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 책읽기


 텃밭에 호박씨를 심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호박싹이 텄고 호박줄기가 올랐으며 호박잎이 돋다가는 그예 호박꽃이 핀다. 내가 한 일이라면, 둘째가 태어난 뒤로 텃밭을 도무지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밥을 할 때에 호박 찌끄레기를 텃밭 한쪽에 버린 한 가지. 호박 찌끄레기에 깃들던 호박씨 몇이 텃밭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터서 노란 꽃방울을 함지박만 하게 터뜨렸다.

 아이하고 살아가며 똑같은 그림책을 수백 차례 되풀이 읽는다. 한 번 보고 그닥 다시 보고프지 않은 그림책을 사고 난 뒤에는 돈을 잘못 썼다고 생각한다. 지식이나 상식을 다룬다든지, 옛사람 살림살이나 장마당을 보여준다든지, 지구별 여러 나라 모습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그림책을 아이들이 수백 차례 보기는 힘들다. 수백 차례 되풀이해서 볼 만한 그림책에는 이야기가 깃들어야 한다. 날마다 먹는 밥처럼 날마다 여러 차례 되읽을 만큼 마음을 살찌우는 이야기여야 한다.

 둘째가 혼자 잘 놀기도 한다. 그렇지만 곁에서 말끄러미 바라보며 함께 놀자고 해야 훨씬 잘 논다. 조막만 한 손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고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힘을 쓰게 하기만 해도 까르르 웃는다. 두 발을 하나씩 쥐고 하늘달리기를 해 주어도 즐겁게 웃는다.

 어버이로 살아가며 하루하루 기쁘게 맞아들이도록 돕는 책을 한 권 두 권 아끼면서 그러모으지 않는다면, 아이하고 책읽기를 할 수 없다. 어버이로 지내면서 어버이다운 삶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책을 한 권 두 권 살피며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이한테 책을 물려줄 수 없다. 호박꽃은 흙땅에 씨를 뿌리내리면 피어나지만, 씨앗이 있어야 하고 흙땅이 있어야 한다. 빗물이 있어야 하고, 햇살이 있어야 하며, 바람이 있어야 한다. (4344.8.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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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 - 달리 초등학생 그림책 14
하마다 히로스케 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강라현 옮김 / 달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착한 아이를 기다리는 슬프고 외로운 넋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4] 이와사키 치히로·하마다 히로스케, 《용의 눈물》(달리,2006)


 어머니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열 아이를 낳았으면 열 아이 모두 한결같이 사랑스럽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떠할까요. 아버지도 열 아이를 모두 한결같이 사랑스럽다고 여길까요.

 열 아이가 저마다 다 다르게 한결같이 사랑스럽다면, 이 가운데에는 조금 샘을 부리는 아이가 있을 테고, 이 가운데에는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샘이야 다독이면 되고, 잘못은 씻으면 됩니다. 샘을 부린대서 나쁜 아이가 될 수 없으며, 잘못을 저질렀기에 등을 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더 너른 가슴으로 더 따스히 어루만지면서 다독이는 어버이 품입니다. 이제부터 착하게 살도록, 오늘부터 아름다이 지내도록, 아이가 사랑을 받아먹는 기쁨을 누리도록 할 어버이입니다.

 한 번 베풀었대서 사랑이 아닙니다. 한 번 손을 잡거나 껴안았기에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숫자로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부피로 재지 못합니다. 사랑은 크기가 가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양으로 나누지 못합니다.


.. “그럼 왜 우니?” “불쌍해요…….” “불쌍하다니?”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엄마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엄마, 왜 아무도 용을 좋아하지 않는 거죠?”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구나.” “용이 너무 불쌍해요.” ..  (8∼9쪽)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그림을 넣고, 하마다 히로스케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용의 눈물》(달리,2006)을 읽다가 생각합니다. 아이 어머니가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느끼면서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니 놀랍습니다. 열 손가락 가운데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 어머니일까요.

 생각을 곰곰이 가다듬습니다. 이 땅 모든 어머니가 열 손가락을 다 아파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말 미워하거나 내치는 어머니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니, 내 아이는 미워하지 않거나 내치지 않지만, 이웃 아이나 동무 아이는 꾸밈없이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치거나 한갓진 삶에 눈멀면서 참사랑을 잊거나 잃을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마음이라면, 또 어버이 넋이라면, 내 열 아이 가운데 한 아이가 따돌림받으면서 구석에서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어떻게 생각할까요. 못생긴데다가 다리를 저는 막내가 아홉 언니한테서 따돌림을 받으면서 구석자리로 밀려난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라면, 또 어버이라면, 이러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밤이 되자, 하루 종일 걷다 지친 아이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숲속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이의 잠을 깨웠습니다. 붉은 산복숭아와 산딸기 열매가 열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열매를 따 먹으며 걸었습니다 ..  (14쪽)


 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더 낫다 싶은 책이 있고, 더 재미있다 싶은 책이 있으며, 더 알차다 싶은 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보다 저 책이 더 훌륭하니까 이 책은 뒷전으로 밀거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수 없습니다. 종이에 찍힌 줄거리가 허술하더라도 책은 책이요, 사랑받을 책입니다. 아름드리로 자라던 고운 목숨을 베어 얻은 종이로 빚은 책입니다. 책으로 바뀐 나무 가운데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 나무를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안타깝거나 슬픈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쓴 글이 담긴 책은 안타깝거나 슬프다 느끼는 책입니다. 어여쁘거나 기쁜 삶을 가꾸는 사람들이 쓴 글이 담긴 책은 어여쁘거나 기쁘다 느끼는 책이에요.

 모두들 고운 목숨을 바친 나무에 글을 새깁니다. 모두들 고운 목숨을 밥거리로 받아들여 제 목숨을 잇습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흙에서 뿌리내리던 목숨을 먹어야 합니다. 풀이나 곡식을 안 먹더라도, 고기짐승은 풀이나 곡식을 밥으로 먹습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풀을 먹는 셈이고, 풀이 없으면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흙 한 줌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흙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도시가 버틸 수 없습니다. 도시에는 흙이 깃들지 않더라도 도시 바깥에 흙이 넓게 펼쳐지지 않으면 도시는 하루아침에 죽음터로 바뀝니다.


.. 뜻밖의 소리.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알 수 없었습니다. 용은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용은 동굴 안에서 으르렁거렸습니다. “거기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와 보세요.” 어린 아이 목소리였습니다. 용은 신기해 했습니다 ..  (21쪽)


 《용의 눈물》에 나오는 어린 아이 하나만큼은 용이든 어머니이든 똑같은 목숨이자 이웃이자 동무로 받아들입니다. 《용의 눈물》에서 용이 눈물을 흘리도록 이끈 어린 아이 하나만큼은 모든 목숨을 어여삐 사랑하면서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용한테도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한테도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머니한테도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저, 착한 마음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고, 착한 마음을 젖히는 사람이 있으며, 착한 마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마음을 일구는 사람이 있고, 착한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착한 마음을 북돋우는 사람이 있어요. 착한 마음을 씨뿌리는 사람이 있고, 착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으며, 착한 마음을 감추는 사람이 있어요.

 착한 마음은 내 살붙이하고만 나눌 만하지 않습니다. 착한 마음은 누구하고라도 나눌 만합니다. 못된 마음이나 모진 마음은 내 살붙이하고조차 나눌 만하지 않습니다. 못된 마음이나 모진 마음은 누구하고라도 나눌 만하지 않습니다.

 서로 나눌 마음은 오직 착한 마음입니다. 서로 나누지 말아야 할 마음은 못된 마음이나 모진 마음입니다.


.. 용이 흘린 눈물 때문에 큰비가 온 듯했습니다. 물속에 파란 하늘과 산이 비쳤습니다. 용의 몸이 강물 위로 배처럼 떠올랐습니다. 용은 힘차게 물결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등에 업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참 좋다.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어. 나는 이대로 배가 되겠어. 배가 되어 착한 아이들을 모두 태워 줘야지. 그래서 이 세상을 새롭고 멋진 세상으로 만들 거야.” ..  (29쪽)


 용은 착한 아이들을 태우는 배가 됩니다. 배가 된 용을 탄 아이는 착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둘레에 수많은 아이들이 있으나, 배가 된 용을 섣불리 타지 않습니다. 아니, 배가 된 용을 스스럼없이 타지 않습니다.

 용은 아이들이라 해서 아무나 태우지 않습니다. 착한 아이들이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립니다. 착한 아이들로 어깨동무하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립니다. 용과 함께 물살을 가르는 아이 또한 말없이 손을 흔들면서 기다립니다. 이 땅 모든 아이들이 착하게 살아가며 착하게 손을 맞잡으면서 싱긋 웃을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4344.8.13.흙.ㅎㄲㅅㄱ)


― 용의 눈물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하마다 히로스케 글,강라현 옮김,달리 펴냄,2006.5.5./1만 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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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우어줄라 쇼이 지음, 전옥례 옮김 / 현실문화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에는 자유도 민주도 없다
 [책읽기 삶읽기 71] 우어줄라 쇼이 엮음,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현실문화연구,2003)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이 나라에는 헌법이 있지만, 헌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때때로 특별법이 생기면서 헌법을 뛰어넘습니다.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보다 권위와 권력이 앞섭니다. 자연과 삶보다 개발과 경제가 앞섭니다. 평등과 평화보다 안보와 군대가 앞섭니다.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뒷전이 됩니다. 사랑과 믿음을 지키는 나라정책이나 나라살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나라정책만 자유와 민주하고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라살림만 사랑과 믿음하고 등지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삶부터 자유와 민주랑 사귀지 못합니다. 여느 사람들 여느 삶터부터 사랑과 믿음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나라정책에 앞서 여느 사람들부터 자유와 민주를 먼저 살피지 않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돈벌이를 먼저 살핍니다. 나라살림에 앞서 여느 삶터부터 사랑과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언제나 이름값을 먼저 헤아립니다. 입시지옥은 나라정책이 만들고 제도권학교가 함께 만들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느 어버이 또한 함께 만듭니다. 비정규직이나 푸대접이나 따돌림은 나라정책이 만들고 회사가 함께 만들지만, 어른이 된 여느 사람들 또한 함께 만듭니다.

 내가 살아가는 자리부터 자유와 민주가 가장 앞설 수 있도록 해야, 내 삶터가 달라지고 내 마을이 달라집니다. 내가 꿈꾸는 마음밭부터 사랑과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내 나날이 바뀌고 내 이웃이랑 동무가 바뀝니다.


- 남녀의 동등한 권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종이 위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12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 나와 결혼할 남자는 내 예술과도 결혼해야 한다. 내 예술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라! (33쪽/조지 엘리엇)
- 진실을 위해 싸우는 사람도 남자고, 진실에 반대하는 자들 역시 남자다. (53쪽/메리 아스텔)
- 남자들은 여자를 껴안는 대신에 덮친다. 남자들은 여자를 얻는 대신에 산다. 남자들은 뭔가 이문을 남겨야 하는 사업을 하듯 여자를 다룬다. (80쪽/루트 베를라우)



 우어줄라 쇼이 님이 엮은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현실문화연구,2003)라는 작고 도톰한 책을 읽습니다. 여자로 살아가며 여성으로 말하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보여줍니다. 숱한 서양사람이 어떠한 말을 길어올려 참삶과 참자유와 참민주를 바랐는가를 보여줍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 어여쁜 사람인 줄 느끼며 살아갈 참평화와 참평등과 참사랑이 어떠해야 좋을까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종이에 적힌 권리는 권리가 아닙니다. 삶으로 함께 누릴 때에 비로소 권리입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우는 일은 평화하고 동떨어집니다. 무기와 군대가 더 많고 더 세다 해서 지키는 평화가 아니라, 무기와 군대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전쟁이요 푸대접이며 따돌림입니다.

 여자 군인이 드물게 있으나, 군대는 남자가 만들어 남자로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여자 정치꾼과 경제꾼이 더러 있으나, 정치이든 경제이든 남자가 만들어 남자가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우리 사회와 교육과 문화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남자가 만들어 남자가 이루며 남자가 꾸립니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집을 떠납니다. 남자들은 저를 낳아 키운 어버이 곁을 금세 떠나 홀로 살아갑니다. 어른이 되어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았어도, 저(남자)를 키운 어버이처럼 제 아이를 키울 생각을 않고, 아이를 키울 몫은 오직 여자한테 떠넘기고는 집 바깥에서 무언가 ‘큰 일’을 벌입니다. 돌이키면, 저(남자)를 키운 어버이도 으레 어머니(여자)였지, 아버지(남자)는 아니라 할 만합니다.


- 남자가 권력과 어리석음 대신 영혼과 인간성을 채워 넣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86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 남자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모든 남자가 독재자가 될 것이다. (96쪽/애비게일 애덤스)
- 어른들은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들이 놀 때 각기 다른 운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들이 배우는 종목이 각각 다르다. (163쪽/게르트루드 피스터)
- 아름다운 여자는 이중으로 보복 조치를 당한다. 몸은 묶이고, 남자의 소유물인 자신의 모습은 길들여지고 다듬어진다. (182쪽/수잔 팰루디)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버려야 나라살림이 살아납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에 들일 돈을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에 들여야 합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단단히 움켜쥐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없애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를 없애면 남북이 하나되는 마당에 든다 하는 돈이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전쟁군대가 무섭게 버티는데 대학등록금이 이토록 비쌀밖에 없습니다.

 장난감 칼이나 총을 아이한테 선물하는 일부터 잘못인 줄 느끼지 못하기에 전쟁무기와 전쟁군대는 더 커지기만 합니다. 전투기나 군함이나 탱크나 잠수함이나 미사일을 만들 돈으로 햇볕힘을 알뜰히 쓰도록 애쓸 노릇이요, 지구별 자원을 걱정할 일입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칼이 아닌 호미나 낫이나 쟁기를 손에 쥐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총이 아닌 빨래비누와 걸레와 수세미를 손에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일구며 땀을 흘리는 나날을 어릴 적부터 맞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집일을 거들며 찬찬히 배우는 삶을 어린 날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입으로 넣는 밥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한글은 나중에 깨치더라도 흙살림을 먼저 옳게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며 즐거이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어떻게 돌보며 아끼는가를 익혀야 합니다. 영어나 한자는 모르더라도 집살림을 제대로 알뜰살뜰 느껴야 합니다.


-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싶다. 그게 예절에 맞는지 어떤지 묻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의 판단에 따라 흔들리고 싶지 않다! … 나는 진리에 도움이 되고 싶다. (218쪽/루이제 뮐바흐)
- 여자답다는 말은 남자들에게 욕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형용사다. (233쪽/헤드비히 돔)
- 사회 모든 분야의 원칙은 남자가 정한다. (274쪽/앙엘리카 메르켈)
- 여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가 곁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토록 난폭하게 구는 것이다. (279쪽/조앤 콜린스)



 이 나라에서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아니, 이 나라에는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아예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조차 쉬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이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며 건사하는 삶입니다. 사내다움이나 가시내다움이란 사람다이 살아가면서 둘로 나뉜 성별에 걸맞게 착하면서 참답고 아름다운 나날을 일구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건사할 생각부터 하지 않는데다가,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건사할 줄 모릅니다. 내 삶은커녕 동무 삶과 이웃 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이 보듬을 줄 모릅니다.


- 여자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사내 아이를 재봉학원과 부엌으로 보내라. 그렇게 3세대가 흐르면 여러분도 남자가 바느질과 요리를 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인지, 억압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날이 오리라. (340쪽/이다 한-한)
- 여자는 과거에 대체로 정치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전해 내려온 나쁜 정치 습관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정치를 생각해 낼 수가 있다. (385쪽/에밀리 그린볼치)
- 집안일은 사람의 일이지 여자의 일이 아니다. (418쪽/알리스 슈바르처)
- 전쟁은 경악스러운 강간을 동반한다. (464쪽/리다 구스타파 하이만)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라는 책은 아픈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엉터리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라는 책은 우리가 예쁘게 살아갈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떻게 해야 즐거우며 반가운 나날을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모든 아이들은 오직 대학에 보내는 틀에 짜맞추어집니다. 아이들은 오직 대학에 가는 틀에만 짜맞추어지면서, 스무 살이 되건 스물다섯 살이 되건 스스로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건사하거나 하는 일을 겪지 않고 배우지 않으며 대물림하지 않습니다. 그예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어들이는 일자리 얻는 틀에 갇힙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학문하는 데가 아니라, 돈을 잘 버는 일자리에 들어갈 자격증인 졸업장을 따는 곳일 뿐입니다. 대학등록금이 비싼 까닭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들일 일자리를 얻도록 내밀 자격증인 졸업장을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보아야 하고, 사람을 느껴야 하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며, 아름다이 사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자유도 민주도 없습니다. (4344.8.13.흙.ㅎㄲㅅㄱ)


―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우어줄라 쇼이 엮음,전옥례 옮김,현실문화연구 펴냄,2003.12.2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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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채 살아가기


 나하고 살아가는 옆지기는 내 몸이 얼마나 안 튼튼한지를 어느 만큼 안다. 옆지기 말고 내 몸이 얼마나 안 튼튼한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내 어머니하고 우리 형에다가 오랜 내 술동무 두엇이 있으리라. 몸이 워낙 여리기는 한데, 코와 이 때문에 병원을 오래도록 드나들어야 했던 일을 빼고는 따로 병원 문턱을 드나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용하다 할 만하고, 어찌 보면 고마운 노릇이라 여길 만하다. 여린 몸이지만 사나흘 앓아눕거나 너덧새 끙끙 앓은 일은 없다. 어쩌면 여린 몸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늘 나를 지키려 애쓰고, 늘 애쓰다 보니 때때로 크게 앓을 때에 그리 오래 앓아눕지 않고 탈탈 털며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서른일곱인 오늘, 어제를 돌아본다. 앞으로 내가 꾸릴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 나는 내 몸뚱이가 얼마나 오래도록 살아숨쉬도록 이끌 수 있을까. 누구처럼 병원 문턱을 드나들거나 자리에 앓아누운 몸은 아니나, 참 오랜 옛날부터 내 목숨이 얼마나 이어갈까 하고 생각하며 살았다. 스물을 살 수 있을는지, 스물다섯을 넘길 수 있을는지, 서른을 지날 수 있을는지, 서른셋이나 서른다섯을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살았다. 두 아이를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삶을 꾸리는 오늘, 머잖아 마흔이 되고 쉰도 된다지만, 내가 이 아이들하고 마흔을 맞이하거나 쉰을 맞이할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내 몸이 버틴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 자연 터전이 못 버티고 왕창 무너질는지 모른다. 나는 일본 후쿠시마 일이 이웃나라 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 나라 웬만한 사람들은 축구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한테 진 일을 놓고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거나 짜증스레 여기거나 안타깝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나는 후쿠시마 일을 어제나 그제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일처럼 돌이킨다. 후쿠시마 마을 사람들은 삶인지 죽음인지 모르면서 하루아침에 없던 사람들처럼 깡그리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거나 않으면서 송두리째 없어졌다.

 아이를 수레에 앉혀 자전거를 끌며 읍내를 다녀올 때마다 길바닥에 널린 수많은 주검을 바라본다. 차마 아이한테 이 많은 주검을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도 주검 저기에도 주검이다. 뱀이 깔려 죽고 사마귀가 밟혀 죽으며 나비가 치여 죽는다. 그러나, 까만 길바닥이 놓이는 동안 아주 많다 할 목숨이 소리도 못 내고 죽어 사라졌겠지.

 사람 목숨하고 지렁이 목숨이 무엇이 다를까. 사람 목숨값하고 강아지풀 목숨값하고 무엇이 다르려나.

 우리 옆지기 나이가 서른둘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놀란다. 참 오래도록 아픈 채 살아온 옆지기는 어느새 서른둘이라는 나이까지 살아냈다. 옆지기는 이녁이 서른둘까지 살아낼 줄을 알았을까. 앞으로 서른다섯이나 마흔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얼마까지 살아낼 만할까. 옆지기가 먼저 흙으로 가든, 내가 먼저 흙으로 가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흙으로 가면, 남은 살붙이 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

 돈을 남기는 삶만큼 덧없는 삶이 없다고 몸과 마음으로 느껴, 나는 내 삶을 글을 써서 남기는 삶으로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써서 남기는 삶이란, 돈을 벌어 남기는 삶하고 어느 하나 다르지 않다. 왜 남기려 하는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산 사람은 옛이야기(추억)로 먹고살 수 없다. 산 사람은 돈(재산)으로 살림을 일구지 않는다. 가멸차건 가난하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서 웃거나 웃는 낯으로 먹고살며 살림을 일군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 아파도 아픈 줄 잊거나 넘기면서 두 달을 살았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깨달아, 둘째가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난 다음 첫째를 데리고 며칠 동안 남도를 돌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몸이 무너졌다. 무너진 몸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골이 너무 아프다. 잠이 자꾸 쏟아진다. 이러면서도 글 한 조각 더 끄적이고 싶다며 애를 쓰지만, 글을 쓸 틈이 나지 않는다.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나날을 헤아린다.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돈 몇 푼 더 벌어 남기는 일이라든지, 글 몇 조각 더 끄적여 남기는 일이란 얼마나 뜻있거나 보람이 있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휘둘리며 힘들게 지낼까.

 책으로 살아왔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든 같이 드러눕든 하면서 책을 읽으면 된다. 너른 종이를 펼쳐 함께 그림을 그리면 된다. 나중에 더 남겨 줄 만한 무언가를 찾기 앞서, 오늘 함께 복닥일 무언가를 바라보아야 할 텐데.

 잠자리에서 아이는 소근소근 어여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아버지를 부른다. 얼른 잠들고 아침에 새롭게 일어나 놀면 좋으련만, 깊어 가는 밤에도 아이는 더 놀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더 놀려고 한달 수 있으나, 오늘을 더 좋아한달 수 있겠지.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마음이 짓눌린 나머지, 이레 동안 밥을 못 차리고 빨래를 거의 옆지기한테 맡기면서 보냈다. 한숨을 쉬며 모로 드러누운 채 책을 몇 권 읽기도 한다. 아파서 마냥 지켜보기만 하는 삶이란, 아파서 내 몸을 쓰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몸을 쓰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삶이란, 아파서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아프기에 숨죽이면서 조용히 숨어드는 사람들 삶이란, 사랑스럽다. 아프게 사랑스럽다. (4344.8.1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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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8-12 15:43   좋아요 0 | URL
아프다는 것은, 아픈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증거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거랑 삶의 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어서 나으세요~
아니, 많이 아프진 마세요~^^

파란놀 2011-08-13 05:13   좋아요 0 | URL
아프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낫기를 바랄 수 없어요.
아픔을 잘 받아들이면서 살아야지요...
 



 햇살 책읽기


 해가 났다가 구름이 가득하고, 빗줄기가 퍼부었다가 어느새 그치는 날씨.

 가끔 이러한 날씨를 맞이한다면 그러려니 하면서 여우비라느니 범이 장가를 가느니 하고 생각합니다. 날씨가 구지레한 채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되면, 도무지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공장은 더 늘고 자동차는 끝없이 늘며 아파트는 자꾸 늡니다.

 엉망진창이 되는 날씨를 한 사람 힘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요. 착하며 고운 날씨로 돌이킬 수 있을까요. 엉망진창으로 흐르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나 교육을 한 사람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맑으며 아리따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비가 멎고 구름이 걷혀 해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후끈후끈한 기운이 서렸기에 섣불리 빨래를 내걸지 못합니다. 십 분 이십 분 지난 다음 빨래를 내겁니다. 조금 더 지난 뒤, 곰팡이가 피는 사진틀을 잘 닦아 해바라기를 시킵니다. 조금 더 지난 다음, 나무로 된 평상을 뒤집어 말립니다.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이불을 빨랫줄에 차곡차곡 넙니다.

 다문 한 시간이라도 이 따사로운 햇살을 맞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은 기저귀 한 장에도 내려앉고 손닦개 석 점에도 내려앉습니다. 빨래를 잔뜩 했건 조금 했건 다르지 않습니다. 햇살은 모든 빨래에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햇살은 텃밭에건 무논에건 멧자락에건 들판에건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어느 쪽에는 더 내려앉고 어느 쪽에는 덜 내려앉지 않습니다. 땅이 기울었어도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목덜미로 땀이 흐릅니다. 빨래를 너는 동안에도 목덜미로 땀이 흐릅니다. 보송보송해지면서 햇살 냄새 듬뿍 받아들인 이불을 걷어 터는 동안에는 등줄기로 땀이 흐릅니다. 햇살은 빨래와 이불뿐 아니라, 빨래랑 이불을 널고 걷는 사람 등짝과 얼굴과 손등과 허벅지에도 내려앉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 햇살이면서, 누구를 딱히 더 좋아하지 않는 햇살입니다. 아니, 미움과 좋아함을 넘어, 고운 품으로 따사로이 부둥켜안는 너른 햇살입니다.

 내가 책을 왜 가까이했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왜 이렇게 갈무리하면서 살아가는가 헤아립니다. 모든 책이 햇살처럼 너르면서 고운 따순 품은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햇살처럼 너르면서 곱고 따순 책이 있습니다. 백 권 가운데 하나이든 만 권 가운데 하나이든, 내 마음밭을 너르면서 곱고 따순 헷살로 스며든 책이 있습니다. 백 권이나 만 권이 아니라 한 권을 믿으면서 책을 만났고, 사귀었으며, 함께 살아갑니다.

 모두를 바치는 사랑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두를 누리는 사랑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햇살 한 조각으로 즐거운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햇살 한 조각을 누리거나 나누면서 웃거나 우는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4344.8.1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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