못할 뿐 아니라, 이 땅 이 나라에서 섣불리 애먼 못난 짓을 못하게끔 타이를 수 있다.

 우리들 누구나 내 삶을 재미나며 신나게 꾸리고 있을 때에는 어떠한 멍청한 돈벌레라 할지라도 아무렇게나 우리 넋을 망가뜨리거나 장사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들 누구나 내 삶을 재미없고 신바람 안 나게 돈바라기 권력바라기 학벌바라기로 치닫고 있으니까, 권력자이든 돈벌레이든 우리들을 마음껏 주무르거나 휘두르거나 짓밟을 수 있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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