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일구는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7] 데이비드 플라우덴(David Plowden), 《The Iron Road》(Four Winds Press,1978)



 《마더 존스 자서전》(평민사,1978)이라든지 《미국노동운동비사》(인간,1981)라든지 《정글》(동녘,1991)이라든지, 요즈막에 새로 나온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2010) 같은 책을 읽은 사진쟁이는 이 나라에 얼마쯤 될까요. 사진쟁이이든 아니든 이 책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The Iron Road》처럼 ‘철길 삶자락’을 훌륭히 담아낸 사진책을 보면서 뜻밖에 가슴이 뭉클뭉클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The Iron Road》는 틀림없이 잘 찍고 잘 담았으며 잘 엮은 사진책입니다만 철길이란 그냥 철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철길을 놓을 때에는 예부터 이제까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손을 맞잡고 서로서로 더 크고 센 권력을 누리려는 속셈을 꽃피웁니다. 참말로 여느 사람들 삶자리를 북돋운다든지 시골마을 사람들한테 발이 되어 준다든지 하려는 철길이란 없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더 빨리 실어 옮겨 더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려고 놓는 철길일 뿐입니다. 이 나라 고속철도를 보아도 서울과 부산을 빨리 잇자는 생각일 뿐이지, 서울과 부산 사이에 있는 수많은 시골마을을 이으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더욱이, 서울과 부산 사이에 숱하게 있는 시골마을을 이어 주던 ‘느린 철길’은 거의 모두 사라졌고, 남은 철길마저 머잖아 없애 버릴 판입니다. 서울에 지하철이 잘 뻗어 있다지만, 돈벌이 잘 되는 일터가 많은 곳으로 뻗는 전철길이요, 서울 둘레 전철들은 오로지 서울로 사람(노동자·소비자)을 빨리 보내도록 하는 데에만 맞춰집니다. 일산과 인천을 오가거나 인천과 수원을 오가거나 수원과 구리를 오가거나 구리와 의정부를 오가거나 의정부와 일산을 오가는 전철은 예나 이제나 놓을 생각이 없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입니다.

 우리 삶터 밑자락과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슬프고 씁쓸한 일투성이입니다. 철길을 보아도 슬프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제도권 교육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 대접을 보아도 슬프며 쇠밥그릇 아닌 착하고 참된 공무원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이 목숨 하나 붙잡고 사는 까닭에 섣불리 고개를 떨구지 못합니다. 둘레를 살펴보느니 슬프고 아픈 일이 그득그득이라지만, 이러한 가운데 기쁘며 고운 일을 내 두 손으로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기쁘며 고운 일을 남들이 먼저 스스로 잘 깨달아 펼치기를 바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깜냥껏 깨닫고 찾아낸 기쁘며 고운 일을 나부터 힘차며 즐거이 꾸리면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철길이 어떻게 놓였고, 철도 노동자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떠올린다면, 《The Iron Road》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어떻게 여느 사람을 부려먹거나 들볶는다 할지라도, 철도 노동자인 사람들을 살가이 보듬을 수 있거나 이들하고 이웃하며 지내는 사람들이랑 오순도순 알콩달콩 지낸다면 아름다운 노릇이리라 생각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을 막대접 한달지라도 내 손으로 키운 푸성귀를 내 이웃과 동무한테 기쁘게 나누어 줄 수 있고, 철도 노동자를 죄 비정규직으로 내몰거나 일삯을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달지라도 내 가난한 살림살이를 쪼개고 나누며 내 둘레 더 어렵고 버거운 동무와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다 함께 넉넉하고 따스한 일이요, 우리들이 섬길 믿음은 서로서로 아름다우며 씩씩한 믿음이며, 우리들이 나눌 사랑은 모두들 즐거우며 빛나는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무언가 노리거나 꾀하기 앞서, 꾸밈없이 넉넉하고 따스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무엇을 이루겠다고 바라기 앞서,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자리 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밥그릇 다툼에 앞서, 콩 한 알 나누는 사랑을 고이 실어 알뜰살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다큐멘터리만 사진이지 않습니다. 모델이나 옷 벗은 아가씨를 찍어야만 예술 사진이 아닙니다. 산 들 냇물 바람 바다 들짐승을 찍어야 풍경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포토샵이니 셈틀이니 디지털파일이니 만지작거리거나 인화·현상을 남달리 해 본다고 현대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하자면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사진에 담는 이야기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되도록 하자면 내 삶과 내 이웃 삶이 맑고 밝으며 곱고 착한 삶이 될 수 있게끔 우리 모두 땀흘려야 합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게끔 힘쓰고자 사랑을 바치고 믿음을 쏟으며 내 이야기 알알이 가꾸는 가운데 내 이야기 나눌 삶터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일구면, 우리가 사진기를 들 때에는 사진으로 빛을 뿌립니다. 볼펜을 들고 있으면 글로 빛줄기를 선사합니다. 붓을 들고 있으면 그림으로 빛살을 나누고, 악기를 들고 있다면 노래로 빛무늬를 이루며, 맨몸이라면 춤으로 빛접은 무지개를 피어올립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갈래가 따로 나오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상업이나 만듦이나 예술을 생각하며 갈라 놓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내 살붙이 밥벌이가 되는 일이요 내 삶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며 내 꿈을 이루는 예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사진이 사진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다큐멘터리도 상업도 만듦도 예술도 되지 못합니다. 덧없이 조각나고 하릴없이 용두질을 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좀처럼 태어나지 못하고,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가까스로 헤아렸어도 삶을 일구는 살림꾼이나 일꾼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을 엮어 책을 만들거나, 모두들 우물에 갇힌 개구리 모양입니다. (2010.7.2.)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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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콩콩 책읽기


 빨래와 아이 씻기기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아이는 아빠를 앞질러 저 앞에서 콩콩콩 뛴다. 아이는 그냥 걷지 않는다. 언제나 콩콩콩 뛰면서 걷는다. 조그마한 아이가 콩콩콩 내닫는 소리가 ‘콩콩콩’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아이를 바라볼 때면 내 귀에는 ‘코옹 코옹 코옹’ 하는 소리가 톡톡톡 들린다. 아이는 저렇게 가볍게 콩콩콩 내닫는데, 아빠는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끙끙끙 걷는다. 너무 무겁게 걷나? 아이 외할머니가 “어쩜 벼리는 저렇게 콩콩콩 뛰냐? 하기는, 아이 때는 다 저렇게 뛰더라.” 하고 말씀할 때에 비로소 우리 집 아이가 콩콩콩 뛰는 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뿐 아니라 이웃한 어느 집 아이들이건 콩콩콩 뛴다. 때때로 콩콩콩 안 뛰는 아이를 보기도 하는데, 콩콩콩 뛰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하곤 한다.

 콩콩콩 어린이는 집에서 혼자 책을 펼칠 때이든 아빠나 엄마가 곁에서 책을 읽어 줄 때이든 노상 콩콩콩 책읽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그림을 되삭일 때에는 어쩜 이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 싶은데, 옆에서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온통 그림에 마음을 쏟는다. 요사이는 글자를 알아본다. 글자가 무엇을 적바림했는지를 알아보지는 않는다. 꼬물꼬물한 ‘구림’이라고 여긴다. 아빠는 늘 수첩이나 공책에 요모조모 쪽글을 쓰니까,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 공부해?” 하고 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 마치 ‘공부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을까. 이 소리도 외할머니한테서 들었던가? 이리하여, 요사이 그림책 글자를 알아보는 아이는 ‘구림’이라고 말하다가는 “구림 아냐. 공부야.” 하고 고쳐 말한다. 아빠가 곰곰이 글을 쓰면, “아빠 공부해? 응, 공부해.” 하다가는 저도 작은 수첩과 볼펜을 들고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한’다. 작은 수첩에 꼬물꼬물 글씨를 줄을 가지런히 맞추면서 요모조모 그린다. 게다가 꼬물꼬물 줄맞춘 그림그리기를 한 쪽 가득 하고, 다음 쪽 가득 또 한다.

 예전부터 늘 느끼지만,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살피면, 이 집 어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아이들이 책을 건사하는 매무새를 들여다보면, 이 집 어버이가 책을 어떻게 마주하거나 다루는가를 환히 읽을 수 있다.

 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영어를 말하거나 영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만날 때면, 이 아이가 더없이 불쌍하지만, 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참으로 딱하며 안쓰럽다. 퍽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갖가지 학원에 다니거나 온갖 지식을 주워섬기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이 아이가 그지없이 가여우면서,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그토록 슬프며 안타까울 수 없다.

 왜 즐겁게 살아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사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책을 읽지 않을까. 책이란 즐겁게 읽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즐거이 어우러지는 고운 목숨이다. 삶이란 즐거이 태어나서 즐거이 흙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콩콩콩 가벼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루하루 콩콩콩 맑고 밝은 말마디를 노래하듯 읊으면서 지내면 사랑이요 평화이다. (4344.1.26.물.ㅎㄲㅅㄱ)
 

 

이 그림책은 '영어 그림책'이 아닌 '리처드 스캐리' 그림책. 아직 우리 나라에 번역이 안 되었을 때 헌책방에서 찾아낸 아빠 보물. 그러나 아이는 아빠 보물이건 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이 예쁘니까 책이 낡고 닳도록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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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69] 주폭(酒暴)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걱정이라면, 술집을 없애거나 술을 없애면 될까. 술을 마구 마시는 사람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니까, 술꾼들 보라며 걸개천을 내걸면 될까. 술꾼들 읽으라고 걸개천을 내걸었을 텐데, 술꾼들은 ‘주폭(酒暴)’ 같은 말을 알아들으려나. 술꾼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엇을 생각할까.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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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19] 체크아웃 럭키투데이

 한 번 쓰면 두 번 쓰고, 세 번 쓰면 네 번 씁니다.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함부로 쓰는 영어가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이 바보스럽기 때문에 영어나라를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영어를 써야 멋있다고 여기니까 자꾸 씁니다. 나부터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멋을 부리니까, 아주 쉬운 여느 자리 수수한 말마디를 영어로 가득가득 채웁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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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사진은 온누리를 따스히 감싼다
 [찾아 읽는 사진책 15] 페터 슈테판 엮음, 《세상을 바꾼 사진》(예담,2006)



 ‘세상을 바꾼 사진’이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세상을 바꾼 글’이나 ‘세상을 바꾼 그림’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나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대통령선거에서 여당이 뽑히든 야당이 뽑히든 정치는 정치이고 나라는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대통령으로 누가 뽑히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는데, 대통령으로 누가 뽑혀야 하거나 말거나 나라꼴이나 나라모양이나 나라살림이나 나라꿈이나 나라터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라 할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사진 한 장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보면서, 참말 한 나라가 ‘사진 한 장으로도 크게 거듭나거나 새로워진다’ 할 만합니다. 아름다이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글 한 줄에 서린 사랑스러움을 알아내면서, 참으로 한 나라가 ‘글 한 줄로도 바야흐로 새로 태어나거나 기쁨이 흘러넘칠’ 만합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이나 한글로 옮긴 분이나 ‘사진문화’를 돌아보며 온누리를 읽을 수 있다고 여겼겠구나 싶으나, 사진을 바라보는 눈썰미를 처음부터 이렇게 얄궂게 맞추어 놓으면, 사진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사랑이고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는 ‘세상을 보여주기’나 ‘세상을 말하기’나 ‘세상을 담기’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는다 해서 ‘세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어요. 사진이란, ‘세상이 아닌 세상 가운데 한 자락’을 보여주면서, 이 한 자락을 바탕으로 우리 삶터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나 스스로 차분히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사진은 ‘세상을 말하지’ 않아요. 사진으로 찍은 모습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얼굴빛 가운데 하나를 살며시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픈 말’이 무엇일까를 나 스스로 곰곰이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사진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게 바라볼 모습’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할 사람’을 담습니다. ‘아름다운 꿈’이 아닌 ‘아름답게 가꿀 꿈’을 담아요.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움직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관찰되고 기록된 다이애나 비와 영화스타들의 사진은 수천 장이 넘는 반면, 반인류적 범죄 앞에서 미디어는 침묵을 지키고 나태하다. 사진은 거대 사업이자 생산물이다 … 잡지 《라이프》는 ‘세계의 보도 전선’에 있음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인가? 뉴스는 엔터테인먼트와 치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거듭 곱씹습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 머리말에 적힌 말마따나, ‘사진 = 거대 사업 = 돈벌이’입니다. 돈을 벌려고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서 나눕니다. 돈이 되니까 하는 사진찍기이지, 돈이 안 되어도 하는 사진찍기가 아니에요. 돈이 있으니까 하는 사진찍기요, 돈이 없어도 할 만한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돈과 돈이 얽히는 사진밭인 만큼, ‘돈과 얽힌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라 말한다면, 그닥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동 노동 착취’를 까밝힌 사진이란, ‘돈을 돈다이 나누지 않는 나쁜 돈쟁이들 돈벌이’를 밝히면서, ‘돈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꾸는’ 데에 한몫을 맡았습니다. 슬픈 싸움판을 담은 사진은, ‘돈을 더 거두어들이는 식민지를 거머쥐려고 끔찍한 총칼 따위를 만들어 서로를 죽이도록 내모는 불구덩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돈에 얼룩진 전쟁을 사람들 스스로 미워하도록 이끌어 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예술사가들은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로버트 카파의 〈어느 스페인 병사의 죽음〉, 조 로렌솔의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세우다〉와 같은 보도사진의 아이콘을 연구해 왔을 따름이다. 하지만 역사는 ‘일요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들어가는 말).” 같은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되뇝니다. ‘사진 = 이름난 작품’일까요? 아닙니다. ‘사진 = 여느 내 삶’입니다.

 도로시아 랭 님이 담은 〈이주노동자 어머니〉에 나오는 아줌마는 ‘우리 이웃 아줌마’이거나 ‘내 어머니’입니다. 잘난 모델이 아닌 수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곳에서만 마주할 거룩한 모습인 한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할 여느 사람입니다.

 사진은 대단한 모습을 찍기에 대단한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흔하디흔하다 할 여느 삶을 찍기 때문에 아름다운 ‘삶빛’이 됩니다. 아름다운 삶빛이기에 나중에 예술이든 문화이든 새로운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문화나 예술인 사진이 아니라, 처음부터 삶인 사진입니다.

 “미군 사진사가 찍었을 이 사진은 너무나 전원적인 한국의 시골에 미군이 잔인하게 공격을 퍼부어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은 냉전기 초반에는 국제연합 군대와 함께 한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트남에서 아시아의 정치에 관여했다. 미군의 전략은 점차 시골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격에 의존했다. 이 사진에서 군사적 표적으로 여길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산과 강이 펼쳐진 풍경 속으로 수백 개의 폭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고요하게 정지된 이 이미지를 보면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을 죽음과 파멸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7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 = 고발’이 아닙니다. ‘사진 = 폭로’도 아닙니다. ‘사진 = 나눔’이요, ‘사진 = 어깨동무’입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벗과 같은 사진입니다. 언제나 우리랑 얼굴을 맞대고 살을 부비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읽으며 다음 세 군데에 밑줄을 긋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아니고, 세상을 읽는 사진도 아니며, 세상을 깨우치는 사진 또한 아닙니다. 우리 곁에서 살가이 어우를 사진입니다. 우리 손으로 아낄 사진입니다. 우리 삶으로 녹아내어 나누는 사진입니다. 사진만 따로 똑 떼내어 생각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사진을 높이 추켜세우면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을 애써 가르치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사진으로 살아가면 즐거우면서 흐뭇합니다.


- 최신 이야기는 항상 옛이야기와 같다. (7쪽)
-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그의 사진들은 자기만족에 빠진 대중을 흔들어 깨우고, 워싱턴의 하원의원들에게 미성년노동법을 강화하도록 촉구했다. (16쪽)
- 알티플라노의 위대한 사진 기록자인 마르틴 참비는 쿠스코와 산기슭에 역사를 세운, 아과스칼리엔테스를 잇는 기차가 생기기 전에 마추픽추를 찾아갔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지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1890년에 생긴 울퉁불퉁한 노새 길을 지나야 했다. (20쪽)


 아이를 낳아 아이를 업고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가 ‘아이를 바꾸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제 삶을 찾아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아끼는 우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진을 찍는다거나 말한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뿐입니다.

 이름만 커다랗게 ‘세상을 바꾸는 어쩌고 저쩌고’를 훌훌 털어내면 좋겠습니다. 더 비싼 장비를 갖춘다 해서 ‘세상을 바꿀 만한 사진’이든 ‘아름다울 만한 사진’이든 찍지 못해요. 더 비싸거나 좋은 장비가 아니라 ‘내가 늘 내 곁에 두면서 즐길 장비’롤 갖추어야 합니다. 더 비싸거나 좋은 냄비가 있대서 더 맛난 국을 끓이겠습니까. 내 살림집에 걸맞고 내가 잘 다룰 만한 냄비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국을 끓일 때에 맛나면서 즐겁습니다.

 편집자는 ‘세상을 바꾼 사진’을 찾느라 괜히 아까운 나날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는 ‘내가 살아오며 내 하루하루 아름답게 빛내도록 길동무가 되어 준 예쁜 사진’을 찾으면서 기쁘게 웃고 신나게 춤추며 해맑게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웃음이요 사진은 춤이며 사진은 노래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 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엮음,예담 펴냄,2006.8.20./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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