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호의 카메라 - 세상에 풀어놓은 마음의 모습들
권영호 지음 / 앨리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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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8] 권영호, 《권영호의 카메라》(앨리스,2010)



 사진찍기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든, 사진찍기를 할 뿐 돈벌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든, 언제나 사진을 좋아할 수 있으며 사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진하고 동떨어지거나 사진을 모를 수 있습니다. 사진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해서 사진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배우려고 힘들여 애쓴다 해서 사랑을 알 수 없고, 밥이나 농사나 하늘이나 흙이나 사람을 배우려고 용쓴다 해서 밥이든 농사이든 하늘이든 흙이든 사람이든 속속들이 알 수 없는 흐름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는 권영호 님이 《권영호의 카메라》라는 조그마한 사진수필 하나 내놓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수필에 담은 권영호 님 사진은 ‘돈 받고 팔 생각’으로 찍은 사진이라거나 ‘사진잔치 열어 사람들한테 내보이려는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라 여기기 힘듭니다. 그저 권영호 님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찍은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사진길을 걷거나 사진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한테 ‘사진을 찍는 마음’이 어떠할 때에 참으로 즐거울까 하고 이야기를 건네려고 스스로 기쁘게 찍어 스스로 신나게 엮은 사진이리라 생각합니다.

 권영호 님은 《권영호의 카메라》에서 말합니다. “내 스타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 그저 잘 찍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넘어서 내 생각, 내 기분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진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31쪽).”고. 그런데 권영호 님은 ‘권영호 님 삶에서 어떠한 모습’이 보이도록 하고 싶은지까지 말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찍은 사람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잘 찍든 못 찍든 찍은 사람 느낌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며 어떤 느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가를 먼저 잘 알아채야 합니다. 스스로 먼저 잘 알아챌 때에 나 스스로 어떠한 사진을 찍으면서 나누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정물사진을 보면서도 ‘생동감을 느낍’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살아가면, 이이가 찍은 노래꾼 이효리 님이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서도 ‘슬픈 마음에 푹 젖은 채’ 보내는 나날을 느끼거나 읽습니다.

 사진쟁이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단추를 누르는 일은 사람 아닌 기계를 시켜서도 한다지만, 어떠한 모습을 어떠한 크기와 질감과 빛그림으로 담으려 하는가는 ‘기계 아닌 사람’이 ‘쇠붙이 아닌 따뜻한 가슴’에 따라 담기 마련입니다. 사진을 주문한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찍어 준달지라도, 사진쟁이 스스로 아주 기쁜 나날이라면 ‘슬픈 모습’을 찍어 달라 했는데, 막상 하나도 안 슬픈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기쁜 모습을 찍어 달라 했으나 사진쟁이가 더없이 슬픈 나날을 보낸다면 하나도 안 기쁜 모습만 찍고 말아요.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연속극에서든 영화에서든 나 스스로 연기를 하는 배역에 맞추어 내 삶을 바꿉니다. 내 삶을 내 배역에 맞추어 바꾸지 않고서야 연기를 하지 못합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내 배역에 따라 삶이 바뀌기 때문에, 자칫 마음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말 내 삶에서도 나쁜 짓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착한 일 하는 배역을 맡으면 참으로 내 삶에서도 착한 몸가짐이 스스럼없이 배어듭니다.

 상업사진을 하면서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이란, 언제나 내 삶을 바꾸어야 하는 사진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영화 배역에 따라 늘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살아숨쉬는 내가 아니라 ‘이웃 삶에 오롯이 내 모두를 맞추어 살아내는 내’가 되어야 해요. 권영호 님이 하는 사진찍기란 ‘나를 드러내는 사진찍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사진찍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권영호 님 당신은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숱하디숱한 사진을 찍는 동안 정작 권영호 님 당신을 즐거이 찍을 길은 없으니까요.

 이리하여, 《권영호의 카메라》를 들여다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잘 찍지 못한’ 사진이 수두룩합니다. 어설프다든지 ‘하얀 옷 입은 어린 아이’한테 지나치게 환상을 품는 모습마저 드러납니다.

 그러나, 권영호 님이 이제껏 권영호 님 삶과 모습과 꿈을 즐거이 나누는 삶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흐름을 돌아본다면 더없이 자연스럽거나 마땅한 노릇입니다.

 누구든 빈틈없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꽉 짜인 채 어수룩한 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띄어쓰기를 틀리기도 하고, 말을 하면서 앞뒤가 안 맞기도 하며, 물을 쏟거나 밥을 태우거나 약속을 깜빡 잊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권영호의 카메라》에 담긴 권영호 님 사진은 이렇듯 ‘깜빡깜빡 하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한’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납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 내음이 살며시 묻어나려 하다가 자꾸만 ‘주문자 입맛에 맞추어 사진을 찍던 버릇’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더 수수하게 더 투박하게 더 조촐하게 당신 사진길을 좋아하는 이야기를 펼칠 듯하다가도 자꾸 겉멋을 부립니다.

 겉멋 부리기가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문자 입맛에 맞추’는 일은 멋을 부리고 맛을 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찍은 사진에서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내 사진맛이란 굳이 더 멋부리거나 맛내는 조미료를 쓴다 해서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그 소녀를 카메라에 담으며 나는 상상을 자유롭게 펼친다. 사진 속 소녀는 지금 봐도 참 어여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소녀를 어여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9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야 할 때에는 사진쟁이로서는 돈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찍고 돈을 받으면, 나는 사진을 찍겠지요. 그저 어여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언제나 어여쁘구나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어여쁘구나 하고 느낄 때에 어여쁘다고 느끼도록 사진을 찍어요.

 사진쟁이란, 사진찍기로 돈을 벌든 사진찍기를 그저 즐기든, ‘내 생각에 맞추어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맞추어 생각을 하는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삶에 따라 찍는 사진’인지 ‘사진에 따라 보내는 삶’인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결을 사랑하면서 아끼느냐에 따라 삶도 사람도 사랑도 사진도 달라집니다.

 권영호 님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아주 솔직한 순간, 솔직한 눈빛. 마치 무성영화를 볼 때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 웃고 있는지 다투고 있는지 슬퍼하는지 화가 나 있는지 굳이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처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은 그것 자체로 모든 것을 다 말해 준다. 그런 얼굴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111쪽).” 하고 말합니다만, 권영호 님이 살아가는 틀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르나, 이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기란 쉽습’니다. 그런 얼굴을 만나 사진으로 찍기도 쉽습니다.

 중국에서 만난 흰옷 입은 아이를 찍은 사진은 무슨 사진이었을까요. 이 사진은 사진으로 모두를 다 말해 주지 않던가요. 권영호 님 스스로 ‘모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사람을 만나 사진을 찍는 일’을 겪으면서도, 이러한 일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가누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스스로 겪는다 해서 누구나 다 알아채지는 않는다지만,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나날인 줄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바라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더 멋스러이 찍고픈 사람은 참말 더 멋스러이 찍습니다. 더 아름다이 찍으려 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이 찍어요.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으려면 더 가난해 보이도록 찍습니다.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자니 참말 더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찍고 말아요.

 골목동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으레 골목동네를 ‘골목집 = 달동네 집 = 가난’이라고 공식을 짜맞추어 사진을 만듭니다. 골목동네를 살가이 사귀면서 사진을 못 찍기 일쑤입니다.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기에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골목동네를 사귀는 일이 어렵지 않으나, 사진쟁이 스스로 내 삶을 바치고 품을 들이면서 짬을 내어 가까이 다가서며 만나지 않으니까, 늘 판에 박히거나 틀에 박힌 사진만 찍고 맙니다.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주문한 사람한테 보내 줄 사진을 찍자면, 주문한 사람이 어떠한 마음이거나 뜻이요 어디에 어떻게 쓰며 모델은 어떤 느낌이 나야 하는가를 골고루 살펴야 합니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을는지 밖에서 찍을는지, 한국에서 찍을는지 나라밖에서 찍을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재야 합니다. 곧,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주문을 받아 사진을 만들어야 합니다. 깊이 사귀는 삶이라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에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훌륭하다 싶은 작품 하나 태어납니다.

 다큐사진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영정사진을 찍는다 해서 다를 까닭이 없어요.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저 기계처럼 후다닥 영정사진을 찍는다면, 영정사진으로 찍히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 분 한 분 당신 삶을 기리고 아끼면서 고맙게 찍는 매무새일 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사진으로 찍히는 때에 웃고 울면서 좋아합니다.

 사진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사진찍기는 내 삶대로 찍으니까 아주 쉽습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면서 하는 사진찍기인 만큼 어려울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찍고픈 사진감에 따라 내 삶을 맞추거나 고치거나 가다듬으면 하나도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사진찍기가 어렵다면, 나 스스로 내가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진감으로 깊이 스며들거나 파고들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손잡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살가이 사귀거나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서야 무슨 사진을 찍겠습니까. 내 삶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인 줄 느끼고, 내 삶을 담아서 나누는 사진이라고 헤아리며, 내 삶과 이웃 삶을 서로 사랑하는 길을 찾는 사진이구나 하고 돌아본다면 내 마음밭도 우리네 사진밭도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 권영호의 카메라 (권영호 글·사진,앨리스 펴냄,2010.7.7./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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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79] 아침&햄에그모닝

 빵이름을 굳이 한국말로 이름을 붙여 한글로 적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먹는 빵이라면 굳이 영어로 이름을 붙여 알파벳으로 적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달걀 넣어 아침에 먹는 빵이라면 ‘햄달걀아침빵’이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침 차림’이나 ‘아침 메뉴’조차 아닌 ‘Morning Menu’인 나머지, 달걀을 달걀이라 말하지 않고 ‘햄에그모닝’이라 말하고야 만다. (4344.2.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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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는 책이 없는 나라
― 해적판,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



- 책이름 :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
- 글쓴이 : ?
- 펴낸곳 : 신조사 (1972.8.15.)


 책을 말하는 책이 요즘 들어 퍽 많이 나옵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까나, 어떤 바람이라고 할까나, 그동안 거의 없던 ‘책을 말하는 책’이 나오는 까닭은 좀 얄궂다고, 꽤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합니다.


.. 읽는 책의 선택과 읽지 않는 책의 선택은 표리의 관계가 있다.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위해 책을 읽는다. 그밖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정하는 것도, 책을 읽지 않는 연구의 첫발이고 기본인 셈입니다 ..  (116쪽)


 요즈막에 쏟아지는 ‘책을 말하는 책’은 ‘우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이야기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 이야기한다거나 ‘깊이’ 이야기한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신 뜻과 생각과 마음에 맞게 ‘다 다르게 반갑게 맞이할 만한 책나라’를 열어젖히는 이야기까지 나아가지도 못한다고 느낍니다. 뭐랄까요, 우리가 읽을 책이 있다면 ‘읽을 수 없는 책’이 있는데, 읽을 수 있는 책과 읽을 수 없는 책을 제대로 나누어 말하지 않거든요. 아니, 못한다고 할까요.

 ‘책을 말하는 책’이 많이 나오는 까닭이라면, 요즈음 들어 참으로 수많은 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책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큰 책방에도 제대로 꽂히지 못합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인터넷에도 제대로 못 알려진 채 사라지는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나온 ‘책을 말하는 책’들은 ‘반갑게 나왔으나 빛을 못 보는 책’은 거의 다루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안 다룬다고 해야 맞습니다. 굳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만한 책, 굳이 이런 책에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훤히 아는 책밖에 못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책을 말하는 책’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루에 새로 나오는 책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될 테고, 한 주면 수백 가지에서 천 가지, 한 달이면 만 가지가 넘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들은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요. 바지런히 읽어서 날마다 두 권씩 읽는다 해도 한 달 동안 100권 읽기 어렵습니다. 한 해에 1000권 읽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책만 읽고 살아갈 수는 없는 터. 그렇다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책 가운데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골고루 알맞을 책’이나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따로따로 반가울 책’은 어떻게 가려야 좋을까요. 어쨌든 우리 스스로 눈길과 눈높이를 추슬러야 하지만, 눈길과 눈높이는 어떻게 추슬러 나가야 좋을까요.

 ‘책을 말하는 책’은 이런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읽으면 좋은 책’과 ‘읽어야 할 책’만 아니라 ‘읽지 않아도 되는 책’과 ‘읽을 까닭이 없는 책’과 ‘읽어서 시간만 버리는 책’을 저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말하고 이끌 수 있어야 좋아요.


.. 옛날 사람뿐 아니라 지금의 독서가라도, 이를테면 아랑은 “되풀이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이라면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고 했읍니다. 그는 다시 일보 전진하여 “무릇 책을 읽는데 노으트를 할 필요는 없다. 노으트를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만한 일이라면, 잊어버리는 편이 위생적이다. 잊혀지지 않을 만한 일이라면, 일부러 종이에 적을 것까지도 없다”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 “늦게 읽어라” 하는 것은 “고전을 읽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또 반대로 “고전을 읽어라” 하는 것은 “늦게(천천히) 읽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겠지요 ..  (53∼55쪽)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이라는 책이 1972년에 나왔습니다. 얼핏얼핏 ‘일본책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 있지만, 군데군데 ‘한국사람이 썼구나’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글쓴이를 밝히지 않고 ‘편집부’라고만 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책을 어떻게 마주하면 좋은지, 책이란 우리 삶에 무엇이며, 책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꿀 수 있는지를 참 단출하고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책이 나온 지 서른다섯 해가 지난 2007년이지만, 아직까지 이만큼 제 눈을 밝혀 주는 ‘책을 말하는 나라안 책’은 눈에 안 뜨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제가 못 알아보았다고 해야 옳고, 못 찾았다고 해야 올바르겠지요. 참말, 내 눈이 더없이 얕고, 내 마음이 그지없이 좁은 터라, 좋은 책을 좋은 눈썰미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해야 맞겠지요. (434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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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 잘못 쓰는 말을 왜 돌아보는가


 잘 쓰는 말이 되려면 내 마음이나 뜻을 잘 나타내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 쓰는 말이라 한다면 내 마음이나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말입니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나 혼자만 잘 안다 해서 잘 쓴 말이나 글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나 내 글을 읽는 사람이 함께 잘 알아듣도록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잘 쓴 말이나 글입니다.

 어린 동생한테 말을 건다고 생각해 보셔요. 말사랑벗이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나 취미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들려준다고 헤아려 보셔요. 말사랑벗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말사랑벗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한테는 낯설거나 영 모를 이야기를 ‘어떠한 말’로 들려주는지를 곱씹어 보셔요.

 학교에서 말사랑벗을 가르치는 분들은 어떤 말투와 낱말로 교과서를 가르치는지 짚어 보셔요. 집에서 어버이가 쓰는 말은 어떠한지 되뇌어 보셔요. 동무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랑, 동네에서 흔히 듣는 말이랑, 신문이나 책이나 교과서에 적힌 글이랑, 가만히 견주어 보셔요.

 모든 말과 글은, 첫째, 잘 알아들을 수 있게끔 써야 합니다. 잘 알아듣기 힘들게 썼다면 옳지 못한 말이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말과 글은, 둘째, 옳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말법을 옳게 맞추고 말투를 바르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모든 말과 글은, 셋째, 슬기롭고 착하게 써야 합니다. 어영부영 말할 때에는 어영부영 듣고 맙니다. 어설피 말하니까 어설피 듣습니다. 모든 잘잘못은 말이나 글을 처음 꺼낸 사람한테서 비롯합니다. 슬기롭게 말을 한대서 꼭 슬기롭게 듣는다 할 수 없으나, 슬기롭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 슬기로이 말하는 넋을 추슬러야 합니다. 착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착하게 듣지 않는 사람이 많으나, 착하게 어깨동무하기를 꿈꾸면 착하게 말하는 얼을 다스려야 좋아요.

 말하기와 글쓰기 밑틀은 이 세 가지로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인다면, 맞춤법까지 잘 맞추고 띄어쓰기를 알맞게 살필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테고, 어차피 나눌 말이라면 한결 따스하면서 살가이 펼칠 때에 더욱 좋습니다. 군더더기 없도록 돌아보면 더 좋고,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않은 알맞춤한 길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참으로 좋아요.

 다음으로 하나를 더 살핀다면, 내가 쓰는 말이 참말 우리말답다 할 만한지 살핀다면 아주 고맙습니다. 이 대목까지 바라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말사랑벗은 영어를 더 잘 쓰거나 한자 지식을 더 익히거나 갖가지 자격증을 더 갖추도록 내몰리거든요. 바쁘고 힘든 나머지 말사랑벗 스스로 말사랑벗이 날마다 쓰는 말글을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이 건사할 겨를이 없어요. 대학입시로도 바쁠 뿐더러, 대학입시가 아니라 이 일 저 일 아주 고단할 텐데, ‘참말 우리말다운지’를 살피라 하는 일은 무거운 굴레를 뒤집어씌우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말하기와 글쓰기 밑틀은 딱 세 가지로만 듭니다. 더 기운을 낼 수 있거나 더 사랑을 쏟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를 읽으면서 생각을 기울여 주셔요. 괜히 섣부른 지식쌓기로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를 읽다가는 머리가 핑핑 돕니다. ‘우리말 달인’이 되자며 읽을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가 아니에요. ‘우리말 깨끗이 지키기’를 하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또한 아닙니다. 말사랑벗 스스로 깨끗하다고 느끼는 삶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저절로 우리말을 깨끗하게 지킵니다. 나 스스로 맑으면서 고운 삶을 돌본다면, 내 넋과 말은 시나브로 맑으면서 고운 결을 이을 수 있어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는 말꼬리잡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얄궂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해서 “당신은 뭔데 말을 요로코롬 하우?” 하고 따지자는 말꼬리잡기가 아니에요.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면서 내 삶을 바르게 추스르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는 가운데 내 마음밭을 알차게 일구겠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예요. 책을 읽을 때에 더 깊이 읽으면서 더 제대로 헤아리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내가 늘 쓰는 우리말이 얼마나 우리말다운가를 톺아보면서 내 꿈을 한껏 알뜰히 보살피고프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이 말은 맞고 저 말은 그릇되니까 엉터리라 일컫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또한 아닙니다. 이렇게만 써야 하고 저렇게는 써서는 안 된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도 아니에요.

 우리말이 어느 만큼 우리말다운가를 살피면서, 우리말다움을 빛내는 길이란 어떻게 찾아서 걸어가야 즐거운가를 함께 어깨를 겯고 생각하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로 삼아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 상자에 담아.”랑 “이 박스에 담아.”를 놓고 본다면, “이 상자에 담아.”로 써야 알맞고 올바르지만, “이 박스에 담아.”라 말하는 사람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해서는 안 됩니다. 나 스스로 즐거이 옳고 바르게 말하면서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됩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꿈을 빛내는 길에서 함께할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4344.1.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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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1
― 대학교 바깥에서 사진 배우기



 저는 대학교 사진학과나 사진과라든지, 고등학교 사진과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이러한 곳을 다니면서 어떠한 사진을 배워 어떠한 삶을 일굴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은 대학교를 다니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대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으로서 사진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 하는 한 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으며, 사진을 전공으로 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다섯 학기를 다니고 대학교를 그만두던 때는 1994∼1998년입니다. 사이에 군대살이를 스물여섯 달 했기에 햇수로 치면 조금 깁니다. 저는 대학교를 한 학기 다닌 1994년 여름에 ‘대학교가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대학교에 들어오자며 그토록 푸른 날을 아깝게 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쯤 된다면 제대로 학문을 파고들면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뜰히 보듬는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라는 데는 고등학교하고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사이사이 강의가 비는 때마다 도서관에 가는 선·후배는 찾아볼 길이 없으며, 도서관에 간달지라도 책을 읽으러 가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도서관에 가는 까닭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하고, 보고서 쓰는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도서관에 갖춘 책부터 그리 안 많기도 한데다가 대학생이 도서관에서 빌린다는 책은 ‘유행하는 소설’에 그칩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대학생이 빌린 다음 돌려주는 책을 책시렁 제자리에 꽂는 일’을 한 해 동안 해 보면서, 대학생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엉터리로 읽고 함부로 다루는가를 깨달았습니다.

 1995년 가을에 군대에 들어가기 앞서 휴학계를 냈지만, 제 마음은 휴학계 아닌 자퇴서를 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말렸기에 휴학계로 그쳤고, 1998년에 군대살이를 마친 뒤에도 어머니가 한 해만 더 다녀 보라 해서 한 해만 더 다닌 뒤에 다시금 휴학계를 냈습니다. 저는 따로 나와 살며 살림돈과 책값은 제가 벌어서 댔으나 비싼 배움값은 아버지한테서 빌려 댔습니다. 자퇴를 하면 그동안 빌린 배움값을 은행에 한꺼번에 갚아야 한대서 휴학계를 냈습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에 겪어 보니, 한국땅에서 대학교는 학문이나 문화나 창작이나 꿈을 키워 주지 않습니다. 대학교는 학점과 졸업장을 주는 곳입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나와서는 문학을 하든 학문을 하든 예술을 하든 정치를 하든 경제를 하든 농사를 하든 할 수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기술자가 될 만큼 여러 가지 손재주를 가르쳐 주지도 않습니다. 기술자가 되는 손재주는 학원에서 가르쳐 줍니다. 모든 배움과 재주는 스스로 찾아서 갈고닦아야 합니다. 교재로 쓰는 책을 읽는다 해서 내가 전공으로 삼은 학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교재 아닌 다른 책으로 무엇이 있는가를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모두 스스로 찾아야 하고 손수 살펴야 하며 몸소 곰삭여야 합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하든 글을 하든 그림을 하든 하자면 ‘졸업장 없으면 받아 주는 데가 없다’시피 하니까 대학교에 안 가면 안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 강단에도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강사나 교수 일을 하면서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애씁니다. 다만, 이분들은 알뜰살뜰 가르치려고 애를 쓰시지만 몇 사람 안 되고, 몇 사람 안 될지라도 참으로 애쓰시는데, 워낙 고등학생 때까지 입시지옥에 시달려 ‘스스로 찾아서 배울 줄 모르는’ 아이들한테 ‘스스로 찾아서 배우기’를 알려주려고 애쓸 뿐이지, 이밖에 다른 어떠한 이야기도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입시교육에 찌든 때를 벗겨 주는 대학교라고 할까요. 그나마, 이마저도 스스로 더 애써서 내 허물을 벗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알아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스스로 허물벗기를 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허물벗기를 못하지만, 대학교를 다녀도 허물벗기를 못합니다. 스스로 허물벗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허물벗기를 하지만,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허물벗기를 합니다.

 1994∼1998년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내야 하던 배움값은 한 해를 줄잡아 150만입니다. 2010년대에 들어선 오늘날 대학교를 다닐 때에 내야 하는 배움값은 한 해를 줄잡으면 1000만 원입니다. 숫자로 치면 오늘날이 훨씬 비싼 듯하지만, 물건값 오름세를 따지면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똑같습니다.

 제가 대학생 아닌 여느 사회사람으로서 책을 가까이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일구면서 책과 사진을 배우려 했다면, 한 해 150만 원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그무렵 저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먹고살았으며, 신문배달 한 달 일삯이 1995년에는 16만 원, 1998년에는 32만 원이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밥값이랑 잠값을 대주었으니 밥값이랑 잠값을 따지면 꽤나 많이 받는 셈이에요. 이런 살림에서 150만 원이면 알음알음으로 잠자리를 얻어서 자고 밥도 얻어먹는다면 한 해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한국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여인숙 작은 방에서 잠을 잔다 해도 석 달 넘게 다닐 수 있어요(1994∼1998년에). 요즈음 2010년대에는 여인숙 작은방을 15000원 받고 시골 여관이면 20000원 받을 테니까 한 해 1000만 원이면 여관만 돌면서도 잠값이 다 나오고 밥도 웬만큼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하고 자전거를 한 대씩 장만해서 한 해 동안 나라안 이 마을 저 마을 돌면서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마주할 수 있어요. 나와 함께 한국말을 쓰면서 한국사람으로 지내는 이웃이 어떠한 삶을 일구는가를 마주할 수 있어요. 때때로 어느 마을에서는 일손을 거들면서 여행삯을 보탤 수 있겠지요.

 어떤 지식을 더 갖추었대서 사진을 더 잘 찍지 않는 만큼, 더 두루 다니며 더 깊이 사람을 사귀면서 지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가 어디에서 누구를 왜 어떻게 언제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를 시나브로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알아야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살아야 찍는 사진입니다. 만나고 마주하며 부대끼면서 비로소 언제 어디에서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하는가를 깨달으리라 봅니다.

 다큐사진은 나라밖 인도나 티벳이나 중남미나 아프리카에 있지 않습니다. 패션사진은 서울 강아랫마을이나 스튜디오에 있지 않습니다. 예술사진은 옷 벗긴 모델 아가씨 몸매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깃듭니다. 살아도 사람이 살고, 살아도 마을에서 사람이 삽니다. 내 삶을 보고 이웃 삶을 보아야 사진으로 어떤 이야기를 엮으면 좋을까를 알아챕니다. 내 삶을 살피며 동무 삶을 살펴야 사진으로 어떤 삶자락을 담으면 즐거울까를 알아냅니다.

 대학교 바깥에서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사진 학문’이 아닌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를 샘솟도록 이끄는 물줄기이자 밑바탕’을 배운다는 소리입니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든 대학교 바깥에서 스스로 사진을 익히든, 사진을 찍는 나부터 사람이고, 사진에 찍히는 모든 모습은 사람들 모습이거나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거나 사람들 꿈꾸거나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자연 풍경을 찍는달지라도 자연 풍경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 터전이 가장 스스럼없이 펼쳐진 풍경’입니다. 풀과 나무와 햇볕과 물과 바람이 없이는 사람이 살아가지 못해요. 도시만 있으면 사람은 몽땅 죽습니다. 시골 논밭이랑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끔한 자연 터전이 함께 있어야 사람이 살아갑니다. 공장에서 음료수와 공산품과 식료품을 만들어 낸다 해서 사람이 살 수 있지 않아요. 모든 공장 물건은 자연에서 재료를 얻어서 만듭니다. 자연 풍경 사진이랄지라도 사람 내음과 빛깔과 살결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가끔 ‘출사’를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늘 내가 부대끼는 자리에서 사귀는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끔 내 매무새를 다스리는 사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사진을 돌아보면, 다큐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또 무슨무슨 이름을 내거는 사진이든 ‘출사 사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사진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처음부터 ‘출사 사진 배우기’ 아닌 ‘살아가는 내 하루를 사랑하는 사진 배우기’를 즐거이 꾸렸던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4344.2.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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