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山이 낫다
남난희 지음 / 학고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가난하고 어리숙하며 미련한 사람이 낫다
 [책읽기 삶읽기 10] 남난희, 《낮은 산이 낫다》



 밤에는 늘 몇 차례 잠을 깬다. 아이가 자면서 오줌을 누느라 젖은 기저귀를 갈아 주려고 잠을 깨고, 아이가 오줌을 누지 않았더라도 새벽에는 으레 깬다. 새벽 두 시부터 시간마다 한 번씩 깬다.

 몸이 괜찮다면 새벽 두 시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글쓰기를 한다. 몸이 조금 무거우면 세 시에 일어나고, 아무래도 찌뿌둥하다면 네 시에 일어난다. 몸이 제법 무거우면 다섯 시에 일어나고, 몸이 퍽 고단하면 여섯 시에 일어난다. 고뿔이 들었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면 일곱 시에 일어난다.

 오늘은 다섯 시에 일어난다. 어젯밤 아이하고 좀더 신나게 놀면서 일찍 잠들었다면 세 시나 네 시쯤에는 일어났겠지.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살짝 마을을 돈 다음 들어와 책도 읽으며 열 시 즈음 잠들었기에, 네 시나 세 시에 잠을 깨기는 했지만 아이가 오줌을 눈 줄 알면서도 일어나지 못한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이 같은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글쓰기를 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희뿌윰히 밝아 오는 빛살을 느끼며 일어난다든지, 하늘에 걸린 달이 드리우는 빛무늬를 받으며 일어난 적이 없다. 고요히 잠든 골목동네에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이나 우유를 돌리는 사람들 소리, 웃집 젊은이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비적비적 섬돌을 밟으며 중얼중얼 올라가는 소리, 깊은 새벽에도 시끄럽게 골목을 내달리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깨곤 한다. 몸이 먼저 날씨와 때를 느끼어 받아들이기 앞서, 갖은 소리와 불빛이 내 몸을 건드린다.

 새벽 두어 시든 서너 시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얌전히 깔아 놓는다. 시골집은 많이 추우니까 이불을 바닥에 잘 깔아 놓아 따스함이 날아가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발소리를 죽이며 큰방으로 나오고, 쉬를 누러 바깥으로 나온다. 달빛과 별빛이 앞마당으로 쏟아진다. 깊은 새벽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우는 보름달이 몹시 밝다. 어제도 밝고 그제도 밝더니 오늘 또한 참 밝다. 둘레에 다른 빛이 없기 때문일까. 날이 꽁꽁 얼면 달빛이 더 밝다고 했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달이 살짝 이울었으나 빛무늬는 훨씬 널따랗게 퍼진다. 올망졸망 별빛 또한 참으로 반짝반짝 밝다. 이렇게 밤빛이 곱고 좋은데, 굳이 한국전력에 전화해서 등불 하나 세워 달라 할 까닭이 없다. 멧기슭 집이라 밤손님이 들까 걱정스럽다는 어르신 말씀이 있으나, 가난한 멧기슭 집까지 뭔가를 얻으러 찾아들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배를 곪는다는 소리일까. 아니, 예까지 뭔가를 훔치고 돌아갈 생각으로 찾아올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없는 이런 멧기슭에.

 멧기슭에서 젊은 나날 꿈을 길어 올리다가 그예 멧사람으로 살아가는 남난희 님이 쓴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2006)를 읽었다. 이 책에 앞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을 읽었다. 《하얀 능선에 서면》은 꽤 팔리거나 읽혔는지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어렵잖이 한 권씩 보곤 한다. 산을 타는 이야기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 여러 해 동안 《하얀 능선에 서면》을 들추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이 책이 왜 이렇게 자주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한번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처음으로 들추어 보는데, 뜻밖에 이야기가 아주 좋았다. 늘 손에 쉽게 닿는 자리에 있으나 돌아보지 않던 책인데, 생각해 보면 내 곁에서 내 손길이 뻗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낮은 산이 낫다》라는 책을 읽으면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산은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더 빨리, 더 힘든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게 되었다 …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면 아이의 동심이 부러워진다. 아이는 온몸으로 산과 만난다.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한다(11쪽).”는 대목이 나온다. 남난희 님은 ‘겨울 백두대간 걷기’를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해냈다고 한다.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하든 남녘에서 꽃등으로 하든 그다지 대단한 일이 되지 않는다. 첫째이건 둘째이건 막째이건 무슨 대수랴. 백두대간을 타든 동네 뒷산을 타든 다를 바 없다. 어떤 길을 얼마나 걷든 똑같이 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남난희 님 《하얀 능선에 서면》을 읽으면서 ‘이분은 참 멧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그래, 헌책방에서 《하얀 능선에 서면》을 한참 서서 읽다가 책값을 셈하자니, 헌책방 할배가 넌지시 한 말씀 했다. “이거, 참 재미있는 책이지? 이 사람 참 재미있는 양반이더구만. 좋은 책이지.” 그 뒤로 이 책을 몇 권 더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보는데 이 책을 받은 벗님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냥 산 타는 이야기’쯤으로 여길는지 모르고, 다른 읽을거리가 많아 바빠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에서 당신 삶이 찬찬히 무르익은 한결 고즈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나라 고무신은 참 좋다. 우선 ‘가격이 싸고 어디서나 쉽게 신고 벗을 수 있고 발이 편하고 비교적 질기며 보기도 좋다. 간편하게 세탁하여 빨리 신을 수도 있고, 신다가 버려도 그리 아깝지 않고 재활용도 가능하다’ 등 장점이 무수히 많다(27쪽).”는 대목을 읽으며 피식 웃는다. 아주 맞는 소리이니까. 산을 탈 때에도 고무신이 퍽 좋다. 산을 고무신을 신고 한참 타다가 나중에는 신을 벗어 가방에 넣고 맨발로 타면 더욱 좋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남난희 님도 고무신을 신고 산을 타다가 맨발로 바꾼 적이 잦지 않을까. 나는 2004년에 고무신을 처음 신었는데 이때에 한 켤레 값이 3000원이었다. 2009년까지 이 값이었는데 2010년에 접어드니 장마당에서 고무신을 구경하기 어렵다. 고무신은 플라스틱신과 견주어 딱딱해서 시골에서도 잘 안 신으니까 공장에서 더 안 만든다고 했다. 2004년에 3000원 하던 값은 1000원인가 1500원 오른 값이라고 했다. 남난희 님이 고무신을 처음 신던 무렵에는 한 켤레에 1000원이나 1500원쯤 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때에도 웬만한 운동신은 2만 원을 웃돌았을 테니까 고무신 한 켤레를 신어 한두 해 보내면 신값을 얼마나 아끼는 셈일까. 고무신을 신으며 늘 느끼지만, 고무신 생김새가 참 곱다. 고무신은 신는 동안 차츰 닳는데, 닳아 가는 생김새 또한 꽤 곱다. 여느 운동신은 신을수록 모양이 뒤틀리고 망가지면서 볼품이 없다.

 “얼마 전 그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는 의사의 퇴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수술을 했다고 한다 … 나는 이 이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 산중에서 맞는 봄은 또 얼마나 찬란한지. 새소리에 단잠을 깨고,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갓 돋아난 잎들, 갓 피어난 얼레지와 제비꽃은 또 얼마나 예쁜지 … 정말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이렇게 충만하고,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95∼100쪽).” 하는 글월을 읽는다. 농사짓는 착한 사람이 옹기종기 모인 시골마을도 좋고, 이웃집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멧기슭도 좋으며, 바다랑 이웃하는 마을도 좋다. 꼭 알맞게 모여 마을을 이룬 시골일 때에 살기 좋다. 살기 좋은 마을이라면 아이를 낳기에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도 좋다. 아이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벌레소리에 귀를 쫑긋한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느낄 수 있고,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느긋하게 올려다볼 수 있다. 도시에서 서른 해쯤 살아오는 동안 도시사람 가운데 구름 구경을 느긋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은 다섯 번이 채 안 된다. 도시에서는 구름도 하늘도 바람도 무지개도 별도 달도 해도 느긋하게 올려다보며 마주하는 사람이 몹시 드물다. 아니지. 도시에서는 자연을 가까이할 수 없다. 도시에서 살며 자연을 가까이하려 든다면 돈벌이에 뒤처질밖에 없고 끝없는 다툼과 겨루기에서 밀릴밖에 없다. 도시에서는 자연일랑 까맣게 잊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자연은 어린이한테 읽히는 ‘자연그림책’이나 ‘생태도감’ 같은 책으로만 읽히면 된다. 날마다 몸에 넣는 밥이 바로 자연임을 느낄 수 없고, 언제나 나를 살도록 하는 님이 자연임을 깨달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 동네라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자그마한 꽃그릇에 자그마한 꽃이나 푸성귀를 기르는 도시농업을 진작부터 해 왔지만, 한국에서 환경운동이니 무어니 하는 사람들은 한국땅 골목동네 ‘도시 생태 농업’을 느끼지 못하면서 으레 쿠바로 가느니 생태도시 아바나라느니 떠들기만 한다.

 “장난감이 넘치는 도시 아이들이 얼마나 가지고 놀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더 클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땅의 위대함을 보고 배운다면 참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125, 222쪽).” 하고 읊는 글월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이곳에서 살다 보니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조금은 알 듯하다. 땡볕 아래서 밭매기를 하지 않고 편하게 잡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땀을 흠뻑 흘리며 풀을 뽑는 고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농산물이 깨끗하고 충실해야만 제값을 받을 수 있으니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안 칠 수 없어서 그렇게밖에 못하는 것이다(69쪽).” 같은 글월을 되씹는다. 시골사람은 농사를 지으며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야 한다. 푸성귀나 곡식을 기르든, 고기소나 고기돼지나 고기닭을 기르든 매한가지이다. 도시사람은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 커다란 마트에서 더 값싸게 파는 물건을 장만할밖에 없다. 시골사람은 오롯이 유기농사를 짓기 힘들고, 도시사람은 생활협동조합을 함께하며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 모두 똑같은 걱정을 안고 똑같은 굴레에 빠져 허덕인다. 서로 만날 길이 없고 서로 사귈 틈이 없다. 함께 어깨동무할 짬이 없고 함께 손을 맞잡을 마음이 없다.

 이리하여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알아들으며 살아갈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은 어디에 얼마나 있으려나. 가난한 사람이 낫고, 적게 배운 사람이 나으며, 못생기거나 키가 작거나(또는 멀대 같거나) 힘이 여린 사람이 나은데, 이 흐름을 알아채며 오순도순 어깨를 겯을 사람은 이 나라에 얼마나 되려나. 글솜씨가 어리숙한 사람이 낫고, 착한 사람이 나으며, 미련한 사람이 나은 줄, 이 땅에서는 얼마나 알아들으며 헤아릴 수 있으려나. (4343.10.27.물.ㅎㄲㅅㄱ)


― 낮은 산이 낫다 (남난희 글,학고재 펴냄,2004.6.28./9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늦잠과 글쓰기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하루를 알뜰히 열어 알차게 보낸다고 느낀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면 더욱 알뜰살뜰 보낼 수 있을 텐데, 세 시나 두 시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면 몸이 좀 찌뿌둥하다. 다섯 시에 일어나면 빠듯하게 몰아쳐야 하니까 적잖이 어수선하거나 벅차다. 새벽 다섯 시를 넘겨 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로서는 늦잠이다. 나한테는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며 글쓰기를 하는 삶이 가장 알맞고 좋다.

 그런데 아이 하나를 키우는 삶으로서 이맘때가 가장 좋은데, 아이가 둘이라면 어떠하려나.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한테 동생이 생겨 둘째를 첫째와 마찬가지로 돌보고 보듬으며 복닥이며 지내는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면 내 하루는 언제 열어야 좋으려나. 그때에도 새벽 네 시에 느긋하게 홀로 글쓰기를 하며 마음닦이를 할 수 있는가. 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며 빨래감이 비로소 조금 주는구나 하고 느끼는데 다시금 기저귀 빨래 왕창 나오는 아이키우기를 해야 한다고 할 때, 내 글쓰기이며 사진찍기이며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아이 두셋씩 키우면서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바깥일을 해내는 적잖은 분들을 보면 몹시 놀랍다. 이분들은 언제 책을 읽고 언제 글을 쓰며 언제 밥을 먹으려나. 밥을 입으로 먹을까 코로 먹을까 귀로 먹을까.

 겨울 새벽 하얗게 밝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본다. 시골집에서는 새벽이 하얗게 밝아 오더라도 시끄럽지 않다. 도시 골목집에서조차 새벽이 다가올 무렵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모른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골목집에 깃든 사람들이 새벽과 아침을 조용하면서 느긋하게 맞이하고파 하는 줄 모르는 듯하다. 큰길에서면 모르되 왜 골목길에서조차 자동차를 그리 거칠고 시끄럽게 몰까.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은 왜 골목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굴면서 지나갈까.

 이제 나무마다 가랑잎을 내고 멧자락에 먹을거리가 떨어질 즈음이 되니, 작은 멧새들이 새벽녘부터 우리 살림집 둘레로 찾아든다. 밤에 잠을 자다 보면 우리 살림집 문에 콩콩 쿵쿵 뭔가 부딪는 소리가 난다. 다람쥐이거나 족제비이거나 오소리이거나 너구리일 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은 밀가루를 일부러 문간에 뿌려 놓고 짐승 발자국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단다. 시튼 님이 살던 예전처럼 큰곰이나 늑대나 여우가 이 나라 멧자락에 보금자리를 틀지는 못한다. 고작 몇 가지 멧짐승밖에 없다.

 지난주에 멧자락을 타며 버섯을 딸 때에 고라니 똥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멧돼지도 그리 많지 않고 노루나 사슴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멧돼지 때문에 밭농사 망친다는 곳이 제법 있는데,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요즈음 멧돼지는 멧돼지라고조차 하기 힘들다. 멧돼지가 멧자락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도록 고속철도를 뚫고 고속도로를 내며 공장을 지으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분들은 이 나라 정부나 건설회사한테 땅을 팔면 안 된다. 농사짓던 땅이나 너그러운 멧자락이 기찻길이나 찻길이나 공장터나 아파트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막아내지 못하니까 멧돼지가 밭을 파헤쳐 먹이를 얻으려 한다.

 새벽 네 시쯤 하루를 열며 글을 쓰고 있자면, 새소리는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나 여섯 시 십 분 사이에 맨 처음으로 들린다. 여섯 시 반부터 새소리가 꽤 많이 들린다. 겨울을 코앞에 두니까 이즈음 들리는데, 이제 이곳 멧기슭 살림집에서 겨울을 난 다음 새봄을 맞이하고 새여름을 즐길 수 있다면, 그때에는 멧새가 봄이랑 여름에는 언제부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새 하루를 여는지 남달리 알 수 있겠지. 멧새 모이통을 하나 마련해 볼까. (4343.10.27.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을 꺼내어 보지 말라고 1000번이 아닌 3000번쯤은 말했겠지. 그러나 우리 아이는 귀가 둘이라며 한귀로 흘리곤 한다. 또는 아예 귀에 안 들어오도록 뭔가를 틀어막는다. 사진을 늘 꺼내어서 본다. 이제는 집어넣을 줄도 알지만 안 집어넣고 늘어놓기 일쑤이다. 어제는 고맙게 '다시 집어넣어' 준다.

- 2010.10.2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0-10-29 08:36   좋아요 0 | URL
이 사진, 참 좋으네요.
양손으로 사진을 꼭 붙들고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그런데 저 윗칸에 끼워야하는 것 아니니? 아가야 ^^) 자꾸 보게 되요.
아빠 닮아 사진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

파란놀 2010-10-27 08:32   좋아요 0 | URL
아빠가 갓난쟁이 때부터 사진기를 늘 들이대며 찍고 사진을 뽑아서 보고 했기에, 아이도 절로 사진을 가까이한답니다. 책도 마찬가지이고요. 아빠가 텃밭을 좀더 사랑하여 호미를 자주 쥔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농사꾼이 되리라 믿어요~~~
 

  추운 바람이 불 때에 따뜻하던 나날을 떠올린다고 하던가. 여러 날 퍽 길게 따뜻하다 싶더니 바야흐로 칼바람이 한 번 몰아치니까, 한창 무덥던 여름날 골목 모습을 생각하고 싶다. 골목동네를 온통 꽃나라로 일구던 아줌마들 고운 손길을 헤아려 본다.

 - 2010.6.13. 인천 동구 금곡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살 보듬는 마음


 지난 열흘 동안 애 아빠는 다른 어디로 혼자 볼일 보러 먼길을 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꼭 붙어서 지냅니다. 옆지기는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기에 아이랑 노는 몫은 으레 아빠가 맡습니다. 아빠한테는 할 일이 멧더미 같으나 멧더미 같은 일거리는 흔히 뒤로 젖혀 놓습니다. 다만, 날마다 쓸 글은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아이가 잠이 깰 무렵까지 신나게 써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지만 고단하다는 티를 되도록 안 내려고 용을 쓰면서 아이랑 놉니다. 이러면서 이렇게 잠도 안 자는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자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옳게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노릇이며 이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뼛속 깊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그림책을 하나 꺼냅니다. 하나 더 꺼내고 또 하나 더 꺼냅니다. 드러누워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도 함께 보자고 부릅니다. 아이가 와서 “누워! 누워?” 하면서 엉덩이를 들이밉니다. 그림책은 배에 얹고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 얌전히 눕힙니다. 팔베개를 할까 말까 하다가 아기 베개에 머리를 놓습니다. 그림책을 듭니다. 여느 때라면 누워서 책을 든다고 팔이 아플 까닭이 없지만, 아침부터 갖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랑 놀다 보면 누구나 팔이 저립니다. 그래도 꾹 참고 그림책을 넘깁니다. 새로운 그림책을 보고도 싶지만, 아주 재미나다고 느끼는 그림책만 보고 또 보고 다시 봅니다. 팔이 저리고 졸리며 고단할 때에도 언제나 새롭게 보고 즐길 만한 아주 훌륭하다 싶은 그림책이 아니면 아이를 재우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그림책은 지식책이 아니에요. 그림책이란 삶책이요 사랑책입니다.

 세 권을 내리 읽으니 참말로 팔이 후들후들. 아이보고 이제 “벼리도 코 자야지. 토끼도 코 자고 고양이도 코 자는데, 코 자자.” 하고 말합니다. “토끼 코 자? 고양이 코 자?” 하면서 도무지 곱게 잠들어 줄 낌새가 아닙니다. “응, 아빠도 코 잘게. 드르렁! 드르렁!” 일부러 코고는 소리를 내다가 실눈을 뜹니다. 아이는 잘 생각을 않으며 조그마한 손으로 살며시 아빠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아빠가 가여워 보였을까요. 아빠가 힘들어 보였을까요.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 주려는 마음일까요. 엄마나 아빠가 저를 그렇게 살며시 쓰다듬어 주곤 하니까, 이런 손길을 떠올리며 아빠한테 돌려주는 셈일까요.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 얼마나 고마우며 사랑스러운가를 살 떨리도록 느낍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습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글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겠지요. 인문책이란 지식책이 아니랍니다. 인문책이란 사랑책이며 삶책입니다.

 지식을 주워담아서는 그림책이든 인문책이든 될 수 없으나, 책조차 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꽉꽉 들어찬 낱말을 엮어 지식을 꽃피우는 놀라운 얼거리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림책이나 인문책이 될 턱이 없어요. 이런 책은 모두 부질없는 자랑책이자 돈책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책다운 책이고자 한다면 눈물책이거나 웃음책이어야 합니다. 땀방울책만으로는 책이 되지 못합니다. 차근차근 살림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살림책이 되려면 땀방울은 밑바탕으로 깔아 놓으니 땀방울책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햇살책 달빛책 별빛책 구름책 하늘책 흙책 배추책 보리책 바람책 냇물책 바다책 멧새책 무지개책 들이 고루고루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살림책이 되고, 이 살림책 가운데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인문책이든 가지를 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