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과 글쓰기


 겨우내 우리 집 텃밭이며 둘레 논밭이며 눈이 그득그득 쌓였습니다. 지난 한 주 드디어 날씨가 포근하면서 눈이 많이 마릅니다. 녹는다기보다 마릅니다. 집 옆 퍽 너른 밭에 보자기처럼 판판히 쌓인 눈도 모두 마르고, 우거진 풀숲에 깔린 눈도 거의 다 마릅니다. 멧길을 따라 섬돌처럼 이루어진 논에는 아직 얼음이 두껍고 눈도 많이 남았지만, 올 듯 안 올 듯 알쏭달쏭하던 봄은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구나 싶습니다. 엊저녁에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면서 바깥을 내다보니 여섯 시가 넘어도 해는 아직 기울지 않습니다.

 새벽 네 시 이십일 분에 일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고 아버지도 밖으로 쉬를 누러 나옵니다. 겨우내 흰눈 덮인 텃밭을 빙 돌아가며 쉬를 누었으나, 이제는 감나무 둘레에도 누고 도랑에도 누며 풀밭에도 눕니다. 흰눈과 오줌을 받으며 겨울을 보낸 텃밭 흙은 아직 딱딱한데, 한결 따스한 날씨가 찾아와 우리 집 언물이 녹을 무렵이면, 그동안 밥찌꺼기와 똥오줌을 섞어 모아 놓은 거름을 내어 흙하고 고루 섞을 수 있겠지요. 그리 넓지 않은 텃밭에 거름을 얼마나 낼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한 집에서 나오는 밥찌꺼기와 똥오줌이 쓰레기가 안 되고 거름이 되도록 하자면, 그렇게까지 땅이 넓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낍니다. 여러 식구 살림이요 일구어야 할 논밭이 제법 된다면 거름으로 낼 똥오줌이나 밥찌꺼기란 퍽 모자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지 않은 옛날에 똥오줌을 참아 가며 집으로 와서 거름자리나 밭자리 한켠에 누었다는 이야기란 거름이 얼마나 보배롭고 소담스러웠는가를 보여주는구나 싶어요. 내가 먹는 밥을 내가 손수 일굴 때에는 내 똥과 오줌을 어떻게 삭여서 쓰는가를 두루 헤아릴 테니까, 이러한 삶은 흙하고 하나될밖에 없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른 논까지 일구지 못한다더라도 작은 텃밭 하나 일구면서 밥과 삶을 하나로 이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른 논은커녕 작은 텃밭조차 얻기 힘듭니다. 달삯을 내는 집이든 전세로 지내는 집이든, 텃밭 딸린 아파트나 빌라나 골목집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제는 마당 딸린 골목집조차 퍽 드뭅니다. 가난하거나 쪼들리는 사람들한테는 마당이든 텃밭이든 딸린 집을 얻는 일은 꿈조차 못 꾸겠지요. 가멸차거나 돈있는 사람들로서는 애써 텃밭을 일굴 생각을 안 할 테고, 마당보다는 잔디밭이나 꽃밭쯤 일굴 생각은 가끔 하겠지요. 그러나 가멸차거나 돈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잔디밭이나 꽃밭을 돌볼는지 궁금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거나 부리면서 멋들어지게 꾸미지 않으랴 싶습니다.

 도시 한복판 아파트마을에서는 텃밭이나 꽃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집안에 꽃그릇 잔뜩 벌여 놓을 수는 있습니다. 꽃그릇이라도 잔뜩 벌인다면 꽃과 풀과 흙을 날마다 조금이나마 보면서 살아갑니다. 햇볕이 안 드는 땅밑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꽃그릇을 꿈꾸지 못합니다. 꽃그릇 하나 보살피지 못할 만큼 돈벌이에 매달려야 하겠지요. 집살림 걱정하느라 내 몸과 마음을 한결 아름다이 건사하도록 손과 몸을 놀려 흙을 일굴 걱정까지는 못하겠지요.

 학교를 다니며 배우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든, 돈벌이만 하는 사람이든, 일자리를 바라는 사람이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든, 집살림만 하는 사람이든, 손수 텃밭을 마련하여 일굴 수 있으면 삶이 한껏 달라집니다. 어쩌면, 온누리는 텃밭을 일구는 사람과 텃밭을 안 일구는 사람으로 갈린달 수 있습니다. 텃밭을 안 일구는 사람 가운데에는 텃밭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테며, 텃밭은 생각하지만 너무 바쁘거나 쪼들려 힘들다는 사람이 있을 테고, 텃밭 따위에 마음쓸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겠지요.

 푸성귀 몇 가지이든 곡식 몇 줌이든 손수 일구는 사람이라면, 이른바 탄소발자국을 어마어마하게 줄이는 사람이 됩니다. 굳이 탄소발자국 따위를 헤아리지 않아도 됩니다만, 무가 되든 배추가 되든 얼갈이가 되든 아욱이 되든 콩이 되든 옥수수가 되든 고구마가 되든 감자가 되든, 텃밭을 조그맣게나마 일구는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만화책 《꽃과 모모씨》에 나오는 가녀린 새색시는 도쿄 한복판에서도 텃밭을 일굴 뿐 아니라 무논까지 일구어 냅니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한낱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로만 바라볼는지, 아니면 참말 내 삶터부터 이렇게 우리 터전을 고쳐 나가려 애쓰자는 다짐으로 마주할는지는, 저마다 어떻게 살아가고픈가에 따라 나뉘겠지요.

 자동차를 버려야 이라크에 군대를 안 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해적을 막자며 유디티 같은 군대에 가겠다는 젊은이가 꽤 늘어난답니다. 군대에 간다고 평화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군대가 평화를 사랑하는 곳이 되겠습니까. 자동차를 버린 우리들이 할 일이란,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텃밭 일구기입니다. 텃밭을 일구어야 4대강이고 경부운하(또는 경인운하)를 멈출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에 미친 나라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텃밭을 일구지 않고서야 글을 쓸 수 없고,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4344.2.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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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作寫眞館―小學館ア-カイヴスベスト·ライブラリ- (11) (ムック)
木村 伊兵衛 / 小學館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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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6쪽 580엔 사진책에 담는 예술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7]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名作寫眞館 11 : 昭和の日本》(小學館,2006)



 우리 나라에도 조그마한 판으로 나오는 ‘사진문고’가 있습니다. 아예 없지 않으며 새로운 책이 아예 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꾸준히 나오는 사진문고는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네 사진밭을 빛낸 분들 작품이든 오늘날 우리네 사진밭을 남달리 일구는 이들 작품이든, 적은 돈으로 여러모로 살필 만한 사진책으로 사진문고를 만나기는 몹시 힘듭니다. 아니, 아예 만날 수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나마 꼭 한 가지 나오는 사진문고조차 1999년 12월 31일까지는 프랑스판 사진문고를 저작권을 안 치르고 내던 판이었기에 2000년 1월 1일부터 판이 끊어지며 2003년 즈음부터 새판으로 나오지만 2008년에 30권째 나오고는 더 소식이 없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사진문고 내는 일이 만만하지 않겠으나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한테 베푸는 선물인데,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로서는 이 고운 선물을 알뜰히 받아먹지 못하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달리 보면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애틋하게 바라는 사진책을 사진문고로 못 내놓는다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살갑거나 훌륭하다 싶은 사진이 책 하나로 묶일 때라 해서 더 사랑받거나 눈길을 받지 않습니다. 더욱이, 작은 판으로 나오든 큰 판으로 나오든 두루 사랑하거나 따사로이 어루만지지 못해요.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을 책 하나로 묶어 보여주는 ‘좋은 사진마당(名作寫眞館)’ 가운데 11권으로 나온 《昭和の日本》(小學館,2006)을 찬찬히 읽으면서 곰곰이 돌아봅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을 놓고 《昭和の日本》은 “一舜の情景を輕やかに切り取る”라고 덧붙입니다. 1901년에 태어나 1974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한삶을 ‘사진길 걷기’에 따라 살핀 해적이를 책 첫머리에 붙이는 한편,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진을 한 장 넣으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꼭 36쪽짜리 얇으면서 조금 큼직한 판인 사진책에는 한 쪽을 통째로 차지하는 커다란 사진부터 한 쪽에 서너 장을 넣는 작은 사진을 골고루 넣고, 사진쟁이 한 사람 삶과 넋과 작품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글에다가, 이 한 사람이 온삶을 걸쳐 이룬 사진책을 찬찬히 소개하는 대목까지 깃듭니다. 어떻게 보면 기무라 이헤이 같은 분이든 다른 사람들 사진밭이든 36쪽이 아니라 360쪽이나 3600쪽에 이르는 판으로 엮어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 할 텐데, 더도 덜도 아닌 36쪽짜리 사진책으로도 사진쟁이 한 사람이 걸어간 길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소학관 출판사에서 내놓는 ‘좋은 사진마당(名作寫眞館)’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지만, 이 사진책들은 이 한 권으로 넉넉히 사진쟁이와 사진찍기와 사진읽기와 사진나눔과 사진하기를 맞아들이도록 이끕니다. 한편, 이 사진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진책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도록 돕습니다. 모든 넋을 짚도록 이끌면서 깊은 얼을 살피라고 돕습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훌륭해서 아름답고, 책은 책대로 훌륭해서 즐겁습니다.

 아무래도, 사진과 글을 엮어 이야기로 이루려는 책마을 일꾼부터 기무라 이헤이라는 사진쟁이 한 사람을 한결 살뜰히 읽었기에 이만 한 책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저 기계처럼 책을 만들어 상품으로 팔아치우는 부속품 같은 책마을 일꾼이라면 이러한 사진책을 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즐기고 제 삶으로 껴안으며 하루하루 아름답게 보내고, 책쟁이는 책 엮는 일을 즐기고 당신 삶으로 얼싸안으며 나날이 아리땁게 누리기에, 좋은 사진책이 태어나겠구나 싶습니다.

 사진책은 사진 한 장으로도 이룰 수 있고, 사진 만 장으로도 이룰 수 있습니다. 사진 만 장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으며, 사진 한 장만 넣으면서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내보일 수 있어요. 사진을 하는 마음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고, 책을 일구는 매무새에 따라 사진책이 바뀝니다. 일본 사진쟁이와 책쟁이가 사진책 하나 길어올리는 모습을 돌아볼 때면, 좋은 사진을 즐길 수 있으니 좋은 넋을 배우기도 하고 좋은 사진뿐 아니라 좋은 책을 아낄 줄 아는 몸가짐을 함께 길러야 비로소 사진누리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사진누리를 이 땅에서 이룬다면, 사진을 담아 내놓는 사진책으로도 아름다운 책누리를 이 땅에서 이룰 테지요. 사진은 책이랑 떨어질 수 없고, 사진을 하는 사람은 책을 가까이할밖에 없으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진이 담긴 책을 기쁘게 넘기면서 글과 그림과 사진이 빚는 이야기보따리를 듬뿍 맛봅니다.

 사진책 《昭和の日本》을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일본사람은 580엔밖에 안 하는 적은 돈으로도 이 멋진 사진책을 사서 읽으니 얼마나 좋을까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도 이 일본 사진책을 책방에 주문해서 1만 원이 안 되는 값으로 장만할 수 있습니다. 일본사람이 치르는 책값을 헤아리면 꽤 비싸게 사는 셈이지만, 반가운 책을 마련할 때에는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책을 살 수 있어 반가우며 고마워요. 사진을 한 번 보고 열 번 보며 백 번쯤 보면서 생각합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은 1901년에 태어나 1974년에 흙으로 돌아갔기에 1930년대나 1950년대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더 빼어난 눈길이라서 1930년대와 1950년대 삶자락을 사진으로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이 1930년대 한복판을 젊음으로 보냈고 1950년대 한가운데를 무르익는 나이로 누볐으니까 이러한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고 아낌없이 사진으로 찍습니다.

 더 잘난 눈썰미가 아닙니다. 더 어설픈 눈높이가 아닙니다. 1930년대에는 그저 1930년대 눈썰미이고, 1950년대에는 그예 1950년대 눈높이예요. 당신이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하고 어깨높이를 맞추고, 당신이 사진과 함께 마주하는 이웃들하고 손을 맞잡습니다. 애써 부드러운 옷을 입지 않습니다. 온몸이 부드러워 부드러이 바라보며 부드러이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일부러 살갑게 웃지 않습니다. 온마음이 살가우니까 살가이 눈웃음을 지어 살가운 웃음을 사진으로 옮겨 냅니다.

 2000년대 한복판을 살아온 우리들이라면 2000년대 한복판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으면 됩니다. 2020년대 한가운데를 살아갈 우리들이라면 2020년대 한가운데 삶무늬를 아낌없이 사진으로 찍으면 돼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찍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웃음꽃대로 찍습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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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2-12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파란놀 2011-02-12 20:22   좋아요 0 | URL
이 사진책을 사려고 꽤 오래 기다렸어요. 못 살 줄 알았는데, 두 주 남짓 기다린 끝에 뜻밖에 살 수 있었답니다. 좋은 사진이나 좋은 글이라면, 세상보다 사람들 마음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011-02-13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1-02-13 05:24   좋아요 0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최종규'입니다.
^^;;;;;
 
名作寫眞館―小學館ア-カイヴスベスト·ライブラリ- (11) (ムック)
木村 伊兵衛 / 小學館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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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진에 훌륭한 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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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꿈 과학에 실어 - 대동문예 6
이승기 지음 / 대동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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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이한테 싣는 꿈 한자락
― 이승기, 《겨레의 꿈 과학에 실어》



- 책이름 : 겨레의 꿈 과학에 실어
- 글 : 이승기
- 옮긴이 : 김남현
- 펴낸곳 : 대동 (1990.5.10.)



 일본 제국주의한테서 식민지살이를 풀려난 지 예순 해가 지났습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신 분들은 어느덧 예순을 넘기고 일흔 가까운 나이가 되며 머잖아 여든 아흔이 되겠지요. 앞으로 몇 해 지나지 않아 해방둥이였던 분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없겠구나 싶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나날 맛보던 아픔과 쓰라림을 떠올릴 수 있는 분들은 그예 자취 없이 사라질 테지요.

 그러면, 우리들은 일제강점기에 어떠했는지, 또 해방이 되고 난 뒤 어떠했는지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때 이야기를 얼마나 적바림해 놓았을까요.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담은 책이 ‘제대로’ 팔리거나 ‘널리’ 읽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가 겪은 이야기와 거쳐야 했던 이야기를 얼마나 알뜰하게 남겼을까요. 북쪽사람이 ‘북침’이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북조선은 어떠하고 남한은 어떻다고 하든, 우리들 남녘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우리네 이야기를 얼마나 갈무리해 놓았는가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채 서로 반쪽짜리 정보와 생각과 슬기로 일구는 문화와 사회는 이대로 또 얼마나 넉넉히 남녘끼리든 북녘끼리든 알뜰살뜰 주고받으면서 서로서로 제 살림을 키우는가요.


..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후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미제국주의의 통치하에서는 와이셔츠 하나 만족스럽게 살 수 없었다. 하물며 양복, 외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생활이었다. 조국을 빼앗겼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25년 동안 이국땅에서, 운명의 갈림길에 세워진 옥중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사 제쳐놓고 귀국한 고향땅, 남조선. 그곳은 지배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속과 박해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81쪽)


 젊은 날 읽고서 헌책방에 내놓았던 책을 하나둘 다시 사 모읍니다. 예전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예 거들떠보지 않던 책까지 하나둘 사 모으며 읽습니다. 저로서는 제 깜냥껏 제 생각과 마음을 키우며 이 땅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좋아하지 않으니 애써 안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제가 아닌 제 아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제도권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저와 옆지기한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싶을 수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 이리 살피고 저리 헤아리고 싶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로서 옳고 바른 생각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도 좋지만, 아이 스스로 이 책 저 책 돌아보면서 스스로 깨우치는 일도 좋습니다. 먼 뒷날을 헤아리면서, 아이 스스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이든, 아이가 궁금해 할 만한 책이든 갖춥니다. 이문열 문학도 갖추고, 김동인 소설이나 서정주 시집도 건사해 놓습니다. 허영만 님이 그린 《오! 한강》뿐 아니라 《퇴색공간》 같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부역만화도 챙깁니다. 노무현 님이 대통령으로 뽑히자 봇물처럼 터져나온 만화책이라든지 이명박 님이 대통령이 되니 숱하게 그려지는 만화책이라든지 하나하나 갈무리합니다.

 이 책들을 읽어내거나 받아들이는 몫은 아이한테 있습니다. 다만,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자료가 아닌 이쪽저쪽 골고루 모아 놓는 자료를 함께 보여주면서, 아이 나름대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아름다운가를 찾아나가도록 길동무 노릇을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니, 맞고 옳고 틀리고 그르고를 떠나, 참다운 삶인지 착한 넋인지 고운 길인지를 알아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그만, 이제 충분해. 정치 얘기는 그 정도로 하세. 우리는 정치가가 아니니까……. 그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일뿐이야. 해방된 조국이 이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치는 그렇다치고 교육계의 사정은 어떻게 돼 있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  (36쪽)


 오늘날 한국 사회는 ‘책이 버려지는’ 사회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늘 꾸준하게 있습니다. 제법 많습니다. 다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한쪽으로 치우친 책만 읽습니다. 또한, 제 삶에서 잘못되거나 뒤틀린 대목을 바로잡도록 이끄는 책은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날씨가 미쳐서 걱정이야,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치솟아서 큰일이야.’ 하고들 말하지만, 정작 날씨가 왜 미쳐 가는지를 알아보는 책은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책을 읽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고치거나 추스르지 않습니다. 기름값이 오를 때 우리 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은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기름값이 오르는 만큼 돈을 더 벌어서 기름값을 대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이리하여 한국 사회에서는 ‘책이 버려집’니다. 새로 나오는 책도 서너 달쯤 지나면 새책방 책꽂이에서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판이 끊어지기도 하고 출판사가 문을 닫기도 합니다. 때를 놓치고 못 장만하면, 그 책을 다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나라 도서관에서 ‘새로 나오는 모든 책’을 갖추고 있느냐? 아니지요. 그렇게 못 하잖습니까. 더구나,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을 뺀, 전국 곳곳에 있는 지역도서관 형편은 어떠한가요.

 ‘책이 안 버려지’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주 적습니다. 무척 조그맣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하나하나 눈을 밝히면서 찾아내고 캐내려 합니다. 김지하 수필책도 사 놓고, 하길종 수필책도 사 놓으며, 이경자 수필책도 사 놓고, 천상병 수필책도 사 놓습니다. 프랭크 기브니 책도 사 놓고, 타르코프스키 책도 사 놓으며, 스콧 버거슨 책도 사 놓습니다. 간디 님이 남긴 《날마다 한 생각》뿐 아니라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도 사 놓고, 고암 이응로 님 이야기책도 장만해 놓습니다. 김환기 님 이야기책도, 추송웅 님 이야기책도 들여놓습니다. 제가 이 모든 책을 다 읽어내면 저로서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믿고, 제가 이 모든 책을 못 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이가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으면 되지, 하고 믿습니다. 우리 아이가 못 읽어내더라도, 우리 동네 이웃들이 도서관에 찾아와서 읽어 줄 수 있다면 되지, 하고 믿습니다.


.. 이날 밤 나는 막내 종민이를 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고향 생각을 했다. 내가 가져온 섬유를 조금씩 손에 쥔 채로 혜인이도, 종과도, 종택이도, 혜경이도, 혜숙이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내 아내도 잠들었다. 가족 모두가 행복한 잠에 빠져 있었다. 나만 혼자 가벼운 숨소리를 내고 있는 막내를 안고 남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내 누나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남반부에 있는 과학자들의 일도 끊임없이 생각났다. ‘○○박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과학계의 거물인데 그 재능이 때를 못 만나 …….’ ..  (108쪽)


 일제강점기 한복판을 살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어수선한 때에 북녘땅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틀던 과학자 이승기 님 삶을 담은 책 하나를 읽습니다. 이런 책이 용케 남녘에서 나와 정식으로 나오기도 했구나 싶어 놀랍습니다. 아마 6·29선언 뒤끝으로 북녘 이야기 몇 가지가 풀리면서 나올 수 있던 책이지 싶은데, 과학자는 과학을 이야기하지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정치빛이 아예 없을 수 없다지만 과학은 과학입니다. 집에서 아이를 낳아 살림하는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낳아 살림하는 사람이지, 남녘사람 북녘사람 일본사람 미국사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오롯하고 튼튼한 아이로 자라야 합니다. 씩씩하며 다부진 아이로 커야 합니다. 착하며 어여쁜 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아이로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똑똑한 아이보다는 착한 아이이기를 꿈꿉니다. 잘난 아이보다는 살가운 아이이기를 바랍니다. 돈 잘 버는 아이보다는 사랑 예쁘게 나누는 아이이기를 비손합니다.

 누군가는 우리 겨레 꿈을 과학에 싣고, 누군가는 우리 겨레 꿈을 우리 아이가 살아갈 앞날을 헤아리며 멧골자락 조그마한 보금자리에 싣습니다. (4341.5.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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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32] 스타일아이디

 은행은 사람들이 몸소 찾아가서 볼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집이나 일터에서 전화를 걸어 볼일을 볼 수 있는 틀이 나왔고, 이러한 틀을 가리켜 ‘폰뱅킹’이라 했습니다. 전화로 은행 볼일을 보니까 ‘전화은행’이지만, 굳이 영어로 ‘폰뱅킹’이라 했습니다. 이제는 집이나 일터에서 인터넷을 켜고 은행 볼일을 봅니다. 그러니, ‘인터넷은행’이나 ‘누리은행’이라 할 만하지만, 이때에도 애써 영어로 ‘인터넷뱅킹’이라고만 일컫습니다. 이러다 보니, 누리은행들이 쓰는 이름도 으레 영어로 붙이고, 통장도 영어로 된 이름이 많습니다. ‘스타일아이디’란 무엇을 가리키려나요. 이러한 틀을 반드시 영어로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래도 ‘빠른조회’ 같은 이름이 보이니 반갑습니다. 이런 자리에도 ‘퀵’이나 ‘스피드’ 같은 영어를 쓸 법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자리까지 영어를 쓴다면 인터넷을 켜서 은행 볼일을 보려는 사람들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되겠지요.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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