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운 상말
 606 : 오만방자


염라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는다더니, 과연 오만방자하군요
《주호민-신과 함께 (이승편 上)》(애니북스,2011) 155쪽

 

  “염라대왕의 총애(寵愛)를 듬뿍 받는다더니”는 “염라대왕한테서 사랑을 듬뿍 받는다더니”나 “염라대왕이 더없이 귀여워하고 아낀다더니”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과연(果然)’은 ‘참’이나 ‘참말로’나 ‘아주’나 ‘매우’로 다듬어 줍니다.


   사람들은 ‘오만방자’라는 꼴로 적잖이 생각을 나타내지만, 막상 이 낱말은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따로 네 글자 한자말이 아닙니다. ‘오만’이랑 ‘방자’를 더한 낱말입니다. 먼저, ‘오만(傲慢)’은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을 뜻합니다. ‘방자(放恣)’는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를 뜻합니다. 곧, 오만이든 방자이든 ‘건방지다’는 소리입니다. 주제넘는다는 소리요, 젠체하는 꼴입니다.

 

 과연 오만방자하군요
→ 참 건방지군요
→ 참말 버릇이 없군요
→ 매우 버르장머리없군요
→ 이것 참 콧대가 높군요
→ 듣던 대로 잘난 척이군요
 …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건방지다’ 뜻을 살펴보면 “젠체하며 지나치게 주제넘다”라 나오고, ‘주제넘다’ 뜻을 찾아보면 “말이나 행동이 건방져 분수에 지나친 데가 있다”라 나옵니다. 두 낱말이 어떻게 다른가 풀이하지 않아요. ‘건방지다 = 주제넘다’로 풀이하고, ‘주제넘다 = 건방지다’로 풀이해요. 오락가락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저래 엉망풀이예요.


  어쩌면, 국어사전 엮는 국어학자부터 한국말을 옳게 살피지 못하니, 여느 자리 여느 사람까지 한국말을 살뜰히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사람부터 한국글을 옳게 쓰지 않으니, 국어사전 엮는 국어학자마저 한국글을 엉터리로 쓴다 할 수 있어요.


  주제넘은 소리가 되겠습니다만, 한국땅 어른들은 한국땅 아이들한테 말다운 말을 못 가르치거나 안 보여주는구나 싶어요. 한국땅 지식인들은 한국말을 올바로 쓸 줄 모를 뿐더러, 슬기롭게 빛내지 않는구나 싶어요. 이 땅에서 이 나라 사람들이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 말꽃을 피우고 삶꽃을 나누도록 이끄는 길을 저마다 깨닫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는구나 싶어요. (4345.3.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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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한테서 사랑을 듬뿍 받는다더니, 듣던 대로 버릇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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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타이 도쿄 - 핸드폰으로 담아 낸 도쿄, 그 일상의 세포
안수연 지음 / 대숲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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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없다
 [찾아 읽는 사진책 86] 안수연, 《케이타이 도쿄》(대숲바람,2007)

 


  새봄을 맞이하며 날마다 새로 피어나는 꽃을 봅니다. 봄까지꽃을 보고, 별꽃을 봅니다. 매화꽃을 보고 광대나물을 봅니다. 나는 누가 이 꽃들한테 이런 이름 저런 이름을 붙였는지 잘 모릅니다. 풀꽃도감을 살펴보면서 이름을 헤아리고, 풀꽃 이름과 사진을 나란히 붙인 책을 읽으며 이름을 살핍니다. 어머니나 둘레 어른들이 가리키는 이름을 들으며 이름을 곱씹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대로 내가 바라보는 느낌을 떠올리며 이름을 가늠해 봅니다.


  우리 마을에서 우리 식구가 맨 처음 만난 봄꽃은 ‘봄까지꽃’입니다. 나는 이 꽃을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었고, 나중에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왜 ‘봄까치꽃’이라 일컬을까 궁금해서 말밑을 찾아보는데, ‘-치-’라 적은 대목은 잘못이고 ‘-지-’로 적어야 올바르다 합니다. ‘봄까지꽃’이 올바르게 적는 이름이라 해요. 따뜻한 마을에서는 늦겨울부터 이른봄 사이에 피고 진대서 ‘봄까지꽃’이라 이름을 붙였다더군요.


  그렇지만, 잘못 붙었다는 이름 ‘봄까치꽃’이 훨씬 널리 알려진다고 해요. 아마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도 이와 마찬가지일 테지요. 일본 풀꽃학자가 이 이름을 붙여 그만 일제강점기에 이 이름이 들어왔다던데, 이 대목까지 살필 줄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나도 이냥저냥 이런 이름 저런 이름 깊이 살피지 않으며 쓰지 않았겠느냐 생각해요.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풀이름 꽃이름 나무이름 어떻게 알려줄까 하고 생각하며 찾아보는 이즈음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옳게 살피고 제대로 생각하며 바르게 살아갈 때에 아이들한테 옳은 이름 좋은 생각 바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나는 나대로 ‘봄까지꽃’한테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대로 붙인 새 이름은 내 아이한테 이어지고, 내 아이한테 이어진 이름은 내 아이가 낳을 아이한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찬찬히 이어지는 이름이 되면, 이 이름은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마을에서 따로 일컫는 이름으로 뿌리내려요. 별꽃도, 매화꽃도, 광대나물도 그래요. 나는 별꽃을 바라보며 참 작은 별 같구나 생각했는데, 참말 이름이 별꽃이었습니다. 매화꽃은, 글쎄, 매화라 하니 매화라 말하기는 했는데, 이 꽃을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릴 만할까 하고 더 생각하면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요. 광대나물도 그렇고요.


  손전화에 딸린 사진 찍는 기능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안수연 님이 내놓은 《케이타이 도쿄》(대숲바람,200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손전화 기계는 손전화 기계이지 사진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손전화 기계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화질이나 빛느낌이나 파일크기 모두 여느 사진 기계하고 대면 아무것 아니거나 초라하다 할 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손전화 기계 또한 ‘사진기 구실’을 하고, 손전화로도 얼마든지 ‘사진 이야기’를 빚을 만해요.


  원고지에 써야만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않아요. 광고종이 뒤켠에 글을 써도 시가 되고 소설이 되며 수필이 돼요. 붓에 물감을 묻혀 종이에 그려야 그림이 되지 않아요. 모래밭에서 나뭇가지로 그려도 그림이 돼요. 오래 남아야 그림이고, 밀물에 쓸려 사라지면 그림이 아니란 법은 없어요.


  내 마음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하늘에 대고 손가락으로 그릴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눈망울에 그릴 수 있어요.


  사진이란 내 삶이 되고, 내 사랑이 되며, 내 이야기가 됩니다. 내 삶을 빛내는 길을 찾을 때에 사진이고, 내 사랑을 나누는 꿈이 되면 사진이요, 내 이야기를 도란도란 주고받는 자리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렇게 몰래 찍으며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 순간이 내게 준 울림들이 알 수 없는 온기로 남아 케이타이를 쥔 손이 약간은 따뜻해져 왔다(14쪽).”고 하듯, 스스로 따뜻한 기운을 느끼거나 나눌 때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 흐름과 섞임의 조화가 묘한 울림을 준다. 어느 장소인들, 당신이 발 딛고 살고 있는 곳이라면 그런 울림이 없으랴만(91쪽).” 하고 읊듯, 내가 살아가는 어디에서라도 사진을 빚고, 사진을 일구며, 사진을 펼칩니다. 서울에 가야 사진을 배우지 않고, 도쿄에 갔기에 사진을 배우지 않으며, 한국땅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기에 사진을 못 배우지 않아요.


  “도쿄의 저녁 시간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그들의 생활 풍경이 유난히 푸른빛 저녁 시간과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98쪽).”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좋아하는 삶일 때에 좋아하는 손길로 좋아하는 사진을 빛냅니다. 사랑하는 삶일 때에 사랑하는 눈길로 사랑하는 사진을 읽습니다. 내 매무새가 내 손길이고, 내 몸짓이 내 춤사위입니다.


  “방법은 그 다음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왜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가? 왜 나는 사진을 선택했는가? 그럼 그는 왜 사진을 찍고 있는 걸까(172쪽)?” 하고 늘 물을 수 있으면, 언제나 생각할 수 있으면, 노상 되뇔 수 있으면, 내 가슴속에 사진이라는 씨앗이 살포시 뿌리내리겠지요. 사진이라는 씨앗이 천천히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겠지요. 이윽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겠지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씨앗을 내놓을 테고요.

 

 


  스스로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가르칩니다. 스스로 가르치는 사람은 스스로 배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사진학과에 들어가야 이름난 사진쟁이가 된다, 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로 배움길을 떠나야 멋진 사진길을 걷는다, 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이 마음이 작은 씨앗이 된다면, 스스로 사진을 키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키우는 나날이란, 곧 내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남자들의 마음속엔 영원한 소년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난 여자들의 마음속엔 소중히 물을 주어 정성껏 기르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202쪽).”는 이야기처럼, 내 마음밭에 뿌린 씨앗이 나무 한 그루로 자라도록 돌보는 나날이,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요, 내가 이루려는 꿈을 가꾸는 나날입니다.


  사진은 저기에 없지만, 저기에 있다고 여기면 저기로 가면 됩니다. 사진은 여기에 있으나, 여기에서 못 본다고 느끼면 여기에서 떠나면 됩니다. 좋은 삶 궂은 삶이 없듯, 좋은 사진 궂은 사진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고, 사랑하는 나날을 즐겁게 빛내면 언제나 아름다이 활짝 웃는 사진이고 이야기가 됩니다. (4345.3.22.나무.ㅎㄲㅅㄱ)


― 케이타이 도쿄 (안수연 사진·글,대숲바람 펴냄,2007.7.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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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파리채 쥐고 어디 가니

 


  누나가 마음껏 마을길을 누비고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산들보라는, 섬돌부터 손바닥 척척 소리를 내며 기더니, 혼자 대문을 넘어선다. 이윽고 마을길에 접어들고 누나가 달리는 모습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어디로 기어야 할까 망설인다. 좋은 햇살과 좋은 바람이 두 아이를 어루만진다. (4345.3.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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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있어 만난 사람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0] 사진공모, 《화보 이산가족찾기》(민족통일중앙협의회,1983)

 


  1983년,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이무렵 텔레비전으로 ‘이산가족 찾기’ 이야기를 곧잘 보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헤어지거나 잃은 식구가 없는 줄 아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 이야기를 자주 보고 자주 눈물지었습니다. 모두들 전쟁이라는 끔찍한 생채기 때문에 헤어지고 잃으며 아프던 나날을 보냈고, 누군가는 반가이 새 사랑을 이으며 누군가는 쓸쓸히 빈터를 떠납니다. 퍽 어린 내 눈은 눈물을 흘리며 생각합니다. 다른 어느 일보다 내 살붙이를 잃거나 서로 떨어지고 마는 일이 아주 슬플 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지울 수 없는 응어리가 되는구나 하고.


  한 해 두 해 살같이 흐릅니다.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금세 지납니다. 사람들은 반가운 이끼리 서로 만납니다. 사람들은 낯선 이하고도 마음을 열며 사귑니다. 사람들 살아가는 이 터에서는 어느 무엇보다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일이 가장 큰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돈을 더 많이 번다든지, 가방끈을 더 길게 늘인다든지, 책을 더 많이 읽는다든지, 땅을 더 늘린다든지, 이름을 더 높인다든지 하는 일이란, 언뜻 보기에 꽤 기쁘다 여길는지 모르나, 막상 돈을 더 벌거나 가방끈을 더 늘리거나 책을 더 읽는대서 내 삶이 아름답게 거듭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내 삶을 사랑하고 내 곁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온통 부질없는 셈 아닌가 싶어요.

 

 


  지난날 우리 겨레는 땅덩이를 둘로 쪼개어 서로 치고받으며 싸웠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군대로 끌려가서 죽고, 군대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도 죽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왔으니 죽고, 누구는 또 누구를 도왔기에 죽습니다. 어느 한쪽을 믿거나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전쟁무기가 온 나라 골골샅샅 짓밟으며 까부수기 때문에 이리 몸을 옮기고 저리 몸을 옮깁니다. 몸과 마음을 붙이던 고향마을에서 떠나고야 맙니다.


  학교에서 먼 옛날 세 나라 이야기를 배울 때에 가까운 옛날인 1950년 전쟁을 떠올렸습니다.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 여기에 가야까지 하면 네 나라인데, 고구려이든 신라이든 백제이든 가야이든 모두 ‘한겨레’라 했어요. 고구려만 한겨레이거나 가야만 한겨레가 아니에요. 백제는 한겨레가 아니라 말하지 않고, 신라는 두겨레나 세겨레라 일컫지 않아요. 그런데, 이들 같은 겨레는 다른 나라로 쪼개져 서로 땅을 넓히거나 빼앗으려고 끝없이 싸움을 벌였어요.


  먼 옛날, 이 땅덩이 이 겨레 옛사람은 스스로 좋아서 싸움을 벌였을까 궁금합니다. 임금님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 땅덩이를 넓히자 외치는 바람에 싸움판에 휩쓸리지 않았나 궁금합니다. 먼 옛날이나 가까운 옛날이나 여느 사람들은 싸움터에서 죽고 고향마을에서 그만 애꿎게 죽지 않았나 싶어요.

 

 


  오늘 우리 나라는 경기도·경상도·강원도·전라도·충청도·제주도처럼 나뉩니다. 꼭 나누어야 하지 않으나, 삶터와 삶자락에 따라 나누어요. 먼 옛날, 우리 나라라 한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한쪽은 고구려, 다른 한쪽은 백제, 또 한쪽은 가야와 신라, 이렇게 사이좋게 나누어 서로 즐거이 살림을 꾸리며 어려울 때에는 돕고 기쁠 때에는 함께 잔치를 벌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합니다. 굳이 한덩어리가 되어 한 임금님이 다스려야 하지 않으니까요.


  비매품으로 나온 《화보 이산가족찾기》(민족통일중앙협의회,1983)를 헌책방에서 문득 마주합니다. 이러한 책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한창 ‘이산가족 찾기’가 온 나라를 들끓던 무렵, ‘민족통일중앙협의회’라 하는 곳에서 ‘이산가족 사진공모’를 했다 하고, 이 사진공모에서 입선한 작품을 그러모아 화보 하나 마련했다 합니다.


  벌써 꽤 지난 일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볼 만한 사진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헤어진 식구를 찾는 사람들 낯빛은 하나같이 슬픕니다. 헤어진 식구를 서른 몇 해만에 드디어 찾은 사람들 얼굴빛은 하나같이 눈물바람입니다.

 

 

 


  슬픔 가득한 사진을 바라봅니다. 눈물젖은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사진공모란 이모저모 많다고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사진공모를 해야 했을까 싶기도 한데, 이렇게 사진공모가 있었기에 이날 이곳 이 사람들 눈물과 아픔과 생채기를 먼먼 뒷날까지 찬찬히 들려줄 수 있구나 싶어요. 좋은 뜻으로든 아픈 목소리로든, 누군가 어떤 이야기 하나 빚고 나면, 이 이야기는 책이라는 자리로 그러모아 오래오래 물려주면서 새로 거듭나곤 합니다.


  사진은 흔히 기쁜 자리에서 찍습니다. 누군가 어떤 잔치를 벌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혼인잔치이든 돌잔치이든 생일잔치이든 예순잔치이든, 잔치판하고 잘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는 자리라든지, 학교를 마치는 자리라든지, 학교에서 상을 주고받는 자리라든지, 누군가를 기리거나 누군가한테 손뼉 쳐 주는 자리하고도 잘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이와 달리 슬프거나 궂은 자리는 사진하고 잘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누군가 죽었다든지, 누군가 다쳤다든지, 누군가 괴롭거나 힘든 일이 있다든지, 가난과 굶주림에 찌들리는 살림이라든지, 슬프거나 궂은 자리에서 어느 한 사람이 사진기를 들면 이내 눈살을 찌푸려요. ‘어디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미느냐 손가락질합니다. 어쩌면, 헤어진 식구를 찾는다는 자리에서 벌인 ‘사진공모’도 적잖은 사람들한테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을까요. 방송국이며 신문사이며 잡지사이며, 여기에 개인으로 사진기를 걸친 사진작가들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바짝 들이대니, ‘바라는 사람은 안 오’고 사진기만 춤을 추니 대단히 성가시거나 더욱 괴롭지 않았을까요.


  바라던 사람을 만난 사람들 눈물바람 모습은 누가 사진을 찍더라도 다 괜찮아 다 괜찮아 하고 외치며 기뻐했으리라 느낍니다. 바라던 사람을 만나지 못해 며칠이고 배를 곯으며 눈이 퀭한 모습은 가까운 살붙이가 사진을 슬쩍 찍으려 해도 다 싫어 다 싫어 하고 손사래치며 못마땅해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나는 《화보 이산가족찾기》를 넘기면서, 헤어진 아픈 사람들 응어리진 마음을 읽습니다. 따로 공모전이 없었으면 1983년 그무렵에 ‘헤어진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책 하나로 엮으려던 움직임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어디에 지진이 나 마을이 갈라지고 무너진다 하더라도 이러한 아픔과 생채기를 적잖은 이들이 사진으로 담아 금세 사진책 하나로 갈무리해요. 먼발치 사람들까지 아픔을 나누고 생채기를 달래요.

 


  슬픈 사람들 앞에서 사진기를 들이미는 일이란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내키지 않는 사진을 넘어, 한겨레 모두한테 아픔을 보듬고 생채기를 달래며, 이 겨레가 앞으로 어떻게 살림을 꾸리며 살아야 좋은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넋이라 한다면, 얼마든지 사진을 눈물로 찍고 슬픔으로 담으며 사진책을 빚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공모 1등을 하려는 사진은 사진이 아닐 테지만, 사랑을 나누려는 사진은 사진이에요.


  사람을 찾는 사진입니다. 사랑을 찾는 사진입니다. 삶을 찾는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빚고 꿈을 이루는 사진입니다. (4345.3.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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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뜸의 거리
코노 후미요 지음, 홍성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만화책 즐겨읽기 135] 고노 후미요, 《저녁뜸의 거리》

 


  일본사람 고노 후미요 님은 히로시마에서 나고 자랐다 합니다. 그렇다고 히로시마 원폭 1세대나 2세대나 3세대는 아닙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는 했어도, 이 원자폭탄하고는 동떨어진 데에서 살았다고 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던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저녁뜸의 거리》(문학세계사,2005) 끝자락에 그린이 말을 적는데, “나는 히로시마 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피폭자도 아니고 피폭 2세도 아니다. 피폭 체험을 말해 줄 친척도 없다. 원폭은 내게 있어 먼 과거의 비극이고, 동시에 ‘남의 집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섭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이야기, 파고들어서는 안 될 영역이라 여겨 왔다. 그런데 도쿄에 와 살다 보니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이외의 사람은 원폭의 참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달리 그들은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국이 원폭의 참상을 모른 채 평화를 누리는 이 꺼림칙함은 내가 히로시마 사람으로서 느꼈던 부자연스러움보다 크게 생각되었다(100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린이 말이 아니더라도 일본사람은 꽤 평화로이 살아간다 여길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평화로이 살아간다 여길 만할 뿐 아니라, 이웃나라 평화를 괴롭힌다 여길 만하고, 일본 스스로 더 평화로우면서 아름다이 살아갈 길하고 동떨어진다 여길 만합니다.


  일본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일본사람은 평화도 전쟁도 원자폭탄도 전쟁무기도 모릅니다. 일본사람은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는 길도 사랑스레 품앗이를 하는 길도 모릅니다.


  그러면, 한국사람은 무엇을 알까요. 한국사람은 평화나 전쟁을 얼마나 잘 알까요. 한국사람은 원자폭탄이나 전쟁무기를 어느 만큼 알까요. 한국사람은 서로 아름답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제대로 알까요. 한국사람은 따사롭게 품앗이 하는 좋은 삶을 즐겁게 알까요.

 

 

 


- “미안해요, 안에는 엄마가 누워 계셔서. 게다가 어젯밤 비로 방안이 휘황찬란해요.” “휘황찬란?” “얼룩덜룩 벌레 기어간 자국요!” “하하하.” “…….” “…….” “가 가나야마 선수가 사백 개째 도루에 성공할까요?” “그럼요.” “하세가와 선수는 100승 할까?” “근데 히라노 씨, 대나무 껍질, 그거 왜 모으는 거예요?” “아, 짚신 삼으려고요. 출퇴근 할 때 구두 닳는 게 아까워서요.” (13쪽)
- “역시 그랬군요. 우리 집도 여기 살았던 고모가 원폭으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도 히로시마 아가씨에게 뭔가 해 줘야겠다면서 짚신을 보내 주신 거예요.” “그래요. 아, 갑자기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히라노 씨.” (29쪽)


  전쟁무기로는 전쟁을 부를 뿐,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할 때에 쓰지, 평화를 지킬 때에 쓰지 않습니다. 평화는 평화가 부릅니다. 평화를 누리자면 평화를 일구는 쟁기와 호미와 낫과 가래가 있어야 합니다. 전쟁무기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평화로이 노니는 들판과 평화로이 먹을거리를 얻는 논밭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을 써서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마을을 가꾸고 열매나무를 돌보며 아이와 어른 모두 즐거이 배우며 어깨동무하는 데에 돈을 써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과학자가 더 빼어난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머리와 품과 돈을 쓰는 동안 평화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 과학자를 키우는 나라에서 평화를 지키는 넋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전쟁무기 다루거나 건사하는 데에 내보내는 나라가 평화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별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군대 없는 나라가 없고, 전쟁무기 건사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참말, 지구별 숱한 나라마다 군대를 두고 전쟁무기를 건사하니, 지구별에 평화가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만드니까 지구별 어느 한쪽은 가난하거나 굶주립니다. 자꾸자꾸 만드는 전쟁무기를 자꾸자꾸 쓰니, 지구별 곳곳이 아픕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무기는 거두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래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군대에서 불러들여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젊은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고 꿈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옷·밥·집을 누리는 슬기롭고 맑은 길을 즐겁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중앙정부나 지자체를 잊고, 작은 마을 작은 보금자리를 아끼는 어여쁜 삶을 누려야 합니다.

 

 


- 아무도 그 일을 말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누군가 우리에 대해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런데도 살아남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사실은 그날 이후 내가 그렇게 생각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스스로 문득문득 깨닫는다는 것이다. (16쪽)
- 10년이 지났지만 원폭을 떨어뜨린 사람은 나를 보고 “해 냈다! 또 한 명 죽였어.” 하고 잊지 않고 생각해 줄까? (33쪽)


  우리는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태어납니다.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우리들은 사랑을 누릴 고운 목숨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펼치며 사랑을 꽃피울 아리따운 목숨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삶과 꿈과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이웃과 동무와 푸나무를 사랑합니다.


  서로서로 믿고 기댑니다. 서로서로 돕고 아낍니다. 서로서로 좋아하며 이야기꽃 피웁니다.

  바람 한 점을 사랑합니다. 햇살 한 조각을 사랑합니다. 물 한 방울을 사랑합니다. 풀잎 한 포기를 사랑합니다. 열매 한 알을 사랑합니다. 흙 한 알갱이를 사랑합니다.


  멧새가 지저귀고 들새가 노래합니다. 풀벌레가 속삭이고 아이들이 뛰어놉니다. 새와 벌레와 풀과 나무하고 벗삼던 아이들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저희가 어릴 적 새와 벌레와 풀과 나무하고 벗삼듯, 저희가 낳은 아이들 또한 새와 벌레와 풀과 나무하고 벗삼는 길을 보여줍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삶자락으로 누립니다. 평화를 지키는 길이란 나 스스로 미움·다툼·시샘 아닌 아낌·보살핌·어루만짐으로 이룹니다.

 


- “안녕. 이거 줄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야.” “줘도 돼?” “응, 다 외웠는걸.” “자, 다음 순서입니다.” “도우코, 책받침.” “알았어.” “네가 병원에 있어서 학교 마당의 벚꽃 배달 온 거야.” (47∼48쪽)


  돈을 더 벌어서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이름을 더 날려서 평화를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힘을 더 키워서 평화를 건사하지 않습니다. 알뜰살뜰 일구는 삶으로 평화를 지킵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나날일 때에 평화를 맞아들입니다. 내 손으로 씨앗을 거두어 심고 돌볼 때에 평화를 건사합니다.


  냉이를 캐고 쑥을 뜯습니다. 배추씨를 심고 씨감자를 심습니다. 사랑을 캐고 사랑을 뜯습니다. 사랑을 심고 다시 사랑을 심습니다. 평화를 캐고 평화를 뜯는 나날입니다. 평화를 심고 다시 평화를 심는 터전입니다.


  아파트를 새로 늘릴 까닭이 없습니다. 시골마다 집이 텅텅 비어 남아도는걸요. 고속도로를 새로 닦을 까닭이 없습니다. 기름값이 어마어마하게 치솟는걸요. 공장을 새로 지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살림을 아기자기하게 보듬으면 굳이 새 물건 새로 사서 새 쓰레기 빚지 않아도 돼요.


  내 삶을 빛내는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빛내는 사랑은 어떻게 길어올리는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땅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기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미국이 갖은 전쟁무기를 만들었기에 평화가 이룩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전쟁무기를 갖추어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대서, 일본이 아시아 곳곳에 퍼져 총칼을 휘둘렀대서, 이 지구별에 평화가 찾아왔을까요.

 

 


- “나도 그, 그러니까.” “…….” “전 잘 모르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너 피폭자와 결혼할 셈이냐?” “엄마.” “무엇 때문에 피난 보내고 양자로 주었겠니? 네 양부모한테는 뭐라 말할 거니? 왜 난 안 죽는지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원폭으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84쪽)
- “하지만 따라오길 잘 했어. 다음에는 엄마, 아빠와 같이 올래. 오면 엄마, 아빠도 분명 히로시마를 좋아하게 될 거야.” (86쪽)


  미국에서 온갖 농약과 항생제와 비료를 먹인 쌀과 열매와 곡식과 고기를 값싸게 사들일 때에 평화나 사랑이 찾아올까 궁금합니다. 칠레에서 포도와 포도술을 값싸게 사들이면서 자동차와 손전화와 전자제품을 비싸게 팔 수 있으면 평화나 사랑이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우리한테는 집전화 하나 있으면 넉넉합니다. 집전화 없이 편지 한 장 적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편지 한 장 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전화기도 편지도 무엇도 없는 채, 사람들은 아주 오래고 오랜 나날 서로 믿고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자동차고 컴퓨터고 공장이고 신문이고 텔레비전이고 인터넷이고 없던 기나긴 지난날, 사람들은 즐겁게 어깨동무하고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재미나고 멋진 삶을 누렸어요.


  전쟁을 벌이는 무기를 만들 때부터 평화가 사그라듭니다. 평화가 사그라드는 자리에서는 사랑 또한 사그라듭니다. 사랑이 사그라들 때에는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꿈도 이야기도 빛도 웃음도 나란히 사그라듭니다.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지 생각해야지요. 무엇 때문에 아이를 낳는지, 무엇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넣는지, 무엇 때문에 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지 생각해야지요.

 

 

 


- “나나미, 내가 히로시마에서 무얼 했는지 아니? 올해는 형제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던 내 작은누나의 50주기야. 그래서 생전 누나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들었지. 나나미, 넌 그 누나와 많이 닮았어.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누나가 슬퍼할 게다.” (97∼98쪽)


  고노 후미요 님 만화책 《저녁뜸의 거리》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만화책 《저녁뜸의 거리》는 원자폭탄 피해자가 히로시마에서든 도쿄에서든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원폭 피해 뒤탈’ 같은 이야기는 그닥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수수한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삶을 누리고 싶던 ‘작은 목숨’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살아가고 싶은 꿈을 들려줍니다. 사랑하고 싶은 나날을 들려줍니다. 따로 평화라는 낱말을 모르더라도 언제나 평화롭고 사랑스러울 작은 보금자리, 작은 마을, 작은 이야기, 작은 이웃, 작은 아이들, 작은 어버이, 작은 동무, 작은 꿈을 들려줍니다.


  전쟁무기를 빚는 사람은 어떤 마음인가요. 전쟁무기를 쏘아대는 사람은 어떤 마음인가요. 총을 쏘아 누군가를 죽이면서 ‘그래, 평화를 지켰어!’ 하고 외치는 마음이 되나요. 무시무시한 폭탄을 비행기에 실어 마을과 들판과 멧등성이와 냇물에 마구잡이로 뿌려 터뜨리면서 ‘그래, 평화는 이 맛이야!’ 하고 외치는 마음이 되나요.


  ‘나는 내 아이를 나와 내 옆지기 사랑을 그러모아 낳겠어.’ 하고 속삭일 때에 바야흐로 평화가 된다고 느껴요.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나와 내 옆지기 사랑으로 곱게 돌보며 아끼겠어.’ 하고 소근거릴 때에 시나브로 평화가 찾아온다고 느껴요. ‘나는 서로서로 기쁘게 마주보며 활짝 웃고 싶어.’ 하고 노래할 때에 살포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느껴요.


  일본사람도 한국사람도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도시사람도 서울사람도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이 어떠한지 몰라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목숨이 어떠한지 몰라요. (4345.3.21.물.ㅎㄲㅅㄱ)


― 저녁뜸의 거리 (고노 후미요 글·그림,홍성민 옮김,문학세계사 펴냄,2005.11.2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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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3-2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만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이 만화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서 반성하는 논조인가요?
2차 대전이나 원폭 피해를 다룬 일본 만화를 보면 전쟁중에 일본이 타국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뼈져린 반성보다는 원폭의 피해만을 강조하는것이 많더군요.일본인들이 2차 대전중의 전쟁범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지도층과 지식인들의 은폐도 있었겠지만 그것 보다는 일본인 스스로가 그 점을 알려고 하지 않는것이 더 크단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2-03-22 12:48   좋아요 0 | URL
어떤 논조가 되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야기를 펼치는 결에서
다 알려주니까요.

그리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짓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전쟁이란 무엇이고 평화란 어떠한 삶인가를
밝히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히로시마>라는 그림책처럼 전쟁을 이야기하거나 원폭을 다루면
틀림없이 슬프며 딱하기 그지없습니다만,
<히로시마> 같은 그림책이 슬프며 딱한 까닭은
'피해자 처지를 도드라지게 그리기' 때문이 아니에요.

카스피 2012-03-23 10:54   좋아요 0 | URL
음 제 생각은 약간 다른데 과거를 반성하지 못한다면 과연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무엇을 꺠달을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독일에서도 신 나찌즘이 등장하긴 하지만 양차 대전을 일으킨 것을 철저히 반성한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은 이를 강력히 제재하지요.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정부와 이른바 지식층들이 합심해서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의 죄과를 철저히 부정하고 숨기려고 하고 있지요.그러다보니 요즘 일본인들은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폭의 피해와 극복을 다루는 만화역시 감동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일이 일어나게 됬는지에 근원적 물음과 그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그건 지난 시절 추악한 과거를 미화하는 것에 불과하단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2-03-23 11:18   좋아요 0 | URL
어떻게 해야 '뉘우치기'가 될까요.
'뉘우치기'는 몇 차례쯤 해야 받아들일 만할까요.

한국사람 가운데 베트남에서 저지른 살인과 만행을
한 번이나마 제대로 뉘우친 적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모든 작품에서
모두 똑같이
'뉘우치기'를 집어넣으라 하는 일은
폭력일 뿐입니다.

<저녁뜸 거리>는 '감동적'인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진
작품입니다.
'감동'이든 무엇이든,
또는 '교훈'이든 무엇이든,
억지스레 사과하라 하고 뉘우치라 하는 일은
하나도 즐겁지 않고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

뿌리(근원)란 무엇일까요.
전쟁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가던
보통 사람이
갑자기 전쟁통에 휘말리다가
갑자기 죽어 버리는 일을 놓고
이 사람들한테 무엇을 바라는가요?

일본 시골에서 조용히 농사짓다가
갑자기 원폭을 맞고 죽은 사람한테
무엇을 바라는가요?

일본 바닷마을에서 조용히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원폭을 맞고 죽은 사람한테
무슨 사죄와 원망을 바라는가요?

참말, '뿌리'란 뭐고 '피해'란 뭐며
'반성'이든 뭐든 무엇인가요?

학교를 다닌 적 없고
아이들이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죽어야 했고
쓸쓸하게 동네 작은 가게를 지키던 할머니가
원폭을 맞고 갑자기 죽었을 때에
이 할머니네 아이들은,
우연하게 히로시마 바깥으로 나가서
살아남을 수 있던 아이들은,
나중에 원폭과 전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두머리와 군인과 장교와 정치꾼과 경제꾼들 아닌,
또 지식인과 기자들 아닌,
보통 사람한테 무엇을 바라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