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929) 얄궂은 말투 92 : 토씨 ‘-의’ 끼어드는 말투

 

.. 사진에 찍혀진 것을 두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것이 순수 사진인지 다큐멘터리 사진인지, 카메라는 뭘 썼는지, 이런 논의들을 그는 철저히 배제했다 ..  《박태희-사진과 책》(안목,2011) 168쪽

 

 “찍혀진 것”은 “찍혀진 모습”으로 다듬고, ‘의도(意圖)’는 ‘뜻’이나 ‘생각’으로 다듬습니다. “이런 논의(論議)”는 “이런 말”이나 “이런 얘기”로 손질합니다. “철저(徹底)히 배제(排除)했다”는 “모두 털어냈다”나 “모조리 거슬렀다”나 “하나도 살피지 않았다”나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나 “하나같이 따지지 않았다”로 손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 작가 의도는 무엇인지
→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는지
 …

 

 글쓴이는 글쓴이 생각을 한자말로 밝힐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작가 의도는 무엇인지”나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는지”처럼 적을 수 있어요. “작가로서 의도가 무엇인지”나 “작가는 어떤 의도였는지”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한자말 ‘의도’를 덜고 “작가 생각은 무엇이었는지”나 “작가는 무엇을 뜻했는지”처럼 적을 수 있어요. 뜻이나 생각이나 넋이 어떠한가를 알맞게 드러내면 됩니다.

 

 국어사전에서 한자말 ‘의도’를 찾아봅니다. 뜻풀이를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 또는 무엇을 하려고 꾀함. ‘본뜻’으로 순화.”라 적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 ‘생각’이나 ‘꾀하다’를 한자말 ‘意圖’로 가리키는 셈입니다.

 

 처음부터 ‘생각’이나 ‘꾀하다’ 같은 낱말을 쓴다면 가장 좋으리라 봅니다. 굳이 ‘의도’ 같은 낱말을 쓸 일은 없을 텐데, 둘레에서 이러한 한자말을 익히 쓴다면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거나 길들기 마련이에요. 내 말투는 나 스스로 가다듬지만,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내 살붙이와 내 이웃과 내 동무 말투를 들으며 익히곤 합니다. 내가 읽는 책에 적힌 글투를 읽으며 내 글투로 삼곤 합니다.

 

 작가는 무엇을 뜻했는지
 작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작가는 어떤 생각이었는지
 작가는 무슨 뜻이었는지
 …

 

 좋은 넋으로 좋은 삶을 일구려 한다면, 내가 주고받을 말마디는 좋은 느낌과 마음이 곱게 배어듭니다. 토씨 ‘-의’를 붙인대서 좋은 느낌과 마음이 안 배어들지는 않습니다. 빈틈없이 올바로 말을 한달지라도 알맹이가 없다면 부질없거든요. 어떤 넋이요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좋은 터에 좋은 집을 마련해서 좋은 사람들과 살아가고픈 꿈을 꾼다면, 내가 쓰고 읽을 글은 좋은 꿈과 사랑이 살포시 묻어납니다. 토씨 ‘-의’를 안 쓸 줄 알기에 더 부푼 꿈을 싣는 글을 쓴다거나 더 따스한 사랑을 담는 글을 쓰지는 않겠지요. 빛나는 글이냐 수수한 글이냐에 앞서 나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는 손길로 가다듬는 글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에 찍힌 모습을 두고 무얼 꾀했는지
 사진에 찍힌 모습이 무슨 뜻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사진으로 찍었는지

 

 보기글처럼 “(누구)의 (무엇)은 어떠한가”처럼 글을 쓰면, ‘무엇’ 자리에는 으레 한자말이 깃듭니다. 말투부터 우리 말투가 아니니, 낱말을 우리 낱말로 넣기는 쉽지 않아요. 오래도록 버릇처럼 굳은 말투이거든요.

 

 “아버지의 생각은 어떤데요?”는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아버지 생각은 어떤데요?”나 “아버지는 어떤 생각인데요?”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나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가 우리 말투입니다. 낱말을 놓는 자리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은/-는/-이/-가’ 토씨를 넣어야 할 자리에 ‘-의’를 넣기에 뒷자리 토씨도 흔들립니다. 한겨레말에서 임자토씨는 안 쓰기도 하기에 “아버지 생각”처럼 말을 하고 글을 써요. “아버지 생각”처럼 적으면 “아버지가 품는 생각”과 “아버지를 그리는 생각” 두 가지를 나타내는데, 어느 뜻으로 썼는가는 말흐름이나 글흐름으로 헤아립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한국말을 옳게 물려주면 좋겠어요. 마을에서 어른은 어린이한테 한국말을 옳게 들려주면 기쁘겠어요.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한테 한국말을 옳게 가르치면 고맙겠어요. (4345.2.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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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두 빚는 어린이

 


 첫째 아이가 처음으로 만두를 함께 빚는다. 어머니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본 다음 만두겉살에 속을 담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 어머니는 아이더러 쪼물딱쪼물딱 만지며 놀라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미는 반죽으로는 만두를 빚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아이 손놀림으로는 만두겉살을 마련하거나 속을 겉살에 앉히는 일은 만만하지 않으리라. 쪼물딱거리면서 차츰 손에 익겠지. 머잖아 예쁘게 한 알 빚겠지. (4345.2.17.쇠.ㅎㄲㅅㄱ)

 

 

(사진 드디어 올라갑니다 ㅠ.ㅜ 열 시간쯤 기다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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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2-17 18:17   좋아요 0 | URL
아 수제만두국이 먹고프네요
얼마나 재미났을까요

파란놀 2012-02-17 18:52   좋아요 0 | URL
앞으로 식구들이 다 느긋하고 날이 더 따스하면
한결 재미나게 빚으며 놀리라 생각해요~
 


 손바닥 글쓰기

 


 너무 힘들어 아이보다 먼저 잠자리에 드러누운 날,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불러 아버지 손 좀 만져 주렴, 아버지 어깨 좀 주물러 주렴,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어머니 주무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그대로 아버지 어깨를 주무릅니다. 아이 작은 손이 어깨를 쪼물딱쪼물딱 만집니다. 어른이 어깨를 주무르듯 아프며 쑤시는 자리가 스르르 풀린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만지는 손길로는 다른 사랑과 이야기가 내 어깨를 타고 스며듭니다.

 

 나는 내 어머니를 얼마나 자주 주물러 주었을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 어린 날 내가 어머니 손을 쪼물딱쪼물딱 만졌을 때에 어머니는 나한테서 어떤 기운을 받으셨을까 어림해 봅니다. 나는 두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지만, 내 어머니가 우리 아이만 하던 아이였을 때에, 어머니 당신도 당신 어머니 손을 쪼물딱쪼물딱 주물렀겠지요.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도 당신 어머니 손을 조물조물 주물렀겠지요. (4345.2.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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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동시 따 먹기
김미혜 지음, 김제곤 엮음, 장경혜 그림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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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는 모두 시인입니다
 [어린이책 읽는 삶 16] 김미혜, 《신나는 동시 따먹기》(창비,2011)

 


- 책이름 : 신나는 동시 따먹기
- 글 : 김미혜
- 그림 : 장경혜
- 펴낸곳 : 창비 (2011.6.20.)
- 책값 : 12000원

 


 온삶을 어린이를 생각하며 지낸 이오덕 님이 내놓은 책 가운데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가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초등학교 어린이와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당신이 하늘에서 받은 선물처럼 받아들이며 살았고, 아이들이 스스로 ‘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는 이 같은 기나긴 삶을 바탕으로 쓴 책이에요.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에 실린 아이들 글을 읽는다든지, 《일하는 아이들》이나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에 실린 아이들 글을 읽으면, 이 글은 모두 ‘시’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떠한 시 이론과 비평과 해설을 듣거나 배우거나 익히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저마다 제 고향마을에서 어버이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돌이키며 글을 쓰고, 이렇게 쓴 글은 모두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제 막 국민학교에서 한글을 뗀 아이들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거의 다 틀리는 비뚤비뚤한 글을 씁니다. 3학년이나 4학년쯤 되면 제법 가지런히 글을 씁니다. 5학년이나 6학년쯤 되면 아이 스스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제법 잘 맞춥니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억지로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 스스로 배우기 마련이니까요.

 

 아이들한테 영어나 한자를 굳이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마땅히 써야 하는 영어나 한자라면, 어른들부터 여느 삶 여느 자리에서 영어나 한자를 쓸 테고, 여느 어른이 여느 자리에서 쓰는 영어와 한자는 아이들 여느 삶으로 시나브로 녹아들어요.

 

 가르침도 배움도 저절로 녹아들 때에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따로 교육과정을 짜거나 교과서를 읽히거나 시험을 치러야 가르침이자 배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재와 참고서를 외우도록 시켜야 아이들이 똑똑해지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마다 디디는 땅을 온몸으로 옳게 부대끼며 착하게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튼튼한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아이들은 제 옷과 밥과 집이 모두 흙에서 비롯하는 줄 깨닫고, 흙은 햇살과 비와 바람을 먹으며 기름지는 줄 깨달을 때에 바야흐로 씩씩한 일꾼으로 거듭납니다.

 

 동시를 쓴다는 김미혜 님이 엮은 《신나는 동시 따먹기》(창비,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김미혜 님은 머리말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시의 맛을 알게 되고, 시를 어떻게 감상하는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밝힙니다.

 

 나는 이 머리말을 읽다가, 이 머리말부터 이 책은 ‘시를 읽는 맛’을 지우고 마는 슬픈 책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떠한 ‘동시 읽기 길잡이책’도 동시이든 시이든 읽으며 누리는 깊고 달콤하며 즐거운 맛을 느끼도록 돕지 않아요. 시를 읽어야 시맛을 느껴요. ‘시 해설’과 ‘시 설명’을 읽는다 해서 시맛을 느끼지 않아요.

 

 동시를 더 재미나게 읽는 길은 없습니다. 동시를 더 재미없게 읽는 길도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동시 읽기 길잡이책’을 낸다면, 이러한 책은 아이나 어른이나 동시를 읽는 맛을 못 느끼거나 엉뚱하게 생각하도록 잘못 이끄는구나 싶어요.


.. 고깔제비꽃 알록제비꽃 태백제비꽃 왜제비꽃 / 제비꽃 이름 무어 그리 복잡할까 ..  (김미혜-그냥 제비꽃)


 《신나는 동시 따먹기》 첫머리에는 엮은이 김미혜 님 동시를 넣습니다. 엮은이 김미혜 님은 〈그냥 제비꽃〉이라는 동시에서 “제비꽃 이름 무어 그리 복잡할까” 하고 말하는데,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이런 ‘어른 생각’을 들려주는 일은 아이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궁금합니다. 이런 어른 생각은 아이들한테 어떤 사랑을 불러일으킬까 궁금합니다.

 

 제비꽃 이름이 뭐가 어지러운가요? 똑같은 제비꽃은 하나도 없으니 다 다른 이름이 붙어요. 똑같은 어린이는 하나도 없기에, 어린이마다 이름이 모두 달라요. 똑같은 어른 또한 아무도 없으니, 어른마다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아이를 앞에 두고 “응, 넌 그냥 아이야.”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앞에 두고 “응, 당신은 그냥 어른이야.”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다 보니, 김미혜 님은 동시 끝에 붙이는 풀이글에 더 슬픈 이야기를 달고야 맙니다.


.. 자, 그럼 나무도감을 보고 마음에 드는 나무 이름을 외워 볼까? 10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 적어 보자 ..  (25쪽)


 도감을 읽으며 나무 이름을 외우는 일은 나무를 얼마나 잘 알거나 나무와 얼마나 살가이 사귀는 일이 될는지요. 출석부를 보고 아이들 이름을 외우면 아이들을 잘 아는 교사가 되는가요. 전화번호부를 펼쳐 사람들 이름을 외우면 내 이웃들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 될까요.

 

 이름을 모른다 해서 나쁠 일이 없습니다. 제비꽃을 바라보며 이름을 몰라 “참 예쁜 꽃이로구나.” 할 수 있어요. 내 가슴속으로 이 어여쁜 꽃을 바라볼 수 있으면 돼요. 내 가슴으로 느끼는 대로 ‘내가 사랑스레 느낀 결 그대로 내 나름대로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시는 이렇게 태어나요. 내 가슴속에서 사랑이 샘솟을 때에 시가 태어나요. 나는 제비꽃이라는 꽃을 바라보며 ‘제비꽃’이라는 이름을 모르기에 ‘나비꽃’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나비꽃이라는 시를 내 가슴으로 쓸 수 있어요. ‘무지개꽃’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시를 쓸 수 있겠지요. ‘내 동생 손톱처럼 앙증맞은 꽃’이라고 말을 걸며 시를 쓸 수 있어요.

 

 밤나무 참나무 벚나무 뽕나무 하고 이름을 외운들 무슨 나무 사랑이 되고 어떤 시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막상 뽕나무 줄기를 쓰다듬어 보지 않고 이름만 달달 외운다면, 뽕나무 잎사귀와 꽃잎을 어루만지지 않고 이름만 줄줄 꿴다면, 이러한 지식으로 어떤 시를 쓰는가요. 이렇게 지식만 쌓은 머리로 시를 어떻게 즐기거나 맛보는가요.


.. 좋은 시를 흉내내 ‘모방 시’를 쓰는 것은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꼭 필요한 훈련이란다. 주위를 살펴보고 어떤 내용을 담을지 생각해 본 다음 〈개구쟁이 산복이〉와 비슷한 흐름으로 시를 써 보자 ..  (29쪽)


 김미혜 님은 아이들더러 ‘시 흉내내기’를 하라고 시킵니다.

 

 아이들은 모두 시인인데, 시인더러 시를 흉내내라고 시킵니다.

 

 어린이는 누구나 시인이요, 어린이로 살며 어른이 된 사람들 누구나 시인이기에, 굳이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다니지 않아도 시를 쓸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쓴 시를 베끼듯 흉내내라니요.

 

 다른 사람이 쓴 시는 내 가슴으로 읽으며 사랑을 느껴야 할 뿐입니다. 내가 쓰려는 시에는 내 온 사랑을 담아야 할 뿐입니다.

 

 베껴쓰기 숙제를 내듯 흉내내기 시를 쓰도록 하는 어른이라면, 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시를 이야기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시를 쓸 수도 없습니다. 베끼고 흉내내면서 어떤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흉내내기를 한다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흉내내기가 아니에요. 어른이 바라보기에는 ‘흉내’이지만, 아이들로서는 ‘온몸을 움직여 삶을 다스리는 일’이에요.


.. 청소도 숙제도 미루고 공기놀이에 푹 빠져 버렸네. 놀이, 게임, 영화, 책 ……. 무언가에 몰입하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지. 공기놀이가 끝나면 몇 시쯤 될까? 어쩌다 한 번씩은 할 일 다 미루고 이렇게 마냥 놀면 참 좋을 거야 ..  (31쪽)


 문득 생각합니다. 《신나는 동시 따먹기》라고 하는 책은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동시를 배울 때에 ‘초등학교 논술 공부 더 잘 하라’는 뜻에서 엮은 책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점수따기 하는 아이들이 시험성적 더 잘 거두도록 일찍부터 이끄는 책이 아니겠느냐고 느낍니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야 안 해도 되고 미루어도 됩니다. 그러나, 밥을 안 먹거나 집 안팎을 쓸고닦으며 치우거나 몸을 씻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안 하거나 미룰 수 없습니다. 빨래를 안 해도 될까요. 설거지를 안 해도 되나요.

 

 우리가 먹는 밥은 어디에서 나지요. 공장에서 만든다는 과자나 햄 같은 가공식품이라 하더라도 이 가공식품 밑감은 어디에서 얻나요. 쌀이 없어도 쌀과자가 태어나고, 밀이 없어도 빵이 태어나는가요. 감자가 없어도 포테이토칩을 만들고, 양파가 없어도 양파깡을 만드는가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없으면 가공식품조차 없지 않나요. 시골에서 소와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없다면, 소와 돼지한테 먹을 밥이 되는 곡식을 일구는 사람들이 없다면, 어떠한 밥을 도시사람이 먹을 수 있나요.


.. 시인이 도시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만큼 농촌의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야. 우리가 쌀과 채소를 많이 먹으면 농촌 사람들도 힘이 날 거야. 엄마 아빠와 함께 농촌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많이 들어간 식단을 짜 보자 ..  (103쪽)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눈으로는 “우리가 쌀과 채소를 많이 먹으면 농촌 사람들도 힘이 날 거야” 하고 느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참말 시골사람이 힘이 날 만한가 모르겠습니다. 그저 쌀을 사다 먹으면 되고, 푸성귀를 사다 먹으면 일이 다 풀리는가 모르겠습니다. 논밭을 가로지르는 기찻길과 고속도로를 내고, 온 멧자락에 구멍을 내며 고속철도를 놓는 마당에, 시골사람이 두 다리 뻗을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4대강 삽질 하는 데에 퍼붓는 어마어마한 돈은 시골자락을 얼마나 아름다이 돌보는 일이 되나요. 시골마을이 왜 힘이 드는가요. 사람들은 왜 시골을 떠나 도시로만 몰리나요. 왜 아이들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도시로 빠져나가나요. 아이들은 왜 대학교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나요.

 

 굳이 아이들한테 자유무역협정이나 물질문명을 낱낱이 이야기해야 하지는 않다 할는지 모르나, 아이들이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올바로 깨달으며 생각하도록 돕는 어버이요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 시인의 눈길이 복숭아 장수 아저씨에게로 향했어. 복숭아 장수 아저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앵앵거리는 파리일까, 후끈한 열기일까? 아니면 쏟아지는 졸음일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시 쓰기의 첫걸음이란다 ..  (71쪽)


 시를 쓰는 사람은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둘레를 잘 살피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때에 시를 쓰는 넋이 아름다이 거듭납니다. 삶을 착하고 참다이 일굴 때에 시를 읽는 눈이 곱게 태어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지 않는대서 시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내 가슴을 활짝 여는 착한 매무새일 때에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둘레를 두리번두리번 살핀대서 시로 쓸 만한 이야기를 얻지 않습니다.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내 하루를 올바로 가꿀 때에 시나브로 시가 샘솟습니다.

 

 이리하여, 이오덕 님이 이야기하는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하는 말을 가슴으로 아로새길 수 있어요. 어린이는 날마다 흙을 밟고 신나게 놀면서 삶을 즐기니까 연필 한 자루를 쥐면 시를 술술 씁니다. 어린이는 날마다 햇살을 먹으며 마음껏 놀고 제 어버이하고 논일 밭일 집일 함께 하니까, 구슬땀 흘리는 손으로 붓을 쥐어 그림을 슥슥 그립니다.

 

 아이들한테는 시를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어른들부터 스스로 삶을 착하고 밝고 예쁘게 꾸리는 몸짓일 때에, 아이들은 제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삶을 배웁니다. 삶을 배우는 아이들은 시를 배우는 셈입니다. 삶을 느끼고 사랑을 깨닫는 아이들은 시를 느끼고 시를 깨닫는 아이들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이들한테는 ‘삶’이라고 하는 시집을 선물하면 넉넉합니다. 아이들한테는 ‘사랑’이라는 노래책을 선물하면 흐뭇합니다. (4345.2.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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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 - 사진기자 고명진의 포토에세이
고명진 지음, 조천우.최진 글.정리 / 한국방송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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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까이에서 보고 멀리서 바라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77] 고명진,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한국방송출판,2010)

 


 깊은 밤에도 찻길에는 등불이 밝습니다. 오가는 자동차 없어도 밤길이 훤합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깊은 시골마을에서는 꿈꿀 수 없는 모습이요, 딱히 바라지 않는 모습입니다. 네 식구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뵈러 가는 길에 지나가는 일산 새도시는 밤 열 시가 넘어도 번쩍번쩍 밝습니다.

 

 새로 올려세운 아파트에는 아직 불빛이 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잖아 새 아파트에도 층마다 불빛이 훤하겠지요. 이 많은 아파트에 등불을 밝히자면 서울하고 멀찍멀찍 떨어진 영광과 고리와 울진뿐 아니라 또다른 새 시골마을 깊숙하고 조용하며 깨끗한 터전을 싹 밀어내어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하겠지요. 원자력발전소는 되도록 서울이랑 경기도하고 멀리멀리 떨어진 데에 지으려 하니까요.

 

 원자력발전소를 서울이나 경기도 같은 데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데에 짓는 까닭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지기라도 하면 서울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영광이나 고리나 울진 같은 데는 어쩌지요? 이곳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소 방사능을 늘 쐬어야 하는데 어쩌지요? 원자력발전소가 터지기라도 하면 이곳 사람들은 어쩌지요? 앞으로 이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굴레를 떠안으며 살아야 하지요?

 

 시골마을 사람들이 고향 터전을 깨끗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이 지키고 싶어 원자력발전소를 손사래치는 손길을 가리켜 적잖은 지식인과 언론매체는 ‘님비’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시골마을 사람들은 따로 발전소가 없어도 돼요. 전기를 아예 안 쓰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텔레비전이야 안 보면 되고, 냉장고야 안 쓰면 되며, 빨래기계 없이 손으로 빨래하면 되니까요. 전기를 펑펑 써야 하는 데는 도시입니다. 시골마을은 해가 질 무렵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니, 굳이 밤길을 등불로 밝히지 않아도 돼요. 자동차 넘쳐나는 도시에 전기로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아파트 가득한 도시는 화력발전소이든 원자력발전소이든 몇 군데씩 있어야 해요. ‘님비’라는 이야기로 무언가를 꾸짖으려면 시골마을 사람들 ‘고향 지키기’ 아닌 도시 사람들 ‘위해시설 도시에 들이지 않기’를 꾸짖어야 올발라요.

 

 

 

 사진기자로 한삶을 보낸 고명진 님이 빚은 사진책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한국방송출판,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 고명진 님 사진책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에 나오는 ‘집회 시위 현장’은 모두 서울 모습입니다. 부산 모습마저 한두 차례 나올 동 말 동합니다. 인천이나 부천이나 대전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 역사를 밝힌다는 민주주의 촛불이 선 곳은 오직 서울뿐이로구나 싶으면서, 그러면, 현대 역사를 어둡게 깎아내리거나 짓밟은 곳 또한 오직 서울뿐 아닌가 싶어요.

 

 “연행되어 끌려간 경찰서에서 화염병을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맞닥뜨리는 상황이니, 학생들이 우리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촬영하다가 시위대에 둘러싸여 신분증을 뺏긴 적도 많았고, 카메라와 필름을 뺏긴 채 폭행을 당한 적도 많았다. 나는 경찰도 아니고 권력의 앞잡이도 아니라는 각서를 쓰기도 했다(23쪽).” 하는 이야기를 글로 읽고 사진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슬픕니다. 왜 이렇게 서로서로 싸워야 하나요. 왜 한 하늘 한 땅을 누리는 이웃이자 동무이자 살붙이일 사람들이 한쪽은 대학생이 되고 한쪽은 전투경찰이 되어 욕지꺼리 내뱉으며 죽이자 살리자 싸워야 하나요. 모두들 서울로 몰리지 말고, 모두들 호젓한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서 흙을 일구며 살아간다면 싸울 일이 없지 않을까요. 서울에는 정치꾼만 남기고 경찰이든 대학생이든 몽땅 서울을 비우고 시골로 가서 흙을 일군다면, 싸울 일이란 아예 없지 않을까요. 전투경찰이든 경호원이든 대통령을 지키지 말고 고향마을을 지킨다면, 부정부패라느니 독재정권이라느니 설 일이 없지 않을까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철책을 지키지 말고 고향마을에서 쟁기와 낫을 들고 들판에서 땀방울 흘린다면, 전쟁이라느니 군사독재라느니 싹틀 틈조차 없지 않을까요.

 

 아이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살아가는 경기도 일산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 이곳은 도시 한복판이 아닌 논밭 있는 일산 변두리인데, 이곳에서조차 별을 보기란 왜 이리 힘들지? 왜 달빛조차 그닥 안 밝지?

 

 

 

 별이 없어도 될 도시인가요? 서울에는 별이 없어도 되나요? 달이 없어도 괜찮은 도시인가요? 부산에는 달이 없어도 되나요?

 

 깊디깊은 밤에도 가게마다 불빛을 환하게 비춥니다. 우리 시골집이며 이웃 시골마을이며 밤이 되면 아주 깜깜해요. 등불조차 띄엄띄엄 아주 드뭅니다. 불을 켠 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면내 가게도 일찍 닫고 읍내 가게 또한 일찍 닫아요. 그래, 전기를 써야 하는 데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이니까, 서울 종로와 명동과 압구정동과 삼성동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지요. 이곳에 송전탑을 우람하게 세워야지요. 이곳에 핵폐기물처리장을 짓고, 이곳에 고압변전소를 으리으리하게 놓아야지요.

 

 “이 사진을 찍은 1987년 그 해, 나는 이 사진과 부산에서 찍은 다른 사진 한 장을 ‘한국 보도 사진전’에 냈다. 두 사진 모두 나란히 탈락했다. 똑같은 사진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보도 사진전’에 냈다. 이 사진은 뉴스 부문 3위에 입상했고, 다른 사진은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참 재미있는 일이지 않은가(47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한국 사진밭이나 문화밭이나 예술밭이나 언론밭은 예나 이제나 더없이 슬프구나 싶습니다. 왜 이렇게 슬픈 나라에서 슬픈 굴레를 뒤집어쓰며 살아야 하나 안타깝습니다.

 

 풀이 자랄 틈바구니 없고 나무가 가지 뻗을 터 모자란 도시입니다. 자동차 씽씽 달리는 찻길 나무들은 가지를 홀가분하게 뻗지 못합니다. 뎅겅뎅겅 잘립니다. 전깃줄을 건드린다며, 건물 창문을 가린다며, 나무는 줄기가 뭉텅뭉텅 잘려야 합니다.

 

 자연스러움하고는 동떨어진 도시라니까 어쩔 수 없나요. 그러면, 나뭇가지와 나뭇줄기 싹둑 베는 도시에서 사람들 삶은 어떤 모습이지요? 사람들 삶 또한 싹둑 잘리는 곳이 도시 아닌가요?

 

 이 도시에서 무슨 꿈을 꿀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랑이 싹트지 못하는 도시에서 미움만 싹트지 않나 궁금합니다. 어깨동무를 하기 어려운 도시에서는 이렇게, 슬픈 시위와 집회를 열지 않고서는 아픈 사람들 목소리를 내놓지 못하는가 싶어 눈물겹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내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어머니들도 많았다. 내 아들은 감옥에 갈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고, 내 착한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이다(73쪽).”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착한 아들이 감옥에 가야 할 까닭이 없겠지요. 민주주의를 찾겠다고 하는데 붙잡혀야 할 까닭이 없겠지요. 좋은 나라 아름다운 꿈을 외치겠다는데 전투경찰이 달려들어 사과탄을 깨뜨리고 몽둥이로 두들겨패야 할 까닭이 없겠지요.

 

 고명진 님은 “보도사진은 신문에 나지 않은 이상, 사진 시체가 되어 책상 위를 뒹구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당장 보도가 안 된다고 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진기자가 가장 피해야 할 생각이다(17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신문에 나지 않으면 보도사진으로 빛을 못 보는 셈이라 할 텐데, 신문이란 무슨 말을 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루는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나라 신문매체에 실려야 돋보이는 보도사진이라 할 만한지, 이 나라 신문매체라면 굳이 안 실려도 좋을 보도사진이 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구태여 신문매체 자리를 따지기보다, 스스로 사진책을 엮고 스스로 1인언론을 마련하거나 스스로 마을소식지를 마련해서 보도사진을 띄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과 같은 흐름이라면, 애써 중앙일간지 틀을 따지지 말고, 인터넷 작은 방으로도 보도사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문에 실려 사람들이 많이 보고 많이 알아줄 때에 보도사진답게 빛이 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사진이기 때문에 보도사진 이름이 붙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삶을 밝히고 사람을 아끼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 보도사진 이름이 걸맞으리라 느껴요.

 

 사건과 사고를 찍는다면 ‘사건 사진’과 ‘사고 사진’이에요. 시위와 집회를 찍는다면 ‘시위 사진’과 ‘집회 사진’이겠지요. 이들 사건 사진이 사건 사진으로 안 그치고 보도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사건을 다루는 틀’을 넘어서는 다른 삶·사람·사랑 이야기가 깃들어야 해요. 우리 가슴속에서 피어날 꿈과 믿음과 웃음과 눈물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해요. 신문사진이기에 보도사진이 아니며, 보도사진이기에 신문사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진을 배우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후미진 골목 가장 발길이 뜸한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보라고 권한다(218쪽).” 하는 말마디를 곱씹습니다. 사진기자 한삶을 누린 고명진 님이 들려줄 가장 아름다운 말마디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참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 또한 내가 사랑할 터를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 터에서 두 발 씩씩하게 내딛으며 하루를 즐기자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내 이야기가 태어나고, 내 이야기가 태어나는 곳에서 내 사진이 태어나거든요. 내 삶과 동떨어진 데에서는 내 이야기가 태어나지 못하고, 내 이야기가 태어나지 못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값진 장비를 갖추어도 내 사진이 태어나도록 이끌지 못해요. 나는 내 온 사랑을 쏟는 땀방울과 눈물방울로 사진을 찍습니다. 처음부터 보도사진이 되라며 찍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예술사진이 되라 할 수 없고, 처음부터 인물사진이나 패션사진이나 다큐사진이 되라 할 수 없어요.

 

 언제나 맨 처음은 삶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랑입니다. 삶과 사람과 사랑을 얼싸안는 자리에서 차근차근 글이 태어나고 그림이 태어나며 사진이 태어납니다. 삶과 사람과 사랑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바야흐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저마다 다른 옷을 입는 꿈이 피어납니다. 사진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4345.2.16.나무.ㅎㄲㅅㄱ)


― 다시 쓰는 그날 그 거리 (고명진 글·사진,한국방송출판,20105.1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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