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글이란


 느낌글이란 내 느낌을 적는 글입니다. 생각글이란 내 생각을 적는 글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느낌글하고 생각글을 헷갈리거나 잘못 압니다. 내 느낌을 적지 않았으면서 느낌글인 줄 알고, 내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생각글이라고 여기고 맙니다.

 글을 읽건 영화를 보건 일을 하건 사랑을 나누건, 어떠한 삶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왜 이러할까?’나 ‘이러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돌아보면서 느낌을 적을 때에 느낌글입니다. ‘이러하다면 나는 어찌저찌 해야겠다’ 하고 생각을 밝히면 생각글인데, 내가 스스로 받아들여 몸으로 움직이는 삶을 적을 때에 비로소 참다이 생각글을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내가 자가용을 타고 돌아다니는 일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는 일은 똑같다’ 하고 이야기했을 때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올바로 적는 느낌글이라 할 때에는, ‘내가 자가용을 타는 일이 어떻게 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는 일하고 똑같다고 이야기를 하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할까? 참말 이러할까? 참말 이러하다면, 나는 자가용을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참으로 이러하다는데 나는 내 어버이나 동무나 둘레 사람들이 자가용을 탈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자가용을 타는 일이 우리 삶터하고 어떻게 잇닿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 하고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 느낌을 적을 때에 느낌글이 됩니다. 생각글이라 할 때에는, ‘자가용이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꼼꼼히 살피고 따진 다음, 환경영향평가를 비롯해 한국 자동차 보유대수와 공해비율과 석유재벌 얼거리를 모두 돌아보고 나서, 이 모두를 한 자리에 얽으며 펼치는 내 생각’이 담긴 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는 커다란 잘잘못뿐 아니라 나 스스로 제대로 못 느끼거나 못 깨우치거나 못 알아채면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잘잘못으로 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알아보면서 펼치는 내 생각’이 담겨야 비로소 생각글입니다.

 느낌글을 쓸 줄 모르면 책을 읽어도 내 느낌을 붙잡지 못합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떠한 책을 읽어도 좋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글을 쓰지 못하면 나한테 빛과 소금이 되는 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학교를 제아무리 오래 다니거나 훌륭한 스승을 만났더라도 참생각을 스스로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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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안 몬다


 너무 마땅하지만, 너무 마땅한 이야기를 헤아리지 않거나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몹시 많기 때문에 머리말을 붙인다. 자동차를 몰면서 일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들지 않는다. 짐을 짐차에 실어 나른다든지, 버스나 택시를 모는 사람은 이 이야기하고는 다른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안 몬다. 참 안 바쁜 사람이 자동차를 몬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몰 겨를이 없다. 참 바쁜 사람은 저마다 맡은 일을 치르거나 살림을 돌보거나 삶을 일구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에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바쁜 척하는 사람하고 무엇이 바쁜지를 모르는 채 휩쓸리는 사람하고 안 바쁜 사람이 자동차를 몬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를 몰면서 저마다 꾸리는 삶을 길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참 바쁜 사람은 자동차가 아니라 두 다리와 온몸으로 이 땅을 밟으면서 제 보금자리를 보살핀다. 참 바쁜 사람은 참으로 바쁘기 때문에 가장 눈여겨보면서 사랑해야 할 일을 한다. 사랑해야 할 일은 자동차 몰기가 아니다. 가장 눈여겨볼 일은 자동차 몰기가 될 수 없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하고 보내는 나날을 사랑해야 한다. 내 삶자락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일을 가장 눈여겨보아야 한다.

 책 하나를 읽는다 할 때에는 내가 가장 사랑할 책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 책 하나를 읽는 동안 내 가슴으로 깊이 아로새길 이야기를 느껴야 한다. 책 하나를 덮고 나서 이 책이 내 삶으로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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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62 : 알고 싶어 읽는 책


 내가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읽을 수 있고, 다 알면서 재미가 있다고 느껴 책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 아는데 애써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영화로 본다든지, 학교에서 강의나 수업을 들을 까닭이란 없어요. 내가 모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힘껏 책으로 읽습니다. 내가 배워야 할 이야기라서 학교를 찾아가 강의나 수업을 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개숙여 차근차근 새겨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과 글로 조그맣게 이루어진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밟은 숲을 밟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여느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디깊다 할 만한 숲속을 헤맸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나는 흙 위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은 곰이 다니는 길이었습니다(13쪽).”는 말처럼, 사람길이 아닌 곰길을 걷거나 다람쥐길을 걷습니다. 연어길에 함께 서거나 사슴길에서 다리를 쉬며 하룻밤을 묵습니다. 사진책 《숲으로》는 여느 사람들 여느 눈썰미와 여느 삶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그러나, 《숲으로》는 아주 남다르거나 아주 새로운 이야기이지는 않습니다. 이제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이 되었을 뿐,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터에서 다 다른 사랑을 나누면서 다 다른 삶을 일구던 곳 이야기를 밝힙니다. 더 좋은 삶이나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땅과 사랑과 삶을 바라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니다. 더 큰 도시로 찾아듭니다. 도시로 몰려들어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작은 도시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지내더라도 물질문명을 똑같이 즐깁니다. 입으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한국땅 원자력발전소를 근심하지만, 막상 몸으로는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쓸 뿐 아니라, 전기를 써서 만드는 수많은 물질문명을 안 쓰거나 덜 쓰는 길을 살피지 않아요.

 숲이 숲다웁도록 하는 이야기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도록 하는 슬기를 깨닫지 않습니다. 삶이 삶답도록 하는 깜냥을 빛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답도록 하는 땀방울을 흘리지 않습니다.

 이즈막에 새로 나온 《원전을 멈춰라》(이음,2011)는 벌써 스물한 해 앞서 《위험한 이야기》(푸른산,1990)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스물한 해 앞서 이 나라 사람은 “위험한 이야기”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이라서 더 잘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날보다 책으로 조금 더 읽을 뿐입니다. 위험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고 싶어 읽는다기보다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지니까 읽습니다.

 무언가를 알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머리에 앎조각으로 담겠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알아차리면서 내 삶을 새롭게 일구겠다는 뜻이어야 비로소 알려고 애쓴 일이요, 배움이며 가르침입니다.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알도록(살도록)’ 할 이야기를 먼저 스스로 ‘알려고(살려고)’ 애쓰는 교사가 몹시 드뭅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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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우는 어른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가 어른을 키울 수 없습니다. 때때로 아이가 어른을 깨우치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을 키우지 못합니다. 오직 어른이 아이를 키울 뿐입니다.

 아이는 이것을 먹고 싶거나 저것을 갖고 싶다 말할는지 모릅니다. 아니, 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한테 아이가 먹고 싶다 해서 다 먹이지 않고, 아이가 갖고 싶다 하기에 다 장만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이가 먹어야 할 밥을 장만해서 먹이고, 오로지 아이가 갖추며 즐겨야 할 것을 장만해서 건넵니다.

 아이가 어떤 책을 읽으려 할 때에는 어른이 먼저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어른이 먼저 읽지 않은 책을 아이한테 섣불리 쥐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어느 책을 읽기 앞서 다른 어른이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듭니다. 곧, 내가 되든 남이 되든 ‘어느 어른이든 먼저 책을 알아보고 읽어서 책 하나로 태어나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책을 써서 읽고 만들어야 비로소 아이가 책 하나 손에 쥡니다.

 아이는 자가용이든 자전거이든 스스로 타지 못합니다. 어른이 장만한 자가용에 타는 아이요, 어른이 태우는 자전거에 타거나 어른이 마련한 자전거에 혼자서 타는 아이입니다. 어른이 자가용을 타면 아이도 자가용을 탑니다. 길들거나 익숙해집니다. 어른이 자전거를 타면 아이도 자전거를 타요. 어른이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하면 아이도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합니다. 어른이 숲을 좋아해서 시골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숲을 좋아하면서 시골 아이로 자랍니다. 어른이 물질문명을 좋아해서 도시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물질문명에 젖어들면서 도시 아이로 큽니다.

 교사는 어른이 맡습니다. 교사를 어린이가 맡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쪽은 어린이요, 가르치는 쪽은 어른입니다. 어른은 아이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를 스스로 먼저 헤아릴 뿐 아니라 몸소 살아내고 나서야 아이한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머리에 든 지식으로 아이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지식이 아닌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살아내는 모습에 따라 교사가 가르치려는 이야기를 배웁니다. 교사가 살아내지 못하면서 지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가 하나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잘못 받아들이고야 맙니다.

 어른이 논밭을 일굴 때에 아이도 논밭을 일굽니다. 어른이 평화를 사랑할 때에 아이도 평화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 아이도 사랑을 나누려 합니다. 어른이 보리밥을 먹으면 아이도 보리밥을 먹습니다. 어른이 생활협동조합 회원이 되어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려 할 때에 아이도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는 길을 걷습니다.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시나브로 즐기기 마련입니다. 땀흘려 일하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땀흘려 일하는 보람을 몸으로 깨우치며 받아들입니다. 돈으로 일을 하고 돈벌이에 더 매달리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돈을 더 살피거나 섬기며 돈으로 무엇이든 하려고 나서기 마련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살아가면서 배웁니다. 어른은 교과서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교과서를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은 어른 삶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는 어른 삶을 바라보면서 저희 삶을 키웁니다. 어른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책 지식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손재주가 뛰어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따사롭거나 넉넉하거나 아름다이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을 참답거나 착하거나 슬기로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4344.6.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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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 길벗어린이 지식 그림책 2
캐롤라인 아놀드 글, 최종윤 옮김, 페트리시아 J. 윈 그림, 이한수 감수 / 길벗어린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뻐꾸기 울음소리를 생각하면서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8] 패트리샤 J.윈·캐롤라인 아놀드,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길벗어린이,2005)



 수많은 멧새 가운데 뻐꾸기는 울음소리를 금세 누구나 알아챕니다. 네 살 아이도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응, 뻐꾹 뻐꾹 뻐꾸기가 우네.” 하고 말합니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사람 귀로 듣기에 무척 높고 맑으며 굵습니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깊은 밤과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에 들으면서 늘 곰곰이 생각합니다. 뻐꾸기라는 새는 스스로 둥지를 틀어 알을 까서 보듬지 못합니다. 일부러 다른 둥지로 파고들어 알을 낳아 자라도록 하는지, 아니면 다른 새를 밀어내려고 이렇게 하는지 알 노릇이 없어요. 다만, 뻐꾸기 한삶을 헤아린다면, 뻐꾸기는 다른 새 알을 죽이면서 제 알을 살리기 때문에 몹시 괘씸하다고 느낍니다. 이 괘씸한 새인데, 울음소리는 맑으면서 곱구나 싶으니 얄궂다고 느낍니다.

 뻐꾸기라는 새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뻐꾸기는 다른 여느 새가 살아가는 곳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둥지를 틀지 못할 뿐 아니라 새끼를 돌보거나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뻐꾸기는 ‘새끼를 알뜰히 사랑하면서 돌보아 날갯짓하기를 가르치는 어미’ 새들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남습니다.

 생각해 보면, 뻐꾸기는 무척 괘씸하달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불쌍하달 수 있습니다. 다른 여느 새는 스스로 깐 새끼들을 스스로 낮밤 가리지 않으면서 아끼거나 돌보거나 품에 안습니다. 다른 여느 새는 저희 새끼를 먹여살리려고 저희는 굶으면서 새끼를 먹입니다. 다른 여느 새는 새끼를 낳아 키우는 나날이 얼마나 고되면서 보람차고, 얼마나 힘들면서 아름다운가를 몸으로 느낍니다. 이와 달리 뻐꾸기는 어미새이든 새끼새이든 힘들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모릅니다. 고되면서 보람찬 삶을 몰라요.

 뻐꾸기 울음소리가 왜 무척 높고 맑으면서 굵은지는 모릅니다. 저는 새를 살피는 학자나 연구자나 전문가가 아니기도 하지만, 뻐꾸기 한삶을 돌아볼 만큼 느긋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네 살 아이와 갓난쟁이를 돌보느라 눈코 빠지는 나날이기 때문에, 숲마실을 하며 숲새를 살필 겨를이 없어요.

 그저, 갓난쟁이를 안고 어르면서 생각해 봅니다. 네 살 아이를 토닥이면서 헤아려 봅니다. 이 뻐꾸기들 울음소리는 제 어미를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만 청개구리하고 매한가지는 아닐까 하고 가늠해 봅니다. 오직 사람 눈으로 살피는 이야기인데, 뻐꾸기 울음소리가 사람 귀에 퍽 예쁘게 들리는 까닭은 틀림없이 무언가 있으리라 느껴요.


.. 오두본은 숲속에 머물면서 직접 관찰한 새들을 그렸습니다. 화가 스스로 야생의 자연을 보고 그린 그림들은 그 당시 아주 드물었으므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오두본은 새의 습성을 자세하게 묘사한 일종의 조류 생태 보고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  (3쪽)


 그림책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길벗어린이,2005)를 펼칩니다. 책이름 그대로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는 새가 ‘하늘을 어떻게 날’며 ‘얼마나 놀라운 목숨붙이’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몸 얼거리가 어떠한가를 어린이 눈높이에서 낱낱이 밝히고, 새라는 목숨은 얼마나 놀라운가를 여러 갈래에서 곰곰이 따집니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사람 눈길에서 바라보자면, 이 그림책 하나를 펼치는 동안 새라는 목숨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달을 만합니다. 하늘을 훨훨 나는 새들이 얼마나 홀가분할까 하고 꿈꾸도록 도울 만합니다. 빈틈없이 그린 그림이고, 알뜰살뜰 적바림한 글입니다.

 한 장 두 장 살피면서 한국에서는 아직 이만 한 그림책이 나오기 힘들겠다고 느낍니다. 한국땅 한국새를 바탕으로 ‘새는 어떻게 날고, 새는 얼마나 놀라운 목숨붙이닌가’를 보여주는 그림책이 나오기란 몹시 힘들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끝없이 시골과 자연을 밀어내는 막개발이 이루어집니다. 한국에서는 그림쟁이나 글쟁이가 시골 살림살이를 조용히 일구면서 새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나날입니다. 새 한 마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살가이 담은 그림책을 엮더라도 한국사람은 이러한 그림책을 느긋하게 돌아보기 퍽 어렵습니다. 먹고살기에 바쁠 뿐더러 온통 도시에 몰린 채 살아갑니다. 자연하고는 등을 돌리면서 물질문명에 젖어들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좋은 생태자연 그림책을 읽더라도 이윽고 입시지옥에 파묻히면서 시험문제 풀이에만 얽매입니다. 중학교에 들 푸름이 나이부터 아이들 머리에는 오직 ‘도시·문명·물질·돈·기계’만 자리잡습니다. 그림책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는 꽤 훌륭하지만, 이 그림책이 어느 대목에서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아챌 만한 어버이는 한국에 꽤 드물 수밖에 없구나 싶어요.


..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까닭에 새들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오늘날 지구상에는 1만여 종의 새가 있습니다. 새들은 극지방의 툰드라 지역에서부터 열대 지방의 밀림에 이르기까지, 또 시골의 논과 밭에서 복잡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집을 짓고 삽니다 ..  (31쪽)


 다시금 곰곰이 생각합니다.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라는 그림책은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얼거리를 살핀 ‘과학지식 그림책’입니다. 생태환경 그림책은 아니고 과학지식 그림책이에요. 새를 과학지식 눈길로 바라보면서 찬찬히 뜯어본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한 권으로 바라볼 때에 무척 잘 빚은 작품이요, 새를 살피는 좋은 길잡이책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읽히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그림책을 읽힐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새를 만날’ 수는 없어요. 새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날갯짓을 좋아하며, 하늘을 날 때에 어떤 느낌이나 생각일는지는 조금도 밝히지 못합니다. 새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느낌이랑 새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느낌이 어떠한가를 차분히 들려주지 못합니다. 어미새가 새끼새한테 먹이를 줄 때에 어떤 날개 모습이요, 새끼새는 날개가 어떻게 돋아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어미새가 새끼새한테 날갯짓을 가르치는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새끼새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겪으면서 날갯짓을 배우고, 날갯짓을 배운 다음 어미새하고 어떻게 헤어지는가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젊은 새와 늙은 새 날갯짓이 얼마나 다른가를 밝히지 못합니다. 배고플 때하고 배부플 때 날갯짓이 어떠한지, 오래도록 날아갈 때 날개가 어느 만큼 결리거나 저린지를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날개 꺾이거나 깃털 빠진 새는 날갯짓이 어떠하고, 제대로 못 나는 새는 어떻게 삶을 일구는지를 보여주지 못해요.

 두 아이 어버이로서 생각합니다. ‘하늘을 나는 얼거리’를 보여주는 일은 그다지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늘을 못 날고 새는 하늘을 날거든요. 하늘을 나는 얼거리를 배우거나 알 수 있대서 하늘을 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새가 하늘을 어떻게 나는가를 안대서 ‘새를 안다’ 할 수 없어요. ‘새가 나는 일’을 조금 돌아본다고만 할 수 있습니다.

 과학지식을 다루든 생태환경을 다루든 더 깊이 한결 넓게 헤아려 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시사상식을 배우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저희 삶을 사랑하면서 아낄 수 있는 길을 여는 책이 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새를 들여다보면서 새를 깊이 사랑하도록 돕는 책으로 엮으면 좋겠어요. 새가 날갯짓하는 삶을 살피면서 새가 홀가분하게 날갯짓하는 보금자리를 조용히 일구며 보살필 수 있게끔 곁에서 좋은 삶동무로 이웃하는 마음을 북돋우는 책으로 빚으면 좋겠습니다. (4344.6.8.물.ㅎㄲㅅㄱ)


― 새, 하늘을 나는 놀라운 생명체 (패트리샤 J.윈 그림,캐롤라인 아놀드 글,최종윤 옮김,길벗어린이 펴냄,2005.2.14./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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