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아이를 씻기고
방이며 집 안팎 쓸고닦는다.

 

아이 태운 수레
자전거에 붙여
면내 우체국 다녀온다.

 

씨감자 추리고
밭흙 갈아엎어
고랑 이랑
새로 만든 뒤
차곡차곡 하나하나 심는다.

 

연장을 닦고
손발을 닦고
기지개를 켜면
어느새
밤하늘은 달빛 별빛.

 

아이들과 마을 한 바퀴
아이를 품에 안고 노래
이부자리 여미고
눈을 붙이려다가
빈 종이 한쪽에
몇 줄 끄적이는
글.

 


4345.3.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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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사회

 


  신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는 그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맨 처음, 신문은 글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제 신문은 ‘사진 없는 신문’으로 나오리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신문은 어느덧 ‘사진 있는 신문’이 되었고, ‘사진을 보여주는 신문’으로 아주 바뀌기까지 합니다.


  사진 없이 글만 있는 신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진 한 장 안 넣고 글만 넣은 신문을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이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없다면 신문이 아니라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나 학급에서 조그맣게 꾸리는 신문조차 사진을 넣습니다.


  사진이 쓸모 많기에 사진을 넣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렇지만, 신문에 사진을 굳이 넣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사진을 넣어야 비로소 ‘신문글’을 잘 읽도록 돕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에서 사진을 써야 한다면 ‘신문글 읽기를 돕는 사진’이 아닌 ‘신문사진으로서 읽을 사진’이어야 걸맞으리라 느낍니다. 곧, 이제 신문은 ‘신문글’과 ‘신문사진’과 ‘신문그림’으로 엮어야 한다고 느껴요.


  신문에 싣는 글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입니다. 이와 함께, 신문에 싣는 사진은 ‘따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에 따로 신문에 깃들 만합니다. 대통령 얼굴이라든지 정치꾼 얼굴을 보여주는 노릇이라면 신문사진 노릇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은 없어도 되는 사진이며, 처음부터 안 찍어도 될 사진입니다. 운동경기 소식을 들려줄 때에도 그래요. 야구선수이든 체조선수이든 농구선수이든, 이런 사람들 얼굴이나 몸매를 보여줄 까닭이 따로 없어요. 오직 ‘이 사진 하나로 새롭게 보여주거나 나눌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사진을 실어야 걸맞아요.


  오직 사진 하나로 이야기를 밝혀야 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진으로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어떠한 이야기가 담겼구나’ 하고 읽으며 알아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글에 덩그러니 곁달리는 사진으로는 이 나라를 밝히지 못합니다. 글에 슬그머니 덧붙는 사진으로는 온누리 삶자락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글 한 줄이 사회를 바꾼다든지,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지는 않아요. 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기는 노릇을 할 수 있는데, 글 한 줄이나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긴다 할 때에는 저마다 외따로 가장 깊고 가장 너르며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하는 오늘날이요, 누구라도 글을 쓴다 하는 요즈음입니다.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 계급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먼 옛날 봉건 계급 사회 때처럼, 돈이나 이름이나 권력을 거머쥔 사람 아니고서는 붓을 쥘 수조차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어린이도 글을 쓸 수 있어요. 어린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학교 문턱을 안 밟아 보았어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큰도시 아닌 두메 시골마을 할아버지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이름난 예술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고, 손꼽히는 사진쟁이만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대단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빚는 사진이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진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이야기를 옳게 깨닫고 곧게 담으며 즐거이 나눌 수 있다면, 바로 이렇게 담아 나누려는 사진 하나가 사회를 바꾸도록 이끄는 힘을 보여줘요.


  멋스러이 보이도록 찍는대서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멋스러이 보인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일 뿐입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찍기에 사진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습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하면 그냥 놀랍게 보일 뿐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스스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스스로 즐겁게 나누는 사랑이면서, 스스로 즐겁게 빛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 스스로 문학이라는 자리에 함께 놓여요.


  사진은 사회를 비추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담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글이 사회를 비추지 않으며, 글이 사회를 담지 않고, 글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듯, 사진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으로 일구는 이야기가 사회를 비춥니다. 글로 엮는 이야기가 사회를 담습니다. 그림으로 빚는 이야기가 사회를 보여줘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이러한 갈래마다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떻게 일구는가에 따라, 이들 이야기로 사회를 비추거나 담거나 보여줘요. 잘 찍은 사진이기에 사회를 비추겠습니까. 잘 쓴 글이기에 사회를 담겠습니까. 잘 그린 그림이기에 사회를 보여주겠습니까. 이야기를 일구며 사회를 비춥니다. 이야기를 엮으며 사회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빚으며 사회를 보여줘요.


  이리하여,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면서 사회를 가리거나 숨기려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사회 한켠을 누르거나 짓밟아 그늘이나 어둠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즐겁게 나눌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꽃피우지 못하게끔 제도권으로 꽁꽁 싸매고 입시지옥으로 꽉 틀어쥔 사회에서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주눅들거나 그만 시들고 맙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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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기계 이레

 


  집에 빨래기계를 들인 지 이레가 지난다. 1995년 4월 5일부터 2012년 3월 한복판까지 빨래기계를 안 쓰며 살았다. 내 어버이와 함께 살던 집에서 제금난 뒤로는, 기계를 써서 내 옷가지를 빨래한 적은 한 차례조차 없다. 군대에서는 영 도 밑으로 이삼십 도씩 떨어지는 날씨일 때조차 얼음을 녹여 손빨래를 해야 했다. 이제 손빨래 아닌 기계빨래를 하니 느낌이 남다르다. 맨 처음에는 내 몸이 게을러지나 하고 생각한다. 이듬날에는 퍽 홀가분하구나 싶으면서 어딘가 허전하다. 사흘째에는 나 스스로 빨래거리한테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마음을 빼앗겼구나 하고 느낀다. 나흘째에는 기계가 손보다 물기를 더 잘 짜고 사람 몸뚱이를 덜 쓰도록 돕지만, 이만큼 옷가지를 더 세게 헹구거나 짜기에, 기저귀 실올이 꽤 많이 풀린다고 느낀다. 가장 적게 헹구고 짜도록 맞추었지만, 이렇게 해도 기계를 돌리고 나서 꺼낼 때 살피면 기저귀 실올이 새로 자꾸 풀린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으니, 이제 옆지기가 아침에 나보다 먼저 기계에 전기를 넣어 빨래감을 맡길 수 있기도 하다. 내가 손으로 짜서 털 때보다 물기가 적으니 기저귀랑 옷가지는 햇살을 쬐며 더 일찍 마른다. 손으로 빨래하던 나날에는 머리 감는 물로 가장 지저분한 옷을 헹구고, 아이들 씻긴 물로 아이들 옷가지를 헹구곤 했는데, 이런저런 버릇도 조금씩 바꾸어야겠다고 느낀다. 똥기저귀나 속옷이나 양말은 손으로 비빔질하면 아주 금세 끝나고 한결 깔끔하다. 빨래기계를 쓴대서 손빨래를 아예 안 할 일이란 없다. 그러나, 빨래 일거리를 기계한테 꽤 많이 맡기면서, 집에서 아이하고 눈을 마주하는 겨를이 더 늘고, 몸을 차분히 쉬면서 가만히 생각을 다스리는 겨를이 한결 늘기도 한다. 차츰 따스해지는 날씨를 느끼며 섬돌에 아이들이랑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할 수 있기도 하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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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79 : 이야기를 읽는 책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독일사람을 모릅니다. 이녁이 어떤 삶을 꾸렸고, 어떤 넋을 펼쳤으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했는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이가 쓴 책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2012)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 하나를 읽으며 어느 한 사람이 걸어간 삶과 누리던 넋과 나누던 사랑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누군가한테 묻듯, 또는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는 듯, 혼자말로 “왜 스승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준비 작업을 경험 있는 제자에게 맡기지 않는가 … 무엇 때문에 그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엄격하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하며, 또 제자들에게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가(88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어머니도 이와 같아요.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 언제나 똑같은 몸짓입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며 늘 똑같은 매무새입니다. 아이들 밥을 차리며 노상 똑같은 몸가짐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해서 심어 돌보아 거두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 심어 돌보아 거둔 곡식을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물로 헹구고 밥으로 짓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되풀이해요. 아이들한테 옷을 입히려 하면, 더러워진 옷을 벗겨 새로 빨래하고 말리고 개고 건사합니다. 목을 넣고 팔을 넣으며 단추를 채웁니다. 어느 때라도 어느 한 가지 어긋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가만가만 모든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어느 재주나 솜씨와 얽힌 자리에서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되풀이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으레 수저를 들어 밥이든 반찬이든 하나하나 집고 알맞게 입에 넣어 찬찬히 씹어서 삼켜요. 주걱으로 입에 퍼넣는대서 밥먹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상 앞에 멀뚱멀뚱 앉는대서 내 배가 그득 차거나 부르지 않아요. 여든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섯 살이든,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야 합니다. 날마다 끼니자리에서 이 일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똑같이 똥을 눕니다. 똑같이 숨을 쉽니다. 똑같이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늘 같은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집밖일이라 하는 회사일 또한 노상 같은 일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같은 출근길입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자동차나 버스를 탑니다. 언제나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책상에 앉거나 같은 일터에 서요. 기계를 놀리든 책상맡 셈틀을 붙잡든 종이와 펜대를 붙잡든, 집밖일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곧, 사람이 살아가며 빚거나 누리는 새로운 생각과 꿈이란, 어디에서나 싱그럽고 슬기롭게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사진기를 들고 싸움터를 누비거나 집회 현장에 달려가야 ‘빛나거나 놀라운’ 보도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내 집에서 아이들 놀며 웃음짓는 모습을 마주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빛나거나 놀라운’ 사진이에요.


  빛나거나 놀라운 삶이기에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책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똑같이 누립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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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 - 사진생태에세이 2
김태균 지음 / 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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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86] 김태균,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지성사,2008)

 


  “우리 주변에서 새들을 더욱 가깝게 만날 수 있기를, 우리가 모쪼록 다른 생물에 대한 배려와 함께 살아가기를 마음 가득히 바랍니다(머리말).” 하는 마음으로 내놓은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지성사,2008)일 테지만,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새를 비롯한 뭇목숨이 제 보금자리를 곱게 건사하도록 삶터를 돌보지 않습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고,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들새와 들짐승이 느긋하게 쉴 곳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람 손길이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따로 나무를 솎는다든지 심는다든지 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숲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헬리콥터로 온갖 농약을 뿌리지 않는 숲을 보기 어렵습니다. 조그마한 멧등성이마저 나들이길이 놓입니다. 높직한 멧자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고속도로나 고속철도가 놓입니다. 새들이 쉴 만한 숲이 나날이 사라집니다. 새들이 쉴 만한 숲이 사라지는 나라에서는 사람들도 느긋하게 숨쉴 만한 터전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농약을 치지 않으면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 하는 만큼, 시골자락에서조차 사람들이 마음 놓고 맨발로 밟을 만한 흙이나 아이들하고 뒹굴 만한 흙땅이 사라집니다. 새한테도 사람한테도 기쁘게 누릴 만한 터전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아파트이건 소우리나 돼지우리이건 고속도로나 고속철도이건, 이런저런 물질문명이 숲이나 멧자락까지 치고 들어가지 않을 때에 비로소 새들 보금자리를 곱게 지킵니다. 새들이 곱고 보금자리를 지키는 숲이라 하면, 사람들이 가끔 드나든다 하더라도 발자국이 남지 않습니다. 이때 들새나 멧새는 사람들한테 곱고 맑은 노랫소리를 들려줍니다. 이때 들새와 멧새는 사람들한테 곱고 빛나는 몸빛과 날갯짓을 보여줍니다.


  톱을 들고 숲속 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쳐야 숲이나 멧자락을 예쁘게 보듬는다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돈을 들여 멋들어진 나무를 심는대서 도시 둘레 좋은 쉼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먼저 풀씨 한 알이 흙땅을 돌봅니다. 다음으로 나무씨 한 알이 흙땅을 지킵니다. 한 해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에 걸쳐 숱한 풀씨와 나무씨가 흙땅을 보듬습니다. 이동안 흙땅이 살아나고, 흙땅이 살아나는 동안 벌레들이 살아나며, 벌레들이 살아난 숲자리와 멧자리에 들새랑 멧새가 둥지를 틀고, 작은 들짐승이랑 멧짐승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요.

 

 


  오늘날 새들은 숲을 빼앗기고 들을 빼앗기며 멧자락을 빼앗깁니다. 들새이건 멧새이건 도시 한복판에서 과자부스러기나 밥쓰레기를 주워서 끼니를 때울밖에 없기도 합니다. 새들이 깃들 나무가 있던 데에 전봇대가 서는걸요. 새들이 깃들 숲이 있던 데에 아파트랑 높은 건물이 들어차는걸요. 그야말로 안간힘을 내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더없이 용을 쓰며 살아가자고 합니다.


  김태균 님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이름 그대로 목숨 곁에서 거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싶고, 사람들 누구나 이웃 목숨을 곱게 아끼면 얼마나 기쁜 일이랴 싶어요.


  가만히 보면, 사람들 스스로 이웃사람을 아낄 때에 다른 이웃 목숨이라 할 새나 벌레나 들짐승을 아낄 수 있겠지요. 이웃사람과 알뜰히 어깨동무할 때에 들고양이나 들개하고 알뜰히 어깨동무할 테고, 이웃사람과 살가이 손잡을 때에 들새나 멧새가 느긋하게 둥우리를 틀도록 지켜볼 수 있을 테지요.

 

 

 


  도시 한복판에서도 비둘기나 참새나 직박구리나 까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 한복판 새들은 너무 아슬아슬합니다. 먹이도 아슬아슬하고 보금자리도 아슬아슬합니다.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는 시골자락에서 마주한 새들을 담습니다. 시골자락이 아니고서는 새들 스스로 느긋하게 살아갈 수 없어요. 시골자락이 아니고서는 사람 또한 몸을 살찌우는 밥이랑 마음을 빛내는 숨을 맞아들일 수 없어요. 아스팔트 바닥에서 자라나는 쌀이나 보리가 아니에요. 시멘트 바닥에서 자라나는 콩이나 옥수수가 아니에요. 흙바닥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요, 흙바닥에서 자라난 풀과 나무 둘레에 깃을 들이는 새들입니다.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에는 모두 마흔일곱 가지 새를 담았다고 합니다. 조금 더 담으면 더 좋았으리라 싶기도 하지만, 서른일곱 가지 새나 스물일곱 가지 새를 담아도 좋아요. 다만, 몇 가지 새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더 많은 모습과 더 다른 모습을 골고루 보여주었으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새라 하더라도 다 다른 삶이고 다 다른 모습이에요.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다른 삶이며 다 다른 모습이잖아요. 알이랑 둥우리랑 새끼 모습까지 골고루 보여주어도 좋고, 아직 어린 새인 모습까지 나란히 보여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 한 마리가 봄부터 겨울까지 하루하루 살아내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더 너르고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더 어여쁘고 더 살갑게 얼싸안은 이야기로 보여줄 수 있으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런 새 저런 새를 보여주고,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책이름마따나 “생명 곁에서 거닐다”와 걸맞을 만한 ‘사람이 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하는 대목을 찬찬히 들려주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어떤 숲에서 이들 새를 만났을까요. 어떤 시골에서 이들 새와 사귀었을까요. 어떤 길에서, 어떤 누리에서, 어떤 냇가에서, 어떤 하늘을 올려다보고, 어떤 땅을 밟으며 이들 새와 즐거이 어깨동무하고픈 꿈이요 사랑일까요.


  새를 찍든 나비를 찍든 벌레를 찍든 늘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가 어떤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어떻게 이웃 목숨과 마주하는 나날인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를 바라보며 사진기를 쥔 나이기 앞서, 예쁜 목숨으로 삶을 누리는 내 손길과 눈길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은 벌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과 같습니다. 새 한 마리 아끼는 사진은 나무 한 그루 아끼는 사진과 같습니다. 새 한 마리 마주하는 사진은 내 반가운 이웃들 살아가는 마을과 살가이 마주하는 사진과 같습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 (김태균 사진·글,지성사 펴냄,2008.8.28./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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