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마법의 신문 기자 동글이의 엽기 코믹 상상여행 2
야다마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노란우산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랑 살아가면 신문을 읽지 않는다
 [어린이책 읽는 삶 1] 야다마 시로,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



 집에서 아이 아버지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 어머니도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종이신문을 받아보지 않거든요. 따로 인터넷을 누비며 누리신문을 읽지도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으니 방송을 볼 일도 없습니다. 때때로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누리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는 일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나거나 터지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일어나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나라밖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죽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한창 무언가를 많이 배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살짝 대학교에 발을 담가 다섯 학기를 다니던 때를 떠올립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 배움삯은 내 아버지가 돈을 빌어 마련해 주었고, 대학교 둘레에서 먹고지낼 잠자리는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장만했습니다. 어쨌든 신문사지국은 밥과 잠을 얻는 곳이요, 일삯이 나오면 이 돈으로 책을 사읽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니 이곳에서 돌리는 몇 가지 신문은 거저로 읽을 뿐 아니라, 다른 지국하고 신문을 바꾸어 읽곤 합니다. 대학교 다섯 학기를 다니며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는 동안 날마다 열 가지 ‘중앙일간지’라 하는 ‘서울에서 나오는 큰 신문’을 읽었습니다.

 열 가지 큰 신문에다가 스포츠신문과 경제신문과 영어신문을 날마다 찬찬히 읽는 동안 시나브로 느낍니다. 열 가지 신문을 읽든 스무 가지 신문을 읽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일과 사람을 다루며, 똑같은 곳에서 취재를 해서 글을 씁니다. 이름은 중앙일간지이지만, 정작 왜 ‘한복판(중앙)’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일간지를 채우는 이야기는 95퍼센트 ‘서울에서 일어나는 서울 이야기’였거든요.

 열 가지 신문을 날마다 읽으면서, 열 가지 신문마다 글투가 다르고 사진결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놓고 조금씩 다른 글투와 사진결로 기사를 채운대서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열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면서도 다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하잖아요. 구름을 바라보든 비를 느끼든, 열 사람은 열 가지 느낌입니다. 열 가지 신문이라면 열 가지 글투가 될밖에 없습니다. 굳이 ‘다른 글투를 느끼자’며 여러 신문을 볼 까닭이 없어요. 이 신문이 못 짚는 이야기를 저 신문이 짚는다든지, 저 신문이 안 다루는 이야기를 고 신문이 다루어야 바야흐로 여러 가지 신문을 보는 보람이 있습니다.


.. 한참 생각한 끝에 ‘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벽신문은 커다란 종이에 기사를 적어서 어딘가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뉴스거리는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에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 1호 신문을 만들었다 ..  (5쪽)


 신문이나 방송하고는 금을 그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책 또한 그닥 많이 읽지 못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하고 견주면 많이 읽는 셈일 테지만,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책읽기가 줄고, 아이 하나를 낳으며 책읽기는 훨씬 줄며, 아이 둘이 되니 책읽기는 더더욱 줍니다.

 집일을 도맡지만, 집일을 제대로 도맡는다 말하지 못합니다. 옆지기가 잔소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옆지기가 ‘집일이 이게 무어냐?’ 하고 따지면 하나부터 열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날마다 할 집일을 날마다 옳게 건사하지 못하니, 집일을 도맡느라 하루 열 시간을 넉넉히 쓰더라도 집꼴이 그닥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다든지 신문을 들춘다든지 방송을 뒤적일 겨를이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집일로 바쁘니 이것저것 챙길 수 없습니다.

 이레째 퍼붓던 비가 하루 그친 다음 다시 비가 퍼붓는가 싶더니, 밤에만 조금 흩뿌리고 날이 살며시 갭니다. 언제 다시 퍼부을는지는 모르지만, 구름이 살며시 걷히면서 햇살이 드리웁니다. 멧자락에서는 멧새 소리가 예쁘게 들리고, 웃마을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에 나가면 도랑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에 잠겨 숨죽이던 소리들이 모조리 깨어납니다.

 갓난쟁이를 안고 마을길을 걷거나 멧길을 거닐 때에 물소리가 콰르르 조르르 들리면, 이 소리를 듣고 갓난쟁이가 참 잘 잡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히면 응애 하면서 곧바로 깹니다. 물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곱게 재웁니다. 이와 달리, 자동차 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놀래킵니다. 아이 곁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가 무엇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해야 좋을까를 몸으로 느낍니다. 아이하고 살아갈 어른으로서 내 하루를 어떻게 다스려야 아름다울까를 마음으로 깊이 되새깁니다.


.. 어떤 사람의 창피스러운 이야기를 신문에 쓰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아예 신문을 만들 수 없는 건 아닐까? … 나는 가짜 신문 제 1호를 붙였다. ‘이제 두고보라지. 모두들 깜짝 놀랄 거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가짜 신문이라고 분명히 써 놨는데도 사람들은 진짜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 “아예 냉장고를 넣어 두면 편리할 텐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배 안에 먹거리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게…….” 아무리 장난 삼아 하는 이야기라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었다  ..  (19, 24, 45쪽)


 어린이책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를 읽습니다. 앙증맞은 그림에 앙증맞은 글이 어우러진 어여쁜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에서는 1985년에 나왔고, 한국에서는 2010년에 옮겨집니다. 나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일찌감치 일본책으로 보았습니다. 그림이 퍽 귀여웁다고 느꼈고, ‘잘 그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줄거리는 어떠할는지 모르나, 일본 어린이책을 꽤 많이 옮기는 우리 흐름을 돌아본다면, 퍽 예전부터 옮길 만하지 않겠느냐 싶었으나, 이제서야 한국말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책을 쓴 야다마 시로 님은 책끝에 “‘진짜’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먼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아요(81쪽).” 하는 말을 붙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몸소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 또한 내가 몸소 알아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여 즐길 이야기라면, 내 몸으로 겪어야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요.

 몸소 아기를 안아야 아기 느낌을 압니다. 아기를 달래고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손수 밥을 차리고 손수 밥을 치우며, 손수 빨래를 하고 손수 빨래를 걷어 개야, 비로소 집일이 어떠한가를 깨닫습니다. 걸레를 손수 빨고, 빗자루를 손수 들어야, 집을 돌보는 나날을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어야 밥맛을 압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밥맛을 모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신문을 읽기’만 해서는 모를 뿐 아니라 ‘내 눈으로 지켜본다’고 해서 알 수 있지 않아요. 더 깊이 스며들어야 해요. ‘삶으로 받아들이도록 몸으로 부대낄’ 때에 천천히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만든 재미있고 멋진 신문을 붙여 주면 이 알림판도 좋아하겠지?’ ..  (6쪽)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로서 아이하고 보내는 오늘 하루가 즐겁기에, ‘아이를 키우는 보람과 재미와 힘겨움과 고단함’을 날마다 새롭게 적바림하는 신문이 없다면, 굳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더라도, 나 스스로 내 아이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새롭게 느끼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며 어여쁩니다.

 아침에 깬 첫째 아이가 새소리를 듣는 멧자락 작은 집이 좋습니다. 첫째 아이가 깨며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깬 둘째 아이가 끄응끄응 하면서 옹알옹알 꽁꽁거리며 눈알을 굴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오늘은 비가 없이 아주 후덥지근할 듯합니다. 아침부터 집안 온도가 27도. 이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둘째 갓난쟁이를 씻기고 집안을 첫째랑 함께 치워야겠습니다. 첫째 아이는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돼지’ 그림을 보며 무척 좋아합니다. 네 살 아이는 앞으로 네 살쯤 더 나이를 먹어 글자를 깨치면, 스스로 이 책을 넘기면서 신나게 읽겠지요. (4344.6.28.물.ㅎㄲㅅㄱ)


―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 (야다마 시로 글·그림,오세웅 옮김,노란우산 펴냄,2010.4.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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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


 백선엽이라는 분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에서는 참모총장을 했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났으니,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스스로 겪지 못해 모른다. 오직 책에 적힌 이야기로만 들을 뿐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서 1980∼90년대를 인천에서 살아낸 사람으로서 백선엽이라는 분을 떠올린다면, 인천 제물포역 뒤쪽 도화동에 널찍하게 자리한 ‘선인재단’이다. 선인재단은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 이름을 따서 붙인 곳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우글우글 모였다.

 선인재단은 사립학교인데, 이 사립학교는 열 해 즈음이던가, 인천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싸우고 싸운 끝에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한테서 재단을 빼앗아 시립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선 뒤로 끝없는 부정부패와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졌으니까.

 제물포역 둘레에 갈 때면 우람하게 버틴 선인재단이 드리우는 먹구름 때문에 서슬퍼런 기운에 싫었다. 버스가 선인재단 둘레를 거쳐 갈 때에는 이쪽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몇 만을 웃돌 학생들이 선인재단 수많은 학교에 우글거리도록 하는 일이 참말로 교육이 될는지 알쏭달쏭했다. 뺑뺑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야 할 때에, 부디 선인재단에 깃든 학교에 안 걸리도록 비손을 했다. 여중과 여고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남중과 남고는 선인재단 쪽 학교로 가면 교사와 선배가 어마어마하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를 일찍부터 들었으니까.

 학교에서 교사는 왜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교과서를 펼칠까. 학교에서 선배들은 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쉽게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걸어다닐까. 학교에서 또래 동무들은 왜 서로 무리를 지어 패싸움을 벌이거나 돌림뱅이 짓을 벌이려 할까. 학교라는 곳에서 조용하면서 착하게 배우고 어깨동무할 수는 없을까.

 한국전쟁에서 훈장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면,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전쟁 영웅이란 무엇이지?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사람이 영웅 아닌가? 적군이라는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죽여야 영웅 아닌가?

 군대에서 장교로 있는 사람은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한다. 군화발로 걷어차며 어서 총알받이로 달려가라고 뒤에서 내몬다. 적군을 수없이 쓰러뜨리려고 아군이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쓰러져야 했을까. 적군을 죽이는 숫자만큼 아군이라는 사람도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 두 나라 총알받이 군인, 곧 여느 사람들은 왜 싸움터로 나와서 낯도 이름도 모르는 서로를 나쁜 놈이라 여기면서 죽이고 죽어야 할까.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흙을 일구며 착하게 살아가면 될 이웃이 아닌가.

 내 어릴 적 인천에서 지내던 나날을 곰곰이 떠올린다. 교사는 몇 해에 한 번씩 학교를 바꾼다. 나는 고맙게도 선인재단 쪽 학교에 안 걸리며 여섯 해를 보냈으나,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아주 마땅히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들 사이에서 수근수근 이야기가 퍼진다. “야, 선인재단 내기는 되게 무섭다며?” “선인재단에서는 엄청나게 줘팬다는데, 거기에서 온 선생은 어떨까?” “그 선생이 우리 학년을 안 맡으면 좋겠는데.”

 선인재단이 사립재벌에서 시립으로 바뀐 지 어느덧 열 해 즈음 되는 듯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또 선인재단 이름 넉 자를 이루는 백선엽 씨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시커먼 소름이 돋는다. 부디, 백선엽 씨가 스스로 영웅이라는 이름표를 내려놓고, 백선엽 씨가 거느리는 널따란 산과 들에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흙을 일구면서 무랑 당근이랑 배추랑 오이랑 가지랑 고추랑 감자랑 고구마를 길러서 예쁘게 살아가시기를 빈다. (4344.6.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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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61] 막대기빵

 아이를 태운 자전거를 몰아 읍내 장마당으로 가는 길에 옆지기한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옆지기는 사올 수 있으면 ‘막대기빵’도 사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장마당에 나오는 김이니, 사올 수 있으면이 아니라 이곳저곳 뒤져서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네, 막대기빵이요?” 하고 묻습니다. 옆지기는 “막대기빵. 바게트빵.” 하고 덧붙입니다. “아, 바게트빵.” 손전화를 끊고 앞가방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니, 옆지기는 곧잘 ‘막대기빵’이라 이야기했습니다. 막대기처럼 생겼기에 막대기빵이라 할 수 있겠구나 싶은데, 집에 와서 더 얘기를 들으니, 프랑스사람이 구워서 먹는 ‘바게트빵(baguette  pain)’에서 바게트는 ‘막대기’를 뜻한다더군요. 그러니, 프랑스사람으로서는 삶말로 ‘막대기빵’이라 이름붙인 셈이고, 한국에 있는 빵집 이름을 돌아보자면 ‘파리 막대기’예요. 다음 장날에 다시금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에 나가 막대기빵을 둘 사옵니다. 아이 손을 잡고 빵집에 들어서며 막대기빵을 한손에 하나씩 집고는 썰어 달라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이게 뭐야?” 하고 묻습니다. “응, 막대기처럼 생긴 이 녀석은 막대기빵이야.” “응, 막대기빵. 막대기빵 맛있어?” “응, 맛있어.” (4344.6.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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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79] 마당, 게시판, 센터, 코너

 어느덧 ‘열린마당’ 같은 이름이 퍽 널리 쓰입니다. 이와 함께 ‘열린게시판’ 같은 이름도 쓰이는데, 그냥 영어로 ‘오픈캐스트’를 쓰기도 합니다. 영어 쓰기 좋아하는 버릇은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처럼 바꾸고, 파출소를 ‘치안센터’로 바꾸는 데에서 엿보는데, 닭집을 일컬어 ‘치킨센터’라 하는 데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부정부패처럼 지저분한 일을 밝히자 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을 ‘클린신고센터’처럼 붙입니다. ‘열린신고마당’이라든지 ‘맑은신고마당’처럼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한편, ‘센터’ 못지않게 ‘코너’라는 영어를 곳곳에 씁니다. 방송에서도 무슨 코너 요 코너라 할 뿐입니다. ‘생활공감정책코너’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곳은 ‘게시판’이라 해도 될 텐데요. 게시판을 가르는 큰 이름이 ‘열린마당’이니까 ‘생활공감정책마당’이라 해도 됩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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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과 거즈 2
아이자와 하루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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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설픈 대로 재미나며 기쁜 나날
 [만화책 즐겨읽기 49] 아이자와 하루카, 《리넨과 거즈 (2)》


 이레 동안 이어진 비가 여드레째 살짝 멎습니다. 빗줄기가 그치지 않던 이레 동안 숲속에서는 빗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를 하나도 들을 수 없고, 다른 모습 또한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빗소리이고, 한결같이 빗줄기입니다.

 빗줄기가 멎었을 때에는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멧새 소리를 듣고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에는 시골길에서 하얀나비를 만납니다.

 빗줄기가 퍼붓는 동안 텃밭에서 오이를 딸까 말까 망설입니다. 볕이 잘 드는 날 따야 더 맛나다 하는데, 텃밭 오이는 어른 팔뚝만 하도록 굵어집니다. 오늘 드디어 하루 살짝 개는 날이 될 듯하니, 얼른 따 송송 썰어 밥상에 올려야겠습니다.

 비가 멎은 저녁나절에 갓난쟁이를 안고 바깥바람을 쐬러 나옵니다. 한 달을 지난 아이는 바깥으로 나오니 저녁때에도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리지만, 이내 바깥바람에 익숙해지면서 눈을 말똥말똥하다가는 숲바람을 마시면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해 떨어지고 어두운 저녁에 개똥벌레 몇을 봅니다. 다른 불빛이 없기에 개똥벌레 불빛은 더 곱다고 느낍니다. 천천히 깜빡깜빡 날갯짓하는 개똥벌레는 천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품에서 잠드느라 개똥벌레를 못 보지만, 첫째는 길에서 폴짝폴짝 뛰고 달리면서 개똥벌레를 바라봅니다. 개똥벌레는 우리 바로 옆을 살며시 스치고 날아갑니다.


-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쓸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도 기쁘고 특별한 일이었다니.’ (4쪽)
- ‘만드는 일을 통해 내가 용기를 얻는 것처럼, 내가 만든 물건 덕분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괴로운 일도 잊을 수 있어. 다행이야. 숨을 쉴 수 있으니.’ (40∼41쪽)


 장마도 하늘이 내리고 햇살도 하늘이 내립니다. 흙기운을 머금으며 오이랑 가지랑 토마토랑 당근이랑 텃밭에서 예쁘게 자라지만, 흙기운을 머금자면 하늘이 내린 햇살을 받아야 합니다. 햇살 없이 북돋울 흙기운이란 없습니다.

 책은 사람이 만듭니다. 책을 이루는 종이는 사람이 만듭니다. 책종이에 적히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사람이 만듭니다. 그러나 책이든 종이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햇살이 곱게 드리우면서 지구별을 보듬지 않는다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아침을 차리고 낮밥을 차리며 저녁을 차립니다. 쌀을 씻고 미역국을 끓이며 반찬을 마련합니다. 빨래를 하고, 방을 쓸고 닦으며, 아이를 토닥입니다. 모두 어버이가 하는 일이라거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할 테지만, 고운 햇살을 받아먹는 목숨으로서 하는 일입니다.

 푸른 잎사귀로 우거지는 나무도, 나무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어 우짖는 새도, 파랗게 올려다보이는 하늘도, 어느 하나 따스한 햇살 품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시금치를 먹든 감자를 먹든 두부를 먹든, 무엇 하나 햇살이 펼치는 따사로운 손길을 받아먹기 마련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햇살 깃든 숨결을 어여삐 물려주는 이음고리라 할 만합니다.


-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리란 걸, 생각도 못하다니.’ (38쪽)
- ‘데리러 와 준 것만으로 이렇게 기뻐해 주다니. 그 미소가 내겐 가장 좋은 약이야. 이렇게 어린아이에게까지 걱정 끼치지 말고, 어서 기운 차리고 싶은데.’ (51쪽)
- ‘혼자 슬픈 감정에 잠겨, 주위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 했어. 이렇게 매사에 열심인, 이 작은 아이에게서 얼마나 큰 위안을 얻는지.’ (80∼81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 2권을 들여다보니, 책 끄트머리에 ‘그린이 말’이 붙습니다. 그린이 말에는 그린이가 ‘시집을 가서 보내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그린이는 시집가기 앞서까지 당신 어버이랑 살다가 제금을 처음 나서 지낼 때에 “통금도 없고 실컷 놀고 게으름 피워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188쪽)” 한때를 누렸는데, “이 생활이 아이가 생기면 180도 돌변하리(188쪽)”라 생각하지 못했고, 넋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둘인 고단한 나날이 되었다 합니다. 지난날까지는 “만화가답게 올빼미형이었지만, 밤 8∼9시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도 함께 잠(191쪽)”들고,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서 만화를 그린다고 합니다.

 그린이는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북적거리느라 나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일도 조금밖에 못하지만, 재미있다, 그런 나날입니다(191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마지막 그림을 보면, 딸아이가 뒤에서 지켜보며 “엄마 그림 되게 못 그린다. 내가 훨씬 낫다!” 하고 말합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리넨과 거즈》를 그린 아이자와 하루카 님 만화결은 그닥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그냥 ‘못 그린 그림’이라 해도 됩니다. 예쁘장하게 그리려 애썼지만, 아직은 좀 못 그리는 그림이라 해도 틀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화결이 빼어나든 좀 어설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주 훌륭히 잘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만화가 재미나거나 신나거나 즐겁지는 않으니까요. 만화는 ‘잘 그린 그림’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청소년문학이면서 영화로도 나온 《로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잘 나옵니다. 곽운천 선생은 고아명 그림이 아주 좋으면서 아름답다고 말해요. 고아명은 ‘사물을 빈틈없이 옮겨 그리지 못할’ 뿐 아니라, ‘사물을 판박이처럼 옮겨 그릴 마음이 없’습니다. 고아명은 저 스스로 바라보는 대로 그리는데다가, 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그립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빛을, 슬플 때에는 슬픈 빛을, 아플 때에는 아픈 빛을, 벅찰 때에는 벅찬 빛을, 천천히 거침없이 그림으로 옮깁니다. 고아명 그림을 보면서 ‘구도나 명암이나 채도가 엉터리’라 말하지 않고, 말할 까닭이 없어요. 그림에 깃든 이야기와 삶을 읽으면 돼요.


- “코코미 말이야, 지금은 저렇게 씩씩하지만, 셋이 함께 살 때, 그 사람은 툭하면 외박에 나도 술 마시고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그러다 코코미한테 화풀이도 많이 했어. 그무렵부터 애가 별로 웃지도 않고 혼을 내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다 내 탓이란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이를 예뻐할 여유가 없었어.” (116∼117쪽)
- “이제야 좀 알겠네. 당신 정말 둔하군요! 남의 기분 따윈 생각도 안 해요? 그러니 허락도 없이 여자 방에 들어가는 무신경한 짓을 하지. 멋대로 내 동생 남친인 양 굴지 않나! 내 동생이 곤란해 하는 거 몰라요?” (175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그린이 이야기와 삶을 읽는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이니 만화결도 살펴야 할 테지만, 만화결이야 조금 모자라면 어떤가요. 글책을 읽을 때에도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좀 틀린다 한들, 때로는 문장부호나 말투가 어수룩하다 한들, 그다지 마음쓰이지 않습니다. 글줄에 깃든 넋과 얼과 꿈과 땀을 읽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이리하여, 사진에서도 똑같이 말해요. 사진틀이 좀 삐끗하거나 초점이 덜 맞거나 살짝 흔들렸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와 삶이 아름답거나 좋을 때에 아름다운 사진이라 하거나 좋은 사진이라 합니다.

 그림결까지 빼어나다면 더 좋을는지 모르지만, 그림결은 이 만해도 넉넉하며, 앞으로 차츰 발돋움하면 됩니다. 모든 만화쟁이가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이나 예순에 그림결을 마무리짓지 않으니까요. 또한, 일흔이나 여든이 되어도 새로운 그림결을 찾아나설 수 있어요.

 내 아이가 젓가락질을 말끔히 잘하며 밥알 하나 안 흘려야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걸음마나 뜀박질을 빈틈없이 잘해야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빗질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좀 삐져나오면 어떻습니까.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데 머리카락 몇 올 풀리면 어떻습니까. 사랑으로 빗고 사랑으로 묶으면 돼요.

 좋아하는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 삶이 되면 즐거워요.


- ‘언젠가 갖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장소.’ (122쪽)


 누구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삶을 아낌없이 껴안을 수 있는 나날을 꿈꿉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살피며, 어떻게 좋아하며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를 깨달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삶길을 저마다 알뜰살뜰 걸어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 리넨과 거즈 2 (아이자와 하루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6.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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