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걷히면서 해가 난다. 언제 보고 이제서야 보는 해인가 헤아리면서 오늘 가장 먼저 할 일을 하나씩 어림한다. 무엇보다 빨래이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할 수 없던 두꺼운 옷 빨래나 이불 빨래를 해야 한다. 이 좋은 햇볕을 듬뿍 쬐면서 숲에서 책 한 권 시원하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지 못한다.

 아이들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라면, 아이들이 햇볕을 쬐며 멧길을 오르내리도록 마실을 다니자고 생각할밖에 없다. 아이들 옷가지가 햇볕을 쬐며 따사로운 기운을 듬뿍 받아들이기를 바랄밖에 없다.

 제아무리 좋다 하는 빨래기계를 쓴들 햇볕처럼 보송보송 말리지 못한다. 제아무리 좋다 하는 아파트에 산다 한들 햇볕을 머금은 바람처럼 바짝바짝 말리지 못한다. 햇볕을 흉내내거나 바람을 시늉한대서 햇볕처럼 따사롭거나 바람처럼 시원하지 않다. 흙을 따라한대서 흙처럼 모든 씨앗을 넉넉히 품으면서 뿌리가 내리도록 하고 줄기를 올리도록 하지 못한다.

 해를 바라보는 풀처럼 해를 바라보는 빨래이고, 해를 바라보는 나무처럼 해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해를 좋아하는 꽃처럼 해를 좋아하는 살결이요, 해를 사랑하는 흙처럼 해를 사랑하는 목숨이라고 느낀다.

 햇볕을 보니, 살아가는 하루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햇볕을 쬐며, 살아숨쉬는 오늘을 다시금 고맙게 돌아본다. (4344.7.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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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영어 사전 - 개정판
안정효 지음 / 현암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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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 가로막는 영어 불지옥이기에
 [책읽기 삶읽기 68] 안정효, 《가짜 영어사전》(현암사,2000)



 896쪽에 이르는 《가짜 영어사전》(현암사)은 2000년에 처음 나오고, 2006년에 927쪽으로 다시 나옵니다. 영어로 된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을 하면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그러모은 《가짜 영어사전》은 책이름 그대로 한국사람이 옳지 않게 쓰거나 엉터리로 쓰는 영어 이야기를 다룹니다. 첫판이든 고침판이든 더는 찍지 않고 더는 팔지 않으니, 이 책을 찾아서 읽자면 도서관에 가서 빌리거나 헌책방을 뒤져야 합니다. 애써 다리품을 팔면서 이 책을 찾아서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이 나오기 앞서이든 이 책이 나오고 나서이든 이 책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이든, 한국사람이 영어를 잘못 쓰거나 엉터리로 쓰는 버릇은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옳게 쓰거나 바르게 쓰는 버릇이 좀처럼 들지 않아요.


.. 한국인이 외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조금도 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평생 외국인과는 대화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없는 한국사람들끼리, 우리 말은 내버려 두고 어떤 불량 ‘외래어’를 남용하느냐 하는 현실은 마땅히 걱정해야 할 만한 점이다 …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수단이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한 장식품이나 목적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자신이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외국어를 즐겨쓰고는 한다 ..  (4∼5쪽)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어린이한테까지 정규 과목으로 영어를 가르칩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생이 아니어도 어릴 적부터 영어 그림책을 읽고 영어 영화를 봅니다. 돈이 좀 있으면 나라밖으로 퍽 오래 다녀오기도 하고 아예 몇 해쯤 살다가 한국으로 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돈을 들여 영어를 익숙하게 하도록 길들이’면, 나중에 ‘돈을 쏠쏠히 벌 일자리를 다른 사람보다 한결 수월히 거머쥘’ 수 있다고 여기니까요.

 나라에서 영어를 가르치려 하는 움직임이든, 여느 살림집에서 영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몸부림이든,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나라와 여느 살림집 모두 ‘돈을 더 버는’ 데에 뜻을 둡니다. 아이들이 돈 잘 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영어를 가르칩니다.

 영어를 배워 영어책을 마음껏 읽는다든지, 영어 쓰는 나라에서 문화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을 꽃피운다든지 하는 뜻으로 영어를 일찍부터 날마다 여러 시간 끝없이 가르치지 않아요.

 이런 한국땅인 터라, 아이들이 어린 날부터 배우는 다른 과목이든 무엇이든, ‘나중에 어른이 되어 돈을 더 잘 벌도록 돕는’ 쪽으로 기웁니다. 아이들이 착하게 살아가거나 참다이 어깨동무하거나 곱게 살림을 일구도록 돕는 쪽으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요. 아니, 어린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부터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길을 걷지 않습니다.

 겉치레하는 삶이기에 겉치레하는 말입니다. 겉치레하는 삶이기에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옳게 배우지 않을 뿐더러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겉치레하는 삶이기에 오직 영어를 내세울 뿐 아니라, 제 삶과 살림과 사랑을 찾는 데에는 젬병이 되고 맙니다.


.. 또다른 이상한 영어인 ‘핸들을 잡다’가 우리 나라에서는 ‘직업이 운전사이다’라는 엉뚱한 뜻이 되듯, 기껏해야 ‘입에 재갈을 물린다’라는 뜻 말고는 서양인의 귀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개그를 한다’가 우리 나라에서는 ‘내 직업은 코미디언이다’라는 놀라운 의미상의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그러나 ‘gag를 하다’는 ‘우억우억 게우다’라는 뜻이다 … 길거리에서 ‘핸드폰(물론 이것도 가짜 영어임)’ 따위 제품에 관해서 설명과 선전을 하는 예쁜 아가씨를 ‘나레이터 모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필시 그들이 ‘모델처럼 예쁘고 젊으며, 상품에 관한 설명(narration)을 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하는 ‘선전’은 영어로 ‘sales pitch’이지, 전혀 ‘narration’이 아니다 ..  (16, 68쪽)


 《가짜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여러 해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가짜 영어사전》을 찬찬히 읽으면 나 스스로 잘못 길들거나 익숙한 영어가 너무 많다고 느낄 만합니다. 스스로 생각꽃을 피우면서 생각밭을 일군다면, 《가짜 영어사전》에 실리는 영어를 쓸 일이 없겠지요. 나는 ‘우리 말글 바로쓰기’라는 일을 하니까 이 《가짜 영어사전》에 실린 영어 가운데 어느 한 마디도 쓰지 않을 뿐더러, 쓸 까닭이 없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똑같이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는 숱한 이웃이나 동무는 《가짜 영어사전》에 실린 영어뿐 아니라 미처 싣지 못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영어를 온갖 자리에 마음껏 씁니다.

 《가짜 영어사전》을 읽다 보면 ‘굳이 안 다루어도 될 만’하거나 ‘말풀이가 그닥 시원스럽지 못한’ 대목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안정효 님은 ‘한국사람이 잘못 쓰는 영어를 까밝혀 바로잡으려’는 데에 마음을 쓰지,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려’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해요. 그러니까, 《가짜 영어사전》은 ‘바른 영어 바른 씀씀이’를 이루자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아니, 이 대목에서 더 나아갈 수 없겠지요. 아니, 이 대목만 짚을 수 있어도 고마운 노릇이에요.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사람치고 옳고 바르며 알맞고 아름다이 한국말을 살뜰히 익혀서 알뜰히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거든요.


.. ‘르뽀’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의 ‘reportage’를 일본 글자로 표기한 다음 앞부분을 잘라서 쓰던 말을 한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는 반토막 언론 용어이다 … ‘-ment’는 ‘statement’나 ‘comment’ 같은 단어의 꼬리에 붙는 접미사로서 혼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에 전혀 단어 노릇을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방송국에만 가면 여기저기서 ‘멘트’가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 정작 영어 ‘ment’는 ‘말’이라는 단어 가운데 ‘ㄹ’ 받침 정도에 해당한다 …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차에 ‘캐비넷’이 달렸다. 서양사람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질 노릇이지만, 진짜다 ..  (181, 247, 588쪽)


 ‘멘트’라는 영어이든 ‘멘토’라는 영어이든 ‘멘토링’이라는 영어이든 공무원부터 진보 지식인까지 마음껏 쓰는 한국입니다. 진보 지식인이든 보수 지식인이든 수구 지식인이든 누구이든, 한국말을 한국말다이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도권학교 일꾼이든 대안학교 일꾼이든 이런 영어를 영어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마땅히 쓸 낱말이 없다’고 여기거나 ‘한국말로 사랑스레 나타낼 생각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캐비넷’이든 ‘핸드폰’이든 엇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영어를 영어다이 배우지 않거나 못하니까 《가짜 영어사전》을 써서 다룰 만큼 한국사람 스스로 엉터리 말을 자꾸 씁니다. 잘 살필 수 있다면, 《가짜 영어사전》에 실린 ‘가짜 영어’는 ‘거짓 영어’나 ‘콩글리쉬’가 아닙니다. ‘엉터리 말’입니다. 잘못 쓰고 아무렇게나 쓰는 ‘엉터리 말’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엉터리로 쓰는 말마디 가운데 ‘영어 꼴인 말마디’를 그러모았다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알파벳으로 적는 엉터리 말’을 다루는 《가짜 영어사전》이에요.

 안정효 님은 ‘한국사람이 영어를 쓸 때에 알맞고 바르게 영어를 쓰기’를 바랍니다. 애써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될 자리에 영어를 쓰는 모습까지 꾸짖지 않습니다. 영어를 얼토당토않게 쓴 자리를 ‘올바르며 사랑스럽고 알맞게 가다듬을 한국말’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드문드문 다루기는 하지만, 한국말을 깊이 생각하거나 톺아보지는 않아요.

 첫판이든 고침판이든, 어쩌면 앞으로 다시 나올는지 모르는 새판이든, 《가짜 영어사전》이 한국말답게 쓰는 한국말을 더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이 뜻있는 책이 뜻있게 읽히면서 사람들 말매무새와 말씀씀이를 추스르는 도움책으로 자리잡으리라 봅니다.


.. 우리 나라에서 널리 유행하는 가짜 영어의 생태 가운데 하나가 용법의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는 ‘크로스오버’이고, ‘투 톱’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스포츠에서만 머물지 않고 정치계로까지 진출했다 … ‘프로포즈’는 동사이고, 흔히 사용하는 ‘프로포즈하다’라는 표현은 ‘청혼하다하다’라는 소리가 된다. 정확히 말하려면 ‘프로포잘하다’가 되어야 한다 … 〈이소라의 프로포즈〉도 ‘이소라의 프로포잘하다’라는 이상한 뜻이 담긴 제목이다 … ‘egg fry’를 제대로 된 영어로 고치면 ‘fried egg’이다 ..  (678, 751∼752, 873쪽)


 영어에 미친 사람들 밑뿌리를 생각해 봅니다. 영어에 미친 사람들은 영어에만 미쳤다기보다 돈에 미치고 도시에 굶주리며 미국에 목매달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 이웃을 더 사랑하려고 영어를 배우지는 않으며, 지구별 모든 이웃을 아끼려고 영어를 익히거나 즐겨쓰거나 껴안는 한국사람이라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영어에 눈멀기 앞서 참삶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영어에 목매달기 앞서 참사랑을 보듬지 않습니다. 영어에 사로잡히기 앞서 참사람이 되려 힘쓰지 않습니다.

 영어를 몰라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영어를 제대로 못해도 착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어요. 영어를 안 배워도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며 활짝 웃을 수 있어요. (4344.7.16.흙.ㅎㄲㅅㄱ)


― 가짜 영어사전 (안정효 씀,현암사 펴냄,2000 첫판,2006 고침판/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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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잡고 잠든 아이


 이른새벽부터 내내 놀면서 졸린 눈을 하던 첫째가 잠든다. 누워만 지내는 갓난쟁이 둘째 곁에서 알짱거리다가 둘째 팔을 잡고 노래를 부르더니 사르르 잠든다. 둘째는 제 팔을 붙잡은 누나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첫째는 동생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모르는 채 깊이 곯아떨어진다. 옷장에 발을 뻗어 기댄 모습으로 입을 살짝 벌리며 잠든다.

 아이는 제가 어린 날 어떻게 놀며 복닥이거나 치대는지를 떠올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어린 날 어떻게 놀며 복닥이거나 치댔는지를 떠올리지 못한다. 내 어머니나 아버지가 사진으로 몇 장 남겼다든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떠올릴는지 모르나, 사진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는대서 환하게 되새기지는 못하리라 본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제 어버이가 날마다 바지런히 찍어서 갈무리하는 저희 사진을 나중에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쯤 뒤에 돌아보면서 저희 어린 나날을 얼마나 어떻게 되새기거나 떠올리거나 아로새길 수 있을까. 생각이 짧고 마음이 얕은 어버이는 아이가 개구지거나 말똥쟁이처럼 굴 때에 쉬 나무라곤 하는데, 어설피 나무라는 바보스러운 어버이 몸짓은 훌훌 털고, 너희들 어여삐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에 깃든 사랑을 곱게 껴안아 줄 수 있기를 빈다.

 깊은 밤, 이제 아버지도 드디어 찬물로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새벽에 일어나 기저귀 빨래를 하려면 이제 얼른 눈을 붙여야지. (4344.7.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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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7-15 23:38   좋아요 0 | URL
아빠 사진사가 가장 보람있는 사진을 찍을때인것 같아요^^

파란놀 2011-07-16 05:22   좋아요 0 | URL
신나게 놀 때에 함께 같이 놀지 못하는 모습을 늘 되돌아봐요...

마녀고양이 2011-07-16 00:55   좋아요 0 | URL
아우, 정말 한참 이쁠 때네요, 둘 다 토실하니 얼마나 귀여운지.
아이들 깨물어주고 싶다는 말, 정말 실감나는군요.
저는 아이를 참 좋아하는데, 딸 하나에, 이제 12살이 되어버려 좀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두째를 지금 어째보기도 좀 힘들구. ㅠㅠ. 그냥 부러울 뿐이네요.

파란놀 2011-07-16 05:25   좋아요 0 | URL
열두 살이면 집안일도 많이 시키고 함께 놀기도 하고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이는 슬슬 혼자 놀고 혼자 다른 동무들 사귀러 나다니겠지요.. ^^;;;

무해한모리군 2011-07-16 09:13   좋아요 0 | URL
어머나 미쉐린 타이어 같은 팔이네요 ㅎㅎㅎ
너무 귀여워요..

파란놀 2011-07-16 14:23   좋아요 0 | URL
두 돌 때까지는 이 소시지가 그대로 이어갈 테고, 석 돌쯤 되어야 비로소 사라지겠지요~ 이 소시지는 살이 접혀서 땀띠가 늘 생기게 하지요 흠...
 
11마리 고양이와 돼지 11마리 고양이 시리즈 3
바바 노보루 지음, 이장선 옮김 / 꿈소담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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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괘씸한 개구쟁이 고양이가 하늘을 날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3] 바바 노보루, 《11마리 고양이와 돼지》(꿈소담이,2006)



 네 살 첫째 아이는 세 살 적부터 “11마리 고양이” 그림책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펼쳐서 읽어 주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읽어 준 뒤에 혼자서 이 그림책을 넘기곤 합니다. 빛느낌이 좋기 때문일까요. 이 그림책에 나오는 고양이라든지 나무라든지 풀이라든지 바람이라든지 하늘이라든지 집이라든지 쓰레기통이라든지 사진이라든지 꽃이라든지 빠방(자동차)이라든지, 아이가 알 만한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그려 넣었기 때문일까요.

 《11마리 고양이와 돼지》(꿈소담이,2006)는 일본에서 1976년에 나왔으니까, 1970년대에 이 그림책을 볼 어린이라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첫무렵에 태어난 일본 어린이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이 그림책을 보고 자란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은 다음에, 제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 그림책이 일본에서 처음 태어날 때에 처음 알아보며 즐기던 아이가 더 자라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된 다음,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이 그림책을 읽어 줄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자그마치 마흔 살 가까운 그림책이 오늘날에도 퍽 사랑받으니까, 앞으로 스무 해 뒤가 되면 이렇게 될 만하겠구나 싶어요.


.. “우와, 정말 반짝반짝 깨끗해졌다.” “멋진 집으로 변신했어.” “얘들아, 이 집을 우리의 보금자리로 하는 게 어때?” “와! 찬성이야.” ..  (8∼9쪽)


 아직 우리 나라에는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내리 사랑받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대물림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손녀한테 읽힐 그림책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창작그림책 발자국이 짧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일군 그림책을 널리 읽히지 못하기도 해요. 그림결이나 빛느낌이나 줄거리나 이야기나 얼거리에서 일본 그림책이나 서양 그림책만큼 알뜰하거나 알차지 못합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난다면 스무 해 앞서부터 사랑받던 그림책이 대물림하면서 사랑받을 만하고, 서른 해쯤 지난다면 열 해 앞서부터 사랑받던 그림책이 대물림하면서 사랑받을 만하겠지요. 마땅한 노릇일 수밖에 없으니, 섣불리 바라기보다는, 좀 어설프거나 이래저래 모자라더라도 예쁘게 받아들이면서 즐겨야 하지 않을까 싶고, 정 아쉬울 때에는 예쁜 그림책으로 빚지 못하더라도 아이하고 그림종이를 펼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꼭 낱권책으로 나온 그림책을 읽혀야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이하고 그림을 함께 그리면서 이야기 살을 붙이고 이야기 실마리를 풀면 되니까요. 아이하고 살아가는 나날을 아이랑 그림종이에 찬찬히 옮기면 되니까요. 아이가 꿈나라에서 꿈날개를 펼칠 수 있게끔 어버이가 슬기로이 이끌면 되니까요.

 더 멋스레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예뻐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훌륭해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뜻있게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담아 빚는 그림책이고, 사랑을 담아 읽는 그림책이며, 사랑을 담아 대물림하는 그림책이에요. 아이는 어버이하고 그림책을 함께 읽고 즐기면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아이는 그림책을 읽을 때에 앎조각을 받아먹지 않아요. 아이는 혼자 그림책을 펼칠 때에 사랑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앎조각을 늘리거나 넓히려고 그림책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여기는 11마리 고양이의 집이에요.”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꿀꿀꿀, 멀리서 찾아왔는데 좀 들어가도 되나요?” 야용. 대장 고양이가 양팔을 벌리고 돼지 앞을 가로막습니다. “여기는 11마리 고양이의 집!” … “꿀꿀, 우리 할아버지 댁이 어디지? 확실히 이 근처였는데.” ..  (13∼15쪽)


 “11마리 고양이” 이야기 가운데 다른 그림책은 ‘요 꾀쟁이 고양이들이 괘씸해 보이는(?) 짓’을 일삼아서 살짝 밉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그림책을 읽히면서, 음, 참, 개구쟁이 고양이일세 하고 생각했어요. 《11마리 고양이와 돼지》에서도 이 느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짐차에 열한 마리가 빼곡하게 탄 채 멀디먼 나들이를 떠나는 고양이가 어느 멧골자락에서 빈 집을 하나 봅니다. 이 고양이들은 빈 집을 말끔하게 치워 저희가 지낼 곳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빈 집’이라기보다 ‘할배 돼지가 숨을 거두었기에 비게 된 집’이에요. 임자가 없어 아무나 살아도 되는 집이 아니라, 새 임자를 기다리는 집이에요.

 그러니까, 열한 마리 고양이는 이 집이 ‘누구네 어떤 집’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벽에 멀쩡히 걸린 사진을 바라보면 ‘할배 돼지 집’인 줄 알 수 있어요. 할배 돼지가 이제 숨을 거두어 이 집이 비었구나 생각하면서 ‘할배 돼지네 아이나 손자가 찾아올 때까지 살짝 머물겠습니다’ 하고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요. 열한 마리 고양이는 고마워 할 줄 모르고, 고마워 해야겠다고 여기지 않으며, 고마움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할배 돼지 손자가 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에 매몰차게 내쫓습니다. 나중에 좀 미안하다 느껴 손자 돼지를 이 집으로 불러들이지만, 손자 돼지가 이 집에서 고양이들이 지내니 저는 다른 새 집을 지으려 할 때에 열한 마리 고양이는 일손을 거드는데, 정작 돼지네 새 집을 짓고 나서 ‘새로 지은 집이니까, 이 새 집은 우리 열한 마리 고양이가 차지하겠어!’ 하고 고개를 빳빳이 세웁니다.


.. “꿀꿀꿀, 꿀꿀꿀. 이층에는 베란다도 만들 거야.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예쁜 새 집이 생긴다.” … 그랬습니다. 11마리 고양이는 돼지네 새 집이 너무너무 훌륭해 그냥 주기 아까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돼지는 고양이네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꿀꿀, 그래 괜찮아. 원래 여기가 우리 할아버지 집이었잖아.” ..  (30∼35쪽)


 당돌하지요. 뻔뻔하지요. 건방지지요. 얄궂지요.

 손자 돼지는 열한 마리 고양이한테 골을 내지 않습니다. 거칠거나 막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아요. 그저 받아들이고, 그예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며 새로 지은 집이 흔들거리다가 기둥이 뽑히고 지붕이 날아갑니다. 열한 마리 고양이가 타고 다니던 짐차가 하늘에 붕 뜹니다. 열한 마리 고양이도 하늘로 붕 뜹니다. 할배 돼지가 살던 집은 비바람에 끄덕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할배 돼지가 죽고 빈 집이라 하지만, 집안에 거미줄이 잔뜩 치도록 빈 동안에 숱하게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겠지요. 그러나 이 집은 언제나 끄덕없었으니 거미줄은 잔뜩 치고 먼지가 가득 쌓였어도 예쁘게 살아남았을 테지요. 열한 마리 고양이가 ‘겉보기로 멋들어져 보이는 새 집’에 욕심을 품으면서 꾀바른 짓을 일삼았으니, 아주 보기좋게 한 방 먹는 셈입니다.


.. 아아, 고양이들이 하늘로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  (43쪽)


 아이는 마지막 대목에서 “날아. 고양이가 날아.” 하고 이야기합니다. 혼자 그림책을 볼 때에도 “고양이가 날아가.” 하고 으레 말하기에 뭐를 말하나 싶었는데, 이 그림책을 펼치면서 마지막 쪽 모습을 말한 셈이었습니다.

 약삭빠르게 굴던 열한 마리 고양이가 비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마지막 쪽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참 잘된 일이야, 아주 샘통이야, 요 녀석들 매운맛을 보는구나.

 혼자 중얼중얼 하면서 그림책을 덮다가 더 생각합니다. 고양이들은 멀디먼 나들이를 나오던 그대로 비바람에 휩쓸려 ‘멀디먼 새 나들이’를 떠납(?)니다. 이 고양이는 비바람에 휩쓸리며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2층으로 지은 새 집 밑기둥까지 함께 어우러지면서 멀리멀리 날아가요. 큰 물고기를 덮치다가도 하늘 높이 치솟으며 물에 풍덩 빠지곤 했는데, 손자 돼지한테 괘씸한 짓을 잔뜩 저지르더니 톡톡히 값을 치릅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이 고양이들은 이렇게 저희 좋을 대로 마음껏 온누리를 누비면서 장난도 치고 못된 짓도 부리다가 또 어디론가 가면서 새 동무를 사귀거나 새 이야기를 일구겠지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새로운 꿈을 키우고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겠지요.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을 사귀면서 차츰차츰 맑거나 밝은 사랑을 품을 수 있겠지요. (4344.7.15.쇠.ㅎㄲㅅㄱ)


― 11마리 고양이와 돼지 (바바 노보루 글·그림,꿈소담이 펴냄,2006.6.20./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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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머리카락 세 올


 둘째 아이가 아침에 똥을 조금 눈다. 밤새 몸이 끈적끈적하니까 아침부터 일찍 씻기자고 한다. 보일러를 돌린다. 새벽에 빤 기저귀를 방바닥에 펼친다. 아침까지 나온 기저귀를 빨래한다. 어느덧 물이 다 덥혀진다. 아이를 안고 씻는방으로 온다.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손닦개로 목부터 닦는다. 목이 접힐 수밖에 없는 갓난쟁이는 여름날 목에 땀띠가 나서 몹시 애먹는다. 어쩌겠니. 얼른 자라서 목이 잘 열려야 땀띠가 안 나지. 올여름을 잘 견디어 주렴. 목을 요리조리 돌리고 열면서 물을 묻혀 닦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세 올이 나온다. 갓난쟁이 자그맣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다. 네 누나도 너만 할 때에 씻기면서 들여다보면 고 자그마한 머리카락에 목에 끼곤 하던데,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너도 고운 목숨이고 네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겠지. 다 씻기고 마른 기저귀 하나로 몸을 싸서 자리에 눕힌 다음 아랫도리를 살짝 말리라고 두면서 방바닥에 넌 기저귀를 차곡차곡 개는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가 쉬를 눈다. 쉬를 누며 이불을 적신다. 얼른 이불을 걷고 기저귀로 댄다. 요새 장마철이라 이불을 빨면 끔찍하게 안 마르는데 어떡하니. 오줌 젖은 데만 물로 헹구어 짠다. 부디 오늘은 비가 멎는 때가 길기를 빈다. 아무쪼록 이 이불이 잘 말라 냄새가 배지 않기를 바란다. (4344.7.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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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5 09:22   좋아요 0 | URL
아오, 이뻐라.
여름이라 고생하겠네요, 땀띠도 많겠구.. 저런.
하지만 쳐다보는 눈매가 어쩜 저리 똘망하죠. 정말 너무너무 이쁘네요.

파란놀 2011-07-15 16:54   좋아요 0 | URL
올 한여름만 잘 넘기면 이제 제법 크면서 뒤집고 엎드리고 기고 서고 하겠지요~
에궁...

울보 2011-07-15 10:39   좋아요 0 | URL
정말 장마철에 요렇게 귀여운 녀석이 고생이겠어요, 무더우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빨래가 잘 안말라서,,
후후 아가 보니 우리 딸 어릴적 모습이 보여요 저 올록볼록이 ㅎㅎ 귀엽다,,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기저귀 빨아서 대느라 아주 죽어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했으니 뭐...
이렇게 기저귀를 빨아서 대며 키우니
'귀한 아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카스피 2011-07-15 12:13   좋아요 0 | URL
ㅎㅎ 아이가 넘 이쁘네요.그나저나 좀 있으면 푹푹찌는 무더위가 올텐데 아이가 더위에 고생좀 하겠네요.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장마철보다는 나으리라 믿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