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알파 1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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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삶
 [만화책 즐겨읽기 102] 아시나노 히토시, 《카페 알파 (1)》

 


 좋은 마음일 때에 좋은 책에 깃든 좋은 꿈을 받아들입니다. 좋은 마음일 때에 좋은 푸성귀로 좋은 밥을 짓습니다. 좋은 마음일 때에 좋은 사랑을 담은 좋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빈틈이 없도록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 해서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지는 않습니다. 빼어난 솜씨로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춤을 춘다 해서 사람들 가슴을 움직이지는 않아요.

 

 빈틈이 있다 하더라도, 솜씨가 어설프더라도, 여러모로 허술하더라도, 이래저래 모자라더라도,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돈으로 이루지 못하거든요. 사랑이란 이름값이나 힘줄로는 거머쥐지 못하거든요.


- “아, 자네 로보트라구? 좋겠군. 튼튼해서. 나 같은 늙은인 몸이 삐그덕거려서 말야.” “후훗, 그럼 바꿀까요?” (14쪽)
- “난 이곳이 좋아요. 이렇게 할아버지랑 얘기도 하고, 바다도 보고. 붐비고 시끄러울 때도 혼자 있을 때도 모두 좋아요.” (34쪽)


 백 살을 살거나 이백 살을 살아야 더 즐겁지 않습니다. 쉰 살을 살거나 스물다섯 살을 산대서 더 슬프지 않습니다. 내가 누릴 사랑을 오롯이 누릴 때에 내 삶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나눌 꿈을 살뜰히 나눌 때에 내 삶이 빛나요.

 

 이웃이 어렵기에 돕는다 할 적에, 누군가는 큰돈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푼돈을 내놓을 수 있는데, 누군가는 돈푼 하나 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돈이 없기에 밭에서 배추나 무를 뽑아서 건넬 수 있고, 품을 팔아 집일을 거들 수 있으며, 이도저도 안 되어 마음으로 사랑을 보낼 수 있어요.

 

 2만 원은 1만 원보다 크지 않아요. 3만 원은 2만 원보다 크지 않아요. 천만 원은 1만 원보다 크지 않으며, 1억 원 또한 1만 원보다 크지 않아요. 얼마만 한 돈이 되든 마음보다 클 수 없어요.

 

 네 살 아이는 폴짝폴짝 뜁니다. 다섯 살 아이도 폴짝폴짝 뜁니다. 두 살 아이는 콩콩 뜁니다. 열 살쯤 되거나 열다섯 살쯤 된다면 껑충껑충 뛰겠지요.

 

 어떻든 모두 뜁니다. 높이 뛰든 낮게 뛰든 뜁니다. 함께 뜀박질을 하면서 놉니다. 서로 뜀뛰기를 하고 나란히 달리기를 합니다. 더 빨리나 더 늦게는 없어요. 다 같이 즐거이 어우러집니다.


- ‘요 몇 년 동안 세상도 꽤 많이 변했다. 시대의 황혼기가 이렇듯 느긋하고 평화스럽게 오는 것이라니. 난 이 황혼의 세상을 천천히 보며 간다는 생각이 든다.’ (23쪽)
- “그러고 보니 이빨을 보기 전까진 그렇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키타히로가 혼자 있기 때문에 놀러왔을지도 몰라.” (54쪽)
- ‘미사고는 이빨까지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따뜻해지자 멍해져서.’ (59쪽)


 빠른기차를 타고 몇 시간만에 서울부터 부산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빠른찻길을 내달려 몇 시간 들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가용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시간은 더 줄입니다. 퍽 멀리 볼일을 보아야 하니 빨리빨리 오갈 수 있어요.

 

 누군가한테는 서울하고 부산만 보입니다. 누군가로서는 서울이랑 부산을 더 줄이는 길을 바라볼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서울도 부산도 아닌 문경이나 영동에서 살아갑니다. 누군가로서는 서울도 부산도 바라보지 않고 옥천이나 양양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기찻길이 놓이면 거칠 데 없이 시원하게 달린다고 합니다. 이 기찻길한테 자리를 내줄 시골사람은 언제나 기차소리를 듣습니다. 기차를 탈 일도, 기차를 타고 더 빨리 어디로 오갈 일도 없다지만, 시끄러운 소리와 매캐한 먼저를 늘 들이마셔야 합니다.

 

 송전탑 둘레로는 전자파가 어마어마하게 나오니 사람한테 안 좋답니다. 사람한테 안 좋은 송전탑이 나무나 풀이나 흙이나 냇물에 좋을 수 없습니다. 큰도시이든 작은도시이든 송전탑이 서지 않습니다. 도시에 서더라도 바깥이나 변두리에 섭니다. 도시 한복판에 송전탑이 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에는 송전탑이 버젓이 서고, 송전탑한테 논이랑 밭이랑 멧등성이를 내주어야 합니다. 전기 쓸 일이 드문 시골사람은 송전탑을 끼면서 살고, 전기 쓸 일이 많은 도시사람은 송전탑은커녕 발전소조차 곁에 두지 않아요.


- ‘모두 자기 방식대로 보고 있다. 지금은 옛날만큼 계절이 분명하지 않지만, 모두 전보다도 사물에 깊이 감동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128쪽)


 우리들 살아가는 이곳은 얼마나 아름답다 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쓰고 누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빚지 않아도 다들 잘 살아간다 하는 우리들 보금자리는 얼마나 아름답다 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쓰레기를 스스로 돌보지 않는 우리들 보금자리는 얼마나 깨끗하다 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새로 짓는 아파트만큼, 새로 세우는 도시만큼, 건축쓰레기를 어디로 버리고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피지 않는 이 나라는 얼마나 살 만한다 여겨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웃습니다. 사람들은 웁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면서 웃거나 우는지 궁금합니다. 팔랑거리는 나뭇잎 하나를 바라보며 웃을 줄 아는지, 지는 꽃잎을 들여다보며 우는지 궁금합니다. 밭을 일구며 지렁이를 만나 웃는지, 물고기 비늘을 다듬으며 우는지 궁금합니다. 언제 웃고 언제 울며, 어떻게 웃고 어떻게 우는지 궁금합니다.


- ‘난 로보트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만큼이라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16쪽)


 아시나노 히토시 님 만화책 《카페 알파》(학산문화사,1997) 1권을 읽습니다. 느리게도 느긋하게도 한갓지게도 아닌, 살아가는 빠르기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을 읽습니다.

 

 느리게 산대서 더 나은 삶이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살거나 한갓지게 살기에 더 좋은 삶이지 않아요.

 

 저마다 알맞게 살아갈 때에 즐겁습니다. 누구나 알뜰살뜰 살림을 꾸릴 때에 기쁩니다. 패스트푸드도 슬로푸드도 우리한테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집에서 우리 땀을 들여 우리 손으로 거두고 우리 식구가 누리는 우리 밥그릇 하나가 좋습니다. 밥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거든요.

 

 볍씨를 갈무리해서 모를 내고 모를 심고 물을 대며 풀을 뽑고 나락을 거두어 나락을 훑고 나락을 찧고 비로소 쌀을 얻습니다. 쌀은 날로 씹어먹을 수 있고, 먼지를 잘 씻고 돌을 일어 물에 불린 다음 밥으로 지을 수 있습니다. 빠르다 하면 가게에서 사다 먹을 때에 빠르겠지요. 느리다 하면 볍씨를 갈무리해서 심어서 거두는 삶이 느리겠지요.

 

 그러나, 무엇이 빠르고 무엇이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빠르거나 느리다고 나누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게 돌볼 삶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좋게 사랑할 살붙이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좋게 꿈꾸는 하루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고운 목숨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아 새롭게 빛내는 목숨을 예쁘다고 못 느끼는 쳇바퀴가 된다고 느낍니다. (4344.12.31.흙.ㅎㄲㅅㄱ)


― 카페 알파 1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199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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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좋아
이모토 요코 글 그림, 변은숙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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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하루를 어여삐 맞아들이는 새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14] 이모토 요코, 《난 네가 좋아》(문학동네어린이,2002)

 


 나는 아이들 옷가지와 기저귀를 빨아 후박나무 빨래줄에 찬찬히 널며 해바라기 시키는 일이 좋습니다. 겨울날에도 따숩게 부는 바람이 옷가지를 나부끼며 곱게 말리는 일이 고맙습니다. 보송보송 잘 마른 옷가지랑 기저귀를 걷으며 생각합니다. 나는 이 겨울햇살처럼 따스하게 살아가고 싶고, 곧 찾아올 봄햇살처럼 보드라이 살아가고 싶다고. 이어서 찾아올 여름햇살처럼 싱그러이 살아가고 싶고, 이 다음으로 찾아올 가을햇살처럼 포근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 나는 강아지가 좋아. 그래서 꼬옥 안아 주지 ..  (1쪽)


 나부터 좋은 마음이 되어 좋은 나날을 누린다면, 나랑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하고 아이들도 언제나 좋은 나날을 누릴 수 있겠지요. 나부터 좋은 마음이 못 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성깔난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하며 살아간다면, 나랑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하고 아이들 또한 바보스러운 아버지 때문에 자꾸자꾸 미운 마음이 스며들 테지요.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둘째 아이는 제 어머니랑 아버지를 끊임없이 깨웁니다. 아이 어머니는 배에 얹혀 재우다가는 오른팔을 베개 삼아 재우다가는 왼팔을 베개 삼아 재웁니다. 오줌 눈 기저귀를 갈라치면 자지러지게 웁니다. 이리 달래며 조금 재우다가 저리 달래며 조금 재웁니다. 이러는 동안 아이 어머니는 도무지 밤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몸이 힘들거나 아프거나 괴로우니까 제대로 잠들지 못할밖에 없어요. 아기를 다그치거나 나무랄 수 없어요. 더 따사로이 보듬고 더 포근하게 사랑해야 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기를 건네받습니다. 밤에 한 번 아기를 건네받고, 이제 아침에는 식구들 모두 일어날 때까지, 아기가 부디 깊이 잠들고 나서 일어나 주기까지, 이렇게 아기를 품에 꼬옥 안으면서 달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기를 건네받기 앞서 밤새 기저귀 빨래 몇 장쯤 나왔는가 어림합니다. 아침에 끓일 떡국을 헤아리며 떡국떡을 물로 헹구어 불립니다. 뼈다귀를 펄펄 고아 이 물에다가 떡국을 해야 하나. 뼈다귀 국물을 안 하면 안 될까. 그러면 무슨 국물로? 우리는 우리대로 무랑 버섯이랑 감자랑 다시마를 펄펄 끓여 이 물에 떡국을 끓이면 어떠할까. 모처럼 달걀을 흰자랑 노른자랑 나누어 부쳐서 예쁘게 썬 다음 고명으로 얹으면 될까. 지난주 고흥 장마당에서 산 깜포를 박박 비벼 헹구고서 다 끓인 떡국에 살짝 데치듯 넣어서 국그릇에 뜨면 되겠지.


.. 강아지는 고양이가 좋아. 그래서 쫄랑쫄랑 쫓아다녀 ..  (3쪽)


 아기는 아버지 무릎에서 색색 잡니다. 더없이 고맙게 조용히 잡니다. 적어도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 이렇게 잠누리를 누비면 아주 좋겠습니다. 한두 시간쯤 이렇게 잠들어야 비로소 개운하게 일어나 씩씩하게 새해 새날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아기까지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제 첫째한테는 어여쁜 옷을 입히고 모두들 마을 한 바퀴를 돌며 이웃 어르신들한테 인사를 다녀야지요. 이웃 어르신 댁에 찾아온 식구들한테도 인사를 해야지요.

 

 아마 다른 집은 일찌감치 아침밥상을 차려서 먹었겠지요. 아기가 있는 우리 집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느즈막하게 일어나 겨우겨우 아침을 차려서 먹겠지요. 이웃집에서는 낮밥을 먹는다 할 때에 비로소 첫 밥술을 뜨겠지요.

 

 대청마루에서 바깥을 내다 봅니다. 오늘은 구름이 많이 낍니다. 어제도 구름이 퍽 많았습니다. 어젯밤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왔더니 별이고 달이고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양력 아닌 음력에 맞추어 달 구경을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여기지만, 양력이든 음력이든 밤하늘 맑은 별과 밝은 달을 올려다보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우리 아이들 이 시골집에서 밤하늘 별이랑 달을 마음껏 받아들이면서 저희 마음밭에 고운 빛씨를 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병아리는 나비가 좋아. 그래서 팔짝팔짝 뛰어다녀 ..  (10쪽)


 이모토 요코 님 그림책 《난 네가 좋아》(문학동네어린이,2002)를 읽습니다. 아이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강아지는 고양이를 좋아하며, 고양이는 병아리를 좋아한답니다. 병아리는 나비를 좋아하고, 나비는 해바라기를 좋아하며, 해바라기는 아이를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모두모두 해님을 좋아하고, 해님 또한 모두모두 좋아한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따스한 사랑으로 포근하게 낮잠에 빠져드는 조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 그래서 우리를 모두 따뜻하게 감싸 주는 거야 ..  (21∼23쪽)


 서로서로 아끼는 누리에서는 다툼이나 싸움이 깃들지 않습니다. 다툼이나 싸움이라는 낱말부터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다툼이나 싸움이 끼어들 자리가 없으니, 언제나 즐겁게 웃고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기운차게 두레를 합니다. 신나게 도르리를 합니다. 한솥밥을 먹으며 웃습니다. 나란히 땀을 흘리고 다 함께 정갈하게 씻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어버이 일을 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이 물려받는 일은 또 이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땅을 아낄 수 있는 일을 사랑합니다. 흙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좋아합니다. 물을 북돋우고 하늘을 꽃피우는 일을 누립니다.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더 날리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사랑을 예쁘게 나누거나 믿음을 어여삐 심는 일이 보람찹니다.

 

 햇살은 노상 햇살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람입니다. 물은 늘 물입니다. 흙은 한결같이 흙입니다. 햇살을 먹고 바람을 쐬며 물을 마시고 흙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들 마음에는 오직 하나, 사랑씨가 뿌리내리면서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좋은 하루를 좋은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4345.1.1.해.ㅎㄲㅅㄱ)


― 난 네가 좋아 (이모토 요코 글·그림,변은숙 옮김,문학동네어린이 펴냄,2002.10.20./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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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1-01 18:17   좋아요 0 | URL
된장님 2011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파란놀 2012-01-02 00:51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즐거이 새해 맞이하셔요~
고맙습니다 ^^

페크pek0501 2012-01-02 11:32   좋아요 0 | URL
된장님 2011년의 서재의 달인, 저도 축하드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을 쓰실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저는 한 달에 몇 편 쓰는 것도 벅찬 사람이라서요. ㅋ

올해 새해에도 늘 그렇게 글쓰기 생활화의 모습을 기대하며 저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따뜻하고 흐뭇해지는 그런 글, 참 좋습니다.

파란놀 2012-01-02 18:36   좋아요 0 | URL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글로 담을 뿐이에요.
pek0501 님 새해에
언제나 좋은 일 가득하리라 믿어요~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창비시선 16
정희성 지음 / 창비 / 197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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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던 고등학생이 밥을 먹으며 살다
[시를 노래하는 시 4]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책이름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글 : 정희성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1978.11.1.)
- 책값 : 7000원

 


 (1) 시를 읽던 고등학생이


 정희성 님이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내놓던 때에는 할아버지 나이가 아니었어요. 이제, 제 나이 서른여덟에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다시 넘기며 돌아보면, 정희성 님은 할아버지입니다.

 

 1978년 처음 태어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제가 처음 읽던 해는 1993년입니다. 이 시집을 다시 들추는 서른여덟이 된 올해는 2012년입니다. 시집 하나를 두고 제 나이는 얼추 스무 살을 먹습니다.

 

 처음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헌책방에서 만나 읽을 때에는 깔끔함을 느끼고, 텁텁하면서도 맛깔스러움을 느꼈어요. 그때, 그러니까 1993년 어느 날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만나면서 ‘이 시집이 새책방에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있을까 없을까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어쩌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몰라, 하고 생각하다가는, 애써 새책방까지 다시 가야 하나 싶어, 여기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즐겁게 읽자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문학 참고서에 이름이 없고, 대입시험 문제로 정희성 님 시를 다룰 일이 없겠다고 여기면서도 이 시집을 읽고 싶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아니 ‘대중가요’처럼 널리 알려진 시인이 아닌, 낯선 이름인 정희성 님이었으나, 고등학생한테는 누구나 낯선 시인이 아니겠느냐 생각했어요.

 

 씁쓰레하면서도 깊이 스며드는 보리맛 같은 시를 두 손이 새까매지도록 고개숙여 읽다가 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버스로 40분 남짓인데, 이 길을 두 손 꽁꽁 어는 찬바람 고스란히 맞으면서 두 시간 넘게 걸어서 갔어요. 시집 하나 쥐면서, 시집 하나에 머리를 폭 박으면서, 헌책방에서 다 읽은 시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읽으면서.


.. 비무장지대의 모든 산들이 / 일제히 무장을 하고 나선 / 칠흑의 밤이었네 / 적인 듯 싶기에 쏘았지 / 힘없이 쓰러지데, 허전하게 /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그러나 /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어 /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 노루라거니 사슴이라거니 / 좋아 날뛰는 병사들 틈에서 / 대대장의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 수고했노라고 악수를 청하며 / 그런 식으로 하면 적을 잡을 수 있다고 / 친구여, 그가 나를 위로하였지 / 알겠노라고, 알겠노라고 대답하면서 /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 참 알 수 없네 / 확인된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닐세 / 네 다리는 살아서 / 죽음의 어두운 허공을 휘저으며 / 나의 살의를, 대대장의 살의를 /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살의를 / 입증하는 것일까 / 죽어가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 탄환처럼 완강히 내 가슴에 박혀 있네 ..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고등학생으로서는 군대에서 총을 쏘아 짐승을 잡는 일을 모를 테지만, 나는 그무렵 이 시를 읽으면서 내 염통이 끊어지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몇 해 뒤인 1995년 겨울, 강원도 양구 멧골짝 깊디깊은 데로 끌려갑니다. 나도 이 시에 나오듯 군인이 되었어요.

 

 민통선에서 짐승을 쏘아 죽이는 일은 흔합니다. 비무장지대에서는 군인이 아니면 돌아다닐 수 없기에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면 흔히 총을 쏩니다. 가끔 신문에 오르내리는 남북 총격 사건도, 가만히 보면 적군이 아니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짐승을 쏜 일일 때가 잦습니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에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있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떨다가, 잔뜩 움츠리다가, 설마 북녘 군인이라면 나를 쏠지 모르니 먼저 총을 쏘아요. 빵, 빵. 때로는 연사로 놓고 빠바바방.

 

 깊은 밤 부시럭거리는 소리 하나 때문에 총을 쏩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는 다음 근무자가 컵라면 따숩게 끓여 들고 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면서 내는 소리일는지 모릅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는 참말 북녘 군인이 조용히 정찰을 나오다가 방귀를 뀌면서 지레 놀라 낸 소리일는지 모릅니다. 민통선에서는 남북녘 정찰 군인이 한 주에 여러 차례 새벽과 밤마다 오가면서 만나요. 서로 모른 척하기도 하고, 서로 인사하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 총을 쏘기도 합니다.

 

 쏘고 싶지 않은 짐승한테 총을 쏘았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한테 총을 쏘았어요. 아, 나는 군대에서 보았어요. 북녘에서 못 살겠다며 두 손 들고 총을 버리며 철책을 넘어오던 우리처럼 앳된 병사를 보며 두려움에 떤 나머지 총을 빠바방 쏘아 죽인 남녘 앳된 병사를.

 

 죽여야지 내가 사니까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요. 아니 죽여야 내가 산다고 배우잖아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배우고, 군대에서 두들겨맞으면서 뿌리깊게 배우잖아요. 먼저 내 목숨을 지켜야 한다잖아요. 어깨동무나 두레나 품앗이를 겪을 일이 스무 살까지 없잖아요. 그리고, 스무 살부터 총을 쥐라 하잖아요. 이웃한테도, 힘이 여린 사람한테도, 짐승한테도, 풀과 꽃과 나무한테도, 마구마구 돌을 던지고 채찍을 휘두르는 일을 서슴지 않아요.

 

 지난 나날 이렇게 살았어요. 경제개발이니 국가보안법이니 간첩단사건이니 무어니 하고 떠들던 지난 나날 이렇게 살았어요. 평화의댐이니 고속도로이니 월남파병이니 방위성금이니 하고 지껄이던 지난 나날 이처럼 살았어요. 골목길이니 가난이니 달동네이니 정부미이니 하고 읊던 지난 나날 이렁저렁 살았어요. 텔레비전이니 프로야구이니 의료보험이니 예방주사이니 하고 외치던 지난 나날 이래저래 살았어요.

 

 서로가 서로를 이웃이자 따뜻한 목숨붙이로 생각하게 이끄는 마음을 빼앗습니다. 배앗기지 않고 빼앗습니다. 잃어버리지 않고 내놓습니다. 따스한 꿈을 내놓고, 너그러운 믿음을 내려놓습니다. 시를 읽던 고등학생이 군인이 되어 열여섯 달이 지나자, 나도 살아남자며 후임병을 온갖 욕지꺼리로 미치게 만들고, 군화발로 대가리를 걷어찼습니다.

 


 (2) 고등학교 졸업장


 한창 대입시험으로 바쁜 동무들 틈바구니에서 정희성 님 시집을 으레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내 가방에는 릴케 시집이랑 정희성 시집이랑 신동엽 시집이랑 김소월 시집이랑 이육사 시집이랑 문익환 시집이랑 신경림 시집이랑 갈마들었습니다. 외우지는 않았으나 거의 외우다시피 시를 읽었습니다. 대입시험 공부하듯 외우기 싫어, 언제라도 내가 바라는 쪽을 펼쳐 되읽기만 했습니다.

 

 고등학교 큰문 앞에서 나눠 주는 학원 광고종이 뒷자리에 정희성 님 시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를 옮겨적습니다. 따분한 수업이 이어지는 동안 종이비행기를 접어 슬그머니 앞으로 던집니다.


.. 친구여, 네가 非詩的이라고 부르는 / 바로 그곳에 뜨겁게 으스러진 나의 / 삶이 있고, 굶주린 식구가 있고 / 노동이 있고 / 그리고 억센 팔뚝뿐이다 / 삽과 망치뿐이다 // 아니다 친구여, 너의 正義가 사는 곳 / 이 푸른 하늘 아래 / 뜨거운 태양이 있고, 땅이 있고 / 너와 나 그리고 / 햇빛 뒤에 패어진 그늘도 있다 // 친구여,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 침묵 뒤의 소란이, / 정신 뒤의 육체가 / 우정 뒤의 敵意가, / 마음에 들지 않겠지 // 마음에 들지 않어라 / 한때는 너와 내가 만나 / 詩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고 / 政治를 말하고 自由를 말했지만 / 친구여, 30을 넘어 이제는 /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이 / 우리를 가로막는구나 // 친구여, 네가 詩를 쓸 때 / 나는 굶는 식구를 생각했고 / 네가 詩를 쓸 때 /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 네가 天國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 나는 죽음 뒤에 오는 것을 생각하며 / 네가 내민 손수건을 눈에 대고 / 울며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 내게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종이비행기로 뒷통수를 맞은 동무가 깜짝 놀랍니다. 누구야, 하듯 뒤를 홱 돌아보다가 이녁 밑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보고는 얼른 줍습니다. 교과서를 책상에 세우고는 천천히 폅니다. 함께 문학책을 읽으며 문학이야기 꽃피우던 동무는 “마음에 들지 않어라”랑 “내가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하는 대목 때문에 이 시를 적어서 보냈다고 여깁니다. 피식 웃으면서 손으로 주먹질을 합니다. 나도 따라합니다. 칠판에 붙어 끝없이 판서를 해대는 교사는 뒤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나는 고등학생으로서 대입시험에 목매달아야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지, 고등학교 졸업장을 꼭 가져야 하는지 못마땅합니다. 못마땅한데 털지 못합니다. 털지 않는다고 할까요. 고등학교를 그만두어 중학교 졸업장으로 살아갈 나를 어림하면서 나한테 손가락질을 할 사람들 화살을 못 견디리라 생각하고 맙니다.

 

 참으로 모를 일이지요. 뒷날 누가 나더러 ‘개새끼’ 소리를 읊건 말건, 나를 보며 ‘너 참 마음에 들지 않는 놈팽이’라 손가락질하든 말든 얼마나 대수로운가요. 내가 올곧게 살아간다면 올곧게 살아가니 아무렇지 않습니다. 내가 바보스레 살아간다면 바보스레 살아가니까 아무렇지 않아요.

 

 나는 내 사랑을 아끼며 살아가면 돼요. 나는 내 마음을 돌보며 살아가면 돼요. 내 사랑으로 내 동무를 좋아하고, 내 마음으로 내 살붙이를 좋아하면 즐거워요.

 

 어쩌면, 나는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고 정보를 얻으면서 막상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믿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몰라요. 어쩌면, 나는 학교라는 핑계를 대면서 나 스스로 내 가슴에서 사랑을 불사르지 않았고 내 마음밭에 믿음씨앗 심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요.

 

 사랑과 마음을 잃는다면 제가 저로서 살아가는 뜻이 없어요.

 

 이리하여, 나는 어릴 적부터 한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따분한 수업을 견디며 종이접기를 하다가 새삼스레 단단히 다짐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일자리에서 아늑하게 돈받으며 살지 않겠노라. 돈 못 벌고 굶더라도 올바른 곳에서 일하겠노라.

 

 정희성 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스무 해 동안 보듬으며 가만히 되씹습니다. 그래, 나는 올바른 일을 하면서 내 살림을 예쁘게 건사하겠노라. 나는 올바른 일을 하면서 우리 식구들뿐 아니라 우리 동무들 즐거이 마실와서 좋은 사랑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집숲을 이루겠노라. 내가 믿는 가장 올바른 꿈을 글 한 줄에 담아 책으로 엮어, 이 책을 팔아 벌어들이는 돈으로 집숲을 마련하겠노라.

 


 (3) 밥을 먹으면 되지


 고등학교를 그만두나 마나 망설이던 아이는 대입시험에 붙습니다. 처음 원서를 내민 대학교는 떨어졌으나 두 번째 쓴 대학교는 붙습니다. 세 번째 원서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두 번째 학교로 갑니다.

 

 두 번째 학교에 들어가서 첫 날을 보내며 술을 얻어 마십니다. 이때부터 대학교 문턱을 밟는 날이면 온몸을 어찌저찌 가누기 힘들 만큼 술을 얻어 마십니다. 대학생인 선배는 돈이 어디에서 나기에 이렇게 후배한테 술을 사 줄 수 있을까, 나는 한 해를 더 견디어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되면 후배한테 술을 사 줄 수 있으려나, 생각하며 넋을 잃지 않으려고 머리를 다잡습니다. 하나둘 나가떨어져도 끝까지 버팁니다. 넋을 잃은 동무를 어깨동무하거나 업습니다. 속을 게우는 동무들 등을 두들깁니다. 찬물로 얼굴을 씻어 주고, 찬물로 옷을 헹구어 줍니다.


..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날이면 날마다 술자리를 빛내는 선배들을 만나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하는가 생각에 젖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기에, 이렇게 술을 들이부어야 하느냐 생각에 잠깁니다.

 

 인천에서 서울 오른쪽 귀퉁이에 붙은 대학교를 오가자니 아주 벅찹니다. 술자리는 으레 새벽을 넘기는데, 나는 저녁 여덟 시 오십오 분에 떠나는 ‘인천 가는 막차 앞에 있는 차’를 타야, 비로소 마을버스를 갈아타서 밤 한 시 조금 못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선배들은, 또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는 선배들은, 그리고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학교랑 학원이랑 집만 오가던 동무들은, 겨우 술자리가 무르익는다 싶은 여덟 시 오십 분쯤 자리에서 일어나 전철역으로 달음박질하려는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붙들어 앉힙니다.

 

 이러다가 저녁 열 시가 되고 열한 시가 되면 ‘서울에 있는 저희들 집’으로 하나둘 돌아갑니다. 나는 갈 데가 없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온 선배가 자취방에 같이 가자면 같이 가지만, 술로 떡이 된 선배가 도무지 일어날 낌새가 없으면 학과방이나 동아리방에서 신문종이 덮어쓰고 잡니다. 잠들기 앞서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읽습니다. 어스름하게 동이 트는 새벽에 일어나 어젯밤 읽던 책을 더 읽습니다. 새벽녘 학생회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헌종이 모으는 통’을 뒤져 ‘다른 학과방에서 버린 낡은 책과 신문과 잡지’를 줍습니다. 아침이 되어 첫 강의를 하기 앞서까지 낡은 책과 신문과 잡지를 읽습니다. 8교시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이루어지는 술자리에 끌려다니자면 도서관이고 학교 앞 사회과학책방이고 헌책방이고 나들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듬날 새벽 헌종이 모으는 통을 뒤지며 낡은 책 한 권 건질 수 있으면 좋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읽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들고 와서 새삼스레 들추기도 합니다. 선배들은 뭔 시집을 읽느냐고 구경 좀 하자고 하면서, 어느 누구도 정희성이라는 이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가 다닌 학과가 네덜란드말을 배우는 학과라서 모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다닌 학과를 일찌감치 마친 그럭저럭 이름난(이제는 많이 이름난) 선배가 둘 있었으니까요. 하나는 노래하는 권진원이요, 둘은 소설쓰는 김남일.

 

 술에 절어 아침 강의에도 못 일어나는 선배와 동무를 바라보면서 아침햇살 쬐며 시집을 읽습니다. ‘개새끼들!’이라는 싯말을 빙긋 웃으면서 속으로 외칩니다. 잠에서 깨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지른 쓰레기를 치웁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하는 김에 이웃 학과방(스웨던말 학과방과 포르투갈말 학과방과 이탈리아말 학과방)을 함께 치웁니다. 골마루도 슬쩍 걸레질합니다. 학교 건물을 청소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하고 인사합니다. 청소하는 대학생은 보기 힘들다며, 우리 학과와 이웃 학과 사람들이 어지른 쓰레기를 흘깃 보다가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건네줍니다.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감습니다. 학생회관 뒷간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복복 비빕니다. 머리를 감고 낯을 씻어도 한뎃잠을 잔 티가 난다지만, 나는 나대로 새날을 새롭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기운이란 늘 내 몸에 깃든 채 내가 깨우기를 기다릴 테니, 나는 내 마음을 믿으며 사랑하고 싶어요.

 

 나를 돌아보며 시를 읽습니다. 내 마음밭에서 곱게 잠자며 내 목소리를 기다리는 시를 읽습니다. 빛이 넘치는 곳에서는 빛을 모른다 하고, 어두움 가득한 데에서는 빛을 애타게 바란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서도 빛을 느끼겠는걸요. 어두운 데에서도 어두움을 느끼겠는걸요.

 

 나는 시를 읽고 싶어서 문학참고서 아닌 시집을 사서 읽었어요.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내 앞길을 배우고 싶어서 어찌 되든 고등학교를 마쳤고, 어찌저찌 대학교까지 가 보았어요. 그런데, 스무 살까지 살아내며 찾아간 대학교에서는 그저 부어라 마셔라 죽어라 하는 술놀이 빼고는 떠오르지 않아요. 어두운 데에서도 어둠과 빛이 있다지만, 나는 착하게 살아갈 곳에서 착하게 노래부르고 싶어요.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비싼 밥이나 값싼 밥이 아니라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다섯 학기까지만 다니고 대학교 졸업장은 내려놓았어요.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했어요. 아니, 고등학교 졸업장을 쓸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아무 졸업장 없는 사람으로 살자고 생각했어요.

 

 좋아요.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만난 1993년부터 두 아이와 옆지기랑 살아가는 2012년까지 밥을 맛나게 먹는걸요.

 

 좋아요. 나는 앞으로도 밥을 즐거이 먹을 테고, 우리 아이들도 오래오래 밥을 기쁘게 먹을 테니까요.

 

 사랑을 먹고 밥을 먹어요. 믿음을 먹고 밥을 먹어요. 웃음과 눈물을 먹으면서 밥을 먹어요. (4333.8.8.불./4336.7.20.해./4345.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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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안 궁금하지만, 사진이 어떠한가 궁금하다. 그러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삶과 발자취를 살피지 않으며 살아온 남녘땅 여느 사람들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잘 간추린 이야기 하나라도 읽어 보면서, 여러모로 생각에 젖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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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 재인한인 100년의 사진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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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 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유키 마사코 글, 서인주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종이에 앞서 마음에 담는 사진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0 : 이와사키 치히로·유키 마사코,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글에 맞춰 그린’ 그림이 아닌, 당신 스스로 좋아서 그린 그림을 살피면서, ‘그림에 맞춰 글을 넣은’ 그림책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을 읽습니다. 안타깝다면,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 다리품을 팔아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어요. 나도 이 그림책은 한 해 넘게 다리품을 판 끝에 드디어 한 권 만났습니다.

 

 《마음속에 찰칵》은 그림책입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녁 그림을 봄이랑 여름이랑 가을이랑 겨울에 맞추어 곱게 나눈 다음, 철 따라 어떠한 빛깔을 사랑하면서 사진찍기 놀이를 즐길까’ 하는 이야기를 붙인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이니까, 이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로서는 사진책을 본다고 할 수 없다 할는지 몰라요. 그런데, 《마음속에 찰칵》은 사진찍기 놀이를 하는 그림책이에요. 살가이 담은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아하, 이렇게 사진을 찍는구나.’ 하고 느껴요. ‘오호,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갈무리하는구나.’ 하고 깨달아요.

 

 이를테면, 꽃내음 물씬 누리는 봄날, “새로운 친구도 생기고 ……. 오늘을 기념하며 찰칵. 아주 좋아하는 꽃도, 찍는 김에 찰칵(5∼6쪽).” 하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림책 한쪽에는 네모낳거나 동그랗게 구멍이 뚫립니다. 구멍에 따라 ‘사진기로 들여다보듯’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종이 한 장을 넘기면 구멍은 앞쪽 그림을 네모낳거나 동그란 구멍에 맞추어 바라봅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사진이 되’고 ‘저기에서는 저렇게 사진이 되’는 줄 배웁니다.

 

 이리하여, 가을날에는, “저 아이의 옷은 단풍색. 마음속에 찰칵. 저 아이를 찰칵. 다가가서 찰칵. 크게 크게 찰칵. 달님도 가까이 있네요(15∼16쪽).” 하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가을날 단풍빛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내 눈에 아름답다고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아름답구나 싶은 이야기를 나란히 담아요.

 

 무언가를 기리면서 사진에 담을 때에는 어느 날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모습’뿐 아니라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이야기’를 담는답니다. ‘이야, 예전에는 이와 같은 모습이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 아니에요. ‘이야,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꾸준히 찍어서 사진첩으로 엮으면, 이 사진첩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사진첩을 넘길 때에는 이야기꾸러미를 넘기는 셈이에요.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아이가 예뻐 보이는 모습’을 담지 않아요.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요. 그래서 이 아이가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누리고 부대꼈어.’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밭이 되는 사진입니다.

 

 옛날 옛적 모습, 이른바 추억을 담는 사진은 아닙니다. 사진은 추억을 만들려고 찍지 않아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고루 사랑할 내 삶을 아끼고 싶어 빚는 이야기샘입니다. 이야기가 샘솟는 샘인 사진이에요. 지난 한때에 머물도록 하지 않습니다. 옛날을 자랑하거나 우쭐거리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 즐겁게 누렸다는 보람을 기쁜 웃음과 눈물로 곱게 빚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빛으로 일구는 그림이자 글이요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빛무늬와 빛결을 예쁘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꿈이자 넋이요 무지개예요. 사진기 있어 종이에 남기는 사진을 얻겠지요. 사진기 없으면 가슴으로 오래오래 아로새기는 이야기씨앗을 마음밭에 심어요.

 

 나는 우리 집식구들 사진을 찍으면서 종이로도 이야기를 아로새기지만, 이에 앞서 내 눈을 거쳐 내 가슴에 우리 집식구들 삶을 곱게 새깁니다. 먼저 내 가슴에 새기는 집식구들 삶이 아니라면 사진기를 들지 못해요. 언제까지나 내 마음밭에 고이 스미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진으로 옮기지 못해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에 새 옷을 입히며 ‘사진 이야기 그림책’을 일군 유키 마사코 님이 더없이 고맙습니다. 좋은 그림에 좋은 이야기를 붙일 줄 아는 분이라면, 좋은 삶을 좋은 사진으로 옮기면서 활짝 웃을 줄 알겠지요. 마음속에 찰착 하고 담을 수 있어서 종이로 아로새길 모습과 이야기를 사진기로 찰칵 하고 담습니다. (4344.12.29.쇠.ㅎㄲㅅㄱ)


― 마음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유키 마사코 글,서인주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12.1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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