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책읽기


 아스팔트 밑이 어떻게 생겼다거나 어떻게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어느 책에서 아스팔트 밑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면 안다 말할는지 모른다. 어느 방송에서 아스팔트를 파헤쳐 밑바닥을 보여준다면, 이 방송을 본 사람은 ‘난 알아요’ 하고 이야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 아스팔트 밑을 파헤쳐 보지 않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만지다가 손이 데어 따끔한 느낌은, 손이 데지 않고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골짜기 물과 페트병 먹는샘물과 서울시 아파트 수도물이 저마다 어떠한 맛인가를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본대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달리며 맞아들이는 바람과 시골집에서 창문을 열며 받아들이는 바람을 글읽기나 사진읽기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가난하다는 나라 힘겨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글로 읽거나 사진으로 읽었대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느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거나 ‘돕고픈 마음’이 된다 할 만할까.

 자동차를 몰 줄 모르면서 자동차 이름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동차를 아는 일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서 자전거문화나 자전거정책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전거를 아는 일이 아닐 뿐더러,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을 읽었기에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이란 대단히 무섭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까닭은 내 머리속에 앎조각을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날 한국땅 어느 분이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했다는데, 하루라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내 삶을 옳게 다스리는 새 기운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할까. 하루에 몇 쪽쯤 읽어야 책읽기를 했다 할 만한가.

 만 쪽에 이르는 책을 읽으면 책읽기를 한 셈일까. 한 쪽을 겨우 읽으면 책읽기를 못한 셈일까. 한 쪽조차 아닌 고작 한 줄을 읽었으면 책읽기를 안 한 셈일까.

 삼백 쪽짜리 책에서 고작 한 쪽조차 못 읽었으나, 한 줄만 가까스로 읽은 뒤에 이 한 줄에 깃든 이야기를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 곱씹으면서 내 삶을 예쁘게 다스리는 사람은 책읽기를 한 사람인가 안 한 사람인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에, 언제나 참 슬프구나 하고 느낀다. 책읽기 아닌 지식읽기를 하고서는 마치 책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쭐거리는 모습은 그저 슬프다. 한 달에 열 권을 읽든 한 해에 백 권을 읽든 뭐가 대단할까.

 나는 한 해에 천 권 책을 장만하고 만 권 책을 읽는다. 어쩌면 더 살는지 모르고, 어쩌면 더 읽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해에 책을 백 권이나 열 권만 산다면, 또 한 해에 책을 열 권이나 한 권만 읽는다면 어떠할까. 천 권을 사들이는 사람과 열 권을 사들이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십만 권을 읽는 사람하고 한 권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는 한 해에 천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한 달에 백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열 사람씩 새 동무를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100킬로미터를 달릴는지 모른다. 자동차로든 자전거로든. 누군가는 날마다 백만 원을 벌는지 모른다.

 그런데, 책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여행이든 무어든, 얼마나 대수롭다지?

 사랑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책이 된다. 책읽기란 사랑읽기이다.

 사랑으로 사귈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삶이란 사랑삶이다.

 한 해에 책 만 권을 읽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고, 논 만 평을 혼잣힘으로 일구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쌍둥이 아이를 돌보든 다섯 아이를 돌보든 한 아이를 돌보든, 아이 없이 살아가며 이웃 아이를 사랑하든, 모두 똑같은 사랑이고 삶이며 사람이다.

 사랑을 안 담은 책을 백만 권 읽는들 무엇하랴. 사랑이 안 담긴 책을 사랑을 안 실으며 읽고서는 사랑을 싣지 않는 ‘서평’이나 ‘신간소개’나 ‘독후감’ 따위로 끄적인들 무엇하랴.

 새로운 책은 읽을 까닭이 없고, 읽을 보람이 없으며, 읽을 값어치가 없다. 아름다운 책일 때에만 읽을 까닭이 있고, 읽을 보람이 있으며, 읽을 값어치가 있다.

 새로운 판으로 되살리는 옛책이란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선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판으로 되살린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다. 새로운 책이냐 예전 책이냐 하고 따질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이냐 해묵은 사람이냐 하고 가릴 수 없다.

 나는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을 하나도 안 좋아한다. 왜냐하면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은 예전에는 예전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고, 나중에는 또 나중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를 스스로 씻거나 털면서 아름다이 살아갔다면,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는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없다.

 내 둘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옛날 옛적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마냥 아름다운 사람들이지는 않았다. 저마다 예전에는 이렁저렁 얼토당토않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모자란 삶을 모자란 줄 모르며 바보스레 지내곤 했다. 당신들 스스로 당신 삶을 천천히 사랑하면서 시나브로 아름다운 길을 깨달아 거듭난다.

 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을 참 좋아한다. 참으로 바보스럽다 할 만한 시민단체와 ‘진보 껍데기’ 지식인과 기자는 이원수 님을 가리켜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부역시를 썼대서 이이한테 이런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쇠사슬 밤나라에서 이원수 님이 ‘독재부역 문학’을 어느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참회록’ 같은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걸어온 삶이나 남긴 문학을 읽으면, 이이 모든 삶과 문학이 곧바로 ‘반성문’이나 ‘참회록’이다. 한때 ‘아름다운 사랑’을 저버린 슬프며 모자라고 못난 짓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며 말도 못하는 몸짓으로 당신 가슴을 후벼파면서 한 줄 두 줄 적바림한 문학을 가만에 손에 쥐어 읽을 때면 늘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이러한 글삶을 일군 이원수 님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전두환이나 노태우처럼 바보스러운 이들이 참 바보스러워서 딱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들이 모든 권력과 돈과 이름값을 내려놓은 다음, 수수하고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텃밭 쉰 평에 논 삼백 평을 얻어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당신 삶을 꾸린다 한다면, 이들을 좋아할 수 있다. 텃밭에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와 당근과 배추와 무와 고추와 가지와 상추와 시금치를 골고루 심어 손수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땀을 흘리는 흙일꾼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이들 지난날 발자국이 어떠했다 하더라도 반가이 맞아들일 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정책을 끊이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잘난 척하지 말고 힘과 돈과 이름을 송두리째 내려놓으며 흙일꾼이 된다면 즐겁겠다.

 그렇다. 진보이니 개혁이니 혁명이니 변혁이니 하고 신나게 외치기는 하지만, 막상 손수 흙일꾼이 되려고는 안 하는 지식인들은 전두환하고 똑같으며 이명박하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참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정당이다. 여기에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그닥 다를 구석이 없다고 느낀다. 아주 똑같은 정당은 아니다. 틀림없이 외침과 삶과 넋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삶과 눈물방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날마다 두세 끼니 밥을 먹는 사람인 줄을 또렷이 깨달으면 좋겠다. 내가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해야 좋은가를 조금 더 일찍 깨달으면 좋겠다. 스웨덴 정책이나 핀란드 정책도 다 좋기는 좋은데, 내 작은 마을에서 내 작은 손으로 내 작은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스웨덴 정책이나 미국 정책이나 마찬가지이고 핀란드 정책이나 북녘 정책이나 매한가지이다.

 군대를 키우거나 미사일을 만들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 도시를 떠나든 도시에서든 내 살림집 앞마당을 텃밭으로 일구면서 차근차근 나 스스로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나날을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평화를 이룬다.

 사랑하는 책읽기란 사랑하는 삶읽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를 밝힐 때에, 바야흐로 책읽기를 어떻게 즐기며 나눌 때에 아름다운가를 몸으로 배운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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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씨


 우리 멧골자락 단풍나무 한 그루에서 벌써 씨가 맺는다. 어제와 그제는 이 단풍나무를 미처 못 보았으니, 요 며칠 사이에 씨가 맺지 않았나 생각한다. 5월을 갓 넘긴 이무렵, 단풍나무는 단풍꽃을 떨구면서 단풍씨를 맺는구나. 단풍나무는 참말 일찍 꽃과 씨를 내고 나서 겨우내 붉디붉은 단풍잎을 예쁘게 지키는구나.

 단풍씨는 단풍꽃처럼 사람들 눈에 거의 안 뜨이면서 아주 조용히 흙으로 떨어지겠지. 아스팔트가 깔린 도시에 심은 단풍나무는 꽃을 피운들 알아볼 사람이 없고, 씨를 떨군들 싹이 틀 자리가 없다. 오직 흙바닥 멧자락에서 살아가는 단풍나무일 때에만 꽃을 즐길 수 있고 씨가 살아날 수 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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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만박 - 아즈망가 대왕 10주년 기념본!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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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고지 석 장 느낌글 011] 오사카 만박


 《오사카 만박》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즈망가 대왕》 네 권을 장만해서 읽은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즈망가 대왕》을 안 읽었으나 《오사카 만박》을 장만해서 읽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즈망가 대왕》 열 돌을 기리며 나온 《오사카 만박》을 《아즈망가 대왕》을 안 읽거나 모르는 채 읽거나 장만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장정일 문학을 읽지 않았어도 ‘장정일 삼국지’를 읽을 수 있고, 이문열 문학을 읽지 않았어도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만, 《오사카 만박》은 《아즈망가 대왕》 을 알뜰히 읽었을 뿐 아니라, 숱하게 되읽은데다가 퍽 사랑하는 사람만 즐거이 사서 읽으며 두고두고 되새기고픈 사람한테 도움이 될 선물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선물판 책이라 한다면 어떻게 엮어야 선물판 책이 될까요. 요미·오사카·사카키 들을 여러 가지로 새로 그리거나 다시 그려서 보여줄 때에? 수많은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빛느낌으로 옮겨진 모습을 보여줄 때에? 갖가지 캐릭터 상품을 한 자리에 그러모아 보여줄 때에? 《아즈망가 대왕》한테 바치는 ‘새로 읽는 아즈망가 만화’를 보여줄 때에? 302쪽에 걸친 《오사카 만박》은 ‘소장용’일 텐데, 어떤 마음을 오래도록 건사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 아즈마 키요히코·요츠바 스튜디오 엮음, 대원씨아이 펴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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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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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0] 스콧 슈만,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



 한국말은 ‘발돋움’입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은 ‘發展’입니다. 한글로 ‘발전’이라 적으면 한글이지,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발전’이라는 낱말은 들온말(외래어)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낱말인 ‘발전’이지, 한국사람 스스로 일구거나 빚은 낱말인 ‘發展’이 아니에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 ‘발돋움’을 잊거나 내팽개치거나 잃을 뿐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사진을 찍습니다. ‘撮影’을 하거나 ‘出寫’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camera’를 손에 쥐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진을 합니다. ‘photo’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면 ‘사진’이 아닌 ‘photo’를 하겠지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라면 ‘寫眞’을 할 테고요.

 이 글을 쓰는 나, 이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사람이기에 더 잘 났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이 더 뛰어난 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한국글인 한글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즐겁게 쓰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스콧 슈만 님은 머리말에서 “독자들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패션과 스타일을 보게 되길 바란다(7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는 ‘패션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 아닌 ‘패션사진책’이고,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보여줍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하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다운 넋’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헤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저쪽에 가 있으라고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달려와서 매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완벽하면 할수록 때로는 완전히 지루한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163쪽).” 같은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더없이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하기에 굳이 토를 달 까닭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지없이 마땅한 만큼, 굳이 이렇게 이야기할 까닭마저 없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매무새쯤은 밑바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 사람만 이러한 매무새를 다스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빈틈없다는 사진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사진입니다. 빈틈없다는 글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글입니다.

 그저 이러할 뿐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또 만화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여기에 영화나 연극이나 공연이든 매한가지예요. 빈틈이 없는 작품을 노리면, 틀림없이 빈틈이 없는 작품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빈틈은 없되 아름다움 또한 없기 마련입니다. 빈틈은 없지만 사람내음 또한 없기 일쑤예요.

 ‘사진 아닌 패션사진’을 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늘 이러한 대목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저절로 ‘패션사진’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면 좋을 텐데, 처음부터 ‘패션사진’이라고 못을 박으니 슬픕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시나브로 ‘다큐사진’이 되도록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구태여 ‘다큐사진’이라고 대못을 꽝꽝 박아야 거룩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 이름난 상패를 거머쥐어야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이 되지 않아요. 《다카페 일기》 같은 사진책이나 《윤미네 집》 같은 사진책은 참 사랑스러운 다큐사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다카페 일기》이든 《윤미네 집》이든 이 사진책을 일군 사진쟁이는 ‘다큐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마저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지만, 모리 유지 님이 《다카페 일기》를 일구거나 전몽각 님이 《윤미네 집》을 가꿀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이었구나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을 담은 손길로 함께 지내며 ‘사진도 몇 장 같이’ 찍었을 뿐입니다.

 다시 《사토리얼리스트》를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이 젊은 여성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무척 부끄러워하면서 어색해 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갖은 재주를 피웠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198쪽).”고 말합니다. 사진찍기는 재주놀음이 아니니까요. 사람을 사귀려 하지 않고 ‘멋진 사진’만, 아니 ‘멋진 패션’만 뽑아내려고 하면, ‘사진찍기’이든 ‘패션사진찍기’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기를 내려놓거나 당신이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하고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스콧 슈만 님이 쓴 글을 더 읽으면, 스콧 슈만 님은 ‘더 많이 찍거나 다시 찍어’ 보는 틀에서 벗어나, ‘사진쟁이가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처럼 다가갔을’ 때에 비로소 ‘길거리에서 모델 노릇이 된 여느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나 떨림이나 뻣뻣함을 풀면서 스스럼없이 웃거나 멋진 모습을 잡아 주었다고 밝힙니다.

 사진은 기계놀음도 재주놀음도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반기는 숱한 사람들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아니,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도 나타내거나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 길어올리기도 한다고 이야기해야 옳습니다.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진입니다.

 사람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람입니다.

 기계가 바뀌거나 나아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화와 문명이 태어나거나 깊어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사진기를 쥐었건 사진기 앞에 서건, 서로서로 삶을 즐기는 나날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건, 서로서로 부둥켜안거나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꽃입니다.

 “사진에 담고자 하는 것이 그녀라는 내 의도를 이해했을 때 그녀는 ‘노, 미 브루타’라고 말했다. 사진에 찍힐 만큼 예쁘지 않다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445쪽).”를 읽으며 거듭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할머니한테 당신은 참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할 만합니다.

 할머니는 왜 아름다울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아름답기에 애써 사진으로 찍어야 할까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삶이 아름다울 때에 사랑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다우니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람을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이라면, 어느 한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살포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찍는 사진일 테니까요.

 이리하여, 사진이든 사람이든 발돋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발돋움이 아니거든요. 삶 또한 발돋움이 아니에요. 더 나아지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더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늘 넉넉한 삶입니다.

 사진책 아닌 패션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를 손에 쥔 이들이 이 패션사진책을 넘기면서 ‘사람들마다 어떠한 사랑과 삶을 받아들여 즐기거나 누리는가’를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결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4344.5.11.물.ㅎㄲㅅㄱ)


―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사진·글,박상미 옮김,윌북 펴냄,2010.6.20./178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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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미래그림책 8
야시마 타로 글 그림, 정태선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빗방울 노래를 듣는 어여쁜 마음으로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 야시마 타로, 《우산》(미래M&B,2001)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자꾸 멈칫합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월이 그리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 옳지 않고 그리 바르지 않아서, 책에 적힌 글을 고스란히 읽지 못합니다. 볼펜을 들어 책에 적힌 글을 자꾸 고칩니다. 짤막한 글월이지만, 이 짤막한 글월을 아이한테 곧이곧대로 읽어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말을 다 못 알아듣는 아직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제 어버이가 들려주는 목소리 결을 헤아리면서 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서너 살 아이들이 서너 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듣는 말마디로 앞으로 예순이고 일흔까지 살아갈 텐데, 서너 살 어린 나날부터 어떤 말마디를 듣도록 하느냐는 아이 삶과 넋을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그림책 《우산》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번역 글월’에 끝없이 걸려 넘어집니다. 그림책 줄거리를 살피고, 그림책 느낌과 결을 살피기 벅찹니다. 그림책을 그린 야시마 타로 님으로서는 당신 고향나라에서 조용하면서 오붓하게 살림을 꾸리며 지내지 못하는 아쉬움과 고단함을 담았을 텐데, 이 아쉬움과 고단함이 묻는 하루하루라 하더라도 예쁘며 즐거이 꾸린 이야기를 풀었을 텐데, 썩 옳거나 바르게 적바림하지 못한 번역 글월 때문에 그예 이마를 찡그립니다.

 4쪽부터 말썽입니다. “모모는 선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라 나오지만, 선물은 ‘너무’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매우 마음에 들어”나 “참 마음에 들어”로 적어야 합니다. 6쪽에서는 “날씨가 계속되었고”를 “날씨가 이어졌고”로 고칩니다. “매일 아침”은 “아침마다”로 고칩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는 “엄마한테 여쭈었습니다”로 고칩니다. “대답을 하셨습니다”도 영 내키지 않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라 해야 알맞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초조해졌습니다”는 “마음이 바빠졌습니다”로 고치고, “햇빛이 반사되는 것을 본 순간”은 “햇빛이 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로 고칩니다. “우산이 필요해요”는 “우산을 써야 해요”로 고치고, “몹시 우울해졌습니다”는 “몹시 슬펐습니다”로 고칩니다. “다 큰 숙녀처럼”이란 무엇일까 궁금하면서 슬픕니다. 왜 아이들한테 “꼬마 숙녀” 같은 말을 쓸까요. 우리 말은 “꼬마 아가씨”나 “꼬마 색시”예요. “다 큰 숙녀처럼”이 아니라 “다 큰 아가씨처럼”이나 “다 큰 어른처럼”으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우산 위에서 빗방울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는 이 그림책에서 고빗사위인데, 번역 글월을 이렇게밖에 못 적습니다. “우산 위에서”는 참으로 잘못 쓴 말투입니다. “우산에 떨어지는”이나 “우산으로 떨어지는”으로 적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로 고칩니다. 


.. 모모는 미국에 사는 작은 여자아이입니다. 모모네 부모님이 사셨던 일본에서는 모모가 ‘복숭아’라는 뜻이지요 ..  (2쪽)


 일본사람은 제 아이한테 ‘모모’라는 이름을 곧잘 붙이곤 합니다. 한국말로 옮겨진 일본 이야기책 가운데에는 ‘모모’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가 퍽 자주 나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제 아이한테 ‘복숭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한자로 짓는 이름으로는 붙일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일본사람처럼 ‘복숭아(모모)’라 말하거나 부르거나 가리키지는 않아요. 아이한테 ‘살구’라든지 ‘능금’이라든지 ‘배꽃’이라든지 일컫지 않습니다. 그러나, ‘앵두’나 ‘딸기’라는 이름은 드문드문 딴이름 삼아 쓰곤 합니다. ‘오얏’은 안 쓰지만 ‘자두’는 그럭저럭 쓰기도 합니다.

 시골자락에서 흙을 밟고 바람을 맞으며 햇볕을 누리는 살림살이라 한다면, 아이한테 ‘바람’이라든지 ‘하늘’이라든지 ‘바다’라든지 ‘볍씨’라든지 ‘보리’라든지 ‘수수’라든지 하는 이름을 붙일 만하겠지요. 머리로만 헤아리는 이름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내는 고운 이름답게 ‘논논’이라 할 수 있고, ‘물이랑’이라 하거나 ‘호미’라 할 수 있어요.


.. “엄마, 오늘은 우산이 필요해요.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는걸!” 그러자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모모야, 우산이 없어도 햇빛과 즐겁게 놀 수 있잖니? 우산은 잘 두었다가 비 오는 날 쓰고 가렴.” ..  (8쪽)


 비가 오기에 우산을 씁니다. 비가 오니까 목이 길게 올라오는 신을 신습니다. 그냥 맨몸으로 비를 맞기도 합니다. 이제는 일본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비를 맨몸으로 맞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일본 원자력발전소를 들먹이기 앞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빗물을 맨몸으로 맞으면 안 좋다고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나라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걱정에 앞서, 이 나라 어마어마한 자동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에다가 이 나라 공장들이 내뿜는 매연이 얼크러진 지저분한 하늘을 뚫고 내리는 빗줄기이니까요.

 내가 더럽힌 하늘에서 내가 더럽힌 찌꺼기를 붙안는 빗물이 떨어집니다. 내가 일구는 터전에서 내가 일군 정갈한 삶자락과 매한가지인 맑은 빗물이 떨어집니다.

 도시 빗물이 지저분하든 깨끗하든, 도시사람 삶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이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듭니다. 시골자락이 도시와 견주어 깨끗하다 하더라도, 이 나라를 통틀어 골골샅샅 아름다우면서 정갈할 때라야 비로소 제주섬 빗물이든 울릉섬 빗물이든 한결같이 맑고 시원한 빗줄기가 되어 땅속으로 스며듭니다. 고운 물줄기로 흐르자면, 우리들 여느 삶이 맑으면서 시원해야 합니다.


.. 우산 위에서 빗방울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모모는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  (20쪽)


 모모네 어머님은 모모한테 이야기합니다. ‘햇볕과 즐겁게 놀’ 수 있다고. 빽빽한 건물이 높게 드리운 도시라지만, 이러한 도시에서도 모모네 어머님은 당신 아이가 ‘햇볕과 즐겁게 놀’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도시라 하든 시골이라 하든, 햇볕하고 놀아야지요. 빗물이랑 놀아야지요. 흙과 함께 놀아야지요.

 두 다리로 땅을 박차고 달음박질이나 뜀박질을 할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달음박질이나 뜀박질을 즐기게끔, 맨땅을 살려야 할 어른입니다. 맨땅을 놀리지 않고 자가용 대는 터로만 쓴다든지, 무슨무슨 가게를 자꾸자꾸 늘린다든지, 쇼핑센터나 아파트나 높은 건물만 지으려 한다든지 하면서 돈에 얽매이지 말고, 아이 손을 맞잡고 신나게 뛰고 놀고 걷고 누빌 살가운 마을을 일구어야 즐겁습니다.

 빗방울은 시골에서만 토독토독 투투투둑 하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도시에서든 자그마한 도시에서든 섬에서든 바닷가에서든 멧골짜기에서든 골고루 노래합니다. 빗소리에 개구리와 두꺼비와 맹꽁이 소리가 감겨듭니다. 빗소리에 골짝물 흐르는 소리가 엉겨듭니다. 빗소리에 바람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뒤섞입니다. 여느 도시에서는 빗소리를 가로지르는 자동차 날카로운 소리가 가득할는지 모르지만, 어찌 되든 빗소리는 지붕을 두들깁니다. 창문을 두들기고 우산을 두들깁니다. 아스팔트 까만 바닥이든 흙바닥이든, 빗방울은 똑같이 떨어지며 예쁘게 예쁘게 그림을 그립니다. (4344.5.11.물.ㅎㄲㅅㄱ)


― 우산 (야시마 타로 글·그림,정태선 옮김,미래M&B 펴냄,2001.8.2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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