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과 진중권


 김규항 님은 진중권 님을 놓고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고 이야기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말이 옳다. 진보를 내세우는 ‘진보 아닌 사람’ 쪽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말하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하는 일은 잘못이다. 더군다나,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를 이루려고 애쓰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한다면 더 크게 잘못이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기보다 머리와 말로 ‘나는 진보요!’ 하고 외치기만 한다면 끔찍하게 잘못이다.

 나는 진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수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이거나 수구이거나 대수롭지 않다. 사람다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좋다. 누군가는 개혁이나 진보를 좋아할 수 있고, 누군가는 보수나 수구를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옳고 바르게 즐겨야 한다. 나쁘거나 짓궂게 즐길 노릇이 아니라, 옳고 바르며 착하게 즐겨야 한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낚싯대로 고기를 잡든 그물로 고기를 잡든 누군가 고기잡이를 해 주어야, 등푸른고기이든 속살하얀고기이든 장만해서 먹을 수 있다. 내가 먹는 물고기를 잡아서 팔아 주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물고기를 팔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물고기를 돈 몇 푼으로 사서 먹을 뿐이다. 그저 물고기 한 마리를 사더라도 되도록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사려고 한다. 멸치이든 오징어이든 삼치이든 동태이든, 생협을 거친 물고기를 살 수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나는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은 소이든 돼지이든 닭이든 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소고기이든 돼지고기이든 닭고기이든 먹곤 한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고기를 먹을 일은 참말 한 차례도 없으나,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언제나 고기를 먹어야 한다. 내가 먹는 소나 돼지나 닭을 키우는 사람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개혁인지 보수인지 알 길이 없다. 고기집 일꾼이 진보인지 수구인지 알 노릇이 없다. 그저 고맙게 먹는다.

 내가 읍내나 면내에 마실을 가려고 타는 시골버스를 모는 일꾼이 진보인지 개혁인지 수구인지 보수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하루에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때 맞춰 타면서 고맙다고 인사할 뿐이다.

 진중권 님은 “물론 A급 좌파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궁금하다. 사람을 이렇게 등급으로 나눈다고 할 때에 ‘등급으로 나누었’는데에도 스스로 나눈 등급에 드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 님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진중권 님과 가까이에 있는 동무나 이웃은 누구일까. 진중권 님이 설날이나 한가위 때에 마주하는 살붙이는 어떤 사람들일까. 진중권 님을 낳아 키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진중권 님이 날마다 먹는 밥은 누가 흙을 일구어 마련했을까. 참말로 이 나라에, 또 이 지구별에 ‘A급 좌파’는 없을까.

 두 사람, 김규항 님과 진중권 님이 불태우는 말나눔은 참으로 부질없다고 느낀다. 아니, 덧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토록 부질없고 덧없는 말나눔이 아니고서는 생각을 나눌 수 없는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말나눔으로 서로서로 생각을 펼치거나 생각을 깨우칠밖에 없다고 느낀다.

 나는 딱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삼월 삼일, 곧 삼짓날인 오늘 자가용 아닌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골 아무 데로나 가서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논둑길에 돋는 새봄 새 풀싹을 들여다보셔요. 이 풀싹 아무 풀이나 톡 뜯어서 옷섶으로 흙을 슥슥 닦은 다음에 입에 넣어 살살 씹어 보셔요. 풀싹이 겨울을 이겨내어 봄맞이 햇살을 받으며 잎을 틔운 맛과 내음을 맞아들여 보셔요. 진보는 바로 논둑길과 들판과 숲속 봄싹에 있습니다.’ 하고.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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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공무원·군대·일꾼·흙


 정부가 서고, 정부를 지키는 공무원이 있으며, 공무원을 이끄는 정치꾼과 법꾼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지킬 군대가 있어야 한다. 논밭이 있고 들판이 있으며 바다와 멧자락이 있으면, 흙을 일구거나 물을 보듬는 일꾼이 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이 낫이나 호미로 동무를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물을 짜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이웃을 들볶거나 못살게 굴지 않는다. 나물을 뜯거나 캐는 사람이 제 살붙이를 따돌리거나 등치지 않는다.

 나는 정부가 싫다. 나는 공무원도 싫다. 나는 군대도 싫다. 나는 일꾼으로 살아가면서 흙을 일구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다. 흙 묻은 호미를 틈틈이 내려놓고 뙤약볕에서 흙 묻은 손으로 책 몇 쪽 넘기면서 멧골자락에서 아이랑 옆지기랑 살아가고 싶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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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94


 신문을 읽지 않고 방송을 보지 않으며 인터넷소식조차 살피지 않기 때문에, 나와 우리 집 살붙이는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 나와 우리 집 살붙이는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우리들은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보금자리와 마을’을 알고 싶을 뿐이다.

 2월에서 3월로 넘어온 요 며칠 사이, 멧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새로 돋는 풀싹이 싱그럽다. 새벽에 민방위훈련을 갔다 오니, 시골 마을회관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꽃샘추위이니 무어니 하면서 서울시청 앞에서 날씨가 춥다며 벌벌 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꽃샘추위이건 봄추위이건 늦겨울추위이건, 들판과 숲속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다. 우리 집 텃밭에도 새로운 풀싹이 잔뜩 돋았다.

 우리 집 살붙이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소식을 읽지 않기 때문에,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소식으로 무엇이 나오는지를 하나도 모른다. 어쩌면, 이러저러한 봄얘기로 ‘추위에도 돋아나는 풀싹’을 다루거나 보여줄 수 있겠지. 어디에선가 벌써 달래를 캔다 할는지 모르고, 꽃다지나 돌나물을 캤다고 할는지 모르리라. 이런 이야기도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소식에 나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에든 방송에든 인터넷소식에든 이런 얘기가 나온들 우리하고는 아무런 이음줄이 없다. 우리는 우리 집 앞 멧기슭에서 봄나물과 봄풀을 보면 되니까. 우리는 아이 손을 맞잡고 천천히 멧길을 거닐며 봄 풀싹을 마주하면 되니까.

 새벽부터 삼십 분 남짓 민방위훈련 긴급소집 때문에 불려가느라 바빴다. 나는 늘 새벽 두 시에서 너덧 시 사이에 일어나서 글을 쓰기 때문에 새벽 여섯 시에 맞추어 마을회관에 가서 이름 스윽 적고 돌아오는 일이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새벽 여섯 시란 한창 머리가 달구어지면서 내 삶과 이야기를 글로 적바림하는 때. 신나게 글을 써야 하는데, 쓰던 글을 얼추 마무리짓고 셈틀을 꺼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회관을 다녀온다.

 집식구는 고이 잠든 채 깨지 않는다. 집식구가 깰까 걱정하면서 살금살금 움직이며 겉옷을 벗는다. 아이 기저귀를 만져 보니 안 젖었다. 아이는 밤새 아직 오줌을 누지 않았다. 조금 뒤 오줌을 누면서 깨려나. 오줌을 누었어도 안 깨면 좋으련만. 오줌을 누었다고 뒤척일 때에 아버지가 얼른 갈아 줄 테니까, 그대로 새근새근 꿈결을 즐기면 좋으련만.

 다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모처럼 여러 누리집을 둘러보다가 ‘서울 홍익대학교 청소부’ 이야기를 읽는다. 얼마 앞서 이들 서울 홍익대 청소부들이 파업을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일이 있었고, 이들 청소부들이 바라던 대로 무언가 뜻을 이루었다 하는데, 제대로 다 이루지는 못한 듯하지만, 이모저모 그동안 못 누리거나 빼앗겼던 권리를 얼마쯤 찾았다고 한다. 쉬는 날이란 없던 청소부한테 조금이나마 쉬는 날이 주어지고, 터무니없이 적은 일삯이 조금이나마 올랐단다. 그래, 일삯이 얼마나 올랐나 했더니 한 달 75만 원에서 94만 원이 되었단다.

 궁금하다. 75만 원이든 94만 원이든, 이 돈에는 ‘4대 보험’이 어떻게 되었을까. 4대 보험 값을 회사(대학교)에서 내주고 75만 원이나 94만 원을 받는지, 이 돈에 4대 보험 값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들이 출퇴근할 때에 드는 찻삯이나 낮이나 저녁에 먹을 밥값은 이 일삯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들치고 아이 안 키우는 아주머니는 없을 텐데, ‘육아수당’이 이 일삯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한테도 근속수당이나 연차수당이 있을까. 어느 일터이든 안식년이 있는데, 청소부도 안식년을 받는지 궁금하다.

 75만 원 일삯에서 94만 원으로 자그마치 19만 원이나 한꺼번에 올린다 한다면, 19만 원이라는 돈은 처음부터 제대로 주었어야 하는 돈이다. 더구나, 이제부터 94만 원을 준다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94만 원을 주었어야 한다는 소리요, 이제는 94만 원보다 더 주어야 한다는 소리이며,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다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청소부들이 못 받은 몫을 대학교에서는 알뜰히 돌아보며 제대로 챙겨 주기는 할까.

 나는 생각한다. 대학교 청소부와 대학교 교수는 일삯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 대학교 청소부와 대학교 교수가 일하는 시간은 같아야 한다. 대학교 청소부가 일할 때에 대학교 교수도 일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쉴 때에 대학교 청소부도 쉬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밥을 먹는 곳이 따로 있다면, 대학교 청소부가 밥을 먹는 곳이 따로 있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느긋하게 쉬는 방이 따로 있다면, 대학교 청소부가 쉬는 방이 따로 있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한테 건물 지킴이나 학생들이 꾸벅 인사를 한다면, 대학교 청소부한테 건물 지킴이나 학생들 또한 꾸벅 인사를 해야 한다.

 대학교 교수도 내 아버지요 어머니이고, 대학교 청소부도 내 아버지요 어머니이다. 대학교 교수도 대학생 아이를 두고, 대학교 청소부도 대학생 아이를 둔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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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와 책읽기


 풀이 고기보다 몸에 좋은 먹을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풀은 풀대로 좋은 먹을거리이고, 고기는 고기대로 좋은 먹을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고기를 꼭 먹어야 하거나 고기를 굳이 안 먹어도 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고기는 그저 고기라는 먹을거리입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풀을 자주 먹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풀은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키우지 않아도 스스로 돋아나는 풀이든, 사람이 애써 심어서 거두는 푸성귀이든, 풀은 우리한테 살아갈 힘을 북돋아 주는 좋은 먹을거리입니다.

 고기를 먹자면 ‘고기가 될 짐승’한테 풀을 먹여야 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을 여러 해쯤 ‘꽤 많은 풀을 먹인 다음’에야 잡아서 고기로 먹습니다. 고기는 풀처럼 금세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풀을 꽤 많이 들이고 난 다음 먹을 수 있습니다.

 예부터 고기를 드물면서 고마운 먹을거리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을 키우는 데에는 풀이며 품이며 많이 드니까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기란 그다지 드물거나 고마운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참 흔하면서 값싼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고기가 되는 짐승’은 풀을 먹지 않기 때문이요, ‘여러 해에 걸쳐 풀을 많이 먹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학방정식으로 만든 값싼 사료를 먹여 얼른얼른 잡아 죽인 다음 얻는 고기이기 때문에, 오늘날 고기값은 대단히 쌉니다. 고기값이 싸다 보니까 풀값하고 견주면 풀값이 외려 참 비싸다 느낄 만합니다. 어쩌면 풀을 뜯거나 거두어 얻을 때보다 짐승을 잡아 고기로 마련할 때에 드는 돈과 품이 적게 드는지 모릅니다.

 사료와 항생제를 써서 후딱후딱 해치우든 하루아침에 만들어 내는 먹을거리가 되고 만 짐승고기가 사람몸에 좋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들판이나 마당에서 호젓하게 뛰어놀며 살던 닭을 잡아서 고기로 먹을 때하고, 닭공장에서 부화기로 깨어나게 해서 사료만 조금 먹이다가 채 한 달이 안 되어 잡아서 고기로 먹을 때하고 맛이 같을 수 없습니다. 고기값도 다를 테지요.

 고기는 고기다와야 하고, 풀은 풀다와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다와야 합니다. 삶은 삶다와야 하며, 책은 책다와야 합니다. 책에 담을 이야기는 책에 담을 이야기다와야 합니다.

 엉터리로 키워 엉터리로 먹는 짐승고기는 발굽병이니 무어니 하면서 말썽이 생깁니다. 엉터리로 엮어 엉터리로 내놓는 책은 사재기니 거짓말이니 눈속임이니 무어니 하면서 말썽이 터집니다. 겉으로는 예뻐 보이는 글을 쓰던 사람들 가운데 돈과 이름값과 힘에 따라 갈아타기를 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나는 고기를 굳이 싫어하지 않습니다. 나는 풀이라서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 나한테 고마운 먹을거리입니다. 모두 나한테 제 목숨을 기꺼이 바쳐 주기에, 나는 오늘 하루 즐거우며 고맙게 살아숨쉴 수 있습니다. 나한테는 더 좋거나 덜 좋은 책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고마우며 아름다운 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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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의 비밀 정원
박지윤 사진.글 / 엘컴퍼니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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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가 될 수 없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20] 박지윤, 《박지윤의 비밀정원》(엘컴퍼니,2007)



 예쁘다 싶은 모습을 보는 눈이 참말로 내가 보는 눈인지, 누군가한테서 듣거나 본 다음 ‘남들이 예쁘다 말하니’까 나도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보는 눈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남한테 내보이면서 ‘예쁘게 봐 주셔요’ 하고 바라는 마음인지, 나 스스로 내 삶을 예쁘게 일구면서 나부터 참으로 예쁘구나 하고 느껴 절로 웃음이나 눈물이 흐르는 사진을 찍는 마음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취미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이 될 뿐입니다. 사진은 취미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죽이기를 하듯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취미가 되지 않기 때문에, 멋을 낸다거나 겉치레를 하듯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취미하고 동떨어지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돋보이도록 치레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내가 좋아해서 내 모든 마음과 몸을 바치며 즐기는 삶’이 될 뿐입니다.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취미로 여기듯’ 보내지 않습니다. 내가 보내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은 ‘취미로 삼으며’ 보내지 못합니다.

 내가 보내는 스물한 살 적 1월 15일은 이날 하루뿐입니다. 내가 맞이하는 서른두 살 적 2월 23일은 이날 하루뿐입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뿐더러, 언제라도 돌이킬 수 없는 나날입니다. 그냥 좋아서 한다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냥 좋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냥 좋기 때문에, 이 좋은 느낌을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늘 곁에 둡니다.

 늘 곁에 두기에 삶입니다. 늘 곁에 두면서 생각하거나 보듬기에 삶이에요. ‘삶’이라 해서 무겁지 않습니다. ‘삶’이기에 더 가볍지 않습니다. 삶은 그예 삶입니다. 사진을 하는 삶이란 한결같이 똑같은 삶입니다. 프로사진가라 해서 더 돋보이거나 놀라운 삶이 아닙니다. 아마사진가라 해서 더 어설프거나 모자란 삶이 아니에요. 사진기를 쥐었으면 누구나 사진삶을 보냅니다. 이 사진삶은 그냥 재미 삼거나 장난 삼아서 보내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더없이 거룩하면서 기쁜 하루 한때를 즐기면서 보내는 사진삶이에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엉성하게 사진을 찍더라도 좋은 사진삶입니다. 오래도록 가다듬었기에 익숙하게 사진을 찍어도 좋은 사진입니다.

 사진찍기는 틀이 없습니다. 어떻게 찍어야 좋은 사진이 된다거나 어떻게 찍으면 나쁜 사진이 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요, 내가 살아가는 대로 담는 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나 스스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에 따라 찍는 사진이지, 손놀림이나 손재주에 따라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에 따라서 ‘내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기를 들여다볼 때’에 ‘사진기를 거쳐 내 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기를 쥐어 들여다볼 때에 ‘내 눈에 아름답다 느껴지는 모습’이 가득합니다. 나 스스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기를 쥐어 들여다볼 때에 ‘내 눈에 힘들다 느껴지는 모습’이 넘칩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를 찍든 무엇을 찍든 사랑이 어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 어떤 물건을 찍든 믿음이 서립니다.

 몸이 홀가분한 사람은 홀가분하게 일합니다. 몸이 무거운 사람은 무겁게 일합니다. 몸이 홀가분할 때에 사진기를 들면 홀가분한 넋이 사진으로 스밉니다. 몸이 무거울 때에 사진기를 쥐면 무거운 얼이 사진으로 파고듭니다.

 저는 집에서 아이를 날마다 수십 장쯤 사진으로 담는데, 때때로 아이 모습을 안 찍을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땡깡을 부리거나 고달프도록 말을 안 들을 때에는 아이가 미운 나머지 사진기를 들지 않습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미워한다니 말이 안 된다 할 테지만, ‘너 말야, 참말 엄마랑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맞니?’ 하고 묻고플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버이로서 아이를 참다이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니까, 그만 아이 마음을 더 살피지 못하고, 아이 마음을 더 살피지 못하면서 더 따사로이 보듬거나 놀지 못했기에, 아이는 아이로서 골을 부리거나 딴청만 피울 수 있습니다. 밑뿌리를 따지면 아이 탓이라기보다 어버이 탓입니다. 저 스스로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이가 밉게 보일 때에는 내 마음밭이 엉망진창이라는 소리인 만큼 사진기를 들지 못해요.

 운동선수는 몸이 흐트러지면서 마음 또한 흐트러지는 때를 맞이하곤 합니다. 영어로 ‘슬럼프’라 하는데, 이때에는 무엇을 해도 다 안 됩니다. 이때에는 아예 운동이나 연습을 안 해야 합니다. 그저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전문가일 수 있고 풋내기일 수 있습니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흐트러진 때에도 놀랍다 싶은 사진을 찍어낸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사진기자 일을 하는 사람은 집에 무슨 일이 터졌든 어떤 아픈 일을 맞이했든, 사진기자한테 주어진 몫을 사진기자로서 빈틈없이 해내야 합니다. 일은 일대로 마친 뒤에 눈물을 흘리든 웃음을 터뜨리든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사진을 찍으면 어찌 되려나요. 이냥저냥 볼 만한 사진이 나오려나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싶은 사진을 만들 수 있는가요. 보도사진에는 사진기자 넋이, 아니 사진을 찍는 내 마음이 깃들지 않을까요.

 보도사진일지라도 사진을 찍은 사람이 어떠한 마음이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살포시 묻어납니다. 만듦사진이라 해서 사진을 만든 사람 손길과 마음길이 안 묻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사진에는 모든 사람들 하루하루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좀 따분하다 싶다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좀 따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 사진은 영 재미없는데’ 하고 느낀다면, 참말로 이 사진을 찍은 사람부터 삶을 재미없게 꾸리기 때문입니다.

 박지윤 님 사진이야기를 담은 《박지윤의 비밀정원》(엘컴퍼니,2007)을 읽습니다. 박지윤 님은 사진을 무척 좋아하고 사진기를 여럿 모은다고 합니다. 일하는 틈틈이 사진기를 만지며,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꽤 뛰어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만, 박지윤 님이 낸 《박지윤의 비밀정원》이라는 사진책에서 박지윤 님이 ‘사진으로 살아가는 내 넋’으로 무엇을 나누거나 보여주려 하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란 겉멋이 아닌데, 박지윤 님은 이 사진책 하나로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살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중 얼마만큼 진심이었을까. 얼마만큼 진실이었을까. ‘사랑해’ 하고 수천 번 내뱉는 동안 나는 정말 얼마만큼의 진짜 사랑을 했던 것일까(51쪽).” 하는 이야기는 박지윤 님이 겪은 사랑을 놓고만 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박지윤 님 스스로 찍는 사진을 놓고도 똑같습니다. ‘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만큼 내 마음을 담았을까? 나는 얼마만큼 참다이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스스로 묻는 소리입니다.

 “진심은 진실한 마음을 통해 전해진다 믿었는데 그 진심마저 거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211쪽).”고 생각한다면, ‘내가 찍은 사진은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고 믿었는데, 내가 찍은 사진마저 참말 내 마음을 담은 예쁜 사진이 아닌 듯하다.’고 느낀다고 스스로 뉘우치는 셈입니다.

 박지윤 님은 책끝에 “나는 이 사진들이 단순히 내가 주인공인 것에 대해 기억되길 바라지 않는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나 스스로를 다시 깨닫게 하고 떠오르게 하고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는 온전한 마음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또 “처음 사진을 시작하면서는 주로 멋진 풍경이나 세팅된 사물들을 찍었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시멘트 바닥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나 들어 있는 것만으로 사진이 숨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다시 보여주기’일 수 없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사람을 찍는다 해서 살아숨쉬는 목숨을 찍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지만 메마르거나 차갑거나 뻣뻣한 기운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를 찍은 사진이라지만 따뜻하거나 보드랍거나 살가운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찍더라도 내 마음과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벽돌 한 장을 찍는대서 정물사진이 아닙니다. 사람을 찍어도 정물사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찍으나 풍경사진일 수 있고, 너른 들판을 찍었는데 사람사진일 수 있어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고, 바라보는 눈이란 바로 내가 일구는 하루하루가 그러모이는 삶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은 취미가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내 삶이 될 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가 내가 찍는 사진 곳곳에 차곡차곡 담깁니다.

 내 삶을 사랑해 주소서. 내 삶을 사랑해야 내 사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하루를 사랑하여 보살펴 주소서. 내 하루를 사랑하여 보살필 때에, 내가 찍은 사진을 나부터 좋아하면서 나한테 새힘을 북돋우는 기쁜 이야기보따리로 꽃피웁니다. (4344.3.3.나무.ㅎㄲㅅㄱ)


― 박지윤의 비밀정원 (박지윤 사진·글,엘컴퍼니 펴냄,2007.10.1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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