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 앞서 쓴 글을 되읽습니다. 일곱 해 앞서하고 오늘하고 제 생각이나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만 건사하기보다, 이렇게 올려 놓고 함께 읽고 싶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사서 읽다가


 저도 언젠가는 ‘책을 말하는 책’을 한 권 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나서 이런 책을 내고프지는 않아요. ‘책을 말하는 책’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채 읽히기 때문입니다. ‘책을 말하는 사람’들이 보는 책이 너무 한편으로 기울어진 채 울타리가 드높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양사상과 서양철학에 너무 기울어진 한편, 번역을 보는 눈도 참 낮습니다. 모든 책이 말로 이루어지고 모든 사상과 철학을 말로 나눈다는 대목을 살핀다면 말을 얼마나 알맞고 제대로 쓰느냐는 무척 큰 대목입니다. 그러나 글쟁이나 지식인이 쓰는 ‘어렵고 딱딱한 말’로만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좁다란 마음이 슬프고 딱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가만히 보면, 어린이책은 거의 빠지기 일쑤입니다. 더러 어린이책을 한두 권쯤 다룬다고 해도 얕잡아보기 일쑤입니다. 제대로 모르거나 여느 때에는 눈길마저 안 두니까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제대로 살펴보고 애틋한 눈길로 이야기하는 책도 드뭅니다. 이런 책은 그저 몇몇 전문가들만 당신들끼리 아는 말과 이야기로 글을 쓸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즐길 수많은 사람들 앞에 더욱 높은 울타리가 쳐지는 셈입니다.

 엊그제 《강유원-책》(야간비행,2003)과 《서경식-소년의 눈물》(돌베개,2004)을 사서 조금씩 읽습니다. 《책》은 쓸데없는 군소리가 너무 많군요. 《소년의 눈물》은 출판사에서 편집 장난을 친 탓에 책값이 터무니없이 비쌀 뿐더러 번역이 참 어설픕니다. 원고지로 500장을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조그마한 책인데 쪽수를 부풀려 만 원짜리로 만들어 버리는 ‘옛날 인문사회과학출판사’ 모습에 눈물이 핑 돌 뿐입니다. 돈 좀 벌었나요. 그래서 눈이 풀렸나요. 아니면 돈에 눈이 멀어 눈이 풀렸나요.

 강유원 님은 한결 재미나고 신나게 책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김규항 님은 강유원 님 책을 두고 “신문기자들이 보기에 아주 기분 나빠할 책”이지 않겠느냐며 즐겁게 웃는데, 정작 소담스레 돌아볼 대목이란 ‘신문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독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문기자가 이렇게 보건 저렇게 보건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독자인 우리들, 책손이자 책을 즐기는 우리들이 우리 삶으로 어떻게 바라보며 곰삭일 만한 책인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규항 님 말마따나 《책》이라는 책은 신문기자나 전문서평가라고 이름을 내미는 사람들한테는 ‘한방 먹이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촐하고 털털하게 책을 좋아하는 독자한테는 ‘껄끄럽거나 말이 지나친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긴, 이런 책도 있긴 있어야 하는데, ‘책을 말하는 책’이 너무 비좁고 치우친 채 막상 파고들어야 할 속살과 따숩게 보듬어야 할 수수한 삶하고는 동떨어졌다 보니 《책》이란 책이 책다운 제구실을 얼마 못한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책을 말하는 책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책을 좋아하거나 넓은 눈으로 책을 볼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책을 보는 일도 그 나름대로 뜻이나 재미가 있겠군’ 하고 느끼면서 집어들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나한테는 썩 달갑거나 좋은 책은 아니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거나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끔 이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마음으로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농사는 골고루 지어야 하고,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따로 쉬는날 없어도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듯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고단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고단한 일을 살짝살짝 쉬며 담배 한 개비 피워무는 때에 뒷주머니에서 꺼내어 읽을 수 있듯 책을 말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일이 놀이 같으면 힘들지 않고 따로 쉴 까닭이 없답니다. 놀이가 고된 일 같으면 즐길 수 없으나, 일이 놀이이며, 놀이가 일이 된다면 이때에는 삶입니다. 책읽기는 어떨까요. 일인가요, 놀이인가요. 일이자 놀이인가요. 버스에서도 읽고 전철에서도 읽으며 방구석에서도 읽다가는 공원에서도 읽는 한편, 밥 먹고 난 뒤에도 읽는다면 그야말로 우리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눈여겨보고 싶습니다. ‘삶이 되는 책’, ‘밥과 같은 책’, ‘물과 바람과 햇볕과 같은 책’을 말하고 싶고, 우리가 즐기는 책이란 바로 이렇게 내 삶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즐거움을 담아야지 싶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도 그렇고요. 온갖 책을 다 읽거나 고전이라는 책까지 두루 읽거나 새로 나오는 좋은 책을 틈틈이 찾아서 읽거나 헌책방에 묻힌 책을 두 손에 시커먼 먼지를 묻혀 가면서 캐내는 일도 좋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내 삶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떠한 책읽기이든 좋고 어떠한 책을 집어들든 좋습니다.

 내 삶을 찾지 않는 책읽기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내 삶을 찾는 책읽기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몸이 고단하지 않고, 오히려 신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책을 읽다가 밤을 꼬박 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마음은 맑고 깨끗합니다. 책을 읽다가 그냥 잠이 들고 하품이 쏟아지는데에도 끝까지 읽어야 하나요? 이럴 땐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는 책을 읽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날이 새는 줄 모르며, 배가 고픈 줄 모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그저 재미가 있는 책이라서가 아닙니다. 내 몸과 마음을 살피거나 돌아보는 한편, 우리 삶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책읽기이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책을 말하는 책을 펴내고 싶다는 생각은 여기에 뿌리를 둡니다. 우리 삶을 넓고 깊이 돌아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을 느끼고 살피며 헤아리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면서 즐기는 일에 뿌리를 둡니다. 책 하나가 모든 것이 아닙니다만, 책 하나로 여태껏 뜨지 못한 눈을 새롭게 뜰 수 있습니다. 책이 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책을 읽은 우리 스스로 길을 열어젖힐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춥니다. 책을 읽은 우리 스스로 새길을 열고 가시밭길 또한 헤쳐 나가면서 내 삶을 가꿉니다.

 책을 말하는 일이란, 내 넋과 꿈과 사랑을 말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을 말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두를 말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회라든지 제도라든지 문화라든지 정치라든지 경제라든지 자연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가리지 않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저부터 즐거울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일을 즐겁게 해낸다면, 제가 이룬 열매를 즐길 분들도 즐거울 수 있을까요. 즐거울 수 있겠지요.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애쓰고 힘을 모아서 책을 말하는 책 한 권 꼭 펴내고 싶습니다. (4337.10.20.물.처음 씀/4344.1.13.나무.글투 다듬음.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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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와 글쓰기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거나 다리가 없어 걷지 못하는 사람한테 계단을 오르내리라 할 수 없습니다. 다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걱정없이 다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아기 밴 어머니를 세워 놓고 버스나 전철을 달릴 수 없습니다. 어린이를 어버이 무릎에 앉히며 어른들이 자리 하나 차지할 수 없습니다. 글을 잘 모르거나 적게 배운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서류를 만들어서 적으라 할 수 없습니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 또한 쉽게 알아들을 뿐 아니라, 적게 배운 사람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적을 수 있도록 서류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만 알아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스님만 알아들으면 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 누구나 알아들으면서 즐거이 받아들일 말씀입니다. 어린이부터 늙은이까지, 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부터 대학원을 나온 사람까지 두루 고르게 새기면서 곱씹을 말씀입니다.

 문학하는 사람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만 읽으면 될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아닙니다. 사진하는 사람이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만 알아보면 될 사진이 아닙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만 즐기면 넉넉할 그림이 아닙니다.

 글은, 쓰는 사람 몫이 아니라 읽는 사람 몫입니다. 읽는 사람을 생각하며 써야 할 글입니다. 말은, 하는 사람 몫이 아니라 듣는 사람 몫입니다. 초등학생을 앞에 앉히고 대학교재를 줄줄 읽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생을 앞에 앉혔으면 초등학생하고 나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할머니하고 마주앉았으면 할머니하고 나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대학교수 논문에나 적바림하는 글월을 읊을 수 없어요.

 글이란 참말 읽는 사람 눈높이와 삶결을 헤아리면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쟁이 생각을 버리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다만, 글쟁이 생각은 버리되 글쟁이 마음을 담아서 글을 씁니다. 글쟁이 마음을 담은 글쟁이 삶을 글로 씁니다.

 사진이란 참으로 보는 사람 눈썰미와 삶무늬를 살피면서 찍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다만, 사진쟁이 생각은 내려놓되 사진쟁이 사랑을 실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쟁이 사랑을 실은 사진쟁이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우리 삶터 모든 시설과 기관과 학교는 장애인한테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터전 어느 곳에서 오가거나 주고받는 말마디이든 무지렁이라 하는 ‘적게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 배움이나 앎에 맞추어야 합니다.

 부자한테 맞추는 복지정책이나 경제정책이어서는 안 됩니다. 운동선수한테 맞추는 체육정책이나 문화정책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가나 대학교수한테 맞추는 예술정책이나 사회정책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한테 맞추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학생한테 맞추는 교육정책이어야 합니다. 서민을 헤아리는 정책이 없다고 정부나 공무원을 나무라고자 한다면, 내가 쓰는 글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찍는 사진은 얼마나 내 둘레 사랑스러운 이웃이랑 동무랑 살붙이한테 맞추었는가를 돌아보며 느껴야 합니다. (4344.1.1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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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1-13 11:33   좋아요 0 | URL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네요

파란놀 2011-01-13 23:37   좋아요 0 | URL
글 쓰는 사람들이 눈높이를 수수한 여느 사람들한테 맞출 수 있다면... 아니, 높은 자리를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내 둘레 사람을 사랑하는 수수한 살림살이가 되면 좋겠어요..
 



 문학과 글쓰기


 아름다운 문학이면 될 뿐, 무슨무슨 문학상이란 더없이 부질없습니다. 그저 문학이면 될 뿐, 누구 앞에서 아름답게 보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일구어 낸 이야기이면 될 뿐, 따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부대끼는 그대로 적바림하여 나누는 글 한 조각입니다. (4343.3.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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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과 글쓰기


 스스로 깊고 너른 목숨임을 느끼고 있을 때에는, 스스로 넓고 깊은 목숨임을 살며시 보여주고 나눌 글을 쓸 테지요. 스스로 숱한 지식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스스로 갖은 지식을 늘어놓으면서 둘레 사람들이 지식더미에 파묻히도록 내몰 글을 쓸 테고요. 나는 아직 깊거나 너른 글을 쓰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자질구레한 지식조각이 복닥이는 글만큼은 몸서리치도록 싫습니다. 내 삶과 내 넋과 내 글을 지식수렁에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고운 사랑에 기쁘고, 따순 손길에 즐거우며, 넉넉한 품에 반가울 삶과 넋과 글로 흐르도록 가다듬고 싶습니다. 뭇사람이 밥과 같은 책이 아닌 돈과 같은 책에 휩쓸린다 한들, 제가 써낼 책이 돈을 닮게끔 내팽개칠 수 없을 뿐더러, 씨눈이 잘린 밥이라든지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에 절어 있는데다가 전기밥솥으로 달군 쓰레기밥을 좇을 수 없습니다. 고맙게 눈물 흘리고 살가이 웃음지을 밥 한 그릇으로 거듭날 글 한 줄을 좋아합니다. (4343.5.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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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N vol.6 (雜誌)
荒木經惟 徐美姬 竹之內祐幸 岡部桃 Peter Hujar Santiago Mostyn / フォイル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한국판은 18000원짜리인데, 한국판은 목록에 없고 일본책만 목록에 뜨네...) 



 시골사람은 시골 사진을, 도시사람은 도시 사진을
 [찾아 읽는 사진책 13] 사진잡지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도시 사람들 삶터와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시골 사람들 보금자리와 삶무늬를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적거나 그림으로 옮기거나 노래로 나누거나 춤으로 선보일 수 있습니다.

 시골사람이래서 시골 모습만 즐겨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이기에 도시에만 머물 까닭이 없습니다.

 아파트로 숲을 이룬 곳에 산달지라도 달동네로 사진마실을 나올 수 있습니다. 달동네에 살더라도 아파트숲으로 찾아가 오늘날 도시 모습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길 만합니다.

 골목동네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기에 ‘가난한 사람 모습’을 살가이 담지 않습니다. 아파트숲을 사진으로 그리기에 ‘잘사는 사람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지 않아요. 골목동네에도 잘사는 사람 많고, 아파트숲에서도 못사는 사람 많습니다.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아름다이 사는 사람 많고, 아파트숲에서 부자로 지내지만 슬픈 사람 많습니다.

 어디에나 사람이고 삶입니다. 어디에서든 사랑이며 살내음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람이 복닥이면서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나누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철거민을 찍거나 농사꾼을 찍었기에 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난 정치꾼을 찍었거나 손꼽히는 재벌 회장을 찍었다 해서 쓸모없는 사진이 되지 않아요. 내 중학교 적 교사나 내 유치원 적 선생님을 찍은 사진으로도 다큐사진 이야기를 이룹니다. 내 동무들 삶을 돌아보면서 패션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얼마든지 이룹니다. 사진기와 사진장치와 사진기법과 사진소재는 모두 덧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내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태어나거나 사진이 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도 어떠한 글감을 찾아 어떠한 틀로 적바림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삶 이야기를 글로 실어 내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글로 펼치려 하느냐를 대수로이 여겨야 합니다.

 백두산을 그리거나 한라산을 그렸기에 놀라운 그림이 아닙니다. 김영갑 님처럼 용눈이오름을 좋아해야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도 좋고, 서울 남산도 좋습니다. 마을사람조차 이름을 잘 모르는 야트마한 멧중턱도 괜찮습니다. 어떠한 자리이든 좋은 멧자락이요 멧길이며 멧누리입니다.

 골목길이나 고샅길이 더 호젓하지만은 않습니다. 시멘트길이든 아스팔트길이든 괜찮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가운데 껴안을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내가 디디는 걸음걸이가 참다우며 착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다가서지 않고서야 이야기 하나 나누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마주할 때에 비로소 이야기를 살포시 나눕니다.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때에는 사진 십만 장이나 백만 장을 찍었더라도 작품이라 이름할 사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다문 한두 장이나 열 몇 장만 찍었더라도 사진책 하나를 이룰 만합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한 꼭지를 맡는 사람은 으레 ‘필름 천 통’을 찍는다고 들었는데, 필름 천 통, 곧 삼만육천 장을 찍었어도 정작 잡지에 쓰는 사진은 스무 장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필름 천 통을 쓰면서까지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는 소리인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거나 즐기는 가운데 꼭 필름 한 통만 써서도 잡지를 너끈히 채울 만하다는 소리입니다.


- 산티아고 모스틴, 히로유키 타케노우치, 켈리 코넬, 김진희, 미키 조, 피터 후져, 배찬효, 김인숙, 모모 오카베, 노부요시 아라키


 한 해에 두 차례 나오는 사진잡지 《IANN》 6호를 봅니다.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은 ‘성별 울타리’를 다룹니다. 남성과 여성, 또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울타리가 어떠한가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모두 열 사람이 열 갈래 삶자락에서 열 가지 눈빛으로 열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을 나눕니다.

 한국사람 셋, 나라밖 사람 일곱 사진을 바라봅니다. 한국사람 사진은 금세 티가 나고, 나라밖 사람 사진도 얼른 알아챕니다. 나라밖 사람 사진 가운데 일본사람과 서양사람 사진도 쉬 가릴 수 있습니다.

 저마다 삶터가 다르니 사진이 다릅니다. 놀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터전이 사뭇 다르니, 사진으로도 참 다른 모양새를 마주합니다.

 《강운구 사진론》이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얼마 안 된 지난날’ 나라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라밖 사진책을 사들고 들어오다가 공항에서 빼앗기는 대목(169쪽)을 보았습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며, ‘한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벌써 예술이나 문화로 자리잡은 훌륭한 작가들 작품 하나 마음껏 들여오지 못하는 슬픈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한국은 예나 이제나, 또 얼마 앞서나 오늘날이나, 더욱이 요즈음이나 앞으로나 영 엉터리요 엉망입니다. 사회도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과학도 체육도 어느 하나 잘되거나 제대로 된 구석이 없습니다. 지난날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마르크 리보, 다이안 아버스 사진책들을 공항에서 빼앗았다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이들 사진책을 펴내지 못합니다. 아니, 펴내지 않는다 해야 옳겠지요. 저작권 삯을 안 치르고 1999년 12월 31일까지 팔던 조그마한 사진문고로 그럭저럭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나라밖 사진쟁이와 출판사한테 제값을 치르며 내놓던 사진작품책이란 아직까지 없습니다. 잘 나가고 잘 팔린다는 나라밖 글쟁이한테는 몇 억씩 안기며 책을 사들이지만, 이름있을 뿐 아니라 훌륭하다는 나라밖 사진쟁이한테는 인세 5%이든 10%이든 아깝다 여길 뿐 아니라, 애써 내놓아도 제작비를 건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은 엉망이고 엉터리입니다. 뜻있는 사진잡지사나 사진책 출판사는 돈이 적습니다. 뜻없는 출판사는 돈이 많습니다. 뜻은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많고, 뜻은 없는데 돈은 넘치는 사람이 많아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바라고, 돈이 있는 사람은 헤프게 씁니다.

 생각해 보면,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겨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한다가 아니라, 돈이 없을 때에는 돈 없는 삶결대로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즐기면 됩니다. 모든 영화가 돈이 많을 때에 훌륭히 찍을 수 있지 않아요. 모든 노래꾼이 돈 넉넉할 때에 목소리와 가락을 뽐내며 사랑받을 작품을 내놓지 않아요. 어떤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매한가지입니다. 돈·이름·힘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땀방울과 사랑과 믿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브레송이나 아버스 사진책을 공항 들머리에서 북북 찢는 철딱서니없는 짓이 얼마 앞서까지 벌어지던 한국일 뿐 아니라, 브레송이나 아버스 사진책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뭐가 어떻게 좋아 내 가슴이 울렁울렁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몹시 적은 한국입니다. 사진은 이름값이 아니라 작품이지만, 이름을 밝혀야 알아듣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아예 쳐다보지 않아요.

 사진잡지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을 들여다보면 한국땅 사진쟁이 사진은 무척 답답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한국 삶터가 참으로 답답하게 꽉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 막힌 곳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싱그럽거나 맑은 숨을 홀가분하게 들이마시기 어렵습니다. 골방에 갇혀야 하고, 억지로 꾸며야 합니다. 연극을 하거나 몸을 사려야 합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골방에 갇혀야 하는 한국 글쟁이·그림쟁이·사진쟁이는 골방에 갇힌 삶결을 고스란히 옮기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살림살이 그대로 예쁘며 아름다이 일구는 삶터를 예쁘며 아름다이 보여주면 됩니다. 슬프게 살아가니까 슬픈 삶을 적바림합니다. 기쁘게 살아가면 기쁜 삶을 적바림합니다.

 자랑이나 우쭐거림이 아닌 문화이자 예술인 사진이고 그림이며 글입니다. 삶을 차곡차곡 실어내는 문화이며 예술인 사진이요 그림이요 글이에요.

 나쁘다 할 대목이 없으며 좋다 할 구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놓고 더 나쁘다느니 더 좋다느니 할 수 없습니다. 삶은 그저 삶이고, 사진은 그예 사진입니다. 좋아하는 대로 살아내면서 나누는 이야기이기에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삶이라서 삶꽃으로 거듭납니다.

 앞으로도 한국사람들은 더 도시로 몰려들고, 더 도시에서 복닥이며, 더 도시에서 맴돌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시골에서는 사진을 안 하겠구나 싶고, 도시에서 지내더라도 작은 도시에서는 사진을 못 하겠다고 느낍니다. 시골자락에서는 마땅한 책 하나 변변한 사진책 하나 찾아 읽기 어렵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면 무슨 책이든 못 사겠느냐만, 다리품을 팔아 내 손으로 뒤적이며 고르는 책읽기를 할 만한 책쉼터가 없는 시골이고 작은 도시예요. 사진은 골방에 갇혀서 똑딱똑딱 지어내지 못해요. 다리품을 팔아 내 손으로 책을 뒤적이며 고르듯, 내 다리를 움직이고 내 몸을 쓰며 내 마음을 기울이는 가운데 내 손으로 이루는 삶이요 사진입니다.

 이 나라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골에 살림집을 마련하여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다면 어떠한 이야기열매를 맺을는지 궁금합니다. (4344.1.13.나무.ㅎㄲㅅㄱ)


―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 (이안북스 엮어 펴냄,2010.9.3./18000원) 

 http://www.iann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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