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보라 토마토 먹기

 


  앞니 위 넷 아래 셋 있다고 토마토를 깨물어 먹고 싶니. 그래, 깨물어 보렴. 깨물기는 하면서 먹지는 못하면서. 만지고, 입에 대고, 굴리고 쥐며 재미나게 놀렴. (4345.4.30.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기 들고 어린이

 


  가까운 곳으로 마실을 하더라도 꼭 목에 사진기를 거는 아버지처럼 아이도 제 사진기를 들고 따라나서고 싶다. 잘 챙기고 예쁘게 놀아라. 궁금하다며 뚜껑 함부로 열다가 망가뜨리지는 말고. 벌써 망가뜨렸지? 아무리 쪼물딱거리더라도 망가진 사진기는 되살아나지 않을 텐데. (4345.4.30.달.ㅎㄲㅅㄱ)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울보 2012-05-01 09:57   좋아요 0 | URL
류는 지금도 제 카메라를 자기 카메라 처럼 조물딱 조물딱 거리면서 놀아요,
류의 사진찍기는 아무 아주 어렸을때 손에 물건을 잡기 시작했을때부터인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제법사진을 잘 찍습니다,,
참 귀엽네요,,ㅎㅎㅎ

파란놀 2012-05-01 10:20   좋아요 0 | URL
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노는 요즘 아이들은
모두 사진을 잘 찍는구나 싶더라고요~

카스피 2012-05-02 22: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저런 필림 카메라는 집안의 가보 1호였지요.하지만 시간이 흘러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이다보니 위의 필림 카메라는 5천원선에 팔리더군요ㅜ.ㅜ
 


 개미집

 


  뒤꼍 땅뙈기를 밭으로 일구려고 틈틈이 삽과 쟁기로 파헤치곤 했다. 때때로 아주 커다란 돌덩이를 캐기도 한다. 이때에는 낑낑거리며 들어내고는 나중에 돌울을 쌓으려고 아무렇게나 던져 두곤 했다. 다른 일로 바쁘다가, 내팽개쳐진 돌덩이를 두어 달만에 들어서 돌울을 쌓던 엊그제, 커다란 돌덩이 밑에서 바글거리는 개미떼를 본다. 이 돌덩이 밑에도 개미집, 저 돌덩이 밑에도 개미집. 작은 돌 밑에도 개미집 있고, 조금 큰 돌 밑에도 개미집 있다.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개미집 구멍은 아주 작다. 문득 궁금해서 삽으로 쿡 찍어 ‘개미집 자른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돌울을 쌓으며 물골을 내려고 하는데, 물골 자리에 있던 돌 밑마다 개미집이 어김없이 있다.


  개미들은 무척 커다란 벌레를 여럿이 들어 옮긴다고는 하나 ‘사람한테는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라 하더라도 여럿 아닌 수백이나 수천이 모여도 들어 옮기지 못한다. 모래로 이룬 언덕이라면 한 알씩 들어 날라 옮긴다 하지만, 한 덩어리 돌덩이나 바위라면 개미가 옮길 재주가 없으리라. 50층 높이쯤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덩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바위덩이를 수백 수천 수만 사람이 모인들 한꺼번에 짊어지고 옮길 수 있을까.


  네 식구 먹고살자며 밭을 일구고 물골을 낸다. 생각해 보니, 그토록 비가 퍼부었어도 이 돌덩이 밑에 있던 개미집에는 빗물이 스미지 않았으리라 느낀다. 그러면 개미들은 어디로 드나들었을까. 비가 올 적에는 빗물이 스미지 않도록 돌덩이 밑을 흙으로 꽁꽁 틀어막았을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돌을 집어 나른다. 한쪽에 돌울을 쌓는다. 개미들은 집뚜껑을 하루아침에 잃는다. 이른바 ‘미리 알리기’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빼앗긴다. 수만이나 수십만에 이르는 개미들이 집을 잃는다. 수만이나 수십만에 이르는 개미들은 하루아침에 새 집을 찾아야 하고 새 보금자리를 지어야 한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초원의 집》 둘째 권 끝자락 이야기가 떠오른다. 너른 들판에 한 해 꼬박 걸려 알뜰히 짓고 밭까지 일구어 놓은 살림집을 이들 식구는 고스란히 내놓고 새 터로 떠나야 한다. 미국 정부에서 토박이들하고 협정을 맺어 ‘인디언 보호지구’를 마련하면서, 로라네 식구는 집을 하루아침에 잃어야 했단다. 로라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해 동안 흘린 땀을 서운히 여기지 않는다. 거꾸로 보면, 북중미 토박이는 흰둥이한테 하루아침에 삶터와 일터와 꿈터를 몽땅 빼앗기지 않았는가.


  우리 시골마을조차 ‘4대강 사업’ 끄트머리 가운데 하나인 ‘시골 실개천 시멘트 처바르기’를 한다. 시골마을 논물이 흐르는 냇물 도랑을 뭐 하러 시멘트 들이부으며 ‘관광지 서울 청계천’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이루 셀 수 없도록 커다란 돈을 들여 온 나라 물길을 시멘트로 처바른다. 냇물에서 살던 물고기 보금자리가 어떻게 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냇물이 보금자리였을 숱한 목숨들 삶과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 들새와 물새를 생각하지 않는 건설업이요 경제이며 정치이다. 지율 스님은 도룡뇽 한 마리 때문에 천성산에 뚫으려는 굴을 막으려 했다지만, 도룡뇽 한 마리 때문에 고속철도를 안 놓아야 마땅하다. 도룡뇽 한 마리로 대표하는 뭇목숨을 아끼고 사랑하자면 고속철도는 없어도 된다. 고속도로도, 공항도, 전철도, 학교도, 아파트도, 공장도, 골프장도, 핵발전소도, 화력발전소도, 도룡뇽 한 마리를 비롯해 뭇목숨을 살리고 아끼자면 구태여 안 지어도 된다.


  이틀쯤 지나 개미집 자리를 들여다본다. 개미 한 마리 안 보인다. 모두 잘 옮겼을까. 모두 새 터에 즐겁게 또아리를 틀었을까. 개미들아, 물골은 이곳에만 하나 낼게. 새 물골은 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 주렴. (4345.4.30.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말도 익혀야지
 (828) 나름 1

 

여전히 손님은 별로 없지만 ‘아리바이트’까지 하는 할머니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나름 힘겨웠거든
《박기범-낙타굼》(낮은산,2008) 73쪽

 

 ‘여전(如前)히’는 ‘예전처럼’이나 ‘예전과 같이’로 다듬고, ‘별(別)로’는 ‘얼마’나 ‘거의’로 다듬습니다. 흔히 쓴다 싶은 한자말인데, 아마 한자말이라고 못 느끼기도 할 테고, 한자말이라 느끼더라도 이 낱말 쓰는 일이 무어 대수로운가 하고 여기기도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여전히’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언제나’라든지 ‘언제나처럼’이라든지 ‘예전처럼’ 같은 한국말 쓰임새가 줄어듭니다. ‘별로’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그다지’나 ‘거의’나 ‘얼마’나 ‘몇’ 같은 한국말 씀씀이가 사라집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바이바이’라 말하면서 ‘잘 가’나 ‘잘 있어’ 같은 한국말이 자취를 감춥니다. ‘또 봐’라든지 ‘다음에 봐’ 같은 한국말도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글쓰기’였을 테지만, 언제부터인지 ‘작문(作文)’이 되었고, 이제는 ‘라이팅(writing)’이라는 말이 곧잘 쓰입니다. ‘리라이팅’ 같은 영어도 쓰일 뿐 아니라 숱한 영어가 곳곳에 쓰여요. 이러면서 한국말로 가리키던 모습은 하나둘 사라져요.


  국어사전에서 ‘나름’이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나름 [의존명사]
  (1) (명사, 어미 ‘-기’, ‘-을’ 뒤에 ‘이다’와 함께 쓰여) 그 됨됨이나
      하기에 달림을 나타내는 말
   - 책도 책 나름이지 / 네가 열심히 하기 나름이다 / 제 할 나름이다
  (2)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방식이나 깜냥을 이르는 말
   - 나는 내 나름대로 일을 하겠다 / 자기 나름의 세상을 살기 마련이다 /
     나름대로 그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터 / 태임이는 태임이 나름으로

 

  제가 ‘나름’이라는 말을 올바르게 쓴 지는 2000년 즈음입니다. 이무렵에야 이 낱말 쓰임새를 비로소 제대로 알았습니다. 제가 쓴 글을 읽어 주는 어느 분이 어느 날, ‘나름’은 그 자리에 그와 같이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넌지시 일러 주었습니다. 저도, 이 보기글에 나오듯이 “나름 힘겨웠거든” 꼴로 ‘나름’을 쓰곤 했어요. 그분은 저한테 ‘나름’은 이처럼 외따로 적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나름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그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할머니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당신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이 말씀을 듣고 ‘엇, 그런가?’ 하며 온갖 국어사전을 다 뒤적이고,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을 읽었습니다. 한참 읽으며 헤아려 보니 참말 그렇더군요. 여태껏 제대로 모르고 ‘나름’을 쓴 셈이었습니다. 부끄럽더군요. 우리 말 운동을 한답시고 끄적거리는 주제에 ‘나름’ 한 마디 올바르게 못 쓰고 살았다니.


  저한테 ‘나름’ 쓰임새를 알려주신 분은 제가 그 한 마디 똑바로 못 쓴다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그 말투를 아직 못 배웠겠거니 생각하며 일러 주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어느 때에도 ‘나름’ 쓰임새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법 수업이 있었으나, 이때 ‘나름’을 올곧게 쓰도록 가르치지 않았다고 떠올립니다. 어쩌면 교과서에 실리기는 했는지 모르나, 이러한 말씀씀이는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아요. 교사도 모르고 학생도 모릅니다. 여느 어버이도 모르고 여느 아이도 모릅니다. 지식인도 모르고 교수도 모를 뿐 아니라 기자도 모릅니다. 대통령도 모르고 국회의원이나 군수도 모릅니다. 공무원도 모르고 소설쟁이도 모르며 시인도 모릅니다. 참말 아무도 모르는 한국말입니다. 아무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국어학자 또한 국어사전에 싣기는 하지만 올바르거나 알맞거나 슬기롭게 가다듬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이 일은 이 일 나름 뜻이 있다 (x)
 이 일은 이 일 나름대로 뜻이 있다 (o)

 

  한 마디로 간추립니다. ‘나름’은 외따로 쓸 수 없는 말입니다. “너 하기 나름이지”처럼 쓰든지 “할머니 나름대로 하셔요”처럼 써야 합니다. 앞에 이름씨를 하나 넣고, 뒤에는 씨끝을 붙입니다.


  몰랐다면 배워야 합니다. 나이 예순이든 일흔이든,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면 배워야 합니다. 몰랐으니 즐겁게 배웁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어떻게 말썽거리인가 이제껏 몰랐으면, 이제부터 배우면 됩니다.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시위를 하는 까닭을 그동안 몰랐으니, 나이 예순이 되든 일흔이 되든 이제부터 배우면서 함께 어깨동무를 즐겁게 하면 됩니다.


  딱 하루만 알다가 이 땅을 떠나더라도 즐겁게 배우면 됩니다. 고작 한 시간만 알다가 숨을 거둔다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무엇이 옳았는지, 무엇이 참되었는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밝고 깨끗한지를 알 때에 내 아름다운 넋이 참말 아름다이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과 부처님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아흔아홉 해를 모르고 살았어도, 마지막 한 해를 깨닫고 제대로 헤아리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마음이 평화로우며 사랑을 나누거나 베풀 수 있다고 하지요. 늦는 때란 없어요. 언제부터 마음을 다스리면서 일손을 붙잡느냐가 대수롭습니다. ‘흘러간 낡은 말’을 배우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두고두고 우리 가슴에 새길 ‘언제나 새로운 말’을 배우며 나누는 한겨레요 이웃이며 동무입니다.
 (4341.5.17.흙./4345.4.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예전처럼 손님은 얼마 없지만 ‘아리바이트(곁벌이)’까지 하는 할머니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퍽 힘겨웠거든

 

..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3) 나름 2

 

젊으면 젊음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나이 들어도 젊은이들의 존중을 받으니까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거야
《함규진-10대와 통하는 윤리학》(철수와영희,2012) 41쪽

 

  “젊음 자체(自體)만으로”는 “젊음만으로”나 “젊음 하나로”로 다듬습니다. ‘행복(幸福)하고’는 ‘즐겁고’로 손봅니다. “젊은이들의 존중을 받으니까”는 “젊은이들한테서 우러름을 받으니까”나 “젊은이들이 우러르니까”나 “젊은이들이 곱게 섬기니까”로 손질합니다. “행복할 수 있는 거야”는 “즐거울 수 있어”로 가다듬습니다.


  한 마디 두 마디 살뜰히 추스릅니다. 한 줄 두 줄 예쁘게 보듬습니다.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거야
→ 그 나름대로 즐거울 수 있어
→ 서로 즐거울 수 있어
→ 저마다 즐거울 수 있어
→ 다 함께 즐거울 수 있어
→ 모두 즐거울 수 있어
 …

 

  생각을 살뜰히 추스를 때에 내 넋을 어떻게 어떤 낱말에 담아낼 때에 빛나는가를 깨닫습니다. 마음을 예쁘게 보듬을 때에 내 얼을 어떻게 어떤 글줄에 실어낼 때에 환해지는가를 느낍니다.


  좋게 헤아릴 때에 좋게 빛나는 말입니다. 곱게 살필 때에 곱게 피어나는 글입니다.


  이 보기글처럼 글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무슨 줄거리인지 읽어냅니다. ‘나름’ 같은 말마디를 잘못 적었지만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가 잘 읽습니다. 아마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린 대목이 있어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가를 옳게 읽겠지요.


  그런데, 띄어쓰기 틀리거나 맞춤법에 어긋나면 글쓴이나 읽는이나 알맞게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투나 어그러진 말법이나 비뚤어진 말결은 글쓴이나 읽는이 모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 보기글 새로 쓰기
젊으면 젊으니까 즐겁고, 나이 들어도 젊은이들이 좋게 모시니까 서로 즐거울 수 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아타, 인디아 스케치
김아타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인가, 철학인가, 예술인가
 [찾아 읽는 사진책 91] 김아타, 《김아타, 인디아 스케치》(예담,2008)

 


  김아타 님 사진책 《김아타, 인디아 스케치》(예담,2008)를 읽습니다. 맨 마지막 쪽에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님 글이 붙습니다. 이주향 교수님은 김아타 님 책에 “김아타의 사진은 사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입니다(222쪽).”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김아타 님은 ‘사진쟁이’가 아니었군요. 그렇다고 ‘예술쟁이’도 아니었어요. 김아타 님은 바로 ‘철학쟁이’나 ‘철학꾼’이나 ‘철학가’, 쉽게 말하자면 ‘생각쟁이’나 ‘생각돌이’나 ‘생각꾼’이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다(31쪽).” 하고 말하면서 사진을 넣지 않습니다. 그래요, 김아타 님으로서는 당신 생각을 북돋우려고 사진기를 들었을 뿐이니까요. “하얀 보따리가 두 개 있다(53쪽).” 하고 글을 쓰면서 하얀 보따리 둘 있는 사진을 넣습니다. 김아타 님은 하얀 보따리 둘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느끼고 싶었으니까요. “많다. 복잡하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61쪽).” 하고 말하며 사진을 또 안 넣습니다. 참말 아무 생각이 없으니 사진기를 들어, 날마다 1만 장씩 찍었다 하더라도 사진을 넣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순간, 골목이 맑다(111쪽).” 하고 말하지만, 시간이 멈춘 때는 없습니다. 나 스스로 시간이 멈추었다고 생각한 때가 있을 뿐입니다. 곧, 나 스스로 시간이 멈춘 때가 맑구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에 골목을 바라보면 골목이 맑다고 여깁니다. 이때에 아가씨를 보았으면 아가씨 얼굴이 맑다고 여길 테고, 이때에 들판을 바라보았으면 들판이 맑다고 여길 테지요.

 


  누군가는 이런 느낌 한 자락 얻으려고 인도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누군가는 이런 느낌 한 자락 불러일으키려고 네팔이나 티벳이나 스리랑카나 모잠비크나 파키스탄이나 그리스나 칠레나 아르헨티나를 떠돕니다. 모두들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어느 곳으로도 나들이를 다니지 않더라도 ‘시간이 멈춘 한때’를 늘 느낍니다. 이를테면, 밭에서 호미질을 하며 김을 매며 늘 느낍니다. 구부정한 허리가 모질게 아프다가는 아예 구부정하게 굳은 채 걷고 자고 먹고 일어나고 눕고 하는 나날을 이으며 언제나 느낍니다. 또는, 책을 읽으며 느끼기도 합니다. 아이한테 젖을 물리며 느끼기도 합니다. 늙은 어버이 이마 주름을 쓰다듬다가 느끼기도 합니다.


  “뭄바이 시내 고가도로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뭄바이는 내가 만난 세상 중 가장 시끄러운 곳이지만 사진에는 소리가 없다(135쪽).” 하고 말합니다. 김아타 님은 스스로 사진에 소리가 없다고 느끼기에 이 사진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 이곳에서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몹시 시끄러웠다고 여겼으면, 그분 그 사진에는 시끄러운 사진이 담깁니다.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생각에 따라 빚는 사진입니다. 생각에 따라 이루는 사진입니다.

 


  김아타 님은 사진기라는 틀을 빌려 당신 생각을 가꾸어 보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김아타 님은 사진을 수없이 찍고 다시 찍으면서 당신 생각이 어디로 흐르고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헤아리고 싶은 삶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김아타, 인디아 스케치》는 사진책이라 할 테지만 사진책이 아닙니다. 이주향 교수님 말대로 철학책입니다. 철학을 하고 싶어 사진을 빌 뿐입니다. 거꾸로, 누군가는 사진을 하고 싶어 철학을 빌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진을 하고 싶어 영화를 빌곤 합니다. 누군가는 사진을 그리고 싶어 만화를 빌기도 해요.


  글 하나는 시도 되고 수필도 되며 소설도 됩니다. 글이라는 틀을 빌면서 시도 쓰고 수필도 쓰며 소설도 씁니다. 어떤 글은 시와 같지만 편지입니다. 어떤 글은 편지와 같지만 소설입니다. 어떤 글은 소설과 같지만 희곡입니다.


  어떤 사진은 사진으로 보이지만 사진이 아닌 ‘그림’입니다. 어떤 사진은 사진이라는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사진이 아닌 ‘철학’입니다. 어떤 사진은 사진이라는 옷을 걸치지만 사진이 아닌 ‘예술’입니다.

 


  사진기를 쓰기에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쓰며 글을 쓰는 이가 있습니다. 사진기를 빌어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기를 빌어 예술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뭉뚱그려 ‘사진을 한다’거나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알맞지 않습니다.


  사진기로 찍힌 모습을 바라보며 사진이로구나 좋구나 하고 느끼는 일도 반갑습니다. 사진기로 찍힌 모습을 마주하며 철학이로구나 괜찮구나 하고 느끼는 일도 즐겁습니다. 스스로 껍데기를 벗으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스스로 허울을 내려놓으면 사랑이 태어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188쪽).” 하는 말마디처럼, 봄바람을 생각하면 봄바람을 느낍니다. 봄볕을 생각하면 봄볕이 내 온몸으로 샅샅이 스며듭니다. (4345.4.30.달.ㅎㄲㅅㄱ)

 


― 김아타, 인디아 스케치 (김아타 글·사진,예담 펴냄,2008.3.25./13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