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 우리 시대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삶과 사진 이야기
송수정 글, 강재훈 외 사진 / 포토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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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내 삶길에 즐거운 내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22] 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을 얘기할 수 없(머리말)”다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1권과 2권이 일곱 사람씩 나누어 보여주는 대목만 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게 둘로 나누었다 여길 수 있고, 열네 사람을 두 갈래로 바라보며 열네 가지 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을 느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열네 사람을 만난 송수정 님은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하는가 궁금해 합니다. 송수정 님 스스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으며, 송수정 님 사진길을 북돋우고 싶어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수정 님이 북돋우는 사진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움이 되는 길잡이말을 들을 수 있기도 할 테고, 나로서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요.

 어느 쪽이든 즐겁고,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느 한 갈래 길만 사진길일 수 없으니까요. 어느 한 가지 길만 걸어야 비로소 사진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조셉 쿠델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분석하며 ‘에이, 나는 왜 그들처럼 안 될까’ 고민했던 흔적이 그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성남훈/2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책 《유민의 땅》을 보면서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구나 싶어 거듭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성남훈은 성남훈이지 성남훈이 살가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살가도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으로 살아야지 쿠델카처럼 살 수 없을 뿐더러 쿠델카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 값을 해야지, 브레송 같은 이름값을 얻거나 브레송처럼 돈을 벌기를 바라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을 찍으며 제 사진길을 걷고, 성남훈 님은 성남훈 님 사진을 찍으며 성남훈 님 사진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길을 걸을 노릇이요, 교사는 교사 길을 걸을 노릇이며, 공무원은 공무원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방법론입니다. 어떤 대상이가 상황 앞에서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는 촬영 방법으로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습니다(서헌강/3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보면서 그닥 내키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내켜 하지 않는대서 서헌강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잘못 찍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좋아할 테지만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안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이 괜찮다 할 테지만, 누군가는 풋내기 티 풀풀 난다며 손가락질하겠지요.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 삶을 일구며 서헌강 님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서헌강 님한테 안승일이나 김기찬이 되라 할 수 없습니다. 서헌강 님이 강원도 깊은 멧골자락 멧골집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안승일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고, 서헌강 님이 서울 골목길을 찍을 때에 김기찬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이 살아온 결에 따라 당신 사진감을 찾아 당신 사진이야기를 길어올릴 당신 사진길을 걸어야 가장 아름다우면서 좋아요. 사진을 읽는 내가 다 다른 사진쟁이 다 다른 사진길을 느끼며 다 다른 맛과 멋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 찍는 이와 사진 즐기는 이가 나란히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진 흙이 제일 고운 것처럼 나는 그냥 오랫동안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 주제로 잠깐씩 거쳐 간 작업들과 자연스럽게 차이점이 생기겠지요(류은규/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쭈뼛쭈뼛합니다.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흙을 체로 거를 때에 맨 나중에 나오는 흙이 가장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운 흙은 맨 먼저 떨어집니다. 맨 나중에 떨어지며 걸러지는 흙은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입니다.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이 ‘곱게 걸러지기’까지 더디 걸리고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진길에서는 ‘가장 곱게 걸러내어 사진으로 담기 힘든 사진이야기’일수록 오래 걸릴 뿐입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손길을 들여 이룰 사진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금세 빛과 꿈과 뜻을 이루어 살가이 나눌 사진열매가 있어요.

 모든 사진이야기가 모두 오래오래 삭여야 잘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두 해만 사진을 찍든 한두 달만 사진을 찍든 하루이틀만 사진을 찍든 한두 시간만 사진을 찍든 일이 분만 사진을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마주하며 보낸 삶에 걸맞게 사진이 태어납니다.

 수박은 수박만 해야 수박답습니다. 그런데 수박 가운데 참외 크기만 할지라도 수박맛을 다하는 수박이 있습니다. 살구는 살구만 해야 살구답습니다. 살구가 박만 해서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나무줄기조차 휘어진다면 살구랄 수 없어요.

 곡식에는 수수가 있고 기장이 있으며 보리와 벼와 율무와 조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곡식은 다 다른 대로 값을 하며 보람이 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곰삭일 사진이면 오래도록 곰삭이는 대로 아름답고,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이면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여도, 그 아이들이 다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각렌즈를 써서 힘있게 표현한 사진에 너무 길들어 있다 싶기도 하고(강재훈/84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사람들은 광각렌즈에도 길들고 표준렌즈에도 길들며 줌렌즈나 망원렌즈에도 길듭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사진을 즐기면 넉넉한데, 사진이 아닌 다른 대목에 자꾸 얽매이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찍기로 즐거우면 될 텐데, 자꾸만 다른 곁길로 샙니다.

 돈이 있어서 더 낫다 하는 사진장비를 쓴다면 나로서는 더 나은 사진을 낳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더 나은 사진을 얻은 내 삶 또한 더 낫다 할 수 있나요. 한 달에 2백만 원이 아닌 2천만 원을 벌어야 더 낫다는 삶을 꾸리겠습니까. 다달이 2천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2억 원을 번다면 아주 훌륭하다는 삶을 일구려나요. 아니, 한 달에 고작 2십만 원을 벌거나 2만 원을 번다면 아주 못난 삶으로 나뒹굴는지 궁금합니다.

 때에 따라 렌즈를 고르고, 쓰임새에 따라 사진기를 갖추며, 주머니라든지 내 몸에 맞추어 사진을 합니다. 안젤 아담스가 높은 산봉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대서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똑딱이를 주머니에 넣고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도 됩니다. 안젤 아담스는 안젤 아담스대로 살며 안젤 아담스 사진을 찍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즐기며 내 사진 또한 즐깁니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우선이고, 잘 찍는 건 두 번째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는 사실 헛고민이에요. 걸어다니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제일 좋은 사진입니다. 나는 서양 사진을 약탈적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요. 주류가 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육신이 힘들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법이지요(노익상/10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습니다. 참말, 걸어다니지 않고서야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취재할 곳에 자가용을 몰아 씽하니 달려가면 더 빨리 더 금방 사진을 얻겠지요. 그러나 취재할 곳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내가 취재할 곳이 어떠하며 내가 취재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동네 어떤 터전에서 살아가는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쁘면 자가용을 몰 노릇이요, 바쁘지 않으면 걸을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대서 자동차에 탄 채로 사진기 단추만 우악스레 누를 수 없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몇 걸음 옮긴 다음 몇 초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선 채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지, 솜씨를 담지 않습니다. 솜씨를 보여주자면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오로지 ‘사진에 담을 이야기 하나’입니다. 흔들리면 어떻고 빛이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있대서 사진인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림 한쪽이 다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손질해도 되고, 그저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찌개를 끓이는 데에 양념을 0.1그램 더 넣으면 맛이 확 바뀌기도 한다지만, 확 바뀌면 확 바뀌는 대로 좋고, 못 느끼면 못 느끼는 대로 좋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에 양념이나 건더기를 그램으로 하나하나 따질 수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며 쌀을 씻거나 밥그릇에 퍼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과 삶이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 여러 사람 목소리 가운데 내 삶에 이바지한다 싶은 대목은 곱게 받아들이고, 아직 나로서는 지나친 목소리이구나 싶으면 다음에 다시 새기며, 어딘가 섣부르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목소리라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들고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작가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면은 참 좋은데 에너지가 없어요. 예전에 컬라와 흑백을 동시에 작업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양쪽 작업을 다 버리는 일이에요. 한 가지에만 몰입해도 제대로 나오기 힘들어요(이갑철/12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많은 렌즈를 갈아끼우든 렌즈 하나로 찍든, 참말 여기저기 마구 찍어대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런데, 참말 마구 찍어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작품을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꼼꼼히 골라서 사진기 단추를 아주 적게 누르며 훌륭한 사진을 엮는 분이 있으나, 아끼며 사진을 찍는다 하나 정작 뭘 찍는지 알 노릇이 없는 사람 또한 있어요.

 사진기를 여러 대 들든 한 대만 들든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장비를 쓰건 다를 턱이 없습니다.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를 써야 비로소 사진이 되지 않듯, 까망하양을 하건, 무지개빛을 하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에만 기울어집니다. 무지개빛 사람들을 ‘무지개빛처럼 다 다른 모습과 삶이 어떠한가를 고스란히 읽’으며 ‘무지개빛으로 고우면서 다 다른 멋을 나누어 주’듯이 사진으로 담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까망하양이래서 무지개빛을 못 담지 않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걸린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시냇물과 바닷물을 담을 수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까망하양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 까망하양으로 모든 무지개빛을 다 다른 짙기와 옅기와 느낌과 결과 무늬를 담아내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까망하양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무지개빛으로 건너가고, 무지개빛이 좀 어지럽다 싶으면 까망하양으로 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똑같이 어지럽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좀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말마디를 들었기 때문에 ‘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살아오며 겪거나 받아들인 사진말을 길어올립니다. 사진쟁이한테서 삶이 묻어난 이야기를 살뜰히 받아들여도 좋고, 나 스스로 내 사진길을 깨닫거나 찾으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큐사진 열네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르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다 다른 열네 사람 다 다른 사진길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사랑과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이야기꽃을 사진열매로 어떻게 영그는가를 느끼자는 책이겠지요.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여 북돋웁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맞아들여 다스립니다. 사진은 어차피 내가 찍는 내 삶입니다. 사진이란 곧 내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내 길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사진’ 아닌 ‘책’이든 ‘만화’이든 ‘진보’이든 ‘통일’이든 ‘민주’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글쓰기’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집안살림’이든 ‘밥벌이’이든 넣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을 읽을 수 있고, 삶을 읽을 수 있을 때에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똑바로 사랑스레 참답게 읽습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송수정 글,포토넷 기획,포토넷 펴냄,2009.3.1./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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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사진 이야기] 5. 인천 아벨서점 2008

 헌책방은 고마운 곳입니다. 갓 나온 책을 때때로 만나기도 하지만, 잊거나 잃고 지나친 책을 새삼스레 만날 수 있으니 몹시 고마운 헌책방입니다. 웃돈을 얹는대서 사라진 책을 장만할 수 있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사라진 책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스스럼없이 내놓는 책이 헌책방이라는 데에서 빛이 나며 새로 읽힙니다. 이 나라 헌책방치고 널따랗거나 커다란 곳은 드뭅니다. 으레 조그맣거나 조촐합니다. 그런데 이 조그맣거나 조촐한 책쉼터에 수많은 책이 끊임없이 드나들면서 내 눈과 넋과 삶을 아리땁게 여미는 데에 길동무가 되어 줍니다. (4344.3.20.해.ㅎㄲㅅㄱ)


- 2008년.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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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22 22:43   좋아요 0 | URL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가장 책 정리가 잘된 매장이더군요.책도 많고요^^

파란놀 2011-03-23 07:42   좋아요 0 | URL
책방살림에 마음을 가장 넓고 크게 쓰는 책방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쪽글과 글쓰기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떨리는 손으로 부들부들 몇 글자 끄적인다. 그렇지만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나 마음에 피어오르는 모든 이야기를 적바림하지 못한다. 한두 낱말을 적으면서 나중에 수첩을 다시 펼칠 때에 왜 이 낱말을 적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만하게 해 놓는다.

 자전거 발판을 밟는다. 등허리가 결리고 팔뚝이 저린다. 그래도 좋다. 내 몸을 내 힘을 써서 움직일 때에 참 기쁘다. 날마다 빨래에 밥하기에 설거지에 갖은 집일을 하면서 몸을 쓰기에 기쁘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살림을 한다고는 여기지 못한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를 달리든, 혼자 부리나케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느라 자전거를 달리든, 뒷주머니나 옆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챙겨 넣는다. 자전거를 살짝 세워야 할 때에 수첩을 꺼내어 땀내 나는 글을 적바림한다. 때때로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어, 머리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조각을 글로 옮긴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다가, 문득문득 뭔가가 자꾸자꾸 생각나서 수첩을 펼쳐 쪽글을 적는다.

 쪽글 적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는 저도 ‘공부’하겠다면서 종이나 수첩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가 보기로는 그림이지만, 아이로서는 글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쓰는 글을 흉내내어 아버지가 깨알처럼 쓰는 글을 베끼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내 머리를 그닥 못 믿는다. 잘 새겨들었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엉뚱하게 떠올리거나 잊는 일이 잦다 보니, 반드시 수첩에 쪽글을 남겨야겠다고 느낀다. 여기저기 마음쓸 곳이 많으니까 쪽글을 남기지 않으면 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진을 찍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쪽글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웬만하면 쪽글을 쓰지만, 쪽글조차 끄적일 겨를이 없으면 부리나케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또는, 나 혼자 즐기기 너무 아쉽구나 싶은 아름다운 모습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기에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나 혼자 바라보기에 몹시 슬픈 모습을 동무와 함께 나누고자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쪽글을 쓴다. 내 삶을 하루하루 다 다르게 맞이하며 다 다르게 마감하는 즐거움을 듬뿍 맛보고 싶어서 쪽글을 쓴다. 그날그날 이야기를 그날그날 적바림한다. 그날그날 새로워진 내 넋을 곱씹고, 그날그날 거듭나려는 내 몸을 되새긴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며 마음이나 몸을 쉰다고 할 텐데, 나는 손목아지와 손가락이 저리도록 재빨리 쪽글을 휘갈기면서 마음과 몸을 쉰다.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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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터 뒤지기


 어제와 오늘 집안을 치운다. 다 치우지 못한다. 여느 때에 꾸준히 돌보았다면 애써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울 일이 없었을 터이나, 여느 때부터 집안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았으니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운다 하더라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고 여러 날이 걸리고 만다. 앞으로 며칠 더 치워야 비로소 조금 건드렸다 할 만하리라 느낀다.

 자질구레하며 쓰잘데없는 물건을 치우고, 이곳저곳에 흩어 놓던 물건을 갈무리하면서 생각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꾼이란 얼마나 대단하며 고마운 사람일까. 밥을 차려 주는 사람과 함께,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참으로 고마우며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새삼 느낀다.

 그러고 보면, 밥을 하는 일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으레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곧 살림꾼이었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고는 있으나, 나 스스로 살림꾼이라고는 여기지 못한다. 옆지기도 내가 살림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기로도 살림을 못하고, 옆지기가 생각하기에도 살림을 ‘안 한’다.

 살림하기란 밥하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을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몫을 해야 비로소 살림꾼이다. 그런데, 밥을 해서 차린다 할 때에 얼마나 옳고 좋은 밥을 얼마나 옳고 바르게 차리느냐를 살펴야 한다. 밥으로 차릴 먹을거리는 어떻게 일구거나 얻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고, 밥을 차리고 치울 때에 어떻게 하는가 또한 헤아려야 한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쓰레기터를 뒤진다. 집은 집인데, 틀림없이 살림집은 살림집인데, 살림을 엉망으로 내팽개치듯 살아온 사람이기에 쓰레기터를 뒤지고야 만다. 밤을 잊으면서 쓰레기터를 뒤질까 하다가 그만둔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이듬날 또 새 하루를 열어야 하고, 아이와 옆지기와 내가 먹을 밥을 차려야 하며, 이렁저렁 또 하루일을 해야 하니까.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은 건드렸으니, 이쯤에서 몸을 쉬면서, 이듬날에는 어디를 어떻게 손을 대어 치우면 좋을까를 곱씹는다.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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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3.19.
 : 고개 넘어 피자 나르기



(17:27) 옆지기가 피자 먹고 싶다 말한다. 피자라니, 피자라면 읍내 버스역 건너편에 있는 피자집에서 만드는 피자일 테지. 우리 집 물이 아직 녹지 않아, 녹지 않는다기보다 땅밑에서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은데, 집에서 물을 못 쓰니 옆지기는 몸을 씻을 수 없다. 몸을 씻으러 읍내 목욕탕으로 가야 한다. 읍내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씻고 나서 피자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집안을 쓸고닦으며 치우느라 읍내마실을 나가지 못했으나, 피자는 얼마든지 사다 나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얼른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아이도 자전거 함께 타고 싶다 이야기하지만,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에 있으라 이른다. 왜냐하면 피자를 사서 짐수레에 담아야 모양이 깨지지 않으니까. 아이를 태우면 피자 놓을 자리가 없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도서관에서 꺼낸다.

(17:38) 숯고개에 닿다. 피자 두 판을 사러 읍내로 나가느라 깔딱고개를 하나 넘는다. 읍내 가는 길은 가방에 비었으니 몸이 가볍다. 돌아오는 길은 이것저것 사서 가방에 채울 테니 몸이 무겁겠지. 옆지기는 자동차들이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니 수레를 달아야 하지 않느냐 얘기했다. 짐수레 무게가 꽤 나가니까 이 수레를 달고 깔딱고개를 넘으면 땀이 뻘뻘 난다. 그러나, 피자를 가방에 넣으면 한쪽으로 뭉그러질 테니까 짐수레를 달아야 한다. 어찌 되든 짐수레를 뒤에 달았기 때문에 자동차들이 옆으로 꽤 크게 에둘러 가며 빵빵거리지는 않는다. 오르막에서 입이 아닌 코로 숨을 들이마신다. 코로 두 번 마시고 입으로 한 번 뱉는다.

(17:49) 음성 읍내에 닿다. 공부를 마친 듯한 고등학교 아이들이 쳐다본다. 이 아이들로서는 자전거에 수레를 단 모습을 본 적이 없을 테지. 이 아이들이 나이를 더 먹어 아이를 낳으면 나처럼 수레를 장만해서 아이를 태우고 다닐까. 아마, 이 아이들 거의 모두는 ‘손쉽게 자가용을 장만해’서 싱싱쌩쌩 내달리기만 하지 않을까.

(17:50∼18:07) 피자집에 닿아 피자 두 판을 주문한다. 15분이 걸린단다. 엊그제 장날이 지났기에 델타마트라는 데에 가다. 마트 쓰레기통에 쓰레기 두 봉지를 넣는다. 시골자락으로 쓰레기 걷으러 쓰레기차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읍내로 가지고 와서 버린다. 시골에서는 빈병이건 페트병이건 종이건 나누어 내놓을 수 없다.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문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면사무소 일꾼이 돌아다니며 걷어야 하지 않을까. 시골 면사무소나 읍사무소는 여느 때 보면 다들 한갓지게 노닥거리는데, 읍과 면 곳곳을 돌며 쓰레기걷이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읍사무소나 면사무소 일꾼은 늘 건물 안쪽에서만 지내기에, 막상 시골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저희 읍이나 면이 얼마나 넓고, 시골자락 사람들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른다. 읍사무소나 면사무소 일꾼이 한 사람씩 돌며 읍과 면을 골골샅샅 누비지 않고서야 참다이 시골 공무원으로서 일할 수 없다고 느낀다. 표고버섯하고 곤약하고 땅콩하고 마늘하고 사다.

(18:08) 피자를 받아서 짐수레에 넣다. 아이를 태우며 춥지 말라고 덮는 이불로 피자를 여민다. 이렇게 하면 흔들리지 않으면서 집에까지 따뜻하게 할 수 있겠지.

(18:10) 읍내 신호등에서 신호를 한참 기다린다. 읍내에는 차도 얼마 안 다니는데 신호등이 없어도 되리라 생각하지만, 신호등이 없을 때에 천천히 느긋하게 오갈 자동차는 찾아보기 어렵겠지.

(18:15) 읍내를 빠져나온다. 용산리 쪽으로 접어든다. 읍내로 나올 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얼굴바람이다. 아까는 등바람이었나 보다. 얼굴로 제법 세게 부딪히는 바람을 느낀다. 길바닥에 짐승 주검 몇이 보인다. 아주 떡이 된 주검은 벌건 자국만 길바닥에 남긴다. 음성읍에서 생극면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두찻길에서 네찻길로 넓힌다며 한창 길 한쪽을 뜯는다. 여느 때에 이 두찻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매우 적은데, 애써 네찻길로 넓혀야 하는지 알쏭달쏭하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면 모르지만, 오가는 차가 명절날조차 막히는 일이 한 번도 없을 이런 데에서 왜 길을 더 넓혀야 할까. 이렇게 길넓히기 할 돈이 있으면, 시골사람들 농사일을 돕는 데에 써야 할 텐데.

(18:20) 오르막에서 체인이 빠지다. 못물 옆길 가파른 자리를 다 올라와서 기어를 낮추는데 픽 빠진다. 자전거를 세워 기어를 맞추다. 손에 또 기름이 묻는다. 다시 자전거에 오르려다가, 이렇게 멈춘 김에 자전거 모습이랑 내 수첩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어쩌면, 체인 빠진 일이 퍽 고맙다 할 만하다. 다시 자전거에 오르면서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사진을 못 찍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조차 사진을 못 찍는다. 나처럼 사진기를 목걸이로 걸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한손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있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모습 가운데 내 마음 사로잡는 곳을 제대로 느끼거나 제대로 찍지는 못한다. 언제나 스쳐 지나가는 사진만 찍을 뿐이다.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어야 하고, 달리던 차를 멈추어야 하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걸어다니면서도 사진을 못 찍는다. 걷던 걸음을 멈추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몇 초쯤 숨을 멎은 다음 조용히 단추를 눌러야 한다. 사진찍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동차를 타서는 안 된다. 사진찍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두 다리로 걸어야 하고, 어쩔 수 없는 때에만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18:28) 숯고개 오르막에 닿다. 시골길 걷는 시골 아이랑 어머니를 본다. 자전거로 고개를 넘기 때문에, 시골 아이가 제 어머니한테 조잘조잘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듣는다. 자동차로 달리는 사람들은 이 고운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멧자락 비탈논 개구리들이 깨어나 왁왁 우는 소리 또한 자동차를 모는 동안 들을 수 없을 테고. 자동차를 타는 동안 듣는 소리란 자동차 소리에다가 자동차에 붙인 작은 텔레비전이 들려주는 소리뿐이다.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사람소리도 물소리도 들을 수 없는 자동차란 무엇일까.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차바람이 불어 자전거가 흔들린다. 차바람을 일으키는 자동차는 마주 걷거나 마주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이 애먹는 줄을 조금도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다.

(18:30) 집으로 돌아가는 깔딱고개에서 자꾸 자전거를 쉬며 사진 몇 장 찍는다고 하다가 너무 늦을까 걱정스럽다. 내리막에서 발판을 더 힘껏 밟는다. 조금 앞서 오르막 한켠에 쓰레기봉투 몇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았는데, 시골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오가는 사람은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지. 자동차로 길을 달리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휙휙 내던진다. 잘못해서 쓰레기가 창밖으로 날려 갔다 한들 자동차를 멈추어 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을까. 가만히 보면,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듯 ‘걸어다니며 길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 버리기’를 하기도 한다.

(18:37) 드디어 집에 닿다. 피자는 식지 않았다. 그런데 옆지기가 사 오라는 피자가 아니란다. 옆지기는 아무것도 안 든 피자를 하나 사라고 했는데, 나는 엉뚱하게 사고 말았다. 피자 사다 나른다며 고개 넘어 마실을 다녀오느라 몸을 부리면서, 정작 제대로 사다 나르지 못하다니, 참, 나 스스로 할 말이 없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다.
 

 

 그나저나, 다들 배가 불러서 얼마 못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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