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나 쓰기란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하나 있으면, 글 하나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내 마음껏 홀가분하게 쓸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아무것 없다면, 아무리 고즈넉하거나 한갓진 데에서라도 글 한 줄조차 쓸 수 없습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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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읽던 책

 


  앤소니 드 멜로 님 삶을 그러모은 이야기책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132쪽에,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깨어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때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를 알 것입니다.” 하고 읊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함께 지내는 옆지기를 바라볼 때이든, 두 사람 사랑으로 낳은 아이들하고 여러 해째 같이 얼크러지내며 서로서로 마주할 때이든, 꾸밈없이 서로를 느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싶어요. 더 오래 함께 있대서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아주 살짝 눈을 마주치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읽으며 보듬을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더라도 사랑이 곱게 꽃송이처럼 피어난다고 느껴요.


  우니타 유미 님이 빚은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8) 둘째 권 65쪽에, “우선은 장래보다 코우키의 현재를 지켜봐 주고 싶어요. 한 2년 정도 지나면 같이 있고 싶어도 자기들이 피해 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고 외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예쁘게 긋습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사랑스레 돌보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가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랑 오늘 하루 더 즐거이 어울리며 놀고 웃으며 떠들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바로 오늘 사랑을 꽃송이처럼 피우고 싶을 뿐이라는 넋을 느끼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생각을 담은 책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사랑을 들려주는 책을 읽으며 기쁩니다. 삶을 곱게 누리면서 이야기 한 자락 어여삐 보듬는 책을 읽으며 흐뭇합니다.


  나는 어떠한 책이든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읽고 싶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지식을 얻거나 저런 정보를 쌓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한껏 잘 버는 솜씨를 굳이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을 널리 드러내는 재주를 애써 북돋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을 나들이 할 수 있으면 퍽 좋더라 하는 말마디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느 논둑길을 걷더라도 즐겁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들새 소리를 듣습니다. 휘파람새인가, 직박구리인가, 노랑할미새인가, 찌르레기인가, 어떤 새인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갓난쟁이는 품에 안고 다섯 살 개구진 아이는 앞세워 걸리며 봄나무를 바라봅니다. 막 꽃송이 터뜨린 매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직 새눈 조그마한 모과나무를 바라봅니다. 천천히 꽃송이 터뜨리는 동백나무랑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네 식구 나란히 시골마을 곳곳을 두 다리로 걷는 나날을 즐깁니다. 면 소재지까지 사십 분 남짓 천천히 걸어갑니다.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 부치고는 다른 길로 에돌아 오십 분 남짓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멧골짝 안쪽에 깃든 절집 언저리까지 한 시간 반 남짓 걸어 오르다가는 풀숲에 깃듭니다. 네 식구 모두 벌러덩 드러누워 풀과 가랑잎과 흙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한창 뒹굴며 노는 동안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골짝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들이를 하는 동안, 우리 집 마당에 드리운 빨랫줄에 넌 갓난쟁이 기저귀며 식구들 옷가지며 따순 봄햇살 마음껏 들이마시며 보송보송 마를 테지요.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다시 천천히 멧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흙길은 흙길대로 즐겁고, 시멘트길은 시멘트길대로 즐겁습니다. 마늘밭 풀 매는 이웃 할머님한테 인사합니다. 시골집 두루 도는 우체국 일꾼한테 인사합니다. 나와 온 식구한테는 종이에 아로새긴 책도 사랑스럽고, 저마다 얼굴에 아로새긴 웃음도 사랑스럽습니다. 까무잡잡 싱싱한 빛 구수한 흙땅 곳곳에 새로 돋는 봄풀과 봄꽃 모두 사랑스럽게 읽는 책입니다. 봄까지꽃, 별꽃, 광대나물꽃, 냉이꽃, 제비꽃 모두 귀엽게 맞이하는 책입니다. 먼 멧등성이 따라 노랗다가 발갛다가 하얗다가 파랗게 빛나는 아침녘 햇살과 하늘 모두 고맙게 마주하는 책입니다.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아로새기는 책은 바로 좋은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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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희낙락


장마철의 습기며 삼복의 무더위가 작은 산중이라고 어디 피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안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의 한철을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박남준-꽃이 진다 꽃이 핀다》(호미,2002) 90쪽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약탈한다면 그건 괜찮을까요? 그때도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반길까요
《아룬다티 로이-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2004) 139쪽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짝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희희낙락하면서 지나갔다고 호소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미우라 아야코/박기동 옮김-여인의 사연들》(부림출판사,1984) 157쪽

 

  “장마철의 습기(濕氣)며”는 “장마철 축축함이며”로 다듬고, “삼복(三伏)의 무더위가”는 “삼복 무더위가”나 “여름철 무더위가”로 다듬으며, ‘산중(山中)’은 ‘산속’이나 ‘멧골짝’으로 다듬습니다. ‘피(避)해’는 ‘비껴’나 ‘돌아’로 손보고, “방 안의 구석구석”은 “방 안 구석구석”으로 손보며, “저마다의 한철을”은 “저마다 한철을”이나 “저마다 맞이한 한철을”로 손봅니다. “이미 충분(充分)히”는 “이미”나 “이미 아주”나 “이미 옴팡”이나 “이미 몹시”로 손질해 줍니다. “지쳐 있다”는 “지쳤다”로 고쳐야 올발라요.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는 “미국 할렘에 사는 가난뱅이가”나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로 다듬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다듬어 줍니다. ‘약탈(掠奪)한다면’은 ‘유물을 턴다면’이나 ‘유물을 훔친다면’이나 ‘유물을 빼앗는다면’으로 손보고, ‘그건’은 ‘이는’이나 ‘이러한 일은’으로 손봅니다.


  ‘자기(自己)가’는 ‘당신이’로 다듬고, “비탄(悲歎)에 빠져 있는”은 “슬픔에 빠진”으로 다듬으며, ‘호소(呼訴)할는지도’는 ‘하소연할는지도’로 다듬어 줍니다.


  ‘희희낙락(喜喜樂樂)’은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뜻한다고 해요.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 기뻐할 테지만
→ 기뻐 웃을 테지만
→ 기뻐서 히히거릴 테지만
→ 좋아하며 즐길 테지만
→ 반기며 즐길 테지만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 똑같이 기뻐하며
→ 똑같이 즐거워하며
→ 똑같이 좋아서 웃으며
 희희낙락하면서
→ 웃고 떠들면서
→ 즐겁게 시시덕거리면서
→ 하하호호 웃으면서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뜯어 살피면, ‘기쁘다’를 뜻하는 한자 ‘희(喜)’와 ‘즐겁다’를 뜻하는 한자 ‘락(樂)’을 둘씩 붙였습니다. 말뜻 그대로 돌아본다면, “기쁘고 기쁘며 즐겁고 즐겁다”입니다.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그러니까, 한문을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한테는 ‘喜喜樂樂’일 터이나,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한테는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꼭 중국사람이 아닐지라도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쓰고 싶다면 얼마든지 쓸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고맙다’라 안 하고 ‘땡큐’라 말하고, ‘잘 가’라 안 하며 ‘바이바이’라 흔히 말하듯, ‘희희낙락’ 또한 얼마든지 쓰고프면 쓸 일입니다.


  그런데, ‘고맙다’를 안 써 버릇하는 동안 참말 이 한국말은 하루하루 우리한테서 잊혀지거나 멀어집니다. ‘잘 가’를 말하지 않고 ‘바이바이(byebye)’나 ‘안녕(安寧)’만 말하면, 참으로 ‘잘 가’라는 한국말은 어느덧 우리 입에서 낯선 말투가 되고 맙니다. 갓난쟁이나 어린이 앞에서 “잘 가, 또 보자, 잘 지내. 살펴 가.” 하고 말하는 어르신이 얼마나 있는가요. 아이들은 서로서로 손을 흔들며 무슨 말을 하는지요.

 

 즐겁고 즐겁다 / 즐겁디즐겁다
 기쁘고 기쁘다 / 기쁘디기쁘다
 기쁘고 즐겁다 / 즐겁고 기쁘다
 즐겁게 웃다 / 기쁘게 웃다
 웃음꽃이 활짝 피다
 (기뻐서 /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다
 (기뻐 / 즐거워) 죽으려고 하다
 (기쁨이 / 즐거움이) (넘치다 / 가득하다)
 …

 

  우리 말글을 돌아보면 느낌을 담는 말마디가 무척 많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 말글은 우리 느낌을 거의 끝없이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온누리 다른 어느 나라말이나 겨레말을 살펴보더라도 우리 말글처럼 우리가 나타내고픈 숱한 느낌을 알뜰살뜰 담을 만한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고등학교이든, 또 대학교이든 어디에서든 우리 말글이 아름답게 빛나도록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빛나는 우리 말글을 물려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대목을 잘 가르치면서, 어딘가 허전하다 싶은 대목 또한 꾸밈없이 가르치고 북돋우는 한편, 우리 뒷사람이 스스로 갈고닦거나 가다듬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고인 말글이 아닌 움직이는 말글이라면, 먼 옛날 어른들이 닦은 틀로만 쓸 말글이 아니라 앞으로 새 삶을 일굴 어린이와 푸름이가 새롭게 갈고닦으며 빛낼 말글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웃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기쁨을 나타내거나 슬픔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또 울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갖가지 느낌말 가운데 우리가 쓰는 낱말은 몇쯤 될까요. 우리는 한겨레 느낌말을 제대로 아는가요. 우리 말소리가 노래가 되도록 가꾸는 손품은 어느 만큼 들이는가요.  글월 한 자락이 시 한 자락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구는 마음품은 어느 만큼 쏟는가요.


  말은 곧 노래이고, 글은 바로 시입니다. 말은 곧 삶이며, 글은 바로 넋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메마르거나 팍팍하게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내놓는 말마디마다 메마르거나 팍팍하고 말아 노래하고 동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거칠거나 차갑게 지내니, 저마다 펼치는 글월마다 거칠거나 차갑고 말아 시하고 등돌리는지 모릅니다.

 

 똑같이 웃음을 머금으며
 똑같이 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웃음을 띄우며
 똑같이 웃으며
 …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멋을 부리거나 치레를 한다면서 바깥말을 끌어들여 쓸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아, 맛있어!”라 하지 않고 “딜리셔스!”라 하거나 “굿!”이라 말할 수 있다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하고 그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꾸자꾸 다른 얄딱구리한 말투가 뒤따르며 우리 넋을 잃습니다. 처음부터 소도둑은 없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바뀝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지, 여든 살에 갑작스러운 버릇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섣불리 영어를 배우고 한자 지식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아이들이 올바르고 알맞으며 곱게 우리 말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자면, 어른들부터 스스로 참되고 착하며 곱게 우리 말글을 알뜰살뜰 살려서 써야 합니다.


  즐겁게 쓰는 우리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고, 기쁘게 나누는 우리 글이 되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혼자만 신이 나서
 저희끼리만 즐거워 하면서
 아주 좋아 죽겠다면서
 깨가 쏟아지면서

 …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좋은 우리 삶이라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번 선물받은 고운 삶을 즐겁게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돈이 모자라 팍팍하게 살아간다 해서 슬프거나 괴롭기만 하지 않습니다. 돈이 넘쳐 펑펑 쓰며 살아간다 해서 기쁘거나 넉넉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소담스레 살필 대목은 내 즐거움이고 내 사랑이며 내 믿음입니다. 나 스스로 즐거울 여러 가지를 찾을 노릇이고 나부터 사랑할 사람을 찾을 노릇이며 나부터 내 둘레 삶터를 믿음으로 섬길 노릇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말합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즐겁게 말하지 못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홀가분하게 받아들이며 홀가분하게 헤아리는 한편, 홀가분하게 말과 글을 다룰 수 있습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며 넋이며 말이며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거나 다루지 못합니다.


  그예 웃는 삶에서 웃는 넋이고 웃는 말입니다. 내 삶에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씌울 까닭이 없다면, 내 넋이나 말에도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덮을 까닭이 없습니다. 꾸밈없이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즐기고, 꾸밈없이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나누면 됩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사랑스레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북돋우면 됩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때에는 ‘즐겁다’고 말합니다. ‘희희낙락’하는 내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보기글 새로 써 보기
- 장마철 축축함이며 삼복 무더위가 작은 멧골짝이라고 어디 비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 한철을 누리며 킥킥 웃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벌써 많이 지쳤다
-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깡그리 턴다면 이런 일은 괜찮을까요? 이때에도 똑같이 웃고 떠들며 반길까요
- 또 어떤 사람은 이녁이 짝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면서 지나갔다고 하소연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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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단 책읽기

 


  서평단을 하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서평단을 하면서 내 삶에 찬찬히 녹아들도록 책을 읽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 나한테 책을 선물로 보내 준다면, 이렇게 받는 책선물을 즐거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책선물 아닌 책홍보를 바라는 서평단 책들을 읽으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실 수 있을까 아리송하다. 누군가는 서평단 책읽기를 하면서 스스로 이녁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생각으로만 그칠 뿐, 막상 스스로 삶을 일구거나 가꾸는 일하고는 동떨어지지 않나 싶다.


  모든 책은 모든 말에서 태어난다. 모든 말은 모든 삶에서 태어난다. 삶이 있기에 말이 있다. 말이 있기에, 이 말이 글로 피어난다. 글로 피어난 말은 책에 담긴다. 곧, 삶이 말이요, 말이 글이며, 글이 책인 셈이기에, 삶을 스스로 사랑스레 일구는 나날이라 한다면, 다른 사람이 쓴 책을 구태여 안 읽더라도, 내 삶을 일구는 내 삶책이 있는 만큼, 나로서는 언제나 새롭게 책읽기를 하는 셈이다.


  종이책을 읽는대서 책읽기가 되지 않는다. 종이에 아로새긴 책을 읽을 때에만 책읽기라 가리키지 않는다. 이야기를 읽기에 책을 읽는다 말한다. 종이책이든 삶책이든 마음책이든, 또 일책이든 놀이책이든 사랑책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하든 내 아름다운 나날이요 빛이며 이야기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읽기’가 되고, 제대로 읽기를 했다면 ‘책읽기’를 이룬다 할 만하다.


  나는 내 삶을 읽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쓰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아끼며 아이들이 스스로 저희 삶을 아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내 삶을 읽는 책읽기일 때에 즐겁다. 나는 내 삶을 쓰는 책쓰기일 때에 흐뭇하다. 나로서는 내 삶이 아닌 내 지식을 글로 쓰지 못한다. 나로서는 내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 삶을 글로 옮기지 못한다. 오직 내가 즐거이 바라보고 마주하며 기쁘게 어깨동무한 내 삶을 읽고 쓰며 나눈다.


  서평단이든 신문·잡지사 기자이든 또 비평가이든 여느 책즐김이가 되든, 사람들은 스스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 테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기쁘며 사랑스럽고 아름다이 책을 읽으며 삶을 읽고 말을 읽어 이야기 한 자락 빛내는 이는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어떠한 책이든 내 삶을 읽는 길에 함께 선 동무, 곧 길동무이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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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
편해문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널리 사랑받지 못하고, 그만 절판된 사진책 하나를 기리며, 이 사진책 하나를 되새기는 느낌글을 새로 적바림합니다. 부디 되살아나거나 새로운 사진책 하나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1] 편해문, 《소꿉》(고래가그랬어,2009)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어른이 한국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담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저희끼리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는 사진기가 없고, 아이들은 즐거이 놀 뿐 이런저런 모습을 애써 사진으로 찍어 남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오늘 하루 신나게 놀고, 이듬날 하루 새롭게 놀며, 글피에 다시금 더 놀면 돼요.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어른이 한국땅 어린이가 노는 모습을 더러 사진으로 옮기곤 했지만, 막상 아이들을 오래도록 지켜보거나 찬찬히 살펴보거나 꾸준히 함께하면서 사진을 찍은 적은 아직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제 골목놀이 하는 어린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골목놀이 하는 어린이가 아주 많았을 뿐 아니라, 이 아이들이 사진기를 꺼리지 않던 지난날, 이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살포시 옮긴 어른은 매우 드물었어요. 아주 없었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드문드문 한두 장 ‘귀엽다’ 여겨 찍기는 하더라도, ‘한국 어린이 놀이’를 이야기로 엮어 사진책 내려던 어른은 없었다고 느껴요.

 

 


  스스로 사진쟁이라 일컫던 어른은 으레 큰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이나 대구나 부산이나 인천 같은 큰도시에는 사진모임이 있었고, 사진모임에 몸담지 않더라도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는 곳곳으로 ‘사진마실’을 다니는 어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 놀이터를 찾아다닌다든지, 큰길 안쪽 호젓한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한두 시간, 서너 시간, 너덧 시간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며 놀다가 사진을 찍던 ‘한국 사진쟁이 어른’은 왜 찾아볼 수 없을까요.


  1980년대이든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이무렵에 사진을 찍던 어른이 없었다면, 이 나라 아이들 놀이 이야기 또한 사진으로 옮길 수 없었다 하겠지요. 그런데, 이무렵이든 1990년대이든 2000년대이든 2010년대이든 사진을 찍는 어른은 많아요. 많디많은 한국 어른들은 스스로 제 나라 제 땅 제 이웃 어린이를 돌아보지 않아요. 으레 나라밖으로 나갑니다. 나라밖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어린이놀이를 살피는 편해문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이녁은 사진쟁이가 아닌 까닭에 어린이놀이를 눈과 마음과 몸으로 살필 뿐, 굳이 사진기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잃어버린 탓에 한국땅 어린이놀이를 찾으려고 힘썼으니, 한국땅 어린이놀이를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꿈꾸기 힘들겠지요. 편해문 님은 사진책 《소꿉》(고래가그랬어,2009)을 내놓았는데, 한국땅 아이들이 스스로 잊고 만 놀이를 북돋우거나 되살리다가, 나라밖 ‘작은’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아직 마음껏 놀고 신나게 뒹구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사진쟁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진기를 들며 사진을 찍고는, 사진책까지 내놓습니다.

 

 


  사진책을 한참 들여다봅니다. 2009년에 처음으로 장만해서 들여다보고, 이 사진책이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지고 난 이즈음 다시 한 권 장만해서 더 들여다봅니다. 아이들 얼굴만 바꾸면 한국에서 늘 마주하던 아이들 모습이요 아이들 놀이입니다. 아이들 얼굴은 다르지만, 어디에서나 똑같다 싶은 아이들 삶이며 아이들 사랑입니다.


  한국땅 아이들이 놀이를 잃거나 빼앗긴 탓에, 놀이하는 어린이 삶을 담은 사진책 또한 이 땅에서는 읽히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가 싶습니다. 한국땅 어른들부터 즐거이 웃고 까불며 놀 줄 모르니, 아이들 해맑은 웃음과 눈빛과 얼굴짓을 담은 사진책 하나 살뜰히 바라보며 아끼기란 힘든 노릇인가 싶습니다. 사진책 《소꿉》에 이어 “고무줄”이나 “땅금놀이” 같은 사진책이 잇달아 나오기를 빌었는데, 다른 놀이 사진책은 못 태어나고, 그만 《소꿉》마저 아스라이 사라지고 맙니다.

  바야흐로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온통 학교로 쫓겨나고, 학교로 쫓겨나서도 시험공부로 쫓겨나는데다가, 이윽고 대학바라기로 다시금 쫓겨나는 판입니다. 아이들이 일고여덟 살이 되면 ‘학교에 간다’고 말하지만,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고는 좀처럼 못 느끼겠어요. 오늘 이곳 이 아이들은 집이나 마을에서 ‘놀이’를 누리지 못하는 채 학교로 ‘쫓겨나’는 셈 아닌가 싶어요. 한국 아이들은 갓 태어날 적부터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제대로 뛰놀지 못하며, 제대로 흙을 만지지 못하다가, 온갖 탁아시설로 보내지고, 이렇게 보내지고 나서 금세 학교로 ‘등 떠밀리듯 쫓겨나’는 모양새로구나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학교로 쫓겨나더라도 학교에서 동무들을 사귀며 놀이할 틈이 없어요. 학교에서는 갖가지 시험공부가 아이들을 짓누릅니다. 특기이니 적성이니 무슨무슨 과외활동이니 방과후활동이니 참여학습이니 무어니 하면서 홀가분하게 놀이를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제 언니 오빠 누나 형 들한테서 놀이를 물려받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늘 시험공부만 물려받습니다. 놀이를 잊은 채 어린 나날을 보내고, 시험공부만 짊어진 채 푸름이가 되어, 대학바라기로 얼룩진 젊은이가 됩니다.

 

 


  아직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아이들이 제가끔 놀이를 합니다. 골목놀이를 하는 어린이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시골 고샅에서 흙을 파먹는 아이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시에서 골목놀이를 하는 아이들 곁에서 이 아이들 어버이부터 이들 놀이하는 아이를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시골 고샅에서 흙을 파먹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스스로 기쁘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을 마냥 바라보기만 해도 배불러요. 구태여 사진을 찍지 않아도 마음에 꽉 들어찬다 할 만해요. 여느 어버이한테 ‘당신 사진쟁이가 되어 보시오’ 하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누리는 오늘을 아이들과 바로 이 자리에서 기쁘게 누리면서 사진 한 장으로 적바림할 수 있으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될 무렵, ‘어른이 된 아이가 마음껏 뒹굴며 뛰놀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어른이 된 아이’가 오래오래 해맑은 웃음과 낯빛을 알뜰히 아끼도록 도울 수 있어요. 사진쟁이가 되어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은 없으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손길과 꿈길과 사랑길을 사진 한 장에 살그마니 옮겨,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낼 기나긴 나날 좋은 ‘놀이 넋’을 어버이로서 선물로 남길 수 있어요.


  내 아이한테 어마어마하다 싶은 돈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아파트나 자가용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부동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네가 아이였을 적 예쁜 삶과 놀이와 몸짓이 이와 같았단다’ 하고 기쁘게 보여주는 사진 한 장 차곡차곡 찍어서 푼푼이 그러모은 사진첩 하나 물려주면 돼요.


  사진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사진쟁이하고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삶을 꿈꾸는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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