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책읽기


 호들갑을 떨 까닭이란 없습니다. 두려워 한다든지 걱정할 까닭 또한 없습니다. 아쉽다고 여기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 아이가 살아갑니다. 나한테 아이가 없으면 이웃에 아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얼거리는 톱니바퀴와 같아, 톱니로 다루어지는 우리들이 떨어져 나가면 금세 다른 톱니를 갈아끼웁니다. 어느 회사이든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춘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갈음할 새로운 일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를 갈음할 사람이 많다 해서 내가 일을 못한다거나, 내 몫으로 들어온 사람이 일을 못할 까닭이란 없어요.

 시골집에서 논밭을 애써 일구는 동안 논밭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골집 사람들이 하나둘 흙으로 돌아가거나 도시로 흘러들면, 정갈하던 논밭에는 갖은 풀이 돋고 나무가 우거집니다. 한 해만 지나도 묵정밭과 같고, 오래지 않아 여느 풀밭 모양새가 됩니다. 나중에 누군가 땅을 사랑할 농사꾼이 이곳으로 찾아온다면 묵정밭은 정갈한 밭으로 탈바꿈하겠지요.

 큰별이 진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합니다. 큰사람이 맡던 몫을 누가 맡을는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큰별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별이든 작은별이든 똑같은 별입니다. 큰별이 졌으면 어디에선가 새로운 큰별이 뜹니다. 작은별이 졌을 때에도 어디에선가 작은별이 새롭게 떠요. 큰 어른이 숨을 거두었으면, 누군가 큰 어른이 되겠지요. 어쩌면 내가 큰별이 될 수 있고, 큰 어른 노릇을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알뜰히 꾸리면 넉넉합니다. 내 살림을 내 깜냥껏 일구고, 내 이웃은 내 사랑으로 보듬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 깨닫고, 잠자리에 들어 홀로 생각하다가 다시금 깨닫습니다. 곰곰이 돌이키자니, 이 땅에서 ‘천재’라 일컬을 만한 글쟁이나 예술쟁이가 참말 있었나 알쏭달쏭합니다. 아마, 천재 글쟁이나 천재 예술쟁이란 한 사람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들을 가리켜 영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썩하지만, 아이들은 영재나 천재라서 무엇을 아주 잘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몇 살 때에 노래를 지었든, 이름난 테니스 선수가 몇 살 적부터 테니스를 배웠든, 이들을 놓고 천재라고는 일컬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동무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참말 똑똑할 뿐더러 잘생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무가 천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데에서는 뜻과 마음이 하나라서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걸레질하는 살림꾼 어머니’와 같은 천재는 다시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을 밥을 날마다 뚝딱뚝딱 세 끼니나 차릴 수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날마다 새옷을 헌옷으로 만들며 빨랫감을 잔뜩 쌓아 놓는데 어떻게 날마다 새로 입을 옷이 뚝딱뚝딱 태어나는지 대단했습니다.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살림꾼 어머니를 키운 어머니를 키웠을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으레 ‘남자 쪽 어버이’를 좇으면서 족보를 만든다느니 뿌리를 찾는다느니 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뿌리야 있겠지요. 어느 쪽 뿌리이든 살아숨쉬는 사람길일 테지요. 남자 쪽 어버이는 이름이 남아 영의정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벼슬을 하느니 학문을 하느니 하고 적힙니다. 여자 쪽 어버이는 아무런 이야기 하나 안 적힙니다. 그렇지만 여자 쪽 어버이가 살아온 결은 살림꾼 어머니들 손과 몸과 땀과 마음에 알알이 아로새겨지며 오늘날로 이어 왔습니다.

 여자가 집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자 쪽 어버이가 살림꾼 일을 도맡으면서 일군 삶자락이 그지없이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천재’로구나 싶을 뿐입니다. 여자 쪽 어버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천재로 여기지 않았고, 천재로 여기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재로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삶입니다.

 간장 고추장 된장 담기란 곧 예술입니다. 나물 김치 절임이란 바로 문화입니다. 밥 쌀 나락 모두 자연입니다. 똥지게 낫 호미 한결같이 삶입니다.

 글 잘 쓰고 춤 잘 추며 노래 잘 하는 여느 예술쟁이들은 거의 ‘기술자’처럼 흐릅니다. 오늘날 사진 잘 찍고 그림 잘 그리며 연극 잘 한다는 숱한 예술쟁이들은 으레 ‘전문가’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맛난 요리를 잘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요리책을 쓸 만큼 무언가 남달리 밥을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림꾼이면 될 삶입니다.

 똑똑하대서 더 잘 쓰는 책이거나 더 잘 읽는 책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책이며 살아가는 대로 읽는 책입니다. 내 삶을 담는 책인 만큼,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아름다울 책을 일굽니다. 내 삶으로 읽는 책이기에, 나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면서 착하게 스며들 책을 받아들입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이 그림결을 흉내내어 꼼지락꼼지락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참으로 딱합니다. 다 큰 어른들은 다 큰 어른들 그림을 즐기면서 그려야지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삶을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면 될 뿐입니다.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이든 고차매이든 천재가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 아이로서 제 삶과 삶터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착하게 돌보면서 그림 또한 사랑한 아이입니다. 반 고흐가 천재 그림쟁이였겠습니까. 당신 반 고흐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동안 그림에 온 넋을 바친 어른 하나일 뿐입니다.

 리영희 님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우리 삶자락 앞날을 밝힐 빛’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뒷사람은 리영희 님이 잘한 대목을 톺아보고 아쉬운 대목을 보듬으며 더욱 맑고 밝게 빛나면 됩니다. 아니, 애써 더욱 맑고 밝게 빛날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제 마음그릇에 걸맞게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습니다. 리영희 님은 리영희라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갔고, 우리들은 우리들 다 다른 이름과 삶을 담는 마음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소설쓰던 박완서 님을 돌아보면서 똑같이 느낍니다. 박완서 님이 흙으로 돌아갔대서 큰별이 졌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박완서 님은 박완서 님 삶대로 문학을 했을 뿐, ‘큰별이 되도록’ 문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완서 님이 짚지 못한 삶은 수두룩하게 많고, 박완서 님 스스로 살피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은 사람들 삶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수수한 여느 어머니들 삶을 다루지 못했대서 아쉬운 문학이 아니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 어머니들 삶을 다루어야 비로소 참문학이 아닙니다.

 기술자로 꾸릴 내 삶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될 내 꿈이 아닙니다. ‘프로페셔널’이나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그저, 나로서는 내 삶을 내 힘으로 단단히 움켜쥐며 당차게 다스리는 착하며 참답고 고운 ‘살림꾼’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때에 조용히 빛납니다. 나와 내 살붙이가 알아보며 느낄 만한 빛줄기를 얌전히 내뿜으면서 서로 활짝 웃습니다. 기술자가 되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딱할 뿐 아니라, 스스로 기술자조차 되지 못합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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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가꿀 내 고마운 삶
 [푸른책과 함께 살기 64] 멜빈 버지스, 《빌리 엘리어트》



- 책이름 : 빌리 엘리어트
- 글 : 멜빈 버지스
- 옮긴이 : 정해영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7.2.9.)


 

 (1) 아이와 함께 살기


 아이가 “아빠, 쉬 마려.” 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누운 아이를 일으켜세웁니다. 다리를 왼손으로 모으고 오른손으로는 엉덩이 아래에 팔을 넣어 아이를 안아 올립니다. 기저귀를 풀고 바지를 내려, 잠자는 방 옆에 놓은 변기에 앉힙니다. 어두운 방에서 쉬를 하는 아이는 아빠를 안습니다. 쉬를 다 눈 다음 기저귀천으로 밑을 닦습니다. 다시 안아서 잠자리에 누이고, 기저귀를 다시금 채웁니다. 간밤에 오줌기저귀를 한 장도 갈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며칠에 한 번쯤 오줌기저귀 없는 밤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오줌기저귀를 갈지 않는 만큼 새벽에 꼬박꼬박 오줌 누이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줌 누이기를 안 하더라도 기저귀 갈기는 해야 합니다. 기저귀에 오줌을 누어 기저귀를 갈든, 부시시 일어나 오줌을 누이든 어버이로서는 똑같은 일입니다. 아이가 오줌을 꼬박꼬박 가릴 수 있다면, 기저귀 빨래 하나는 훨씬 주는 만큼 집일이 한 가지 주는 셈입니다. 석 돌째 될 올해에 밤오줌을 뗄 수 있을까 꿈을 꿉니다. 오늘과 이듬날과 또 이듬날, 잇달아 밤오줌을 가린다면 비로소 기저귀를 뗄 수 있겠지요. 이렇게 여러 날을 보낸 다음 기저귀천을 두 장 이부자리에 깔아 놓고 보내면서 오줌을 누지 않고 아버지를 불러 오줌을 누자고 한다면, 이제 아버지도 빨래일을 조금 덜 만하겠지요.


.. 어쨌든 저 소녀들은 분명 다르다. 만일 저 애들이 다른 곳에서 저런 꼴로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엄마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고 다들 어린 창부라고 손가락질해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발레고, 따라서 걔들이 엉덩이를 살짝 내보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애들을 바라볼 때마다 어쩐지 내가 무례하고 추잡한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 그리고 참 쉬워 보였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싶었다. 그래서 문득 저애들이 이토록 뻔한 일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  (43, 44쪽)


 오뉴월에 둘째가 태어나기에, 첫째가 이에 앞서 밤오줌까지 떼어, 첫째 기저귀 빨래가 없기를 애타게 비손합니다. 두 아이 기저귀 빨래를 하자면 기저귀 빨기 하나만으로도 눈코를 못 뜨지 않겠느냐 걱정합니다.

 그러나, 애 한둘 두엇 서넛 너덧 ……을 키우던 지난날 어머님들을 돌아보면, 애 둘이야 아무것 아니라 할 만합니다. 걱정하기에 앞서 받아들일 삶이고, 걱정하기보다 즐거이 여길 삶입니다.

 오줌을 쌌으니 갈아 주고 빨래를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씻기고 옷을 틈틈이 갈아 입힙니다. 심심하지 않게 함께 놀며, 꾸준히 책을 함께 읽어 주며, 이것저것 자잘한 집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킵니다. 아버지 곁에서도 놀고 어머니 곁에서도 놉니다. 함께 마실을 하거나 자전거를 탑니다.

 크게 근심하지 않아도 다섯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면 밤오줌 걱정이란 없겠지요. 때때로 이불에 쉬를 할 때가 있을 텐데, 이렇게 쉬를 하면 빨면 됩니다. 모든 삶에는 뜻이 있고,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벅차기만 하거나 고단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더 마음을 쏟기 마련이요, 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옲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껴안는 사랑입니다. 겉핥는 사랑이 아닌 속으로 부둥켜안을 사랑이에요.


.. “근데, 완전 얼간이가 된 기분이야.” “어차피 넌 얼간인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져.” 마이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빌리, 솔직히 네가 멋져 보여. 난 네가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그건 참 뭐랄까 …….” “뭔데?” “거칠진 않지만 …… 남자다워 보여.” “남자답다고?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네. 어쩼거나 그건 여자 애들이 하는 거잖아.” ..  (57∼58쪽)


 어제 아침, 멸치볶음을 하면서 멸치를 헹구지 않고 그냥 했더니 몹시 짭니다. 멸치 헹구기를 하자면 얼마나 품이나 겨를을 써야 한다고 이 일을 건너뛰어, 반찬 먹는 식구들 입맛을 버리도록 했는지, 참 딱합니다. 겨울날 찬물로 헹구기를 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만, 푸성귀를 헹굴 때에도 똑같이 손이 얼어붙으니, 그냥 언손으로 한 번 더 헹구면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무슨 반찬을 새로 할까 아직 생각해 놓지 못했습니다. 엊저녁부터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직 마땅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음, 식빵과 달걀과 치즈와 봄동이 있으니, 달걀을 부치고 치즈와 봄동을 속으로 삼아 빵 두 쪽을 위아래로 싸 볼까?

 늘 같은 밥에 같은 국만 끓이는데, 아침을 먹인 다음 빨래하고 물 길으러 다녀온 다음에, 저녁을 마련할 때에는 밀가루반죽을 해서 수제비이든 칼제비이든 끓여 볼까?

 혼자 밥 차리고 치우기 힘들다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한테 아주 작은 한두 가지 잔일이라도 맡기면서 차츰차츰 집일에 익숙하도록 이끌어야겠지요. 아이가 훨씬 어릴 적에는 그저 아버지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하는 놀이였으면, 이제부터는 놀이를 넘어 일로 접어드는 섬돌을 밟는다 할 테니까, 아이 스스로 ‘아버지를 도왔다’고 느끼도록 할 만큼 일을 시켜야겠구나 싶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모시 천으로 닦는 일을 아이한테 맡겼더니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주 신나게 해 줍니다. 책을 나른다든지 무어를 나를 때에도 꼭 옆에 붙어서 저도 같이 나르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혼자 후다닥 옮기면 금세 끝이지만, 이렇게 혼자 해 버리면 아이로서는 심심합니다. 아버지로서는 더디 걸리며 손이 많이 가면 더 고단할 수 있지만, 일을 더 천천히, 한결 느긋하게 하면서, 아이가 차분히 ‘일 거들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는 이렇게 일을 거드는 아이 모습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멋없이 ‘v 그리기’를 하는 사진만 찍어대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함께 어우러지며 부대끼는 삶을 사진으로 고맙게 담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다 하면 한식구끼리도 말을 섞을 일이 줄고, 다 같이 하자면 식구들끼리 말을 섞을 일이 잦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 살림살이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집안일이 되도록 애쓰면서 도란도란 오붓하게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학교 건물 앞에 서자마자, 나는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아무도 학교가 그런 곳이라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춤추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제애 왜 토니 형이 그처럼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춤추는 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상류층의 세계였다. 그건 높은 사람들의 세계였고, 누구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류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리고 상류층이 될 생각도 없었다 … (230쪽)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삶이 아닌, 아이와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양육 의무’나 ‘부양 의무’ 따위가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구태여 아이 머리속에 이것저것 쑤셔넣는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시나브로 받아들일 삶이 되도록 하는 하루하루입니다.


 (2) 시골에서 함께 살기


 지난해 12월 첫머리부터 멧골자락 우리 집 물이 얼었습니다. 달포가 지나도록 날씨는 꽁꽁 얼어붙어 물이 녹지 않습니다. 멧골집으로 들어온 첫 해부터 이만저만 고단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모기장이 없어 여름날 애먹고, 겨울에는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 어찌저찌 마음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생각조차 않고 살아왔지만, 혼자 꾸리는 삶이 아니라 여럿이 한식구가 되어 함께 꾸리는 삶이니, 이제부터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며 곱씹어야 합니다.

 집 바깥에 바람막이 노릇을 할 문을 새로 한 겹 대든 무어를 하든 어찌 되든 돈이 들겠지요. 돈은 돈대로 들 터이나, 돈에 앞서 어떻게 뚝딱뚝딱 해야 하느냐 하는 일손이 듭니다. 나 스스로 일손을 들여야 하고, 둘째를 낳기 앞서 이 일을 마쳐야 합니다. 날이 풀려 따스해질 삼월이나 사월에 집고치기를 해야 합니다. 어느새 일월이 저무는 만큼 곧장 이월이요, 삼월과 사월도 눈앞입니다.


.. 할머니도 나랑 같이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한다. 아빠는 요즘 노래가 다 쓰레기 같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걸 신경 쓰기엔 너무 늙었다 … 뭐, 식구들 앞에서 주책을 부릴 수 없다면 어디서 부린단 말인가? 할머니가 원하면 온종일 음악을 듣고 춤추게 내버려 둬야 한다 … 할머니가 왜 거기에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할머니가 무엇을 하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물어 봐도 할머니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어쩌면 어릴 적에 뛰놀던 곳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으니까. 80년 동안. 오, 세상에! 80년이라니. (14, 17∼18쪽)


 지난 하루와 이틀과 사흘 들을 곰곰이 돌아보니, 집에 물이 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어찌저찌 살기는 잘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물을 못 쓰니 집에서 씻고 치우고 하기란 퍽 힘듭니다. 개수구를 씻거나 뚫기도 벅찰 뿐더러, 무엇 하나 수월히 넘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시골살이를 할 사람들이 시골살이를 찬찬히 보듬지 못한 탓인데, 아이 어머니가 몸을 건사하기 힘들어 이런 일을 같이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이 아버지가 한결 슬기롭고 차분히 이 일을 건사해야 합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 집부터 느긋해야 이 일을 하든 저 놀이를 하든 제대로 합니다. 집에서 물을 못 쓰니,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멧길을 걸어 웃집까지 다녀옵니다. 날마다 이렇게 오가는 길에 아이는 즐겁게 따라나섭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가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일이라기보다 저랑 같이 겨울날 찬바람 쐬면서 즐기는 마실일는지 모릅니다. 여러모로 고단한 겨울날이지만, 달리 보면 내가 여태껏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가를 뼛속 깊이 아로새기면서, 아이하고 더 오래 제대로 깊이 사귀면서 집식구 몸앓이랑 마음앓이를 옳게 짚으라는 뜻입니다.


.. “나도 기회만 있었으면 무용수가 될 수 있었어.” “장모님은 가만 좀 계세요!” 아빠가 뒤로 돌아서 할머니에게 고함쳤다. 젠장! 할머니에게 그렇게 소리치다니. 나는 펄쩍 뛰어올라서 아빠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미워! 아빤 나쁜 놈이야!” … 나쁜 놈! 발레는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  (92∼93쪽)


 밥을 하니까 살림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빨래를 하기에 살림꾼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만큼 살림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그러나 밥만 한대서 살림꾼이 되지 않아요. 밥만 하는 사람은 밥쟁이입니다. 빨래만 한다면 빨래쟁이입니다. 아이돌보기란 어떠한 삶일까요. 어떻게 하는 일이 아이돌보기이고, 돌봄을 받는 아이는 어떠할 때에 즐겁게 받아들이려나요.

 시골집에서 밥쟁이로 남을 내 삶인지 살림꾼으로 거듭날 내 삶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멧골자락에서 빨래쟁이로 한삶을 보내려 하는지 살림꾼으로 한삶을 누리려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하고 어머니 아버지에다가 둘째 아이가 어엿하게 시골사람으로 시골마을을 아낄 삶으로 나아갈는지, 어영부영 바빠맞은 하루를 보내느라 눈코 못 뜨며 보내는 삶으로 허둥댈는지 알뜰살뜰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춤과 삶과 일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를 읽습니다. 영화를 소설로 옮긴 작품인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본 사람이 많을 테고, 앞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을 작품이요, 길이길이 이야기될 작품입니다.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는 청소년문학으로 여길 수 있고, 그냥 문학으로 여겨도 됩니다. 어찌 되었든 문학책입니다.

 영화로 볼 때면 한두 시간 가만히 지켜보면서 가슴이 젖어들 만하고, 책으로 읽을 때면 같은 대목을 되읽고 곱읽으며 새삼스레 가슴이 뭉클할 만합니다. 영화읽기를 할 때에는 낯빛과 몸짓과 삶터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젖어듭니다. 책읽기를 할 때에는 온삶을 머리로 그리는 가운데 내가 꾸리는 내 삶은 어떠한가를 나란히 맞대 놓으면서 내 길을 걷는 좋은 꿈을 꿉니다.


.. 내 말은, 대체 탄광 동네에서 발레 따윌 해서 뭘 하겠냐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떤 탄광 말인가? … 하지만 난 광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광부가 된다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어째서 우리는 발레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단지 전에 해 본 사람이 없는 거다. 그뿐이다. 따라서 일단 내가 하고 나면,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도 우리 중에 한 사람이니까. 남자들이 모두 아빠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단지 춤춘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  (51, 91쪽)


 ‘빌리 엘리어트’는 춤꾼이 아닙니다. 그저 춤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춤을 출 때에 어쩐지 새 기운이 샘솟으면서 아름다운 땀방울을 흘리는 아이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안 되고 ‘광부’가 될 수 있습니다. ‘광부로 일하면서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탄광마을에서 춤을 선보이면서 이웃 ‘탄 캐는 일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될 만하고, 다 함께 춤추기를 즐기면서 ‘춤추는 탄광사람들’ 무대를 마련할 수 있어요.

 어느 길로 가든 빌리한테는 빌리 삶입니다. 춤을 추어도 좋고 안 추어도 되는 빌리 삶입니다. 다만, 빌리는 퍽 어린 날, 빌리가 걸어갈 길에서 ‘춤이란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억지로 하는 춤이 아닌, 돈을 바라보는 춤이 아닌, 이름을 드날리려는 춤이 아닌,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춤입니다. 몸과 춤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 아빠는 아빠대로 내가 춤추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내가 당당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  (88쪽)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춘다고 계집애 같다 할 수 없습니다.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추기에 더없이 사내애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사내애가 하는 일을 하기에 훨씬 계집애 같다 할 만합니다. 어떠한 일이든 ‘사내가 할 일’과 ‘계집이 할 일’이 따로 나뉘어지지 않거든요. 아기씨를 내놓는 일이란 사내만 할 수 있고, 아기씨를 받아 아기를 낳는 일이란 계집만 할 수 있습니다. 아기한테 젖 물리기도 계집만 하겠지요. 그러나, 이 일을 뺀 모든 일은 사내와 계집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일입니다.

 빌리가 깨달은 춤추기란 ‘계집애만 추는 춤’이 아니라, ‘춤추며 흘리는 땀방울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는 춤’입니다.


..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아빠와 형이 그렇게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다 ..  (134쪽)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도록 목숨을 선물받았다고 느낍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꿈으로 빛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돈을 많이 벌 때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크고 멋진 집에다가 빠르며 예쁘장한 자동차를 갖추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얼굴을 뜯어고쳐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한다거나 머리가 똑똑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아름답습니다. 엉겅퀴는 엉겅퀴라서 아름답습니다. 우리 집 앞에 우뚝 선 두릅나무는 두릅나무라서 아름답습니다. 콩새와 박새는 콩새와 박새라서 아름답습니다. 개구리는 개구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저마다 제 길을 씩씩하게 걸어갈 노릇입니다. 저마다 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일입니다. 저마데 제 길을 튼튼하게 걸어가면서 따스함과 넉넉함을 사랑할 삶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춤 하나를 붙잡을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열면서 춤하고 사귈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사랑하면서 춤하고 하나가 될 뿐입니다. 춤을 추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춤을 춘 다음에도 옷을 입어야 하며, 춤을 추기 앞서도 잠을 자야 합니다. 살림꾼이면서 한 아이요 바야흐로 어른으로 자라나며 오늘은 멋스러운 춤을 선보이는 빌리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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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9. 

네 양말을 떠 주는 어머니 허벅지에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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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 18.

 잠들기 앞서, 어머니가 책을 읽어 준다. 인형을 안고 함께 책을 본다.

 

혼자 책을 읽으며 꼼지락꼬무락거리는 네 발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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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푸른말


 말만 예쁘장하게 쓰는 사람이 있어요. 삶이나 매무새는 하나도 예쁘장하지 않을 뿐더러, 넋이나 얼 또한 조금도 예쁘장하지 않을지라도 말만큼은 예쁘장하게 쓰는 사람이 있어요.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이름을 아는 말사랑벗은 몇 사람이나 있으려나요. 말사랑벗들은 어릴 적부터 이원수 님 동요나 동시나 동화를 읽었는가요. 읽은 벗님이 있고, 이름을 모르는 벗님이 있겠지요. 이원수 님은 《얘들아 내 얘기를》이라는 수필책을 어린이가 읽도록 1975년에 내놓은 적 있는데, 이 책에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이름을 붙인 짧은 글이 실렸어요.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글을 쓰고, 마음이 슬픈 사람은 슬픈 글을 쓰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은 괄괄한 모양의 글을 쓴다.”고 하면서, 글을 읽으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말사랑벗들은 말만 참 예쁘장하고 삶은 엉망이거나 짓궂거나 미워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참말 말은 훌륭하거나 멋진데, 하는 모양은 엉터리인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원수 님은 “그러나 그 속에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생각은 없었다. 그 시를 쓴 사람을 나쁘다고 한 것은 그가 속은 좋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좋은 듯이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고 덧붙입니다.

 저 또한 이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제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오로지 제 삶 테두리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그대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뿐입니다. 저부터 아름다이 살아가지 못하면서 아름답다 싶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요. 저부터 더 착하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착한 마음이나 넋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저부터 집에서고 밖에서고 어디에서고 바르며 고운 말을 즐겨쓰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만 바르며 고운 말 이야기를 적바림할 수 없어요.

 푸른말을 생각합니다. 푸른말이란 말사랑벗님이 보내는 10대라는 나이에 둘레에서 들으면서 말사랑벗님 스스로 쓰는 말을 일컫습니다. 푸름이가 쓰는 말이기에 푸른말이에요. 또한, 내 삶과 넋을 푸르게 가꾸고픈 꿈으로 쓰는 말이 푸른말이에요.

 나이로 치면 10대 푸름이가 쓰는 말이지만, 나이를 넘어 누구나 푸른 모두를 사랑하고플 때에 쓰는 푸른말입니다. 옷차림만 푸름이답기보다 마음차림부터 푸름이다우면 좋겠고, 나이를 세는 밥그릇으로만 푸름이가 되기보다 사랑을 담는 마음그릇부터 푸름이다우면 좋겠어요.


1. 배움집 : 우리는 ‘학교(學校)’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이 한자말은 한자말이라기보다 그냥 우리말이 되었기에 굳이 한자를 밝힐 까닭이 없어요. 초등학교는 ‘초등학교’이지 ‘初等學校’가 아니고, 중학교는 ‘중학교’이지 ‘中學校’가 아닙니다. 그런데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배우는 곳이지요. 배우는 곳이기에 ‘배움곳’이나 ‘배움터’일 테고, 건물이 선 학교뿐 아니라 마을이나 집 어디에서나 사람들 누구나 배우기에 ‘배움마을’이요 ‘배움집’이며 ‘배움누리’이고 ‘배움마당’입니다. 


2. 스승 : 해마다 5월 15일 하루만 ‘스승날’이라 하면서 ‘스승’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다른 때에는 ‘교사’나 ‘선생’이라고만 해요. 우리한테는 좋은 낱말 ‘스승’이 있지만 좀처럼 이 낱말을 못 쓰며 살아요. 참다운 스승, 곧 참스승이 없기 때문인가요. 내 마음에 참스승을 못 모시며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3. 동무 : 북녘사람들은 나이나 계급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래서 1950년대부터 남녘땅 사회와 학교에서는 이 낱말 ‘동무’를 몹쓸 낱말로 여기고 말았어요. ‘어깨동무’ ‘길동무’ 하듯이 동무일 뿐인데요. ‘사랑동무’ ‘마음동무’ ‘공부동무’ ‘놀이동무’처럼 우리들은 좋은 벗님, 그러니까 너나들이를 사귀면 좋을 텐데요. 


4. 골마루 : 건물이나 집에서 나무로 바닥을 댄 거님길을 골마루라 합니다. 옛날 학교는 나무로 지어서 ‘복도’ 아닌 ‘골마루’였어요. 그런데 아파트에서도 ‘마루’이고 ‘부엌’은 똑같아요. 솥을 걸어야만 부엌이 아니고, 시멘트로 바닥을 대었어도 ‘골마루’랍니다. 


5. 푸름이 : 이름만 푸름이로 쓴다 해서 참으로 푸른 사람 푸른 꿈 푸른 날 푸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지는 않지만, ‘청소년’이라는 이름에서는 푸른 빛깔과 맑은 무지개를 떠올리기 너무 어려워요. 


6. 사랑매질 : 예부터 학교에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얼차려를 하거나 매질이나 주먹질을 했습니다. ‘체벌’이라고도 하는데, 참말 사랑을 담은 매질이라면 이름부터 ‘사랑매질’이라 붙여서, 거짓없이 사랑을 담은 손길로 우리들을 어루만지면 고맙겠어요. 


7. 개밥도토리 : ‘왕따’는 일본말이라 ‘집단 따돌림’이라 써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 나라에도 예부터 ‘개밥도토리’랑 ‘돌림뱅이’가 있었어요. 일본에서 들어온 못된 짓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우리들 살갑고 사랑스러운 벗을 괴롭히던 슬프며 못난 삶이 있었습니다. 


8. 건널목 : 나어린 아이들은 건널목을 건널 때에 손을 높이 들도록 시킵니다. 키가 작아 ‘자동차에 탄 어른들 눈에 잘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널목 앞에서 얌전히 서거나 기다리는 어른은 몇이나 되나요. 아이들은 어른들 차 모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중에 어른이 되어 차를 몰 때에 똑같이 슬픈 빛으로 차를 몬다고 느껴요.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건널목 앞에 서면 무섭습니다. 


9. 징검돌 : 시골 아저씨는 말사랑벗한테 징검돌 하나입니다. 말사랑벗이 저 같은 아저씨 한 사람을 밟고 새길을 걸으면서 슬기로우며 예쁜 넋을 북돋우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징검다리를 이루는 징검돌입니다. 나중에 말사랑벗님들이 씩씩하며 훌륭한 어른이 된다면 또다른 징검돌 노릇을 해 주셔요. 디딤돌이나 받침돌이나 밑돌 노릇도 좋아요. 걸림돌은 되지 말아 주셔요. 


10. 길잡이 : 가시밭길을 꿋꿋이 헤치면서 뒷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일컬어 ‘이슬떨이’라 합니다. 이슬떨이만큼 대단하게 살 수 없어도 길잡이 노릇으로도 즐겁습니다. 길잡이가 못 된다면 길동무로도 좋고, 그냥 길손이 되어도 괜찮아요. 


11. 꿈날개 : 꿈에 날개를 답니다. 생각에도 날개를 답니다. 마음에도 날개를 달아요. 이야기에도 날개를 달고, 책이나 글이나 선물이나 꽃이나 나무한테도 날개를 달아 봅니다. 


12. 삶이야기 : ‘판타지’란 어떤 이야기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읽을 문학을 손수 쓰거나 나라밖에서 들여오면서 ‘판타지문학’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우리 삶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라면 꾸밈없이 ‘삶이야기’라 해도 되고, 우리 꿈을 마음껏 펼치는 이야기라면 수수하게 ‘꿈이야기’라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3. 셈틀 : 아저씨도 ‘컴퓨터’라는 낱말을 쓰지만, 때때로 ‘셈틀’이라는 낱말을 쓰곤 합니다. ‘셈 + 틀’이라 셈틀이고, ‘셈’이란 ‘세다’에서 비롯했으며, ‘세다’는 ‘헤다’에서 온 말이요, ‘헤다’는 ‘헤아리다’로 가지를 뻗었습니다. ‘헤아리다’란 ‘생각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셈틀’이란 ‘생각틀’이요 ‘꿈틀’이기도 합니다. 


14. 빛슬기 : 아저씨하고 아줌마는 첫째 딸아이 이름을 ‘사름벼리’라고 지었습니다. 아저씨랑 아줌마는 어버이 성씨를 둘 다 안 쓸 마음으로 딸아이 이름을 지으며 ‘사름’을 성으로 삼고 ‘벼리’를 이름으로 삼았어요. 호적에 올릴 때에는 아버지 성을 넣어야 했는데, 여느 자리에서는 아버지 성을 뺀 ‘사름벼리’라고만 불러요. 티없이 고우면서 꾸밈없이 어여삐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름 넉 자에 담았어요. ‘빛슬기’라는 낱말은 푸름이로 살아가는 말사랑벗들이 빛과 같은 슬기를 몸소 일구면서 나누면 좋겠다는 꿈을 담아 새로 지어 봅니다. ‘꿈슬기’를 지을 수 있고 ‘참슬기’라든지 ‘멋슬기’라 지어도 되겠지요. 더 많은 지식보다는 더 따스한 슬기와 더 너그러운 빛깔을 사랑해 주면 기쁘겠어요.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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