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아버지 곁으로 기어오기

 


 둘째를 씻긴다. 씻긴 아이를 방으로 안고 간다. 씻긴 아이한테 옷을 새로 입힌다. 둘째는 방에 두고 아이 씻긴 물이 가득한 씻는방으로 간다. 아이들 옷가지와 기저귀를 빨래한다. 한참 비빔질과 헹굼질을 하는데, 뒤에서 방바닥 척척 때리는 소리가 난다. 뭔가 하고 뒤돌아보니 둘째가 기어서 씻는방으로 다가온다. 곧, 씻는방 문턱에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는 바닥 물 흐르는 자리에 손을 대려 한다. 물을 만지고 싶구나. 그러나 빨래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바닥에 손을 대지 않게 허벅지를 내밀며 막는다. 이런 모습으로 빨래를 잇는다. 아이가 아버지 허벅지에 두 손을 척 대고 발을 버티어 선다. 허벅지에 닿은 아이 손이 차갑다. 아이구, 이렇게 차가운 손으로 물놀이를 하겠다고? 여름이면 몰라, 겨울이잖니. 아버지는 허벅지로 버티며 빨래를 더 한다. 네가 씻은 이 물이 아직 따스할 때에 빨래를 해야 하거든. 둘째는 아버지 허벅지에 기대어 선 채 빨래 구경을 한다. 옳거니, 네 아버지가 네 옷가지랑 기저귀를 어떻게 빨래하는지 보고 싶니. 그러면 잘 보고, 무럭무럭 자라서 네 누나랑 함께 너희 옷가지를 신나게 빨렴. 너희 이불도 너희가 기쁘게 빨렴. 어느덧 빨래를 다 마칠 무렵까지 아버지 허벅지에 기대어 서며 구경하던 둘째는, 이제 다 되었다 싶을 때에 허벅지에서 손을 내리더니 뒤돌아선다. 두꺼운 겉옷은 씻는방에 걸어 물이 떨어지도록 하고, 나머지는 바가지에 담는다. 이제 방에 널려고 하니, 아이도 아버지를 따라 척척 긴다. 방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빨래를 꿰어 널 때에, 첫째가 일을 거든다. 아버지가 열 몇 점을 꿰고, 첫째가 석 점을 꿴다. (4345.1.29.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쓰기도 힘들고 시읽기도 힘겹고
[시를 노래하는 시 12] 송경동, 《꿀잠》

 


- 책이름 : 꿀잠
- 글 : 송경동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6.3.30.)
- 책값 : 8000원

 


 열흘 남짓 입었는지 보름쯤 입었는지 헷갈리는 두툼한 웃옷을 벗은 엊저녁, 새 웃옷을 꺼내 입지 않고 잠들었는데, 반소매 웃통으로 이불 세 겹 덮어쓰고 자다가 내 옆에서 꼬물거리며 이불을 걷어차는 아이한테 내 이불 씌우다 보니 어느새 내 몸을 가리는 이불이 없더니, 그만 밤새 찬바람 많이 마시며 고단한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둘째 똥기저귀를 두 벌 빨래하고 나서는 도무지 몸이 버티지 못하겠구나 싶어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당근을 씻어서 알맞게 썬 다음 물을 짭니다. 이럴 때에 곁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거나 함께 놀아야 일이 수월한데, 꿈결인지 잠결인지 아스라한 소리만 듣고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눈을 감고 허리를 폅니다.

 

 두 시간을 들뜬 몸으로 뒤척이다가 일어납니다. 두툼한 겉옷을 입습니다. 아이 둘은 어머니 곁에서 알짱알짱 붙어서 칭얼거립니다. 아이 어머니는 두 아이 칭얼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아침과 낮 먹을거리를 마련합니다. 거꾸로, 아이 어머니가 드러누운 때, 내가 두 아이 먹을거리를 마련하면서 집안을 쓸고닦는 한편, 아이들 옷가지와 기저귀 빨래하는 몫을 기쁘며 홀가분하게 짊어질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짊어지기야 하지요. 날마다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다섯 해째. 그렇지만, 활짝 웃는 얼굴로, 싱그러이 노래하는 목소리로, 이 집일을 거느리면서 아이들하고 사랑꽃을 나누었을까 생각하면, 낯이 화끈거립니다.


..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던 손 / 괭이가 박혀 있던 손 ..  (손)


 아버지가 깬 뒤 둘째 아이가 셋째 똥기저귀를 내놓습니다. 둘째를 살짝 안고 한동안 어르다가는 똥기저귀를 빨래합니다. 똥기저귀랑 낮에 눈 오줌기저귀를 빨래하는 사이, 둘째 아이는 넷째 똥기저귀를 내놓습니다. 아이 밑을 씻기고 똥기저귀를 새로 빨래하는 김에 오줌기저귀 두 장을 더 빨래하고, 옆지기 두툼한 겉옷 한 벌 나란히 빨래합니다. 후줄근하게 빨래를 마치고 마당가 후박나무 빨래줄에 넙니다. 새벽에 빨래해서 널어 다 마른 옷가지와 기저귀를 걷습니다. 걷은 옷가지는 갤 틈이 없습니다. 똥을 두 차례 더 눈 둘째는 틀림없이 졸릴 테니까요. 옆지기가 둘째를 어르고 나서 먹을거리 마련하기를 더 하는 동안, 아버지는 둘째를 품에 안습니다. 둘째 가슴을 톡톡 다독이고 노래를 부릅니다. 둘째는 눈을 뜨고 감다 되풀이하다가 스르르 감습니다. 옳지 옳지 이제 나이 제법 먹었으니 꼭 어머니 등짝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곱게 잘 수 있겠지.


.. 우린 흙 묻은 안전화를 끌며 계단을 서성이다 / 후문을 나서 다시 새벽 작업장으로 간다 ..  (저 하늘 위에 눈물샘자리)


 한창 뛰놀며 이른아침부터 늦은저녁까지 같이 놀자고 부르는 첫째 아이를 한동안 무릎에 누여, 얘, 얘, 아버지는 좀 쉬자, 좀 쉬다가 놀자, 너도 책 좀 읽어 주렴, 아버지도 책 읽으며 살짝 쉬자꾸나, 다리도 쉬고 허리도 쉬며 등도 팔도 쉬자꾸나, 이야기하며 시집을 들춥니다. 만화책도 읽고 사진책도 읽고 그림책도 읽습니다. 아이한테 그림책 글을 읽히며 함께 들추기도 하지만, 이제 아이는 그림책 그림을 혼자 말끄러미 바라보기를 조금 더 좋아합니다. 굳이 어떤 말을 살붙이며 들려주지 않더라도 아이 스스로 생각힘을 북돋웁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히며 때때로 생각합니다. 내 어버이는 나한테 그림책을 읽힌 적이 있나? 내 어버이는 나한테 만화책을 읽힌 적이 있나? 내 어버이는 나한테 동화책을 읽힌 적이 있나? 내 어버이는 나한테 동시책을 읽힌 적이 있나?

 

 나 어릴 적 살던 집에 책이 아예 없지 않았습니다. 빨간빛 딱따구리 100권 넘는 손바닥책이 있기도 했습니다. 돌이키면, 내 어버이 두 분부터 어린 나날 책을 읽으며 자라지 않았겠구나 싶습니다. 내 어버이 두 분은 도시와 시골에서 어린 나날을 바쁘게 부대겼으리라 생각합니다. 종이로 된 책이 없이 삶을 이었고, 종이로 된 책에 아로새기는 이야기가 없이 둘레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 그 술집이 있던 닭장 골목 / 그 골목 밀고 이제는 멋진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 나는 왜 이리 슬픈가. 집을 잃은 아이처럼 ..  (마지막 술집)


 나는 일곱 살 적 무얼 하며 한 해를 보냈는지 거의 떠올리지 못합니다. 하루나 이틀쯤 가까스로 한두 대목 떠올립니다. 나는 여섯 살 적이나 다섯 살 적이나 네 살 적이나 세 살 적을 거의 하루조차, 한 시간조차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런 내 넋으로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한 살일 적에 나는 한 살 나이에 내 어버이하고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 하고. 우리 아이들이 두 살이고 세 살일 때에 나는 두 살 세 살 나이에 내 어버이하고 어느 곳에서 어떠한 보금자리를 누리며 살았을까 하고.

 

 우리 집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나서 저희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적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 저희 아이들을 낳아 돌보며 무럭무럭 자라는 예쁜 모습 바라보면서 저희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모습을 되새길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먼 뒷날 되새길 저희 어버이 모습, 곧 오늘 내 모습은 어떠한 이야기 나누는 사람일까요.


.. 하고많은 길 중에 내가 걸은 노동자의 길 ..  (길)


 아이와 살아가는 숱한 어버이들이 ‘아이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더없이 예쁘며 사랑스럽다 이야기합니다. 나도 내 아이들 새근새근 잠드는 모습이 그지없이 예쁘며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이 아이들 자는 얼굴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고 눈물을 짓습니다. 아이들 살몃 감은 두 눈을 바라보며 시가 절로 튀어나옵니다. 아이들 보드라운 볼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시를 절로 노래합니다.

 

 문득, 거꾸로, 내가 이 아이들만 하던 어린 나날, 내 어버이가 나를 재우면서 내 어버이도 나를 예쁘며 사랑스럽다 여겼을까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그무렵 나는 내 어버이를 보며 나를 재우는 어버이 손길이 언제나 포근하면서 따사롭구나 하고 느꼈는지 궁금해요. 왜냐하면, 예쁘며 사랑스레 잠드는 아이들을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하면서 내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과 말길 모두 보드라우면서 따사롭게 바뀌니까요. 잠든 아이처럼, 재우는 어버이가 예쁘리라 생각해요. 잠든 아이처럼, 재우는 어버이가 사랑스럽구나 생각해요.


.. 김씨가 H빔에서 떨어져 죽고 나서야 / 나는 깜짝 놀랐다 / 고작 시급 3천 원에 목메던 그의 몸값이 / 1억이 넘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  (뒷빽)


 송경동 님 시집 《꿀잠》(삶이보이는창,2006)을 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송경동 님이 틈틈이 적바림한 글줄을 그러모은 《꿀잠》이라는 시집이 태어나기까지, 참말 시쓰기가 힘들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팍팍한 울타리와 맞서면서, 힘들게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을 고단하게 내모는 걸림돌과 부딪히면서, 참으로 힘들게 시를 썼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힘들게 쓴 시를 읽는 사람 또한 힘겹습니다. 아이들과 하루 내내 복닥이며 집안일을 하고 집살림을 꾸리는 어버이도 참으로 버겁습니다.

 

 시를 쓰기 힘든 이 나라이기 때문에, 시를 읽는 사람 또한 힘겨울밖에 없는 이 나라일까요. 시를 쓰면서 힘들게 이맛살 찡그리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슬픈 이 나라인 탓에, 시를 읽는 사람까지 뻑적지근해지는 등허리를 토닥이면서 겨우겨우 한 쪽 두 쪽 읽다가 이내 덮고는 똥기저귀를 빨고 오줌기저귀를 갈며 밥을 차리고 비질을 해야 할까요.


.. 세계는 학살을 하며 / 그게 평화라 하고 / 기생을 자유라 하고 / 굴종을 안녕이라 가르치기에 / 오늘부터는 없는 말 / 태어나지 않은 말들만 / 믿기로 했다 ..  (102쪽)


 어머니들은 하루하루 어떤 삶을 누리면서 아이들을 사랑했을까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머니들은 하루하루 어떤 꿈을 심으면서 어떤 사랑을 누릴까요.

 

 어머니를 옆지기로 둔 아버지들은 날마다 어떤 일과 놀이를 즐기면서 아이들을 마주할까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아버지들은, 어머니를 옆지기로 둔 아버지들은 날마다 어떤 빛을 가슴에 묻으면서 어떤 사랑을 서로서로 빛낼까요.

 

 남녀평등이고 여남평등이고 성평등이고를 떠나, 2010년대를 넘어서는 이즈음에도 집안일을 여자가 할 때에는 아뭇소리 없습니다. 2020년대를 곧 맞이할 텐데, 2030년대나 2040년대가 되더라도 집안일을 남자가 할 때에는 참 얄궂다는 눈길로 바라봅니다. 혼인을 해서 며느리가 되면 시댁 집안일과 제사까지 맡아야 합니다. 혼인을 해서 사위가 되면 친정마실을 하더라도 그저 손을 놓고 책상다리로 밥과 술과 고기를 받아먹기만 합니다.

 

 삶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이며 꿈이란 무엇일까요.


.. 농사는 안 허는디요, 소작 허는디요 / 소작이 농사지 뭐여 웃던 사람들도 / 소작이 무신 농사여 하던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 아낙의 얼굴에 핀 더운 열꽃 ..  (바닷가 야유회)


 노동자 길을 걸어간 송경동 님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제는 벌교하고 한참 멀디먼 서울바닥에서 노동자와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거꾸로, 서울에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노동자 길을 걷다가, 전남 보성 벌교로 흙일꾼 길을 걷는다든지, 흙일꾼하고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을 사람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두들 서울로 가고, 또 서울로 몰리며, 또 서울에서 으싸으싸 하면서 나라를 갈아엎으려 하는지 궁금해요.

 

 바깥에 볼일이 있어 전남 고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벌교읍을 지날 때면, 벌교시장 그득히 늘어선 꼬막장사 할매와 아지매를 바라보곤 합니다. 참말 사람 많고 저잣거리 넓구나 싶습니다. 벌교라 해 봤자 그리 넓지 않은 터에 넓지 않은 갯벌인데, 이 조그마한 벌교 갯벌에서 온 나라 꼬막구이 꼬막무침을 마련하는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하기는. 한국에서 거두는 쌀이 남아돈대서, 시골마을에서 ‘논을 묵히’면 나라에서 돈을 줍니다(직불보상금).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은 거의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구는 논밭으로도 ‘쌀이 남아돈다’지만 나라밖에서 새로운 곡식을 사들이고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며 자동차와 손전화를 나라밖으로 팝니다.

 

 노동자는 자동차를 구워먹느라 힘들까요. 노동자는 2012년 1월부터 단돈 1만 원이 된 숫젖소 고기를 구워먹느라 버거울까요. 이 나라 노동자들이 설이나 한가위 때처럼, 모두들 일손을 놓고 고향마을 시골로 가서 두 번 다시 서울로든 인천이로든 대구로든 부산으로든 가지 말고 흙하고 어깨동무하고 살아간다면, 파업 아닌 파업으로 온 나라 크고작은 도시를 꼼짝달싹없이 멈추도록 한다면, 군인도 경찰도 공무원도 몽땅 시골마을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텃밭과 무논하고 소꿉놀이를 하면서 온 나라 공공기관과 청와대와 언론사 모조리 멈추도록 한다면, 깊은 밤에도 서울에서 올려다보는 까만 하늘에 뭇별이 반짝반짝 빛나겠지요.

 

 별을 보기 힘드니 시를 쓰기 힘듭니다. 별을 보기 힘겨우니 시를 읽기 힘겹습니다. (4345.1.29.해.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12-01-29 22:21   좋아요 0 | URL
충격적인 사건이 아닌 다음에는 아이 때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요. 철 들기 전의 세월들은 그저 부모님의 몫으로 고스란히 묻혀져 버리는 셈이지요. 사랑의 눈으로 찰칵 찰칵 찍힌 자식들의 어린 시절 사진들은 부모님 가슴팍에 새겨져 있겠지요.
저는...드문드문 네 살 때 기억과 여섯 살 때 기억이 나요. 네 살 땐 사랑하는 내 막내동생이 죽을 뻔했구요.그래서 거짓말처럼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지요. 아무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은 날마다 무탈하고 행복하게 잘 자랐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똥 싸고 오줌 싸며 아버지가 어르고 어머니가 젖 먹이고 그 품안에서 소르르 꽃잠 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송경동 시인요, 저랑 동갑 시인인데....읽으면 가슴이 참 아파요)

파란놀 2012-01-29 22: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즐거이 살았기에 떠올리지 못하기도 하는군요.
그래도, 즐거이 살았기에 떠올릴 수 있으면 더 좋겠어요.

송경동 님이 하루하루 더 즐거이 살아가면서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그러니까, 이 나라가 참으로 아름다우며 빛나는
좋은 나라로 차근차근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요..
 
Dorchester Days (Hardcover)
Richards, Eugene / Phaidon Inc Ltd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47] 유진 리차즈(Eugene Richards), 《Dorchester days》(Phaidon,2000)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을 내 눈길로 읽고, 내 옆지기 눈길로 읽으며, 내 이웃 눈길로 읽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살아가며 아이들 눈길로 새삼스레 읽습니다. 눈을 낮추고 키를 낮추며 마음을 낮춥니다. 눈길을 넓히고 마음길을 넓히며 생각길을 넓힙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숨결을 나눕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이웃한 사람들 숨결을 헤아리고, 내 숨결을 헤아리며, 내 살붙이 숨결을 헤아립니다. 내가 사진기를 쥐었대서 아무 모습이나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내가 연필을 쥐었대서 아무 모습이나 아무렇게나 쓸 수 없습니다. 내가 찍고 싶으니까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가 쓰고프니까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찍는 사진이요,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쓰는 글입니다.

 

 내 숨결이 내 사랑입니다. 내 사랑으로 이웃들 사랑을 헤아립니다. 이웃들 사랑을 헤아리면서 이웃들 숨결을 생각합니다. 이웃들 숨결을 생각하면서 내 사진을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따숩게 맞잡을 손을 살피고, 서로서로 따숩게 어우러지는 자리에 사진기 하나 놓습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고 놀이를 즐깁니다. 서로서로 웃고 울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춤을 춥니다. 사진은 마음껏 춤을 춥니다. 사진은 다른 이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빛나는 춤사위를 떠올리며 스스럼없이 몸을 움직입니다. 다른 사람 춤사위를 흉내낼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발놀림을 따라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내 굼뜬 춤사위를 하하 웃으며 즐깁니다. 나는 내 더딘 발걸음을 킬킬 웃으며 누립니다. 부채춤이든 휴지춤이든, 왈츠이든 탱고이든, 막춤이든 칼춤이든, 어떠한 춤이든 나 스스로 땀을 흥건히 흘리며 놀리는 손짓 발짓 낯짓 궁둥짓이 어여쁩니다.

 

 유진 리차즈(Eugene Richards) 님 사진책 《Dorchester days》(Phaidon,200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유진 리차즈 님한테 ‘미국 도체스터(Dorchester)’는 어떠한 터였을까요. 미국 도체스터는 유진 리차즈 님한테 어떤 빛깔과 무늬와 결과 내음으로 스며들었을까요. 유진 리차즈 님이 담은 미국 도체스터 마을살이는 다큐멘터리일까요, 보도사진일까요, 고발일까요, 생활기록일까요. 또는, 그예 사진일까요. 미국 도체스터에서 만나거나 스치거나 어깨동무한 사람들 자취를 사진으로 적바림하는 일은 ‘들여다보기’일까요 ‘훔쳐보기’일까요. 또는 ‘네 삶을 비추며 내 삶을 비추기’일까요 ‘이웃 삶을 살피며 내 삶을 살피기’일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 네 식구는 시골살이를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두 아이와 복닥이는 나는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옆지기하고 살림을 꾸리는 나는 내 나름대로 옆지기하고 생각을 맞추어 살림을 꾸리는 하루를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사진은 돋보이지 않습니다. 도체스터는 돋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작품은 글 작품보다 돋보이지 않습니다. 뉴욕이나 도쿄나 파리이기에 한결 돋보이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사진기를 손에 쥐었으니 사진을 찍습니다. 살아가며 부지깽이를 쥐었으니 부지깽이로 하루를 그립니다. 살아가며 바늘과 실을 쥐었으니 뜨개질이나 바느질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살아가며 두 발로 흙을 디디고 섰으니 호미질을 하며 꿈을 키웁니다.

 

 

 

 사진이라서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기에 역사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로 남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로 남습니다. 그러나, 역사로 남기 앞서 삶입니다. 사회로 비추기 앞서 삶입니다. 문화로 꽃피우기 앞서 삶이에요. 예술로 피어나기 앞서 삶이랍니다.

 

 유진 리차즈 님 “도체스터 나날”은 도체스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이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이고,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내 삶이면서, 내 옆지기와 내 아이 삶입니다. 내 어버이가 살아가며 꾸는 꿈은 내 어버이 꿈이면서, 내 꿈이고 내 아이들 꿈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와 동백나무가 뿜는 맑은 숨결은 냇물에 녹아들어 송사리도 마시고 바람에 흩날리며 직박구리도 마십니다. 전라남도 고흥 유자나무와 석류나무가 뿜는 고운 숨결은 바닷물 따라 인천 갯벌로 스미고 일본 후쿠시마로도 스밉니다. 바람 따라 대구나 밀양이나 안동으로도 퍼집니다. 포항에 있는 제철소 쇳바람은 해남으로 퍼집니다. 인천에 있는 자동차공장 쇳바람은 춘천으로 퍼집니다. 음성에 있는 고추밭 내음은 여수로 퍼집니다. 상주에 있는 감나무 내음은 서울로 퍼집니. 사진책 《Dorchester days》에 깃든 하루하루 이야기는 도체스터에서 살던 유진 리차즈 님 삶과 넋과 말로 스며들다가는, 뉴욕과 런던으로 퍼지고, 파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카이로와 이스탄불을 지나다가는, 팀부와 라사 눈바람에 살짝 얼었다가 연길과 훈천에서 먼지바람을 마시고, 파주와 고양에서 또아리를 틉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내 사진이랑 이웃 할머니 사진이랑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이웃 고장 사진하고 이웃 나라 사진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고운 삶결을 따라 고운 숨결이 퍼집니다. 슬픈 몸짓을 따라 슬픈 몸짓이 퍼집니다. 고운 삶결은 고운 꿈으로 새로 피어나고, 슬픈 몸짓은 슬픈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며 새 옷을 입습니다.

 

 꿈은 꽃처럼 피었다가 집니다. 시든 꽃을 본대서 꿈이 시들지 않습니다. 피는 꽃을 본대서 꿈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시들면서 씨앗을 맺고, 씨앗을 땅에 드리우면서 새 목숨을 키웁니다. 사진 한 장 두 장 알뜰히 건사한 《Dorchester days》는, 수수하면서 빛나고 빛나면서 수수한 이야기를 작고 크게 들려줍니다. (4345.1.29.해.ㅎㄲㅅㄱ)

 

 

 

 

 

 

 

 

 

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2-01-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말이 좋아요.
녹아들고 스며들고...그렇게 어울리는게 삶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된장님처럼 사진책을 많이 보지 못했지만, 전몽각님 윤미네집 사진 좋더군요.
아니, 뭐 먼데서 찾을 필요 있겠어요?
된장님의 사진들이 다 그런 것들인데 말이죠.
사금벼리, 손이 더 야물어졌는걸요~^^

파란놀 2012-01-29 15:47   좋아요 0 | URL
몸무게도 꽤 나가서, 무릎에 누여 재우니 무릎이 떨어져 나가는 듯해요
ㅠ.ㅜ
씩씩하게 아주 잘 커요~~
 


 네 해 앞서 장만한 책을

 


 네 해 앞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장만한 책을 새로 꺼내어 읽는다. 네 해 앞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에 ‘예전에 사서 읽지 않았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집어들었다. 예전에는 예전대로 읽었을 테고, 예전에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떠올리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안 읽은 책으로 여길 만하니, 새로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한편, 예전에 읽었으면서 생각해 내지 못하는 책이라 한다면, 다시 장만해서 읽는다 하더라도 몇 해 지나면 또 잊는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네 해 앞서, 우리 집 첫째 아이는 갓난쟁이였다. 갓난쟁이를 옆지기랑 갈마들어 안고 업고 하면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누볐다. 해마다 구월 끝무렵이면 헌책방골목책잔치를 벌이니, 이 책잔치에 마실을 안 갈 수 없다.

 

 1977년에 처음 나온 책을 2008년에 새로 읽었다. 2008년에 새로 읽은 책을 2012년에 새삼스레 읽는다. 나는 앞으로 2020년에 이 책을 살그머니 떠올려 또 한 번 읽을 수 있을까. 2020년이면 첫째 아이가 열세 살이 될 텐데, 열세 살이 된 첫째 아이는 스스로 이 책을 읽으려 할까. 2030년에 첫째 아이가 스물세 살이 된다면, 그무렵에는 첫째 아이가 기쁘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오늘 내가 기쁘게 읽은 책을 먼 뒷날 아이가 기쁘게 읽으리라. 오늘 내가 그닥 반가이 여기지 않고 그저 사 놓기만 한 책을 먼 뒷날 아이가 고맙게 읽으리라. 오늘 내가 눈물겨이 읽던 책을 먼 뒷날 아이가 이게 뭐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도 하리라. (4345.1.29.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반죽 미는 어린이

 


 어머니가 아침을 차릴 때에 반죽을 하니 곁에서 같이 하겠다는 사름벼리한테, 어머니가 반죽 밀기를 맡긴다. 얇고 넓적하게 밀어야 하는데, 다섯 살 사름벼리는 아직 얇고 넓적하게 밀지 못한다. 그래도 용을 내고 기운을 내어 반죽을 민다. 여섯 살이 될 무렵에는 반듯하게 얇고 넓적하게 밀 수 있을까. (4345.1.29.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