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에 길든 아이
 ― 자동차 모는 어른 때문에 삶을 잃다



 어버이 되는 사람이 자가용에 길들면 아이 되는 사람 또한 자가용에 길든다. 교사 되는 사람이 학교라는 이름이 붙인 배움터에 자가용을 몰면서 오가면, 학생 되는 사람이 배움터라는 곳에서 자가용을 배운다.

 걸어다니는 어버이 곁에서 걸어다니는 아이가 태어난다. 걸어다니는 교사 곁에서 걸어다니는 학생이 자란다. 자전거를 타는 어버이 곁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큰다. 자전거를 타는 교사 둘레에서 자전거를 타는 학생이 싹튼다.

 자전거는 운동을 하거나 놀이를 하려고 타지 않는다. 내 살림집에서 볼일을 보러 먼길을 오갈 때에 타는 자전거이고, 짐을 실어 나를 때에 타는 자전거이며, 집식구와 함께 움직일 때에 타는 자전거이다. 자전거는 워낙 짐자전거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지, 자전거 달리기대회라든지 살빼기라든지 산타기라든지 따위에 쓰려고 만들지 않았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스스로 가방을 짊어지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스스로 손에 짐을 들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스스로 책을 찾아 읽지 않는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본다. 자가용에 길든 어버이는 텃밭이나 논밭을 일굴 겨를이 없다. 자가용에 길든 교사는 내 보금자리 삶자락을 찬찬히 느끼면서 새소리와 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다.

 그저 바쁘기 때문에 자가용을 몬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바쁜가? 왜 바쁜가? 어떻게 바쁜가? 참말 바쁜가? 두 다리로 걸어서 볼일을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서 볼일을 보았을 때에는 얼마나 더 걸리는가? 내 몸으로 짐을 짊어지고 나르면 얼마나 힘드는가? 내 몸뚱이는 짐 얼마쯤을 들고 나르지 못할 만큼 아무 힘이 없다는 말인가?

 집 한 채 짓는 재료를 스스로 짊어지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집 한 채 짓는 재료 또한 얼마든지 스스로 짊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집 한 채를 하룻밤 사이에 뚝딱하고 지을 생각이 아니라면, 조금씩 천천히 짊어지며 나르면 된다. 커다란 집이 아니라 조그마한 살림집이라면 얼마든지 내 등짐이나 수레로 재료를 나를 수 있다. 집이란 며칠 만에 갑자기 올려세우는 벼락치기가 아니다. 집이란 적어도 오백 해쯤 한 자리에서 버티며 지낼 보금자리이다. 오백 해쯤을 지낼 집을 짓는데 며칠 만에 뚝딱하고 올려세울 수 없다.

 사람들은 바쁘기 때문에 자가용을 몰지 않는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려고 자가용을 몬다. 100킬로미터로 달릴 때하고 110킬로미터로 달릴 때하고 얼마나 다를까. 9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은 8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보다 더 빨리 간다고 하겠지. 그러면, 50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보다 더 빨리 간다는 120킬로미터로 달린 사람은, 더 빨리 간만큼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다움을 빛내는지 궁금하다. 고속철도와 새마을기차와 무궁화기차 가운데 시간을 더 아낀다는 더 빠른 기차는 내 삶을 얼마나 살찌우는지 궁금하다.

 시간을 더 아낀다는 더 빠른 기차를 타자면, 기차삯이 곱배기로 든다. 고속철도 기찻삯은 새마을기차보다 곱배기이고, 무궁화 기찻삯보다 세 곱쯤 된다. 자가용을 몰며 바쁜 일을 본다면, 자가용을 장만하는 돈과 다달이 내는 보함삯과 틈틈이 치르는 기름값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렇게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돈에 앞서, 자동차가 오갈 길을 닦는 데에 나라살림을 얼마나 쓰는가. 아스팔트 길을 1미터 닦는 데에 쓰는 나라살림은 1억 원이다. 게다가, 아스팔트를 까는 찻길이란 언제나 시골마을을 꿰뚫고 숲을 밀며 멧자락을 허물거나 구멍을 낸다. 돈은 돈대로 어마어마하게 들여 찻길을 닦고, 자연은 자연대로 어마어마하게 무너진다. 내가 타는 자가용이란 나라살림과 자연을 엉망진창으로 무너뜨리면서 내 주머니에서 돈을 더 터는 일이 된다.

 생각해 본다. 이웃마을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놓는 일은 팔짱을 끼어도 되고, 내 마을을 꿰뚫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만 반대하면 될까?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둘레로 고속도로가 날 때에는 괜찮고, 내 살림집 코앞으로 널따란 찻길이 뚫리는 일만 나쁜가? 고속도로는 ‘먼 앞날을 살아갈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훌륭한 국책사업’이라 할 만한가?

 이리하여, 나로서는 나라살림이나 자연이 얼마나 무너지는가를 안 느낄 테지만(거의 모든 사람이 안 느낀다),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느끼기 때문에,자가용 값과 보험삯과 기름값을 벌어들이려고 도시에서 더 피튀기며 싸우듯이 일을 해야 한다. 아니, 일이라기보다 돈벌이에 매여야 한다. 돈벌이에 더 매여야 하니까,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책을 읽을 겨를을 스스로 마련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 겨를뿐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하고 살가이 사귀면서 사람으로서 착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이야기할 틈이 없다. 집에서 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 집에서 아이하고 오붓하게 지낼 틈이 없다. 왜냐하면, 자가용을 굴리는 만큼 돈벌이에 더 품을 바쳐야 하니까, 집에서 집식구하고 살가이 지내는 틈은 더욱 줄여야 한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집에 돌아오더라도 돈벌이는 더 해야만 한다.

 이 모두 자가용을 타기 때문에 벌어진다. 게다가, 자가용을 타려고 하면 할수록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나라밖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자가용에 넣는 기름은 패권주의 나라 미국 재벌과 유럽 재벌이 거머쥔다. 이들 재벌이 석유 캐내는 권리를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중남미에서 군대를 보내 억지로 가로챈다. 중남미 볼리비아는 패권주의 미국이 오래도록 가로채던 석유 권리를 도로 찾으려고 혁명을 했다. 피를 흘리면서 싸웠다. 이란과 이라크는 석유 권리를 빼앗으려는 패권주의 나라 미국이 두 나라 사이에 불을 지르면서 두 나라 모두한테 전쟁무기를 판 까닭에 서로서로 피튀기며 싸우고 말았다. 이동안 패권주의 나라 미국은 석유 권리뿐 아니라 전쟁무기 팔아치우는 짭짤한 벌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미국 군대를 이끌어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이라크를 식민지로 삼고야 말았다.

 조그마한 나라 한국땅에서 쓰는 기름(석유)이란, 패권주의 나라 미국에서 움켜쥔 석유 재벌한테서 한국 재벌이 비싼값에 사들인 다음, 한국땅 여느 사람들한테 비싸게 팔려고 하는 기름이다. 이 작은 나라에 고속도로를 더 새로 깔고,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자동차회사가 수두룩하게 있는데다가, 자가용을 더 많이 팔아서 사람들이 자가용을 더 많이 타도록 하는 까닭이란, 미국 석유 재벌과 한국 재벌(한국 재벌은 석유 재벌이기도 하다)이 떼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가용을 타면 자가용 사고팔며 돈을 벌고, 바퀴를 사고팔며 돈을 벌며, 길을 닦고 늘리면서 돈을 버는데다가, 바로 기름을 사고팔며 엄청나게 돈을 번다.

 한국은 조그마한 나라이면서도 사람들이 제도권 입시교육 틀에 어린 나날부터 단단히 길들기 때문에, 마치 내 몸에 달린 두 다리는 언제 어떻게 쓰는지를 잊도록 가르친다. 예부터 〈원숭이 꽃신〉이라는 이야기가 내려왔지만, 〈원숭이 꽃신〉보다 더 모진 “자가용 중독”에 빠지고 만다.

 나는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 나는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는다. 나는 자동차를 모는 면허증을 따지 않았고, 앞으로도 자동차면허증은 딸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여태껏 언제나 두 다리로 살았고, 두 다리가 벅차면 자전거를 탔으며, 자전거로 힘들면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탔다. 더 힘들면 드물게 택시를 탔다.

 커다란 가방에 짐과 책과 아이 옷가지를 잔뜩 짊어지고, 한 팔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팔로는 다른 짐을 들며, 목에는 사진기를 걸고 두 다리로 살아간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숨쉬는 목숨이기 때문에 내 몸을 마음껏 부리면서 살아간다.

 나는 기계를 부릴 마음이 없다. 나는 내 몸을 부리면서 살아가고플 뿐이다. 나는 기계를 써야 할 때에는 기계를 쓰겠지만, 굳이 기계를 안 써도 되는데 내 몸에 있는 기운을 흘려버리거나 묵힐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 셈틀을 켜고 손전화에 밥을 주느라 전기를 쓴다. 그렇지만, 내 손으로 빨래를 하면 되는데 빨래기계를 써서 전기하고 물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쓸 수 없다. 빨래기계를 쓰면 일손을 덜지 않는다. 빨래기계 때문에 써야 하는 전기와 물이란 참으로 많고, 빨래기계는 열 해쯤 쓰면 이제 목숨을 다해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이 덩치 큰 쓰레기는 어떡해야 하나. 내 텃밭에 파묻어야 하는 빨래기계 쓰레기인가?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아주 마땅히 천기저귀를 쓴다. 종이기저귀는 ‘그냥 종이’기저귀조차 아닌 화학약품으로 만든 종이기저귀인데, 갓난쟁이 여린 살결에 어떻게 화학종이기저귀를 댈 수 있는가. 내가 갓난쟁이요 내 어버이가 나한테 화학종이기저귀를 댄다고 하면 내 어버이가 얼마나 싫고 미울까 헤아려 본다.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 앞에서 멈추는 일이 없다.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 앞에서 늘 빵빵거릴 뿐, 빠르기를 줄이지 않는다. 달리는 자동차에 짐을 실어 나른다고? 그래, 아마 ‘자동차를 탄 사람이 가진 짐’은 실어서 나를 테지. 그렇지만, 시골마을에서조차 ‘여느 시골마을 사람들이 짊어지는 짐’을 함께 날라 준다든지, 먼길을 태워 준다든지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기나 한지 궁금하다.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는 ‘걷는 사람이 길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언제나 ‘걷는 사람이 걷던 길을 멈추어 비켜’ 주도록 밀어낸다. 그런데, 자동차는 길을 걷는 사람한테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간다.

 모심기를 할 때에 모판을 자동차에 실어서 날라야 한다고? 모판 하나가 얼마나 무겁기에 스스로 들어서 나르지 못할까? 모심기를 할 때에 일꾼이 몇인데 모판 백 장쯤 씩씩하게 못 나르는가? 모심기를 기계 아닌 손으로 하면서, 모판은 기계로 나르면 무엇을 하는 짓일까? 모판은 기계로 나르고 모는 손으로 심을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기계로 모를 심어야 한다. 두 다리를 논물에 풍덩 담그면서 손으로 모를 심는 뜻을 깨달으려면, 모판부터 한 장씩 가슴에 척 안고서 날라야 한다. 모판 한 장 들지 못하는 사람이 가을걷이를 낫질로 어떻게 벨 터이고, 가을걷이를 해서 푸대에 벼를 담았을 때에, 벼푸대를 어떻게 들어서 나를 수 있을까?

 바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젊을 때를 거쳐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저 바쁘기만 하다. 너무 바쁜 나머지 자가용을 씽씽 빵빵 달리고야 만다. 자가용을 달려 물 좋고 바람 시원하며 햇볕 따사로운 어딘가를 찾아갈 수 있겠지. 그런데 자가용으로 지나친 길자락에 피고 지는 작디작은 풀과 어린나무는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자가용을 달리면서 칡덩굴 냄새를 맡는 사람도 있다지만, 자가용을 몰면서 풀무치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자가용을 몰며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는 들어도 꾀꼬리나 종달새나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자가용을 안 몰 수 없다고들 일컫는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자가용을 안 몰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가용을 안 몰아야 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가용 없이 괴롭겠지. 도시에서는 새소리도 벌레소리도 없으니까. 도시에서는 바람에 뒤집어지는 나뭇잎이 사각사각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도시에서는 나비가 팔랑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이토록 메마른 도시에서는 자가용에 갇혀서 다른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다.

 자동차는 매연을 내뿜는다. 자동차 매연은 ‘다른 자동차에 탔다’고 해서 안 맡지 않는다. ‘내 자동차에 탔을 때’에조차 내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조금씩 함께 마신다. 자동차를 탔을 때에 멀미를 하거나 속이 메슥거리거나 머리가 띵한 까닭은, 내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비롯해 다른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들이마시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일하고 똑같다 할 만큼 매연을 들이마셔야 한다. 몸이 튼튼한 사람이라면, 자동차 안쪽으로 스며드는 매연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몸이 여린 사람이나 어린이나 푸름이라면, 자동차 안쪽으로 스며드는 매연은 몸에 몹시 나쁘다. 이 매연이 차츰차츰 쌓이면서 허파를 쿡쿡 찌르거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만다. 아기를 밴 사람은 감기약을 먹으면 안 될 뿐 아니라, 자동차 또한 타서는 안 된다. 아기를 밴 사람 가운데 몸이 여린 사람은 자가용이든 버스이든 탈 때에 어지럽다고 느끼는데, 자동차에서 내는 매연을 금세 느끼기 때문이다. 금세 느껴 뱃속 아기한테 나쁜 줄을 몸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아기를 밴 사람과 갓난쟁이를 돌보는 사람을 자가용에 태우면서 움직이는 사람은 아기와 애 어머니한테 담배연기를 입에 쑤셔넣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구실을 하자면 책을 읽어야 한다. 어버이가 된 뒤로는 더 바쁘고 훨씬 빠듯하다지만, 어버이 구실을 하자면 책을 더 자주 매우 넓게 읽어야 한다. 시간죽이기라든지 문학취향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내 삶을 들여다보거나 내 삶을 깨닫는 책을 바지런히 찾아서 읽어야 한다. 예방접종이 화학조합 병원균을 사람 몸에 억지로 집어넣는 일인 줄 안다면, 아무 과자나 아이한테 함부로 먹이지 못할 테고, 자가용에 섣불리 아이를 태우며 돌아다닐 수 없다. 집에서 밥을 하면서 법랑냄비라든지 양은냄비를 함부로 쓸 수조차 없다. 법랑과 양은은 조금씩 벗겨지면서 아이 몸에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할 때에 화학세제를 안 쓰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떤 밥그릇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더욱이, 스탠냄비를 쓰더라도 반찬통을 플라스틱통으로 쓰면 도루묵이 된다. 이런저런 흐름을 깨닫자면 바지런히 책을 읽으며 배워야 한다.

 교사 되는 사람은 학생을 맡아 가르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교대나 사대를 마쳤대서 교사가 되지 않는다. 교과서를 잘 가르친대서 교사가 될 수 없다.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한 다음, 이런저런 일이 많기 때문에 책을 안 읽거나 못 읽는다면,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할 때까지 읽은 책’ 틀에서 바라보거나 생각할밖에 없다. 그런데,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할 때까지도 꽤나 바쁘고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교사 노릇을 하기로 한 뒤라면 더욱 책을 힘껏 읽으면서 여태껏 제대로 모르거나 하나도 모르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땀흘려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배우지 않는 교사라면 스스로 배울 학생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들한테 질서와 통제와 훈육과 교훈과 제도와 법규만을 길들일 뿐이다. 가르치며 배우는 어른으로 살아가자면, 누구보다 더 힘들여 배워야 한다. 교사 자리에 서는 사람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아이 어버이’한테까지 가르치는 몫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느 어버이보다 훨씬 땀흘리면서 배우지 않고서야 교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 모든 뿌리는 자가용에 있다. 이 모든 바탕은 자가용에 있고야 마는 오늘날 삶터이다. 권정생 할배가 쓴 글을 엮은 《죽을 먹어도》에 실린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를 읽은 사람은 꽤 많은 줄 알지만, 이 글을 읽고도 승용차(자가용)를 버렸다고 밝힌 사람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도록 뉘우쳤다는 사람마저 자가용을 아직 안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만 듣는다. 어쩔 수 없이 자가용을 써야 할 때가 있단다.

 그러나, 우리 삶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길들고 만 일이 있을 뿐이다. 길들고 물들고 젖어든 일만 있다.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어버이나 교사라면 아주 마땅히 자가용을 버려야 한다. 오토바이도 버리고 다 버려야 한다. 큰짐을 날라야 할 때에만 짐차를 쓰거나 빌려야 한다. 바쁘면 시골에서 살아가지 말고 도시로 가야 한다. 바쁘면 시골학교에 아이를 넣지 말고,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로 아이를 보낼 노릇이다. 자가용을 버리지 않으면서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라는 말이나 ‘나는 교사입니다’라는 말이나 ‘나도 사람입니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4344.6.8.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ed House - 붉은 틀
노순택 사진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잊은 사람들 삶을 다큐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36] 노순택,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



 다큐사진을 찍는 노순택 님은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라는 사진책 머리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도, (그것이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밀도 있는 작업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타인의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또 내 작업을 검토하면서 알게 되었다(1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북녘 이야기와 삶을 사진으로 담든, 남녘 사람들과 사랑을 사진으로 싣든, 깊이 있게 사진말을 나누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느 사진감을 고르든 똑같습니다. 어느 일을 하든 매한가지입니다. 쉬운 일이란 없고, 쉬운 사진이란 없으며, 쉬운 파헤치기나 사귀기란 없습니다.

 사진책 《RED HOUSE》 머리말에는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겉’뿐이다(9쪽)”라는 이야기도 한 줄 적힙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겉을 찍고 겉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속을 찍고 속만 나눌 수 있어요. 겉과 속을 함께 찍을 수 있으며, 겉과 속을 하나도 못 찍을 수 있어요. 스스로 겉을 찍으려 하면 겉을 찍습니다. 스스로 속을 찍으려 할 때에는 속을 찍어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겉치레로 사귄다면 겉훍기로 그칩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속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속사랑을 이루어요.

 사진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글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습까지 담지 않습니다. 그림은, 춤은, 노래는, 영화는, 연극은 어떠하다고 할까 돌아볼 노릇입니다. 어떠한 길을 걷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나누는가는 사뭇 달라집니다.

  사진책 《RED HOUSE》를 들여다봅니다. 세 갈래로 나누어 사진을 싣고 보여줍니다.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로 나눈 《RED HOUSE》입니다. 펼쳐들다에서는 “질서의 이면”을 말한다 하고, 스며들다에서는 “배타와 흡인”을 말한다 하며, 말려들다에서는 “전복된 자기모순”을 말한다 합니다.

 사진을 넘기면서 세 갈래 이야기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가 이러할 수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세 갈래 이야기란 따로 떨어뜨린 셋이 아니라 한몸이고, 세 갈래 이야기는 북녘사람 삶이나 남녘사람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될 수 있지만, 북녘과 남녘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노순택 님은 ‘종이쪽 놀이(카드섹션)’를 하는 북녘사람들을 바라보며 ‘질서 뒤에 가려진 모습을 펼쳐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종이쪽 놀이를 펼치는 10만 어린이와 어른들 움직임을 질서라 일컬을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이쪽 놀이란 질서라 일컬을 수 없을 텐데요. 질서가 아닌 권위이고 권력이며 군국주의라고 느낍니다. 질서일 수 없는 슬픔과 바보짓과 아픔이라고 느낍니다. 질서하고는 동떨어진 눈물이며 생채기인데다가 용두질이구나 싶습니다. 깊이를 따지면, 종이쪽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북녘사람만이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벌이는 일입니다. 북녘이나 남녘이나 틀에 박힌 초·중·고등학교 교육입니다. 북녘 군대나 남녘 군대나 틀에 박힙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지키려는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밟고 서로를 더 잘 죽이려는 ‘사람 죽이는 재주’를 길들이는 군대예요. 이는 사진책 《RED HOUSE》 셋째 갈래인 말려들다를 넘기면 숱하게 나오는 ‘군인옷 입은 어르신’ 얼굴을 보면 쉬 어림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김일성 얼굴보다 이 ‘김일성 그림을 들거나 불사르는 군인옷 입은 남녘 남자 어르신들 얼굴’이 훨씬 무시무시하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노순택 님은 왜 “붉은 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 《RED HOUSE》를 내놓았는지 아리송합니다. 북녘 사회가 붉은 틀을 보여주기에 《RED HOUSE》를 찍었다 할 테지만, 정치권력자가 보여주는 붉은 틀이 북녘사람들 삶자락은 아니거든요. 붉은 틀에 가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붉게 물들지는 않거든요. 아니, 붉은 틀에 오래오래 가둔 끝에 시나브로 붉게 물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든 붉은 피가 흐르지만 붉은 사람 아닌 흙빛 사람이에요.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빛 사람입니다. 입시지옥에 얽매인 채 시험점수만 외워야 하는 남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참으로 슬프며 불쌍한데,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또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대로 참으로 슬프며 불쌍해요. 서로서로 ‘더 낫지’ 않고 ‘더 나쁘지’ 않아요. 둘 모두 아름다움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채 숨을 잇습니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든 정치권력을 쥔 사람한테 눌리는 사람이든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늙은이로 죽습니다. 제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백 살을 튼튼히 살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었더라도 갓난쟁이일 때에는 똥오줌을 못 가립니다. 붉은 틀이란 아직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이에요.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을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담아서 나눈다 할 때에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만 얻고야 맙니다. 다큐사진이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구태여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일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다큐사진은 사랑사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담는 사진이 곧 다큐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책 《RED HOUSE》를 넘기는 내내 노순택 님이 북녘사람과 남녘사람을 바라보며 어떠한 사랑을 무슨 빛깔로 어떤 손길로 담아서 나누려 하는가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요”를 까망하양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우리는 행복해요”를 무지개 빛깔로 보여주었다면 어떠한 느낌과 이야기가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침나절에, 새벽나절에, 낮나절에, 저녁나절에,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뭇 꽃과 풀이 어여삐 어우러진 학교 문가와 둘레를 살펴본다면, 또 창문턱을 가만히 ‘깊게’ 들여다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까 가누어 봅니다.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몸짓 말고,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구두코와 발가락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옷깃과 지갑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붉은 틀’에 꽁꽁 싸매 두었다지만, 이곳저곳에 조용히 스며들어 선보이는 ‘사람내음’과 ‘사랑내음’을 곱게 어루만지듯 감싼다면,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울 광화문 큰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는 어르신들 흰머리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사진책 《RED HOUSE》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새삼스레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더 사랑해 주셔요.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오래오래 내 고운 이웃으로 여겨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큐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으로 내 하루하루를 흐뭇하게 웃고 떠들며 즐기지 않을 때에는 다큐사진하고 멀어집니다. 누군가를 붉은 틀이라고 이름붙일 때에는, 이 이름을 붙이는 사람부터 붉은 틀입니다. (4344.6.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심기 어린이


 첫째 아이는 곧 석 돌을 맞이한다. 석 돌을 맞이하는 아이와 함께 살아오면서 이 아이가 얼마나 몸과 마음으로 잘 느끼거나 아는가를 날마다 새롭게 깨닫는다. 아이가 모르는 일이란 없다. 어버이가 못 알아채거나 둘레 어른이 안 알아챌 뿐이다.

 아이가 물가를 거닌다. 그렇지만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둘레 어른이나 언니 오빠 가운데 물에서 저를 아끼면서 즐거이 놀아 줄 만한 사람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장난걸기는 장난을 거는 쪽에서는 재미날는지 모르지만, 장난을 받는 쪽에서는 못마땅하거나 싫을 수밖에 없다.

 멧골학교 어린이와 어른이 손으로 모심기를 하던 어제, 아이는 논둑에서 얼쩡거리기만 한다. 아이한테는 무논 또한 똑같은 물가이다. 아이한테 무논은 퍽 깊은 물이요, 진흙이 폭폭 빠지니 아이로서는 자칫 숨을 거둘까 두렵다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손으로 모를 알맞게 뜯어 진흙을 폭폭 밟으면서 물속에 손을 포옥 담그면서 살짝 쏙쏙 꽂는 모심기를 네 살 나이에 겪으면 퍽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모심기가 되든 그냥 물놀이가 되든 헤엄치기가 되든, 아이가 물에서 걱정없이 놀거나 어울릴 수 있다고 깊이 느끼기 앞서는 논에 들어올 수 없겠지.

 볍씨에서 쑥쑥 올라온 모를 조금씩 뜯어 무논에 심으며 생각한다. 손모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하는 일이다. 쉴 수 없는 일이고, 서둘러 끝낼 일이다. 이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둘레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는 누군가 있어야 하리라. 노래를 듣고 춤사위를 느끼면서 등판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잊고, 모를 꽂을 때마다 쿡쿡 쑤시는 허리를 잊어야 하리라.

 이제 거의 모든 논에서 논을 갈아엎거나 논삶이를 하거나 가을걷이를 하거나 볏짚을 털거나 하는 온갖 일은 기계가 맡는다. 모심기 또한 기계가 알뜰히 재빨리 해낸다. 손을 쓰는 일은 어리석다. 손을 써서 할 바에는 모든 일을 손을 써서 해야 할 테지. 자가용을 몰면서 무논에 손모를 심을 수는 없다. 아니, 자가용을 몰면서도 얼마든지 무논에 손모를 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손모를 심는들 자가용을 모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면, 무엇을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걷고 뛰고 달리고 서고 눕고 박차는 두 다리로 꼿꼿하게 살아가면서 흙과 물과 벼와 해와 숨을 손으로 받아들인다. 모를 심은 손으로 아이 볼을 쓰다듬는다. 모를 심은 손으로 아이 머리카락을 빗은 다음 두 갈래로 묶는다. 모를 심은 손으로 아이를 품에 안는다. 모를 심은 손으로 아이를 눕히고 이불을 여미어 밤잠을 재운다. (4344.6.7.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빨래


 밤새 틈틈이 깨어나 갓난쟁이 기저귀를 갑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일어나 기저귀를 갈기도 하지만, 옆지기가 아버지를 부르기에 벌떡 일어나서 기저귀를 갈기도 합니다. 밤새 쌓이는 똥오줌기저귀가 몇 장쯤 되는가를 헤아려 밤 빨래나 새벽 빨래를 합니다. 밤이나 새벽에는 넉 장까지 그대로 담그고, 다섯 장째부터 빨래를 합니다. 시골집은 밤이 되면 퍽 쌀쌀해서 새벽에 보일러를 돌립니다. 새벽나절에는 따순 물로 새벽 빨래를 합니다.

 아기가 빨래거리를 잔뜩 내놓으면 깊은 밤 한 시이든 두 시이든 빨래를 한 차례 더 합니다. 밤 열두 시에 겨우 등허리를 토닥이며 자리에 드러눕기 앞서 모든 빨래를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열두 시 땡 하고 지나고 나서도 으레 새 빨래거리는 나오고, 새벽 빨래를 하건 안 하건 밤새 잠자리에 들기는 어렵습니다. 집에서 아기를 돌보는 사람은 밤잠도 새벽잠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밤잠도 새벽잠도 이루기 힘든 터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이기저귀를 채우는구나 싶습니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안에서는 집안대로 온갖 일에 시달릴 테고, 집밖에서는 집밖대로 돈벌이를 하느라 힘들 테니까요.

 새벽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새벽 빨래를 합니다. 시나브로 이른여름에 접어든 유월 첫머리 새벽은 퍽 밝습니다. 새벽 세 시 반쯤부터 희부윰합니다. 네 시를 넘기면 하이얗고, 네 시 반부터는 꽤 환하며, 다섯 시면 동이 다 틉니다. 더운 여름날 밭에서 김매기 좋은 때는 네 시 반부터 여섯 시 사이입니다. 나는 이무렵, 네 시 안팎에 새벽 빨래를 하면서 하루를 엽니다. 첫째 아이가 밤오줌기저귀를 뗄락 말락 하는 무렵에 둘째 갓난쟁이 똥오줌기저귀를 빨아야 하다 보니, 내 팔뚝은 남아날 겨를이 없고 숨돌릴 틈이 없습니다. 하루 내내 팔뚝이 저린 채 보냅니다. 둘째 아이가 석 돌이 될 네 살을 맞이할 무렵까지 새벽 빨래입니다. (4344.6.6.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힘드니까 책읽기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어른들이 책을 장만해서 아이들 손에 쥐도록 하니까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어른들이 책을 장만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만드는 어른이 있기에 어린이는 책을 찾아서 읽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은 어른이 만듭니다. 어른들이 읽을 책도 어른이 만듭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책만들기라는 일 때문에 바쁘거나 힘듭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드는 책에만 마음을 쏟느라 다른 책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드는 책은 내가 만드는 책대로 꼼꼼히 살피거나 찬찬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책은 다른 사람이 만든 책대로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기쁘게 아로새겨야 합니다. 다른 좋은 책을 찾아서 읽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교사 노릇 하기 참 벅찼다고 합니다. 갖가지 공문서를 써야 하고, 아이들한테 돈을 거두어야 할 뿐더러, 남자 교사는 밤새워 학교를 지켜야 했습니다. 이러면서 일삯은 몹시 적었습니다.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교사 구실 하기 꽤 힘겹다고 합니다. 지난날만큼 공문서를 써야 하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한테 돈을 거두지 않는데다가, 이제 학교를 밤새워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면서 일삯은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교사로서 교사답게 일하는 터전이 안 된 지난날하고 견주어 이모저모 나아졌대서 교사 구실이 수월할 수 없습니다. 교사 구실이 수월하지 않은 까닭은 교사가 교사다움을 돌볼 수 있게끔 언제나 새로 배우거나 새로 가다듬으며 새로 태어나도록 이끄는 얼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사뿐 아니라 여느 어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몸소 보여줍니다. 입으로 떠들며 가르치지 않더라도 모든 어른은 모든 어린이 앞에서 몸소 삶을 보여줍니다.

 어른이 어린이한테 보여주는 삶은 아름다울 수 있으나, 구지레할 수 있습니다. 시커먼 돈을 뿌리거나 집어삼키는 어른만 구지레하지 않습니다. 말과 삶이 다르거나 말이 거칠거나 막된 어른 또한 구지레합니다.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운 길하고 동떨어진 어른이라면 모두 구지레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책을 읽으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어른들 스스로 책을 읽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조차 제대로 읽기는 읽고 나서 읽으라고 책을 내밀까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일곱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며 열다섯 살이 되다가는 스무 살이 될 무렵, 이러한 나이에 걸맞게 차근차근 읽으며 받아들일 만한 책을 ‘어른으로서 먼저 살뜰히 읽’는가요. 아이들이 즐거이 읽을 만한 책을 하나하나 살피거나 가려서 알뜰히 갖추었는가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나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모두 힘듭니다. 바쁘고 힘들며 벅찹니다. 그래, 더없이 바쁘기 때문에 책을 읽습니다. 더없이 바쁜 터라 내 삶을 사랑하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그지없이 힘들기 때문에 책을 읽습니다. 그지없이 힘든 터라 내 삶을 아끼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면서 거듭나는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아이들 앞에서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한 어른이라 할 만합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지 않을 뿐더러 거듭나지 않는 어른이라 한다면, 아이들 앞에서 어른이나 교사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4344.6.6.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